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용록

종용록 제29칙 본칙

태화당 2022. 5. 15. 09:24

*風穴*郢州衙內 上堂云 *祖師*心印狀似*鐵牛之機針剳不入 去卽印住拽迴鼻孔 住卽印破截斷脚跟 只如不去不住 印卽是 不印卽是泥裏洗土塊 時有廬陂*長老出問云 某甲有鐵牛之機 請師不搭印宛有逆水之波 穴云 慣釣鯨鯢澄*巨浸 却嗟蛙步?泥沙*魂幡子搐氣袋 陂佇思已過*鬼門 穴喝云 長老何不進語已臨崖岸 更與一推 陂擬議許多時節甚處去來 穴打一拂子云 還記得話頭麽 試擧看爲人爲徹 殺人見血 陂擬開口猶自不伏燒埋 穴又打一拂子仍少三十棒 *牧主云 佛法與王法一般不會做官 看傍州例 穴云 見箇什麽却好與一拂子 牧云 當斷不斷 返招其亂自罵自招 穴便下座得意濃時正好休

 

風穴; 風穴延沼(896-973) 又作延昭 北宋臨濟宗僧 浙江餘杭人 俗姓劉 少年卽魁偉有英氣 博覽諸書 依開元寺之智恭律師剃髮受具足戒 復遊學講肆 其後依止南院慧顒公 問法從學六年 竝嗣其法 長興二年(931) 入汝州之風穴古寺 留止七年 徒衆聞風來集 信徒竝重建此地 改爲叢林 宋太祖開寶六年八月示寂 壽七十八 有風穴禪師語錄一卷傳世 [傳燈錄十三 佛祖歷代通載十八 五燈會元十一] 祖庭事苑六 風穴在汝州 昭禪師居焉 因處得名 其穴 夏則風出 寒則風入 有寒過者 笠子叩于地

郢州; 今湖北鍾祥 隋以前的郢州一般指後來的鄂州 治所在今武漢市武昌 南朝宋從荊 湘 江 豫四州析置 隋滅陳 改爲鄂州 另一郢州以今鍾祥爲治所 [百度百科] 湖廣名勝志八荊州府曰 春秋楚文王自丹陽徙都於此 謂之郢都

祖師; 祖者始也 開創一宗一派之人 謂之開祖 或傳承其敎法之人 謂之列祖 開祖有宗祖派祖之別 例如一般尊稱菩提達摩爲禪宗之宗祖 義玄良价則分別爲臨濟宗曹洞宗之派祖 佛敎各宗派 皆重視其列祖之相承 例如禪宗有西天二十八祖東土六祖 天台宗有東土九祖十七祖 華嚴宗有五祖七祖十祖 眞言宗有八祖 淨土宗有五祖十六祖等 春秋正義 啖助曰 三傳(左傳 公羊傳 穀梁傳)之義 本皆口傳 後之學者 乃著竹帛 而以祖師之目題之 漢書外戚傳 定陶丁姬 哀帝母也 易祖師丁將軍之玄孫 師古注曰 祖 始也 丁寬易之始師 故釋老二氏 稱其創立宗派之人曰祖師 釋氏要覽上 此士自達磨西來 距曹溪能大師 六人得稱祖師

心印; 禪之本意 不立文字 不依言語 直以心爲印 故曰心印 心者佛心 印者印可印定之義 此印能印可或印定佛法之實義也

鐵牛之機; 禪門拈頌集第一二四七則 拈頌說話曰 狀似鐵牛之機者 風吹不入 水洒不著 掀戞不動也

長老; 指年齡長而法臘高 智德俱優之大比丘 又稱上座 上首 耆宿 耆舊 老宿 具壽 長阿含八衆集經 列擧三種長老 一年耆長老 指入佛道經年之僧 二法長老 指精通敎法之高僧 三作長老 爲世俗假名之長老 長老雖對年臘高者之敬稱 然未必爲年老者 增一阿含經二十二 我今謂長老 未必先出家 修其善本業 分別於正行 設有年幼少 諸根無漏缺 正謂名長老 分別正法行 此外 禪林中 多稱接引學人之師家爲長老 又禪宗稱寺院住持僧人爲長老 祖庭事苑八 長老 今禪宗住持之者 必呼長老 正取長阿含經有三長老中 所謂了達法性 內有智德之人 以訓領學者

巨浸; 大海也 浸 湖澤 澤之總名也

魂幡子; 指古代招引亡魂的旗子 又叫靈旗 子 後綴

鬼門; 鬼出入之門 稱爲鬼門 古來民間相傳 鬼門位於家宅或城廓之東北角 故東北角向爲一般人所忌諱 法苑珠林六 依神異經曰 東北方有鬼星石室 三百戶而共所 石傍題曰鬼門 門晝日不閉 至暮則有人語 有火靑色

牧主; 牧 古代州的長官 字彙 牧 古者州長謂之牧

 

()하다. 풍혈(*風穴)이 영주(*郢州) 아내(衙內; 官衙 )에 있으면서 상당해 이르되 조사(*祖師)의 심인(*心印)은 철우지기(*鐵牛之機)와 상사(狀似; 類似. 類似)하여 침으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다 떼면() 곧 인()이 머물고 콧구멍을 끌어 돌리는구나 머물면() 곧 인()이 깨어진다. 발꿈치를 절단(截斷)했다 지여(只如) 떼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면 인()을 침이 곧 옳으냐, 인을 치지 않음이 곧 옳으냐. 진흙 속에서 흙덩이를 씻는구나때에 노파장로(盧陂*長老)가 있어 나가 물어 이르되 모갑이 철우지기가 있습니다. 스님의 탑인(搭印; 인을 치다)하지 않으심을 청합니다. 완연히 역수(逆水)의 파도가 있다 풍혈이 이르되 경예(鯨鯢; 고래)를 낚아 거침(*巨浸; 大海)을 맑힘에 익숙한지라 도리어 개구리 걸음으로 진흙 모래에 허우적거림(蛙步?泥沙; 은 말 땅에 구를 전)을 탄식한다. 혼번자(*魂幡子)를 당기고 기대(氣袋; 공기 주머니)를 당기는구나 노파가 저사(佇思; 우두커니 서서 사유함)하자 이미 귀문관(*鬼門)을 통과했다 풍혈이 할()하고 이르되 장로는 왜 말을 진행하지 않느냐. 이미 애안(崖岸)에 임했는데 다시 한 번 밀어뜨려 주었다 노파가 의의(擬議)했다. 허다한 시절에 어느 곳에 갔다 왔느냐 풍혈이 곧 1불자(拂子)를 때리고 이르되 도리어 화두를 기득(記得)하는가, 시험 삼아 들어보아라(擧看). 위인(爲人; 사람을 위하다)하거든 철저해야 하고 살인하거든 피를 보아야 한다 노파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아직 스스로 소매(燒埋; 타서 묻힘)를 복종(服從)하지 않느냐 풍혈이 또 1불자(拂子)를 때렸다. 오히려() 30()이 모자란다 목주(*牧主)가 이르되 불법과 왕법(王法)이 일반입니다. 주관(做官; 官吏 노릇을 하다)을 알지 못하거든 방주(傍州)의 예()를 보아라 풍혈이 이르되 저() 무엇을 보았는가. 도리어 좋게 1불자를 주어야 한다 목주가 이르되 마땅히 자를 것을 자르지 않으면(當斷不斷) 도리어 그 난()을 초래합니다. 스스로 욕하고 스스로 부른다 풍혈이 곧 하좌했다. 득의(得意)가 농후할 때 바로 쉼이 좋다

 

風穴; 풍혈연소(風穴延沼; 896-973)니 또 연소(延昭)로 지음. 북송 임제종승. 절강 여항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유(). 어린 나이에 곧 괴위(魁偉)하고 영기(英氣)가 있었으며 여러 책을 박람(博覽)하였음. 개원사의 지공율사에게 의지해 머리를 깎았고 구족계를 받았음. 다시 강사(講肆)에 유학(遊學)하다가 그 후 남원혜옹공(南院慧顒公)에 의지하여 법을 묻고 좇아 배우기 6년이었고 아울러 그의 법을 이었으며 장흥 2(931) 여주(汝州)의 풍혈고사(風穴古寺)에 들어가 머물기 7년이었음. 도중(徒衆)이 풍모(風貌)를 듣고 와서 모였으며 신도가 아울러 이 땅을 중건(重建)하매 바뀌어 총림이 되었음. () 태조(太祖) 개보 68월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78. 풍혈선사어록(風穴禪師語錄) 1권이 있어 세상에 전함 [전등록13. 불조역대통재18. 오등회원11]. 조정사원6. 풍혈(風穴)은 여주(汝州)에 있으며 연소선사(延沼禪師)가 거주했다. 처소를 인해 이름을 얻었으니 그 혈(; 동굴 혈)은 여름엔 곧 바람이 나가고 추워지면 곧 바람이 들어온다. 추위를 지내는 자가 있으면 삿갓이 땅을 두드린다.

郢州; 지금의 호북 종상. () 이전의 영주는 일반으로 후래의 악주(鄂州)를 가리키며 치소(治所)는 지금의 무한시(武漢市) 무창에 있었음. 남조(南朝) ()은 형()ㆍ상()ㆍ강()ㆍ예() 4()로부터 쪼개어 설치했음. ()가 진()을 멸하자 고쳐 악주라 했고 다른 1영주(郢州)는 지금의 종상(鍾祥)을 치소로 삼았음 [백도백과]. 호광명승지8 형주부(荊州府)에 가로되 춘추 초문왕(楚文王)이 단양으로부터 여기로 도읍을 옮기고 이를 일러 영도(郢都)라 했다.

祖師; ()란 것은 시()11(一宗一派)를 개창(開創)한 사람을 개조(開祖)라고 이르고 혹 그 교법(敎法)을 전승(傳承)한 사람을 열조(列祖)라고 이름. 개조에 종조(宗祖)와 파조(派祖)의 분별이 있으니 예여(例如; 예를 들어 말함) 일반적으로 보리달마(菩提達摩)를 존칭하여 선종의 종조(宗祖)로 삼고 의현(義玄)과 양개(良价)는 곧 분별하여 임제종과 조동종의 파조(派祖)로 삼음. 불교의 각 종파(宗派)에서 다 그 열조(列祖)의 상승(相承)을 중시하나니 예여(例如) 선종은 서천의 28조와 동토의 6조가 있고 천태종은 동토의 9조ㆍ17조가 있고 화엄종은 5조ㆍ7조ㆍ10조가 있고 진언종은 8조가 있고 정토종은 5조ㆍ13조 등이 있음. 춘추정의(春秋正義) 담조(啖助)가 가로되 3(三傳; 左傳公羊傳穀梁傳)의 뜻은 본래 다 구전(口傳)했으나 뒤의 학자들이 이에 죽백(竹帛)에 붙여 조사(祖師)의 명목(名目)으로써 이를 제목했다. 한서 외척전. 정도정희(定陶丁姬)는 애제(哀帝)의 모친이다. 역조사정장군(易祖師丁將軍)의 현손(玄孫)이다. 사고(師古)의 주()에 가로되 조()는 시(). 정관역(丁寬易)의 시사(始師). 고로 석로(釋老) 2씨가 그 종파를 창립한 사람을 일컬어 가로되 조사(祖師)라 한다. 석씨요람상(釋氏要覽上) 이 국토에선 달마의 서래(西來)로부터 조계능대사(曹溪能大師)에 이르기까지() 6인만이 조사(祖師)라는 명칭을 얻는다.

心印; ()의 본의는 문자를 세우지 않고 언어에 의하지 않고 바로 심()으로 인()을 삼는지라 고로 가로되 심인임. 심이란 것은 불심이며 인이란 것은 인가인정(印可印定)의 뜻이니 이 인()이 불법의 실의(實義)를 능히 인가(印可)하거나 혹 인정(印定).

鐵牛之機; 선문염송집 제1247. 염송설화에 가로되 철우지기(鐵牛之機)와 상사(狀似; 형상이 흡사)하다는 것은 바람이 불어도 들어가지 않고 물로 뿌려도 붙지 않고 흔알(掀戞; 당기고 두드림)해도 움직이지 않음이다.

長老; 연령이 어른이면서 법랍이 높으며 지덕(智德)이 모두 우수한 대비구를 가리킴. 또 명칭이 상좌(上座)ㆍ상수(上首)ㆍ기숙(耆宿)ㆍ기구(耆舊)ㆍ노숙(老宿)ㆍ구수(具壽). 장아함8 중집경에 3종 장로를 열거했음. 1. 연기장로(年耆長老) 불도에 들어와 경년(經年)한 승인을 가리킴. 2. 법장로(法長老) 교법에 정통한 고승을 가리킴. 3. 작장로(作長老) 세속의 가명(假名)의 장로가 됨. 장로는 비록 연랍(年臘)이 높은 자에 대한 경칭이지만 그러나 꼭 연로자가 됨은 아님. 증일아함경22 내가 이제 장로를 말함음/ 꼭 먼저 출가함은 아니다/ 그 선()의 본업을 닦고/ 정행(正行)을 분별해야 한다/ 설사 나이가 유소(幼少)함이 있더라도/ 제근(諸根)에 누결(漏缺)이 없으면/ 바로 이르되 이름이 장로니/ 바른 정법의 행을 분별한다. 이 밖에 선림 중에선 다분히 학인을 접인하는 사가를 일컬어 장로라 함. 또 선종은 사원의 주지승인(住持僧人)을 일컬어 장로라 함. 조정사원8. 장로(長老) 여금에 선종의 주지하는 자를 반드시 장로라고 부르거니와 바로 장아함경에 세 장로가 있는 가운데를 취했음이다. 이른 바 법성을 요달하고 안에 지덕(智德)이 있는 사람으로서 학자를 훈령(訓領; 가르치고 거느림)하는 이다.

巨浸; 대해임. ()은 호택(湖澤)이니 못의 총명임.

魂幡子; 고대 망혼을 초인()하는 기자(旗子). 또 영기(靈旗)로 일컬음. ()는 후철(後綴).

鬼門; ()가 출입하는 문을 일컬어 귀문이라 함. 고래로 민간에서 서로 전하기를 귀문은 가택이나 혹 성곽의 동북 모퉁이에 위치한다 함. 고로 동북 모퉁이 방향을 일반인이 기휘(忌諱; 기피)하는 곳이 됨. 법원주림6. 신이경에 의하자면 가로되 동북방에 귀성(鬼星)의 석실이 있는데 3백 호()며 공동 처소이다. 석실 곁에 제하여 가로되 귀문(鬼門)이다. 문은 대낮에 닫지 않고 저묾에 이르면 곧 사람의 언어가 있으며 불이 있는데 청색이다.

牧主; ()은 고대 주()의 장관. 자휘 목() 옛적에 주장(州長)을 일컬어 목()이라 했다.

 

師云 *無盡居士 擧 臨際辭潙山 仰山侍其傍 潙曰 此人他日法道如何 仰曰 他日法道大行吳越 遇風卽止 又問其嗣之者何人 仰曰 年代深遠未可言耳 潙固問之曰 吾亦欲知 仰云 經不云乎 將此深心奉*塵刹 是則名爲報佛恩 居士曰 吾以此知 風穴仰山之後身也 穴初參雪峯五年 一日請益臨際會下兩堂上座 擧頭相顧各下一喝 僧擧問際 未審具賓主眼否 際曰 雖然如是 賓主歷然 雪峯敘與巖頭*欽山 進途而値臨際已逝不及參 則曰 汝欲會當問取他子孫 穴擧似南院顒 院云 雪峯古佛也 師後住*汝州風穴山廣慧禪院 五代*離亂 郢州牧主請師衙內住夏 一日牧主請陞座 示衆云 祖師心印 狀似鐵牛之機 不同石人木馬玄唱玄提 *直下如鐵牛 無爾近傍處 爾纔去鉤迴 纔住打敎*百雜碎 只如不去不住 印卽是 不印卽是 可謂鉤頭有餌 盧陂長老亦是際下兒孫 便拈轉他話頭 置問不妨奇特 道某甲有鐵牛之機 請師不搭印 其奈風穴據令而行 便道 慣釣鯨鯢澄巨浸 却嗟蛙步?泥沙 鯨鯢橫海大魚也 莊子*任公子五十犗爲餌 曾得此魚 蛙步?泥沙 有說 漢武帝時有暴利長 渥洼水傍見群野馬 中有奇者來飮水 因作土人 持勒絆于傍 習以爲常 以人代之 收得其馬 欲神異其馬 謂從水出 遂傳爲龍種 穴謂馬出淸水反偃?泥沙中 此說迂迴*風穴衆吼集 明作蛙步 不見 雪竇頌犀牛扇話了 復云 若要淸風再振 頭角重生 請禪客下轉語乃云 扇子旣破 還我犀牛兒來 時有僧出云 大衆*參堂去 竇喝云 拋鉤釣*鯤鯨 釣得箇蝦䗫 以此兩句對風穴上下兩句 蛙字無疑也 陂佇思 問話呈機 要與風穴相見 而忽遭點 要別尋出長投 至爾施呈槍法 一*檐打倒也 此不解奪機行令賓主互換之過也 牧主久參風穴 不無見處道 佛法與王法一般 風穴收得*安南 又憂塞北 便問牧主道 見箇什麽 這裏便好與盧陂雪屈 却只道 當斷不斷反招其亂也 不妨說到 風穴爲伊是俗官 *飮氣呑聲便下座 二尊宿一龍一蛇 做剛做柔 *篁鼓臨際宗風 更著天童*斷和 頌云

 

無盡居士; 張商英(1043-1121) 北宋黃龍派居士 蜀州(四川崇慶)新津人 字天覺 號無盡居士 自幼卽銳氣倜儻 日誦萬言 初任通州主簿 一日入寺見藏經之卷冊齊整 怫然曰 吾孔聖之書 乃不及此 欲著無佛論 後讀維摩經有感 乃歸信佛法 神宗(1068-1085)時 受王安石推擧入朝 大觀年間 爲尙書右僕射 未久因事謫於外 及遷江西運使 禮謁東林寺常總(嗣黃龍) 得其印可 復投兜率寺從悅(黃龍下二世) 就巖頭末後之句有所參究 得嗣其法 紹聖(1094-1098)初年 受召爲左司諫 因上書論司馬光呂公著而左遷 又常詆當時宰相蔡京 故屢受貶 大觀四年(1110)六月 天久旱 乃受命祈雨 晩忽雨 徽宗大喜 賜商霖二字 後受蔡京讒言 貶知河南府 宣和四年歿 壽七十九 賜諡文忠 著有護法論一卷 [釋氏稽古略四 居士傳二十八 宋史三五一]

塵刹; 謂多如微塵數之無量世界

欽山; 欽山文邃(834-896) 唐代曹洞宗僧 福州(今屬福建)人 洞山良价法嗣 少依杭州大慈山寰中禪師受業 時巖頭雪峰在衆 覩師吐論 知是法器 相率遊方 初參德山 後於洞山言下發解 乃爲之嗣 年二十七 止於湖南澧州欽山 [傳燈錄十七 聯燈會要二十二 統要續集十五 敎外別傳十五]

汝州; 今河南省汝州

離亂; 變亂 常指戰亂

直下; 指卽時卽刻之意 與合下當下同義

百雜碎; 細碎其物也

任公子; 是古代傳說中善於捕魚的人 亦稱任公 任父 成玄英疏 任 國名 任國之公子 [百度百科]

風穴衆吼集; 一卷 臨濟下三世風穴延沼(896-973)的語錄 現存者明代再編底 [祖庭事苑六]

參堂; 入僧堂參見首座大衆竝坐禪 又禪院住持僧同意接受行脚僧的習語

鯤鯨; 鯤魚 鯤魚千尺如鯨 故名

; 同棇 尖頭擔

安南; 指越南 西晉時越南稱交州 唐代則設安南都護府 惟當時之越南 僅指今北越而言

塞北; 又作北塞 塞 邊境 與徼(西南)相區別時 特指東北邊境

飮氣呑聲; 出氣息不得 非常恐懼之貌 氣 呼吸 氣息

篁鼓; 義同簧鼓 篁 管樂器的通稱 謂用動聽的言語 能感動於物 莊子騈拇 使天下簧鼓 以奉不及之法 成玄英疏 如笙簧鼓吹 能感動於物

斷和; 彼此有爭 則斷事之人 斷其是非 使兩者和

 

스님이 이르되 무진거사(*無盡居士)가 거()했다. 임제가 위산(潙山)을 고별하자 앙산(仰山)이 그 곁에 시립했다. 위산이 가로되 이 사람(임제)은 다른 날 법도(法道)가 어떻겠는가. 앙산이 가로되 다른 날 법도가 오월(吳越)에서 크게 행할 것이며 풍()을 만나면 곧 그칠 것입니다. 또 묻되 그를 잇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앙산이 가로되 연대(年代)가 심원(深遠)하여 가히 말할 만하지 않습니다. 위산이 굳이() 물어 가로되 나도 또한 알고 싶다. 앙산이 이르되 경(; 릉엄경3)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이 심심(深心)을 가지고 진찰(*塵刹)을 받들어야 이를 곧 이름하여 불은(佛恩)에 보답함이다. 거사가 가로되 내가 이로써 아나니 풍혈은 앙산의 후신(後身)이다. 풍혈이 설봉을 초참(初參)한 지 5년이었는데 어느 날 청익(請益)하되 임제 회하의 양당(兩堂; 동당과 서당) 상좌(上座)가 머리를 들고 서로 돌아보며 각자 1()을 내렸다. 중이 들어 임제에게 묻되 미심(未審)하오니 빈주(賓主)의 눈을 갖추었습니까. 임제가 가로되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빈주가 역연하다. 설봉이 서술(敘述)하되 암두(巖頭)ㆍ흠산(*欽山)과 더불어 진도(進途)하다가 임제가 이미 서거함을 만나 참알(參謁)함에 미치지 못하였다 하고는 곧 가로되 네가 알고 싶거든 마땅히 그의 자손에게 문취(問取)하라. 풍혈이 남원옹(南院顒; 慧顒)에게 들어 보이자 남원이 이르되 설봉은 고불(古佛)이로다. 스님이 후에 여주(*汝州) 풍혈산(風穴山) 광혜선원(廣慧禪院)에 주()했다. 오대(五代)의 이란(*離亂)에 영주(郢州) 목주(牧主)가 스님에게 아내(衙內)에서 주하(住夏)하기를 청했다. 어느 날 목주가 승좌를 청했다. 시중하여 이르되 조사의 심인(心印)은 철우지기(鐵牛之機)와 상사(狀似)하여, 석인(石人)이나 목마(木馬)의 현창현제(玄唱玄提)와 같지 않고 직하(*直下)에 철우와 같다 하니 네가 곁으로 다가갈 곳이 없다. 네가 겨우 가면 갈고리로 돌리고 겨우 머물면 때려 산산조각이 나게 한다(*百雜碎). 지여(只如) 떼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면 인()을 침이 곧 옳으냐, 인을 치지 않음이 곧 옳으냐 하니 가위(可謂) 구두(鉤頭)에 미끼가 있다. 노파(盧陂) 장로도 또한 이 제하(際下)의 아손이니 곧 그의 화두를 염전(拈轉)하여 질문을 두었으니 기특함에 방애되지 않는다. 말하되 모갑이 철우지기가 있습니다. 스님의 탑인(搭印; 인을 치다)하지 않으심을 청합니다. 풍혈이 거령(據令)하여 행함을 그 어찌하겠는가. 곧 말하되 고래를 낚아 거침(巨浸; 大海)을 맑힘에 익숙한지라 도리어 개구리 걸음(蛙步)으로 진흙 모래에 허우적거림을 탄식한다. 경예(鯨鯢)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대어다. 장자(莊子) 임공자(*任公子)50(; 불친소)를 미끼로 하여 일찍이 이 고기를 얻었다. 개구리 걸음으로 진흙 모래에 허우적거린다(蛙步?泥沙) 함은 설()이 있다. 한무제(漢武帝) 때 폭리장(暴利長)이 있었는데 악와수(渥洼水) 곁에 무리 지은 야마(野馬)를 보았다. 가운데에 기자(奇者)가 와서 음수(飮水)함이 있었다. 인하여 토인(土人; 土偶의 사람)을 만들어 굴레를 가지고 곁에 묶어 놓았다. 익혀 일상(日常)으로 삼자 사람으로써 그에 대체하여 그 말을 수득(收得)했다. 그 말을 신이(神異)하게 하고자 하여 이르기를 물로부터 나왔다 하매 드디어 전하여 용종(龍種)이라 했다. 풍혈이 이르되 말이 청수(淸水)에서 나와 도리어 진흙 모래 속에 누워 뒹군다(偃?) 함이니 차설(此說)은 풍혈중후집(*風穴衆吼集)을 우회(迂迴)하면 분명히 와보(蛙步)로 지었다. 보지 못하는가, 설두가 서우선화(犀牛扇話)를 송해 마치고 다시 이르되 만약 청풍이 재진(再振)하고 두각이 중생(重生)함을 요하거든 청컨대 선객이 전어(轉語; 一轉語)를 내려라 하고 이에 이르되 선자(扇子)가 이미 깨어졌다면 나에게 서우아(犀牛兒)를 송환해 오너라. 때에 어떤 중이 나와 이르되 대중은 참당(*參堂)하러 가거라. 설두가 할하고 이르되 갈고리를 던져 곤경(*鯤鯨)을 낚으려 했더니 이 하마(蝦䗫; 두꺼비. 청개구리)를 조득(釣得)했다. 이 양구(兩句)로써 풍혈의 상하(上下) 양구에 상대하면 와자(蛙字)가 의심 없다. 노파가 저사(佇思; 우두커니 생각함)하며 문화(問話)하고 정기(呈機)하여 풍혈과 더불어 상견하고자 하다가 홀연히 조점(遭點; 點額을 만나다)했다. 달리 장투(長投; 길게 던지다)함을 찾아내고자 하는데 네가 창법(槍法)을 시정(施呈)함에 이르러 하나의 총담(*; 뽀족한 멜대)으로 타도(打倒)하였다. 이것은 탈기(奪機)하여 행령(行令)하는 빈주호환(賓主互換)을 알지 못하는 허물이다. 목주(牧主)도 풍혈을 구참(久參)한지라 견처가 없지 않아 말하되 불법과 왕법이 일반입니다. 풍혈이 안남(*安南)을 수득(收得)했더니 또 새북(塞北)을 근심하며 곧 목주에게 물어 말하되 저 무엇을 보았는가. 이 속에서 곧 좋이 노파를 위해() 설굴(雪屈)해야 하거늘 도리어 다만 말하되 마땅히 자를 것을 자르지 않으면 도리어 그 난()을 초래합니다 했으니 설도(說到; 說通)에 방애되지 않는다. 풍혈이 그가 이 속관(俗官)이기 때문에 음기탄성(*飮氣呑聲)하고 곧 하좌했다. 두 존숙이 하나는 용이며 하나는 뱀이니 강()을 짓고 유()를 지으며 임제의 종풍을 황고(*篁鼓)했다. 다시 천동의 단화(*斷和)를 붙인다. 송운(頌云)하되

 

無盡居士; 장상영(張商英; 1043-1121)이니 북송 황룡파 거사. 촉주(蜀州; 사천 숭경) 신진(新津) 사람이며 자는 천각(天覺)이며 호는 무진거사(無盡居士). 어릴 적부터 곧 예기(銳氣)가 척당(倜儻; 근기가 卓異)하여 하루에 만언(萬言)을 외웠음. 처음에 통주주부(通州主簿)에 임용되었는데 어느 날 입사(入寺)하여 장경(藏經)의 권책(卷冊)이 제정(齊整)함을 보고 발끈하며 가로되 우리 공성(孔聖)의 서책이 여기에도 미치지 못하겠는가 하고는 무불론(無佛論)을 지으려고 했음. 후에 유마경을 읽고 느끼는 게 있어 이에 불법에 귀신(歸信)했음. 신종(神宗; 1068-1085) 때 왕안석(王安石)의 추거(推擧)를 받아 입조(入朝)했고 대관년 간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가 되었으며 오래지 않아 사건으로 인해 외지(外地)로 적강(謫降)되었다가 강서운사(江西運使)로 좌천(左遷)됨에 이르렀음. 동림사(東林寺) 상총(常總; 황룡을 이었음)을 예알(禮謁)하고 그의 인가(印可)를 얻었음. 다시 도솔사 종열(從悅; 황룡하 2)에게 투입해 암두(巖頭)의 말후지구(末後之句)로 나아가 참구하는 바가 있었고 그의 법 이음을 얻었음. 소성(紹聖; 1094-1098) 초년(初年) 부름을 받아 좌사간(左司諫)이 되었는데 글을 올려 사마(司馬) 광려공(光呂公)의 저서를 논함으로 인해 좌천되었고 또 늘 당시의 재상 채경(蔡京)을 욕한지라 고로 여러 차례 폄강(貶降)을 받았음. 대관(大觀) 4(1110) 6월에 하늘이 오래 가물었는데 칙명을 받고 기우(祈雨)하여 저녁에 홀연히 비가 와 휘종(徽宗)이 크게 기뻐하며 상림(商霖) 2()를 주었음. 후에 채경(蔡京)의 참언(讒言)을 받아 지하남부(知河南府)로 폄강(貶降)되었음. 선화(宣和) 4년에 죽었으니 나이는 79며 사시(賜諡)가 문충(文忠). 저서에 호법론(護法論) 1권이 있음 [석씨계고략4. 거사전28. 송사351].

塵刹; 이르자면 많기가 미진수와 같은 무량한 세계.

欽山; 흠산문수(欽山文邃; 834-896)니 당대 조동종승. 복주(지금 복건에 속함) 사람. 동산양개(洞山良价)의 법사. 젊었을 적에 항주 대자산 환중선사에게 의지해 수업(受業)했는데 당시에 암두와 설봉이 대중에 있다가 스님의 토론(吐論)을 보고 이 법기임을 알았으며 서로 인솔하여 유방했음. 처음엔 덕산을 참했고 후에 동산의 언하에 발해(發解)하고 이에 법사가 되었음. 나이 27에 호남 예주 흠산에 머물렀음 [전등록17. 연등회요22. 통요속집15. 교외별전15].

汝州; 지금의 하남성 여주(汝州).

離亂; 변란(變亂)이니 늘 전란(戰亂)을 가리킴.

直下; 즉시ㆍ즉각의 뜻을 가리킴. 합하(合下)ㆍ당하(當下)와 같은 뜻

.●百雜碎; 그 물건을 잘게 부숨임.

任公子; 이는 고대 전설 중 포어(捕魚)를 잘한 사람이니 또한 호칭이 임공(任公)ㆍ임부(任父). 성현영(成玄英) () 임은 나라 이름이니 임국의 공자다 [백도백과].

風穴衆吼集; 1. 임제하 3세 풍혈연소(風穴延沼; 896-973)의 어록이니 현존하는 것은 명대(明代) 재편한 것임 [조정사원6].

參堂; 승당에 들어가 수좌와 대중을 참견(參見)하고 아울러 좌선함. 또 선원의 주지승의 동의로 행각승을 접수한다는 습관적인 말임.

鯤鯨; 곧 곤어(鯤魚)니 곤어는 천 척이며 경(; 고래)과 같은지라 고로 이름함.

; ()과 같음. 첨두담(尖頭擔; 뾰족한 멜대).

安南; 월남을 가리킴. 서진(西晉) 시 월남을 교주(交州)로 호칭했으며 당대(唐代)에 곧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했음. 오직 당시의 월남은 겨우 지금의 북월(北越)을 가리켜 말함이었음.

塞北; 또 북새(北塞)로 지음. ()는 변경이니 요(; 서남)와 서로 구별할 때 특별히 동북의 변경을 가리킴.

飮氣呑聲; 기식(氣息)을 냄을 얻지 못함. 비상(非常)의 공구(恐懼)의 모양. ()는 호흡. 기식(氣息).

篁鼓; 뜻이 황고(簧鼓)와 같음. ()은 관악기(管樂器)의 통칭(通稱). 이르자면 동청(動聽; 傾聽)의 언어를 써서 능히 사람을 감동시킴. 장자 변무(騈拇). 천하로 하여금 황고(簧鼓)하여 이르지 못할 법을 받들게 하다. 성현영(成玄英) () 생황(笙簧)을 고취(鼓吹)함과 같이 능히 사람()을 감동시킴이다.

斷和; 피차 다툼이 있으면 곧 일을 판단하는 사람이 그 시비를 판단하여 양자로 하여금 화해하게 함.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daum.net)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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