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州遊方到院 在*後架洗脚次 師便問 如何是*祖師西來意 趙州云 恰遇*山僧洗脚 師近前作聽勢 趙州云 會卽便會 *啗啄作甚麽 師便歸方丈 趙州云 三十年行脚 今日錯爲人下*註脚 〔一作趙州行脚時參師 遇師洗脚次 趙州便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恰値老僧洗脚 趙州近前作聽勢 師云 更要第二杓惡水潑在 趙州便下去〕
●趙州 嗣南泉普願 願嗣馬祖 事苑七 趙州 師諱從諗심 姓郝학氏 曹州郝鄉人 作沙彌時 造南泉之室 穎拔不群 南泉待之異於流輩 一日問 如何是道 泉曰 平常心是道 師曰 還可趣向否 曰 擬向卽乖 師曰 不擬 那知是道 曰 道不屬知不知 知是妄覺 不知是無記 若眞達不擬之道 猶如大虛廓확然 豈可强是非邪 師旣領旨 却往嵩嶽 請戒而歸 晚游河朔 被檀越之請 唱道於趙州之觀音 一日 眞定帥王公鎔訪師 師坐而問曰 會麽 王曰 不會 師曰 自小持齋身已老 見人無力下禪牀 公益加敬仰 至唐昭宗乾寧末年 仲冬二日 右脇示寂 諡眞際大師 ▲趙州 位於河北省西部之都市 卽趙縣 隋謂趙郡 唐名趙州 宋名慶源府 元稱趙州而爲首邑 唐末大中年間 有南泉普願之法嗣趙州從諗 以趙州爲中心 大振南宗禪風 ▲禪苑蒙求拾遺 趙州眞際禪師行狀曰 師諱從諗 自携瓶錫遍歷諸方 常自謂曰 七歲童兒勝我者 我卽問伊 百歲老翁不及我者 我卽敎他 年至八十方住 趙州城東觀音院 住持枯槁志効古人 僧堂無前後架 旋營齋食 繩牀一脚折 以燒斷薪用繩繫之 每有別制新者 師不許也 住持四十來年 未甞賚一封書告其檀越
●後架 指禪林設於僧堂後方之洗面架 爲大衆之洗面處 ▲正法眼藏五十六 洗面章 雲堂洗面處者在後架裡 後架在照堂之西 其側多設廁所 故廁名亦與彼相混 ▲古者架謂之閣
●祖師 開創一宗一派之人 謂之開祖 或傳承其敎法之人 謂之列祖 開祖有宗祖派祖之別 例如一般尊稱菩提達摩爲禪宗之宗祖 義玄良价則分別爲臨濟宗曹洞宗之派祖 佛敎各宗派 皆重視其列祖之相承 例如禪宗有西天二十八祖東土六祖 天台宗有東土九祖十七祖 華嚴宗有五祖七祖十祖 眞言宗有八祖 淨土宗有五祖十六祖等
●祖師西來意 初祖達磨自西天來此土傳禪法 究竟意思如何 究此意思者 卽究佛祖之心印也
●山僧 猶云山野僧 謙辭也
●啗啄탁 啗 吃 咬
●註脚 註釋也 脚註也 反意語頭註 脚 物體的下端
조주가 遊方하다 사원에 이르러 後架에 있으면서 발을 씻던 차에 스님이 곧 묻되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조주가 이르되 마침 산승의 발 씻음을 만났습니다. 스님이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듣는 형세를 지었다. 조주가 이르되 알려면 곧 알 것이지 물고 쪼아서 무엇하리오. 스님이 곧 방장으로 돌아갔다. 조주가 이르되 삼십 년 행각에 금일 그르게 사람을 위해 註脚을 내렸도다. 〔혹은 짓기를 조주가 행각할 때 스님을 참견했는데 스님의 발 씻던 차를 만났다. 조주가 곧 묻되 무엇이 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스님이 이르되 마침 노승의 발 씻음을 만났습니다. 조주가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듣는 형세를 지었다. 스님이 이르되 다시 두번 째 구기의 더러운 물 끼얹음을 요합니까. 조주가 곧 아래로 내려갔다〕.
●趙州 南泉普願을 이었으며 보원은 마조를 이었음. 事苑七 趙州 스님의 휘는 從諗심(778~897)이며 姓은 郝학氏며 曹州 郝鄉 사람이다. 사미가 되었을 때 南泉의 室로 나아갔는데 穎拔(송곳 끝이 빼어남)하여 不群(어떤 무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뛰어남)이라 남천이 그를 접대함이 流輩(流는 무리 류. 곧 같은 또래)와 달랐다. 어느 날 묻되 무엇이 이 道입니까. 남천이 가로되 평상심이 이 도니라. 스님이 가로되 도리어 가히 趣向(趣는 趨蹌할 취. 뜻 취. 곧 목적을 정하여 그에 향하는 것)합니까. 가로되 취향하려 한다면 곧 어긋나느니라. 스님이 가로되 헤아리지(擬) 않으면 어떻게 이 도를 알겠습니까. 가로되 도는 앎과 알지 못함에 속하지 않나니 앎은 이 妄覺(허망한 생각. 망령된 생각)이며 알지 못함은 이 無記(華嚴經疏卷二十四에 이르되 非善非惡이라 능히 愛나 非愛의 과보를 招感하지 않음을 이름하여 無記이다. 허망하게 推度탁하여 비리로 물어 힐난하므로 가히 기록치 않으므로 고로 이름이 무기니 선악으로 상대하지 않는 연고이다)이다. 만약 진실로 헤아리지 않음의 도를 통달했다면 마치 큰 허공의 廓然(廓은 휑할 확. 곧 휑함)함과 같거늘 어찌 가히 애써 시비하리오. 스님이 이미 지취를 領悟(領은 깨달을 령)하고는 도리어 숭악으로 가서 請戒(戒를 請함이니 곧 受戒)하고 돌아왔다. 만년에 河朔에 노닐다가 단월의 청을 입어 조주의 관음원에서 唱道했다. 어느 날 眞定帥인 王公鎔(五代 때의 偏覇니 釋氏稽古略三에 이르되 王鎔이 鎭州의 眞定府를 統率하며 趙王이라고 일컬었다)이 스님을 방문했다. 스님이 앉아서 물어 가로되 알겠습니까. 王이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스님이 가로되 어릴 적부터 齋를 가져 몸이 이미 늙은지라 사람을 보고도 선상에서 내려올 힘이 없습니다. 公이 더욱 敬仰을 더했다. 唐 昭宗 乾寧末年(897) 仲冬(十一月) 二日에 이르러 右脇하여 示寂했다. 시호가 眞際大師다. ▲趙州 하북성 서부의 도시에 위치하나니 곧 趙縣임. 隋나라는 趙郡이라 했고 당나라는 조주라 이름했고 宋나라는 慶源府라 이름했고 元나라는 趙州라고 일컬으며 首邑을 삼았음. 唐末인 大中年間에 남천보원의 法嗣인 조주종심이 조주를 중심으로 하여 南宗의 禪風을 크게 떨쳤음. ▲禪苑蒙求拾遺(一卷 編者名闕) 조주진제선사행장에 가로되 스님의 휘는 從諗심이며 스스로 甁錫(錫은 錫杖 석)을 휴대하고 제방을 편력했는데 늘 스스로 일러 가로되 일곱 살 童兒라도 나보다 나은 자는 내가 곧 그에게 묻고 백 살 老翁이라도 나에게 미치지 못하는 자는 내가 곧 그를 가르치리라. 나이 팔십에 이르자 비로소 조주성 동쪽 관음원에 머물렀다. 주지하면서 枯槁하고 뜻이 古人을 본받아 승당엔 전후의 架(閣)가 없었고 그대로 齋食을 營爲했다. 繩牀의 다리 한 개가 부러지자 태우다가 끊어진 장작으로써 노를 써 그것을 매었는데 따로 새것을 만들자는 자가 있었지만 스님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주지한 지 사십 년에 일찍이 一封의 서찰을 주어 그 단월에게 알림이 없었다.
●後架 선림에서 승당 후방에 시설한 洗面架를 가리킴이니 대중의 세면하는 곳이 됨. ▲正法眼藏(九十五卷 日本 道元述)五十六 洗面章 雲堂(僧堂)의 세면처란 것은 後架 속에 있으며 후가는 照堂(승당의 후문과 세면처의 중간에 하나의 솟은 행랑이 있는데 그 집의 꼭대기가 극히 높아 採光하기에 좋지 않아서 고로 천장으로 낸 창을 개설하여 조명을 도우나니 조당이라고 일컬음. 한 禪床을 조당 안에 시설하여 수좌가 주지를 대신해 설법하여 중승을 지도하는 곳임)의 서쪽에 있다. 그 곁에 많이 뒷간을 시설한다. 고로 뒷간의 이름이 또한 그것(후가)과 서로 혼람한다. ▲옛 사람들은 架를 閣이라고 일컬었음.
●祖師 一宗一派를 개창한 사람을 開祖라고 이르고 혹은 그 교법을 전승한 사람을 列祖라고 말함. 開祖에 宗祖와 派祖의 다름이 있음. 例如 일반적으로 존칭하여 보리달마를 선종의 宗祖라 하고 의현이나 양개는 곧 분별하여 임제종 조동종의 派祖라 함. 불교의 각 종파는 다 그 列祖의 相承을 중시하나니 예컨대(如) 선종은 西天의 二十八祖와 東土의 六祖가 있으며 천태종은 동토의 九祖와 十七祖가 있으며 화엄종은 五祖 七祖 十祖가 있으며 진언종은 八祖가 있으며 정토종은 五祖 十六祖가 있는 등임.
●祖師西來意 초조달마가 서천으로부터 이 땅에 와서 禪法을 전했거니와 구경에 의사가 무엇인가. 이 의사를 究明하면 곧 불조의 심인을 구명함임.
●山僧 山野의 僧이라고 말함과 같나니 謙辭임.
●啗啄탁 啗담은 먹음임. 깨물음임.
●註脚 註釋임. 脚註임. 반의어는 頭註임. 脚은 물체의 하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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