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오십삼가주

금강경오십삼가주(金剛經五十三家註) 이색이상분제이십(離色離相分第二十)

태화당 2019. 9. 20. 09:17

離色離相分第二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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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相緣妄生이라 離妄卽見性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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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과 모양이 망념(妄念) 때문에 나는지라 망념을 여의면 곧 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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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七斷無爲何有相好疑니라 論云 若諸佛以無爲得名인댄 云何諸佛成就相好하야 而名爲佛此約法身佛故以爲疑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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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칠(十七)은 무위거늘 어찌 상호(相好)가 있겠는가 하고 의심함을 끊음이다. 논에 이르되 만약 제불이 무위로써 이름을 얻는다면 어떻게 제불이 상호를 성취하여 이름해 부처라 하는가. 이는 법신불(法身佛)에 의거(依據. )한 고로 의심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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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 於意云何 佛可以具足色身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色身見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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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여 뜻에 어떠한가, 부처를 가히 구족색신(具足色身)으로써 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응당 구족색신으로써 보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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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雄曰 色身者 三十二相也 具足者 無一而虧欠也니라 備三十二行이면 而具足是相이니 三十二行 法身中有之니라 欲見法身如來인댄 識自本心하고 見自本性하면 足矣어늘 豈應見於具足色身也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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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웅이 가로되 색신이란 것은 삼십이상(三十二相)이며 구족이란 것은 하나도 모자람이 없음이다. 삼십이행(三十二行)을 갖추면 이 상()을 구족하나니 삼십이행은 법신 가운데 있다. 법신여래를 보고자 한다면 자기의 본심을 알고 자기의 본성을 보면 족하거늘 어찌 응당 구족색신에서 보겠는가.

 

何以故 如來說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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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연고냐, 여래가 설한 구족색신은 곧 구족색신이 아닌 이 이름이 구족색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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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雄曰 壇經云 皮肉是色身이라하고 華嚴經云 色身非是佛이라하니 觀此則知肉身無如來하고 殊不知有生如來存焉이며 知色身非法身하고 殊不知有妙色身存焉이로다 華嚴經又云 淸淨妙色身 神力故顯現하나니 曰妙色身이다하니 則現一切色身三昧 便是法身如來 卽非具足色身可知로다 以非具足色身 而名爲具足色身者 蓋得其所以 具足色身故也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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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웅이 가로되 단경(壇經. 육조단경)에 이르기를 피육(皮肉)이 이 색신이라 하고 화엄경에 이르되 색신은 이 부처가 아니라 하니 이를 보건대 곧 육신엔 여래가 없는 줄만 알고 생여래(生如來)가 존재하여 있음을 너무 알지 못하며 색신은 법신이 아닌 줄만 알고 묘색신(妙色身)이 존재하여 있음을 너무 알지 못한다. 화엄경에 또 이르되 청정한 묘색신이 신력(神力)의 연고로 환히 나타나나니 가로되 묘색신이라 했다. 곧 일체의 색신삼매(色身三昧)를 나타냄은 바로 이 법신여래며 곧 구족색신(具足色身)이 아닌 줄 가히 알지로다. 구족색신(具足色身)이 아님을 이름해 구족색신(具足色身)이라 한 것은 대개 그 소이를 얻음이 구족색신(具足色身)인 연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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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可以具足諸相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諸相見이니다 何以故 如來說諸相具足 卽非具足 是名諸相具足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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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여 뜻에 어떠한가, 여래를 가히 구족제상(具足諸相)으로써 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응당 구족제상으로써 보지 못합니다. 무슨 연고냐, 여래가 설하신 제상구족(諸相具足)이 곧 구족이 아닌 이 이름이 제상구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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顏丙曰 佛 覺也 覺性如虗空이라 不應以具足色身見이며 唯見性人이라사 方知卽非色身이니라 如夫子毋我 顏子坐忘 是也니라 自性如來 不應以具足諸相見이니 性尙不可得이어늘 又何有諸相이리오 故以卽非之說 爲掃除之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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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이 가로되 불()은 각()이니 각성(覺性)이 허공과 같은지라 응당 구족색신(具足色身)으로써 보지 못하며 오직 견성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곧 색신이 아닌 줄 안다. 예컨대() 부자(夫子)1의 무아(毋我)안자(顏子)2좌망(坐忘)3이 이것이다. 자성여래(自性如來)는 응당 구족제상(具足諸相)으로써 보지 못하나니 자성도 오히려 가히 얻지 못하거늘 또 어찌 제상(諸相)이 있으리오. 고로 즉비(卽非)의 설로써 소제(掃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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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祖謂牛頭融禪師曰 百千妙門 同歸方寸하고 恒沙功德 總在心源이니라 一切空門 一切慧門 一切行門 悉皆具足하며 神通妙用 只在你心하니라 業障煩惱 本來空寂이며 一切果報 性相 平等하며 大道虗曠하야 絕思絕慮 如是之法 無欠無餘하야 與佛無殊 更無別法이니라 但只令心自在케하고 莫懷妄想하며 亦莫歡忻하며 莫起貪嗔하며 莫生憂慮하라 蕩蕩無礙하니 任意縱橫하라 不作諸善하고 不作諸惡하라 行住坐臥 觸目遇緣 皆是佛之妙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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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四祖)4우두융선사(牛頭融禪師)5에게 일러 가로되 백천(百千)의 묘문(妙門)이 한가지로 방촌(方寸)6으로 돌아가고 항사(恒沙. 恒河沙)의 공덕이 모두 심원(心源)에 있다. 일체의 공문(空門)과 일체의 혜문(慧門)과 일체의 행문(行門)을 다 모두 구족했으며 신통과 묘용이 다만 너의 마음에 있느니라. 업장과 번뇌가 본래 공적(空寂)하며 일체의 과보의 성상(性相)이 평등하며 대도가 허광(虗曠)하여 사()도 끊기고 여()도 끊겼으니 이와 같은 법은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어서 부처와 다름이 없으며 다시 다른 법이 없다. 단지 마음으로 하여금 자재케 하고 망상(妄想)을 품지 말며 또한 환흔(歡忻)하지 말며 탐진(貪嗔)을 일으키지 말며 우려(憂慮)를 내지 말아라. 탕탕무애(蕩蕩無礙)하니 뜻대로 종횡(縱橫)하라. 제선(諸善)을 짓지 말고 제악(諸惡)을 짓지 말아라.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촉목우연(觸目遇緣)이 다 이 부처의 묘용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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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印明禪師頌曰 養就家欄水牯牛 自歸自去有來由로다 如今穩坐深雲裏하니 秦不管兮漢不收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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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명선사(祖印明禪師. 미상)이 송왈 집 우리에서 양육해 성취한 수고우(水牯牛)7/ 스스로 돌아오고 스스로 가면서 내유(來由)가 있도다/ 여금에 깊은 구름 속에 온좌(穩坐)했으니/ ()에 상관하지 않고 한()에도 거두어지지 않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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川禪師曰 官不容針이나 私通車馬니라 頌曰 請君仰面看虗空하라 廓落無邊不見踪이로다 若解轉身些子力이면 頭頭物物總相逢이니라

 

천선사가 가로되 관()에서는 바늘도 용납하지 않으나 사적으론 거마도 통한다. 송왈 그대에게 청하노니 얼굴을 쳐들어 허공을 보아라/ 확락(廓落. 空寂)하고 무변하여 종적을 보지 못하도다/ 만약 전신(轉身)할 조금의 힘을 안다면/ 두두물물(頭頭物物)에서 모두 상봉하느니라.

 

 

    1. 부자(夫子); 여기에선 공자(孔子)를 가리킴.
    2. 안자(顏子); 안회(顔回. 前 521~前 490)니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유학자(儒學者). 공자의 수제자임.
    3. 좌망(坐忘); 좌선할 때 자가(自家)의 현전(現前)의 세계를 망각(忘卻)함이니 도가(道家)에서도 자고(自古)로 또한 좌망의 설(說)이 있음.
    4. 사조(四祖); 동토선종(東土禪宗) 제사조(第四祖)인 도신(道信. 580~651)이니 승찬(僧璨)에게서 법을 이었고 홍인(弘忍)에게 전했음.
    5. 우두융(牛頭融); 당대승(唐代僧) 법융(法融. 594~657)이니 우두종(牛頭宗)의 개조(開祖)임. 사조도신(四祖道信)의 법을 이었음.
    6. 방촌(方寸); 조론소상(肇論疏上)에 이르되 방촌(方寸)이란 것은 심(心)이다.
    7. 수고우(水牯牛); 곧 물소(水牛)임. 옥편(玉篇) 고(牯) 암소(牝牛)이다. 정자통(正字通) 고(牯) 속칭 수소(牡牛)를 가로되 고(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