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역해 오종록

집주역해(集註譯解) 오종록(五宗錄; 五家語錄) 卷四 洞山錄 29

태화당 2019. 9. 16. 10:03

師與泰首座 *冬節喫菓子次 乃問 *有一物 上拄天 下拄地 黑似漆 常在動用中 動用中收不得 且道 過在甚麽處 泰云 過在動用中 *同安顯別云 不知師喚侍者掇退菓卓 五祖戒別首座云 朝來*更獻楚王看 瑯琊覺云 若不是洞山老人 焉能辨得 雖然如是 洞山猶欠一著在 潙山喆云 諸人還知洞山落處麽 若也不知 往往作是非得失會去 山僧道 這菓子非但首座不得喫 假使盡大地人來 亦不得正眼覷著 *雲蓋本云 洞山雖有打破虛空鉗鎚 而無補綴底針線 待伊道 過在動用中 但道 請首座喫菓子 泰首座若是箇衲僧 喫了也須吐出 南堂靜云 洞山*坐籌帷幄 決勝千里 泰首座通身是口 有理難伸 *潙山果云 洞山壓良爲賤 泰首座有理難伸 山僧路見不平 要爲*雪恥 當時纔見與麽問 只向道 靈山授記 未到如此 待他擬議 拈菓子*劈面便擲 不唯塞斷咽喉 免見後人妄生卜度 *淨慈昌云 洞山雖然掇得菓卓去 要且塞泰首座口不得

冬節 卽指冬至之日

有一物 見上臨濟錄一物下

同安顯 同安紹顯禪師 嗣法眼文益

更獻楚王 事苑三云 楚人卞和獻玉於楚厲王 王曰 石也 遣使刖一足 及武王卽位 和又獻之武 武王復怒 又刖一足 至楚文王立 和抱璞哭於荊山之下 文王召而謂曰 刖足者 何怨乎 曰 不怨刖足 而怨眞玉以爲凡石 忠事以爲慢事 是以哭之 文王乃使工剖石 乃眞玉也 文王嘆曰 哀哉 二先君易刖人足 而難於剖石 令和果是璧 乃國寶也 見韓子 五燈全書十四 抱璞不須頻下淚 來朝獻楚王看 圓悟錄十九 堪笑卞和三獻玉 縱榮刖却一雙足

雲蓋本 雲蓋智本禪師 宋代楊岐派僧 嗣白雲守端 端嗣楊岐方會 住潭州雲蓋

坐籌帷幄 事苑七曰 漢高帝封功臣 或謂張良未嘗有戰鬪功 高帝曰 運籌策帷帳中 決勝千里外 子房功也

潙山果 大潙善果 宋代楊岐派僧 嗣開福道寧 寧嗣五祖法演 晩居大潙

雪恥 雪 洗 除 廣雅 雪 除也

劈面 劈 冲著 正對著

淨慈昌 淨慈道昌禪師 宋代雲門宗僧 雲門下八世 晩住淨慈寺

스님과 태수좌가 冬節菓子를 먹던 차에 곧 묻되 한 물건이 있어 위로는 하늘을 버티고 아래론 땅을 버티며 검기로는 칠과 같다. 動用하는 가운데 있지만 동용 가운데에서 거두려면 얻지 못한다. 그래 말하라, 허물이 어느 곳에 있느냐. 태가 이르되 허물이 동용 가운데 있습니다. 同安顯이 다르게 이르되 알지 못합니다. 스님이 시자를 불러 菓卓을 거두어 물리게 했다. 五祖戒가 수좌와 다르게 이르되 아침에 다시 楚王에게 바쳐 보겠습니다. 瑯琊覺이 이르되 만약 이 동산노인이 아니었다면 어찌 능히 분변하랴.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기는 하지만 동산이 오히려 일착이 모자란다. 潙山喆이 이르되 제인은 도리어 동산의 낙처를 아느냐. 만약에 알지 못하면 왕왕 시비와 득실로 알아 감을 짓는다. 산승이 말하나니 이 과자는 다만 수좌만이 먹음을 얻지 못함이 아니라 가사 온 대지 사람이 오더라도 또한 正眼으로 엿봄을 얻지 못한다. 雲蓋本이 이르되 동산이 비록 허공을 타파하는 (집게와 망치)가 있지만 보철할 針線이 없다. 그가 말하되 허물이 동용 가운데 있다 함을 기다렸다가 다만 말하기를 청컨대 수좌는 과자를 먹게나 했어야 하고 태수좌가 만약 이 납승이라면 먹고 나서 또한 반드시 토해 내었어야 하리라. 南堂靜이 이르되 동산은 휘장 안에 앉아 計謀하여 천 리에 승부를 결정했다. 태수좌는 온몸이 이 입일지라도 펴기 어려운 도리가 있다 하노라. 潙山果가 이르되 동산은 양민을 억압해 천민으로 삼았고 태수좌는 펴기 어려운 도리가 있었다. 산승이 길에서 평등하지 못함을 보고 요컨대 부끄러움을 씻어 주리라. 당시에 겨우 이러히 물음을 보았다면 다만 향해 말하되 영산의 수기가 이와 같음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했으리라. 그의(동산) 말하려 함을 기다렸다가 과자를 집어 얼굴에다 곧 던졌다면 오직 목구멍을 막아 끊음만이 아니라 후인의, 망령되이 헤아림 냄을 봄을 면했으리라. 淨慈昌이 이르되 동산이 비록 그렇게 菓卓을 거두어 갔지만 요컨대 다만 태수좌의 입을 막음을 얻지 못했다 하노라.

冬節 곧 동짓날을 가리킴.

有一物 위 임제록 一物 아래를 보라.

更獻楚王 事苑三에 이르되 나라 사람 卞和에게 옥을 바쳤다. 이 가로되 돌이로다 하고 使者를 보내 한 발을 잘랐다. 武王(재위 서기전 740~서기전 690)이 즉위하자 가 또 무왕에게 그것을 바쳤다. 무왕이 다시 노해 또 한 발을 잘랐다. 楚文王(재위 서기전 689~서기전 675)이 옹립됨에 이르러 가 옥덩이를 안고 荊山 아래에서 했다. 문왕이 불러서 일러 가로되 발을 베인 자야 무엇을 원망하는가. 가로되 발을 베임을 원망함이 아니라 眞玉凡石으로 삼고 忠事慢事(傲慢할 만)로 삼음을 원망함이니 이 때문에 그것을 곡합니다. 문왕이 이에 工人을 시켜 돌을 쪼개게 했는데 곧 진옥이었다. 문왕이 탄식하며 가로되 슬프다, 先君이 사람의 발을 쉬이 자르면서 돌을 쪼갬엔 어려워했도다. 변화에게 시키니 과연 이 璧玉은 곧 국보였다. 韓子(韓非子 和氏第十三)를 보라. 五燈全書十四 옥덩이를 안고 자주 눈물 흘림을 쓰지 말고 다음날에 다시 楚王에게 바쳐 보아라. 圓悟錄(圓悟佛果禪師語錄 二十卷 宋 紹隆等編)十九 가히 우습구나 변화는 세 번 옥을 바쳤나니 비록 영화로웠으나 한 쌍의 발이 잘려 버렸네.

同安顯 同安紹顯禪師니 법안문익을 이었음.

雲蓋本 雲蓋智本禪師니 송대 양기파의 승인임. 白雲守端을 이었으며 수단은 양기방회를 이었음. 潭州雲蓋에 머물렀음.

坐籌帷幄 事苑七에 가로되 漢高帝(재위 206~195)功臣을 책봉하자 누가() 이르기를 張良(?~서기전 168. 漢高祖功臣)은 일찍이 전투의 이 있지 않습니다. 고제가 가로되 籌策(利害打算한 끝에 생각해 낸 策略)帷帳(는 휘장 유) 중에서 움직여 천 리 밖에서 決勝한 것은 子房(張良)의 공이다(漢書卷四十에 나오는 말).

潙山果 大潙善果(1079~1152)니 송대 양기파의 승인임. 開福道寧을 이었으며 도녕은 오조법연을 이었음. 만년에 大潙에 거주했음.

雪恥 雪. . 광아 .

劈面 劈冲著. 正對著.

淨慈昌 淨慈道昌禪師(1089~1171)니 송대 운문종 승인이며 운문하 八世. 만년에 정자사에 머물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