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의 도제에/ 양기가 걸두니/ 그 파가 울성하여/ 십중 팔구에 이르도다.
❶楚圓徒弟; 楚圓 石霜楚圓 嗣汾陽善昭 臨濟下六世 楚圓(九八六~一○三九) 宋代臨濟宗僧 全州淸湘(廣西桂林)人 俗姓李 少爲儒生 潛心擧業 二十二歲迴心向道 於湘山隱靜寺得度 未久遊襄沔之間 與守芝谷泉結伴入洛陽 聞善昭之道望爲天下第一 遂赴汾州 依止二年 未許入室 每見必詬罵 或毁詆諸方 所訓亦皆流俗鄙事 師一夕訴之 語未竟 昭熟視而罵曰 是惡知識 敢裨販我 擧杖逐之 師欲伸解 昭掩其口 師忽大悟曰 是知臨濟道出常情 遂服役約十二年(一說七年) 盡領其旨 後至幷州 訪唐明智嵩 更與當世名士楊大年李遵욱 時聚論道 後欲歸鄕省母 過筠州(四川) 於洞山見曉聰 依止三年 又遊仰山 時楊大年寄書宜春太守黃宗且 請師住於袁州(江西)南源廣利寺 居三年 辭而省母 又謁神鼎洪諲 洪諲大加讚賞 由是聲名大揚 旣主潭州(湖南)道吾之席 次住石霜山崇勝寺 又轉南嶽福嚴寺 後遷潭州興化寺 寶元二年正月 於潭州興化寺示寂 壽五十四 諡號慈明禪師 法嗣五十人中 以黃龍慧南 楊岐方會最爲知名 各成一派 遺有石霜楚圓禪師語錄一卷(慧南重編) [續傳燈錄三 禪林僧寶傳二十一]
❷楊岐傑斗; 楊岐 楊岐方會 方會(九九六~一○四九) 北宋臨濟宗楊岐派之開祖 石霜楚圓之法嗣 南嶽下十一世 臨濟下七世 袁州(江西)宜春人 俗姓冷 法名方會 初從楚圓掌監院之事 後住筠州九峰山 未久至袁州楊岐山住持普通禪院 大振禪風 宋仁宗慶曆六年(一○四六) 住潭州雲蓋山海會寺 皇祐元年示寂 壽五十四 一說慶曆六年或皇祐二年示寂 壽五十八 與同門慧南之黃龍派對峙 與臨濟 潙仰 曹洞 雲門 法眼等五家 竝稱爲五家七宗 [續燈錄七 佛祖歷代通載十八 五燈會元十九] ◆傑斗 其義有二 一比喩黠慧狡猾之徒的倔傲爭鬥 二指出類拔萃之人物 此指後者
❸其派鬱盛; 中國臨濟宗 自宋至明 唯存楊岐派 明末淸初其派鬱盛 不可勝記 黃龍派 唯宋代蕃盛
❹十洎八九; 中國臨濟宗 楊岐黃龍二派中 至宋末唯存楊岐派 洎 及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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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초원도제(楚圓徒弟); 초원(楚圓) 석상초원(石霜楚圓)이며 분양선소(汾陽善昭)를 이었으니 임제하육세(臨濟下六世)임. 초원(楚圓. 986~1039) 송대(宋代) 임제종 승려며 전주청상(全州淸湘. 廣西 桂林)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이(李리)임. 어릴 적에 유생(儒生)이 되어 거업(擧業. 科擧에 應試하는 일)에 마음을 담갔는데 스물두 살에 마음을 돌려 도(道)로 향했으며 상산(湘山) 은정사(隱靜寺)에서 득도(得度)했음. 오래지 않아 양면(襄沔)의 사이를 유람하다가 수지(守芝. 善昭의 法嗣)ㆍ곡천(谷泉. 善昭의 法嗣)과 결반(結伴)하여 낙양(洛陽)에 들어갔음. 선소(善昭. 臨濟下五世)의 도가 천하제일(天下第一)을 바라본다 함을 듣고 드디어 분주(汾州)에 다다라 이 년을 의지(依止)했으나 입실(入室)을 허락하지 않았음. 매번 보기만 하면 반드시 꾸짖고 욕하였으며 혹은 제방(諸方)을 헐뜯고 흉보았으며 가르치는 바는 또한 다 유속(流俗. 世俗)의 비사(鄙事)였음. 스님이 어느 날 저녁 이를 하소연했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소(善昭)가 찬찬히 보다가 욕하며 가로되 이 악지식(惡知識)이 감히 나를 비판(裨販. 裨는 附)하느냐, 주장자를 들어 쫓아내자 스님이 해설(解說)을 펴려고 하는데 선소가 그 입을 막았음. 스님이 홀연히 대오하고 가로되 이로 알지니 임제의 도가 상정(常情. 범상한 정)을 초출했도다. 드디어 약 십이 년(일설엔 칠 년)을 복역(服役)하면서 그 지취(旨趣)를 다 영오(領悟)했음. 후에 병주(幷州)에 이르러 당명지숭(唐明智嵩. 首山省念의 法嗣)을 방문했고 다시 당세(當世)의 명사(名士) 양대년(楊大年)ㆍ이준욱(李遵勗)과 때때로 모여 도를 논했음. 후에 귀향하여 성모(省母. 모친을 살핌)하려고 균주(筠州. 四川)를 지나다가 동산(洞山)에서 효총(曉聰)을 뵙고 삼 년을 의지(依止)했음. 또 앙산(仰山)을 유람했는데 때에 양대년(楊大年)이 의춘태수(宜春太守) 황종차(黃宗且)에게 서신을 기탁해 스님을 원주(袁州. 江西) 남원(南源)의 광리사(廣利寺)에 주지(住持)하도록 청했음. 삼 년을 거주하다가 고별하고 성모(省母)했음. 또 신정홍인(神鼎洪諲. 臨濟下五世)을 알현(謁見)했는데 홍인이 찬상(讚賞)을 크게 더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성명(聲名)을 크게 날렸음. 이미 담주(潭州. 湖南) 도오(道吾)의 법석을 주재(主宰)하고는 다음으로 석상산(石霜山) 숭승사(崇勝寺)에 주지(住持)했으며 또 남악 복엄사(福嚴寺)로 이전(移轉)하였고 후에 담주(潭州) 흥화사(興化寺)로 옮겼으며 보원이년(寶元二年) 정월 담주 흥화사에서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쉰넷이며 시호(諡號)는 자명선사(慈明禪師)임. 법사(法嗣) 오십 인 중에 황룡혜남(黃龍慧南)과 양기방회(楊岐方會)가 가장 이름이 알려졌으며 각기 일파(一派)를 이루었음. 유작(遺作)에 석상초원선사어록(石霜楚圓禪師語錄. 慧南重編) 일 권이 있음. [續傳燈錄三 禪林僧寶傳二十一].
❷양기걸두(楊岐傑斗); 양기(楊岐) 양기방회(楊岐方會)임. 방회(方會. 996~1049) 북송 임제종 양기파의 개조(開祖)임. 석상초원(石霜楚圓)의 법사(法嗣)니 남악하십일세(南嶽下十一世)며 임제하칠세(臨濟下七世)임. 원주(袁州. 江西) 의춘(宜春)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냉(冷랭)이며 법명은 방회(方會)임. 처음엔 초원(楚圓)을 따르며 감원(監院)의 일을 장악(掌握)했고 뒤에 균주(筠州) 구봉산(九峰山)에 거주했고 오래지 않아 원주(袁州) 양기산(楊岐山)에 이르러 보통선원(普通禪院)에 주지(住持)하며 선풍을 크게 진작(振作)했음. 송(宋) 인종(仁宗) 경력육년(慶曆六年. 1046) 담주(潭州) 운개산(雲蓋山) 해회사(海會寺)에 거주했으며 황우원년(皇祐元年)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쉰넷임. 일설엔 경력육년(慶曆六年) 혹은 황우이년(皇祐二年)에 시적(示寂)했다 하니 나이가 쉰여덟임. 동문인 혜남(慧南)의 황룡파(黃龍派)와 대치(對峙)하며 임제(臨濟)ㆍ위앙(潙仰)ㆍ조동(曹洞)ㆍ운문(雲門)ㆍ법안(法眼) 등 오가(五家)와 아울러 칭하기를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 함. [續燈錄七 佛祖歷代通載十八 五燈會元十九]. ◆걸두(傑斗) 그 뜻이 둘이 있으니 일(一) 힐혜교활(黠慧狡猾. 꾀가 많고 교활)한 무리의 굴오쟁투(倔傲爭鬥. 고집이 세고 오만하며 투쟁함)에 비유함. 이(二) 출류발췌(出類拔萃. 무리에서 아주 뛰어남)의 인물을 가리킴. 여기에선 후자(後者)를 가리킴.
❸기파울성(其派鬱盛); 중국의 임제종은 송(宋)으로부터 명(明)에 이르기까지 오직 양기파(楊岐派)만 남으며 명말청초(明末淸初)에 그 파가 울성(鬱盛)하여 다 기록치 못함. 황룡파(黃龍派)는 오직 송대(宋代)에만 번성했음.
❹십계팔구(十洎八九); 중국 임제종은 양기(楊岐)ㆍ황룡(黃龍) 이파(二派) 중에 송말(宋末)에 이르러선 오직 양기파만 남음. 계(洎) 미치다(及)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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音義 楚 나라 이름 초. 회초리 초. 가시나무 초. 圓 둥글 원. 뚜렷할 원. 徒 무리 도. 弟 제자 제. 아우 제. 楊 버들 양. 岐 갈림길 기. 傑 뛰어날 걸. 斗 말 두. 其 그 기. 派 물갈래 파. 鬱 울창할 울. 우거질 울. 盛 성할 성. 담을 성. 十 열 십. 洎 미칠 계. 이르를 계. 八 여덟 팔. 九 아홉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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