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천자문

선종천자문(禪宗千字文) 절상회리(折床會裏) 15

태화당 2019. 8. 11. 08:39

折床會裏 切忌刻舟 俱胝指上 錯認者誰

절상회리 절기각주 구지지상 착인자수

 

절상회 속에서/ 각주를 간절히 꺼리며/ 구지의 손가락 상에/ 잘못 아는 자 누구인가.

 

 

 

 

折床會裏; 又作折牀會 唐代如會禪師法席隆盛 僧徒之多 壓斷床榻 時號折牀會 如會(七四四~八二三) 唐代僧 韶州(廣東)始興人 幼卽出家 大曆八年(七七三)參徑山道欽 後又參訪馬祖道一 爲其法嗣 於馬祖處時 因來參者衆多 僧堂禪床爲之而折 故有折床會之稱 其後 入主長沙東寺 法門鼎盛 時號東寺禪窟 穆宗長慶三年示寂 壽八十 諡號傳明大師 [宋高僧傳十一 傳燈錄七 釋氏稽古略二]

切忌刻舟; 五燈會元三 東寺如會 始興曲江人也 初謁徑山 後參大寂 學徒旣衆 僧堂牀榻爲之陷折 時稱折牀會也 自大寂去世 師常患門徒以卽心卽佛之譚誦憶不已 且謂 佛於何住 而曰卽心 心如畫師 而云卽佛 遂示衆曰 心不是佛 智不是道 劒去遠矣 爾方刻舟 時號東寺爲禪窟焉 刻舟 呂氏春秋十五曰 楚人有涉江者 其劍自舟中墜於水 遽契(刻也)其舟曰 是吾劍之所從墜 舟止 從其所契者入水求之 舟已行矣 而劍不行 求劍若此 不亦惑乎

指上; 唐代僧 名元修 福淸(今屬福建)人 武宗時 結庵於靈石山 嘗誦七俱胝咒 故名 宣宗四年(八四九) 創翠石院 曾參杭州天龍 龍竪一指 遂得悟 自是凡有學者參問 唯竪一指曰 吾得天龍一指禪 一生用不盡 後住州金華山 [五燈會元四 傳燈錄十一 祖堂集十九] 指上 上 表示範圍或方面 如會上 思想上 政治上等 傳燈錄十一金華俱 初住庵 有尼名實際 到庵戴笠子執錫繞師三云 道得卽拈下笠子 三問 師皆無對 尼便去 師曰 日勢稍晩且留一宿 尼曰 道得卽宿 師又無對 尼去後歎曰 我雖處丈夫之形 而無丈夫之氣 擬棄庵往諸方參尋 其夜山神告曰 不須離此山 將有大菩薩來爲和尙說法也 果旬日天龍和尙到庵 師乃迎禮具陳前事 天龍竪一指而示之 師當下大悟 自此凡有參學僧到 師唯擧一指無別提唱 有一童子於外被人詰曰 和尙說何法要 童子竪起指頭 歸而擧似師 師以刀斷其指頭 童子叫喚走出 師召一聲 童子回首 師却竪起指頭 童子豁然領解 師將順世 謂衆曰 吾得天龍一指頭禪 一生用不盡 言訖示滅 眞心直說 所以道吾舞笏 石鞏拈弓 祕魔擎 竪指 忻州打地 雲巖師子 莫不發明這著大用

錯認者誰; 大慧錄十三云 俱胝得處不在指頭上 香嚴悟處不在擊竹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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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상회리(折床會裏); 또 절상회(折牀會)로 지음. 당대(唐代) 여회선사(如會禪師)의 법석이 융성(隆盛)하여 승도(僧徒)의 많음이 상탑(床榻)을 눌러 절단(截斷)한지라 당시에 호()하기를 절상회(折牀會)라 하였음. 여회(如會. 744~823) 당대(唐代)의 승려며 소주(韶州. 廣東) 시흥(始興) 사람임. 어릴 적에 곧 출가하였고 대력팔년(大曆八年. 773) 경산도흠(徑山道欽. 牛頭下六世)을 참알(參謁)하고 후에 또 마조도일(馬祖道一)을 참방(參訪)하여 그의 법사(法嗣)가 되었음. 마조에 거처할 때 내참(來參)하는 자의 무리가 많아 승당(僧堂)의 선상(禪床)이 부러진지라 고로 절상회(折床會)의 칭호(稱號)가 있음. 그 후 장사(長沙)의 동사(東寺)에 들어가 주지(主持)하였는데 법문이 정성(鼎盛. 흥성)해 당시에 호하기를 동사선굴(東寺禪窟)이라 했음. 목종(穆宗) 장경삼년(長慶三年)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여든이며 시호(諡號)가 전명대사(傳明大師). [宋高僧傳十一 傳燈錄七 釋氏稽古略二].

절기각주(切忌刻舟); 오등회원삼(五燈會元三) 동사여회(東寺如會) 시흥(始興) 곡강(曲江) 사람이다. 처음에 경산(徑山)을 참알(參謁)하고 뒤에 대적(大寂. 馬祖道一諡號)을 참알(參謁)했다. 배우는 무리가 많아 승당(僧堂)의 상탑(牀榻)이 함몰(陷沒)해 부러진지라 당시에 칭하기를 절상회(折牀會)라 했다. 대적(大寂)이 세상을 떠남으로부터 스님이, 문도(門徒)들이 즉심즉불(卽心卽佛)의 얘기로 외우고 기억해 말지 않음을 늘 우환(憂患)으로 여겼다. 또 이르기를 부처가 어디에 머무는가, 가로되 곧 마음이다. 마음이 화사(畫師. 화가)와 같은가, 이르되 곧 부처이다. 드디어 시중(示衆)해 가로되 마음은 이 부처가 아니며 지혜는 이 도가 아니니라. 검이 떠난 지 오래거늘 너희는 비로소 배에 새기는구나(劒去遠矣 爾方刻舟). 당시에 동사(東寺)를 호하되 선굴(禪窟)이라 하였다. 각주(刻舟) 여씨춘추십오(呂氏春秋十五)에 가로되 초인(楚人)에 강을 건너는 자가 있었다. 그의 검이 배 가운데로부터 물에 떨어지자 급히 그 배에 새기며 가로되 이는 내 검이 좇아 추락한 곳이다. 배가 멈추자 그 새긴 곳을 좇아 물에 들어가 그것을 구하려 했다. 배는 이미 갔지만 검은 가지 않았거늘 검을 구함이 이와 같으니 또한 미혹(迷惑)이 아니겠는가.

구지지상(指上); 구지() 당대(唐代)의 승려며 이름은 원수(元修)며 복청(福淸. 지금 福建에 속함) 사람임. 무종(武宗) 때 영석산(靈石山)에 암자를 엮어 늘 칠구지주(七俱胝咒)를 외운지라 고로 이름함. 선종사년(宣宗四年. 849) 취석원(翠石院)을 창건했음. 일찍이 항주(杭州)천룡(天龍)을 참알(參謁)했는데 천룡이 한 손가락을 세우자 드디어 깨침을 얻었음. 이로부터 무릇 학자의 참문(參問)이 있으면 오직 한 손가락을 세우고 가로되 내가 천룡의 일지선(一指禪)을 얻어 일생에 써도 다하지 않는다. 후에 무주()의 금화산(金華山)에 머물렀음. [五燈會元四 傳燈錄十一 祖堂集十九]. 지상(指上) () 범위(範圍) 혹은 방면(方面)을 표시함. 예컨대(. 예를 듦을 표시) 회상(會上)ㆍ사상상(思想上)ㆍ정치상(政治上) . 전등록십일(傳燈錄十一) 금화구지(金華俱)가 처음 암자(庵子)에 머물 적에 비구니(比丘尼)가 있어 이름이 실제(實際)였는데 암자에 이르러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잡고 스님을 세 바퀴 돌고는 이르되 말해 얻는다면 곧 삿갓을 집어 내리겠습니다. 세 번 물었지만 스님이 다 대답을 못했다. ()가 곧 떠나려 하자 스님이 가로되 일세(日勢)가 조금 늦었으니 다만 머물며 일숙(一宿)하시오. 니가 가로되 말해 얻는다면 곧 일숙하겠습니다. 스님이 또 대답을 못했다. 니가 간 후 탄식해 가로되 내가 비록 장부(丈夫)의 형상(形相)에 처했지만 장부의 기상(氣像)이 없도다. 암자를 버리고 제방(諸方)으로 가서 참심(參尋)하려 했는데 그날 밤에 산신(山神)이 고해 가로되 이 산을 떠남을 쓰지 마시오, 장차 대보살(大菩薩)이 오셔서 화상(和尙)을 위해 설법함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열흘 만에 천룡화상(天龍和尙)이 암자에 이르렀다. 스님이 이에 맞이하여 예배하고 앞의 일을 갖추어 진술(陳述)했다. 천룡(天龍)이 한 손가락을 세워 그에게 보였다. 스님이 당하(當下)에 대오했다. 이로부터 무릇 참학승(參學僧)의 내도(來到)함이 있으면 스님이 오직 한 손가락을 들고 특별한 제창(提唱)이 없었다. 한 동자(童子)가 있었는데 밖에서 타인의 힐문(詰問)을 입었으니 가로되 화상(和尙)이 어떤 법요(法要)를 설하시는가. 동자가 손가락(指頭. 助詞)을 세워 일으켰다. 돌아와 스님에게 들어 보이자 스님이 칼로 그 손가락을 잘랐다. 동자가 부르짖으며 달려 나갔다. 스님이 부르는 한 소리에 동자가 머리를 돌렸다. 스님이 도리어 손가락을 세워 일으켰다. 동자가 휑하게(豁然) 영해(領解. 받아들여 이해함)했다. 스님이 장차 순세(順世. 죽음)하려 하면서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천룡의 일지두선(一指頭禪)을 얻어 일생(一生)에 쓰고도 다하지 않았다. 말을 마치자 시멸(示滅. 示寂)했다. 진심직설(眞心直說) 소이(所以)도오(道吾)의 무홀(舞笏)석공(石鞏)의 염궁(拈弓)비마(祕魔)의 경차()와 구지()의 수지(竪指)흔주(忻州)의 타지(打地)운암(雲巖)의 사자(師子)는 이 대용(大用)발명(發明)하지 않음이 없다.

착인자수(錯認者誰); 대혜록십삼(大慧錄十三)에 이르되 구지가 얻은 곳은 지두상(指頭上)에 있지 않고 향엄(香嚴)이 깨친 곳은 격죽변(擊竹邊)에 있지 않다.

 

 

音義 부러질 절. 상 상. 모일 회. 속 리. 정성스러울 절. 꺼릴 기. 새길 각. 배 주. 다 구. 굳은 살 지. 손가락 지. 위 상. 어긋날 착. 알 인. 것 자. 놈 자. 누구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