서장

서장주역(書狀註譯) 엄교수(嚴敎授)〈子卿〉에게 답하다- 영시랑(榮侍郞)에게 답하다 14

태화당 2025. 10. 5. 09:20

答嚴敎授子卿

眞實到不疑之地者 如渾鋼打就生鐵鑄成 直饒千聖出頭來 現無量殊勝境界 見之亦如不見 況於此作奇特殊勝道理耶 昔藥山坐禪次石頭問 子在這裏作甚麽 藥山云 一物不爲 石頭云 恁麽則閑坐也 藥山云 閑坐則爲也 石頭然之 看他古人 一箇閑坐也奈何他不得 今時學道之士 多在閑坐處打住 近日叢林無鼻孔輩 謂之默照者 是也 又有一種脚跟元不曾點地 認得箇門頭戶口光影 一向狂發 與說平常話不得 盡作禪會了 似這般底 喚業識作本命元辰 更是不可與語本分事也 不見雲門大師有言 光不透脫 有兩般病 一切處不明面前有物 是一 又透得一切法空 隱隱地似有箇物相似 亦是光不透脫 又法身亦有兩般病 得到法身 爲法執不忘 己見猶存 坐在法身邊 是一 直饒透得法身去 放過卽不可 子細檢點來 有甚麽氣息 亦是病 而今學實法者 以透過法身爲極致 而雲門返以爲病 不知透過法身了 合作麽生 到這裏如人飮水冷煖自知 不著問別人 問別人則禍事也 所以云 眞實到不疑之地者 如渾鋼打就生鐵鑄成是也 如人喫飯飽時 不可更問人我飽未飽 昔黃檗問百丈 從上古人以何法示人 百丈只據坐 黃檗云 後代兒孫將何傳授 百丈拂衣便起云 我將謂汝是箇人 這箇便是爲人底樣子也 但向自信處看 還得自信底消息絕也未 若自信底消息絕 則自然不取他人口頭辦矣 臨濟云 汝若歇得念念馳求心 與釋迦老子不別 不是欺人 第七地菩薩求佛智心未滿足故 謂之煩惱 直是無爾安排處 著一星兒外料不得 數年前有箇許居士 認得箇門頭戶口 將書來呈見解云 日用中空豁豁地 無一物作對待 方知三界萬法 一切元無 直是安樂快活放得下 因示之以偈曰 莫戀淨潔處 淨處使人困 莫戀快活處 快活使人狂 如水之任器 隨方圓短長 放下不放下 更請細思量 三界與萬法 匪歸何有鄉 若只便恁麽 此事大乖張 爲報許居士 家親作禍殃 豁開千聖眼 不須頻禱禳 偶晨起稍涼 驀然記得 子卿道友初得箇入頭時 尙疑恐是光影 遂將從來所疑公案拕照 方見趙州老漢敗闕處 不覺信筆葛藤如許

渾鋼; 渾淪鋼鐵 渾淪 又作渾崙 渾侖 混淪 鶻侖 渾圇 囫圇 原指天地未形成前 陰陽未分 暗黑不明 一團迷濛混濁之狀態 禪林中 轉指不分明 渾然一片 或物之不可分 又指無差別而平等之眞性

藥山; 惟儼(751-834) 唐代僧 絳州(今山西新絳)人 俗姓韓 十七歲依潮陽(廣東)西山慧照出家 大曆八年(773) 就衡山希澡受具足戒 博通經論 嚴持戒律 後參石頭希遷 密領玄旨 次參馬祖道一 言下契悟 奉侍三年 後復還石頭 爲其法嗣 不久 至澧州藥山 廣開法筵 唐太和八年(834)示寂 壽八十四 一說太和二年十二月示寂 壽七十 敕諡弘道大師 [宋高僧傳十七 祖堂集四 傳燈錄十四 傳法正宗記七]

打住; 止住 滯留

脚跟元不曾點地; 脚跟 於禪林常轉指本來自我 脚跟不點地 是對修行未純熟之用語

法執; 二執之一 我執之對稱 固執心外有有爲無爲之實法之妄念也 二乘之人 雖斷我執而不能絶此法執 大乘之菩薩則漸斷之

據坐; 一謂禪師坐于法座 坐 通座 二一種機鋒施設 禪師坐于法座 而對僧人提問不用言句作答 也無其他動作 此指二

是箇人; 又作是箇漢 意謂是一箇眞正的丈夫漢 是一箇眞正的參禪者 箇 代詞 相當于這那 又相當于什麽

一星兒; 猶一點兒 兒 後綴

外料; 指本分草料以外底

空豁豁; 空無一物的樣子 指悟道者之空寂境界

對待; 事物的對立區分

家親; 家族中的長輩 多指父母

禱禳; 祈禱鬼神求福除災

 

엄교수(嚴敎授)子卿에게 답하다

진실로 의심하지 아니할 지경에 이른 자는 혼강(渾鋼)으로 타취(打就; 쳐서 이루다)하고 생철(生鐵)로 주성(鑄成)함과 같아서 직요(直饒; 假令) 천성(千聖)이 출두(出頭)하여 와서 무량한 수승경계(殊勝境界)를 나타내더라도 이를 보매 또한 보지 않음과 같거늘 하물며 여기에서 기특과 수승한 도리를 짓겠습니까. 옛적()에 약산(藥山)이 좌선하던 차에 석두(石頭)가 묻되 자네는 이 속에 있으면서 무엇을 짓느냐. 약산이 이르되 일물(一物)도 하지() 않습니다. 석두가 이르되 이러하다면 곧 한좌(閑坐)함인가. 약산이 이르되 한좌는 곧 함()입니다. 석두가 그렇다 하였다(然之). 저 고인을 보건대 일개(一箇)의 한좌라도 또한 그를 어찌함(奈何)을 얻지 못하거늘 금시의 학도지사(學道之士)는 다분히 한좌처(閑坐處)에 있으면서 타주(打住)합니다. 근일(近日) 총림에서 비공(鼻孔)이 없는 무리()를 이를 일러 묵조(默照)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또 일종(一種)이 있어, 발꿈치가 원래 일찍이 땅에 닿지 않았으면서(脚跟元不曾點地) () 문두호구(門頭戶口)의 광영(光影)을 인득(認得)해 일향(一向) 광발(狂發; 狂疾發作)하여 평상화(平常話)를 설해 줌을 얻지 못하나니 모두 선()이란 이회를 지어버립니다. 저반과 같은 것(似這般底)은 업식을 일러 본명원신(本命元辰)이라 하나니 다시 이는 가히 더불어 본분사(本分事)를 말하지 못합니다. 운문대사(雲門大師)가 말씀이 있었음을 보지 못합니까, ()을 투탈(透脫)하지 못하면 두 가지 병이 있나니 일체처가 밝지 못한데 면전에 물건이 있음이 이 하나다. 또 일체법이 공()했음을 투득(透得)했으나 은은지(隱隱地)에 흡사 개물(箇物; 이 물건)이 있음과 상사(相似)함도 또한 이 광()을 투탈하지 못했음이다. 또 법신(法身)에 또한 두 가지 병이 있나니 법신에 득도(得到; 이름을 얻다)했으나 법집(法執)을 잊지 못하기 때문에() 기견(己見)이 아직 존재하여 법신변(法身邊)에 앉아 있음이 이 하나다. 직요(直饒; 가령) 법신을 투득(透得)하여 갔으나 방과(放過)함은 곧 불가하다 하여 자세히 검점(檢點)하여 오매 무슨 기식(氣息)이 있으리오 하나니 역시 병이다. 이금(而今)에 실법(實法)을 배우는 자가 법신을 투과함으로써 극치(極致)로 삼거늘 운문은 도리어 병으로 삼았습니다. 알지 못하나니 법신을 투과하고 나서 합당히 어떻습니까(作麽生). 이 속에 이르러선 사람이 음수(飮水)하매 냉난(冷煖)을 스스로 앎과 같아서 다른 사람에게 물음을 붙이지 못하나니 다른 사람에게 물으면 곧 화사(禍事)입니다. 소이로 이르되 진실로 의심하지 아니할 지경에 이른 자는 혼강(渾鋼)으로 타취(打就)하고 생철(生鐵)로 주성(鑄成)함과 같다 함이 이것입니다. 예컨대() 사람이 끽반(喫飯)하여 배부를 때 다시 사람에게 묻되 내가 배부른가 배부르지 않은가 함은 옳지 못합니다. 옛적에 황벽(黃檗)이 백장(百丈)에게 묻되 종상(從上)의 고인이 무슨 법으로써 사람에게 보였습니까. 백장이 다만 거좌(據坐)했다. 황벽이 이르되 후대 아손이 무엇을 가지고 전수(傳授)합니까. 백장이 옷을 떨치고 바로 일어나 이르되 내가 다만() 이르기를 네가 시개인(是箇人)이라 한다. 저개(這箇)가 바로 이 위인(爲人)하는 양자(樣子; 모양)입니다. 단지 자신처(自信處)를 향해 간()해야 하나니 도리어 자신(自信)하는 소식이 끊어짐을 얻었습니까 또는 아닙니까. 만약 자신하는 소식이 끊어졌다면 곧 자연히 타인의 구두(口頭)를 취해 판별(判別;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임제가 이르되 너희가 만약 염념(念念)에 치구(馳求)하는 마음을 헐득(歇得)했다면 석가노자(釋迦老子)와 다르지 않다. 이 기인(欺人)함이 아닙니다. 7(第七地) 보살이 불지(佛智)를 구하되 마음에 만족하지 않는 연고로 이를 일러 번뇌라 하며 바로 이는 그대()가 안배(安排)할 곳이 없는지라 일성아(一星兒)의 외료(外料)를 붙임을 얻지 못합니다. 몇 년 전 저() 허거사(許居士)가 있어 저() 문두호구(門頭戶口)를 인득(認得)해 글을 가지고 와서 견해를 보여() 이르되 일용(日用) 중에 공활활지(空豁豁; 는 조사)라 일물(一物)도 대대(對待)를 지음이 없습니다. 바야흐로 알았나니 3계 만법이 일체 원무(元無)인지라 바로() 이 안락하고 쾌활해 놓아 내려놓음을 얻었습니다(放得下). 인하여 게를 보여 가로되 정결한 곳을 연모하지 말지니/ 정처(淨處)가 사람으로 하여금 곤(; 어떤 책엔 으로 지었음)하게 한다/ 쾌활한 곳을 연모하지 말지니/ 쾌활이 사람으로 하여금 광()하게 한다. 물이 그릇에 맡김과 같아서 방원장단(方圓短長)을 따릅니다. 방하(放下)와 불방하(不放下)를 다시 청컨대 자세히 사량하십시오. 3계와 만법이 돌아가지 않으면() 어찌 향()이 있겠습니까. 만약 다만 바로 이러하다면 차사(此事)가 크게 괴장(乖張; 差違)입니다. 허거사(許居士)에게 보고(報告; )하나니 가친(家親)이 화앙(禍殃; 災禍)을 지어/ 천성(千聖)의 눈을 활짝 열었다(豁開)/ 자주 도양(禱禳)을 쓰지() 말지니/ 마침() 새벽에 일어나매 조금 서늘하다. 맥연(驀然)히 기득(記得)하나니 자경(子卿) 도우(道友)가 처음 저() 입두(入頭)를 얻었을 때 오히려 이 광영(光影)인가 의공(疑恐; 의심하고 염려함)했고 드디어 종래(從來)에 의심했던 바의 공안을 가지고 타조(拕照; 끌어당겨 비춤)하고서야 비로소 조주노한(趙州老漢)의 패결처(敗闕處)를 보았다고 한지라 불각에 붓 따라(信筆) 갈등이 여허(如許; 허다)했습니다.

渾鋼; 혼륜(渾淪)한 강철. 혼륜(渾淪)은 또 혼륜(渾崙)ㆍ혼륜(渾侖)ㆍ혼륜(混淪)ㆍ골륜(鶻侖)ㆍ혼륜(渾圇)ㆍ홀륜(囫圇)으로 지음. 원래(原來)는 천지가 형성되지 아니한 전, 음양이 나뉘지 않음, 암흑이라 분명하지 않음, 한 덩어리의 미몽(迷濛)과 혼탁의 상태(狀態)를 가리킴. 선림 중에선 전()하여 불분명, 혼연일편(渾然一片), 혹은 사물의 불가분(不可分)을 가리킴. 또 무차별(無差別)하여 평등한 진성(眞性)을 가리킴.

藥山; 유엄(惟儼; 751-834)이니 당대승. 강주(지금의 산서 신강)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한(). 17세에 조양(광동) 서산의 혜조(慧照)에게 의지해 출가했음. 대력 8(773) 형산(衡山)의 희조에게 나아가 구족계를 받았으며 경론을 널리 통달했고 계율을 엄히 가졌음. 후에 석두희천(石頭希遷)을 참알(參謁)해 몰래 현지(玄旨)를 영오(領悟)했음. 다음으로 마조도일(馬祖道一)을 참알해 언하에 계합(契合)해 깨쳤고 3년 동안 받들어 모시다가 뒤에 다시 석두로 돌아와 그의 법사(法嗣)가 되었음. 오래지 않아 예주(澧州)의 약산(藥山)에 이르러 법연(法筵)을 널리 열었음. 당 태화 8(834)애 시적했으니 나이는 84이며 일설엔 태화 212월에 시적했으니 나이가 70이라 함. 칙시(敕諡)가 홍도대사(弘道大師). [송고승전17. 조당집4. 전등록14. 전법정종기7].

打住; 지주(止住; 머묾). 체류(滯留).

脚跟元不曾點地; 각근은 선림에서 늘 전()하여 본래의 자아를 가리킴. 각근부점지(脚跟不點地)는 이는 수행이 순숙하지 못함에 대한 용어임.

法執; 2집의 하나. 아집의 대칭. 마음 밖에 유위무위의 실법이 있다고 고집하는 망념임. 2()의 사람이 비록 아집을 끊더라도 능히 이 법집을 끊지 못함. 대승의 보살은 곧 점차 이를 끊음.

據坐; 1. 이르자면 선사가 법좌에 앉음. ()는 좌()와 통함. 2. 일종의 기봉의 시설이니 선사가 법좌에 앉아 승인의 제문(提問)에 대해 언구를 써서 답을 짓지 않으며 또한 기타의 동작이 없음. 여기에선 2를 가리킴.

是箇人; 또 시개한(是箇漢)으로 지음. 뜻으로 이르자면 이 일개의 진정한 장부한이며 이 일개의 진정한 참선자임. ()는 대사(代詞)니 저()ㆍ나()에 상당함. 또 십마(什麽)에 상당함.

一星兒; 일점아(一點兒)와 같음. 아는 후철.

外料; 본분초료(本分草料) 이외의 것을 가리킴.

空豁豁; 비어서 한 물건도 없는 양자(樣子; 모양)니 오도한 자의 공적한 경계를 가리킴.

對待; 사물의 대립과 구분.

家親; 가족 중의 장배(長輩)니 다분히 부모를 가리킴.

禱禳; 귀신에게 기도하여 복을 구하고 재앙을 제거함.

 

答張侍郞子韶

左右以自所得瞥脫處爲極則 纔見涉理路入泥入水爲人底 便欲掃除使滅蹤跡 見宗杲所集正法眼藏便云 臨濟下有數箇菴主好機鋒 何不收入 如忠國師 義理禪 敎壞人家男女 決定可刪 左右見道如此諦當 而不喜忠國師說老婆禪 坐在淨淨潔潔處 只愛擊石火閃電光一著子 此外不容一星兒別道理 眞可惜耳 故宗杲盡力主張 若法性不寬 波瀾不闊 佛法知見不亡 生死命根不斷 則不敢如此四楞著地入泥入水爲人 蓋衆生根器不同故 從上諸祖各立門戶施設 備衆生機隨機攝化 故長沙岑大蟲有言 我若一向擧揚宗敎 法堂前須草深一丈 倩人看院始得 旣落在這行戶裏 被人喚作宗師 須備衆生機說法 如擊石火閃電光一著子 是這般根器 方承當得 根器不是處用之 則揠苗矣 宗杲豈不曉瞥脫一椎 便七穿八穴是性燥 所以集正法眼藏不分門類 不問雲門臨濟曹洞潙仰法眼宗 但有正知正見 可以令人悟入者 皆收之 見忠國師大珠二老宿 禪備衆體 故收以救此一類根器者 左右書來云 決定可刪 觀公之意 正法眼藏盡去除諸家門戶 只收似公見解者 方是 若爾則公自集一書 化大根器者 有何不可 不必須敎妙喜隨公意去之 若謂忠國師說拕泥帶水老婆禪便絕後 則如巖頭睦州烏臼汾陽無業鎭州普化定上座雲峯悅法昌遇諸大老 合兒孫滿地 今亦寂然無主化者 諸公豈是拕泥帶水說老婆禪乎 然妙喜主張國師 無垢破除 初不相妨也

子韶; 張九成(1092-1159) 宋代楊岐派居士 字子韶 號橫浦居士 又號無垢居士 錢塘(今浙江杭州)人 紹興二年(1132)進士 官至禮部刑部侍郞 贈太師崇國公 諡文忠 因反對議和 爲秦檜所惡 被誣與宗杲禪師交遊 謗訕朝政 謫居南安軍十四年 秦檜死 起知溫州 其學術思想大端仍屬程門理學 然多有援佛入儒之意 如仁卽是覺 覺卽是仁 因心生覺 因覺有仁(橫浦心傳上) 被朱熹攻擊爲陽儒陰釋 洪水猛獸 著有橫浦文集 橫浦心傳 橫浦日新 [宋史三七四 五燈會元二十 法喜志四]

正法眼藏; 六卷 宋代大慧宗杲(1089-1163)撰 爲古尊宿之機緣法語集 總計百餘篇 竝附撰者之短評 宗杲於南宋紹興十一年(1141) 因罪遷居衡陽 其間與諸方大德往來酬酢之法語 爲侍者沖密慧然隨手抄錄 於紹興十七年編錄而成 尋卽刊行 俗稱大慧正法眼藏 明萬曆四十四年(1616) 普善庵沙門慧悅及居士春門徐弘澤等 附圓澄及李日華之序 另加宗杲之答張子韶侍郞書 而加以重刻 [禪籍志上]

機鋒; 指禪機之敏銳 禪機鋒芒 又作鋒機

忠國師; 慧忠(?-775) 又作惠忠 唐代僧 浙江諸曁人 俗姓冉 自幼學佛 初習戒律 長通經論 聞六祖慧能大師之名 卽踰嶺叩謁 獲其心印 而入南陽白崖山黨子谷(白草谷) 靜坐長養 四十餘年足不出山 而學者就之 恆逾百千 開元年中 玄宗欽其道譽 迎赴京師 敕住龍興寺 未久逢安史之亂 師乃遁歸 肅宗上元二年(761) 再召赴京 住千福寺西禪院 公卿士庶參叩求法 不捨晝夜 代宗繼位 優禮有加 遷住光宅寺 後歸南陽 於大曆十年在黨子谷示寂 年壽當在八十以上 諡號大證禪師 世稱南陽慧忠 南陽國師 [宋高僧傳九 傳燈錄五 傳法正宗記七]

義理; 適於理之道也

老婆禪; 親切叮嚀之禪也 老婆禪一語 或有輕蔑之意

宗敎; 一宗門之敎意 二禪宗與敎宗 此指一

法堂; 乃七堂伽藍之一 卽禪林演布大法之堂 位於佛殿之後方 方丈之前方 相當於講堂 而講通於講敎 爲別於他宗 且示其敎外別傳之宗旨 故於禪宗特稱爲法堂 按歷代三寶紀十二 傳燈錄四等 支那自古除佛殿外 亦建有法堂 及至百丈懷海禪師定禪苑之規制 遂模倣朝制之太極殿 建立法堂 堂內中央設一高臺 四方均得仰望 然後世則於座後設大板屛 已失古意 禪苑淸規十云 不立佛殿唯搆法堂 可知禪苑古來不存佛殿 只建法堂 後始於佛殿之後方建法堂 或於小寺院中 衍爲佛殿法堂兩者兼用 [百丈淸規上尊祖章 禪苑淸規五 同七 同九 象器箋殿堂類]

行戶; 比喩禪家法會

揠苗; 揠 拔起 孟子公孫丑 宋人有閔其苗之不長而揠之者 茫茫然歸 謂其人曰 今日病矣 予助苗長矣 其子趨而往視之 苗則槁矣 天下之不助苗長者寡矣 以爲無益而舍之者 不耘苗者也 助之長者 揠苗者也 非徒無益 而又害之

七穿八穴; 逆順縱橫自由自在 通達無障礙之意 七或八表示多數 類似用語尙有七縱八橫 七通八達 七顚八倒 七凹八凸等

雲門臨濟曹洞潙仰法眼宗; 指中國禪宗的五家宗派 卽潙仰宗 臨濟宗 曹洞宗 雲門宗 法眼宗 五家宗派門風各有特色 傳承自成系統 先後創立于唐代下半葉至五代 其中潙仰法眼雲門三宗 在宋元時代逐漸失傳 臨濟與曹洞二宗 則延續至當今

睦州; 道明(780-877) 唐代僧 又稱道蹤 江南國主陳氏之後 持戒精嚴 學通三藏 契旨於黃檗希運 住觀音院數十載 學者叩激 隨問隨答 詞語峻險 旣非循轍 淺機者往往莫解 玄學性敏者欽服 諸方歸慕 咸稱尊宿 後歸睦州開元寺 常織蒲鞋養母 又有陳蒲鞋之號 黃巢入境 以有師在 一方平安 唐乾符四年示寂 壽九十八 [傳燈錄十二 五燈會元四]

烏臼; 唐代僧 馬祖道一法嗣 [傳燈錄八 五燈會元三]

無業; (762-823) 唐代僧 商州上洛(今陝西商縣)人 姓杜氏 九歲依開元寺志本禪師受大乘經 五行俱下 十二落髮 二十受具戒於襄州幽律師 後往江西 瞻禮馬祖 竝嗣其法 往淸涼金閣寺 重閱大藏 周八稔而畢 復南下至汾州(今山西汾陽) 住開元寺二十載 唐憲宗屢召 皆辭疾不赴 長慶三年十二月而逝 壽六十二 臘四十二 勅諡大達國師 [傳燈錄八 聯燈會要五]

普化; (?-860) 唐代僧 嗣盤山寶積 南嶽下三世 日本禪宗支派普化宗之祖 姓氏壽皆不詳 寶積示寂後 師卽遊化北地鎭州 佐贊於臨濟 臨濟住未久 師全身脫去 [宋高僧傳二十 傳燈錄十 釋氏稽古略三]

定上座; 五代後唐僧 臨濟義玄法嗣 [聯燈會要十 臨濟語錄]

雲峯悅; 文悅(998-1062) 宋代臨濟宗僧 江西南昌人 俗姓徐 七歲時剃髮於龍興寺 十九歲遊歷諸方 參謁筠州(江西)大愚守芝 開悟後承其法 竝隨侍守芝八年 守芝入寂後 師再遊方 參謁同安院慧南 爲首座 歷住翠巖寺 南嶽法輪寺等 後又住南嶽雲峰 故又稱雲峰文悅 嘉祐七年示寂 壽六十五 有語錄二卷行世 [續燈錄八 禪林僧寶傳二十二 五燈會元十二 佛祖歷代通載十八]

法昌遇; 倚遇(1005-1081) 宋代雲門宗僧 漳州(今屬福建)林氏 自幼依郡之崇福得度 有大志 受具遊方 名著叢席 參南嶽谷泉 返潭州北禪 參智賢 喜其機語捷健 乃傾心師事甚久 晩至西山棲息三年 後住洪州法昌老屋數間 刀耕火種 安樂於道 [聯燈會要二十八 宗統編年二十六 續傳燈錄五]

 

장시랑(張侍郞)子韶에게 답하다

좌우(左右)는 스스로 얻은 바 별탈처(瞥脫處; 灑脫處)로써 극칙(極則)으로 삼아, 이로(理路)로 건너 입니입수(入泥入水)하여 위인(爲人)하는 것()을 겨우 보면 바로 소제(掃除)하여 종적(蹤跡)을 없애게 하려고 합니다. 종고(宗杲)가 소집(所集)한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보고 바로 이르되 임제하(臨濟下)에 몇 개 암주(菴主)가 있어 좋은 기봉(機鋒)이거늘 왜 수입(收入)하지 않았으며 예컨대() 충국사(忠國師)는 의리선(義理)을 설해 인가(人家)의 남녀를 무너뜨리게 했으니 결정코 산제(刪除; )함이 옳다 했습니다. 좌우가 견도(見道)함이 이와 같이 체당(諦當; 穩當. 適合)하여 충국사가 노파선(老婆禪)을 설한 것을 기뻐하지 않음은 정정결결(淨淨潔潔)한 곳에 앉아 있으면서 다만 격석화섬전광(擊石火閃電光)의 일착자(一著子; 는 조사)를 좋아하고 이 밖엔 일성아(一星兒)의 다른 도리를 용납하지 않음이니 참으로 가석(可惜)할 따름입니다. 고로 종고(宗杲)가 힘을 다해 주장(主張)하나니 만약 법성(法性)이 넓지() 못하면 파란(波瀾)이 넓지() 못하고 불법의 지견이 망하지 않으면 생사의 명근(命根)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곧 감히 이와 같이 사릉착지(四楞著地)하여 입니입수(入泥入水)하여 위인(爲人)하지 않음은 대개(大蓋; ) 중생의 근기(根器)가 부동(不同)한 연고입니다. 종상(從上)의 제조(諸祖)가 각자 문호(門戶)를 세워 시설(施設)해 중생기(衆生機)를 갖추어() 수기(隨機)하여 섭화(攝化)했습니다. 고로 장사(長沙) 잠대충(岑大蟲; 景岑)이 말씀이 있었으니 내가 만약 일향(一向) 종교(宗敎)를 거양(擧揚; 擧說. 闡揚)한다면 법당(法堂) 앞에 모름지기 풀의 깊이가 1()이라서 사람을 청(; 雇用)해 간원(看院)해야 비로소 옳으리라(이상 잠대충의 말). 이미 이 행호(行戶) 속에 떨어져 있으면서 사람이 종사(宗師)라고 불러 지음을 입었으면 모름지기 중생기(衆生機)를 갖추어() 설법해야 합니다. 격석화섬전광(擊石火閃電光)의 일착자(一著子) 같은 것은 이는 저반(這般)의 근기(根器)라야 비로소 승당(承當)함을 얻습니다. 근기가 시처(是處)가 아닌데 이를 쓴다면 곧 알묘(揠苗)입니다. 종고(宗杲)가 어찌 별탈(瞥脫)한 일추(一椎)가 바로 칠천팔혈(七穿八穴)하는 이 성조(性燥; 爽快. 靈利)임을 환히 알지() 못하겠습니까. 소이로 정법안장을 편집(編輯; )하면서 문류(門類)를 나누지 않았고 운문ㆍ임제ㆍ조동ㆍ위앙ㆍ법안종(雲門臨濟曹洞潙仰法眼宗)을 묻지 않고 단지 정지정견(正知正見)이 있어 가이(可以) 사람으로 하여금 오입(悟入)하게 하는 자는 모두 거두었습니다. 충국사와 대주(大珠) 두 노숙(老宿)을 보건대 선()에 중체(衆體)를 갖춘지라 고로 수록(收錄; )하여 이 일류(一類)의 근기자(根器者)를 구제(救濟)했습니다. 좌우는 글을 써(書來) 이르되 결정코 산제(刪除; )함이 옳다 했거니와 공()의 뜻을 보건대() 정법안장은 제가(諸家)의 문호(門戶)를 모두 거제(去除)하고 다만 공()의 견해와 같은 자만 수록(收錄; )해야 비로소 옳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곧 공()이 스스로 일서(一書)를 편집(編輯; )해 대근기자(大根器者)를 교화함이 무슨 불가(不可)함이 있겠습니까. 묘희로 하여금 공의 뜻에 따라 이()를 제거함을 씀()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르되 충국사는 타니대수(拕泥帶水)하여 노파선을 설해 후손이 끊어졌다고 한다면 곧 암두(巖頭)ㆍ목주(睦州)ㆍ오구(烏臼)ㆍ분양무업(汾陽無業)ㆍ진주보화(鎭州普化)ㆍ정상좌(定上座)ㆍ운봉열(雲峯悅)ㆍ법창우(法昌遇)와 같은 여러 대로(大老)는 합당히 아손이 만지(滿地)해야 하거늘 지금 또한 적연(寂然)하여 주화자(主化者; 主宰해 교화하는 자)가 없습니다. 제공(諸公)이 어찌 이 타니대수하여 노파선을 설했겠습니까. 그러나 묘희가 국사를 주장(主張)하고 무구(無垢; 張九成)가 파제(破除)함이 애초에 서로 방애(妨礙)되지 않습니다.

子韶; 장구성(張九成; 1092-1159)이니 송대 양기파거사. 자는 자소(子韶)며 호는 횡포거사(橫浦居士)며 또 호가 무구거사(無垢居士)며 전당(지금의 절강 항주) 사람. 소흥 2(1132) 진사(進士)에서 관직이 예부(禮部)와 형부시랑(刑部侍郞)에 이르렀음. 태사숭국공(太師崇國公)을 추증(追贈)했고 시호는 문충(文忠). 의화(議和; 和親을 의논함)에 반대함으로 인해 진회(秦檜)의 미워하는 바가 되었는데 종고선사(宗杲禪師)와 교유(交遊)하면서 조정을 방산(謗訕; 誹謗)했다는 무고(誣告)를 입어 남안군(南安軍)에 적거(謫居)하기가 14년이었음. 진회가 죽자 일어나 온주를 지(; 맡아 다스림)했음. 그의 학술사상(學術思想)의 대단(大端)은 그대로 정문(程門; 程子)의 이학(理學)에 속했으나 그러나 다분히 불법을 당겨 유교에 주입하는 뜻이 있으니 예컨대() ()은 곧 이 각()이며 각은 곧 이 인()이다, ()을 인해 각이 나고 각을 인해 인()이 있다(橫浦心傳上) 하였는데 주희(朱熹)가 공격하여 양유음석(陽儒陰釋)ㆍ홍수맹수(洪水猛獸)라 함을 입었음. 저서에 횡포문집ㆍ횡포심전ㆍ횡포일신이 있음 [송사374. 오등회원20. 법희지4].

正法眼藏; 6. 송대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가 지었음(). 고존숙(古尊宿)의 기연법어집(機緣法語集)이 되며 총계가 백여편(百餘篇)이며 찬자(撰者)의 단평(短評)을 병부(竝附; 나란히 붙임)하였음. 종고가 남송 소흥(紹興) 11(1141)에 죄로 인해 형양(衡陽)에 옮겨 거주했는데 그 사이에 제방의 대덕과 왕래수작(往來酬酢)한 법어를 시자 충밀과 혜연이 손 가는 대로 초록(抄錄)한 것이며 소흥 17년 편록(編錄)하여 이루었으며 이윽고 곧 간행했음. 속칭이 대혜정법안장(大慧正法眼藏). 명 만력(萬曆) 44(1616) 보선암 사문 혜열과 및 거사 춘문 서홍택 등이 원징과 및 이일화의 서()를 붙이고 따로 종고가 장자소시랑(張子韶侍郞)에게 답한 글을 더하여 중각(重刻)을 더했음 [선적지상].

機鋒; 선기(禪機)의 민예(敏銳; 민첩하고 예리함)와 선기의 봉망(鋒芒; 칼날)을 가리킴. 또 봉기(鋒機)로 지음.

忠國師; 혜충(慧忠; ?-775)이니 또 혜충(惠忠)으로 지음. 당대승. 절강(浙江) 제기(諸曁)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염(). 어릴 적부터 불법을 배웠으며 처음엔 계율을 학습하고 장성(長成)하자 경론(經論)을 통달했음. 6조 혜능대사(慧能大師)의 명성(名聲)을 듣고 곧 재를 넘어 고알(叩謁)하여 그의 심인(心印)을 얻었음. 남양(南陽)의 백애산(白崖山) 당자곡(黨子谷; 白草谷)에 들어가 정좌(靜坐)하며 장양(長養)했는데 40여 년 동안 발이 산을 벗어나지 않았음. 학자들이 그에게 나아갔는데 늘 백천(百千)을 넘었음. 개원년(開元年) 중에 현종(玄宗)이 그의 도예(道譽)를 흠모(欽慕)하여 맞이해 경사(京師)에 다다랐으며 칙명(勅命)으로 용흥사(龍興寺)에 주()했음. 오래지 않아 안사(安史)의 난()을 만나 스님이 이에 둔귀(遁歸; 달아나 회귀)했음. 숙종(肅宗) 상원(上元) 2(761) 다시 불러 경사(京師)에 다다랐고 천복사(千福寺) 서선원(西禪院)에 주()했음. 공경(公卿)과 사서(士庶)가 참고(參叩)하며 구법(求法)했는데 주야를 놓치지 않았음. 대종(代宗)이 계위(繼位)하자 우례(優禮)를 더함이 있었으며 광택사(光宅寺)로 천주(遷住)했음. 후에 남양(南陽)으로 돌아갔다가 대력(大曆) 10년 당자곡(黨子谷)에 있으면서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응당 80 이상(以上)에 있음. 시호(諡號)는 대증선사(大證禪師)며 세칭이 남양혜충(南陽慧忠)ㆍ남양국사(南陽國師) [송고승전9. 전등록5. 전법정종기7].

義理; ()에 적합한 도임.

老婆禪; 친절하고 정녕(叮嚀)한 선. 노파선 1()는 혹 경멸의 뜻이 있음.

宗敎; 1. 종문(宗門)의 교의(敎意). 2. 선종과 교종. 여기에선 1을 가리킴.

法堂; 곧 칠당가람(七堂伽藍)의 하나. 곧 선림에서 대법을 연포(演布)하는 당(). 불전(佛殿)의 후방과 방장의 전방에 위치함. 강당에 상당하며 강()은 강교(講敎)와 통함. 타종(他宗)과 구별하기 위함이며 또 그 교외별전의 종지를 보이는지라 고로 선종에서 특별히 법당으로 호칭함. 역대삼보기12ㆍ전등록4 등을 안험컨대 지나(支那)에선 자고로 불전을 제한 밖에 또한 법당을 건립해 있었으며 및 백장회해선사가 선원의 규칙을 제정함에 이르러 드디어 조제(朝制)의 태극전(太極殿)을 모방해 법당을 건립했음. 당내 중앙에 하나의 고대(高臺)를 설치하여 사방에서 균일하게 앙망함을 얻었음. 그러나 후세에 곧 좌후(座後)에 대판병(大板屛)을 설치했는데 이미 고의(古意)를 잃었음. 선원청규10에 이르되 불전을 세우지 않고 오직 법당만 지었다 했으니 가히 선원은 고래로 불전을 두지 않고 다만 법당만 건립한 줄을 알 것임. 후에 비로소 불전의 후방에 법당을 건립했음. 혹 작은 사원 중엔 널리 불전과 법당 양자를 겸용했음 [백장청규상존조장. 선원청규5, 7, 9. 상기전전당류].

行戶; 선가의 법회에 비유.

揠苗; ()은 발기(拔起; 뽑아올림). 맹자 공손축. 송나라에 그 모가 자라지 않음을 걱정하여 그것을 뽑아올린 자가 있었다. 망망연(茫茫然; 迷茫한 모양)히 돌아와 그 가인(家人)에게 일러 가로되 오늘 병날 것 같다. 내가 모가 자라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의 아들이 달려가서 보니 모가 곧 시들어버렸다. 천하에서 모의 생장을 돕지 않는 자는 적다. 그것을 무익하다고 여기고 버리는 자는 모의 김매기도 하지 않는 자다. 자라는 것을 도와주려고 모를 뽑아올리는 자는 도연(徒然)하고 무익함만이 아니라 또 그것을 해치는 것이다.

七穿八穴; 역순종횡(逆順縱橫)하며 자유자재하고 통달하여 장애가 없음의 뜻. 7 8은 다수를 표시함. 유사용어에 오히려 칠종팔횡ㆍ칠통팔달ㆍ칠전팔도ㆍ칠요팔철(七凹八凸) 등이 있음.

雲門臨濟曹洞潙仰法眼宗; 중국 선종의 5가 종파를 가리킴. 곧 위앙종ㆍ임제종ㆍ조동종ㆍ운문종ㆍ법안종. 5가 종파의 문풍에 각기 특색이 있으며 전승(傳承)하여 스스로 계통을 이루었음. 당대 하반엽(下半葉)에서 오대에 이르기까지 선후로 창립했는데 그 중 위앙ㆍ법안ㆍ운문 3종은 송ㆍ원 시대에 점차 실전(失傳)했고 임제와 조동 2종은 곧 연속하여 당금(當今)에 이름.

睦州; 도명(道明; 780-877)이니 당대승. 또 도종(道蹤)으로 일컬음. 강남국주 진씨(陳氏)의 후예임. 지계가 정엄(精嚴)하고 학문이 3()을 통했음. 황벽희운에게서 지취를 계합했으며 관음원에 머물기 수십 해였으며 학자가 물어 격발(激發)하면 물음을 따라 그대로 답했음. 사어(詞語)가 준험(峻險)하여 이미 순철(循轍)이 아닌지라 기()가 천박한 자는 왕왕 해석하지 못했고 현학(玄學)으로 성품이 민첩한 자라야 흠복(欽服)했음. 제방에서 귀의하여 흠모한지라 다 일컫기를 존숙(尊宿; 陳尊宿)이라 했음. 뒤에 목주 개원사로 돌아가 늘 포혜(蒲鞋. 는 부들 포)를 짜서 어머니를 봉양한지라 또 진포혜(陳蒲鞋)란 호가 있음. 황소(黃巢)가 입경(入境)하였지만 스님이 있었기 때문에 한 방면이 평안했음. 당 건부 4년 시적했음. 나이 98. [전등록12. 오등회원4].

烏臼; 당대승. 마조도일의 법사 [전등록8. 오등회원3].

無業; (762-823) 당대승. 상주 상락(지금의 섬서 상현) 사람이며 성은 두씨. 9세에 개원사 지본선사에게 의지해 대승경을 수학(受學)했는데 5행을 함께 내리읽었음. 12에 낙발(落髮)했고 20에 양주 유율사에게서 구계(具戒)를 받았음. 후에 강서로 가서 마조를 첨례하고 아울러 그의 법을 이었음. 청량 금각사로 가서 대장경을 두 번 열람했는데 여덟 해를 돌아 마쳤음. 다시 남하하여 분주(지금의 산서 분양) 개원사에 주()하기 스무 해였음. 당 헌종이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사질(辭疾;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다다르지 않았음. 장경 312월에 떠났음. 나이 62, 42. 칙시가 대달국사(大達國師) [전등록8. 연등회요5].

普化; (?-860) 당대승 반산보적(盤山寶積)을 이었으니 남악하 3. 일본 선종의 지파(支派) 보화종(普化宗)의 개조(開祖). 성씨와 나이는 다 상세치 못함. 보적(寶積)이 시적한 후 스님이 곧 북지(北地)의 진주(鎭州)에서 유화(遊化)하며 임제를 좌찬(佐贊)했음. 임제가 머문 지 오래지 않아 스님이 전신(全身)으로 벗고 갔음(죽음) [송고승전20. 전등록10. 석씨계고략3].

定上座; 오대 후당승. 임제의현의 법사 [연등회요10. 임제어록].

雲峯悅; 문열(文悅; 998-1062)이니 송대 임제종승. 강서 남창 사람이며 속성은 서. 7세 때 용흥사에서 머리를 깎았고 19세에 제방을 유력(遊歷)했음. 균주(강서)의 대우수지(大愚守芝; 임제하 6)를 참알(參謁)해 개오(開悟)한 후 그의 법을 이었으며 아울러 수지(守芝)를 수시(隨侍)하기 8년이었음. 수지가 입적(入寂)한 후 스님이 다시 유방(遊方)하며 동안원(同安院)의 혜남(慧南)을 참알해 수좌가 되었고 취암사(翠巖寺)ㆍ남악 법륜사 등을 역주(歷住)했음. 후에 또 남악 운봉(雲峰)에 거주한지라 고로 또 운봉문열(雲峰文悅)이라 일컬음. 가우 7년에 시적했으니 나이는 65. 어록 2권이 있어 행세(行世)[속등록8 선림승보전22. 오등회원12. 불조역대통재18].

法昌遇; 의우(倚遇; 1005-1081)니 송대 운문종승. 장주(지금 복건에 속함) 임씨(林氏). 어릴 적부터 군()의 숭복(崇福)에게 의지해 득도(得度)했으며 대지(大志)가 있었음. 수구(受具)하고 유방(遊方)하며 이름이 총석(叢席)에 드러났음. 남악곡천(南嶽谷泉)을 참알했다가 담주(潭州)의 북선(北禪)으로 돌아와 지현(智賢)을 참알했는데 그의 기어(機語)가 첩건(捷健)함을 좋아해 곧 마음을 기울여 사사(師事)함이 매우 오래였음. 만년에 서산에 이르러 서식(棲息)하기 3년이었고 후에 홍주 법창(法昌)의 낡은 가옥 수간(數間)에 거주하면서 도경화종(刀耕火種)하며 도에 안락(安樂)했음 [연등회요28. 종통편년26. 속전등록5].

答徐顯謨稚山

左右頻寄聲妙喜 想只是要調伏水牯牛揑殺這猢猻子耳 此事不在久歷叢林飽參知識 只貴於一言一句下直截承當不打之遶爾 據實而論 間不容髮 不得已說箇直截 已是紆曲了也 說箇承當 已是蹉過了也 況復牽枝引蔓 擧經擧敎 說理說事 欲究竟耶 古德云 但有纖毫卽是塵 水牯牛未調伏 猢猻子未死 縱說得恒沙道理 並不干我一星兒事 然說得說不得 亦非外邊事 不見江西老宿有言 說得亦是汝心 說不得亦是汝心 決欲直截擔荷 見佛見祖如生冤家 方有少分相應 如此做工夫 日久月深不著起心求悟 水牯牛自調伏 猢猻子自死矣 記取記取 但向平昔心意識湊泊不得處 取不得處捨不得處 看箇話頭 僧問雲門 如何是佛 門云 乾屎橛 看時不用將平昔聰明靈利思量卜度 擬心思量 十萬八千未是遠 莫是不思量不計較不擬心便是麽 咄更是箇甚麽 且置是事

顯謨; 顯謨閣 宋代所建 又指顯謨閣學士

調伏; 調伏身口意三業而制伏諸惡行也 又調理惡魔使降伏我也 又柔者以法調之 剛者以勢伏之 [唐華嚴經五 探玄記四 無量壽經義疏]

猢猻子; 又作胡孫子 卽猢猻 子 後綴 比喩心猿 多喩指躁動不安之心

打之遶; 指斥參禪者不能直截悟入而迂回

冤家; 怨讐 寃與怨通 家 助詞

 

서현모(顯謨)稚山; 치산에게 답하다

좌우(左右)가 자주 묘희(妙喜)에게 음성을 기탁함은 상념컨대 다만 이 수고우(水牯牛)를 조복(調伏)하고 호손자(猢猻子)을 날살(揑殺; 억눌러 죽임)하려고 할 따름입니다. 차사(此事)는 총림을 구력(久歷)하거나 지식을 포참(飽參)함에 있지 않고 다만 일언일구하(一言一句下)에 직절(直截)하고 승당(承當)하여 타지요(打之遶)하지 않음을 귀하게 여길 따름입니다. 사실에 의거해 논하자면 사이에 머리카락도 용납하지 않지만 부득이하여 이() 직절(直截)을 설하거니와 이미 이는 우곡(紆曲; 굽다)했고 이() 승당(承當)을 설함도 이미 이는 차과(蹉過)했거늘 하물며 다시 견지인만(牽枝引蔓)하고 거경거교(擧經擧敎)하고 설리설사(說理說事)하여 구경(究竟)하려고 함이겠습니다. 고덕이 이르되 단지 섬호(纖毫)라도 있으면 곧 이 진()이다. 수고우(水牯牛)를 조복하지 못하고 호손자(猢猻子)가 죽지 않았다면 비록 항사(恒沙; 恒河沙) 도리를 설해 얻더라도 모두() 나의 일성아사(一星兒事; 一點事)에도 상간(相干; )되지 않습니다. 그러하여 설함을 얻거나 설함을 얻지 못하거나 또한 외변사(外邊事)가 아닙니다. 보지 못했습니까, 강서노숙(江西老宿; 馬祖)이 말하되 설함을 얻어도 역시 너의 마음이며 설함을 얻지 못해도 역시 너의 마음이다(이상 마조의 말). 결정코 직절(直截)하여 담하(擔荷)하고 싶다면 견불견조(見佛見祖)함을 원가라는 생각을 냄과 같아야(如生冤家) 바야흐로 소분(少分) 상응함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공부를 짓되 일구월심(日久月深)하면서 마음을 일으켜 구오(求悟)함에 집착하지 않아야 수고우가 저절로 조복되고 호손자가 저절로 죽나니 기취(記取)하고 기취하십시오. 단지 평석(平昔)에 심의식(心意識)이 주박(湊泊)함을 얻지 못하는 곳ㆍ취함을 얻지 못하는 곳ㆍ버림을 얻지 못하는 곳을 향해 이() 화두를 간()하십시오 중이 운문(雲門)에게 묻되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문운(門云) 건시궐(乾屎橛)이다. 간시(看時)에 평석(平昔)의 총명ㆍ영리ㆍ사량ㆍ복탁(卜度)을 가짐을 쓰지 말아야 하나니 의심(擬心)하여 사량한다면 십만팔천도 이 먼 게 아닙니다. 이 불사량(不思量)ㆍ불계교(不計較)ㆍ불의심(不擬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 다시 시개(是箇; 이것)가 무엇인가. 이 일을 차치(且置)합니다.

顯謨; 현모각이니 송대에 건립한 것이며 또 현모각 학사를 가리킴.

調伏; 신ㆍ구ㆍ의 3업을 조복(調伏)하고 모든 악행을 제복(制伏). 또 악마를 조리(調理)하여 나에게 항복하게 함. 또 부드러운 것은 법으로 그것을 조리하고 강한 것은 세력으로 그것을 항복시킴 [당화엄경5. 탐현기4. 무량수경의소].

猢猻子; 또 호손자(胡孫子)로 지음. 곧 호손이니 자는 후철. 심원(心猿)에 비유함. 다분히 조동(躁動)하며 불안한 마음을 비유로 가리킴.

打之遶; 참선자가 능히 직절(直截)하여 오입(悟入)하지 못하고 우회(迂回)함을 지척(指斥; 가리킴).

冤家; 원수. ()과 원()은 통하며 가는 조사.

 

答楊敎授彦侯

左右彊項中 却有不可思議底柔和 致一言之下千了百當 此事殊勝 若不間於彊項中打發得幾人 佛法豈到今日 非有般若根性 則不能如是 盛事盛事 示諭 欲來年春夏間 棹無底船 無孔笛 施無盡供 說無生話 要了無窮無始不有不無巴鼻 但請來與這無面目漢商量 定不錯了這話 又承需道號 政欲相塗糊 可稱快然居士 故眞淨老人云 快然大道 只在目前 縱橫十字 擬而留連 便是此義也 某在長沙作久住計 左右他日果從此來 則林下不寂寞也

彊項; 亦作强項 形容剛强不屈等

打發; 發動精神之義 猶擊發

無底船; 亦作沒底船 禪家以此奇特物象 隱指超越情識分別之境界

無孔笛; 無孔竅的笛子 不能吹出通常的曲調 喩指超越言句 玄妙奇特的禪法或機鋒

塗糊; 猶糢糊 有汚染義 塗 汚染 塗抹 糊 蒙混 宋史二百八十一列傳 呂端傳 時呂蒙正爲相 太宗欲相端 或曰 端爲人糊塗 太宗曰 端小事糊塗 大事不糊塗

留連; 留戀不止 舍不得離去

 

양교수(楊敎授)彦侯; 언후에게 답하다

좌우(左右)는 강항(彊項)한 가운데 도리어 불가사의한 유화(柔和)가 있어 일언지하(一言之下)에 천료백당(千了百當)함에 이르렀습니다(). 차사(此事)는 수승(殊勝)하나니 만약 간혹(間或; ) 강항(彊項) 중에 타발(打發)하여 몇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불법이 어찌 금일에 이르렀겠습니까. 반야(般若)의 근성이 있지 않다면 곧 능히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니 성사(盛事)며 성사(盛事)입니다. 시유(示諭)하되 내년 봄 여름 사이에 무저선(無底船)을 노 젓고 무공적(無孔笛)을 불고 무진공(無盡供)을 베풀고 무생화(無生話)를 설해 무궁무시(無窮無始)에 불유불무(不有不無)한 파비(巴鼻)를 깨닫기()를 요한다 하셨습니다. 단지 청컨대 와서 이 무면목한(無面目漢)과 더불어 상량(商量)한다면 꼭() 저화(這話)에 어긋나지(錯了) 않을 것입니다. 또 듣건대() 도호(道號)를 구하여() 바로() 서로 도호(塗糊)하고 싶다 하셨으니 쾌연거사(快然居士)로 호칭함이 옳을 듯합니다. 고로 진정(眞淨; 克文) 노인이 이르되 쾌연한 대도(大道)/ 다만 목전에 있나니/ 종횡으로 십자(十字)/ 향하면서() 유련(留連)한다. 바로 이는 이 뜻입니다. ()가 장사(長沙)에 있으면서 구주(久住)할 계산을 지었으니 좌우가 다른 날 과연 여기로 와서 좇는다면 곧 임하(林下)가 적막(寂寞)하지 않을 것입니다.

彊項; 또한 강항(强項)으로 지음. 강강(剛强)하여 굽히지 않음 등을 형용.

打發; 정신을 발동(發動)함의 뜻. 격발(擊發)과 같음.

無底船; 또 몰저선(沒底船)으로 지음. 선가에서 이 기특한 물상(物象)으로 정식(情識)과 분별을 초월한 경계를 은유로 가리킴.

無孔笛; 구멍이 없는 피리니 능히 통상의 곡조를 불어 내지 못함. 언구를 초월한 현묘하고 기특한 선법 혹 기봉을 비유로 가리킴.

塗糊; 모호(糢糊)와 같음. 오염의 뜻이 있음. ()는 오염ㆍ도말(塗抹)이며 호()는 몽혼(蒙混; 속임수로 남을 속이다). 송사281 열전 여단전(呂端傳). 때에 여몽정이 재상이 되었다. 태종이 여단(呂端)을 재상으로 삼고자 했더니 혹은 가로되 단은 사람됨이 호도(糊塗)합니다. 태종이 가로되 단은 소사엔 호도하지만 대사엔 호도하지 않다.

留連; 유련(留戀)하여 멈추지 않음. 버리고 떠남을 얻지 못함.

 

答樓樞密

不識 別後日用應緣處 不被外境所奪否 視堆案之文 能撥置否 與物相遇時 能動轉否 住寂靜處 不妄想否 體究箇事 無雜念否 故黃面老子有言 心不妄取過去法 亦不貪著未來事 不於現在有所住 了達三世悉空寂 過去事或善或惡 不須思量 思量則障道矣 未來事不須計較 計較則狂亂矣 現在事到面前 或逆或順 亦不須著意 著意則擾方寸矣 但一切臨時隨緣酬酢 自然合著這箇道理 逆境界易打 順境界難打 逆我意者 只消一箇忍字 定省少時 便過了 順境界直是無儞回避處 如磁石與鐵相偶 彼此不覺合作一處 無情之物尙爾 況現行無明全身在裏許作活計者 當此境界 若無智慧不覺不知被他引入羅網 却向裏許要求出路 不亦難乎 所以先聖云 入得世間出世無餘 便是這箇道理也 近世有一種修行失方便者 往往認現行無明 爲入世間 便將出世間法 彊差排作出世無餘之事 可不悲乎 除夙有誓願 卽時識得破作得主 不被他牽引 故淨名有言 佛爲增上慢人 說離婬怒癡爲解脫耳 若無增上慢者 佛說婬怒癡性卽是解脫 若免得此過 於逆順境界中 無起滅相 始離得增上慢名字 恁麽方可作入得世間 謂之有力量漢 已上所說 都是妙喜平昔經歷過底 卽今日用亦只如此修行 願公趁色力彊健 亦入是三昧 此外時時以趙州無字提撕 久久純熟 驀然無心撞破漆桶 便是徹頭處也

撥置; 捩開而置于一邊也 [大慧書栲栳珠]

定省; 定心而自省

無情; 無情識者 謂山川草木等

 

누추밀(樓樞密)에게 답하다

알지 못하나니 헤어진 후 일용의 응연처(應緣處)에 외경(外境)이 빼앗는 바를 입지 않습니까. 퇴안지문(堆案之文; 책상에 쌓인 문서)을 보면서 능히 발치(撥置)합니까. 사물과 상우(相遇)할 때 능히 동전(動轉)합니까. 적정처(寂靜處)에 머물면서 망상하지 않습니까. 개사(箇事; 此事)를 체구(體究)하며 잡념이 없습니까. 고로 황면노자가 말씀이 있었으니 마음이 과거법(過去法)을 허망하게 취하지 않고/ 또한 미래사(未來事)에 탐착(貪著)하지 않고/ 현재에 머무는 바가 있지 않아야/ 삼세(三世)가 모두() 공적(空寂)함을 요달(了達)한다(화엄28). 과거사(過去事)는 혹선혹악(或善或惡)을 사량(思量)함을 쓰지() 않아야 하나니 사량하면 곧 장도(障道)입니다. 미래사는 계교(計較)함을 쓰지 않아야 하나니 계교하면 곧 광란(狂亂)합니다. 현재사(現在事)가 면전에 이르러 혹역혹순(或逆或順)하지만 또한 착의(著意)를 쓰지 않아야 합니다. 착의하면 곧 방촌(方寸)을 시끄럽게() 합니다. 단지 일체를 임시(臨時)하여 수연(隨緣)하여 수작(酬酢)한다면 자연히 저개(這箇) 도리에 합착(合著)합니다. 역경계(逆境界)는 쉽게 치지만() 순경계(順境界)는 치기 어렵습니다. 나의 뜻에 거슬리는() 것은 다만 일개(一箇)의 인자(忍字)를 써서() 소시(少時) 정성(定省)하면 바로 지나가버리지만 순경계(順境界)는 바로() 이 그대()가 회피할 곳이 없나니 자석(磁石)과 철()이 서로 짝함과 같아서 피차(彼此) 불각에 합쳐 일처(一處)를 짓습니다. 무정지물(無情之物)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현행(現行) 무명(無明)의 전신(全身)이 이허(裏許; 裏邊)에 있으면서 활계(活計)를 짓는 자이겠습니까. 이 경계를 당해 만약 지혜가 없다면 불각부지(不覺不知)에 그가 나망(羅網)으로 인입(引入)함을 입습니다. 도리어 이허(裏許)를 향해 출로(出路)를 요구(要求)한다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소이로 선성(先聖)이 이르되 세간(世間)에 입득(入得)하면 출세(出世; 출세간)의 무여(無餘; 殘餘가 없음). 바로 이는 저개(這箇) 도리입니다. 근세(近世) 일종의 수행하면서 방편을 잃은 자가 있나니 왕왕(往往) 현행무명(現行無明)을 인정하여 세간에 수입(收入; )하고 바로 출세간법(出世間法)을 가져다 억지로() 차배(差排; 差別하여 按排)하여 출세(出世)의 무여지사(無餘之事)로 지으니 가히 슬프지 않겠습니까. 오직() 일찍() 서원(誓願)이 있어야 즉시(卽時) 알아 깨뜨림을 얻고(識得破) 지어 주재(主宰)함을 얻어 그의 견인(牽引)을 입지 않습니다. 고로 정명(淨名; 淨名經이니 維摩經의 다른 이름)에 말씀이 있었으니 불타가 증상만인(增上慢人)을 위해 설하되 음노치(婬怒癡)를 여의어야 해탈한다고 했거니와 만약 증상만자(增上慢者)가 없다면 불타가 설하되 음노치(婬怒癡)의 성()이 곧 이 해탈이다(維摩經中). 만약 이 허물을 면함을 얻는다면 역순경계(逆順境界) 중에 기멸상(起滅相)이 없고 비로소() 증상만이란 명자(名字)를 여읨을 얻을 것입니다. 이러해야 바야흐로 가히 세간에 입득(入得)한다고 지으리니 이를 일러 역량이 있는 자(有力量漢)라 합니다. 이상(已上) 설한 바는 모두() 이 묘희가 평석(平昔)에 경력(經歷)하여 지난 것이니 즉금의 일용에도 또한 다만 이와 같이 수행합니다. 바라건대 공()도 색력(色力; 氣力. 精力)의 강건(彊健)을 쫓아() 또한 이 삼매에 드십시오. 이 밖에 시시로 조주무자(趙州無字)를 제시(提撕)하되 구구(久久)하면 순숙(純熟)하리니 맥연(驀然)히 무심하게 칠통(漆桶)을 당파(撞破)하면 바로 이 철두처(徹頭處)입니다.

撥置; 열개(捩開; 비틀어 열다)하여 한 쪽에 둠임 [대혜서고로주].

定省; 마음을 안정시켜 스스로 살핌.

無情; 정식(情識)이 없는 것이니 이르자면 산천초목 등.

 

日用工夫 前書已葛藤不少 但只依舊不變不動 物來則與之酬酢 自然物我一如矣 古德云 放曠任其去住 靜鑑覺其源流 語證則不可示人 說理則非證不了 自證自得處 拈出呈似人不得 唯親證親得者 略露目前些子 彼此便默默相契矣 示諭 自此不被人謾 不錯用工夫矣 大概已正 𣠽柄已得 如善牧牛者索頭常在手中 爭得犯人苗稼 驀地放却索頭 鼻孔無撈摸處 平田淺草一任縱橫 慈明老人所謂 四方放去休攔遏 八面無拘任意遊 要收只在索頭撥 未能如是 當緊把索頭 且與順摩捋 淹浸工夫旣熟 自然不著用意隄防矣 工夫不可急 急則躁動 又不可緩 緩則昏怛矣 忘懷著意俱蹉過 譬如擲劍揮空 莫論及之不及 昔嚴陽尊者問趙州 一物不將來時如何 州云 放下著 嚴陽云 一物旣不將來 放下箇甚麽 州云 放不下擔取去 嚴陽於言下大悟 又有僧問古德 學人奈何不得時如何 古德云 老僧亦奈何不得 僧云 學人在學地 故是奈何不得 和尙是大善知識 爲甚麽亦奈何不得 古德云 我若奈何得 則便拈却爾這不奈何 僧於言下大悟 二僧悟處 卽是樓樞密迷處 樓樞密疑處 卽是二僧問處 法從分別生 還從分別滅 滅諸分別法 是法無生滅 細觀來書 病已去盡 別證候亦不生矣 大段相近 亦漸省力矣 請只就省力處 放敎蕩蕩地 忽然啐地破嚗地斷 便了千萬 勉之

慈明; 楚圓(986-1039) 宋代臨濟宗僧 全州淸湘(廣西桂林)人 俗姓李 少爲儒生 潛心擧業 二十二歲迴心向道 於湘山隱靜寺得度 未久遊襄沔之間 與守芝谷泉結伴入洛陽 聞善昭之道望爲天下第一 遂赴汾州 依止二年 未許入室 每見必詬罵 或毁詆諸方 所訓亦皆流俗鄙事 師一夕訴之 語未竟 昭熟視而罵曰 是惡知識 敢裨販我 擧杖逐之 師欲伸解 昭掩其口 師忽大悟曰 是知臨濟道出常情 遂服役約十二年(一說七年) 盡領其旨 後至幷州 訪唐明智嵩 更與當世名士楊大年李遵勗 時聚論道 後欲歸鄕省母 過筠州(四川) 於洞山見曉聰 依止三年 又遊仰山 時楊大年寄書宜春太守黃宗且 請師住於袁州(江西)南源廣利寺 居三年 辭而省母 又謁神鼎洪諲 洪諲大加讚賞 由是聲名大揚 旣主潭州(湖南)道吾之席 次住石霜山崇勝寺 又轉南嶽福嚴寺 後遷潭州興化寺 寶元二年正月 於潭州興化寺示寂 壽五十四 諡號慈明禪師 法嗣五十人中 以黃龍慧南 楊岐方會最爲知名 各成一派 遺有石霜楚圓禪師語錄一卷(慧南重編) [續傳燈錄三 禪林僧寶傳二十一]

攔遏; 遮之止之

摩捋; 本爲撫摩義 禪錄用例多謂師家悟道未徹 或言敎誤導學人 或順學人情性虛加撫慰

淹浸; 淹沒 浸沒

昏怛; 暗昏忉怛 心頭黑漫漫地如可悲慘 故曰昏怛

嚴陽尊者; 唐代僧 諱善信 趙州從諗法嗣 初結廬武寧新興嚴陽山 天祐(904-907)間 居明心寺 [傳燈錄十一 五燈會元四]

學地; 指修學佛道時 尙殘留有餘地之修行境地

 

()

일용공부(日用工夫)는 전서(前書)에서 이미 갈등이 적지 않았습니다. 단지(但只) 의구히 불변부동(不變不動)하면서 물()이 오면 곧 그()와 더불어 수작(酬酢)하면 자연히 물아일여(物我一如)일 것입니다. 고덕(古德; 淸涼澄觀)이 이르되 방광(放曠)하며 그 거주(去住)에 맡기고 고요히() 그 원류(源流)를 감각(鑑覺; 鑑別하고 覺悟)하라. ()을 말하라면 곧 가히 사람에게 보이지 못하지만 리()를 설하려면 증()이 아니면 마치지 못한다(以上 澄觀語). 자증자득(自證自得)한 곳을 염출(拈出)하여 사람에게 보여 줌(呈似)을 얻지 못하지만 오직 친증친득(親證親得)한 자라야 목전(目前)의 사자(些子)를 조금 드러내매 피차(彼此) 바로 묵묵히 상계(相契)합니다. 시유(示諭)하되 이로부터 사람의 속임을 입지 않는다 하니 잘못() 공부를 씀이 아닙니다. 대개(大概)가 이미 바르고() 패병(𣠽柄)을 이미 얻었으니, 예컨대() 잘 목우(牧牛)하는 자가 삭두(索頭; )가 늘 손안에 있거늘 어찌 사람의 묘가(苗稼; 곡식)를 범함을 얻겠습니까. 맥지(驀地; 갑자기) 삭두(索頭)를 방각(放却)하여 비공(鼻孔)을 노모(撈摸; 摸索. 尋取)할 곳이 없으면 평전천초(平田淺草)에 종횡하는 대로 일임(一任)할 것입니다. 자명(慈明) 노인이 이른 바 사방으로 방거(放去)하니 난알(攔遏)을 그치고 팔면에 구속이 없으니 뜻대로(任意) 노닌다. 거두고자 한다면 다만 삭두(索頭)를 제거함()에 있나니 능히 이와 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삭두(索頭)를 긴파(緊把)하여 다만() ()해 마랄(摩捋)해 주어야 합니다. 엄침(淹浸)하여 공부가 이미 익숙하면 자연히 용의(用意)하여 제방(隄防; 防備)함을 붙이지 않을 것입니다. 공부는 급하면 불가하나니 급하면 곧 조동(躁動; 조급하게 움직임)하고 또 느슨함은 불가하나니 느슨하면 곧 혼달(昏怛)합니다. 망회(忘懷; 忘記)와 착의(著意)는 모두 차과(蹉過)하나니 비유컨대 검을 던져 허공에 휘두르면 미침과 미치지 못함을 막론(莫論)함과 같습니다. 옛적에 엄양존자(嚴陽尊者)가 조주(趙州)에게 묻되 일물(一物)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 어떻습니까. 주운(州云) 방하착(放下著)하라. 엄양이 이르되 일물도 이미 가지고 오지 않았거늘 저() 무엇을 방하하라 하십니까. 주운(州云) 놓아 내리지 못하겠거든(放不下) 담취(擔取; 짊어지다)하여 가거라. 엄양이 언하에 대오했다. 또 어떤 중이 고덕(古德)에게 묻되 학인(學人)이 어찌함(奈何)을 얻지 못할 때 어떻습니까. 고덕이 이르되 노승도 또한 어찌함을 얻지 못한다. 승운(僧云) 학인은 학지(學地)에 있는지라 고로 이 어찌함을 얻지 못하지만 화상은 이 대선지식이거늘 무엇 때문에 또한 어찌함을 얻지 못합니까. 고덕이 이르되 내가 만약 어찌함을 얻는다면 곧바로 네가 이 어찌하지 못하는 것을 집어 물리쳤으리라(拈却). 중이 언하에 대오했다. 2()의 오처(悟處)가 바로 이 누추밀(樓樞密)의 미처(迷處)며 누추밀의 의처(疑處)가 곧 이 2승의 문처(問處)입니다. 법이 분별로 좇아 생기고/ 도리어 분별로 좇아 멸하나니/ 모든 분별을 멸하는 법은/ 이 법은 생멸이 없다(金剛三昧經). 내서(來書)를 자세히 보매 병()이 이미 제거되어 다했고 다른 증후(證候; 證得할 기미)도 또한 생기지 않습니다. 대단(大段)이 상근(相近)하고 또한 점차 생력(省力)할 것입니다. 청컨대 다만 생력처(省力處)로 나아가 놓아 탕탕지(蕩蕩地)케 하면 홀연히 쵀지(啐地)에 깨뜨리고 박지(嚗地)에 끊어 바로 천만(千萬)을 마치리니() 힘쓰십시오(勉之).

慈明; 초원(楚圓; 986-1039)이니 송대 임제종승. 전주(全州) 청상(淸湘; 廣西 桂林)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이(). 어릴 적에 유생(儒生)이 되어 거업(擧業; 科擧應試하는 일)에 마음을 담갔는데 22세에 마음을 돌려 도()로 향했으며 상산(湘山) 은정사(隱靜寺)에서 득도(得度)했음. 오래지 않아 양면(襄沔)의 사이를 유람하다가 수지(守芝; 善昭法嗣)ㆍ곡천(谷泉; 善昭法嗣)과 결반(結伴)하여 낙양(洛陽)에 들어갔음. 선소(善昭; 임제하 5)의 도가 천하제일(天下第一)을 바라본다 함을 듣고 드디어 분주(汾州)에 다다라 2년을 의지(依止)했으나 입실(入室)을 허락하지 않았음. 매번 보기만 하면 반드시 꾸짖고 욕하였으며 혹은 제방(諸方)을 헐뜯고 흉보았으며 가르치는 바는 또한 다 유속(流俗; 世俗)의 비사(鄙事)였음. 스님이 어느 날 저녁 이를 하소연했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소가 찬찬히 보다가 욕하며 가로되 이 악지식(惡知識)이 감히 나를 비판(裨販; )하느냐, 주장자를 들어 쫓아내자 스님이 해설(解說)을 펴려고 하는데 선소가 그 입을 막았음. 스님이 홀연히 대오하고 가로되 이로 알지니 임제의 도가 상정(常情; 범상한 정)을 초출했다. 드디어 약 12(일설엔 7)을 복역(服役)하면서 그 지취를 다 영오(領悟)했음. 후에 병주(幷州)에 이르러 당명지숭(唐明智嵩; 首山省念法嗣)을 방문했고 다시 당세(當世)의 명사(名士) 양대년(楊大年)ㆍ이준욱(李遵勗)과 때때로 모여 도를 논했음. 후에 귀향하여 성모(省母; 모친을 살핌)하려고 균주(筠州; 四川)를 지나다가 동산(洞山)에서 효총(曉聰)을 뵙고 3년을 의지(依止)했음. 또 앙산(仰山)을 유람했는데 때에 양대년(楊大年)이 의춘태수(宜春太守) 황종차(黃宗且)에게 서신을 기탁해 스님을 원주(袁州; 江西) 남원(南源)의 광리사(廣利寺)에 주지(住持)하도록 청했음. 3년을 거주하다가 사퇴하고 성모(省母)했음. 또 신정홍인(神鼎洪諲; 임제하 5)을 알현(謁見)했는데 홍인이 찬상(讚賞)을 크게 더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성명(聲名)을 크게 날렸음. 이미 담주(潭州; 湖南) 도오(道吾)의 법석을 주재(主宰)하고는 다음으로 석상산(石霜山) 숭승사(崇勝寺)에 주지(住持)했으며 또 남악 복엄사(福嚴寺)로 이전(移轉)하였고 후에 담주(潭州) 흥화사(興化寺)로 옮겼으며 보원(寶元) 2년 정월 담주 흥화사에서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54며 시호(諡號)는 자명선사(慈明禪師). 법사(法嗣) 50인 중에 황룡혜남(黃龍慧南)과 양기방회(楊岐方會)가 가장 이름이 알려졌으며 각기 일파(一派)를 이루었음. 유작(遺作)에 석상초원선사어록(石霜楚圓禪師語錄; 慧南 重編) 1권이 있음 [속전등록3. 선림승보전21].

攔遏; 그것을 가리고() 그것을 멈추게() .

摩捋; 본래 무마(撫摩)의 뜻이 되지만 선록에서의 용례는 다분히 사가의 오도가 철저하지 못함을 일컬음. 혹은 언교(言敎)로 학인을 오도(誤導)하거나 혹 학인의 정성(情性)에 순응해 헛되이 무위(撫慰)를 가함임.

淹浸; 엄몰(淹沒). 침몰.

昏怛; 암혼(暗昏)하고 도달(忉怛)함이니 심두가 흑만만지(黑漫漫地)라 가히 비참함과 같으므로 고로 가로되 혼달임.

嚴陽尊者; 당대승. 휘는 선신(善信)이며 조주종심의 법사. 처음에 무녕 신흥 엄양산에 오두막집을 엮었고 천우(904-907) 간 명심사에 거주했음 [전등록11. 오등회원4].

學地; 불도를 수학할 때 아직 여지(餘地)가 잔류해 있는 수행의 경지를 가리킴.

 

答曹太尉功顯

宗杲雖年運而往矣 不敢不勉彊力以此事與衲子輩激揚 一日粥後撥牌子 輪一百人入室 間有負命者上鉤來 亦有咬人師子 以此法喜禪悅爲樂 殊不覺倦 亦造物見憐耳 左右福慧兩全 日在至尊之側 而留意此段大事因緣 眞不可思議事 釋迦老子曰 有勢不臨難 豪貴學道難 非百劫千生曾承事善知識種得般若種子深 焉能如是信得及 只這信得及處 便是成佛作祖底基本也 願公只向信得及處覷捕 久久自透脫矣 然第一不得著意安排覓透脫處 若著意則蹉過也 釋迦老子又曰 佛道不思議 誰能思議佛 又佛問文殊師利曰 汝入不思議三昧耶 文殊曰 弗也世尊 我卽不思議 不見有心能思議者 云何而言入不思議三昧 我初發心欲入是定 如今思惟 實無心想而入三昧 如人學射 久習則巧 後雖無心 以久習故箭發皆中 我亦如是 初學不思議三昧 繫心一緣 若久習成就 更無心想 常與定俱 佛與祖師所受用處 無二無別 近年叢林有一種邪禪 以閉目藏睛 觜盧都地作妄想 謂之不思議事 亦謂之威音那畔空劫已前事 纔開口便喚作落今時 亦謂之根本上事 亦謂之淨極光通達 以悟爲落在第二頭 以悟爲枝葉邊事 蓋渠初發步時便錯了 亦不知是錯 以悟爲建立 旣自無悟門 亦不信有悟者 這般底謂之謗大般若斷佛慧命 千佛出世不通懺悔 左右具驗人眼久矣 似此等輩 披却師子皮作野干鳴 不可不知 某與左右雖未承顔接論 此心已默默相契多年矣 前此答字 極不如禮 今專遣法空禪人 代往致敬 故不暇入善思惟三昧 只恁麽信手信意 不覺葛藤如許 聊謝不敏而已

太尉; 古代執掌軍事的最高官職 秦始置 漢初沿用 漢武帝以後或廢或置 後也用來尊稱一般武官 權書九 漢高曰 周勃重厚少文 然安劉氏必勃也 可令爲太尉 宋史一六八 以太尉爲武選一品 位節度使上

造物; 指創造萬物 也指創造萬物的神力

至尊; 最尊貴 用爲皇帝的代稱

觜盧都; 又作嘴盧都 杜口無言之貌 盧都 下垂貌

野干; 祖庭事苑七 梵云悉迦羅 此言野干 亦名夜干 或射干 色靑黃 如狗群行 夜鳴其聲如狼 又野干形小尾大 能上樹 疑枯枝不登 狐卽形大 疑冰不渡 不能上樹

承顔; 順承尊長的顔色 謂侍奉尊長

 

조태위(太尉)功顯에게 답하다

종고(宗杲)가 비록 연운(年運)이 갔으나 감히 힘써() 강력(彊力)히 차사(此事)로써 납자배(衲子輩)와 격양(激揚)하지 아니치 못합니다. 어느 날 죽후(粥後)에 패자(牌子; 는 조사)를 제거하고() 일백인(一百人)을 윤번(輪番)으로 입실(入室)케 했는데 간혹(間或; ) 부명자(負命者)가 갈고리에 올라옴이 있었으며 또한 사람을 무는 사자(咬人師子)가 있었습니다. 이 법희선열(法喜禪悅)로써 낙을 삼는지라 특수히 권태(倦怠; )를 깨닫지 못하며 또한 조물(造物)이 연민(憐愍; )을 보일 따름입니다. 좌우(左右)는 복혜(福慧)를 양전(兩全; 둘이 完全)했고 날마다 지존(至尊)의 곁에 있으면서도 차단(此段)의 대사인연(大事因緣)에 유의(留意)하시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석가노자(釋迦老子)가 가로되 권세가 있으면서 임하지 않기 어렵고(有勢不臨難) 호귀(豪貴)하면서 도를 배우기 어렵다(四十二章經) 했거늘 백겁천생(百劫千生)에 일찍이 선지식을 승사(承事; 받들어 모심)하고 반야종자(般若種子)를 심음(種得)이 깊지 않다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믿어 미침을 얻겠습니까. 다만 이 믿어 미치는 곳이 바로 이 성불작조하는 기본입니다. 바라건대 공()은 다만 믿어 미침을 얻는 곳을 향해 처포(覷捕)할지니 구구(久久)하면 저절로 투탈(透脫)할 것입니다. 그러나 첫째로 착의(著意)하여 안배(安排)하거나 투탈(透脫)할 곳을 찾음을 얻지 마십시오. 만약 착의(著意)하면 곧 차과(蹉過; 錯過)합니다. 석가노자(釋迦老子)가 또 가로되 불도(佛道)는 부사의하나니 누가 능히 불()을 사의(思議)하겠는가(화엄23. 佛道諸佛로 지었음). 또 불타가 문수사리에게 물어 가로되 네가 부사의삼매(不思議三昧)에 들었느냐. 문수가 가로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내가 곧 부사의인지라 유심(有心)히 능히 사의하는 자를 보지 못하거늘 어찌하여(云何) 부사의삼매에 들었느냐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처음 발심하여 이 정()에 들고 싶었으나 여금에 사유(思惟)컨대 실로 심상(心想)이 없어서 삼매에 듭니다. 예컨대() 사람이 학사(學射; 射術을 배움)하매 오래 익히면 곧 교묘해져서 후에 비록 무심(無心)하더라도 구습(久習)을 쓰는() 연고로 화살을 발사하면 모두 적중(的中)합니다. 나도 또한 이와 같아서 처음 부사의삼매(不思議三昧)를 배우면서 일연(一緣)에 계심(繫心)하고 만약 오래 익히면 성취하나니 다시 심상(心想)이 없어도 늘 정()과 더불어 함께합니다(文殊般若經下). 불타와 조사가 수용(受用)하는 바의 곳은 무이무별(無二無別)합니다. 근년(近年) 총림에 일종의 사선(邪禪)이 있어 폐목장정(閉目藏睛; 눈 감고 눈동자를 감춤)하고 취로도지(觜盧都)로써 망상을 지으면서 이를 일러 부사의사(不思議事)라 하고 또한 이를 일러 위음나반(威音那畔)ㆍ공겁이전사(空劫已前事)라 합니다. 겨우 입을 열면 바로 불러 짓되 금시에 떨어졌다(落今時) 하며 또한 이를 일러 근본상사(根本上事)라 하며 또한 이를 일러 정이 지극해 광이 통달한다(淨極光通達)고 하며 깨침을 제2(第二頭)에 떨어져 있음이라 하며 깨침을 지엽변사(枝葉邊事)라 합니다. 대개(大蓋; ) ()는 처음 걸음을 뗐을 때(發步時) 바로 틀려버렸습니다. 또한 이 착()을 알지 못하고 깨침을 건립이라 합니다. 이미 스스로 오문(悟門)이 없으니 또한 깨침이 있는 자를 불신합니다. 저반지(這般底; 이런 것)를 일러 대반야를 비방하고 불혜명(佛慧命)을 끊음이라 하나니 천불(千佛)이 출세하더라도 참회가 통하지 않습니다. 좌우는 사람을 감험(勘驗; )하는 눈을 갖춘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등의 무리는 사자피(師子皮)을 입고(披却) 야간명(野干)을 지음이니 알지 않음은 옳지 못합니다. ()가 좌우와 비록 승안(承顔)하여 접론(接論)하진 못했지만 차심(此心)은 이미 묵묵히 상계(相契)한 지 여러 해입니다. 이 앞(前此)에 답한 글자에 극히 여례(如禮)하지 못함이 있어 지금 오로지 법공선인(法空禪人)을 보내어 대신(代身; ) 가서 치경(致敬; 恭敬을 드림)합니다. 고로 선사유삼매(善思惟三昧)에 들 여가가 없어() 다만 이렇게 신수신의(信手信意)하면서 불각에 갈등이 여허(如許; 허다)했습니다. 애오라지 불민(不敏)을 사과(謝過; )할 따름입니다.

太尉; 고대에 군사(軍事)를 집장(執掌)하는 최고의 관직이었음. ()에서 처음 설치했고 한초(漢初)에는 따라서 썼으나 한무제 이후 혹은 폐하기도 하고 혹은 두기도 했음. 후에는 일반의 무관의 존칭으로 쓰였음. 권서9(權書九) 한고조가 가로되 주발(周勃)은 중후하지만 문장이 적다. 그러나 유씨(劉氏)를 안정하는 것은 반드시 주발이니 가히 태위(太尉)로 삼게 하라. 송사168(宋史一六八) 태위로써 무선(武選)의 일품(一品)으로 삼아 절도사의 위에 위치케 했다.

造物; 만물을 창조함을 가리킴. 또한 만물을 창조하는 신력을 가리킴.

至尊; 가장 존귀함. 황제의 대칭(代稱)으로 사용함.

觜盧都; 또 취로도(嘴盧都)로 지음. 두구무언의 모양. 로도(盧都)는 아래로 처진 모양.

野干; 조정사원7. 범어로 이르되 실가라(悉迦羅)는 여기 말로는 야간(野干)이며 또 이름이 야간(夜干)이며 혹은 야간(射干)이다. 색은 청황이며 개와 같이 떼 지어 다니며 밤에 울면 그 소리가 이리와 같다. 또 야간은 형체가 작고 꼬리가 크며 능히 나무에 오르되 마른 가지로 의심되면 오르지 않는다. 여우는 곧 형체가 크고 얼음으로 의심되면 건너지 않으며 능히 나무에 오르지 못한다.

承顔; 존장(尊長)의 안색을 순승(順承). 이르자면 존장을 시봉함.

 

大慧普覺禪師書卷第二十九

 

大慧普覺禪師書卷第三十

宋徑山能仁禪院住持嗣法慧日禪師臣蘊聞 上進

答榮侍郞茂實

承 留心欲究竟此一段大事因緣 旣辦此心 第一不要急 急則轉遲矣 又不得緩 緩則怠墮矣 如調琴之法 緊緩要得中 方成曲調 但向日用應緣處 時時覷捕 我這箇能與人決斷是非曲直底 承誰恩力 畢竟從甚麽處流出 覷捕來覷捕去 平昔生處路頭自熟 生處旣熟則熟處却生矣 那箇是熟處 五陰六入十二處十八界二十五有 無明業識思量計較心識 晝夜熠熠 如野馬無暫停息底是 這一絡索 使得人流浪生死 使得人做不好事 這一絡索旣生 則菩提涅槃眞如佛性便現前矣 當現前時亦無現前之量 故古德契證了便解道 應眼時若千日 萬象不能逃影質 應耳時若幽谷 大小音聲無不足 如此等事 不假他求 不借他力 自然向應緣處活鱍鱍地 未得如此 且將這思量世間塵勞底心 回在思量不及處 試思量看 那箇是思量不及處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只這一字 儘爾有甚麽伎倆 請安排看 請計較看 思量計較安排 無處可以頓放 只覺得肚裏悶心頭煩惱時 正是好底時節 第八識相次不行矣 覺得如此時 莫要放却 只就這無字上提撕 提撕來提撕去 生處自熱 熱處自生矣 近年以來 叢林中有一種唱邪說爲宗師者 謂學者曰 但只管守靜 不知守者是何物 靜者是何人 却言靜底是基本 却不信有悟底 謂悟底是枝葉 更引僧問仰山曰 今時人還假悟也無 仰山曰 悟則不無 爭奈落在第二頭 癡人面前不得說夢 便作實法會 謂悟是落第二頭 殊不知 潙山自有警覺學者之言 直是痛切 曰研窮至理 以悟爲則 此語又向甚處著 不可潙山疑誤後人要敎落在第二頭也 曹閣使亦留心此事 恐其被邪師輩所誤 比亦如此書 忉忉怛怛寫 與此公聰明識見 有大過人處 決不到錯認方便語作實法會 但某未得與之目擊 私憂過計耳 聞老居士亦與之是道友 因筆不覺葛藤 無事相見時 試問渠取書一看 方知妙喜相期 不在眼底 彼此氣義相投 又非勢利之交 寫了一紙 紙盡又添一紙 不暇更事形迹 此書亦如是 前書託是箇中人 故曰 切不可道老老大大著甚來由 若如此則好事在面前 定放過矣 寫時雖似率易 然亦機感相投 亦不覺書在紙上 公信得妙喜及 便把做事日用應緣處 便恢張此箇法門 以報聖主求賢安天下之意 眞不負其所知也 願種種堪忍 始終只如今日做將去 佛法世法打作一片 且耕且戰 久久純熟 一擧而兩得之 豈非腰纏十萬貫騎鶴上揚州乎

六入; 又作六處 指眼耳鼻舌身意等六根 或色聲香味觸法等六境 六根爲內之六入 六境爲外之六入 總稱十二入 亦作十二處 入者 涉入趨入之義 處者 所依之義 此六根六境互相涉入而生六識 故稱入 六根六境爲生六識之所依 故稱處 [大乘義章四 法界次第中之下]

十二處; 指六根加六境 又作十二入 十二入處 處乃養育生長之意 卽長養心心所之法 計分爲十二種 乃眼 耳 鼻 舌 身 意 色 聲 香 味 觸 法等處 前六處爲六根 爲心心所之所依 有六內處之稱 後六處爲六境 爲心心所之所緣 稱六外處 [雜阿含經十三 大毘婆沙論七十一]

十八界; 界爲種類種族之義 謂十八種類自性各別不同 故稱十八界 又作十八持 卽眼 耳 鼻 舌 身 意等六根 及其所對之色 聲 香 味 觸 法等六境 以及六根緣對六境 所生之眼 耳 鼻 舌 身 意等六識 合稱爲十八界 [大毘婆沙論七十一 俱舍論一] 大乘五蘊論 復有十八界 謂眼界色界眼識界 耳界聲界耳識界 鼻界香界鼻識界 舌界味界舌識界 身界觸界身識界 意界法界意識界

二十五有; 由因必得果 因果不亡 故稱爲有 天台四敎儀曰 言二十五有者 四洲 四惡趣 六欲 幷梵天 四禪 四空處 無想 五那含(四洲四趣成八 六欲天幷梵王天成十五 四禪四空處成二十三 無想天及那含天成二十五) 別則二十五有 總則六道生死

影質; 謂心中映像所據以産生的外界事物

潙山; 靈祐(771-853) 唐代僧 爲潙仰宗始祖 福州長溪(今福建省霞浦縣南)人 俗姓趙 法名靈祐 十五歲隨建善寺法常(又稱法恆)律師出家 於杭州龍興寺受具足戒 曾先後遇寒山拾得 二十三歲至江西參謁百丈懷海 爲上首弟子 於此頓悟諸佛本懷 遂承百丈之法 憲宗元和末年 棲止潭州大潙山 山民感德 群集共營梵宇 由李景讓之奏請 敕號同慶寺 其後(一說大中初年)相國裴休亦來諮問玄旨 聲譽更隆 禪侶輻輳 海衆雲集 會昌(841-846)法難之際 師隱於市井之間 至大中元年(847)復敎之命下 衆迎返故寺 巾服說法 不復剃染 裴休聞之 親臨勸請 始歸緇流 師住山凡四十年 大揚宗風 世稱潙山靈祐 大中七年正月示寂 壽八十三 臘六十四 諡號大圓禪師 有語錄警策各一卷傳世 嗣法弟子有仰山慧寂 承其後而集大成 世稱潙仰宗 [福建高僧傳一 宋高僧傳十一 傳燈錄九 聯燈會要七]

過計; 過多的考慮

箇中人; 指能領悟禪法之人

老老大大; 對年老者的譏刺語 隱含恁麽年老 猶不明悟之義

機感; 衆生有善根之機 而感佛也 又衆生有善根之機 故佛感應之也

; 承受 表示感謝(多用於書信)

恢張; 擴大 發揚

聖主; 聖君 聖 對帝王的尊稱

 

영시랑(榮侍郞)에게 답하다茂實

(; 承受. 接受)했습니다. 유심(留心)하여 이 일단(一段)의 대사인연(大事因緣)을 구경(究竟)하고 싶다 하셨습니다. 이미 차심(此心)을 판비(辦備; )했으니 첫째 급함을 요하지 말아야 하나니 급하면 곧 더욱() 더딥니다. 또 느슨함()을 얻지 말아야 하나니 느슨하면 곧 태타(怠墮; 懈怠. 懶惰)합니다. 조금지법(調琴之法)과 같아서 긴완(緊緩)에 득중(得中)함을 요하나니 비로소 곡조를 이룹니다. 단지 일용의 응연처(應緣處)를 향해 시시로 처포(覷捕)하되 나의 저개(這箇)가 능히 사람과 시비곡직(是非曲直)을 결단(決斷)하는 것()은 누구의 은력(恩力)을 승수(承受; )했으며 필경 어느 곳으로 좇아 유출(流出)했는가. 처포(覷捕)하여 오고 처포하여 가되 평석(平昔)에 생처로두(生處路頭; 생소한 곳의 路頭)를 스스로 익혀야 합니다. 생처(生處; 생소한 곳)가 이미 익숙하면 곧 숙처(熟處)는 도리어 생소합니다. 어느 것(那箇)이 이 숙처인가. 5(五陰; 五蘊)6(六入)12(十二處)18(十八界)25(二十五有)와 무명의 업식과 사량하고 계교하는 심식이 주야로 습습(熠熠; 빛나는 모양)함이 야마(野馬; 아지랑이)가 잠시도 정식(停息)함이 없음과 같은 게 이것입니다. 이 일낙삭(一絡索)이 사람으로 하여금 생사에 유랑하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불호사(不好事)를 짓게 합니다. 이 일낙삭(一絡索)이 이미 생소하면 곧 보리ㆍ열반ㆍ진여ㆍ불성이 바로 현전(現前)합니다. 현전함을 당했을 때 또한 현전한다는 헤아림()이 없습니다. 고로 고덕(古德)이 계증(契證)하고 나서 바로 말할 줄 알았으니 눈에 응할 때 천일(千日)과 같아서() 만상(萬象)이 능히 영질(影質)을 도피하지 못하고 귀에 응할 때 유곡(幽谷)과 같아서 대소(大小)의 음성이 부족함이 없다. 이와 같은 등의 일은 남에게 구함을 빌리지() 않으며 타력(他力)을 빌리지() 않나니 자연히 응연처(應緣處)를 향해 활발발지(活鱍鱍地)입니다. 이와 같음을 얻지 못했다면 다만() 이 세간을 사량하는 진로(塵勞)의 마음을 가져다 돌이켜 사량이 미치지 않는 곳에 두고() 시험 삼아 사량해 보십시오. 나개(那箇)가 이 사량이 미치지 않는 곳입니까. 중이 조주(趙州)에게 묻되 구자(狗子)는 도리어 불성이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주운(州云) 없다(). 다만 이 일자(一字; )를 그대()가 무슨 기량(伎倆)이 있음을 다하여() 청컨대 안배(安排)해 보십시오. 청컨대 계교(計較)해 보십시오. 사량ㆍ계교ㆍ안배를 가이(可以) 돈방(頓放; 도 또한 의 뜻)할 곳이 없습니다. 다만 두리(肚裏)가 답답하고() 심두(心頭)가 번뇌함을 각득(覺得)할 때 바로 이 좋은 시절이니 제8(第八識)이 상차(相次; 順次)로 행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음을 각득(覺得)할 때 방각(放却)함을 요하지 말고 다만 이 무자상(無字上)으로 나아가 제시(提撕)하십시오. 제시하여 오고 제시하여 가면 생소한 곳은 저절로 익숙해지고 익숙한 곳은 저절로 생소해질 것입니다. 근년(近年) 이래로 총림 중에 일종의 사설(邪說)을 창()하며 종사가 된 자가 있습니다. 학자에게 일러 가로되 단지(但只) 관대(管帶; )하여 수정(守靜)하라 하거니와 알지 못하나니 수자(守者)는 이 무슨 물건이며 정자(靜者)는 이 어떤 사람입니까. 도리어 말하되 정하는 것(靜底)이 이 기본이라 하니 도리어 깨치는 것(悟底)이 있음을 믿지 않습니다. 이르되 깨치는 것(悟底)은 이 지엽(枝葉)이라 하며 다시 인용하되, 중이 앙산(仰山)에게 물어 가로되 금시(今時)의 사람이 도리어 깨침을 빌립니까 또는 아닙니까. 앙산이 가로되 깨침은 곧 없지 않으나 제2(第二頭)에 떨어져 있음을 어찌하겠는가. 치인(癡人)의 면전에서 설몽(說夢)함을 얻지 못하나니 바로 실법(實法)으로 이회함을 짓습니다. 이르자면 깨침은 이 제2두에 떨어진다 함이니 너무 알지 못합니다. 위산(潙山)이 스스로 학자를 경각(警覺)한 말이 있나니 바로 이 통절(痛切)합니다. 가로되 지리(至理)를 연궁(研窮)함은 깨침으로써 법칙을 삼는다. 차어(此語)를 또 어느 곳을 향해 붙이겠습니까. 위산이 후인을 의오(疑誤; 의심케 하고 잘못되게 함)하여 제2두에 떨어져 있게 하려고 했다 함은 옳지 못합니다. 조각사(曹閣使)도 또한 차사(此事)에 유심(留心)하거니와 그가 사사배(邪師輩)가 그르치는 바(所誤)를 입을까 염려됩니다. 요즈음() 또한 이 글과 같이() 도도달달(忉忉怛怛)하며 서사(書寫)했습니다. 그리고() 차공(此公)은 총명한 식견(識見)이 사람을 크게 초과하는 곳이 있으니 결코 방편어(方便語)를 착인(錯認)하여 실법(實法)으로 이회함을 지음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모()가 그와 목격(目擊)함을 얻지 못한지라 사사로이 근심하며() 과계(過計)할 따름입니다. 듣건대 노거사(老居士)도 또한 그와(與之) 이 도우(道友)라 하니 붓으로 인해 불각에 갈등했습니다. 무사(無事)하여 상견할 때 시험 삼아 거()에게 물어 취서(取書)하여 한 번 보십시오. 묘희가 상기(相期; 期待하다)함이 눈에(眼底) 있음이 아니라 피차(彼此) 기의(氣義; 意氣)가 상투(相投)했으며 또 세리(勢利)의 교유(交遊; )가 아님을 바야흐로 알 것입니다. 일지(一紙)를 서사(書寫; )하고 나서 종이가 다하면 또 일지(一紙)를 더하면서 다시 형적(形迹)에 종사(從事;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不暇). 차서(此書)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전서(前書)는 이 개중인(箇中人)에게 기탁(寄託; )한지라 고왈(故曰) 간절히, 노로대대(老老大大)가 무슨 내유를 이루는가(著甚來由) 라고 말함은 옳지 않습니다. 만약 이와 같다면 곧 호사(好事)가 면전(面前)에 있거늘 결정코 방과(放過)함입니다. 사시(寫時)에 비록 솔이(率易; 率直하고 平易)한 것 같지만 그러나 또한 기감(機感)이 상투(相投)하는지라 또한 불각에 지상(紙上)에 글을 써 두었습니다. ()이 묘희를 믿어 미침을 얻음을 승수(承受; )하여 바로 주사(做事)하는 일용의 응연처(應緣處)를 잡아 바로 차개(此箇) 법문을 회장(恢張)하여 성주(聖主), 구현(求賢)하여 천하를 안녕하게 하는 뜻에 보답하니 참으로 그 소지(所知)를 등지지 않음입니다. 바라건대 갖가지를 감인(堪忍)하여 시종(始終) 다만 금일과 같이 지어 가지고 가서(做將去) 불법과 세법(世法)을 일편(一片)으로 타작(打作; 짓다)하고 차경차전(且耕且戰; 또 경작하고 또 전투하다)한다면 구구(久久)에 순숙(純熟)하고 일거(一擧)에 양득(兩得)하리니 어찌 허리에 십만관(十萬貫)를 묶고 학을 타고 양주(揚州)에 오름이 아니겠습니까.

六入; 6()로 지음. 안ㆍ이ㆍ비ㆍ설ㆍ신의 등 6근이나 혹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 등 6경을 가리킴. 6근은 속의 6()이 되고 6경은 밖의 6()이 됨. 총칭이 12입이며 또 12()로 지음. ()이란 것은 섭입추입(涉入趨入)의 뜻이며 처()란 것은 소의(所依)의 뜻임. 6()6()이 호상 섭입하여 6식을 생기(生起)하는지라 고로 명칭이 입()이며 6근과 6경이 6식을 생기하는 소의(所依)가 되는지라 고로 명칭이 처()[대승의장4. 법계차제중지하].

十二處; 6근에 6()을 가함을 가리킴. 12()12입처(入處)로 지음. ()는 곧 양육ㆍ생장의 뜻이니 심()ㆍ심소(心所)의 법을 장양(長養)함임. 계분(計分)하면 12종이 되나니 곧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ㆍ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 등의 처(). 6()6()이 되고 심ㆍ심소의 소의(所依)가 되며 6내처(內處)의 명칭이 있음. 6()6()이 되고 심ㆍ심소의 소연(所緣)이 되며 명칭이 6외처(外處)[잡아함경13. 대비바사론71].

十八界; ()는 종류ㆍ종족의 뜻이 됨. 이르자면 18종류의 자성이 각별하여 같지 않은지라 고로 명칭이 18계임. 18()로 지음. 곧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 등 6() 및 그 소대(所對)의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 등 6() 그리고 6근이 6경을 연대(緣對)하여 소생(所生)하는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 등의 6()을 합칭하여 18계라 함 [대비바사론71. 구사론1]. 대승오온론. 다시 18계가 있다. 이르자면 안계ㆍ색계ㆍ안식계, 이계ㆍ성계ㆍ이식계, 비계ㆍ향계ㆍ비식계, 설계ㆍ미계ㆍ설식계, 신계ㆍ촉계ㆍ신식계, 의계ㆍ법계ㆍ의식계다.

二十五有; 인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과를 얻으며 인과가 망하지 않는지라 고로 호칭하여 유()라 함. 천태사교의에 가로되 말한 25유란 것은 4()4악취(惡趣)6() 아울러 범천ㆍ4()4공처(空處)ㆍ무상(無想)5나함(那含)이다(44취가 8을 이루고 6욕천과 아울러 범왕천이 15를 이루고 44공처가 23을 이루고 무상천 및 나함천이 25를 이룸). ()은 곧 25()며 총()은 곧 육도생사(六道生死).

影質; 이르자면 심중의 영상(映像)에 의거한 바로 산생하는 외계의 사물.

潙山; 영우(靈祐; 771-853)니 당대승. 위앙종(潙仰宗)의 시조(始祖)가 됨. 복주 장계(長溪. 지금의 복건성 하포현의 남쪽) 사람이니 속성(俗姓)은 조()며 법명은 영우(靈祐). 15세에 건선사 법상(法常; 또 칭호가 法恆)율사를 따라 출가했으며 항주 용흥사(龍興寺)에서 구족계를 받았음. 일찍이 선후(先後)로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을 만났으며 23세에 강서에 이르러 백장회해(百丈懷海)를 참알(參謁)해 상수제자(上首弟子)가 되었음. 여기에서 제불의 본회(本懷)를 돈오(頓悟)했으며 드디어 백장의 법을 승계했음. 헌종 원화 말년에 담주(潭州)의 대위산(大潙山)에 서지(棲止)했는데 산민(山民)이 감덕(感德)하여 무리가 모여 범우(梵宇; . 사원)를 함께 지었음. 이경양(李景讓)의 주청(奏請)으로 말미암아 동경사(同慶寺)라 칙호(敕號)했음. 그 후(一說大中初年) 상국(相國) 배휴(裴休)가 또한 와서 현지(玄旨)를 자문(諮問)하자 성예(聲譽)가 더욱 융성했으며 선려(禪侶)가 복주(輻輳)하여 해중(海衆)이 운집했음. 회창(會昌; 841-846)의 법난(法難)의 즈음에 스님이 시정(市井)의 사이에 은거하다가 대중 원년(847)에 복교(復敎)의 명이 떨어짐에 이르러 대중이 영접하여 옛 절로 돌아갔으나 건복(巾服; 옷갓)으로 설법하고 다시 체염(剃染)하지 않았음. 배휴가 이를 듣고 친림(親臨)하여 권청(勸請)하자 비로소 치류(緇流; 僧徒)로 돌아왔음. 스님이 산에 머문 무릇 40년에 종풍을 크게 날려 세칭이 위산영우(潙山靈祐). 대중 7년 정월에 시적(示寂)했음. 나이는 83이며 납(. 僧臘)64. 시호는 대원선사(大圓禪師)며 어록과 경책(警策) 1권이 있어 세상에 전해짐. 법을 이은 제자에 앙산혜적(仰山慧寂)이 있어 그 뒤를 이어 집대성(集大成)했으니 세칭이 위앙종(潙仰宗)[복건고승전1. 송고승전11. 전등록9. 연등회요7].

過計; 과다(過多)한 고려(考慮).

箇中人; 능히 선법을 영오(領悟)하는 사람을 가리킴.

老老大大; 연로한 자에 대한 기자어(譏刺語: 헐뜯고 비꼬아서 하는 말). 이렇게 연로하면서 오히려 밝게 깨치지 못했는가 하는 뜻을 은함(隱含)하였음.

機感; 중생이 선근의 기()가 있어 부처를 감(). 또 중생이 선근의 기()가 있는지라 고로 불타가 그에 감응함.

; 승수(承受)니 감사를 표시(다분히 書信에 씀).

恢張; 확대(擴大). 발양(發揚).

聖主; 성군. 성은 제왕에 대한 존칭.

 

示諭 鐘鳴漏盡之譏 爲君上盡誠 而下安百姓 自有聞絃賞音者 願公凡事堅忍 當逆順境 政好著力 所謂將此深心奉塵刹 是則名爲報佛恩 平昔學道 只要於逆順界中受用 逆順現前而生苦惱 大似平昔不曾向箇中用心 祖師曰 境緣無好醜 好醜起於心 心若不彊名 妄情從何起 妄情旣不起 眞心任遍知 請於逆順境中 常作是觀 則久久自不生苦惱 苦惱旣不生 則可以驅魔王作護法善神矣 前此老老大大著甚來由之說 言猶在耳 豈忘之耶 欲識佛性義 當觀時節因緣 以居士前十餘載閑 自有閑時時節 今日仕權在手 便有忙底時節 當念閑時是誰閑 忙時是誰忙 須信忙時却有閑時道理 閑時却有忙時道理 正在忙中 當體主上起公之意 頃刻不可暫忘 自警自察 何以報之 若常作是念 則鑊湯鑪炭刀山劍樹上 亦須著向前 況目前些小逆順境界耶 與公以此道相契 故不留情 盡淨吐露

鐘鳴漏盡; 暮鍾已經敲完 漏水的壺也將滴完 比喻年老力衰 已到晚年 也指深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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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유(示諭)하되 종명누진(鐘鳴漏盡)이라고 기롱(譏弄; )하지만 군상(君上; 君主)을 위해 충성(忠誠; )을 다하고 아래론 백성을 안녕케 함이라 하시니 저절로 문현(聞絃; 현악기의 소리를 듣다)하고 상음(賞音)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공()은 범사(凡事)에 견인(堅忍)하고 역순경(逆順境)에 당하여 정호(政好; 正好) 착력(著力)하십시오. 이른 바 이 심심(深心)을 가지고 진찰(塵刹)을 받들어야 이를 곧 이름하여 불은에 보답함이다(릉엄경3). 평석(平昔)에 학도(學道)하면서 다만 역순계(逆順界; 역순경계) 가운데서 수용(受用)함을 요하나니 역순이 현전(現前)하매 고뇌(苦惱)를 낸다면 대사(大似; 극히 相似) 평석에 일찍이 개중(箇中)을 향해 용심(用心)하지 않은 것입니다. 조사(祖師; 4道信)가 가로되 경연(境緣)은 호추(好醜)가 없나니 호주는 마음에서 일어난다. 마음을 만약 억지로 이름하지 않는다면 망정(妄情)이 어디로 좇아 일어나겠는가. 망정이 이미 일어나지 않으니 진심(眞心)만 편지(遍知)함에 맡긴다(이상 4조의 말). 청컨대 역순경중(逆順境中)에서 늘 이 관()을 지으십시오. 곧 구구(久久)하면 저절로 고뇌가 생기지 않으며 고뇌가 이미 생기지 않으니 곧 가이(可以) 마왕(魔王)을 몰아() 호법선신(護法善神)이 되게 할 것입니다. 이 앞(前此)에 노로대대(老老大大)가 무슨 내유을 이루는가(著甚來由)라고 설()한 말이 아직 귀에 있거늘 어찌 이()를 잊겠습니까. 불성의 뜻을 알고 싶다면 마땅히 시절인연을 관()하라 했습니다. 거사(居士)가 앞 십여(十餘) ()에 한가했으니 저절로 한시(閑時)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금일 사권(仕權; 벼슬의 權勢)이 손에 있으니 바로 바쁜(忙底) 시절이 있습니다. 마땅히 사념하되 한시(閑時)엔 이 누가 한()하며 망시(忙時)엔 이 누가 망()한가. 모름지기 믿을지니 망시(忙時)에 도리어 한시(閑時)의 도리가 있고 한시(閑時)에 도리어 망시(忙時)의 도리가 있습니다. 바로() 망중(忙中)에 있으면서 당체(當體)의 주상(主上; 은 방면을 표시)에 공()의 뜻을 일으켜 경각(頃刻)에라도 가히 잠망(暫忘; 잠시 잊다)하지 않고 자경자찰(自警自察)하면서 무엇으로써 이에 보답할까 하십시오. 만약 늘 이 사념을 짓는다면 곧 확탕노탄(鑊湯鑪炭)과 도산검수(刀山劍樹) 위에서도 또한 꼭 붙어서 앞을 향할 것이거늘 하물며 목전의 사소(些小)한 역순경계(逆順境界)이겠습니까. ()과 이 도로써 상계(相契)한지라 고로 정()에 머물지 않고 진정(盡淨)하여 토로(吐露)합니다.

鐘鳴漏盡; 모종(暮鍾)은 이미 두드림을 경과해 마쳤고 누수(漏水)의 호(; 計時器를 가리킴)도 거의 물방울이 끝났음이니 연로하여 힘이 쇠약하고 이미 만년에 이르렀음에 비유함. 또한 심야(深夜)를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