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주해

벽암록 제66칙 본칙평창

태화당 2021. 8. 27. 08:37

大凡挑囊負鉢 撥草瞻風 也須是具行脚眼始得 這僧*眼似流星 也被巖頭勘破了一串穿却 當時若是箇漢 或殺或活 擧著便用 這僧*砑郞當 却道收得 似恁麽行脚 *閻羅老子問爾 *索飯錢在 知他踏破多少草鞋 直到雪峰 當時若有些子眼筋 便解瞥地去 豈不快哉 這箇因緣 有節角誵訛處 此事雖然無得失 得失甚大 雖然無揀擇 到這裏 却要具眼揀擇 看他龍牙行脚時 致箇問端 問德山 學人仗鏌鎁劍 擬取師頭時如何 德山引頸近前云 㘞 龍牙云 師頭落也 山便歸方丈 牙後擧似洞山 洞山云 德山當時道什麽 牙云 他無語 洞山云 他無語則且置 借我德山落底頭來看 牙於言下大悟 遂焚香遙望德山禮拜懺悔 有僧傳到德山處 德山云 洞山老漢 不識好惡 這漢死來多少時也 救得有什麽用處 這箇公案 與龍牙底一般 德山歸方丈 則暗中最妙 巖頭大笑 他笑中有毒 若有人辨得 天下橫行 這僧當時若辨得出 千古之下 免得檢責 於巖頭門下 已是一場蹉過 看他雪峰老人是同參 便知落處 也不與他說破 只打三十棒趕出院 可以光前絕後 這箇是拈作家衲僧鼻孔 爲人底手段 更不與他如之若何 敎他自悟去 本分宗師爲人 有時籠罩 不敎伊出頭 有時放令死郞當地 却須有出身處 大小大巖頭雪峰 倒被箇喫飯禪和勘破 只如巖頭道 黃巢過後還收得劍麽 諸人且道 這裏合下得什麽語 免得他笑 又免得雪峰行棒趕出 這裏誵訛 若不曾親證親悟 縱使口頭快利 至*究竟透脫生死不得 山僧尋常敎人覰這機關轉處 若擬議則遠之遠矣 不見*投子問鹽平僧云 黃巢過後 收得劍麽 僧以手指地 投子云 *三十年弄馬騎 今日却被驢子撲 看這僧 也不妨是箇作家 也不道收得 也不道收不得 與西京僧 如隔海在 眞如拈云 他古人 一箇做頭 一箇做尾定也 雪竇頌云

 

眼似流星; 喩指看破禪法的眼目如流星迅疾

砑郞當; 又作訝郞當 狼藉之義 又疑怪之義

閻羅老子; 卽閻羅王 又稱閻魔王 爲鬼世界之始祖 冥界之總司 地獄之主神

索飯錢; 意謂參學一生 不能悟道 徒喫了施主的齋飯 死後閻羅王將追收飯錢 是禪家常用斥責語 索 請求 要求

究竟; 一事理道法至極高深之處 終極永恒的眞理 二畢竟 此指二

投子問鹽平僧; 鹽平當作延平(福建南平) 延平僧 指疏山匡仁法嗣疏山證禪師 傳燈錄二十 疏山證禪師第二世住 初參仁和尙 得旨後遊歷諸方 謁投子同禪師 投子問曰 近離什麽處 曰 延平來 投子曰 還將得劍來麽 曰 將得來 投子曰 呈似老僧看 師乃指面前地上 投子便休 師遂去 三日後投子問主事 新到僧在什麽處 曰 當時去也 投子曰 三十年學馬伎 昨日被驢撲

三十年弄馬騎 今日却被驢子撲; 法擧揚中 禪機被人識破 或無言可對時用此語 是一種自嘲 又含不服氣

 

대범(大凡) 바랑(; 주머니 낭)을 메고 발우를 지고서 발초첨풍(撥草瞻風)함엔 또한 모름지기 이, 행각안(行脚眼)을 갖추어야 비로소 옳다. 이 중이 눈이 유성과 같더라도(*眼似流星) 또한 암두의, 감파하여 한 꼬챙이로 천각(穿却)함을 입으리니 당시에 만약 시개한(是箇漢; 진정한 대장부)이었다면 혹은 죽이고 혹은 살림을 거착(擧著)하면 곧 썼으련마는 이 중이 아낭당(*砑郞當)하여 도리어 말하되 수득(收得)했습니다 하니 이렇게 행각할 것 같으면 염라노자(*閻羅老子)가 그에게 물어 밥값을 찾으리니(*索飯錢; 는 조사) 그가 얼마나 짚신을 답파(踏破)한 줄 알겠다. 바로 설봉에 이르니 당시에 만약 조금의 안근(眼筋)이 있어서 곧 별지(瞥地; 얼핏 퍼뜩 살핌)하여 갈 줄 알았더라면 어찌 쾌재(快哉)가 아니리오. (這箇) 인연(因緣; 공안)에 절각효와처(節角誵訛處)가 있으니 차사(此事)가 비록 그러히 득실이 없지만 득실이 매우 크며 비록 그러히 간택이 없지만 이 속에 이르러선 도리어 눈을 갖추어 간택함을 요한다. 보아라 저 용아(龍牙; 嗣洞山良价 청원하 5)는 행각할 때 저() 문단(問端)을 보내어() 덕산(德山; 宣鑑이니 嗣龍潭崇信 남악하 4)에게 묻되 학인이 막야검(鏌鎁劍)을 가지고 스님의 머리를 취하려고 할 땐 어떻습니까. 덕산이 목을 늘어뜨리며 앞으로 다가가서 이르되 화(). 용아가 이르되 스님의 머리가 떨어졌습니다. 덕산이 곧 방장으로 돌아갔다. 용아가 후에 동산에게 거사(擧似)하자 동산이 이르되 덕산이 당시에 무어라고 말하더냐. 용아가 이르되 그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동산이 이르되 그가 말이 없음은 곧 그래 두고 나에게 덕산의 떨어진 머리를 빌려주어 와 보아라. 용아가 언하에 대오하고 드디어 분향하고 멀리서 덕산을 바라보며 예배하고 참회했다. 어떤 중이 덕산의 처소에 전해 이르자 덕산이 이르되 동산노한이 호오(好惡)를 알지 못하는구나, 저한(這漢)은 죽은(死來; 는 조사) 지 다소시(多少時)거늘 구득(救得)한들 무슨 쓸 곳이 있으리오. (這箇; 此則) 공안이 용아의 것과 더불어 일반이다. 덕산이 방장으로 돌아감은 곧 암중(暗中)에 최묘(最妙)하고 암두가 대소(大笑)함은 그의 소중(笑中)에 독이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변득(辨得)한다면 천하를 횡행(橫行)하리라. 이 중이 당시에 만약 변득해 내었더라면 천고지하(千古之下)에 검책(檢責)을 면득(免得)했겠지만 암두의 문하에서 이미 이 한바탕 차과(蹉過; 錯過)했다. 보아라 저 설봉노인은 이 동참(설봉과 암두가 한가지로 덕산을 참문했음)이라서 곧 낙처를 알아 또한 그에게 설파하여 주지 않고 다만 30방 때리고 사원에서 쫓아내니 가이(可以; 는 조사) 광전절후(光前絕後). 이것(這箇)은 이 작가납승(作家衲僧)의 콧구멍을 염제(拈提)하여 사람을 위하는 수단이므로 다시 그에게 여지약하(如之若何; 이러쿵저러쿵)를 주지 않고 그로 하여금 오거(悟去)하게 함이다. 본분종사가 사람을 위하매 어떤 때엔 농조(籠罩; 制御)하여 그로 하여금 출두(出頭)하지 못하게 하고 어떤 때엔 방개(放開)하여 사낭당지(死郞當地; 不整治. 는 조사)로 하여금 도리어 반드시 출신(出身)할 곳이 있게 한다. 대소대(大小大; 이렇게 큰) 암두와 설봉이 거꾸로(; 一作到) () 끽반선화(喫飯禪和)의 감파(勘破)를 입었다. 지여(只如) 암두가 말하되 황소(黃巢)가 지나간 후 도리어 검을 수득(收得)했느냐 하니 제인은 그래 말하라 이 속에 합당히 무슨 말을 하득(下得)해야 그의 웃음을 면득(免得; 은 조사)하며 또 설봉의 행방(行棒)하여 쫓아냄을 면득하겠는가. 이 속의 효와(誵訛)를 만약 일찍이 친증친오(親證親悟)하지 못했다면 종사(縱使; 設使. 假令) 구두(口頭; 는 조사)의 쾌리(快利; 매우 날카로움)로는 구경(*究竟)에 생사를 투탈(透脫)함을 얻지 못함에 이른다. 산승(원오)이 심상(尋常)에 사람들에게 이 기관(機關)의 전처(轉處)를 보라고 시키지만() 만약 의의(擬議)한다면 곧 멀고도 멀다. 보지 못하는가, 투자(大同)가 염평승에게 물어(*投子問鹽平僧) 이르되 황소가 지나간 후 검을 수득(收得)했느냐. 중이 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투자가 이르되 30년 동안 마기를 희롱했더니 금일 도리어 나귀에게 차임을 입었다(*三十年弄馬騎 今日却被驢子撲). 이 중을 보건대 또한 이(是箇) 작가임에 방애되지 않아서 또한 수득(收得)을 말하지 않고 또한 거둠()을 얻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으니 서경승(西京僧)과는 격해(隔海)하여 있음과 같다. 진여(眞如; 慕喆)가 염운(拈云)하되 저 고인(투자와 염평승)1(투자)는 머리를 만들고 1(염평승)는 꼬리를 만들어 정()했다. 설두가 송해 이르되

 

眼似流星; 선법을 간파하는 안목이 유성 같이 신질(迅疾)함을 비유로 가리킴.

砑郞當; 또 아낭당(訝郞當)으로 지음. 낭자(狼藉)의 뜻. 또 의괴(疑怪)의 뜻.

閻羅老子; 곧 염라왕이니 또 명칭이 염마왕(閻魔王). 귀세계(鬼世界)의 시조며 명계(冥界)의 총사(總司)며 지옥의 주신(主神)이 됨.

索飯錢; 뜻으로 이르자면 일생에 참학하여 능히 오도하지 못하면 도연히 시주의 재반(齋飯)을 먹고 사후에 염라왕이 장차 밥값을 추수(追收)한다 함이니 이는 선가에서 상용하는 척책어(斥責語; 責罵하는 말). ()은 청구ㆍ요구.

究竟; 1. 사리의 도법이 지극하고 고심(高深)한 곳. 종극의 영항(永恒)의 진리. 2. 필경. 여기에선 2를 가리킴.

投子問鹽平僧; 염평(鹽平)은 마땅히 연평(延平; 福建 南平)으로 지어야 함. 연평승(延平僧)은 소산광인(疏山匡仁)의 법사인 소산징선사(疏山證禪師)를 가리킴. 전등록20 소산징선사(疏山證禪師) 第二世住 처음 인화상(仁和尙)을 참했고 득지(得旨)한 후 제방을 유력(遊歷)했다. 투자동선사(投子同禪師)를 참알하자 투자가 물어 가로되 최근에 어느 곳을 떠났느냐. 가로되 연평에서 왔습니다. 투자가 가로되 도리어 검을 가지고(將得; 은 조사) 왔느냐. 가로되 가지고 왔습니다. 투자가 가로되 노승에게 정사(呈似)하여 보아라. 스님이 곧 면전의 땅 위를 가리켰다. 투자가 곧 쉬었다. 스님이 드디어 떠났다. 3일 후에 투자가 주사(主事)에게 묻되 신도승(新到僧)이 어느 곳에 있느냐. 가로되 당시에 떠났습니다. 투자가 가로되 30년 동안 마기를 배웠더니 작일 나귀에게 차임을 입었다(三十年學馬伎 昨日被驢撲).

三十年弄馬騎 今日却被驢子撲; 법을 거양(擧揚)하는 중에 선기(禪機)가 남에게 식파(識破)됨을 입거나 혹 가히 대답할 말이 없을 때 이 말을 사용함. 이는 1종의 자조(自嘲). 또 복종하지 않는 기분을 함유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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