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堂云 卽心是佛 上至諸佛 下至蠢動含靈 皆有佛性 同一心體 所以達摩從西天來 唯傳一心法 直指一切衆生本來是佛 不假修行 但如今識取自心 見自本性 更莫別求 云何識自心 卽如今言語者正是汝心 若不言語又不作用心體 如虛空相似 無有相貌亦無方所 亦不一向是無有而不可見 故祖師云 眞性心地藏 無頭亦無尾 應緣而化物 方便呼爲智 若不應緣之時 不可言其有無 正應之時 亦無蹤跡 旣知如此 如今但向無中棲泊 卽是行諸佛路 經云 應無所住而生其心 一切衆生輪迴生死者 意緣走作 心於六道不停 致使受種種苦 淨名云 難化之人心如猿猴 故以若干種法制禦其心 然後調伏 所以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故知一切諸法皆由心造 乃至人天地獄六道修羅 盡由心造 如今但學無心頓息諸緣 莫生妄想分別 無人無我 無貪瞋無憎愛無勝負 但除却如許多種妄想 性自本來清淨 卽是修行菩提法佛等 若不會此意 縱爾廣學勤苦修行 木食草衣 不識自心皆名邪行 盡作天魔外道水陸諸神 如此修行 當復何益 志公云 本體是自心作 那得文字中求 如今但識自心 息却思惟 妄想塵勞自然不生 淨名云 唯置一床寢疾而臥 心不起也 如今臥疾 攀緣都息 妄想歇滅 卽是菩提 如今若心裏紛紛不定 任爾學到三乘四果十地諸位 合殺秖向凡聖中坐 諸行盡歸無常 勢力皆有盡期 猶如箭射於空 力盡還墮 却歸生死輪迴 如斯修行不解佛意 虛受辛苦 豈非大錯 志公云 未逢出世明師 枉服大乘法藥 如今但一切時中行住坐臥 但學無心 亦無分別亦無依倚 亦無住著 終日任運騰騰 如癡人相似 世人盡不識爾 爾亦不用敎人識不識 心如頑石頭都無縫罅 一切法透汝心不入 兀然無著 如此始有少分相應 透得三界境過 名爲佛出世 不漏心相名爲無漏智 不作人天業 不作地獄業 不起一切心 諸緣盡不生 卽此身心是自由人 不是一向不生 秖是隨意而生 經云 菩薩有意生身是也 忽若未會無心 著相而作者 皆屬魔業 乃至作淨土佛事 並皆成業 乃名佛障 障汝心故 被因果管束 去住無自由分 所以菩提等法 本不是有 如來所說 皆是化人 猶如黃葉爲金 權止小兒啼 故實無有法名阿耨菩提 如今旣會此意 何用區區 但隨緣消舊業 更莫造新殃 心裏明明 所以舊時見解總須捨却 淨名云 除去所有 法華云 二十年中常令除糞 秖是除去心中作見解處 又云 蠲除戲論之糞 所以如來藏本自空寂 幷不停留一法 故經云 諸佛國土亦復皆空 若言佛道是修學而得 如此見解全無交涉 或作一機一境揚眉動目 秖對相當便道契會也 得證悟禪理也 忽逢一人不解 便道都無所知 對他若得道理 心中便歡喜 若被他折伏不如他 便卽心懷惆悵 如此心意學禪 有何交涉 任汝會得少許道理 卽得個心所法 禪道總沒交涉 所以達摩面壁 都不令人有見處 故云妄機是佛道 分別是魔境 此性縱汝迷時亦不失 悟時亦不得 天眞自性本無迷悟 盡十方虛空界 元來是我一心體 縱汝動用造作 豈離虛空 虛空本來無大無小 無漏無爲 無迷無悟 了了見無一物 亦無人亦無佛 絕纖毫的量 是無依倚無粘綴 一道清流是自性 無生法忍何有擬議 眞佛無口不解說法 眞聽無耳其誰聞乎 珍重
상당(上堂)하여 이르되 즉심(卽心)이 이 부처니 위로 제불에 이르고 아래로 준동함령(蠢動含靈)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佛性)이 있으며 동일한 심체(心體)다. 소이로 달마(達摩)가 서천(西天)으로부터 와서 오직 1심법(心法)을 전했고 일체중생이 본래 이 부처임을 직지(直指)했으니 수행을 빌리지 않는다. 단지 여금에 자심(自心)을 식취(識取)하고 자기의 본성을 보고 다시 달리 구하지 말아라. 어떻게(云何) 자심을 아는가, 곧 여금에 언어(言語)하는 것이 바로 이 너의 마음이다. 만약 언어하지 않고 또 심체(心體)를 작용하지 않는다면 마치 허공과 상사(相似)하여 상모(相貌)가 있지 않고 또한 방소(方所)가 없으니 또한 한결같이(一向) 이 있음이 아니며 가히 보지 못한다 하지 말아라. 고로 조사(祖師; 제26조 不如密多)가 이르되 진성(眞性)을 심지(心地)에 감추었으니/ 머리도 없고 또한 꼬리도 없다/ 응연(應緣)하여 중생(物)을 화도(化度)하나니/ 방편으로 호칭(呼稱)해 지(智)라 한다. 만약 응연(應緣)하지 않을 때는 그것이 있지 않다고 말함은 옳지 못하며 바로(正) 응할 때도 또한 종적이 없다. 이미 이와 같음을 알았으니 여금에 단지 무(無) 가운데를 향해 서박(棲泊)해야 즉시 제불의 길을 행함이다. 경(經; 금강경)에 이르되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應無所住而生其心). 일체중생이 생사에 윤회(輪迴)하는 것은 의연(意緣)으로 주작(走作; 함부로 날뛰는 것)하여 마음이 6도(道)에서 멈추지 않는지라 갖가지 고(苦)를 받게 함에 이른다(致). 정명(淨名)이 이르되 교화하기 어려운 사람은 마음이 원후(猿猴; 원숭이)와 같은지라 고로 약간종(若干種)의 법으로써 그의 마음을 제어(制禦)한 연후에 조복(調伏)해야 한다(이상은 維摩經下에 나옴). 소이로 마음이 생하면 갖가지 법이 생하고 마음이 멸하면 갖가지 법이 멸한다. 고로 알라, 일체제법(一切諸法)은 모두 마음으로 말미암아 짓나니 내지 인천(人天)ㆍ지옥(地獄)ㆍ6도(道)ㆍ수라(修羅)도 모두 마음으로 말미암아 짓는다. 여금에 단지 무심을 배우면 제연(諸緣)을 문득 쉬나니 망상과 분별을 내지 말아라. 인(人)이 없고 아(我)가 없고 탐진(貪瞋)이 없고 증애(憎愛)가 없고 승부(勝負)가 없나니 단지 허다한 종류의 망상 같은 것을 제각(除却)하면 본성이 스스로 본래 청정하며 즉시(卽是) 보리(菩提)ㆍ법(法)ㆍ불(佛) 등을 수행함이다. 만약 이 뜻을 알지(會) 못하면 비록(縱) 네가 광학(廣學)하고 근고(勤苦)하며 수행하고 목식초의(木食草衣)하더라도 자심(自心)을 알지 못하니 모두 이름이 사행(邪行)이며 모두(盡) 천마(天魔)ㆍ외도(外道)ㆍ수륙(水陸)의 제신(諸神)이 되거늘 이와 같이 수행하여 마땅히 다시 무슨 이익이리오. 지공(志公)이 이르되 본체(本體)를 이 자심(自心)이 짓거늘 어찌(那) 문자 중에서 구함을 얻겠는가. 여금에 단지 자심을 알고 사유(思惟)를 쉬어버리면 망상과 진로(塵勞; 번뇌)가 자연히 나지 않는다. 정명(淨名)이 이르되 오직 1상(床)을 안치하고 침질(寢疾)하여 누웠다 하니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이며 여금의 와질(臥疾)은 반연(攀緣)을 모두 쉬고 망상이 헐멸(歇滅; 息滅)했음이니 즉시 보리(菩提)다. 여금에 만약 심리(心裏)가 분분(紛紛)하여 정(定)하지 못한다면 네가 3승(乘)의 4과(果)ㆍ10지(地)의 제위(諸位)에 이름(到)에 맡기더라도 합쇄(合殺; 結束)가 다만(秖) 범성(凡聖) 가운데를 향해 앉았음이다. 제행(諸行)은 모두(盡) 무상(無常)으로 돌아가고 세력은 모두(皆) 다할 시기(時期)가 있나니 마치 화살을 허공에 쏘면 힘이 다하매 도리어 떨어짐과 같이 도리어 생사의 윤회로 돌아간다. 이와 같은 수행은 불의(佛意)를 알지 못하고 헛되이 신고(辛苦)를 받음이니 어찌 대착(大錯)이 아니겠는가. 지공(志公)이 이르되 출세(出世; 세상을 超脫하다)의 명사(明師; 事理에 밝은 스승)를 만나지 못해 부질없이(枉) 대승(大乘)의 법약(法藥)을 복용(服用)한다. 여금에 단지 일체 시중(時中)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단지 무심을 배우고 또한 분별이 없고 또한 의의(依倚)함이 없고 또한 주착(住著)함도 없고 종일 임운등등(任運騰騰)하면서 마치 치인(癡人)과 상사(相似)하고 세인이 모두 너를 알지 못하고 너도 또한 타인으로 하여금 알거나 알지 못하게 함을 쓰지 않으면서 마음이 완석두(頑石頭; 頭는 조사)와 같이 도무지 봉하(縫罅; 꿰맨 틈)가 없으며 일체법이 너의 마음에 투입하여도 들지 못하며 올연(兀然)히 집착이 없어야 하나니 이와 같아야 바야흐로 소분(少分) 상응함이 있다. 3계(界)의 경계를 투득(透得)해 지나야 이름하여 불출세(佛出世)며 심상(心相)으로 새지(漏) 않아야 이름하여 무루지(無漏智)다. 인천업(人天業)을 짓지 않고 지옥업을 짓지 않고 일체심을 일으키지 않고 제연(諸緣)이 모두 나지 않아야 곧 이 신심(身心)이 이 자유인(自由人)이다. 이 일향(一向) 불생(不生)함이 아니라 다만 이 수의(隨意)하여 생하나니 경에 이르되 보살이 의생신(意生身)이 있다 한 게 이것이다. 홀연히 만약 무심을 알지 못해 상(相)에 집착해 짓는 자는 모두 마업(魔業)에 속하며 내지 정토(淨土)의 불사(佛事)를 지음도 모두(並) 다 업을 이루며 곧 이름이 불장(佛障)이며 너의 마음을 장애하며 인과의 관속(管束; 統制. 團束)을 입어 거주(去住)에 자유의 분한(分限)이 없다. 소이로 보리(菩提) 등의 법이 본래 이 있음이 아니며 여래가 설하는 바는 모두 이 사람을 화도(化度)함이니 마치 황엽(黃葉)을 금으로 삼아 소아(小兒)의 울음을 권(權; 방편)으로 그치게(止) 함과 같다. 고로 실로 법이 있지 않음을 이름해 아뇩보리(阿耨菩提)다. 여금에 이미 이 뜻을 알았거늘 어찌 구구(區區)함을 쓰겠는가. 단지 인연 따라 구업(舊業)을 소멸(消滅)하고 다시 신앙(新殃)을 짓지 않으면 심리(心裏)가 명명(明明)하리니 소이로 구시(舊時)의 견해를 모두 꼭 버려버려라. 정명(淨名)이 이르되 소유(所有)를 제거했다. 법화(法華)에 이르되 20년 중에 늘 똥을 제거하게 했다 했는데 다만 이는 심중에 견해를 지은 곳을 제거했음이다. 또 이르되 희론(戲論)의 똥을 견제(蠲除; 깨끗이 치움)했다. 소이로 여래장(如來藏)은 본래 스스로 공적(空寂)하며 아울러 1법도 정류(停留)하지 않는다. 고로 경에 이르되 제불국토(諸佛國土)도 또한 다시 모두 공(空)했다. 만약 말하되 불도(佛道)는 이 수학(修學)하여 얻는다 하면 이와 같은 견해는 전혀 교섭(交涉)이 없다. 혹 1기1경(一機一境)을 지어 양미동목(揚眉動目)하거나 지대(秖對; 應對)가 상당(相當)하여 바로 말하되 계회(契會; 계합해 알다)했다, 선리(禪理)를 증오(證悟)함을 얻었다. 홀연히 이해하지 못하는 1인을 만나면 바로 말하되 도시(都是) 아는 바가 없구나. 그를 상대하여 만약 도리를 얻으면 심중에 바로 환희하고 만약 그에게 절복(折伏)됨을 입어 그만 같지 못하면 바로 곧 마음에 추창(惆悵)을 품나니 이와 같은 심의(心意)로 학선(學禪)한다면 무슨 교섭이 있겠는가. 너의 소허(少許)의 도리를 회득(會得)함에 맡기더라고 바로 저(個) 심소법(心所法)을 얻음인지라 선도(禪道)엔 모두 교섭이 없다. 소이로 달마의 면벽(面壁)은 도무지 사람으로 하여금 견처(見處)가 있게 하지 않았다. 고로 이르되 망기(妄機)는 이 불도(佛道)며 분별은 이 마경(魔境)이다. 이 자성(自性)은 비록 내가 미시(迷時)에도 또한 잃지 않고 오시(悟時)에도 또한 얻지 않는다. 천진(天眞)의 자성은 본래 미오(迷悟)가 없나니 온 시방 허공계가 원래 이 나의 1심체(心體)니 비록 네가 동용(動用)하고 조작(造作)하더라도 어찌 허공을 여의겠는가. 허공은 본래 무대무소(無大無小)며 무루무위(無漏無爲)며 무미무오(無迷無悟)니 요료(了了)히 보지만 1물(物)도 없고 또한 사람도 없고 또한 부처도 없다. 섬호(纖毫)의 양(量)도 끊겼고 이는 의의(依倚)가 없고 점철(粘綴; 저본에 䊀綴로 지었음)이 없다. 1도(道; 量詞니 가닥. 줄기)의 청류(清流)가 이 자성이니 무생법인(無生法忍)에 어찌 의의(擬議)가 있으랴, 진불(眞佛)은 입이 없어 설법할 줄 알지 못하고 진청(眞聽)은 귀가 없거늘 그 누가 듣겠는가. 진중(珍重)하라.
上堂; (一)上法堂 爲演法而上法堂也 此有旦望上堂 五參上堂 九參上堂 謝秉拂上堂 謝都寺上堂 出隊上堂 出鄕上堂等 (二)上僧堂 爲喫粥飯而上僧堂也 (三) 上間 此指(一)
(1). 법당(法堂)에 오름이니 연법(演法)하기 위해 법당에 오름임. 이에 단망상당(旦望上堂)ㆍ오참상당(五參上堂)ㆍ구참상당(九參上堂)ㆍ사병불상당(謝秉拂上堂)ㆍ사도사상당(謝都寺上堂)ㆍ출대상당(出隊上堂)ㆍ출향상당(出鄕上堂) 등이 있음. (2). 승당(僧堂)에 오름이니 죽반(粥飯)을 먹기 위해 승당에 오름임. (3). 상간(上間)임. 여기에선 (1)을 가리킴.
蠢動含靈; 蠢動的含靈 則指諸衆生
준동하는 함령이니 곧 모든 중생을 가리킴.
佛性; 佛者覺悟也 一切衆生皆有覺悟之性 名爲佛性 性者不改之義也 通因果而不改自體是云性 ▲涅槃經二十七 一切衆生悉有佛性 如來常住無有變易 ▲涅槃經二十八 欲見佛性 應當觀察時節形色
불(佛)이란 것은 각오(覺悟)임. 일체중생이 모두 각오의 성이 있음을 이름해 불성임. 성(性)이란 것은 불개(不改)의 뜻이니 인과에 통하되 자체를 고치지 않나니 이를 이르되 성임. ▲열반경27.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으며 여래는 상주하여 변역(變易)이 있지 않다. ▲열반경28. 불성(佛性)을 보고자 한다면 응당 시절의 형색을 관찰하라.
西天; 天竺在支那之西方 故曰西天
천축이 지나의 서방에 있는지라 고로 가로되 서천임.
心地; 心爲萬法之本 能生一切諸法 故曰心地 又修行者依心而近行 故曰心地 又三業中 心業最勝 故曰心地
심은 만법의 근본이며 능히 일체의 제법을 내는지라 고로 가로되 심지임. 또 수행자가 심에 의해 행에 접근하는지라 고로 가로되 심지며 또 3업 중에 심업이 가장 수승하므로 고로 가로되 심지임.
輪迴; 謂衆生由惑業之因而招感三界 六道之生死輪轉 恰如車輪之迴轉 永無止盡 故稱輪迴 [過去現在因果經二 分別善惡業報經上 法華經一 大智度論三十 同七十七 成唯識論四]
이르자면 중생이 혹업(惑業)의 인(因)으로 말미암아 3계(界)를 초감(招感)하여 6도(道)의 생사에 윤전함이 마치 수레바퀴의 회전과 같이 영원히 지진(止盡)이 없는지라 고로 일컬어 윤회라 함 [과거현재인과경2. 분별선악업보경상. 법화경1. 대지도론30, 동77. 성유식론4].
淨名; 梵語毘摩羅詰利帝 又作毘摩羅詰 維摩詰 華言無垢稱 淨名 滅垢鳴 爲佛陀之在家弟子 乃中印度毘舍離城之長者 [維摩經義疏一 維摩義記一本 玄應音義八]
범어로 비마라힐리제(毘摩羅詰利帝; 梵 vimalakīrti)며 또 비마라힐(毘摩羅詰)ㆍ유마힐(維摩詰)로 지음. 화언(華言)으로 무구칭(無垢稱)ㆍ정명(淨名)ㆍ멸구명(滅垢鳴)임. 불타의 재가제자(在家弟子)가 되니 곧 중인도 비사리성의 장자임 [유마경의소1. 주유마힐경1. 현응음의8].
人天; 一人趣與天趣 此是六道十界中之二界 皆爲迷妄之界 又指人與天神 二禪家常將法堂上聽法大衆稱作人天 此指一
1. 인취(人趣)와 천취(天趣)니 이것은 이 6도(道)와 10계(界) 중의 2계며 다 미망(迷妄)의 경계가 됨. 또 사람과 천신(天神)을 가리킴. 2. 선가에서 늘 법당상(法堂上)의 청법대중(聽法大衆)을 가지고 인천(人天)이라 호칭함. 여기에선 1을 가리킴.
地獄; <梵> naraka 或 niraya <巴> niraya 爲五道之一 六道之一 三惡道之一 玄應音義六 地獄 梵言泥黎耶 或言泥囉夜 或云那落迦 此云不可樂 亦云非行 謂非法行處也 ▲慧琳音義二十六 地獄一百三十六所 初有八熱地獄 一等活 二黑繩 三衆合 四號叫 五大號叫 六燒燃 七極燒燃 八阿鼻大地獄也 一一地獄各有四門 一一門外復有四獄 一煻煨 二屍糞 三鋒刃 四烈河 此八地獄是根本 各有十六以爲眷屬 合成一百三十六也 ▲翻譯名義集二 輔行云 地獄 從義立名 謂地下之獄 名爲地獄 故婆沙云 贍部洲下 過五百踰繕那 乃有其獄
<범> naraka 혹 niraya. <파> niraya. 5도(道)의 하나, 6도의 하나, 3악도의 하나가 됨. 현응음의6. 지옥(地獄) 범언(梵言)으로 니리야(泥黎耶), 혹은 말하되 니라야(泥囉夜), 혹은 이르되 나락가(那落迦)는 여기에선 이르되 가히 즐겁지 않음(不可樂)이며 또는 이르되 비행(非行)이니 이르자면 비법(非法)을 행하는 곳이다. ▲혜림음의26. 지옥(地獄)은 136소(所)며 처음에 팔열지옥(八熱地獄)이 있다. 1은 등활(等活)이며 2는 흑승(黑繩)이며 3은 중합(衆合)이며 4는 호규(號叫)며 5는 대호규(大號叫)며 6은 소연(燒燃)이며 7은 극소연(極燒燃)이며 8은 아비대지옥(阿鼻大地獄)이다. 낱낱의 지옥에 각기 4문(門)이 있고 낱낱의 문밖에 다시 4옥(獄)이 있다. 1은 당외(煻煨)며 2는 시분(屍糞)이며 3은 봉인(鋒刃)이며 4는 열하(烈河)다. 이 8지옥은 이 근본이며 각기 열여섯이 있어 권속(眷屬)으로 삼나니 합하면 136을 이룬다. ▲번역명의집2. 보행(輔行; 止觀輔行傳弘決)에 이르되 지옥은 뜻을 좇아 이름을 세웠다. 이르자면 지하의 옥(獄)인지라 이름해 지옥이다. 고로 바사(婆沙)에 이르되 섬부주(贍部洲) 아래 5백 유선나(踰繕那)를 지나면 곧 그 옥(獄)이 있다.
修羅; 阿修羅 略稱修羅 爲六道之一 八部衆之一 十界之一 又作阿蘇羅 阿素羅 阿素洛 阿須倫 阿須輪 此云非天 非同類 不端正 舊譯不酒 不飮酒 阿修羅爲印度最古諸神之一 是屬於戰鬥一類之鬼神 經常被視爲惡神 而與帝釋天(因陀羅神)爭鬥不休 以致出現了修羅場修羅戰等名詞 阿修羅之形像有多種 或謂九頭千眼 口中出火 九百九十手 六足 身形爲須彌山之四倍 或謂千頭二千手 萬頭二萬手 三頭六手 或謂三面靑黑色 忿怒裸形相 六臂 [長阿含經十 同二十一 大智度論十 同十一 同三十 佛地經論六 觀音經義疏記四 法華經文句二 慧苑音義上 翻譯名義集二]
아수라(阿修羅; 梵 巴 asura)니 약칭이 수라(修羅)며 6도(道)의 하나, 8부중(八部衆)의 하나, 10계(界)의 하나. 또 아소라(阿蘇羅)ㆍ아소라(阿素羅)ㆍ아소락(阿素洛)ㆍ아수륜(阿須倫)ㆍ아수륜(阿須輪)으로 지음. 여기에선 이르되 비천(非天)ㆍ비동류(非同類)ㆍ부단정(不端正)이며 구역(舊譯)은 부주(不酒)ㆍ불음주(不飮酒)임. 아수라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여러 신의 하나가 됨. 이것은 전투하는 일류(一類)의 귀신에 속하며 경상(經常) 악신(惡神)으로 보임을 입음. 제석천(帝釋天; 因陀羅神)과 쟁투(爭鬥)하여 쉬지 않는지라 수라장(修羅場)ㆍ수라전(修羅戰) 등의 명사(名詞)가 출현하기에 이르렀음. 아수라의 형상(形像)은 여러 종류가 있으니 혹은 이르기를 구두천안(九頭千眼)에 입속에서 불을 내고 990수(手)에 6족(足)이며 신형(身形)이 수미산의 4배가 된다 하며 혹은 이르기를 천두이천수(千頭二千手)ㆍ만두이만수(萬頭二萬手)에 3두6수(三頭六手)라 하며 혹은 이르기를 세 얼굴에 청흑색(靑黑色)이며 분노(忿怒)한, 벗은 형상(形相)에 6비(臂)라 함 [장아함경10, 동21. 대지도론10, 동11, 동30. 불지경론6. 관음경의소기4. 법화경문구2. 혜원음의상. 번역명의집2].
木食草衣; 采野果爲食 編草葉爲衣 指僧人隱居深山密林的簡陋生活
야과(野果)를 채집해 음식으로 삼고 풀잎을 엮어 옷을 지음이니 승인이 깊은 산 밀림에 은거하는 간루(簡陋)한 생활을 가리킴.
天魔; 天子魔之略稱 四魔之一 第六天之魔王也 其名云波旬 有無量之眷屬 常障礙佛道者
천자마(天子魔)의 약칭이니 4마의 하나임. 제6천의 마왕임. 그 이름은 파순(波旬)이라 이르며 무량한 권속이 있어 늘 불도를 장애하는 자임.
志公; 又作誌公 寶誌(418-514) 南朝僧 又作寶志 保誌 世稱寶公 志公 誌公和尙 金城(陝西南鄭 或江蘇句容)人 俗姓朱 年少出家 師事道林寺僧儉 修習禪業 劉宋泰始年間(466-471) 往來於都邑 居無定所 時或賦詩 其言每似讖記 四民遂爭就問福禍 齊武帝以其惑衆 投之於獄 然日日見師遊行於市里 乃往獄中檢視 卻見師猶在獄中 帝聞之 乃迎入華林園供養 禁其出入 而師不爲所拘 仍常遊訪龍光 罽賓 興皇 淨名等諸寺 至梁武帝建國 始解其禁 師每與帝長談 所言皆經論義 師於天監十三年十二月示寂 壽九十六 敕葬鍾山獨龍阜 於墓側立開善寺 諡號廣濟大師 後代續有追贈 如妙覺大師 道林眞覺菩薩 道林眞覺大師 慈應惠感大師 普濟聖師菩薩 一際眞密禪師等號 師嘗爲學者述文字釋訓三十卷 十四科頌十四首 十二時頌十二首 大乘讚十首等 [梁高僧傳十 佛祖統紀三十六 同三十七 佛祖歷代通載十 寶華山志七誌公法師墓誌銘 神僧傳四]
또 지공(誌公)으로 지음. 보지(寶誌; 418-514)니남조승(南朝僧)니 또 보지(寶志)ㆍ보지(保誌)로 지음. 세칭이 보공(寶公)ㆍ지공(志公)ㆍ지공화상(誌公和尙)임. 금성(섬서 남정 혹 강소 구용) 사람이며 속성은 주(朱). 연소할 적에 출가하여 도림사 승검(僧儉)을 사사(師事)했고 선업(禪業)을 수습(修習)했음. 유송(劉宋) 태시년 간(466-471) 도읍에 왕래하며 거처에 정한 곳이 없었음. 때로 혹 시를 읊었는데 그 말이 매번 참기(讖記)와 같았으며 사민(四民; 士ㆍ農ㆍ工ㆍ商)이 드디어 다투며 문으로 나아가 복화(福禍)를 물었음. 제무제(齊武帝)가 그것을 혹중(惑衆; 무리를 惑亂함)이라 하여 뇌옥(牢獄) 에 투옥(投獄)시켰음. 그러나 날마다 시리(市里)에 유행하는 스님을 본지라 이에 뇌옥 속에 가서 검시(檢視)하였는데 도리어 스님이 아직 옥 속에 있음을 보았음. 제(帝)가 이를 듣고 드디어 화림원으로 영입해 공양하고 그의 출입을 금지시켰으나 스님은 구애되는 바가 되지 않고 그대로 늘 용광ㆍ계빈ㆍ흥황ㆍ정명 등 여러 사원을 유방(遊訪)했음. 양무제가 건국함에 이르러 비로소 그 금지가 풀렸음. 스님이 매번 무제와 길게 얘기했는데 말하는 바가 모두 경론의 뜻이었음. 스님이 천감 13년 12월에 시적했는데 나이는 96이며 칙령으로 종산(鍾山) 독룡부(獨龍阜)에 장사 지내고 묘 곁에 개선사를 세웠음. 시호는 광제대사. 후대에 이어서 추증(追贈)이 있었으니 묘각대사ㆍ도림진각보살ㆍ도림진각대사ㆍ자응혜감대사ㆍ보제성사보살ㆍ일제진밀선사 등과 같은 호임. 스님이 일찍이 학자를 위해 문자석훈(文字釋訓) 30권ㆍ14과송 14수ㆍ십이시송 12수ㆍ대승찬 10수 등을 서술했음 [양고승전10. 불조통기36, 동37. 불조역대통재10. 보화산지7지공법사묘지명. 신승전4].
寢疾; 寢 病臥 寢疾 生病 多指重病
침(寢)은 병으로 누웠음임. 침질은 병이 남. 다분히 중병을 가리킴.
攀緣; 攀取緣慮 心念執著于塵俗事物 如同猿猴攀樹 佛家稱爲攀緣
연려(緣慮)를 반취(攀取; 당겨서 취함)함이니 심념이 진속(塵俗)의 사물에 집착함이 마치 원후(猿猴; 원숭이)가 반수(攀樹; 나무에 매달림. 나무를 잡아당김)함과 같음이니 불가에서 반연으로 호칭함.
任運; 凡事順其自然 具平常心 禪家認爲如此可養護悟心 也體現道法的日常運用
범사(凡事)를 그 자연에 순응하면서 평상심을 갖춤. 선가에서 인식하기를 이와 같이 가히 오심(悟心)을 양호(養護)함. 또 도법을 체현(體現)하는 일상의 운용.
頑石; 堅硬之石 頑 堅强 堅硬
견경(堅硬)한 돌. 완(頑)은 견강(堅强), 견경(堅硬).
兀然; 不動貌 又混沌無知 隨性自在的樣子
움직이지 않는 모양. 또 혼돈하여 앎이 없으며 성품 따라 자재한 양자.
無漏智; 謂三乘之人 離煩惱無染之淸淨智也 斷惑證理 卽此智之用
이르자면 3승(乘)의 사람이 번뇌를 여읜 무염(無染)의 청정한 지혜임. 미혹을 단절하고 이치를 증득함은 곧 이 지혜의 씀(用)임.
意生身; 初地以上之菩薩身 爲衆生濟度如意受生而得之身 △翻譯名義集五 魏譯入楞伽經云 隨意速去 如念卽至 無有障礙 名如意身 又意者意憶故 △唐譯大乘入楞伽經 佛告大慧 意生身者 譬如意去速疾無礙 名意生身
초지 이상의 보살신으로 중생제도를 위해 뜻과 같이 수생(受生)하여 얻는 몸. △번역명의집5. 위역(魏譯) 입릉가경에 이르되 뜻 따라 속히 가고 생각과 같이 곧 이르면서 장애가 있지 않음을 이름해 여의신(如意身)이다. 또 의(意)란 것은 의억(意憶)인 연고다. △당역(唐譯) 대승입릉가경. 불타가 대혜에게 고하셨다. 의생신(意生身)이란 것은 비여(譬如) 뜻대로 가되 신속하고 빠르며 장애가 없나니 이름이 의생신이다.
黃葉; 涅槃經二十 又嬰兒行者 如彼嬰兒 啼哭之時 父母卽以楊樹黃葉 而語之言 莫啼 莫啼 我與汝金 嬰兒見已 生眞金想 便止不啼
열반경20. 또 영아행(嬰兒行)이란 것은 예컨대(如) 저 영아가 울 때 부모가 곧 버드나무 누런 잎(黃葉)을 써 말하되 울지마라, 울지마라. 내가 너에게 금을 준다. 영아가 보고 나서 진금이란 생각을 내어 곧 그쳐서 울지 않는다.
區區; 奔走勞碌
분주하며 노록(勞碌; 게을리 하거나 쉬지 아니하고 꾸준히 힘을 다함)함.
法華; 妙法蓮華經 七卷或八卷 略稱妙法華經 法華經 漢譯妙法蓮華經有六種 現存者三種 西晉竺法護譯正法華經十卷二十七品(286) 後秦鳩摩羅什譯妙法蓮華經八卷二十八品(406) 隋闍那崛多與達磨笈多譯添品妙法蓮華經七卷二十七品(601)
묘법련화경(妙法蓮華經) 7권 혹은 8권. 약칭이 묘법화경ㆍ법화경. 한역(漢譯) 묘법연화경은 6종이 있으며 현존하는 것은 3종임. 서진(西晉)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 10권 27품(286)과 후진(後秦)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8권 28품(406)과 수(隋) 사나굴다(闍那崛多)와 달마급다(達磨笈多)가 번역한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 7권 27품(601)임.
如來藏; 眞如在煩惱中 謂之如來藏 眞如出煩惱 謂之法身 △入楞伽經一 寂滅者 名爲一心 一心者 名爲如來藏
진여가 번뇌 속에 있으면 이를 일러 여래장이며 진여가 번뇌에서 나오면 이를 일러 법신임. △입릉가경1. 적멸이란 것은 이름해 일심이며 일심이란 것은 이름해 여래장이다.
揚眉動目; 禪家示機應機時的特殊動作 亦泛指禪機作略 亦作揚眉瞬目 瞬目揚眉
선가에서 시기응기(示機應機)할 때의 특수한 동작이니 또한 널리 선기(禪機)의 작략(作略)을 가리킴. 또한 양미순목ㆍ순목양미로 지음.
秖對; 又作秪對祇對 回答 應對 秖 與秪祇用同
또 지대(秪對)ㆍ지대(祇對)로 지음. 회답임. 응대임. 지(秖)는 지(秪)ㆍ지(祇)와 용이 같음.
心所; 心所有法之略 又作心數 心所法 心數法 爲心王之所有 而有貪瞋等別作用之心法也 小乘俱舍有四十四法 大乘唯識有五十一法
심소유법의 약칭. 또 심수(心數)ㆍ심소법ㆍ심수법으로 지음. 심왕(心王)의 소유가 됨이니 탐진 등 다른 작용이 있는 심법임. 소승 구사(俱舍)엔 44법이 있고 대승 유식엔 51법이 있음.
無生法忍; 謂觀諸法無生無滅之理而諦認之 安住且不動心 又作無生忍 無生忍法 大智度論五十 無生法忍者 於無生滅諸法實相中 信受通達 無礙不退 是名無生忍 ▲禪林疏語考證三 無生法忍 棱嚴云 無生法忍 註 眞如實相名無生法忍 無漏眞知名之爲忍 得此智時忍可印持法無生理 決定不謬 境智相冥名無生忍 瑜伽論云 何名忍 自無憤勃 不報他怨 故名忍
이르자면 제법의 무생무멸의 이치를 관하여 그것을 체인(諦認; 자세하게 분변하고 인식함)하고 안주하면서 또 마음을 움직이지 않음. 또 무생인(無生忍)ㆍ무생인법(無生忍法)으로 지음. 대지도론50. 무생법인이란 것은 생멸이 없는 제법의 실상 중에서 신수(信受)하여 통달하고 무애하면서 불퇴하나니 이 이름이 무생인(無生忍)이다. ▲선림소어고증3. 무생법인(無生法忍) 릉엄에 이르되 무생법인(無生法忍). 주(註) 진여의 실상을 무생법인이라고 이름하며 무루(無漏)의 진지(眞知)를 이름하여 인(忍)이라 한다. 이 지(智)를 얻을 때 법의 무생의 이치를 인가인지(忍可印持)하므로 결정코 어긋나지 않아 경지(境智)가 상명(相冥)함을 이름이 무생인(無生忍)이다. 유가론(瑜伽論)에 이르되 어찌하여 이름이 인(忍)인가. 스스로 분발(憤勃; 분을 발끈 냄)함이 없어 남에게 원한을 갚지 않으므로 고로 이름이 인(忍)이다.
擬議; 思慮 遲疑 說文 擬 度也 說文 議 語也 △易繫辭上傳 言天下之至賾 而不可惡也 言天下之至動 而不可亂也 擬之而後言 議之而後動 擬議以成其變化
사려. 지의(遲疑; 주저하며 의심함). 설문 의(擬) 탁(度; 헤아리다)이다. 설문 의(議) 어(語)다. △역 계사상(繫辭上) 전(傳). 천하의 지색(至賾; 가장 精微한 奥理)을 말해도 가히 악(惡; 過錯)하지 않고 천하의 지동(至動; 가장 細致한 변화)을 말해도 가히 난(亂; 혼란)하지 않는다. 이를 의(擬)한 후에 말하고 이를 의(議)한 후에 동(動)하나니 의의(擬議)하여 그 변화를 이룬다.
珍重; 勸自重自愛之詞也 △大宋僧史略一 臨去辭曰珍重者何 此則相見旣畢 情意已通 囑曰珍重 猶言善加保重 請加自愛 好將息 宜保惜 同也
자중자애(自重自愛)를 권하는 말임. △대송승사략1. 떠남에 임해서 말해 가로되 진중(珍重)이라고 하는 것은 왜인가 하면 이것은 곧 상견을 이미 마치고 정의(情意)가 이미 통했음이다. 부촉(付囑)해 가로되 진중이라 함은 오히려 말하되 잘 보중(保重)을 더하라, 청컨대 자애(自愛)를 더하라, 좋게 장차 쉬어라(好將息), 의당 보호하여 아껴라(宜保惜) 함과 같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