擧 *臺山路上有一*婆子〈傍城*庄家夾道兔〉 凡有僧問 臺山路向什麽處去〈一生行脚 去處也不知〉 婆云 *驀直去〈未當好心〉 僧纔行〈著賊也不知〉 婆云 好箇*阿師又恁麽去也〈爾早侯白〉 僧擧似趙州〈人平不語〉 州云 待與*勘過〈水平不流〉 州亦如前問〈陷虎之機〉 至來日上堂云 我爲汝*勘破婆子了也〈我更侯黑〉
●臺山; 五臺山 位於山西五臺縣東北 與峨眉山 普陀山 九華山 合稱爲中國佛敎四大靈山 以東西南北中五峰聳立 山頂無林木 壘土如臺 故稱五臺山 又以五巒巍然 拔乎群山 盛夏仍不知炎暑 故別號淸涼山 爲古來文殊菩薩示現之道場 五臺之外 稱臺外 五臺之內稱臺內 以臺懷鎭爲中心 山中寺廟林立 北魏時建有佛寺 北齊時擴建寺院二百餘所 唐開元(713-741)以後 佛敎發展處于極盛時期 寺院多達三百餘所 五臺山有顯通寺 塔院寺 文殊寺 羅睺寺等禪寺 歷代禪宗高僧也有許多曾在五臺山活動 如晩唐著名禪僧趙州從諗 曾九次行脚五臺
●婆子; 卽婆 子 泛指人 又助詞
●庄家; 同莊家 農村住房 農家
●驀直; 一直 直捷 多隱含直截領悟 當下契入之義
●阿師; 對和尙之親切稱呼 阿 助詞 名詞詞頭 宋代趙彦衛雲麓漫鈔十 古人多言阿字 如秦皇阿房宮 漢武阿嬌金屋 晉尤甚 阿戎阿連等語極多 唐人號武后爲阿武婆 婦人無名 以姓加阿字
●勘過; 謂禪人之間試驗對方悟道之深淺 勘 察看 過 助詞
●勘破; 卽看破識透之意 看透了互相比較試驗質問之對手 亦卽勘定事之是非
거(擧)하다. 대산(*臺山)의 노상에 한 파자(*婆子)가 있었다. 〈성(城) 근방의 장가(*庄家)의 협도(夾道)의 토끼다〉 무릇 어떤 중이 묻되 대산로(臺山路)는 어느 곳을 향해 가야 합니까. 〈일생에 행각하면서 거처(去處)도 알지 못하느냐〉 노파가 이르되 바로 곧장(*驀直) 가십시오. 〈호심(好心)에 상당하지 않는다〉 중이 겨우 가면 〈도적에게 붙은 줄도 알지 못하느냐〉 노파가 이르되 호개(好箇; 箇는 조사)의 아사(*阿師)가 또 이렇게 가는구나. 〈너는 일찍 후백(侯白)이다〉 중이 조주(趙州)에게 거사(擧似)하자 〈사람이 평안하면 말하지 않는다〉 조주가 이르되 감과(*勘過)하여 줌을 기다려라. 〈물이 평평하면 흐르지 않는다〉 조주도 또한 앞과 같이 물었다. 〈범을 빠뜨리는 틀이다(陷虎之機)〉 내일에 이르러 상당해 이르되 내가 너희를 위해 파자를 감파(*勘破)했다. 〈나는 다시 후흑(侯黑)이다〉
●臺山; 오대산(五臺山)이니 산서 오대현 동북에 위치함. 아미산ㆍ보타산ㆍ구화산과 합칭하여 중국불교 4대 영산(靈山)으로 삼음. 동ㆍ서ㆍ남ㆍ북ㆍ중 5봉이 용립(聳立)했고 산정에 임목(林木)이 없으며 흙이 쌓여 대(臺)와 같은지라 고로 명칭이 오대산(五臺山)임. 또 다섯 봉우리가 외연(巍然; 우뚝한 모양)하여 뭇 산보다 빼어나며 성하(盛夏)에도 그대로 염서(炎暑)를 알지 못하는지라 고로 별호가 청량산(淸涼山)임. 고래로 문수보살이 시현하는 도량이 됨. 오대의 밖은 호칭이 대외(臺外)며 오대의 안은 호칭이 대내(臺內)니 대회진(臺懷鎭)을 중심으로 삼음. 산중에 사묘(寺廟)가 숲처럼 건립되었으며 북위 때 불사(佛寺)를 건립해 있었고 북제(北齊) 때 사원 2백 여 곳을 확건(擴建)했음. 당 개원(713-741) 이후 불교가 발전하여 극히 성한 시기에 처했는데 사원이 많을 적엔 300여 곳에 달했음. 오대산에 현통사ㆍ탑원사ㆍ문수사ㆍ라후사(羅睺寺) 등의 선사(禪寺)가 있으며 역대 선종 고승도 허다하게 일찍이 오대산에 있으면서 활동함이 있었으니 예컨대(如) 만당(晩唐)의 저명한 선승 조주종심이 일찍이 아홉 차례 오대산에 행각했음.
●婆子; 곧 파(婆)니 자(子)는 널리 사람을 가리킴. 또 조사.
●庄家; 장가(莊家)와 같음. 농촌의 주방(住房). 농가.
●驀直; 일직(一直; 곧장. 곧바로). 직첩(直捷; 곧바로). 직절(直截)하여 영오하고 당하(當下)에 계입(契入)함의 뜻을 다분히 은함(隱含)했음.
●阿師; 화상에 대한 친절한 칭호(稱呼)임. 아(阿) 조사니 명사(名詞)의 사두(詞頭)임. 송대(宋代) 조언위(趙彦衛)의 운록만초10. 고인이 많이들 아자(阿字)를 말했으니 진시황의 아방궁(阿房宮)과 한무제의 아교금옥(阿嬌金屋) 같은 것들이다. 진(晉)은 더욱 심했으니 아융(阿戎)과 아련(阿連) 등의 말이 극히 많았다. 당인(唐人)은 무후(武后; 則天武后)를 아무파(阿武婆)라 호칭했고 부인(婦人)이 이름이 없으면 성에 아자(阿字)를 더했다.
●勘過; 이르자면 선인지간(禪人之間)에 상대방의 오도의 심천을 시험함. 감(勘)은 살펴 봄이며 과(過)는 조사.
●勘破; 곧 간파하고 식투(識透)함의 뜻. 호상 비교하고 시험하면서 질문하는 대수(對手; 적수)를 간투(看透)하거나 또한 곧 일의 시비를 감정(勘定)함.
師云 臺山路上婆子 慣隨*無著出寺入寺 *飽參文殊*前三後三 凡見僧問臺山路向什麽處去 便*當陽指出*長安大道 云驀直去 其僧不作*疑阻便行 婆云 好箇阿師又恁麽去也 這婆子也鉤錐在手 從來觸誤多少賢良 這僧旣不奈伊何 拈來擧似趙州 州云 待與勘過 疑殺天下人 這老漢老不歇心 圖箇甚麽 也要定箇*宗眼 州依前恁麽問 婆依前恁麽答 有底便*話作兩橛 前段點這僧扶婆子 後段點婆子扶趙州 唯*玄覺云 前僧也恁麽問答 後來趙州也恁麽問答 且道 甚處是勘破處 萬松道 勘破了也 又云 非唯被趙州勘破 亦被這僧勘破 萬松道 非但累及玄覺 亦乃累及萬松 *瑯琊云 大小趙州去這婆子手裡 喪身失命 雖然如是 錯會者多 萬松道 切忌*以己方人 *潙山哲云 天下衲僧只知問路老婆 要且不知*脚下泥深 若非趙州老人 爭顯*汗馬功高 雖然須假天童歌揚*始得 頌云
●無著; 釋無著 姓董氏 永嘉人 年十二 依本州龍泉寺猗律師出家 誦大乘經數十萬偈 唐天寶八年(749) 以業優得度 二十一歲首習毘尼 因詣金陵牛頭山忠禪師 參受心要 大曆二年(767)正月 發跡浙右 夏五月初 至淸涼嶺下 時日暮 倏見化寺 因扣扉請入 有一童子 名胊胝者 延無著入 主僧問曰 師自何來 無著具對 又曰 彼方佛法何如 答 時逢像季 隨分戒律 復問 衆有幾何 曰 或三百 或五百 無著曰 此處佛法如何 答云 龍蛇混跡 凡聖同居 又問 衆有幾何 答云 前三三與後三三 無著乃良久無對 主僧命童子送客出門 無著問曰 此寺何名 答 淸涼寺 童子曰 早來所問前三三與後三三 師解否 曰 不能 童子曰 金剛背後 爾可覻之 師乃迴視 化寺卽隱 無著愴然久之 次月 無著獨詣金剛窟 倏見一老人 老人手指東北 無著隨觀 見一寺 僅五十餘步 老人牽牛前導 無著踵後 旣抵門闔 老人呼君提數聲 有童子 啓扉而出 延無著入 童子送茶二器 皆瑠璃盞 酥蜜各一器 卽玳瑁 老人謂無著云 南方有此物不 無著云 無 又云 南方旣無此物 甚裏喫茶 無著不對 無著請留一宿 老人不許曰 師有執處在也 無著云 出家之人 有何執處 老人曰 師常持三衣否 無著曰 自受戒已來持之 老人曰 此是執處也 老人說偈云 若人靜坐一須臾 勝造恒沙七寶塔 寶塔畢竟壞微塵 一念淨心成正覺 偈畢 顧童子送之出寺 至金剛窟邊 童子問曰 此何窟 無著云 名金剛窟 童子曰 金剛下更有何字 無著思惟久之 謂童子曰 下有般若字 童子曰 此卽化般若寺也 童子說偈曰 面上無瞋供養具 口裏無瞋吐妙香 心裏無瞋是眞寶 無染無著是眞如 說是偈已 無著再拜 擧首不見童子 化寺亦隱 須臾遍谷 見文殊菩薩乘大師子 萬聖翼從 凡食頃間 菩薩卽隱 上文出廣淸涼傳卷中無著和尙入化般若寺章 五燈會元九所云仰山法嗣無著文喜於五臺山見文殊者誤矣
●飽參; 謂廣泛參問名師 多年參究禪法 頗具造詣
●前三後三; 見上無著
●當陽; 又作當揚 ①對著陽光 顯露明白 ▲圓悟語錄六 一句當陽顯赫 遍界已絶羅籠 ②當面 當場 當下 ▲碧巖錄第七則 一句下便見 當陽便透 若向句下尋思 卒摸索不著 ▲圓悟語錄五 以佛見佛無異見 以法說法無別說 佛法聞見總現成 當陽直下全超越
●長安; 中國著名古都之一 位於陝西省黃河流域 卽今之西安 自漢至唐一千年之間 長安爲西漢 西魏 北周 隋唐等朝代之首都
●疑阻; 疑惑隔閡 指惑亂
●宗眼; 卽正法眼 透徹了解宗旨奧義之明眼
●話作兩橛; 謂前後話語自相矛盾
●玄覺; 指五代法眼宗僧行言 泉州(今屬福建)晉江人 嗣淸涼文益 南唐主于金陵(今江蘇南京)建報慈院 命師住持 大闡禪道 署號玄覺導師 [傳燈錄二十五 十國春秋三十三]
●瑯琊; 同瑯瑘 瑯琊慧覺 見上第七則瑯琊覺
●以己方人; 以自己方比他人 廣韻 方 比也
●潙山哲; 正作潙山喆 潙山慕喆(?-1095) 宋代臨濟宗僧 臨川(今屬江西)聞氏 依建昌永安圓覺得度 勵道甚勤 後至南昌 謁翠巖可眞爲侍者 世稱喆侍者 爲人剛直 以荷法爲志 出住潭州 遷慧光大潙 衆二千指 紹聖改元(1094) 奉驛召 引對延和殿 稱旨 錫紫服眞如號 尋補大相國寺 二年十月八日 無疾說偈別衆 良久示寂 有大潙山語錄 黃庭堅作序 [禪林僧寶傳二十五 統要續集二十一 五燈會元十二]
●脚下泥深; 又作脚跟下泥深 脚跟 卽脚之後跟 於禪林常轉指本來自我 脚下泥深 指跌入煩惱之深淵 卽迷妄甚深 又作脚下太泥深
●汗馬; 祖庭事苑五 汗馬 李廣利爲貳師將軍 伐大宛國 得汗血馬 名蒲捎 漢武作天馬之歌 馬出汗卽有功勞 故云汗馬
●始得; 得 適合 適當 正好 可
스님이 이르되 대산로상(臺山路上)의 파자(婆子)가 익숙하게 무착(*無著)을 따라 출사입사(出寺入寺)하고 포참(*飽參) 문수(文殊)는 전삼후삼(*前三後三)이다. 무릇 중이 묻되 대산로는 어느 곳을 향해 가야 합니까 함을 보면 곧 당양(*當陽)하여 장안대도(*長安大道)를 가리켜 내어 이르되 바로 곧장 가십시오. 그 중이 의조(*疑阻)를 짓지 않고 곧 가면 노파가 이르되 호개(好箇)의 아사(阿師)가 또 이렇게 가시는구나. 이 파자는 구추(鉤錐)가 손에 있어 종래(從來)로 다소(多少)의 현량(賢良)을 촉오(觸誤; 접촉해 미혹하게 하다)했다. 이 중이 이미 그를 어찌하지 못해 염래(拈來)하여 조주에게 거사(擧似)하자 조주가 이르되 감과(勘過)하여 줌을 기다려라 했으니 천하인을 너무 의심케 한다. 이 노한이 늙어서도 마음을 쉬지 못했으니 저(箇) 무엇을 도모함인가, 또한 저(箇) 종안(*宗眼)을 정(定)함을 요한다. 조주가 의전히 이렇게 물었고 노파도 의전(依前)히 이렇게 답했다. 어떤 이는 곧 화가 두 말뚝을 이루었다(*話作兩橛) 하나니 전단(前段)은 저승(這僧)이 파자를 부기(扶起)했다고 점검하고 후단(後段)은 파자가 조주를 부기했다고 점검한다. 오직 현각(*玄覺)이 이르되 전승(前僧)도 이렇게 문답했고 후래(後來)에 조주도 이렇게 문답했거늘 그래 말하라 어느 곳이 이 감파(勘破)한 곳인가. 만송이 말하노니 감파했다. 또 이르되 오직 조주의 감파를 입음만이 아니라 또한(亦) 저승(這僧)의 감파를 입었다. 만송이 말하노니 단지 누(累)를 현각에게 끼침만이 아니라 또한 곧 누를 만송에게 끼친다. 낭야(*瑯琊)가 이르되 대소(大小) 조주가 이 파자의 손안으로 가서 상신실명(喪身失命)했다.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착회(錯會)하는 자가 많다. 만송이 말하노니 자기로써 남과 견줌(*以己方人)을 절기(切忌)하라. 위산철(*潙山哲)이 이르되 천하 납승이 다만 노파에게 길을 물을 줄 만 알고 요차(要且; 도리어) 각하에 진흙이 깊은(*脚下泥深) 줄 알지 못했다. 만약 조주 노인이 아니었다면 어찌 한마(*汗馬)의 공이 높음을 나타내었겠는가 하였다. 비록 그러하지만 모름지기 천동의 가양(歌揚; 노래로 선양함)을 빌려야 비로소 옳다(*始得). 송운(頌云)하되
●無著; 석무착(釋無著)이니 성이 동씨(董氏)며 영가(永嘉) 사람. 나이 12에 본주(本州) 용천사의 의율사(猗律師)에게 의지해 출가했고 대승경 수십만 게를 외웠음. 당 천보 8년(749) 업(業)이 우수했으므로 득도(得度)했음. 21세에 처음으로 비니(毗尼)를 익혔고 인해 금릉 우두산의 충선사(忠禪師; 慧忠禪師니 우두법융하 5세)에게 나아가 심요(心要)를 참수(參受; 參問해 받음)했음. 대력 2년(767) 정월 절우(浙右)에서 발적(發跡)하여 하(夏) 5월 초 청량산의 고개 아래 이르렀다. 때에 해가 저무는데 갑자기 화사(化寺)가 보였고 인해 문을 두드리며 들어가기를 청했다. 한 동자가 있었으니 이름이 구지(胊胝)였고 무착을 맞이해 들였다. 주승(主僧)이 물어 가로되 어디로부터 왔는가. 무착이 갖취 대답했다. 또 가로되 그 지방의 불법은 어떠한가. 답하되 때가 상계(像季; 像法과 末法)를 만난지라 수분(隨分)의 계율입니다. 다시 묻되 대중은 얼마나 있는가. 가로되 혹은 3백이며 혹은 5백입니다. 무착이 가로되 이곳은 불법이 어떻습니까. 답해 이르되 용과 뱀이 혼적(混跡)하고 범부와 성인이 동거한다. 또 묻되 대중은 얼마나 있습니까. 답해 이르되 전삼삼(前三三)과 후삼삼(後三三)이다. 무착이 이에 양구(良久)하며 대답이 없없다. 주승이 동자에게 명하여 객을 보내 출문(出門)하게 했다. 무착이 물어 가로되 이 절은 무엇이라 이름하느냐. 답하되 청량사입니다. 동자가 가로되 아까 물은 바 전삼삼(前三三)과 후삼삼(後三三)을 스님이 아십니까. 가로되 불능(不能)이다. 동자가 가로되 금강의 등 뒤를 그대가 가히 그것을 보시라. 스님이 곧 돌아보자 화사(化寺)가 곧 은몰했다. 무착이 창연(愴然; 愴은 슬플 창)함이 오래였다. 다음 달 무착이 홀로 금강굴(金剛窟)로 나아갔다. 갑자기 한 노인이 보였는데 노인이 손으로 동북을 가리켰다. 무착이 그대로 보매 한 사원이 보였는데 겨우 50여 보(步)였다. 노인이 소를 끌고 전도(前導)했고 무착이 뒤를 따랐다. 이미 문짝에 다다르자 노인이 몇 소리로 군제(君提)를 불렀다. 어떤 동자가 문을 열고 나와 무착을 맞이해 들였다. 동자가 두 그릇의 차를 보냈는데 모두 유리잔(瑠璃盞)이었고 소밀(酥蜜)이 각기 한 그릇이었는데 곧 대모(玳瑁)였다. 노인이 무착에게 일러 가로되 남방에도 이 물건이 있습니까. 무착이 이르되 없습니다. 또 이르되 남방에 이미 이 물건이 없다면 어느 속에서 차를 마십니까. 무착이 대답하지 못했다. 무착이 1숙(宿)을 청하자 노인이 허락하지 않고 가로되 스님은 집착하는 곳이 있습니다. 무착이 이르되 출가한 사람이 무슨 집착할 곳이 있겠습니까. 노인이 가로되 스님은 늘 3의(衣)를 가집니까. 무착이 가로되 수계한 이래로 그것을 가졌습니다. 노인이 가로되 이것이 이 집착하는 곳입니다. 노인이 게를 설해 가로되 어떤 사람이 1수유(須臾)라도 정좌(靜坐)한다면/ 항사의 칠보탑을 조성함보다 수승하다/ 보탑은 필경 부서져 미진(微塵)이지만/ 한 생각 청정한 마음은 정각을 이룬다. 게를 마치자 동자를 돌아보고는 보내어 사원에서 나가게 했다. 금강굴 가에 이르자 동자가 물어 가로되 이것은 어떤 굴입니까. 무착이 이르되 이름이 금강굴이다. 동자가 가로되 금강 아래는 다시 무슨 글자가 있습니까. 무착이 오래 사유하고는 동자에게 일러 가로되 아래에 반야란 글자가 있다. 동자가 가로되 이것이 곧 화(化)한 반야사(般若寺)입니다. 동자가 게를 설해 가로되 면상에 성냄 없음이 공양구며/ 입속에 성냄 없음이 묘한 향을 토함이며/ 마음 속에 성냄 없음이 이 진보(眞寶)며/ 물듦 없고 집착 없음이 이 진여다. 이 게를 설해 마치자 무착이 재배(再拜)했다. 머리를 드니 동자가 보이지 않았고 화사도 또한 은몰했다. 수유(須臾)에 온 계곡에 문수보살이 큰 사자를 탔음이 보였고 만성(萬聖)이 익종(翼從)했는데 무릇 식경(食頃) 간에 보살도 곧 은몰했다. 상문(上文)은 광청량전권중 무착화상입화반야사장(無著和尙入化般若寺章)에 나옴. 오등회원9에 이른 바 앙산의 법사인 무착문희(無著文喜)가 오대산에서 문수를 보았다는 것은 오류임.
●飽參; 이르자면 광범(廣泛)하게 명사(名師)를 참문하고 여러 해 선법을 참구하여 자못 조예(造詣)를 갖춤.
●前三後三; 위 무착(無著)을 보라.
●當陽; 또 당양(當揚)으로 지음. ①햇빛을 대착(對著)하여 환히 드러나서 명백함. ▲원오어록6. 1구가 당양(當陽)하여 환히 빛나니 편계(遍界)에 이미 나롱(羅籠)이 끊겼다. ②당면. 당장. 당하. ▲벽암록 제7칙. 1구 아래에서 바로 보고 당양(當陽)에 바로 투출해야 한다. 만약 구절 아래를 향해 심사(尋思)하면 마침내 모색을 붙이지 못한다. ▲원오어록5. 부처로써 부처를 보니 다른 봄이 없고/ 법으로써 법을 설하니 다른 설이 없다/ 불법이 듣고 봄에서 모두 현성(現成)했나니/ 당양(當陽) 직하에 모두 초월한다.
●長安; 중국의 저명한 고도(古都)의 하나. 섬서성 황하유역에 위치하며 즉금의 서안. 한(漢)으로부터 당에 이르는 1천 년 사이 장안은 서한(西漢)ㆍ서위(西魏)ㆍ북주(北周)ㆍ수ㆍ당 등 조대(朝代)의 수도가 되었음.
●疑阻; 의혹하여 격애(隔閡)됨. 혹란(惑亂)을 가리킴.
●宗眼; 곧 정법안이니 종지의 오의(奧義)를 투철하게 요해(了解)하는 명안(明眼).
●話作兩橛; 이르자면 전후의 화어(話語)가 스스로 서로 모순됨.
●玄覺; 오대 법안종승 행언(行言)을 가리킴. 천주(지금 복건에 속함) 진강 사람이니 청량문익(淸涼文益)을 이었음. 남당주(南唐主)가 금릉(지금의 강소 남경)에 보자원(報慈院)을 건립하고 스님에게 명해 주지하게 했음. 선도(禪道)를 대천(大闡)했고 서호(署號)하여 현각도사(玄覺導師)라 했음 [전등록25. 십국춘추33].
●瑯琊; 낭야(瑯瑘)와 같음. 낭야혜각(瑯琊慧覺)이니 위 제7칙 낭야각(瑯琊覺)을 보라.
●以己方人; 자기로써 타인에 방비(方比; 비교)함. 광운(廣韻) 방(方) 비(比)다.
●潙山哲; 바르게는 위산철(潙山喆)로 지음. 위산모철(潙山慕喆; ?- 1095)이니 송대 임제종승. 임천(지금 강서에 속함) 문씨. 건창 영안원각에게 의지해 득도했고 도에 힘씀이 매우 부지런했음. 후에 남창에 이르러 취암가진(翠巖可眞)을 참알하고 시자가 되었음. 세칭이 철시자(喆侍者)임. 사람됨이 강직했고 하법(荷法; 법을 짊어짐)으로 뜻을 삼았음. 출세해 담주에 거주하다가 혜광 대위로 옮겼는데 대중이 2천 지(指)였음. 소성 개원(1094) 역소(驛召; 역마로 부름을 전함)를 받들어 연화전에서 인대(引對)하였고 칭지(稱旨; 主上의 뜻에 부합함)했으며 자복(紫服)과 진여(眞如)의 호를 주었음. 이윽고 대상국사에 보임(補任)했음. 2년 10월 8일 질병 없이 게를 설하여 대중과 이별하고 양구(良久)에 시적했음. 대위산어록이 있으며 황정견이 서를 지었음 [선림승보전25. 통요속집21. 오등회원12].
●脚下泥深; 또 각근하니심(脚跟下泥深)으로 지음. 각근은 곧 발의 뒤꿈치. 선림에선 늘 전(轉)하여 본래의 자아를 가리킴. 각하니심은 번뇌의 깊은 못에 미끌어져 들어감을 가리킴. 곧 미망이 매우 심함. 또 각하태니심(脚下太泥深)으로 지음.
●汗馬; 조정사원5. 한마(汗馬) 이광리(李廣利)가 이사장군(貳師將軍)이 되어 대완국(大宛國)을 정벌해 한혈마(汗血馬)를 얻었는데 이름이 포소(蒲捎)였다. 한무제가 천마(天馬)의 노래를 지었다. 말이 땀을 내면 곧 공로가 있으므로 고로 이르되 한마임.
●始得; 득(得)은 적합. 적당. 정호(正好). 가(可).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daum.net)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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