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심법요

전심법요 13

태화당 2023. 1. 8. 09:02

六祖不會經書 何得傳衣爲祖 秀上座是五百人首座 爲敎授師 講得三十二本經論 云何不傳衣 師云 爲他有心是有爲法 所修所證將爲是也 所以五祖付六祖 六祖當時秖是默契 得密授如來甚深意 所以付法與他 汝不見道 法本法無法 無法法亦法 今付無法時 法法何曾法 若會此意 方名出家兒 方好修行 若不信云何上座走來大庾嶺頭尋六祖 六祖便問 汝來求何事 爲求衣爲求法 明上座云 不爲衣來 但爲法來 六祖云 汝且暫時斂念 善惡都莫思量 明乃稟語 六祖云 不思善不思惡 正當與麽時 還我明上座父母未生時面目來 明於言下忽然默契 便禮拜云 如人飲水冷煖自知 某甲在五祖會中 枉用三十年工夫 今日方省前非 六祖云 如是 到此之時 方知祖師西來直指人心見性成佛不在言說 豈不見 阿難問迦葉云 世尊傳金襴外別傳何物 迦葉召阿難 阿難應諾 迦葉云 倒却門前刹竿著 此便是祖師之標榜也 甚生阿難三十年爲侍者 秖爲多聞智慧 被佛訶云 汝千日學慧 不如一日學道 若不學道 滴水難消

 

묻되 6(六祖)는 경서(經書)를 알지() 못했거늘 어찌하여전의(傳衣)하여 조사가 됨을 얻었으며 수상좌(上座)는 이 5백 인의 수좌(首座)며 교수사(敎授師)가 되며 32(三十二本) 경론을 강득(講得)했거늘 어찌하여 전의(傳衣)하지 못했습니까. 사운(師云) 그는 유심(有心)했기 때문이니 이는 유위법(有爲法)이며 소수소증(所修所證)이 다만() 이것이 되므로 소이로 5(五祖)6조에게 부촉(付囑)했다. 6조가 당시에 다만 이 묵계(默契)하고 여래의 심심(甚深)한 뜻을 밀수(密授; 는 통함)함을 얻은지라 소이로 부법(付法)하여 그에게 주었다. 네가 말한 것을 보지 못했느냐. 법의 본법(本法)은 무법(無法)이니/ 무법의 법도 또한 법이다/ 이제 무법을 부촉할 때/ 법법이 어찌 일찍이 법이리오(석가모니불의 전법게). 만약 이 뜻을 안다면 바야흐로 이름이 출가아(出家兒)며 바야흐로 훌륭하게() 수행한다. 만약 불신(不信)한다면 어찌하여 명상좌(上座)가 대유령두(大庾嶺)로 달려와 6조를 찾았겠는가. 6조가 바로 묻되 네가 와서 무슨 일을 구하는가. 옷을 구하느냐, 법을 구하느냐. 명상좌가 이르되 옷을 위해 온 게 아니라 단지 법을 위해 왔습니다. 6조가 이르되 너는 다만() 잠시 사념(思念)을 거두고() 선악을 모두 사량(思量)하지 말아라. ()이 이에 말씀을 품수(稟受)했다. 6조가 이르되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아라. 바로() 이러한(與麽) 때를 당해 나에게 명상좌의 부모미생시(父母未生時)의 면목을 송환해 오너라. 명이 언하에 홀연히 묵계(默契)했다. 바로 예배하고 이르되 사람이 음수(飲水)하매 냉난(冷煖)을 스스로 앎과 같습니다. 모갑(某甲)5조의 회중(會中)에 있으면서 헛되이() 30년 공부(工夫)를 썼으며 금일 비로소 앞의 그름을 성찰했습니다. 6조가 이르되 이와 같다. 이때에 이르러 조사가 서래(西來)하여 인심(人心)을 직지(直指)하여 견성성불케 함이 언설(言說)에 있지 않음을 비로소 알 것이다. 어찌 보지 못하는가, 아난(阿難)이 가섭에게 물어 이르되 세존이 금란(金襴)을 전한 밖에 달리 무슨 물건을 전하셨습니까. 가섭이 아난을 불렀다. 아난이 응낙(應諾)했다. 가섭이 이르되 문앞의 찰간(刹竿)을 넘어뜨려버려라. 이것이 바로 이 조사의 표방(標榜)이다. 심생(甚生; 2字 誤謬로 의심됨) 아난이 30년 동안 시자(侍者)가 되었으나 다만 다문(多聞)의 지혜인지라 불타의 꾸짖음을 입었으니 이르되 너의 천일(千日)의 학혜(學慧)1일의 학도(學道)만 같지 못하나니 만약 학도하지 않으면 적수(滴水; 한 방울의 물)도 소화하기 어렵다.

 


六祖; 指東土禪宗第六代祖師 卽六祖慧能(638-713) 唐代僧 又作惠能 號六祖大師 大鑑禪師 祖籍范陽(河北) 俗姓盧 生於南海新興(廣東) 其父早亡 家貧 常採薪汲水以奉寡母 一日負薪至市 聞客讀誦金剛經 心卽開悟 時五祖弘忍住蘄州黃梅之東禪院 法門甚盛 師乃前往拜謁 五祖遂使入碓房舂米 歷八月 一日夜召師入室 潛授衣法 竝遣其連夜南歸 隱於四會懷集之間 儀鳳元年(676)至南海 遇印宗法師於法性寺 受具足戒 翌年 移住於韶陽曹溪寶林寺 弘揚頓悟法門 與神秀於北方所倡之漸悟法門相對 史稱南頓北漸 南能北秀 其弟子法海 將其敎說編成一書 名六祖法寶壇經 盛行於世 後應刺史韋據之請 於大梵寺樹立法幢 未久歸曹溪 弘布大法 道俗歸崇 神龍元年(705) 中宗派遣內侍薛簡召師至京師 師稱疾固辭未往 帝乃敕賜摩衲袈裟及寶鉢等物 竝敕改寶林寺爲中興寺 三年 更賜法泉寺額 師又曾捨宅爲國恩寺 先天元年(712) 命門人於寺內建立報恩塔 翌年七月 歸返國恩寺 八月示寂 壽七十六 師肉身不壞 迄今仍存 歸停曹溪 憲宗時諡號大鑑禪師 遺錄有六祖壇經一卷 金剛經口訣等 其中六祖壇經 初由法海集錄師之語要 後人多所節略 未能見祖意之全貌 元代德異乃探求諸方 得其全文 至元二十八年(1291) 宗寶重新校對三種異本 正其訛誤 詳其節略 增補弟子之請益機緣而印行之 今收於大正藏第四十八冊 師之嗣法弟子四十餘人中 以荷澤神會 南陽慧忠 永嘉玄覺 靑原行思 南嶽懷讓等最著 開後世臨濟曹洞等五家七宗之禪 [六祖壇經 佛祖統紀二十九 宋高僧傳八 傳燈錄五 釋氏稽古略三 傳法正宗記六]

여기에선 동토(東土) 선종 제6대 조사를 가리킴. 6조 혜능(慧能; 638-713)이니 당대승. 또 혜능(惠能)으로 지음. ()가 육조대사(六祖大師)ㆍ대감선사(大鑑禪師). 조사의 관적(貫籍)은 범양(范陽; 하북)이며 속성(俗姓)은 노(). 남해(南海) 신흥(新興; 광동)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일찍 죽었음. 집이 가난하여 늘 땔나무를 채집(採集)하고 물을 길어 그 홀어머니를 봉양했음. 어느 날 땔나무를 지고 시장에 이르렀다가 나그네의 금강경 독송함을 듣고 마음이 곧 개오(開悟)했음. 당시에 5조 홍인(弘忍)이 기주(蘄州) 황매(黃梅; 호북성 동남 黃梅縣)의 동선원(東禪院)에 주()하면서 법문(法門)이 매우 흥성(興盛)했음. 스님이 곧 앞으로 가서 배알(拜謁)했는데 5조가 드디어 대방(碓房; 방앗간)에 들어가 쌀을 찧게 했음. 여덟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스님을 불러 입실케 하고 몰래 의법(衣法)을 전수(傳授)했음. 아울러 그를 보내면서 밤을 이어 남쪽으로 돌아가 사회(四會)와 회집(懷集)의 사이에 은거하라 했음. 의봉(儀鳳) 원년(676) 남해(南海)에 이르러 법성사(法性寺)에서 인종법사(印宗法師)를 만나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음. 다음해 소양(韶陽)의 조계(曹溪) 보림사(寶林寺)로 이주(移住)하여 돈오법문(頓悟法門)을 크게 선양(宣揚)했는데 신수(神秀), 북방에서 제창(提倡)한 바 점오법문(漸悟法門)과 상대되므로 사가(史家)가 남돈북수(南頓北漸)ㆍ남능북수(南能北秀)라 일컬음. 그의 제자 법해(法海)가 그의 교설(敎說)을 가지고 한 책을 편성(編成)하고는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이라고 이름했으며 세상에 성행(盛行)했음. 후에 자사(刺史) 위거(韋據)의 청에 응해 대범사(大梵寺)에서 법당(法幢)을 수립(樹立)했고 오래지 않아 조계로 돌아가 대법(大法)을 홍포(弘布)했는데 도속(道俗; 僧俗)이 귀의하며 숭배했음. 신룡(神龍) 원년(705) 중종(中宗)이 내시(內侍) 설간(薛簡)을 파견하여 스님을 불러 경사(京師; 首都. 帝都. 는 서울 사)에 이르게 하자 스님이 질병을 일컬으며 고사(固辭)하고 가지 않자 황제가 이에 칙명으로 마납가사(摩衲袈裟) 및 보발(寶鉢) 등의 물건을 주었으며 아울러 칙명으로 보림사(寶林寺)를 고쳐 중흥사(中興寺)로 만들었음. 3(707)에 다시 법천사(法泉寺)의 편액(扁額)을 주었음. 스님이 또 일찍이 집을 희사(喜捨)해 국은사(國恩寺)를 만들었는데 선천(先天) 원년(712)에 문인(門人)에게 명령해 절 안에 보은탑(報恩塔)을 건립케 하고 다음해 7월 국은사로 돌아갔다가 8월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76. 스님의 육신이 무너지지 않아 지금까지 그대로 존재하며 조계로 돌아가 머묾. 헌종(憲宗) 때 대감선사(大鑑禪師)로 시호(諡號)했음. 유록(遺錄)으론 육조단경(六祖壇經) 1, 금강경구결(金剛經口訣) 등이 있음. 그 중 육조단경은 처음 법해(法海)가 스님의 어요를 집록(集錄)함으로 말미암았으며 후인이 절략(節略)한 바가 많아 조의(祖意)의 전모를 능히 보지 못했음. 원대(元代) 덕이(德異)가 이에 제방을 탐구(探求)해 그 전문을 얻었으며 지원(至元) 28(1291) 종보(宗寶)가 거듭 새롭게 3종의 이본(異本)을 교대(校對)하여 그 와오(訛誤)를 정정(訂正)하고 그 절략(節略)을 상세히 하여 제자의 청익기연(請益機緣)을 증보하여 인행(印行)했으니 지금 대정장 제48책에 수록되었음. 스님의 사법제자(嗣法弟子) 40여 인 중에 하택신회(荷澤神會)ㆍ남양혜충(南陽慧忠)ㆍ영가현각(永嘉玄覺)ㆍ청원행사(靑原行思)ㆍ남악회양(南嶽懷讓) 등이 가장 저명함. 후세의 임제ㆍ조동 등 오가칠종(五家七宗)의 선()을 열었음 [육조단경. 불조통기29. 송고승전8. 전등록5. 석씨계고략3. 전법정종기6].

 

; 神秀(605-706) 唐代僧 汴州(河南開封之南)尉氏人 俗姓李 身長八尺 尨眉秀目 有巍巍威德 少覽經史 博學多聞 旣剃染受法 尋師訪道 後至蘄州雙峰東山寺 參五祖弘忍 唐高宗上元二年(675)十月 弘忍示寂 師遷江陵當陽山玉泉寺傳法 緇徒靡然歸其德風 道譽大揚 則天武后聞之 召入內道場 特加敬重 敕於當陽山建度門寺 以表旌其德 中宗卽位亦厚重之 師嘗奏武后召請慧能 亦自裁書招之 慧能固辭 答己與嶺南有緣 遂不踰大庾嶺 禪門乃有南能北秀之稱 神龍二年二月示寂於洛陽天宮寺 壽一二 敕號大通禪師 爲禪門諡號最早者 [宋高僧傳八 傳燈錄四 五燈會元二]

신수(神秀; 605-706)니 당대승. 변주(하남 개봉의 남) 울지(尉氏)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이(). 신장이 8척이며 큰 눈썹에 빼어난 눈(尨眉秀目)이었으며 외외(巍巍)한 위덕(威德)이 있었음. 어릴 적에 경사(經史)를 열람했고 박학다문(博學多聞)했음. 이미 체염(剃染)하고 수법(受法)하고는 스승을 찾고 도를 물었음. 후에 기주(蘄州)의 쌍봉산(雙峰山) 동산사(東山寺)에 이르러 5조 홍인(弘忍)을 참알(參謁)했음. 당 고종 상원 2(675) 10월에 홍인이 시적하자 스님이 강릉(江陵) 당양산(當陽山) 옥천사(玉泉寺)로 옮겨 전법(傳法)했음. 치도(緇徒; 僧徒)가 쓰러질 듯 그의 덕풍(德風)에 귀의했고 도예(道譽)를 크게 드날렸음.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이를 듣고 내도량(內道場)에 불러들여 특별히 경중(敬重)을 더했으며 칙령으로 당양산(當陽山)에 도문사(度門寺)를 세워 그의 덕을 표정(表旌)했음. 중종이 즉위하자 또한 그를 후중(厚重)하였음. 스님이 일찍이 무후(武后)에게 아뢰어 혜능(慧能)을 소청(召請)하게 했으며 또한 스스로 서신을 지어 그를 초청했지만 혜능이 고사(固辭)하며 답하기를 자기는 영남(嶺南)에 인연이 있다 하며 드디어 대유령(大庾嶺)을 넘지 않았음. 선문에 남능북수(能北秀之)의 호칭이 있음. 신룡 22월에 낙양의 천궁사(天宮寺)에서 시적했으니 나이는 102. 칙호(敕號)가 대통선사(大通禪師)니 선문에서 시호의 가장 이른() 자가 됨 [송고승전8. 전등록4. 오등회원2].

 

上座; 參禪僧中的首座稱爲上座 多用作對禪僧的尊稱

참선승(參禪僧) 중에 수좌(首座)를 상좌(上座)라고 호칭함. 다분히 선승(禪僧)에 대한 존칭으로 쓰임.

 

首座; 寺院參禪僧衆中居于首位者 又僧堂中居于首位的參禪僧 是禪寺職事僧之一 若僧堂分作前後兩堂 則分別設前堂首座與後堂首座 大宋僧史略中 首座之名 卽上座也 居席之端 處僧之上 故曰也 尋唐世敕辯章 撿校修寺 宣宗賞其功 署三敎首座 …… 次復經論之學 或置首座 三敎首座則辯章爲始也

사원의 참선하는 승중(僧衆) 가운데 수위(首位)에 거처하는 자임. 또 승당(僧堂) 중에 수위에 거처하는 참선승임. 이는 선사(禪寺)의 직사승(職事僧)의 하나임. 만약 승당을 전후의 양당(兩堂)으로 나누어 지으면 곧 전당수좌(前堂首座)와 후당수좌(後堂首座)를 분별해 시설함. 대송승사략중. 수좌(首座)란 이름은 곧 상좌(上座). 좌석의 첫째()에 거처하면서 승중의 위에 거처하는지라 고로 말함이다. 찾아보니 당세(唐世)에 변장(辯章)에게 칙령하여 사원을 검교(撿校)하고 다스리게 했는데 선종(宣宗)이 그 공을 상()주어 삼교수좌(三敎首座)로 임명()했다 …… 다음에 다시 경론의 학()으로 혹 수좌를 두었으니 삼교수좌는 곧 변장(辯章)이 처음이 된다.

 

五祖; 卽東土禪宗第五祖弘忍(602-675) 唐代僧 潯陽(江西九江)人 或謂蘄州(湖北蘄春)黃梅人 俗姓周 七歲 從四祖道信出家於蘄州黃梅雙峰山東山寺 唐永徽二年(651)五十一歲 道信入寂 乃繼承師席 世稱五祖黃梅 或僅稱黃梅 咸亨二年(671) 傳法於六祖慧能 師於高宗上元二年示寂 壽七十四 代宗敕諡大滿禪師 相傳著有五祖弘忍大師最上乘論一卷 或以爲僞作 [宋高僧傳八 傳燈錄三]

곧 동토 선종 제5조 홍인(弘忍; 602-675)이니 당대승. 심양(潯陽; 강서 九江) 사람이니 혹은 이르기를 기주(蘄州; 호북 蘄春) 황매(黃梅) 사람이라 함. 속성(俗姓)은 주(). 7세에 4조 도신(道信)을 좇아 기주(蘄州) 황매(黃梅) 쌍봉산(雙峰山)의 동산사(東山寺)에서 출가했음. () 영휘(永徽) 2(651) 51세에 도신이 입적(入寂)하자 이에 사석(師席)을 계승(繼承)했음. 세칭이 오조황매(五祖黃梅)며 혹은 다만 명칭이 황매(黃梅). 함형(咸亨) 2(671) 6조 혜능(慧能)에게 전법(傳法)했으며 스님은 고종(高宗) 상원(上元) 2년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74. 대종(代宗)이 칙시(敕諡)하여 대만선사(大滿禪師)라 했음. 서로 전()하기를 저서(著書)에 오조홍인대사최상승론(五祖弘忍大師最上乘論) 1권이 있다 하지만 혹은 위작(僞作)이라 하기도 함 [송고승전8. 전등록3].

 

出家兒; 猶出家人 兒 後綴

출가인과 같음. 아는 후철(後綴; 接尾辭).

 

; 道明 唐代僧 鄱陽(江西)人 俗姓陳 陳宣帝之裔 國亡落於民間 以其王孫 曾受四品將軍之爵 因有將軍之號 幼年於永昌寺出家 於高宗之世 投黃梅山五祖弘忍 初無證悟 後聞大鑑慧能得五祖衣鉢 乃躡迹急追 而於大庾嶺會之 因六祖慧能之開示 言下大悟 遂獨往廬山布水臺 經三載後 始往袁州蒙山 大唱玄化 初名慧明或惠明 以避六祖上字 故名道明 弟子等盡遣過嶺南 參禮六祖 [五燈會元二 六祖壇經 祖堂集二 宋高僧傳八 傳燈錄四]

도명(道明)이니 당대승. 파양(강서) 사람. 속성은 진()이니 진선제의 후예임. 나라가 망하자 민간에 추락하였으나 그가 왕손이기 때문에 일찍이 사품장군의 작위를 받았고 인해 장군이란 명칭이 있음. 유년에 영창사에서 출가하였고 고종의 시대에 황매산 5조 홍인에게 투신해 처음엔 증오(證悟)가 없었음. 뒤에 대감혜능이 5조의 의발을 얻었다 함을 듣고 이에 자취를 밟아 급히 추격하여 대유령에서 그를 만났으며 6조 혜능의 개시(開示)로 인하여 언하에 대오하고 드디어 홀로 여산 포수대로 갔으며 3()가 지난 후 비로소 원주 몽산으로 가서 현화(玄化)를 대창(大唱)했음. 처음 이름은 혜명(慧明) 혹 혜명(惠明)이었으나 6조의 위의 글자를 피한지라 고로 도명으로 이름했음. 제자 등을 모두 보내어 영남에 이르게 하고 6조를 참례하게 했음 [오등회원2. 육조단경. 조당집2. 송고승전8. 전등록4].

 

大庾嶺; 爲通往嶺南的五條要道之一 位於江西大庾縣南 廣東南雄縣北 古稱塞上 漢武帝遣庾勝兄弟征伐南越 庾勝據守此嶺 遂稱大庾 又稱庾嶺 臺嶺山

영남으로 통왕(通往)하는 다섯 줄기의 요됴(要道)의 하나가 됨. 강서성 대유현 남쪽과 광동성 남웅현 북쪽에 위치함. 옛 호칭은 세상(塞上)이었음. 한무제가 유승(庾勝) 형제를 파견하여 남월(南越)을 정벌했는데 유승이 이 고개에 기대어 지켰으므로 드디어 대유(大庾)라고 일컬었음. 또 호칭이 유령(庾嶺)ㆍ대령산임.

 

父母未生時; 與父母未生前同義 指本來面目

부모미생전과 같은 뜻. 본래면목을 가리킴.

 

某甲; 自稱之詞 相當于我 二代替人名 此指一

1. 자칭의 말이니 아()에 상당(相當). 2. 인명(人名)을 대체함. 여기에선 1을 가리킴.

 

工夫; 或作功夫 謂參禪也

혹 공부(功夫)로 지음. 참선을 말함.

 

阿難; <> ānanda 阿難陀之略 譯曰歡喜 慶喜 斛飯王之子 提婆達多之弟 佛之從弟 十大弟子之一 禪宗第二祖 生於佛成道之夜 佛壽五十五 阿難二十五歲時出家 從侍佛二十五年 受持一切佛法 [中阿含第八侍者經 智度論三 文句二之上 阿彌陀經慈恩疏上]

<> ānanda. 아난타(阿難陀)의 약칭. 번역해 가로되 환희(歡喜)ㆍ경희(慶喜). 곡반왕(斛飯王)의 아들이며 제바달다(提婆達多)의 동생이며 부처의 종제(從弟)10대 제자의 하나. 선종 제2. 부처가 성도(成道)한 날 밤에 출생했으며 부처의 나이가 55며 아난이 25세 이었을 때 출가했음. 부처를 좇아 시봉하기 25년에 일체의 불법을 수지(受持)했음 [중아함제8시자경. 지도론3. 문구2지상. 아미타경자은소상].

 

金襴; 金襴衣 金縷織成之袈裟 又曰金色衣 金色㲲衣 黃金㲲衣 金縷袈裟 印度早已行之 佛母大愛道 上之於釋尊 其因緣散見諸經論

금란의니 금실로 짜서 이룬 가사임. 또 가로되 금색의ㆍ금색첩의ㆍ황금첩의ㆍ금루가사. 인도에서 일찍 이미 이를 행했으니 불모 대애도(大愛道)가 석존에게 바쳤음. 그 인연은 여러 경론에 가끔 보임.

 

刹竿; 翻譯名義集七 刹摩 正音掣多羅 此云土田 淨名略疏云 萬境不同亦名爲刹 垂裕云 蓋取莊嚴差別名之爲刹 此乃通指國土名刹 又復伽藍號梵刹者 如輔行云 西域以柱表刹示所居處也 梵語 剌瑟胝 此云竿 卽幡柱也 長阿含云 若沙門於此法中勤苦得一法者 便當竪幡以告四遠今有少欲人

번역명의집7. 찰마(刹摩) 정음(正音)은 체다라(掣多羅; ksetra)며 여기에선 이르되 토전(土田)이다. 정명약소(淨名略疏)에 이르되 만경(萬境)이 부동(不同)함을 또한 이름해 찰()이다. 수유(垂裕; 維摩經略疏垂裕記一)에 이르되 대개 장엄차별(莊嚴差別)을 취해 찰()이라고 이름한다 했는데 이것은 곧 국토(國土)를 이름해 찰()이라 함을 보통으로 가리킴이다. 또 다시 가람(伽藍)을 범찰(梵刹)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예컨대() 보행(輔行)에 이르되 서역에선 기둥()으로 찰()을 표시함은 거처하는 곳을 보임이다 했다. 범어 랄슬지(剌瑟胝; lakṣatā)는 여기에선 이르되 간(竿)이니 곧 번주(幡柱). 장아함(長阿含)에 이르되 만약 사문(沙門)이 이 법 가운데에서 근고(勤苦)하여 일법(一法)을 얻는다면 곧 마땅히 번()을 세워 지금 소욕인(少欲人)이 있음을 사원(四遠; 四方의 뜻)에 고한다.

 

標榜; 標準 榜樣 法式

표준. 방양. 법식.

 

侍者; 伺候寺院主持僧 爲其服務的職事僧 有燒香請客書狀侍者之職

사원의 주지승을 사후(伺候; 살피다)하며 그를 위해 복무하는 직사승(職事僧)이니 소향ㆍ청객ㆍ서장시자(書狀侍者)의 직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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