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주해

벽암록 제23칙 수시 본칙 평창

태화당 2021. 8. 25. 10:43

垂示云 *玉將火試 *金將石試 *劍將毛試 *水將杖試 至於衲僧門下 一言一句 一機一境 一出一入 一挨一拶 要見深淺 要見向背 且道將什麽試 請擧看

 

玉將火試; 淮南子俶眞訓 鍾山之玉 炊以鑪炭 三日三夜而色澤不變

金將石試; 有試金石 其狀圓渾而純黑色 以金於上試磨之 以視其色 眞僞高低悉可辨驗 南金第一紫黃色金 第二正黃色 日本金第三靑黃色 [碧巖錄不二鈔]

劍將毛試; 試利劍 以毛吹於刃上 卽斬斷也

水將杖試; 以杖試水之淺深也

 

수시(垂示)하여 이르되 옥은 불을 가져 시험하고(*玉將火試) 금은 돌을 가져 시험하고(*金將石試) 검은 털을 가져 시험하고(*劍將毛試) 물은 지팡이를 가져 시험하거니와(*水將杖試) 납승의 문하(門下)에 이르러선 11(一言一句)11(一機一境)11(一出一入)11(一挨一拶; 한 번 밀치고 한번 핍박함)에 심천(深淺)을 보고자 하며 향배(向背)를 보고자 할진대 그래 말하라 무엇을 가져 시험 하는가. 청컨대 들어보아라(擧看).

 

玉將火試; 회남자 숙진훈(俶眞訓). 종산(鍾山)의 옥은 노탄(鑪炭)으로 불을 때어 33(三日三夜)에도 색택(色澤)이 변하지 않는다.

金將石試; 시금석(試金石)이 있으며 그 형상은 원혼(圓渾; 새기거나 쫀 흔적이 없음)하면서 순흑색임. 금을 위에서 그것을 시험하여 갈고는 그 색을 살피는데 진위와 고저를 다 가히 변험(辨驗). 남금(南金; 중국 荊州揚州 지방에서 나는 황금으로, 품질이 좋은 것으로 이름이 높음)의 제1은 자황색금(紫黃色金)이며 제2는 정황색(正黃色). 일본금은 제3이며 청황색임 [벽암록 불이초].

劍將毛試; 예리한 검을 시험하려면 털을 칼 위에서 불매 곧 베어져 끊김.

水將杖試; 지팡이로써 물의 천심(淺深)을 시험함.

 

二三*保福*長慶遊山次這兩箇落草漢 福以手指云 只這裏便是*妙峰頂*平地上起骨堆 切忌道著 掘地深埋 慶云 是則是 可惜許若不是*鐵眼銅睛幾被惑了 同病相憐 兩箇一坑埋却 雪竇著語云 今日共這漢遊山 圖箇什麽不妨減人斤兩 猶較些子 傍人按劍 復云 百千年後不道無 只是少少賣弄 也是雲居羅漢 後擧似鏡淸有好有惡 淸云 若不是孫公 便見髑髏遍野同道者方知 大地茫茫愁殺人 奴見婢慇懃 設使臨濟德山出來 也須喫棒

 

保福; 保福從展 從展(?-928) 五代僧 福州人 姓陳氏 年十五禮雪峰爲受業師 十八本州大中寺具戒 遊吳楚間 後歸執侍雪峰 嗣其法 梁貞明四年(918) 漳州刺史創保福院請居之 後唐明宗天成戊子三月二十二日入寂 [傳燈錄十九 五燈全書十四]

長慶; 長慶慧稜 慧稜(854-932) 五代後唐僧 號超覺 杭州(浙江)鹽官人(宋高僧傳作海鹽人) 俗姓孫 人稱孫公 十三歲於蘇州通玄寺出家受具足戒 歷參靈雲志勤 雪峰義存 玄沙師備等師 曾依止雪峰義存三十年 後爲其法嗣 唐代天祐三年(906) 住於泉州(福建)招慶院 後住福州(福建)長慶院 於後唐長興三年示寂 壽七十九 僧臘六十 [宋高僧傳十三 傳燈錄十八 佛祖歷代通載十七]

妙峰頂; 卽須彌山 按華嚴經入法界品 善財童子於妙峰山頂上 向德雲比丘 請示菩薩行 在禪林中 用妙峰一詞 形容超絶一切言語思惟 情識分別之絶對境界 卽指本分安住之處 稱爲妙峰孤頂 妙峰頂 孤峰頂上

平地上起骨堆; 意謂做沒有埋死人的假墳 譏刺禪人做作多事 虛妄徒勞 骨堆 墳墓

鐵眼銅睛; 與鐵額銅頭同義 形容本色禪僧 根器靈敏 機鋒强硬

 

二三()하다. 보복(*保福)과 장경(*長慶)이 유산(遊山)하던 차에 이 두 개의 낙초한(落草漢)이여. 보복이 손으로써 가리키며 이르되 다만 이 속이 곧 이 묘봉정(*妙峰頂)이다. 평지 위에 뼈 무더기를 일으킨다(*平地上起骨堆). 말함(道著)을 간절히 꺼리나니 땅을 파서 깊이 묻으리라. 장경이 이르되 옳기야 곧 옳지만 가석하다(可惜許; 는 조사). 만약 이 철안동정(*鐵眼銅睛)이 아니었다면 거의 혹()함을 입었으리라. 동병상련(同病相憐)이다. 두 개를 한 구덩이에 묻어버리겠다. 설두가 착어하여 이르되 금일 이 자(這漢)와 함께 유산하여 저() 무엇을 도모했는가. 사람의 근량(斤兩)을 감함에 방애되지 않으므로 오히려 조금은 상당하다. 곁의 사람이 검을 어루만진다. 다시 이르되 백천 년 후에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다만 이 적다 하노라. 소매롱(少賣弄)이로구나. 또한 이 운거라한(雲居羅漢)이다. 후에 경청(鏡淸)에게 거사(擧似; 들어 보임)하니 좋음도 있고 나쁨도 있다(有好有惡). 경청이 이르되 만약 이 손공(孫公; 長慶의 성이 손씨)이 아니었다면 곧 촉루(髑髏; 해골)가 들판에 두루함을 보았으리라. 도가 같은 자라야 비로소 안다. 대지가 망망(茫茫)하여 사람을 너무 근심스럽게 한다. 종놈이 종년을 보면 은근해진다(奴見婢慇懃). 설사 임제와 덕산이 나오더라도 또한 반드시 몽둥이를 받으리라().

 

保福; 보복종전임. 종전(從展) (?-928) 오대승. 복주 사람이며 성은 진씨. 나이 15에 설봉(雪峰)을 예알하고 수업사(受業師)로 삼았음. 18에 본주(本州) 대중사에서 구계(具戒)했고 오초(吳楚) 사이를 유람했음. 후에 돌아와 설봉을 집시(執侍)하다가 그의 법을 이었음. () 정명(貞明) 4(918) 장주자사(漳州刺史)가 보복원(保福院)을 창건하고 청하여 거주하게 했음. 후당 명종 천성(天成) 무자(戊子) 322일에 입적했음 [전등록19. 오등전서14].

長慶; 장경혜릉임. 혜릉(慧稜) (854-932) 오대 후당승. 호는 초각(超覺)이며 항주(杭州; 절강) 염관(鹽官) 사람이며(송고승전엔 海鹽人으로 지어졌음) 속성(俗姓)은 손()이며 사람들이 손공(孫公)이라 일컬었음. 13세에 소주(蘇州) 통현사(通玄寺)에서 출가해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음. 영운지근(靈雲志勤)ㆍ설봉의존(雪峰義存)ㆍ현사사비(玄沙師備) 등의 스님들을 역참(歷參)했음. 일찍이 30년 동안 설봉의존에게 의지(依止)했고 후에 그의 법사(法嗣)가 되었음. 당대(唐代) 천우(天祐) 3(906) 천주(泉州; 복건) 초경원(招慶院)에 주()하다가 뒤에 복주(福州; 복건) 장경원(長慶院)에 주()했음. 후당(後唐) 장흥(長興) 3년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79며 승랍은 60 [송고승전13. 전등록18. 불조역대통재17].

妙峰頂; 즉 수미산. 화엄경 입법계품을 안험컨대 선재동자가 묘봉산 정상에서 덕운비구를 향해 보살행을 교시(敎示)함을 청했음. 선림 중에 있어서 묘봉 1()를 사용함은 일체의 언어와 사유, 정식(情識)과 분별을 초절(超絶)한 절대(絶對)의 경계를 형용함. 곧 본분으로 안주할 곳을 가리킴이니 묘봉고정(妙峰孤頂)ㆍ묘봉정ㆍ묘봉정상으로 호칭함.

平地上起骨堆; 뜻으로 이르자면 죽은 사람을 매장함이 있지 아니한 가분(假墳)을 만듦이니 선인(禪人)이 다사(多事)를 주작(做作)하면서 허망하게 헛수고함을 기자(譏刺; 헐뜯고 비꼬아서 말함)함임. 골퇴(骨堆)는 분묘(墳墓).

鐵眼銅睛; 철액동두(鐵額銅頭)와 같은 뜻. 본색의 선승이 근기가 영민(靈敏)하고 기봉(機鋒)이 강경함을 형용함.

 

保福長慶鏡淸 總承嗣雪峰 他三人同得同證 同見同聞 同拈同用 一出一入 遞相挨拶 蓋爲他是同條生底人 擧著便知落處 在雪峰會裏 *居常問答 只是他三人 古人*行住坐臥 以此道爲念 所以擧著便知落處 一日遊山次 保福以手指云 只這裏便是妙峰頂 如今禪和子 恁麽問著 便只口似匾檐 賴値問著長慶 爾道保福恁麽道 圖箇什麽 古人如此 要驗他有眼無眼 是他家裏人 自然知他落處 便對他道 是卽是可惜許 且道長慶恁麽道 意旨如何 不可一向恁麽去也 似則似 罕有等閑無一星事 賴是長慶識破他 雪竇著語云 今日共這漢遊山 圖箇什麽 且道落在什麽處 復云 百千年後不道無 只是少 雪竇解*點胸 正似黃檗道不道無禪只是無師 雪竇恁麽道 也不妨險峻 若不是同聲相應 爭得如此孤危奇怪 此謂之著語 落在兩邊 雖落在兩邊 却不住兩邊 後擧似鏡淸 淸云 若不是孫公便見髑髏遍野 孫公乃長慶俗姓也 不見僧問趙州 如何是妙峰孤頂 州云 老僧不答爾這話 僧云 爲什麽不答這話 州云 我若答爾 恐落在平地上 *敎中說妙峰孤頂 *德雲比丘 從來不下山 *善財去參 七日不逢 一日却在別峰相見 及乎見了 却與他說一念三世 一切諸佛 智慧光明 普見法門 德雲旣不下山 因什麽却在別峰相見 若道他下山 敎中道 德雲比丘從來不曾下山 常在妙峰孤頂 到這裏 德雲與善財 的的在那裏 自後*李長者打葛藤 打得好 道妙峰孤頂 是一味平等法門 一一皆眞 一一皆全 向無得無失 無是無非處獨露 所以善財不見 到稱性處 如眼不自見 耳不自聞 指不自觸 如刀不自割 火不自燒 水不自洗 到這裏 敎中大有老婆相爲處 所以放*一線道 於第二義門 立賓立主 立機境立問答 所以道 *諸佛不出世 亦無有涅槃 方便度衆生 故現如斯事 且道 畢竟作麽生免得鏡淸雪竇恁麽道去 當時不能拍拍相應 所以盡大地人髑髏遍野 鏡淸恁麽證將來 那兩箇恁麽用將來 雪竇後面頌出更顯煥 頌云

 

居常; 平常時 日常

行住坐臥; 卽四威儀 指日常之生活擧止

點胸; 此指自我炫耀的動作 高傲 自負

敎中說; 見華嚴經六十二

德雲比丘; 按華嚴經入法界品 善財最初受文殊敎 遊行南方 往勝樂國妙峰山 先參德雲比丘

善財; 按華嚴經入法界品 文殊師利在福城東 住莊嚴幢娑羅林中 其時福城長者子有五百童子 善財其一人也 善財生時 種種珍寶自然涌出 以此事故 父母親屬及善相師 共呼此兒名曰善財 善財詣文殊師利所發心 從此漸次南行 參五十三知識而證入法界

李長者; 指李通玄(635-730) 唐代華嚴學者 王族出身 或謂滄州(河北滄縣)人 開元七年(719) 隱於太原府壽陽方山之土龕 參究新譯華嚴經 居山中數載 每日僅以棗顆柏葉餠爲食 世稱棗柏大士 開元十八年三月 於龕室坐化 享年九十六 宋徽宗賜號顯敎妙嚴長者 所著有新華嚴經論四十卷 華嚴經會釋論十四卷 十玄六相 百門義海等 [華嚴經決疑論序及後記 華嚴經合論卷首李長者事迹 唐李長者通玄行蹟記 昭化寺帖]

一線道; 形容極小的距離或空間 上已出

諸佛不出世; 華嚴經二十三 兜率宮中偈讚品云 如來不出世 亦無有涅槃 以本大願力 示現自在法

 

보복ㆍ장경ㆍ경청이 모두 설봉을 승사(承嗣)했으니 저 3인이 동득동증(同得同證)이며 동견동문(同見同聞)이며 동념동용(同拈同用)인지라 11입에 체상(遞相; 갈마들며 서로) 애찰(挨拶; 밀치고 다그치다)하니 대개 그들이 이 동조생(同條生)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착(擧著)하면 곧 낙처를 알았다. 설봉의 회리(會裏)에 있으면서 거상(*居常; 日常)의 문답이 다만 이 저 3인이었다. 고인은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이 도로써 생각을 삼은지라 소이로 거착(擧著)하면 곧 낙처를 알았다. 어느 날 유산하던 차에 보복이 손으로써 가리키며 이르되 다만 이 속이 곧 이 묘봉정(妙峰頂)이다. 여금의 선화자(禪和子)는 이러히 문착(問著)하면 곧 다만 입이 편담과 같겠지만(口似匾檐; 입을 다문 모양) 다행히() 장경에게 문착(問著)함을 만났다. 너희가 말하라, 보복의 이러히 말함이 저() 무엇을 도모함인가. 고인의 이와 같이 함은(물음은) 그의 유안무안(有眼無眼; 눈이 있는지 눈이 없는지)을 시험코자 함이니 이는 그(설봉) 집안의 사람이므로 자연히 그 낙처를 알고 곧 그(보복)에게 응대()하여 말하되 옳기야 곧 옳지만 가석하다(可惜許) 하니 그래 말하라 장경의 이러히 말한 의지가 무엇인가. 한결같이(一向) 이러히 감은 옳지 못하나니(가석하다고 한결같이 말함은 옳지 못함) 비슷하기야 곧 비슷하지만(말은 비슷하지만 뜻은 隔絶) 등한(等閑)히 일성사(一星事; 一點事)도 없는 이가 드물게 있거니와(장경 같은 이가 드물다는 말) 다행히() 이 장경이 그(보복)을 식파(識破)했다. 설두가 착어(著語)하여 이르되 금일 이 자와 함께 유산하면서 저() 무엇을 도모했는가 하니 그래 말하라 어느 곳에 떨어져 있느냐. 다시 이르되 백천 년 후에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거니와 다만 이 적다 하노라 하니 설두가 점흉(*點胸)할 줄 앎이 바로 황벽이 말한 선()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으나 다만 이 사()가 없다 한 것과 비슷하다. 설두가 이러히 말하니 또한 험준함에 방애되지 않는다. 만약 이 동성(同聲)으로 상응함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은 고위기특(孤危奇怪)함을 얻으리오. 이것을 착어(著語)라고 이르나니 양변(兩邊)에 떨어져 있음이며(賓主에 떨어져 있음) 비록 양변에 떨어져 있지만 도리어 양변에 머물지 않는다. 후에 경청에게 거사(擧似; 들어 보임)하자 경청이 이르되 만약 이 손공(孫公)이 아니었다면 촉루(髑髏)가 들판에 두루함을 보았으리라 하니 손공은 곧 장경의 속성(俗姓)이다. 보지 못하는가 중이 조주에게 묻되 무엇이 이 묘봉고정(妙峰孤頂)입니까. 조주가 이르되 노승이 너의 이 화()에 답하지 않겠다. 중이 이르되 무엇 때문에 이 화에 답하지 않습니까. 조주가 이르되 내가 만약 너에게 답한다면 평지상(平地上)에 떨어져 있을까 염려한다 하였다. 교중에 설하되(*敎中說) 묘봉고정의 덕운비구(*德雲比丘)가 종래(從來)로 하산하지 않으니 선재(*善財)가 가서 참례한 지 7일 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어느 날 도리어 별봉(別峰; 다른 봉우리)에 있으면서 상견했고 상견함에 미쳐서는 도리어 그(선재)에게 설하여 주되 1()3()며 일체제불의 지혜광명이 널리 법문(法門)을 나타낸다() 하였다. 덕운이 이미 하산하지 않았거늘 무엇 때문에() 도리어 별봉에 있으면서 상견했는가. 만약 그가 하산했다고 말할진대 교중(敎中)에 말하되 덕운비구가 종래로 일찍이 하산하지 않고 늘 묘봉고정에 있다 하니 이 속에 이르러 덕운과 선재가 적적(的的; 확실. 진실. ) 어느 속에 있는가. 자후(自後; 이로부터 뒤)로 이장자(*李長者)가 타갈등(打葛藤; 언구에 뒤얽힘)하니 타득(打得)함이 훌륭하다. 말하되 묘봉고정은 이 일미(一味)의 평등법문이므로 하나하나가 다 진()이며 하나하나가 다 전()인지라 무득무실(無得無失)과 무시무비(無是無非)한 곳을 향해 독로하는지라 소이로 선재가 보지 못했다 하고 칭성처(稱性處; 法性稱合하는 곳)에 이르러선 눈이 스스로를 보지 못하고 귀가 스스로를 듣지 못하고 손가락이 스스로를 접촉()하지 못함과 같고 칼이 스스로를 베지 못하고 불이 스스로를 태우지 못하고 물이 스스로를 씻지 못함과 같다 하니 이 속에 이르러 교중(敎中)에 매우() 노파(노파심)로 상위(相爲)하는 곳이 있다. 소이로 일선도(*一線道)를 놓아 제이의문(第二義門)에서 빈()을 세우고 주()를 세우고 기경(機境)을 세우고 문답을 세운다. 소이로 말하되 제불이 출세하지 않고(*諸佛不出世)/ 또한 열반도 있지 않지만/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하고자/ 고로 이와 같은 일을 나타낸다 하니 그래 말하라, 필경 어떻게 해야 경청과 설두의 이러히 말함을 면득(免得)하겠는가(는 조사). 당시에 능히 박박(拍拍; 拍子와 박자)이 상응하지 아니한지라 소이로 온 대지인(大地人)의 촉루가 들판에 두루하리라(온 대지인이 無事로 앎을 지어 死漢이 됨을 말함) 하여 경청이 이러히 증명하여 가져오고 저() 두 개(보복과 장경)는 이러히 써서() 가져오고 설두는 후면에 송하여 내니 다시 현환(顯煥)하다. 송해 이르되

 

居常; 평상시, 일상.

行住坐臥; 곧 사위의(四威儀)니 일상의 생활거지(生活擧止)를 가리킴.

點胸; 여기에선 자아(自我)가 현요(炫耀; 誇耀)하는 동작을 가리킴이니 고오(高傲), 자부임.

敎中說; 화엄경62를 보라.

德雲比丘; 화엄경 입법계품을 안험(按驗; 查驗)하니 선재가 최초에 문수의 가르침을 받아 남방을 유행(遊行)하다가 승락국(勝樂國) 묘봉산(妙峰山)에 가서 먼저 덕운비구(德雲比丘; Meghaśrī-bhikṣu)를 참례했음.

善財; 화엄경 입법계품을 안험컨대 문수사리가 복성(福城)의 동쪽에 있으면서 장엄당사라림(莊嚴幢娑羅林) 중에 머물렀다. 그때 복성의 장자(長者)가 아들이 5백 동자가 있었는데 선재도 그 한 사람이다. 선재가 태어났을 때 갖가지 진보(珍寶)가 자연히 용출했다. 이 일을 쓴 고로 부모와 친속 및 선상사(善相師)가 모두 이 아이를 호칭하며 이름해 가로되 선재라 했다. 선재가 문수사리의 처소에 나아가서 발심하여 여기로부터 점차 남행하여 53지식을 참알하여 법계에 증입(證入)했다.

李長者; 指李通玄(635-730) 당대 화엄학자. 왕족 출신. 혹 이르기를 창주(滄州; 하북 창현) 사람이라 함. 개원(開元) 7(719) 태원부(太原府) 수양(壽陽) 방산(方山)의 토감(土龕)에 은거하며 신화엄경을 참구했으며 산중에 거주하기 몇 해에 매일 겨우 대추와 잣잎의 떡으로써 식사를 삼았으며 세칭이 조백대사(棗柏大士). 개원 183월 감실(龕室)에서 좌화(坐化)했음. 향년은 96. 송휘종이 현교묘엄장자란 호를 주었음. 소저(所著)에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40권ㆍ화엄경회석론 14권ㆍ십현육상ㆍ백문의해 등이 있음 [화엄경결의론서급후기. 화엄경합론권수이장자사적. 당이장자통현행적기. 소화사첩].

一線道; 극소의 거리 혹 공간을 형용함. 위에 이미 나왔음.

諸佛不出世; 화엄경23 도솔궁중게찬품에 이르되 여래는 출세하지 않고/ 또한 열반도 있지 않지만/ 본래의 대원력으로써/ 자재한 법을 시현(示現)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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