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주해

벽암록 제67칙 본칙 평창

태화당 2021. 8. 27. 08:43

六七擧 梁武帝請*傅大士講金剛經達磨兄弟來也 魚行酒肆卽不無 衲僧門下卽不可 這老漢老老大大作這般去就 大士便於座上 揮案一下 便下座直得*火星迸散 似則似是則未是 不煩打葛藤 武帝愕然兩回三度被人瞞 也敎他摸索不著 誌公問 陛下還會麽*黨理不黨情 肐膊不向外 也好與三十棒 帝云 不會可惜許 誌公云 大士講經竟也須逐出國始得 當時和誌公 一時與趕出國 始是作家 兩箇漢同坑無異土

 

傅大士; 傅翕(497-569) 南朝梁代禪宗著名之尊宿 東陽烏傷(浙江義烏)人 字玄風 號善慧 又稱善慧大士 魚行大士 傅大士 雙林大士 東陽大士 烏傷居士 與寶誌共稱爲梁代二大士 嘗與里人共捕魚 每得魚則盛於竹籠 沈入深水 竝謂 欲去者去 欲止者留 時人以之爲愚 年十六 娶劉氏女妙光 生普建普成二子 年二十四 於沂水取魚 適逢胡僧嵩頭陀(名達摩) 遂棄魚具 入烏傷縣松山雙檮樹下結庵 自號雙林樹下當來解脫善慧大士 自稱由兜率天宮來說法 日常營作 夜歸行道 苦行七年 自謂得首楞嚴定 竝能通儒道典籍 學徒漸集 衆皆虔誠精進 不惜身命 梁大通六年(534) 遣弟子傅暀上書致武帝 獻上中下三善之策 閏十二月 帝召入禁闕 講經於重雲殿 大同元年(535)四月 還松山 五年 重赴鍾山 於壽光殿與帝論眞諦 作偈頌呈之 六年(一說五年) 營造松山雙檮樹間之佛殿 九重塼塔 竝於斯地寫經律千餘卷 此卽雙林寺 七年 自宣爲賢劫千佛之一佛 十年 捨屋宇田地 設大施會 太淸二年(549) 欲焚身供養三寶 弟子堅留之 代士燒身者十九人 士乃止之 未久亂起 梁亡 傅翕家居徒衆甚多 講說不輟 每率徒衆焚指燃臂以供佛 嘗營齋轉法華經二十一遍 屢設無遮會 竝於會稽鑄寶王像十尊 爲便於讀大藏經 建有輪藏 令衆轉之 可得大利益 故後世所作輪藏皆安置其父子三人之像 此外 士於天台之一心三觀有其獨到之領略 而以三觀四運爲其心要 倡導三觀一心四運推檢之說 陳太建元年四月 集弟子告誡畢 趺坐入寂 壽七十三 弟子葬之於雙林山頂 號彌勒下生 撰有心王銘 語錄四卷 還源詩等 [善慧大士錄 續高僧傳二十五 傳燈錄二十七 同三十 神僧傳四]

火星; 星 比喩星狀物 多指細碎細小 或閃亮的東西

黨理不黨情; 謂基於道理 而不從人情 轉義爲依法而忘卻人情 黨 朋也 類也

 

六七()하다. 양무제(梁武帝)가 부대사(*傅大士)를 초청하여 금강경을 강설케 하였는데 달마의 형제가 왔다(機用이 흡사한 연고임). 어항(魚行; 생선 시장)과 주사(酒肆; 술집 가게)는 곧 없지 않으나 납승의 문하에선 곧 옳지 못하거늘 이 노한(老漢)인 노로대대(老老大大)가 이런 종류(這般)의 거취를 짓는다. 대사가 곧 좌상(座上)에서 한 번(一下) 궤안(机案; 작은 )을 휘두르고 곧 하좌했다. 바로 불똥(*火星)이 병산(迸散; 흩어짐)함을 얻었다. 비슷하기는 곧 비슷하지만 옳기는 곧 옳지 않나니 번거롭게 타갈등(打葛藤; 언구에 뒤얽힘)하지 말아라. 무제가 악연(愕然; 깜짝 놀라다)하거늘 양회삼도(兩回三度; 2, 3) 사람의 속임을 입는구나(달마ㆍ지공ㆍ부대사에게 속음). 또한 그(무제)로 하여금 모색함을 얻지 못하게 했다. 지공(陛下)이 묻되 폐하, 도리어 아시겠습니까. 당리부당정(*黨理不黨情)해야 하리라. 흘박(肐膊; 팔뚝)이 밖을 향하지 않는다. 또한 좋게 30방을 주어야 하리라. 무제가 이르되 알지 못합니다. 가석하다(可惜許). 지공이 이르되 대사가 강경(講經)을 마쳤습니다. 또한 나라에서 축출함을 써야() 비로소 옳다. 당시에 지공마저 일시에 나라에서 쫓아내어 주어야 비로소 이 작가다. 양개한(兩箇漢; 부대사와 지공)이 한 구덩이에 다른 흙이 없음이다.

 

傅大士; 부흡(傅翕; 497-569). 남조 양대(梁代) 선종의 저명한 존숙이며 동양 오상(절강 의오) 사람이니 자는 현풍(玄風)이며 호는 선혜(善慧). 또 호칭이 선혜대사(善慧大士)ㆍ어행대사(魚行大士)ㆍ부대사(傅大士)ㆍ쌍림대사(雙林大士)ㆍ동양대사(東陽大士)ㆍ오상거사(烏傷居士). 보지(寶誌)와 공칭(共稱)하여 양대(梁代)2대사(大士)라 함. 일찍이 마을 사람과 함께 물고기를 잡았는데 매번 물고기를 얻으면 곧 죽롱(竹籠)에 담아 깊은 물에 담가 넣고는 아울러 이르되 떠나려는 자는 떠나고 머무려고 하는 자는 머물러라. 당시의 사람들이 이를 어리석음으로 삼았음. 나이 16에 유씨(劉氏)의 딸 묘광(妙光)에게 장가들어 보건(普建)과 보성(普成) 두 아들을 낳았음. 나이 24에 기수(沂水)에서 물고기를 취하는데 마침 호승(胡僧) 숭두타(嵩頭陀; 이름이 달마)를 만났고 드디어 어구(魚具)를 버리고 오상현 송산(松山) 쌍도수(雙檮樹) 아래 들어가 암자를 엮고 스스로 호하기를 쌍림수하당래해탈선혜대사(雙林樹下當來解脫善慧大士)라 했음. 자칭하기를 도솔천궁으로부터 와서 설법한다 했음. 낮에는 늘 영작(營作)하고 밤에는 돌아와 행도(行道)하면서 고행하기 7년이었음. 스스로 이르기를 수릉엄정(首楞嚴定)을 얻었다 했고 아울러 능히 유도(儒道)의 전적을 통달했음. 학도가 점차 모였고 대중이 모두 건성(虔誠)으로 정진하며 신명을 아끼지 않았음. 양 대통 6(534) 제자 부왕(傅暀)을 보내어 무제에게 서신을 올려 이르게 했으며 상중하 3()의 책략을 바쳤음. 12월 무제가 금궐(禁闕)로 불러들여 중운전(重雲殿)에서 강경(講經)하게 했음. 대동 원년(535) 4월 송산으로 돌아갔음. 5년 다시 종산(鍾山)에 다다라 수광전(壽光殿)에서 무제와 진제(眞諦)를 논했고 게송을 지어 그에게 보였음. 6(일설에 5) 송산 쌍도수 사이의 불전(佛殿)9()의 전탑(塼塔)을 영조(營造)하고 아울러 이 땅에서 경률 천여 권을 서사했으니 이것이 곧 쌍림사(雙林寺). 7년 스스로 선포하기를 현겁천불의 1()이라 했음. 10년 옥우(屋宇)와 전지(田地)를 희사해 대시회(大施會)를 베풀었음. 태청 2(549) 분신하여 삼보에 공양하려 하자 제자들이 굳게 그것을 만류했으며 대사를 대신해 소신(燒身)한 자가 19인이었음. 대사가 이에 그것을 그치게 했음. 오래지 않아 난이 일어나 양()이 망했음. 부흡가(傅翕家)에 거처하는 도중이 매우 많았으며 강설을 거치지 않았음. 매번 도중을 거느리며 손가락을 태우고 팔을 태워 공불(供佛)했음. 일찍이 영재(營齋)하며 법화경 21()을 전독(轉讀)했고 여러 차례 무차회(無遮會)를 개설했음. 아울러 회계(會稽)에 보왕상(寶王像) 10()을 주성(鑄成)했고 대장경을 전독(轉讀)하기에 편하도록 윤장(輪藏)을 건립했으며 대중으로 하여금 그것을 돌리게 하면서 가히 대이익을 얻게 했음. 고로 후세에 만든 바 윤장에는 모두 그 부자 3인의 형상을 안치했음. 이 밖에 대사는 천태의 일심삼관(一心三觀)에 그만이 독도(獨到)한 영략(領略)이 있었고 삼관사운(三觀四運)을 그 심요(心要)로 삼아 삼관일심사운추검(三觀一心四運推檢)의 설을 창도(倡導)했음. () 태건 원년 4월 제자를 소집해 고계(告誡)를 마치자 부좌(趺坐)하고 입적했으니 나이는 73. 제자들이 쌍림의 산정에 장사 지내고 미륵하생이라고 호했음. 찬술(撰述)에 심왕명ㆍ어록 4권ㆍ환원시 등이 있음 [선혜대사록. 속고승전25. 전등록27, 30. 신승전4].

火星; ()은 별 형상의 물건에 비유함. 다분히 세쇄세소(細碎細小; 작은 부서러기나 잘디잔 것)나 혹은 번쩍이며 밝은 동서(東西; 물건)를 가리킴.

黨理不黨情; 이르자면 도리에 기초하고 사물을 좇지 않음. 전의(轉義)하여 법률에 의지하고 인정을 망각함. ()은 붕()이며 류().

 

梁高祖武帝 蕭氏 諱衍 字叔達 立功業 以至受齊禪 卽位後 別註*五經講議 奉黃老甚篤 而性至孝 一日思得出世之法 以報*劬勞 於是捨道事佛 廼受*菩薩戒於婁約法師處 披佛袈裟 自講放光般若經 以報父母 時誌公大士 以顯異惑衆 繫於獄中 誌公乃分身 遊化城邑 帝一日知之 感悟極推重之 誌公數行*遮護隱顯 逮不可測 時婺州有大士者 居雲黃山 手栽二樹 謂之雙林 自稱當來善慧大士 一日修書 命弟子 上表聞於帝 時朝廷以其無君臣之禮不受 傅大士將入*金陵城中賣魚 時武帝或請誌公講金剛經 誌公曰 *貧道不能講 市中有傅大士者 能講此經 帝下詔召之入禁中 傅大士旣至 於講座上 揮案一下 便下座 當時便與推轉 免見一場狼籍 却被誌公云陛下還會麽 帝云 不會 誌公云 大士講經竟 也是一人作頭 一人作尾 誌公恁麽道 還夢見傅大士麽 一等是弄精魂 這箇就中奇特 雖是死蛇 解弄也活 旣是講經 爲甚却不*大分爲二 一如尋常座主道 金剛之體堅固 物物不能壞 利用故能摧萬物 如此講說 方喚作講經 雖然如是 諸人殊不知 傅大士只拈向上關捩子 略露鋒鋩 敎人知落處 直截與爾壁立萬仞 恰好被誌公不識好惡 却云大士講經竟 正是好心不得好報 如美酒一盞 却被誌公以水攙過 如一釜羹 被誌公將一顆鼠糞汚了 且道旣不是講經 畢竟喚作什麽 頌云

 

五經; 儒家典籍 詩經 尙書 禮記 周易 春秋的合稱

劬勞; 劬勞之恩 詩蓼莪 哀哀父母 生我劬勞

菩薩戒; 大乘菩薩所受持之戒律 又作大乘戒 佛性戒 方等戒 反之 小乘聲聞所受持之戒律 稱小乘聲聞戒 說菩薩戒之大乘典籍甚多 可綜合爲梵網與瑜伽二類律典 今則盛行梵網戒 其戒相爲十重禁戒 四十八輕戒 不論出家在家 皆可受持

遮護; 遮蓋護持

金陵; 江蘇金陵 又江寧 建業 建康 應天府 南京等稱之 吳 東晉 宋 齊 梁 陳 明等之都邑 鍾山靈谷寺 攝山棲霞寺 鳳山天界寺 石頭山淸涼寺 上下瓦官寺 牛頭山弘覺寺 幽棲山祖堂寺等中國禪宗大叢林 在此集中 [金陵梵刹志 讀史方輿紀要二十]

貧道; 慧琳音義二十六 沙門那 梵語也 此義譯云乏道 沙門名乏 那名道 僧稱云貧道 貧道者 卽謙退自卑之辭也 亦更有多義也

大分爲二; 大分爲堅利二義

 

양고조(梁高祖) 무제는 소씨(蕭氏)며 휘()는 연()이며 자()는 숙달(叔達)이니 공업(功業)을 세워 이지(以至; 乃至와 같음) (; 和帝)의 선위(禪位)를 받았다. 즉위한 후에 오경(*五經)을 별주(別註)하여 강의했으며 황로(黃老; 黃帝와 노자)를 받듦이 매우 돈독(敦篤)하면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느 날 출세지법(出世之法; 출세간의 법)으로 구로(*劬勞)에 보답해야겠다고 사득(思得; 은 조사)하여 이에 사도사불(捨道事佛; 도교를 버리고 불타를 섬김)하여 이에() 누약법사(婁約法師)의 처소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불가사(佛袈裟)를 입고서 스스로 방광반야경을 강설하여 부모에게 보은(報恩)했다. 때에 지공대사(誌公大士)가 이적(異蹟; )을 나타내어 민중을 현혹(眩惑; )하므로 옥중에 묶었는데 지공이 이에 분신(分身)하여 성읍에 유화(遊化; 다니면서 교화)하는지라 무제가 어느 날 이를 알고 감오(感悟)허여 지극히 그를 추중(推重; 추앙하여 존중)하였다. 지공이 몇 차례 차호은현(*遮護隱顯)을 행하는지라 가히 추측하지 못함에 이르렀다. 때에 무주(婺州)에 대사(大士)란 자가 있어 운황산(雲黃山)에 거주하면서 손수 2()를 심고 쌍림(雙林)이라 일컬으면서 자칭 당래선혜대사(當來善慧大士)라 하였다. 어느 날 수서(修書; 寫信이니 편지를 씀)하여 제자에게 명해 무제에게 올려 표문(表聞; 표를 올려 알림)하니 때에 조정에서 그것이 군신지례(君臣之禮)가 없다 하여 접수하지 않았다. 부대사가 장차 금릉성중(*金陵城中)에 들어가 물고기를 팔았는데 때에 무제가 혹 지공을 초청해 금강경을 강설케 하려고 하니 지공이 가로되 빈도(*貧道)는 능히 강설하지 못하지만 시중에 부대사란 자가 있어 능히 이 경을 강설합니다. 무제가 하조(下詔)하여 그를 불러 금중(禁中)에 들게 하니 부대사가 이미 이르러 강좌(講座) 위에서 한 번(一下) 궤안(机案; 작은 )을 휘두르고 곧 하좌했다. 당시에 곧 퇴전(推轉; 는 밀다)하여 주었더라면 일장낭자(一場狼籍; 와 통함)를 봄을 면했으련만 도리어 지공이 이르되 폐하 도리어 아시겠습니까 함을 입어 무제가 이르되 알지 못합니다. 지공이 이르되 대사가 강경(講經)을 마쳤습니다 하니 또한 이 1(부대사)은 머리를 만들고 1(지공)은 꼬리를 만들었다. 지공의 이러히 말한 것이 도리어 꿈에라도 부대사를 보았겠느냐. 일등(一等; 一樣으로 평등) 이는 정혼(精魂)을 희롱함이다. 이것(這箇; 부대사의 作略)이 취중(就中; 그 중)에 기특하여 비록 이 죽은 뱀이지만 희롱할 줄 알아 또한 살려내었음이다. 이미 이 강경(講經)이거늘 무엇 때문에(爲甚) 도리어 대분하여 둘로 만들지(*大分爲二) 않는가. 심상(尋常)의 좌주의 말과 일여(一如)하게 하여 금강지체(金剛之體)는 견고하여서 물물(物物)이 능히 파괴치 못하지만 이(; 날카로울 리)를 쓰는 고로 능히 만물을 최파(摧破; )한다 하여 이와 같이 강설해야 바야흐로 강경이라고 불러 짓는다.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제인은 너무 알지 못하나니 부대사가 다만 향상의 관려자(關捩子)를 염제(拈提; )하여 봉망(鋒鋩; 칼날)을 조금() 드러내어 사람으로 하여금 낙처를 알게 하였음이다. 직절(直截)하여 너희에게 벽립만인(壁立萬仞)하여 주려고 하다가 흡호(恰好; 꼭 알맞음)히 지공의, 호오(好惡)를 알지 못해 도리어 이르되 대사가 강경을 마쳤습니다 함을 입었으니 바로 이 호심(好心)에 호보(好報)를 얻지 못함이 마치 미주(美酒) 1잔이, 도리어 지공이 물을 타서 줌(攙過)을 입은 것과 같으며 마치 1()의 국이, 지공이 한 알의 쥐똥을 가져 더럽혀버림을 입은 것과 같다. 그래 말하라 이미 이 강경이 아닐진대 필경 무엇이라고 불러 짓겠느냐. 송해 이르되

 

五經; 유가의 전적인 시경ㆍ상서ㆍ예기ㆍ주역ㆍ춘추의 합칭.

劬勞; 구로지은(劬勞之恩)이니 시 육아(蓼莪). 애애哀哀() 부모여, 날 낳아 구로(劬勞)하셨다.

菩薩戒; 대승보살이 수지하는 바의 계율이니 또 대승계ㆍ불성계ㆍ방등계로 지음. 이에 반해 소승 성문이 수지하는 바의 계율을 소승성문계로 일컬음. 보살계를 설하는 대승경전이 매우 많음. 가히 종합하자면 범망(梵網)과 유가(瑜伽)의 두 종류의 율전이 됨. 여금엔 곧 범망계가 성행함. 그 계상(戒相)은 십중금계(十重禁戒)ㆍ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가 됨. 출가와 재가를 논하지 않고 모두 가히 수지함.

遮護; 차개(遮蓋)와 호지(護持).

金陵; 강소 금릉이니 또 강녕ㆍ건업ㆍ건강ㆍ응천부ㆍ남경 등으로 호칭함. 오ㆍ동진ㆍ송ㆍ제ㆍ양ㆍ진ㆍ명 등의 도읍. 종산 영곡사ㆍ섭산 서하사ㆍ봉산 천계사ㆍ석두산 청량사ㆍ상하와관사(上下瓦官寺; 상와관사와 하와관사)ㆍ우두산 홍각사ㆍ유서산 조당사 등 중국선종의 대총림이 여기에 집중해 있음 [금릉 범찰지. 독사방여기요20].

貧道; 혜림음의26. 사문나(沙門那; śramaṇa samaṇa) 범어다. 여기에서 뜻을 번역해 이르면 핍도(乏道). 사문은 이름이 핍()이며 나()는 이름이 도(). 승려가 자칭해 이르기를 빈도라 한다. 빈도란 것은 곧 겸퇴(謙退)하며 스스로 낮춤의 언사다. 또 다시 많은 뜻이 있다.

大分爲二; 대분하여 견리() 2()로 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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