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용록

종용록 제9칙 송

태화당 2022. 4. 25. 08:42

兩堂*雲水盡紛拏有理不在高聲 *王老師能驗正邪明鏡當臺物來斯鑑 利刀斬斷俱亡像消得龍王多少風 千古令人愛*作家有一人不肯 此道未喪死猫兒頭堪作何用 知音可嘉不道無只是少 鑿山透海兮唯尊*大禹功不浪施 鍊石補天兮獨賢*女媧闕一不可 趙州老有生涯信手拈來無不是 草鞋頭戴*較些些且信一半 *異中來也還明鑒衲子難謾 只箇眞金不混沙是眞難滅

 

雲水; 又稱雲水僧 雲衲 指爲尋師求道 至各地行脚參學之出家人 以其居無定所 悠然自在 如行雲流水 故以雲水喩之 雲水僧掛搭之居處稱雲水堂 或稱上客堂 專爲雲水僧所設之齋 則稱雲水齋 [永平淸規下 永平衆寮箴規]

王老師; 池州南泉之普願禪師 姓王氏 承馬祖之法 弘道於南泉 常自稱王老師

作家; 同作者 機用傑出的禪家高手

大禹; 禹 史稱大禹 帝禹 釋氏稽古略一 帝禹 姓姒氏 黃帝之孫 顓頊生鯀 鯀生禹 當堯之時洪水滔天 堯命鯀治水無功殛之死 舜攝位擧禹續父業 勞身焦思 居外十三年 過家之門不入 陸行乘車 水行乘船 泥行乘橇 山行乘梮 行相地所有以貢及山川之便利 於是水害皆息 九州攸同 四隩可居 堯於是錫禹玄圭 告其成功 舜卽正位 使禹爲司空 以宅百揆 天錫洪範九疇 彝倫攸敘 天與禹洛出書 神龜負文列于背 有數至于九 禹遂因而第之以成九類 舜之子商均不肖 舜薦禹於天使代己位 舜崩 天下之人不歸商均而歸禹 禹卽天子位 國號夏

女媧; 媧皇 是上古母系氏族時期聚落首領或部族首領 相傳是華胥氏之女 與伏羲是血親兼配偶 女媧被譽爲古神女而帝者 是炎黃二帝的母族 位列三皇五氏之一 [百度百科]

較些些; 同較些子 較 差也 些子 卽些少 謂有些少的差異也 兼帶否定與肯定兩意

異中; 異 指異類 一指佛果位以外之因位 如菩薩衆生之類 二畜生 此指二

 

양당(兩堂)의 운수(*雲水)가 모두 분라(紛拏; 混亂한 모양)하매 이치가 있음은 고성(高聲)에 있지 않다/ 왕노사(*王老師)가 능히 정사(正邪)를 시험했다 명경이 당대(當臺)하니 사물이 오면 이에 비춘다/ 이도(利刀)로 참단(斬斷)하니 모두 망상(亡像; 죽은 形像)이라 용왕의 다소의 바람을 소비했는가(消得)/ 천고(千古)에 사람으로 하여금 작가(*作家)를 사랑하게 한다 어떤 한 사람은 수긍하지 않는다/ 이 도가 죽지() 않아 죽은 고양이(死猫兒頭)를 차마 어디에 씀을 짓겠는가/ 지음(知音)이 가히 가상(嘉尙)하나니없다고 말함이 아니라 다만 이 적다/ 착산(鑿山)하고 투해(透海)함은 오직 대우(*大禹)를 존중하고 공을 헛되이 베풀지 않았다/ 연석(鍊石)하여 보천(補天)함은 오직() 여왜(*女媧)를 현명하게 여긴다 하나라도 궐()하면 옳지 못하다/ 조주로(趙州老)가 생애가 있어 손 닿는 대로 집어 오매 이것 아닌 게 없다/ 짚신을 머리에 이니() 조금은 상당하다(*些些) 다만 일반(一半; 절반)만 믿는다/ 이중(*異中; 異類中)에서 왔으니 도리어 명감(明鑒)하라 납자는 속이기 어렵다/ 다만 이 진금은 모래에 섞이지 않는다 이 진짜는 없애기 어렵다.

 

雲水; 또 명칭이 운수승, 운납(雲衲)이니 심사구도(尋師求道)하기 위해 각지에 이르면서 행각하며 참학하는 출가인을 가리킴. 그가 거처에 정한 곳이 없고 유연(悠然)하며 자재함이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은지라 고로 운수로 이에 비유함. 운수승이 괘탑(掛搭)하는 거처를 일컬어 운수당(雲水堂) 혹은 일컬어 상객당(上客堂)이라 하며 오로지 운수승을 위하여 베푸는 바의 재를 곧 일컬어 운수재(雲水齋)라 함 [영평청규하. 영평중료잠규]. .

王老師; 지주(池州) 남천(南泉)의 보원선사(普願禪師)는 성이 왕씨며 마조의 법을 승계했고 남천에서 홍도(弘道)했는데 늘 자칭이 왕노사였음.

作家; 작자와 같음. 기용이 걸출한 선가의 고수.

大禹; ()니 사칭(史稱)이 대우(大禹)ㆍ제우(帝禹). 석씨계고략1. 제우(帝禹) 성이 사씨(姒氏). 황제의 후손이다. 전욱이 곤()을 낳았고. 곤이 우()를 낳았다. ()의 시절에 당하여 홍수가 하늘에 넘쳤다. 요가 곤에게 치수(治水)하게 명했으나 공이 없이 귀양 보내 죽였다. ()이 섭위(攝位)하자 우()를 천거해 부업(父業)을 잇게 했다. 노신초사(勞身焦思)하며 외지에 거처하기 13년이었는데 집의 문을 지나가면서도 들지 못했다. 육행(陸行)에 수레를 타고 수행(水行)에 배를 타고 이행(泥行)에 썰매를 타고 산행(山行)에 국(; 나무 신발에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철침을 박은 것)을 탔다. 다니면서 토지의 소유를 살펴서 바치고 산천의 편리에도 미쳤다. 이에 수해가 다 쉬어져 9()가 같은 바였고 사방이 살 만해졌다. 요가 이에 우에게 현규(玄圭)를 주며 그 성공을 알렸다. 순이 정위(正位)에 즉위하고 우를 시켜 사공(司空)을 삼았고 백규(百揆; 百官)를 정했다. 하늘이 홍범구주(洪範九疇; 가 정한 정치 도덕의 아홉 원칙. 는 무리 주. 이랑 주)를 주어 이륜(彝倫; 은 떳떳할 이)을 베풀었다. 하늘이 우에게 낙()에서 나온 서()를 주었는데 신귀(神龜)가 등에 나열된 문()을 졌다. ()가 있어 9에 이르렀으며 우가 드디어 인유하여 그것을 편차(編次; )하여 9()를 만들었다. 순의 아들 상균(商均)이 불초(不肖; 는 닮을 초)하여 순이 천하에 우를 천거하여 자기의 자리를 대신케 했다. 순이 붕어하자 천하의 사람들이 상균에게 귀의하지 않고 우에게 귀의했다. 우가 천자의 자리에 즉위하여 국호를 하()라 했다.

女媧; 왜황(媧皇)이니 이는 상고의 모계씨족 시기에 취락의 수령이나 혹 부족의 수령임. 서로 전하기를 이는 화서씨(華胥氏)의 딸이라 하며 복희(伏羲)와는 이 혈친이면서 겸해 배우자라 함. 여왜는 옛 신녀이면서 제()가 되었다는 명예를 입은 자임. 이는 염()ㆍ황() 2()의 모족(母族)이 되며 지위가 삼황오씨(三皇五氏)의 하나에 늘어섬 [백도백과].

較些些; 교사자(較些子)와 같음. ()는 차()며 사자(些子)는 곧 사소임. 이르자면 사소한 차이가 있음. 부정과 긍정의 두 뜻을 겸대함.

異中; ()는 이류(異類)를 가리킴. 1. 불과위(佛果位) 이외의 인위(因位)를 가리킴이니 보살과 중생의 무리 같은 것임. 2. 축생(畜生). 여기에선 2를 가리킴.

 

師云 兩堂雲水盡紛拏 至今不曾*定交 若非天童會南泉例驗出*端倪 往往邪正不分 邪正分明時如何判斷 便好利劍斬斷一坑埋却 非但*勦絕一期不了公案 亦使千古之下風淸*寰宇 南泉當時師勝資强 見衆無語 却擧似趙州 表顯衆中有人 趙州脫草鞋頭上戴出 果然此道未喪 知音可嘉 *孔子云 天將*未喪斯文也 看他師資道合 唱拍相隨 無以爲喻 *諡法 泉源流通曰禹 又*受禪成功曰禹 *尙書*禹貢 導河積石至於*龍門 *淮南子 共工氏兵强兇暴 而與堯帝爭功 力窮觸*不周山而死 天柱爲之折 女媧鍊五色石 補天 *列子 陰陽失度名缺 鍊*五常之精名補 *雲蓋本*洞山掇却泰首座果棹話云 洞山雖有打破虛空底鉆鎚 要且無補綴底*針線 南泉如大禹鑿山透海 顯出神用 趙州如女媧鍊石補天 圓却*話頭 萬松道 趙州*十八上解破家散宅 不知有多少生涯 草鞋頭戴較些些 咄咄沒去處 作這箇去就 *保福展云 雖然如是 也只是破草鞋 南泉*平高就下道 子若在恰救得猫兒 翠巖芝云 *大小趙州只可自救 *放過*一著 天童道 異中來也還明鑒 只箇眞金不混沙 只能順水推舡 不解逆風把柁 而今爾這一隊上來 猫又無 爭甚狗 以拄杖*趁下

 

定交; 停止 罷休

端倪; 事情的頭緒

勦絕; 消滅 滅絕

寰宇; 寰內 天下 全世界

孔子; (551-479) 宗統編年四 周靈王庚戌二十一年(551) 儒敎聖人孔子生於魯 夾注云 十一月初四日 生于魯國兗州鄒邑縣平鄕晉昌里 按殷本紀 孔子父姓叔梁 名紇 爲鄒邑縣宰 先娶鄒氏女 生子孟皮 不才 後娶顔氏女曰徵在 禱于尼邱山神 而生孔子 生而有髮 身長九尺六寸 腰帶十圍 垂手過膝 河眸海口 龍顔方顙 鳳顒燕頷 虬髭虎視 有中和之德 衣莊而嚴 色溫而厲 有四十二表 自易姓曰孔 名丘 字仲尼 先祖殷之後裔 穎考叔弗何 至紇移居魯 易姓叔梁 孔子追昔殷宋之後 以子配一 更姓孔氏 佛祖統紀五十四 周靈王二十一年(551) 十一月庚子 孔子生魯陬邑 景王十年(535) 孔子朝周 問禮於老子 敬王十九年(501) 爲魯中都宰 二十一年爲司空 二十二年爲大司寇 誅少正卯墮三都 魯定公受齊女樂 三日不聽政 孔子遂適衛 三十六年(484)自衛反魯 刪詩定書繫周易作春秋 以曾參孝爲作孝經 三十九年 哀公西狩獲麟 孔子傷麟出非時 遂絶筆於春秋 四十一年(479)四月乙丑 孔子卒 葬泗水上 弟子三千人 身通六藝者七十二人

未喪斯文; 祖庭事苑四 斯文 子畏於匡(論語集註 匡 地名 史記云 陽虎曾暴於匡 夫子貌似陽虎 故匡人圍之)曰 文王旣沒 文不在茲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出論語子罕)

諡法; 按死者行跡立號之法 以表彰其行爲事跡 始於周 廢於秦 漢時又恢複其法 沿至清末始廢 二書名 宋蘇洵奉詔編定 四卷 三稱號 [百度漢語] 此指一

受禪; 禪讓制 是中國上古時期推擧部落首領的一種方式 卽部落各個人表決 以多數決定 相傳堯爲部落聯盟領袖時 四嶽推擧舜爲繼承人 堯對舜進行三年考核後 使幫助辦事 堯死後 舜繼位 用同樣推舉方式 經過治水考驗 以禹爲繼承人 [百度漢語]

尙書; 又稱書 書經 是一部多體裁文獻彙編 長期被認爲是中國現存最早的史書 但是淸華簡證明傳世的尙書 部分僞古文尙書 部分爲僞書 該書分爲虞書 夏書 商書 周書 戰國時期總稱書 漢代改稱尙書 卽上古之書 因是儒家五經之一 內容主要是君王任命官員或上次諸侯時發布的政令

禹貢; 尙書夏書的一篇 篇中把當時中國分爲九州 記述各區域的山川分布 交通 物産狀況以及貢賦等級等

龍門; 位於山西平陽河津 與陝西西安韓城縣境之黃河中流 其處山嶽對峙 形成門闕之狀 爲一天然險要之所 後漢書六十七 李膺 字元禮 潁川襄城人也 膺性簡亢 無所交接 唯以同郡荀淑陳寔爲師友 是時朝庭日亂 綱紀穨阤 膺獨持風裁 以聲名自高 士有被其容接者 名爲登龍門 祖庭事苑二 龍門 以魚爲喩也 龍門 河水所下之口 在今絳州龍門縣 龍門水險不通 魚鼈之屬莫能上 江海大魚集龍門下者 數千不得上 上卽爲龍 今士有被其容接者 名爲登龍門 事見東漢李膺傳

淮南子; 又名淮南鴻烈 劉安子 是西漢宗室淮南王劉安招致賓客 在他主持下編寫的 著錄內二十一篇 外三十三篇 內篇論道 外篇雜說 今存內二十一篇 以道家思想爲主 糅合了儒法陰陽等家 是戰國至漢初黃老之學理論體系的代表作 [百度百科]

不周山; 中國古代神話傳說中的山名 最早見於山海經大荒西經 西北海之外 大荒之隅 有山而不合 名曰不周 [百度百科]

列子; 戰國時鄭人 姓列 名禦寇 生卒年及事蹟皆不詳 約後於老子 先於莊子 卽西元前四世紀時 著有列子一書 崇奉道家之言 今證實此書大多爲後人之假託僞作 至於其人之有無 則尙待考證 然在中國思想體系與文學影響上 則將其與莊周竝列 世稱老 莊 關(尹子) 列爲道家四子 或稱四經

五常; 盂蘭盆經疏孝衡鈔上 五常者 謂仁義禮智信 好生惡殺曰仁 知恩報恩曰義 長幼恭勤曰禮 敏速多知曰智 立行可依曰信 又云 不殺爲仁 不盜爲義 不亂爲禮 不淫爲智 忠實爲信 由於此五 王者以之治國 君子以之立身 不可蹔亡謂之五常

雲蓋本; 雲蓋智本 宋代楊岐派僧 姓郭氏 瑞州人 嗣白雲守端 初住舒州龍門 樞密曾公請住南嶽法輪 高臺道林 晩遷潭州雲蓋 [續燈錄二十]

洞山掇却泰首座果棹話; 洞山良价語錄 師與泰首座 冬節喫菓子次 乃問 有一物 上拄天 下拄地 黑似漆 常在動用中 動用中收不得 且道 過在甚麽處 泰云 過在動用中 師喚侍者 掇退菓卓

針線; 指縫紉刺繡等工作

話頭; 公案中大多有一個字或一句話 供學人參究之用者 稱爲話頭 又話頭同話 頭 助詞 如念頭

十八上; 十八歲也 上 置數詞後表年齡 如五家正宗贊四芭蕉淸 師諱慧淸 嗣南塔 新羅人也 師謂衆曰 十八上到仰山 見南塔 碧巖錄第八十則 南泉云 我十八上解作活計 趙州道 我十八上解破家散宅

保福展; 保福從展(?-928) 五代僧 福州人 姓陳氏 年十五禮雪峰爲受業師 十八本州大中寺具戒 遊吳楚間 後歸執侍雪峰 嗣其法 梁貞明四年(918) 漳州刺史創保福院請居之 後唐明宗天成戊子三月二十二日入寂 [傳燈錄十九 五燈全書十四]

平高就下; 高 指向上尊貴 下 指第二義門

大小; 大與小 古尊宿語錄三十四龍門佛眼 問 虗空還有變異也無 代云 靑黃赤白 長短大小 同大小大 則偌大 這麽大 那麽大 碧巖錄不二鈔二 楞伽(竺仙)云 北方人欲議人之長短 詞端先言大小二字 於下必有譏誇之語也 或言大小大底人 意謂汝是大大底人 卻作這般瑣細小小底無伎倆事也 碧巖錄第一則種電鈔 大小者 北方罵人起頭之語 抑示現成明了的而無勦絶機 圓悟語錄十一 大小世尊龍頭蛇尾 置于句末 表疑問 相當于多 大 五燈會元七玄沙師備 問 如何是無縫塔 師曰 這一縫大小

放過; 饒恕 對錯誤不加處罰 二錯過 [百度漢語] 此指二

一著; 本爲圍棋用語 猶言一事也 又一回一次也 又稱一著子

趁下; 下 助詞

 

스님이 이르되 양당(兩堂)의 운수(雲水)가 모두 분라(紛拏; 혼란한 모양)하매 라고 하니 지금(至今)토록 일찍이 정교(*定交; 停止)하지 않았다. 만약 천동이 남천의 예()를 이회(理會)하여 단예(*端倪)를 시험해 내지 않았다면 왕왕 사정(邪正)을 분별하지 못하리라. 사정이 분명할 땐 어떻게 판단하겠는가. 곧 좋게 이검(利劍)으로 참단(斬斷)하고 한 구덩이에 매각(埋却)해야 하리니 단지 일기(一期)의 마치지 못한 공안(公案)을 초절(*勦絕; 滅絶)할 뿐만 아니라 또한 천고지하(千古之下)에 바람이 환우(*寰宇)를 청정하게 하리라. 남천의 당시에 사()는 수승(殊勝)하고 자(; 徒弟)는 막강(莫强)했다. 대중이 말이 없음을 보고 도리어 조주에게 거사(擧似; 들어 보이다)한 것은 중중(衆中)에 사람이 있음을 표현(表顯)했음이다. 조주가 짚신을 벗어 머리 위에 이고 나갔으니 과연 이 도(此道)가 죽지() 지음(知音)이 가히 가상(嘉尙)하다. 공자(*孔子)가 이르되 하늘이 장차 이 글을 죽이지 않으려고 하셨다(*未喪斯文). 저 사자(師資; 師徒)를 보건대 도가 합하고 창박(唱拍)이 상수(相隨)하여 비유할 게 없다. 시법(*諡法) 천원(泉源)이 유통함을 가로되 우()며 또 수선(*受禪)하여 성공함을 가로되 우(). 상서(*尙書) 우공(*禹貢) 적석(積石; 積石山)으로 도하(導河)하여 용문(*龍門)에 이르렀다. 회남자(*淮南子) 공공씨(共工氏)의 장병은 강하고 흉포(兇暴)했는데 요제(堯帝)와 공을 다투었다. 힘이 다해 부주산(*不周山)에 부딪쳐 죽자 천주(天柱)가 부러졌다. 여왜(女媧)5색의 돌을 연마하여 하늘을 보수했다. 열자(*列子) 음양이 법도(法度)를 잃음을 이름해 결()이며 5(*五常)의 정()을 연마함을 이름해 보(). 운개본(*雲蓋本), 동산이 태수좌의 과탁을 거둔 화(*洞山掇却泰首座果棹話)를 염(; 擧說)해 이르되 동산이 비록 허공을 타파하는 겸추(鉆鎚)가 있지만 요차(要且; 도리어. 종내) 보철(補綴)하는 침선(*針線)이 없다. 남천은 대우(大禹)가 착산투해(鑿山透海)함과 같이 신용(神用)을 현출(顯出)했고 조주는 여왜가 연석(鍊石)하여 보천(補天)함과 같이 화두(*話頭)를 원만하게 했다. 만송이 말한다. 조주는 십팔상(*十八上)에 파가산택(破家散宅)할 줄 알았다 하니 다소(多少)의 생애(生涯)가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짚신을 머리에 이니 조금은 상당하지만(較些些) 돌돌(咄咄; 쯧쯧) 거처(去處)가 없어 이런(這箇) 거취를 짓는구나. 보복전(*保福展)이 이르되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또한 다만 이는 해진 짚신(破草鞋)이다. 남천이 평고취하(*平高就下)하여 말하되 자네가 만약 있었더라면 마침 고양이를 구득(救得)했으리라. 취암지(翠巖芝; 守芝)가 이르되 대소(*大小) 조주는 다만 가히 자기를 구제했고 일착(*一著)을 방과(*放過)했다. 천동이 말하되 이중(異中; 異類中)에서 왔으니 도리어 명감(明鑒)하라, 다만 이 진금은 모래에 섞이지 않는다 하니 다만 능히 순수(順水)에 배를 밀었고 역풍에 키를 잡을 줄 알지 못했다. 이금(而今)에 너희 이 일대(一隊)가 위로 올라왔지만 고양이도 또한 없거늘 무슨 개를 다투느냐. 주장자로써 쫓아내었다(*趁下).

 

定交; 정지(停止). 파휴(罷休; 진행을 정지하다).

端倪; 사정(事情)의 두서(頭緒).

勦絕; 소멸(消滅). 멸절(滅絕).

寰宇; 환내(寰內). 천하. 전세계.

孔子; (551-479) 종통편년4. () 영왕(靈王) 경술 21(551) 유교 성인 공자가 노나라에 탄생했다. 협주(夾注)에 이르되 11월 초 4일에 노나라 연주 추읍현 평향 진창리에 탄생했다. 은본기(殷本紀)를 살펴보니 공자 아버지의 성은 숙량(叔梁)이며 이름은 흘()이며 추읍의 현재(縣宰). 먼저 추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맹피(孟皮)를 낳았으나 부재(不才)였다. 후에 안씨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가로되 징재(徵在)였다. 이구산(尼邱山)의 신에게 기도하여 공자를 낳았다. 태어나자 머리카락이 있었으며 신장이 96촌이며 허리 둘레가 열 아름이었다. 손을 내리면 무릎을 지났고 강의 눈에 바다의 입이며 용의 얼굴에 네모진 이마였으며 봉의 머리통에 제비의 턱이며 규룡의 수염에 범의 눈초리였다. 중화(中和)의 덕이 있으며 옷은 장식하여 위엄스러웠고 안색은 온화하면서 맑았다. 마흔둘의 표시가 있었다. 스스로 성을 바꾸어 가로되 공()이며 이름은 구()며 자는 중니(仲尼). 선조는 은나라의 후예인 영고숙불하(穎考叔弗何)이다. ()에 이르러 노나라로 이거(移居)했으며 성을 바꾸어 숙량(叔梁)이라 했다. 공자가 옛적에 은나라와 송나라의 후예임을 추억해 자()에 일()을 배합해 성을 바꾸어 공씨(孔氏)라 했다. 불조통기54. 주 영왕 21(551) 11월 경자(庚子)에 공자가 노나라 추읍(陬邑)에서 탄생했으며 경왕 10(535) 공자가 주나라를 방문해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 경왕 19(501) 노나라의 중도재(中都宰)가 되었고 21년에 사공(司空)이 되었고 22년에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소정묘(少正卯)를 죽이고 삼도(三都)를 무너뜨렸다. 노 정공이 제나라의 여악(女樂)을 받아들여 3일 동안 정무를 듣지 않자 공자가 드디어 위나라로 갔다. 36(484) 위나라로부터 노()로 돌아와 시를 산취(刪取)하고 서()를 정하고 주역을 계사(繫辭)하고 춘추를 지었다. 증삼이 효자라 위하여 효경을 지었다. 39년에 애공(哀公)이 서쪽으로 사냥하다 기린을 잡았는데 공자가 기린이 비시(非時)에 출현함에 상심하여 드디어 춘추에서 절필했다. 41(479) 4월 을축(乙丑)에 공자가 졸했으며 사수상(泗水上)에 장사 지냈다. 제자가 3천 인이며 몸이 6()를 통달한 자 72인이다.

未喪斯文; 조정사원4. 사문(斯文) (; 공자)가 광()을 두려워하며(論語集註. 地名. 사기에 이르되 陽虎가 일찍이 에서 포악했는데 夫子의 용모가 양호와 비슷하여 고로 사람들이 그를 包圍했다) 가로되 문왕(文王)이 이미 몰()하시매 문(; 註 道라고 말하지 않고 이라고 말한 것은 謙辭)이 이에 있지 않음인가. 하늘이 장차 이 문(斯文)을 죽이려 하실진댄 뒤에 죽는 자는 이 문()과 함께 함을 얻지 못하려니와 하늘이 이 문을 죽이지 않으시리니 광인(匡人)이 그 나를 어찌하겠는가(논어 子罕에 나옴).

諡法; 1. 사자(死者)의 행적(行跡)을 안험(按驗; 查驗)하여 입호(立號)하는 법이니 그 행위와 사적(事跡)을 표창(表彰). ()에서 비롯했고 진()에서 폐()했고 한시(漢時)에 또 그 법을 회복했고 따르다가 청말에 이르러 비로소 폐()했음. 2. 서명(書名)이니 송() 소순(蘇洵)이 봉조(奉詔)하여 편정(編定)했고 4. 3. 칭호(稱號) [백도한어]. 여기에선 1을 가리킴.

受禪; 선양제(禪讓制)니 이는 중국 상고시기(上古時期) 부락(部落)의 수령(首領)을 추거(推擧)하는 일종의 방식. 곧 부락의 각 개인이 표결(表決)하여 다수(多數)로써 결정했음. 상전(相傳)하기를 요()가 부락연맹(部落聯盟)의 영수(領袖)가 되었을 때 사악(四嶽)에서 순()을 추거하여 계승인으로 삼았는데 요()가 순()에 대해 3년의 고핵(考核)을 진행한 후 방조(幫助)하며 판사(辦事)하게 했고 요가 사후에 순이 계위(繼位)했음. 동양(同樣)의 추거방식(推舉方式)을 써서 치수(治水)의 고험(考驗)을 경과하여 우()를 계승인으로 삼았음 [백도한어].

尙書; 또 명칭이 서()ㆍ서경(書經)이니 이는 1부 다체재(多體裁) 문헌의 휘편(彙編). 장기(長期)에 인식됨을 입기를 이는 중국 현존의 가장 이른 사서(史書). 단지 이는 청() 화간(華簡)이 증명하기를 전세(傳世)의 상서는 부분은 고문상서(古文尙書)의 위작(僞作)이며 부분은 위서(僞書)가 됨. 그 서책은 우서(虞書)ㆍ하서(夏書)ㆍ상서(商書)ㆍ주서(周書)로 분류되었음. 전국시기에 총칭이 서()며 한대(漢代)에 상서로 개칭되었음. 곧 상고(上古)의 서()니 이로 인해 유가(儒家) 5경의 하나임. 내용의 주요(主要)는 이 군왕이 관원을 임명하거나 혹 제후를 상차(上次; 位階를 올리다)할 때 발포(發布)하는 정령(政令)[백도백과].

禹貢; 상서(尙書) 하서(夏書)1(). 편중(篇中)에 당시의 중국을 파악(把握)하여 분할해 9()로 삼았고 각 구역의 산천의 분포ㆍ교통ㆍ물산(物産)의 상황(狀況) 및 공부(貢賦)의 등급 등을 기술했음.

龍門; 산서 평양 하진(河津)에 위치함. 섬서 서안 한성현경(韓城縣境)의 황하 중류와 더불어 그곳 산악이 대치(對峙)하여 문궐(門闕)의 형상을 형성했으며 하나의 천연적인 험요(險要)의 처소가 됨. 후한서67. 이응(李膺)은 자가 원례며 영천 양성 사람이다. 이응은 성품이 간항(簡亢; 뜻이 크고 오만)하여 교접하는 바가 없었다. 오직 동군(同郡)의 순숙과 진식을 사우(師友)로 삼았다. 이때의 조정은 날마다 혼란했으며 강기(綱紀)가 퇴타(穨阤; 쇠퇴. 붕괴)했다. 이응만이 오직 풍재(風裁; 풍모. 풍치)를 유지했으며 성명(聲名)이 저절로 높아졌으므로 사()가 그의 용접(容接)을 받음이 있는 자는 이름하여 등용문(登龍門)이라 했다. 조정사원2. 용문(龍門)은 물고기로써 비유를 삼음. 용문은 하수(河水)가 내려가는 바의 입구니 지금 강주(絳州)의 용문현에 있음. 용문의 물이 험해 통하지 않는지라 어별(魚鼈)의 족속(族屬)이 능히 오르지 못함. 강해(江海)의 대어가 용문 아래에 모인 자 수천(數千)이 오름을 얻지 못하나니 오른 즉 용이 됨. 지금의 사(; 사내)가 그 용접(容接)함을 얻은 자는 등용문이라 이름함. ()는 동한의 이응전(李膺傳)을 보라.

淮南子; 또 명칭이 회남홍렬(淮南鴻烈)ㆍ유안자(劉安子). 이는 서한 종실 회남왕 유안(劉安)이 빈객을 초치(招致)하여 그들의 주지(主持) 하에 편사(編寫)한 것임. 저록(著錄)의 내()21편이며 외()33편이니 내편은 논도(論道)며 외편은 잡설(雜說). 여금엔 내() 21편이 존재함. 도가사상(道家思想)을 위주로 하여 유법(儒法)과 음양 등 가()를 유합(糅合; 섞어 합침)했음. 이는 전국(戰國)에서 한초(漢初)에 이르기까지의 황로지학(黃老之學)의 이론의 체계적인 대표작 [백도백과].

不周山; 중국 고대 신화(神話) 전설 중의 산 이름. 최조(最早)에 산해경(山海經) 대황서경(大荒西經)에 보임. 서북해(西北海)의 밖, 대황(大荒)의 모퉁이에 산이 있는데 닫히지() 않았고 이름해 가로되 부주(不周)[백도백과].

列子; 전국 시 정()나라 사람. 성은 열()이며 이름은 어구(禦寇). 생졸년 및 사적(事蹟)은 모두 불상(不詳)이나 약 노자보다는 뒤며 장자(莊子)보다는 앞이니 곧 서원전(西元前) 4세기 때. 저서에 열자(列子) 1()가 있음. 도가의 언사를 숭봉(崇奉)했음. 여금의 고증(考證)으로는 실로 이 서책은 대다(大多)가 후인의 가탁(假託)의 위작(僞作)이라 함. 그 사람의 유무까지도 곧 오히려 고증(考證)을 기다림. 그러나 중국의 사상체계와 문학의 영향상에 있어서는 곧 그를 가져 장주(莊周)와 병렬(竝列). 세칭 노()ㆍ장()ㆍ관(; 尹子)ㆍ열()을 도가의 4()라 하며 혹 4()으로 일컬음.

五常; 우란분경소효형초상(盂蘭盆經疏孝衡鈔上). 5()이란 것은 이르자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다. 살림을 좋아하고 죽임을 싫어함을 가로되 인()이며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음을 가로되 의()며 장유(長幼)를 공근(恭勤; 恭敬으로 의심됨)함을 가로되 예()며 민속(敏速)하고 다지(多知)를 가로되 지()며 입행(立行)에 가히 의지할만함을 가로되 신()이다. 또 이르되 불살(不殺)은 인()이 되고 부도(不盜)는 의()가 되고 불란(不亂)은 예()가 되고 불음(不淫)은 지()가 되고 충실(忠實)은 신()이 된다. 5로 말미암아 왕자(王者)는 이로써 치국(治國)하고 군자는 이로써 입신(立身)하나니 가히 잠시도 잊지 않으며 이를 일러 5상이다.

雲蓋本; 운개지본(雲蓋智本)이니 송대 양기파승. 성은 곽씨며 서주 사람이며 백운수단(白雲守端)을 이었음. 처음은 서주 용문에 주()했고 추밀 증공(曾公)의 청으로 남악 법륜ㆍ고대 도림에 주()하다가 만년에 담주 운개로 옮겼음 [속등록20].

洞山掇却泰首座果棹話; 동산양개어록. 스님과 태수좌가 동절(冬節)에 과자(菓子)를 먹던 차에 곧 묻되 한 물건이 있어 위로는 하늘을 버티고 아래론 땅을 버티며 검기로는 칠과 같다. 늘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있지만 동용 가운데에서 거두려면 얻지 못한다. 그래 말하라, 허물이 어느 곳에 있느냐. 태가 이르되 허물이 동용 가운데 있습니다. 스님이 시자를 불러 과탁(菓卓)을 거두어 물리게 했다.

針線; 봉인(縫紉; 裁縫)과 자수(刺繡) 등의 공작을 가리킴.

話頭; 공안(公案) 중에 거의(大多) 일개자(一個字) 혹은 일구화(一句話)가 있어 학인(學人)에게 공급해 참구(參究)로 쓰이는 것을 화두라고 일컬음. 또 화두는 화()와 같나니 두()는 조사(助詞). 예컨대() 염두(念頭).

十八上; 18세임. ()은 수사(數詞) 뒤에 두어서 연령을 표시함. 예컨대() 오가정종찬4 파초청. 스님의 휘()는 혜청이며 남탑을 이었고 신라 사람이다. 스님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18()에 앙산에 이르러 남탑을 참견했다. 벽암록 제80. 남천이 이르되 나는 십팔상(十八上)에 활계를 지을 줄 알았다(解作活計). 조주가 말하되 나는 십팔상에 파가산택(破家散宅)할 줄 알았다.

保福展; 보복종전(保福從展; ?-928)이니 오대승. 복주 사람이며 성은 진씨. 나이 15에 설봉(雪峰)을 예알하고 수업사(受業師)로 삼았음. 18에 본주(本州) 대중사에서 구계(具戒)했고 오초(吳楚) 사이를 유람했음. 후에 돌아와 설봉을 집시(執侍)하다가 그의 법을 이었음. () 정명 4(918) 장주자사가 보복원(保福院)을 창건하고 청하여 거주하게 했음. 후당 명종 천성 무자 322일에 입적했음 [전등록19. 오등전서14].

平高就下; ()는 향상의 존귀를 가리키며 하()는 제2의문(第二義門)을 가리킴.

大小; 대와 소. 고존숙어록34 용문불안. 묻되 허공이 도리어 변이함이 있는가 또는 없는가. 대운(代云)하되 청황적백이며 장단대소(長短大小). 대소대(大小大)와 같음. 곧 야대(偌大. 저렇게 큰). 저마대(這麽大; 이렇게 큰). 나마대(那麽大; 저렇게 큰). 벽암록 불이초2. 릉가(楞伽; 竺仙)가 이르되 북방인이 사람의 장단을 의논하려 하면 말의 처음에 먼저 대소(大小) 2자를 말한다. 아래에 반드시 기과(譏誇; 나무람과 자랑)의 말이 있다. 혹 말하기를 대소대(大小大)의 사람이라 하면 뜻에 이르기를 너는 이 대대(大大)한 사람이거늘 도리어 이러한 쇄세소소(瑣細小小; 자질구레하고 아주 작음), 기량이 없는 일을 짓는가 함이다. 벽암록 제1칙 종전초. 대소(大小)란 것은 북방에서 사람을 욕하는 기두(起頭)의 말이다. 현성(現成)하여 명료하면서 초절(勦絶)의 기가 없음을 억제하여 보임이다. 원오어록11. 대소(大小) 세존이 용두사미다. 구말에 두어서 의문을 표시함. ()ㆍ대()에 상당함. 오등회원7 현사사비. 묻되 무엇이 이 무봉탑입니까. 스님이 가로되 이 1()은 대소(大小)(큰가).

放過; 1. 요서(饒恕)니 착오에 대해 처벌을 가하지 않음. 2. 착과(錯過; 놓침) [백도한어]. 여기에선 2를 가리킴.

一著; 본래 위기(圍棋; 바둑) 용어가 됨. 1()라고 말함과 같음. 1, 1차임. 또 명칭이 일착자(一著子).

趁下; ()는 조사.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daum.net)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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