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용록

종용록 제32칙 송

태화당 2022. 5. 18. 08:59

無外而容大無不包 無礙而沖細無不入 門牆*岸岸莫探頭好 關鎖重重不消彈指 酒常酣而臥客喚醒來打 飯雖飽而穨農一坑埋却 突出虛空兮風搏妙翅穿開*碧落 踏翻滄海兮雷送游龍驚蟄二月節

 

岸岸; 高貌

碧落; 碧天也 落 籬也 說文 杝 落也 文選 張衡西京賦 揩枳藩 突棘落 李善注 落 亦籬也

 

무외(無外)이므로 수용(受用)하고 크기로는 싸지 못할 게 없고/ 무애(無礙)이므로 충(; 하다)하나니 작기로는 들어가지 못함이 없다/ 문장(門牆)이 안안(*岸岸; 높은 모양)하고 탐두(探頭; 刺探)하지 말아야 좋으리라/ 관쇄(關鎻)가 중중(重重)하다 탄지(彈指)도 쓰이지 않는다/ 술은 늘 취해서() 누운 객(臥客)이며 불러 깨워서 때려라/ 밥은 비록 포식(飽食)했지만 무너진 농부(頹農)한 구덩이에 묻어버려라/ 허공에 돌출하면서 바람이 묘시(*妙翅)를 치고() 벽락(*碧落)의 하늘을 천개(穿開)한다/ 창해를 답번()하면서 우레가 유룡(遊龍)을 전송한다 경칩(驚蟄)의 이월절(二月節)이다

 

岸岸; 높은 모양.

碧落; 푸른 하늘임. ()은 울타리임. 설문 이(; 울타리) ()이다. 문선. 장형의 서경부. 지번(枳藩; 탱자 울타리)을 문지르고 극락(棘落)에 충돌한다. 이선(李善) () () 또한 리(; 울타리).

 

師云 天童先頌返思能思底 豈有多般 雲門道 會得也目前包裹 會不得也目前包裹 此無外而容也 山河樓閣人畜等物 一多無礙 人境交參 此無礙而沖也 *韶國師*通玄峯頂 不是人間 心外無法 滿目靑山 通玄峯頂 所思境也 不是人間 能思心也 心外無法 總不見有也 滿目靑山 只此一句 這僧與韶國師 相隔信位人位一玄三玄 直得門牆岸岸 關鎖重重 卒難相見也 又頌 這僧見處 如醉客頹農 仰山指處 如妙翅游龍 法華經 譬如有人 至親友家醉酒而臥 是時親友官事當行 以無價寶珠繫其衣裏 其人醉臥都不覺知 州云 曾聞一飽忘百飢 今日山僧身便是 趙州一飽忘百飢 合受人天妙供 這僧飯飽頹農 滴水難消 明眼人辨取 梵語迦樓羅 此云妙翅鳥 搏風闢海 直取龍呑 孔子問禮於*老聃 謂見老子其猶龍也 游龍雲煙出沒 非同潛蟄者 此頌人位未是 只得一玄 向後自看 敎渠移身換步何也 但有路可上 更高人也行

 

韶國師; 德韶(891-972) 五代吳越法眼宗僧 處州龍泉(浙江龍泉)人 一說縉雲(浙江縉雲)人 俗姓陳 十五歲出家 十八歲受具足戒 嘗遍訪明師五十三人 後爲臨川法眼文益之法嗣 復入天台山訪智顗之遺蹟 止住白沙寺 後受吳越王錢弘俶 迎至杭州 尊爲國師 時天台山之螺溪義寂 慨嘆天台敎籍之散佚 聞高麗存有天台敎籍 與師共議之 師乃乞錢弘俶遣使帶回 後遷天台般若寺 竝興建道場數十所 宋太祖開寶五年入寂 壽八十二 [宋高僧傳十三 禪林僧寶傳七 聯燈會要二十七]

通玄峯; 碧巖錄第七則同種電鈔云 天台山有通玄峰

老聃; 老子 姓李氏 名聃 字伯陽 聃 諡也 定王三年丁巳(604) 九月十四日 生楚國陳郡苦縣賴鄕曲仁里 聃之生也 釋迦文佛入滅已三百四十六年矣 簡王四年己卯(582) 伯陽年二十三 仕周爲守藏吏 十三年遷柱下史 自是五十四年不遷 時人目爲吏隱 敬王元年壬午(519) 老子年八十六歲 去周與散關(今陝西興元路鳳州)令尹喜 西遊流沙 而死於扶風郡 葬槐里(今陝西安西路興平縣也) [釋氏稽古略一]

 

스님이 이르되 천동(天童)이 먼저 능사하는 것(能思底)을 반사(返思)하매 어찌 다반(多般)이 있으랴를 송했다. 운문이 말하되 회득(會得)하더라도 목전에 포과(包裹)했고 회()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목전에 포과했다. 이것이 무외(無外)이므로 수용(受用)함이다. 산하ㆍ누각ㆍ인축(人畜) 등의 물건이 일다(一多)가 무애(無礙)하고 인경(人境)이 교참(交參)하나니 이것이 무애(無礙)이므로 충(; 하다)함이다. 소국사(*韶國師)가 말하되 통현봉정(*通玄峯)/ 이 인간이 아니다(不是人間)/ 마음 밖에 법이 없어서(心外無法)/ 눈 가득히 청산(滿目靑山)이다. 통현봉정(通玄峯頂)은 소사경(所思境)이며 불시인간(不是人間)은 능사심(能思心)이며 심외무법(心外無法)은 모두 있음을 보지 않음이다. 만목청산(滿目靑山), 다만 이 1구는 저승(這僧)과 소국사(韶國師)가 신위인위(信位人位)와 일현삼현(一玄三玄)이 상격(相隔)했음이니 바로 문장(門牆)이 안안(岸岸)하고 관쇄(關鎖)가 중중(重重)함을 얻은지라 마침내 상견하기 어렵다. 또 송하되 저승(這僧)의 견처는 취객(醉客)과 퇴농(頹農)과 같고 앙산이 가리킨 곳은 묘시(妙翅)와 유룡(游龍)과 같다. 법화경 비여(譬如) 어떤 사람이 친우가(親友家)에 이르러 술에 취해 누웠다. 이때 친우가 관사(官事)로 마땅히 가야 했다. 무가보주(無價寶珠)를 그의 옷 안에 묶어 두었다. 그 사람이 취와(醉臥)하여 도무지 각지(覺知)하지 못했다. 조주(; 저본에 로 지었음)가 이르되 한 번 배부르면 백기(百飢)를 잊는다 함을 일찍이 들었는데 금일 산승의 몸이 곧 이것이다. 조주는 한 번 배불러 백기(百飢)를 잊었고 합당히 인천(人天)의 묘공(妙供)을 받아야 하거니와 저승(這僧)은 밥으로 배부른 퇴농(頹農)인지라 적수(滴水)도 소화하기 어렵나니 명안인(明眼人)이거든 변취(辨取)하라. 범어 가루라(迦樓羅)는 여기에선 이르되 묘시조(妙翅鳥). 바람을 치고 바다를 열어 바로 용을 취해 삼킨다. 공자(孔子)가 노담(*老聃;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 이르자면 노자를 본 그것은 용과 같음이다. 유룡(游龍)은 운연(雲煙)에 출몰하나니 잠칩(潛蟄)한 자와 같지 않다. 이것은 인위(人位)는 이것이 아니며 다만 1현을 얻었으니 향후에 자간(自看)하라 한 것을 송했다. 그로 하여금 이신환보(移身換步)하게 한 것은 왜인가, 단지 길이 있으면 가히 오를 것이니 다시 높더라도 사람이 또한 행한다.

 

韶國師; 덕소(德韶; 891-972)니 오대 오월 법안종승. 처주 용천(절강 용천) 사람인데 일설엔 진운(절강 진운) 사람. 속성은 진. 15세에 출가했고 18세에 구족계를 받았음. 일찍이 명사(明師) 53인을 두루 참방했으며 후에 임천의 법안문익(法眼文益)의 법사가 됨. 다시 천태산에 들어가 지의(智顗)의 유적(遺蹟)을 참방하고 백사사에 지주(止住)했는데 뒤에 오월왕 전홍숙이 영접해 항주에 이르게 하고 존경하여 국사로 삼음을 받았음. 때에 천태산의 나계의적(螺溪義寂)이 천태의 교적(敎籍)이 산일(散佚; 흩어져 없어짐)함을 개탄하였는데 고려에 천태의 교적이 존재하여 있다 함을 듣고 스님과 함께 의논했으며 스님이 이에 전홍숙에게 걸구(乞求)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가지고 오게 했음. 후에 천태 반야사로 옮겼고 아울러 도량 수십 곳을 흥건(興建)했음. 송태조 개보 5년에 입적했으니 나이는 82 [송고승전13. 선림승보전7. 연등회요27

通玄峯; 벽암록 제7칙 동 종전초에 이르되 천태산에 통현봉이 있다.

老聃; 노자(老子). 성은 이씨(李氏)며 이름은 담()이며 자는 백양(伯陽)이니 담()은 시호임. 정왕(定王) 3년 정사(丁巳; 604) 914일에 초국(楚國)의 진군(陳郡) 고현(苦縣) 뇌향(賴鄉) 곡인리(曲仁里)에서 출생했음. ()의 탄생은 석가문불이 입멸한 지 이미 346년임. 간왕(簡王) 4년 기묘(己卯; 582) 백양의 나이 23에 주()에 벼슬해 수장리(守藏吏)가 되었으며 13년에 주하사(柱下史)로 옮겼음. 이로부터 54년 동안 옮기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지목해 이은(吏隱)이라 했음. 경왕(敬王) 원년 임오(壬午; 519) 노자의 나이 86세에 주()를 떠나 산관(散關; 지금의 섬서 흥원로 봉주) ()인 윤희(尹喜)와 유사(流沙)로 서유(西遊)하다가 부풍군(扶風郡)에서 죽었으며 괴리(槐里; 지금의 섬서 서안 안서로 흥평현)에 장사 지냈음 [석씨계고략1].

 

萬松老人評唱天童覺和尙頌古從容庵錄卷二

 

底本 大正藏 第48冊 萬松老人評唱天童覺和尙頌古從容庵錄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daum.net)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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