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草*入草頭上漫漫脚下漫漫 半開半合 他也恁麽我也恁麽 誰解尋討頂門具一隻眼 闍黎不解尋討 白雲重重千重百匝 頭上安頭 紅日杲杲破也 瞎 擧眼卽錯 左顧無瑕瞎漢 依前無事 爾作許多伎倆作什麽 右盻已老一念萬年 過 君不見*寒山子癩兒牽伴 行太早也不早 十年歸不得卽今在什麽處 灼然 忘却來時道渠儂得自由 放過一著 便打 莫做這忘前失後好
●入草; 出草之對稱 謂陷入言句糾纏 知識見解
●寒山; 唐代隱士 亦稱寒山子 住天台山寒巖幽窟中 因不詳其姓氏 故稱寒山 容貌枯悴布襦零落 以樺皮爲冠 曳大木履 時來國淸寺 就拾得取衆僧殘食菜滓食之 寒山之行跡近於顚狂 來至國淸寺中 或於廊下徐行 或時叫躁凌人 或望空漫罵 寺僧不耐 以仗逼逐之 輒翻身撫掌 呵呵大笑而退 好吟詩唱偈 常契於佛理 臺州刺史閭丘胤曾慕名相訪 寒山見太守來 與拾得連臂笑傲 出寺而避之 閭丘胤復往寒巖謁問 竝送衣裳藥物等 二士高聲喝之曰 賊賊 便縮身入巖石縫中 復言 報汝諸人 各各努力 其石縫忽然而合 閭丘哀慕 令僧道翹尋其遺物 於林間得葉上所書辭頌 及題村墅人家屋壁 共三百餘首傳布人間 曹山本寂注釋謂之對寒山子詩 潙山曾在天台山會見寒山 趙州亦曾與寒山相互問答 其族姓不詳 年代亦有異說 或謂是唐玄宗先天年中之人 或太宗貞觀年中之人 或憲宗元和年中之人 據近人考證 生於睿宗景雲(710-711)初年 代宗大曆(766-779)年間 隱居於天台山 傳說其爲文殊菩薩之化身 與豐干(彌陀化身) 拾得(普賢化身) 號稱三聖 或稱三隱 又以三者皆隱棲天台山國淸寺 故亦稱國淸三隱 淸雍正十一年(1733) 封寒山爲和聖 拾得爲合聖 竝稱和合二聖 或和合二仙 [宋高僧傳十九 傳燈錄二十七 佛祖統紀三十九 佛祖歷代通載二十 釋氏稽古略三 天台山國淸禪寺三隱集記]
출초입초(出草*入草)를 두상(頭上)에 만만(漫漫)하고 각하(脚下)에 만만하다. 반은 열리고 반은 닫혔구나. 그도 또한 이러하고 나도 또한 이러하다. 누가 심토(尋討; 찾다)할 줄 아는가 정문(頂門)에 일척안(一隻眼)을 갖췄거늘 사리(闍黎)는 심토(尋討)할 줄 알지 못하는가. 백운은 중중(重重)하고 천중백잡(千重百匝)이로다. 머리 위에 머리를 얹는구나. 홍일(紅日)은 고고(杲杲; 매우 높이 떠 있는 모양)하다 깨어졌다. 눈 멀어졌다. 눈을 들면 곧 틀렸다. 좌를 돌아보니 티가 없고 할한(瞎漢)이 의전(依前)히 일이 없구나. 네가 허다한 기량(伎倆)을 지어 무엇하려느냐. 우로 힐끗 보니 이미 늙었다 1념(念)이 만 년이다. 지나갔다. 그대가 보지 못하는가 한산자(*寒山子)가 문둥이가 동무를 끌고 오는구나. 행(行)이 너무 일러 또한 이르지(早) 않다. 십 년 동안 돌아감을 얻지 못해 즉금 어느 곳에 있느냐. 작연(灼然)하다. 올 때의 길을 망각했다 거농(渠儂; 그)은 자유를 얻었다. 1착을 방과(放過; 放棄)했다. 문득 때려주리라. 이(這) 망전실후(忘前失後)를 짓지 말아야 좋으니라.
●入草; 출초의 대칭. 이르자면 언구의 규전(糾纏)과 지식의 견해에 함입(陷入)함.
●寒山; 당대의 은사(隱士)며 또한 호칭이 한산자(寒山子)니 천태산 한암(寒巖)의 유굴(幽窟) 속에 거주했음. 그 성씨가 불상(不詳)함으로 인해 고로 명칭이 한산임. 용모가 고췌(枯悴)하고 포유(布襦; 저고리)는 영락(零落; 떨어져 너덜거림)했고 화피(樺皮; 자작나무 껍질)로 갓을 만들고 큰 나막신을 끌었으며 때로 국청사(國淸寺)에 와서 습득(拾得)에게 나아가 중승의 잔식(殘食)이나 채재(菜滓; 滓는 찌꺼기 재)를 취해 그것을 먹었음. 한산의 행적은 전광(顚狂; 미치광이)에 가까웠음. 국청사 속에 내지(來至)하여 혹은 낭하(廊下)에서 서행(徐行)하고 혹은 때로 규조(叫躁; 부르짖으며 떠듦)하며 타인을 능멸하고 혹은 허공을 바라보며 만매(漫罵; 함부로 꾸짖음)했음. 사승(寺僧)이 참지 못해 지팡이로 핍박하여 쫓아내면 번번이 몸을 뒤집어 손뼉을 치면서 하하 대소하며 물러났음. 음시창게(吟詩唱偈)를 좋아했는데 항상 불리(佛理)에 계합했음. 대주자사(臺州刺史) 여구윤(閭丘胤)이 일찍이 모명(慕名)하여 상방(相訪)했는데 한산이 태수가 옴을 보고는 습득과 연비(連臂)하여 소오(笑傲; 웃으며 날뜀)하고는 사원에서 나가 그를 피했음. 여구윤이 다시 한암으로 가서 알문(謁問)하고 아울러 의상과 약물 등을 송부했는데 2사(士)가 고성으로 그를 꾸짖으며 가로되 도적아, 도적아, 하고는 곧 몸을 옴츠려 암석의 틈 속으로 들어갔는데 다시 말하되 너희 제인에게 알리나니 각각 노력하라. 그 돌의 틈이 홀연히 봉합되었음. 여구윤이 애모(哀慕)하여 승 도교(道翹)를 시켜 그의 유물을 찾게 했는데 임간(林間)에서 잎 위에 서사한 바의 사송(辭頌) 및 촌서(村墅; 농막)와 인가의 가옥의 벽에 제(題)한 것을 얻었으니 공히 300여 수가 인간에 전포(傳布)되었음. 조산본적(曹山本寂)이 주석하여 이를 일러 대한산자시(對寒山子詩)라 했음. 위산(潙山)이 일찍이 천태산에서 한산을 회견(會見)했고 조주도 또한 일찍이 한산과 상호 문답했음. 그 족성(族姓)은 불상(不詳)이며 연대도 또한 이설(異說)이 있음. 혹 이르기를 이는 당 현종 선천년(先天年) 중의 사람이라 하고 혹은 태종 정관년(貞觀年) 중의 사람이라 하고 혹은 헌종 원화년(元和年) 중의 사람이라 함. 근인(近人)의 고증에 의거하면 예종 경운(710-711) 초년에 출생했고 대종 대력(766-779)년 간 천태산에 은거했음. 전설에 그는 문수보살의 화신이라 하며 풍간(미타 화신) 습득(보현 화신)과 더불어 호칭이 3성(聖)이며 혹은 호칭이 3은(隱)임. 또 3자가 모두 천태산 국청사에 은서(隱棲)한지라 고로 또한 명칭이 국청삼은(國淸三隱)임. 청 옹정 11년(1733) 한산을 화성(和聖)에 봉하고 습득을 합성(合聖)이라 했으니 병칭이 화합2성(和合二聖) 혹 화합2선(和合二仙)임 [송고승전19. 전등록27. 불조통기39. 불조역대통재20. 석씨계고략3. 천태산국청선사삼은집기].
出草入草誰解尋討 雪竇却知他落處 到這裏 *一手擡一手搦 白雲重重紅日杲杲 大似草茸茸煙羃羃 到這裏無一絲毫屬凡 無一絲毫屬聖 遍界不曾藏 一一蓋覆不得 所謂無心境界 寒不聞寒 熱不聞熱 都盧是箇大解脫門 左顧無瑕右盻已老 *懶瓚和尙 隱居衡山石室中 *唐德宗聞其名 遣使召之 使者至其室宣言 天子有詔 尊者當起謝恩 瓚方撥*牛糞火 尋煨芋而食 寒涕垂頤未甞答 使者笑曰 且勸尊者拭涕 瓚曰 我豈有工夫爲俗人拭涕耶 竟不起 使回奏 德宗甚欽嘆之 似這般淸寥寥白的的 不受人處分 直是把得定 如生鐵鑄就相似 只如善道和尙 遭沙汰後 更不復作僧 人呼爲石室行者 每踏碓忘移步 僧問臨濟 石室行者忘移步意旨如何 濟云 沒溺深坑 法眼*圓成實性頌云 理極忘*情謂 如何有喩齊 *到頭霜夜月 任運落前溪 菓熟兼猿重 山長似路迷 擧頭殘照在 元是住居西 雪竇道 君不見寒山子 行太早 十年歸不得 忘却來時道 寒山子詩云 欲得安身處 寒山可長保 微風吹幽松 近聽聲愈好 下有班白人 嘮嘮讀*黃老 十年歸不得 忘却來時道 永嘉又道 心是根法是塵 兩種猶如鏡上痕 痕垢盡時光始現 心法雙忘性卽眞 到這裏 如癡似兀 方見此公案 若不到這田地 只在語言中走 有甚了日
●一手擡一手搦; 又作一手擡一手捺 謂一方面扶持之 一方面又壓抑之 乃形容禪師指導修行僧時 自由無礙之機法
●懶瓚; 唐代僧明瓚不務勞作 人稱懶瓚 明瓚 初參嵩山普寂 默證心契 竝嗣其法 然人罕推重 乃閑居衡巖 衆僧營作 師則晏如 縱被詆訶 殊無愧恥 人稱懶瓚 懶殘 好食衆人之殘食 逐之則所出言語皆契佛理 時人疑是彌陀應身 天寶元年(742)頃 至南嶽寺執役 夜止群牛之下 如是經二十年 李泌隱居衡山時 曾往拜謁 卒諡大明禪師 塔存南嶽 有南嶽懶瓚和尙歌行世 [宋高僧傳十九 傳燈錄三十]
●唐德宗; (742-805 在位779-805) 卽李适 代宗長子 在位二十六年 建中元年(780) 沙門圓照進新定四分律疏 敕賜紫衣 充內供奉檢校鴻臚卿 食邑三百戶 貞元二年(786) 詔律師道澄入宮 爲妃嬪內侍授三歸戒 賜號大圓律師 四年 詔迎鳳翔法門寺佛指骨入禁中供養 十五年 帝誕節 敕有司備儀輦 迎澄觀入內殿 闡揚華嚴宗旨 謂羣臣曰 師能以聖法淸凉朕心 乃以淸凉賜爲國師之號 [佛祖統紀四十一 佛法金湯編七 舊唐書十二]
●牛糞火; 往時以牛馬糞乾燥後 用燃料而得火
●圓成實性; 法相宗所立三性之一 圓滿成就之眞實性也 亦曰法性 亦曰眞如 是一切有爲法體性也 恰如繩之實性爲麻 [唯識論八 百法問答抄四] ▲宗鏡錄五十九 今言三性者 約經論共立 一遍計所執性 二依他起性 三圓成實性
●情謂; 情識與言謂 謂智識與言語
●到頭; 同到底 最終 結局 終極之意
●黃老; 黃帝與老子之合稱
출초입초(出草入草)를 누가 심토(尋討; 찾다)할 줄 아는가 하니 설두가 도리어 저(他) 낙처를 알았다. 이 속에 이르면 한 손은 든 것이며 한 손은 내린 것이다(*一手擡一手搦). 백운은 중중(重重)하고 홍일(紅日)은 고고(杲杲; 매우 높이 떠 있는 모양)하다 하니 풀은 용용(茸茸; 뾰족뾰족)하고 안개(煙)는 멱멱(羃羃; 자욱함)함과 매우 비슷하다(大似). 이 속(如上境界)에 이르면 한 실터럭만큼도 범(凡)에 속함이 없으며 한 실터럭만큼도 성(聖)에 속함이 없는지라 편계(遍界)에 일찍이 숨기지 못하므로 하나하나 개부(蓋覆)함을 얻지 못하나니 이른 바 무심경계(無心境界)인지라 추워도 추위를 듣지 못하며 더워도 더위를 듣지 못하는 도로(都盧; 온통, 모두) 이것(是箇)은 대해탈문(大解脫門)이다. 좌를 돌아보니 티가 없고 우로 힐끗 보니 이미 늙었다 함은 나찬화상(*懶瓚和尙)이 형산(衡山)의 석실 가운데 은거했다. 당덕종(*唐德宗)이 그 이름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를 불렀다. 사자가 그 석실에 이르러 선포해 말하되 천자께서 부름(詔)이 있으십니다. 존자는 마땅히 일어나 사은(謝恩)하세요. 나찬이 막 우분화(*牛糞火)를 헤쳐 구운 토란(芋)을 찾아 먹으면서 찬 눈물이 턱에 드리워져 일찍 답하지 못했다. 사자가 웃으며 가로되 다만 존자에게 권하오니 눈물을 닦으십시오. 나찬이 가로되 내가 어찌 속인을 위해 눈물을 닦는 공부가 있으랴. 마침내 일어나지 않았다. 사자가 돌아가 아뢰자 덕종이 매우 흠탄(欽嘆)했으니 저반(這般; 이런 종류)과 흡사히 청요료(淸寥寥; 맑으면서 매우 고요)하고 백적적(白的的; 깨끗하면서 매우 분명)하여 남의 처분을 받지 않음은 바로 이 정(定)을 파득(把得)함이 마치 생철(生鐵)로 부어 만든 것과 상사하여서이다. 지여(只如) 선도화상(善道和尙)이 사태(沙汰)를 만난 후에 다시는 승인(僧人)이 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석실행자(石室行者)라고 호칭(呼稱)했다. 매번 디딜방아를 밟으면서 걸음 옮김을 망각하였다. 중이 임제에게 묻되 석실행자가 걸음 옮김을 망각한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임제가 이르되 깊은 구덩이에 몰닉(沒溺)했다. 법안의 원성실성송(*圓成實性頌)에 이르되 이치가 지극하면 정위(*情謂)를 잊나니/ 어찌 제등한 비유가 있으랴/ 마침내(*到頭) 상야(霜夜)의 달이/ 움직이는 대로 앞 개울에 떨어졌다/ 과일이 익으면 원숭이도 겸해 무겁고/ 산이 길면 길이 미란(迷亂)한 것 같다/ 머리를 들매 쇠잔한 비춤이 있나니/ 원래 이 서쪽에 주거하였네. 설두가 말하되 그대가 보지 못하는가 한산자가 행(行)이 너무 일러 십 년 동안 돌아감을 얻지 못해 올 때의 길을 망각했다 하니 한산자 시에 이르되 안신(安身)할 곳을 얻고자 한다면/ 한산이 가히 길이 보장(保障)하리라/ 미풍이 유송(幽松)에 불어/ 가까이 들으매 소리가 더욱 좋아라/ 아래에 반백(斑白)의 사람이 있어/ 중얼거리며 황로(*黃老)를 읽는다/ 10년 동안 돌아감을 얻지 못해/ 올 때의 길을 망각했다. 영가(永嘉)가 또 말하되 마음은 이 뿌리며 법은 이 티끌이니/ 두 가지가 마치 거울 위의 흔적과 같다/ 흔적의 때가 없어질 때 빛이 비로소 나타나고/ 마음과 법을 쌍(雙)으로 잊으니 성(性)이 곧 진(眞)이다. 이 속(心法雙忘處)에 이르면 여치사올(如癡似兀; 어리석은 듯하고 無知한 듯함)해야 바야흐로 이 공안을 보려니와 만약 이 전지(田地; 경계)에 이르지 못한다면 다만 어언(語言) 중에 있으면서 달리거늘 무슨 깨칠 날이 있으리오.
●一手擡一手搦; 또 일수대일수날(一手擡一手捺)로 지음. 이르자면 1방면으론 그것을 부지(扶持)하고 1방면으론 또 그것을 압억(壓抑)함이니 곧 선사가 수행승을 지도할 때 자유무애한 기법(機法)을 형용함.
●懶瓚; 당대승 명찬(明瓚)이 노작(勞作; 힘을 들여 부지런히 일함)에 힘쓰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칭호하여 나찬이라 했음. 명찬(明瓚) 처음에 숭산보적(嵩山普寂)을 참해 묵묵히 증득하고 마음에 계합했으며 아울러 그의 법을 이었음. 그러나 사람들이 추중(推重)함이 드물었고 이에 형암(衡巖)에 한가히 거처했음. 중승이 영작(營作; 집 따위를 짓거나 물건을 만듦)해도 스님은 곧 안여(晏如; 편안한 모양)했으며 비록 저가(詆訶; 꾸짖고 책망함)를 입어도 특수히 부끄러움이 없었음. 사람들이 나찬(懶瓚)ㆍ나잔(懶殘)으로 호칭했음. 중인(衆人)의 남은 밥을 먹기를 좋아했으며 그를 축출하면 곧 내뱉는 언어가 모두 불리(佛理)에 계합했음. 당시의 사람들이 이 미타의 응신이라고 의심했음. 천보 원년(742) 무렵 남악사(南嶽寺)에 이르러 집역(執役; 服役)했는데 밤에는 뭇 소 아래에 머물렀으며 이와 같이 20년을 경과했음. 이비(李泌)가 형산에 은거할 때 일찍이 가서 배알(拜謁)했음. 졸시(卒諡)는 대명선사며 탑이 남악에 존재함. 남악나찬화상가(南嶽懶瓚和尙歌)가 있어 세상에 유행함 [송고승전19. 전등록30].
●唐德宗; (742-805. 재위 779- 805) 즉 이괄(李适)이니 대종(代宗)의 장자. 재위 26년. 건중(建中) 원년(780) 사문 원조가 신정사분율소(新定四分律疏)를 진상하자 칙령으로 자의를 주고 내공봉검교홍려경(內供奉檢校鴻臚卿)에 충원했으니 식읍이 3백 호(戶)였음. 정원(貞元) 2년(786) 율사 도징을 불러 입궁하여 비빈과 내시를 위해 삼귀계를 주게 했으며 대원율사란 호를 주었음. 4년 조칙으로 봉상 법문사의 불지골(佛指骨)을 맞이하여 금중에 들게 해 공양했음. 15년 제(帝)의 탄절(誕節)에 유사(有司; 관리)에게 칙령해 의연(儀輦; 儀典用의 수레)을 준비해 징관(澄觀)을 맞이하여 내전에 들게 하고 화엄종지를 천양(闡揚; 드러내어 밝혀서 널리 퍼지게 함)하게 했음. 군신에게 일러 가로되 스님은 능히 성법(聖法)으로 짐의 마음을 청량(淸凉)하게 했다 하고는 이에 청량을 주면서 국사의 호로 삼게 했음 [불조통기41. 불법금탕편7. 구당서12].
●牛糞火; 왕시(往時; 옛날)에 우마의 똥을 건조한 후 연료로 사용하여 불을 얻었음.
●圓成實性; 법상종에서 세운 바 3성의 하나. 원만성취의 진실한 성(性)임. 또한 가로되 법성이며 또한 가로되 진여니 이는 일체 유위법의 체성(體性)임. 흡사 승삭(繩索)의 실성이 마(麻; 삼)가 됨과 같음 [유식론8. 백법문답초4]. ▲종경록59. 여금에 말한 3성(性)이란 것은 경론에서 공립(共立)한 것을 대약(大約)하면 1은 편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며 2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며 3은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情謂; 정식(情識)과 언위(言謂)니 이르자면 지식(智識)과 언어.
●到頭; 도저(到底)와 같음. 최종ㆍ결국ㆍ종극(終極)의 뜻.
●黃老; 황제(黃帝)와 노자의 합칭(合稱).
'벽암록주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벽암록 제35칙 본칙평창 (0) | 2021.08.26 |
---|---|
벽암록 제35칙 수시 본칙 (0) | 2021.08.26 |
벽암록 제34칙 본칙 평창 (0) | 2021.08.26 |
벽암록 제33칙 송 평창 (0) | 2021.08.26 |
벽암록 제33칙 본칙평창 (0) | 2021.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