垂示云 鏌鎁橫按 鋒前剪斷葛藤窠 明鏡高懸 句中引出*毘盧印 田地穩密處 著衣喫飯 神通遊戲處 如何湊泊 還委悉麽 看取下文
●毘盧印; 毘盧遮那佛之法界定印 照破法界之普遍光明定印 用以判定學人境界之眞僞
수시(垂示)하여 이르되 막야(鏌鎁)를 횡안(橫按)하여 봉전(鋒前)에 갈등의 둥지를 전단(剪斷)하며 명경을 고현(高懸; 높이 걸다)하여 구중(句中)에 비로인(*毘盧印)을 인출(引出)한다. 전지(田地; 경계)가 온밀(穩密)한 곳에서는 옷 입고 밥 먹거니와 신통으로 유희하는 곳엔 어떻게 주박(湊泊)하는가. 도리어 자세히 알고자 하느냐, 하문(下文)을 간취(看取)하라.
●毘盧印; 비로자나불의 법계정인(法界定印)이니 법계를 조파(照破)하는 보편(普遍)한 광명의 정인(定印)임. 학인의 경계의 진위를 판정하는 데 사용함.
【七四】擧 *金牛和尙每至齋時 自將飯桶 於僧堂前作舞 呵呵大笑云 菩薩子 喫飯來竿頭絲線從君弄 不犯淸波意自殊 醍醐毒藥一時行 是則是七珍八寶一時羅列 爭奈相逢者少 雪竇云 雖然如此 金牛不是好心是賊識賊 是精識精 來說是非者 便是是非人 僧問長慶 古人道 菩薩子喫飯來 意旨如何不妨疑著 元來不知落處 長慶道什麽 慶云 大似因齋*慶讚相席打令 據款結案
●金牛; 唐代僧 居鎭州某寺 馬祖道一法嗣 [傳燈錄八]
●慶讚; 慶祝讚嘆
【七四】 거(擧)하다. 금우화상(*金牛和尙)이 매일 재시(齋時)가 되면(至) 스스로 반통(飯桶)을 가지고 승당(僧堂) 앞에서 춤추면서 하하 대소하고 이르되 보살자(菩薩子; 子는 後綴)야 밥 먹으러 오너라. 낚싯대와 낚싯줄은 그대의 희롱하는 대로 좇겠지만 청파(淸波)를 범하지 못함은 뜻이 스스로 특수하여서이다. 제호(醍醐)와 독약을 일시에 행하니 옳기는 곧 옳지만 칠진팔보(七珍八寶)를 일시에 나열하였으되 상봉하는 자가 적음을 어찌하리오. 설두가 이르되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금우가 이 호심(好心)이 아니다. 이 도적이 도적을 알고 이 정령(精靈)이 정령을 안다. 와서 시비를 설하는 자가 곧 이 시비하는 사람이다. 중이 장경(長慶; 慧稜)에게 묻되 고인이 말한 보살자에 밥 먹으러 오너라 한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의착(疑著)하기에 방애되지 않는다. 원래 낙처를 알지 못했구나. 장경이 무엇이라고 말할까. 장경이 이르되 재(齋)를 인해 경찬(*慶讚)함과 매우 흡사하다. 좌석을 보고 영을 짓는다(相席打令). 거관결안(據款結案)이다.
●金牛; 당대승. 진주의 모사(某寺)에 거주했고 마조도일의 법사 [전등록8].
●慶讚; 경축(慶祝)하며 찬탄함.
金牛乃馬祖下尊宿 每至齋時 自將飯桶 於僧堂前作舞 呵呵大笑云 菩薩子喫飯來 如此者二十年 且道他意在什麽處 若只喚作喫飯 尋常*敲魚擊鼓 亦自告報矣 又何須更自將飯桶來 作許多伎倆 莫是他顚麽 莫是提唱建立麽 若是提唱此事 何不去寶華王座上 *敲床竪拂 須要如此作什麽 今人殊不知 古人意在言外 何不且看祖師當時初來底題目道什麽 分明說道 敎外別傳 單傳心印 古人方便 也只敎爾直截承當去 後來人妄自卜度 便道那裏有許多事 寒則向火 熱則乘涼 飢則喫飯 困則打眠 若恁麽以常情 義解詮註 達磨一宗 掃土而盡 不知古人 向二六時中 念念不捨 要明此事 雪竇云 雖然如此 金牛不是好心 只這一句 多少人錯會 所謂醍醐上味 爲世所珍 遇斯等人 翻成毒藥 金牛旣是落草爲人 雪竇爲什麽道 不是好心 因什麽却恁麽道 衲僧家須是有生機始得 今人不到古人田地 只管道見什麽心 有什麽佛 若作這見解 壞却金牛老作家了也 須是子細看始得 若只今日明日 口快些子 無有了期 後來長慶上堂 僧問 古人道 菩薩子喫飯來 意旨如何 慶云 大似因齋慶讚 尊宿家忒殺慈悲 漏逗不少 是則是 因齋慶讚 爾且道 慶讚箇什麽 看他雪竇頌云
●敲魚擊鼓; 魚 木魚 鼓 庫前大鼓
●敲床竪拂; 敲擊法座 竪起拂子 並是禪家常用的示機或應機動作 泛指禪機作略
금우(金牛)는 곧 마조하의 존숙이다. 매일 재시(齋時)가 되면 스스로 반통(飯桶)을 가지고 승당(僧堂) 앞에서 춤추면서 하하 대소하고 이르되 보살자야 밥 먹으러 오너라 하여 이와 같이 하기를 20년이니 그래 말하라 그의 뜻이 어느 곳에 있느냐. 만약 다만 끽반(喫飯)이라고 불러 짓는다면 심상(尋常)에 목어를 두드리고 북을 치더라도(*敲魚擊鼓) 또한 고보(告報; 報告)거늘 또 어찌 꼭 다시 스스로 반통을 가지고 와서 허다한 기량(伎倆)을 짓는가. 이는 그가 전광(癲狂; 顚. 미치다)한 것이 아닐까. 이는 제창(提唱)하고 건립함이 아닐까. 만약 이 차사(此事)를 제창함이라고 할진대 왜 보화왕좌(寶華王座) 위로 가서 법상(法床)을 두드리거나 불자를 세우지(*敲床竪拂) 않고 이와 같음을 수요(須要; 需要)하여 무엇하겠느냐. 요즘 사람은 고인의 뜻이 언외(言外)에 있는 줄 너무 알지 못한다. 어찌하여, 조사가 당시에 처음 와서 제목을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를 차간(且看; 且는 發語詞)하지 않느냐. 분명히 설해 말하되 교외(敎外)에 별전(別傳)하는 단전심인(單傳心印; 오로지 심인을 전하다)이라 하였으니 고인의 방편이 또한 다만 너희로 하여금 직절(直截)하여 승당(承當)하여 가게 함이거늘 후래에 사람들이 허망하게 스스로 복탁(卜度; 헤아림)하여 곧 말하되 나리(那裏)에 허다한 일이 있으리오 추우면 곧 향화(向火)하고 더우면 곧 승량(乘涼)하고 주리면 곧 끽반(喫飯)하고 피곤하면 곧 타면(打眠; 睡眠. 打는 前綴)한다 하나니 만약 이렇게 상정(常情)으로써 의해(義解; 뜻으로 풀이)하여 전주(詮註)한다면 달마일종(達磨一宗)이 땅을 쓴 듯 없어지리라. 고인은 이륙시(二六時) 가운데를 향해 염념(念念)에 불사(不捨)하고 차사(此事)를 밝히고자 하였음을 알지 못한다. 설두가 이르되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으나 금우가 호심(好心)이 아니다 하니 다만 이 1구를 다소의 사람이 착회(錯會)하나니 이른 바 제호(醍醐)의 상미(上味)가 세상에서 진기한 바가 되지만 이런 등의 사람을 만나면 도리어 독약이 된다. 금우가 이미 이 낙초(落草)하여 사람을 위하거늘 설두가 무엇 때문에 이 호심이 아니라고 말했는가. 무엇 때문에 도리어 이러히 말했는가. 납승가(衲僧家)는 반드시 이, 생기(生機)가 있어야 비로소 옳거늘 금인(今人)은 고인의 전지(田地)에 이르지 못하고 다만 관대(管帶)하여 말하되 무슨 마음을 보며 무슨 부처가 있으리오 한다. 만약 이런 견해를 짓는다면 금우 노작가(老作家)를 괴각(壞却)한 것이니 반드시 이 자세히 보아야 비로소 옳다. 만약 다만 오늘 내일 하면서 구쾌(口快)한 사자(些子)로는 깨칠 기약이 있지 않다. 후래에 장경이 상당(上堂)하자 중이 묻되 고인이 말한 보살자야 밥 먹으러 오너라 한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장경이 이르되 재로 인해 경찬(因齋慶讚)함과 매우 흡사하다 하니 존숙가(尊宿家)의 특쇄(忒殺; 매우 심함)한 자비지만 누두(漏逗; 泄漏)가 적지 않다. 옳기는 곧 옳지만 재를 인해 경찬한다는 것은 너희가 말하라, 이(箇) 무엇을 경찬함인가. 저 설두의 송운(頌云)함을 보아라.
●敲魚擊鼓; 어(魚)는 목어며 고(鼓)는 고방(庫房) 앞의 큰 북.
●敲床竪拂; 법좌를 치고 두드림과 불자를 세워 일으킴이니 모두 이 선가에서 상용하는 시기(示機) 혹 응기(應機)의 동작임. 널리 선기의 작략을 가리킴.
白雲影裏笑呵呵笑中有刀 熱發作什麽 天下衲僧不知落處 兩手持來付與他豈有恁麽事 莫謗金牛好 喚作飯桶得麽 若是本分衲僧 不喫這般茶飯 若是金毛獅子子須是他格外始得 許他具眼 只恐眼不正 三千里外見誵訛不直半文錢 一場漏逗 誵訛在什麽處 瞎漢
백운의 그림자 속에 하하 웃으면서 웃음 중에 칼이 있다. 열을 내어 무엇하려느냐. 천하 납승이 낙처를 안다. 두 손으로 가져 와서 그들(一會의 大衆)에게 부여하였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으리오. 금우를 비방하지 않음이 좋다. 반통(飯桶)이라고 불러 지음을 얻겠는가. 만약 이 본분납승일진대 이런 종류의 다반(茶飯)을 먹지 않으리라. 만약 이 금모사자의 새끼라면 모름지기 이는 저 격외(格外; 格外漢)라야 비로소 옳다. 그(격외한)에게 눈을 갖추었다고 허락하리라. 다만 눈이 바르지 못할까 염려한다. 3천 리 밖에서 효와(誵訛)를 본다 반문전(半文錢; 동전 1枚)가 1文)의 가치도 안된다. 한바탕 누두(漏逗)로다. 효와(誵訛)가 어느 곳에 있느냐. 눈 먼 자로구나.
白雲影裏笑呵呵 長慶道 因齋慶讚 雪竇道 兩手持來付與他 且道只是與他喫飯 爲當別有奇特 若向箇裏知得端的 便是箇金毛獅子子 若是金毛獅子子 更不必金牛將飯桶來作舞大笑 直向三千里外 便知他敗缺處 古人道 鑒在機先 不消一揑 所以衲僧家 尋常須是向格外用始得稱本分宗師 若只據語言 未免漏逗
백운의 그림자 속에 하하 웃으면서 라고 하니 장경이 말하되 재로 인해 경찬함이다(因齋慶讚) 했다. 설두가 말하되 두 손으로 가져 와서 그들(一會의 大衆)에게 부여하였다 하니 그래 말하라 다만 이느 그들에게 밥을 먹게 하여 줌인가, 마땅히 별다른 기특(奇特)이 있기 때문인가. 만약 이 속(箇裏)을 향해 단적(端的)을 지득(知得)한다면 곧 이는 저(箇) 금모사자의 새끼이려니와 만약 이 금모사자의 새끼라면 금우가 반통을 가지고 와서 춤추며 대소(大笑)함이 다시 필요치 않고 바로 3천 리 밖을 향해 곧 그(금우)의 패결처(敗缺處)를 알리라. 고인이 말하되 감별(鑑別; 鑒)은 기(機)의 앞에 있는지라 1날(揑; 누르다)도 쓰이지(消) 않는다 하니 소이로 납승가는 심상(尋常)에 반드시 이, 격외를 향해 써야 비로소 본분종사라는 칭호를 얻거니와 만약 다만 어언(語言)에 의거한다면 누두(漏逗)를 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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