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四斷無人度生嚴土疑니라 論云 若無菩薩者면 諸佛亦不成菩提며 衆生亦不入涅槃이며 亦無淸淨佛土어늘 何故諸菩薩發心하야 欲令衆生入涅槃하며 起心修行淸淨佛土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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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사(十四)는 중생을 제도하거나 불토를 장엄할 사람이 없다는 의심을 끊음이다. 논에 이르되 만약 보살이 없다면 제불도 또한 보리(菩提)를 성취하지 못하며 중생도 또한 열반에 들지 못하며 또한 청정한 불토도 없거늘 무슨 연고로 제보살이 발심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열반에 들게 하며 마음을 일으켜 청정한 불토를 수행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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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여 菩薩亦如是하야 若作是言호대 我當滅度無量衆生이라하면 卽不名菩薩이니라 何以故오 須菩提여 實無有法을 名爲菩薩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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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여,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이 말을 짓되 내가 마땅히 무량한 중생을 멸도한다 하면 곧 보살이라고 이름하지 않느니라. 무슨 연고냐, 수보리여 실로 법이 있지 않음을 이름해 보살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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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文會曰 實無有法名爲菩薩者는 一切空寂하야 本來不生인지라 不見有生死며 不見有涅槃이며 不見有善惡이며 不見有凡聖이며 不見一切法이니 是名見法이니라 正見之時에 了無可見이 卽是菩薩인지라 故云 實無有法을 名爲菩薩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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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회가 가로되 실로 법이 있지 않음을 이름해 보살이라는 것은 일체가 공적(空寂)하여 본래 불생(不生)인지라 생사를 있음으로 보지 않으며 열반을 있음으로 보지 않으며 선악을 있음으로 보지 않으며 범성을 있음으로 보지 않으며 일체법을 보지 않으니 이 이름이 법을 봄이다. 바로 볼 때에 마침내 가히 봄이 없음이 곧 이 보살인지라 고로 이르되 실로 법이 있지 않음을 이름해 보살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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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故佛說호대 一切法은 無我 無人 無衆生 無壽者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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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로 부처가 설하되 일체법은 아가 없고 인이 없고 중생이 없고 수자가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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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雄曰 上文言實無有法이어늘 尙何有法可說耶아 然佛本無言說이니 其所說者는 不過眞空無相이니라 維摩經云 法無衆生이니 離衆生垢故며 法無有我니 離我垢故며 法無壽命이니 離生死故며 法無有人이니 前後際斷故니라하니 此眞空無相法也니라 佛說一切法者는 此耳니 外此則我佛無所說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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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웅이 가로되 윗글에서 말하기를 실로 법이 있지 않다 했거늘 오히려 어찌 가히 설할 법이 있겠는가. 그러하여 부처는 본래 언설이 없으니 그 설한 바의 것은 진공무상(眞空無相)에 불과(不過)하다. 유마경에 이르되 법엔 중생이 없나니 중생구(衆生垢)를 여읜 연고며 법엔 아(我)가 있지 않나니 아구(我垢)를 여읜 연고며 법엔 수명(壽命)이 없나니 생사를 여읜 연고며 법엔 인(人)이 있지 않나니 전후제(前後際)가 끊긴 연고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공무상의 법이다. 부처가 설한 일체법이란 것은 이것일 뿐이니 이 외엔 곧 우리 부처가 설한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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川禪師曰 喚牛卽牛며 呼馬卽馬로다 頌曰 借婆衫子拜婆門하니 禮數周旋已十分이로다 竹影掃堦塵不動이며 月輪穿海水無痕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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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사가 가로되 소라고 부르면 곧 소며 말이라고 부르면 곧 말이다. 송왈 할머니의 적삼을 빌려 할머니의 문에 절하니/ 예배의 수가 두루 돌아 이미 십분이로다/ 대 그림자가 계단을 쓸어도 티끌은 움직이지 않으며/ 월륜이 바다를 뚫어도 물은 흔적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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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여 若菩薩作是言호대 我當莊嚴佛土라하면 是不名菩薩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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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이 말을 짓되 내가 마땅히 불토를 장엄한다 하면 이는 보살이라고 이름하지 못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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疏鈔云 言佛土者는 心土也니 佛土無相이어늘 云何莊嚴이리오 若有莊嚴이면 法卽是增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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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초에 이르되 말한 불토란 것은 심토(心土)니 불토는 모양이 없거늘 어떻게 장엄하리오. 만약 장엄이 있으면 법이 곧 이 증가(增加)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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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以故오 如來說莊嚴佛土者는 卽非莊嚴인 是名莊嚴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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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연고냐, 여래가 설한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닌 이 이름이 장엄이니라.
顏丙曰 心常淸淨하야 不染世緣이 是爲莊嚴佛土也니라 雖曰莊嚴이나 不可作莊嚴相이니 故曰卽非莊嚴이며 但强名而已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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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이 가로되 마음이 늘 청정하여 세연(世緣)에 물들지 않음이 이것이 불토를 장엄함이다. 비록 가로되 장엄이라 했으나 장엄의 모양을 지음은 옳지 못하니 고로 가로되 곧 장엄이 아니며 단지 억지로 이름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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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여 若菩薩이 通達無我法者면 如來說名眞是菩薩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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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무아법(無我法)을 통달한 자면 여래가 설명(說名)하되 참다운 이 보살이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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顏丙曰 通達無我法者는 直下大悟하야 如漆桶底脫이라 四通八達하야 廓然無我니 我身旣無어늘 何更有法이리오 人法雙忘하야사 只這眞是菩薩이니 更莫別求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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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이 가로되 무아법을 통달한다는 것은 직하에 대오하여 마치 칠통(漆桶)의 바닥이 빠짐과 같은지라 사통팔달하여 휑하게 무아(無我)니 나의 몸도 이미 없거늘 어찌 다시 법이 있으리오. 인과 법을 쌍망(雙忘)해야 다만 이 참다운 이 보살이니 다시 따로 구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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川禪師曰 寒卽普天寒하고 熱卽普天熱하니라 頌曰 有我元無我니 寒時燒軟火며 無心似有心이니 半夜拾金針이로다 無心無我分明道나 不知道者是何人고 呵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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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사가 가로되 추우면 곧 온 하늘이 춥고 더우면 곧 온 하늘이 덥다. 송왈 유아가 원래 무아니/ 추운 때엔 부드러운 불을 지피며/ 무심이 유심과 같으니/ 한밤중에 금침을 줍도다./ 무심이다 무아다 분명히 말하나/ 알지 못하겠네 말하는 자는 이 어떤 사람인고. 하하(呵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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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增收] 宗鏡禪師曰 直指單傳密意深하니 本來非佛亦非心이로다 分明不受然燈記나 自有靈光耀古今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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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增收] 종경선사가 가로되 직지단전(直指單傳)1의 밀의(密意)가 깊나니/ 본래 부처도 아니고 또한 마음도 아니로다/ 분명히 연등불의 수기를 받지 않았으나/ 스스로 영광(靈光)이 있어 고금에 빛나도다.
- 직지단전(直指單傳); 또한 단전직지(單傳直指)로 지음. 이르자면 인심(人心)을 직지(直指)하여 사도(師徒)의 양심(兩心)이 상인(相印)함임. 선종에서 조기(早期)에 의법(衣法)을 쌍수(雙授)했으니 곧 단전(單傳)은 도리어 매대(每代)에 다만 한 사람에게만 전수한다는 뜻을 함유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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