達磨遙觀此土有*大乘*根器 遂泛海*得得而來 *單傳心印 開示*迷塗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若恁麽見得 便有自由分 不隨一切語言轉 *脫體*現成 便能於*後頭 與武帝對譚 幷*二祖安心處 自然見得 無計較*情塵 一刀截斷 *洒洒落落 何必更分是分非 辨得辨失 雖然恁麽 能有幾人 武帝甞披*袈裟 自講*放光般若經 感得天花亂墜地變黃金 *辨道奉佛 誥詔天下 起寺*度僧 依敎修行 人謂之佛心天子 達磨初見武帝 帝問 朕起寺度僧 有何功德 磨云 無功德 早是*惡水*驀頭澆 若透得*這箇無功德話 許爾親見達磨 且道 起寺度僧 爲什麽都無功德 此意在什麽處 帝與*婁約法師*傅大士*昭明太子 *持論眞俗二諦 據敎中說 眞諦以明非有 俗諦以明非無 眞俗不二 卽是聖諦第一義 此是敎家極妙窮玄處 帝便拈此*極則處 問達磨 如何是聖諦第一義 磨云 廓然無聖 天下衲僧跳不出 達磨與他一刀截斷 如今人多少錯會 却去*弄精魂 瞠眼睛云 廓然無聖 *且喜沒交涉 *五祖先師甞說 只這廓然無聖 若人透得 歸家穩坐 *一等是*打葛藤 不妨與他*打破漆桶 達磨*就中奇特 所以道 參得一句透 千句萬句一時透 自然坐得斷把得定 *古人道 *粉骨碎身未足酬 一句了然超百億 達磨*劈頭與他*一拶 多少*漏逗了也 帝不省 却以*人我見故 再問對朕者誰 達磨*慈悲*忒殺 又向道不識 直得武帝*眼目定動不知*落處 是何言說 到這裏有事無事 拈來卽不堪 *端和尙有頌云 一箭尋常落一鵰 更加一箭已相饒 直歸*少室峰前坐 梁主休言更去招 復云 誰欲招 帝不契 遂潛出國 這老漢只得懡㦬 渡江至魏 時*魏孝明帝當位 乃此北人種族 姓*拓跋氏 後來方名中國 達磨至彼 亦不出見 直過*少林 面壁九年 接得二祖 彼方號爲壁觀*婆羅門 梁武帝後問志公 公云 陛下還識此人否 帝曰 不識 且道與達磨道底 是同是別 似則也似 是則不是 人多錯會道 前來達磨是答他禪 後來武帝是對他志公 乃相識之識 且得沒交涉 當時志公恁麽問 且道*作麽生*祇對 何不一棒打殺 免見*搽胡 武帝却供他款道不識 志公見機而作 便云 此是觀音大士 傳佛心印 帝悔遂遣使去取好不唧? 當時等他道此是觀音大士傳佛心印 亦好擯他出國 猶較些子 人傳 志公天鑒十三年化去 達磨普通元年方來 自隔七年 何故却道同時相見 此必是謬傳 據傳中所載 如今不論這事 只要知他大綱 且道達磨是觀音 志公是觀音 *阿那箇是*端的底觀音 旣是觀音 爲什麽却有兩箇 何止兩箇 成群作隊 時後魏*光統律師 *菩提流支三藏 與師論議 師斥*相指心 而*褊局之量 自不堪任 競起害心 數加毒藥 至第六度 *化緣已畢 傳法得人 遂不復救 端居而逝 葬於*熊耳山定林寺 後魏*宋雲奉使 於葱嶺遇師手携隻履而往 武帝追憶 自撰碑文云 嗟夫 見之不見 逢之不逢 遇之不遇 今之古之 怨之恨之 復讚云 心有也 *曠劫而滯凡夫 心無也 *刹那而登*妙覺 且道 達磨卽今在什麽處 *蹉過也不知
●大乘; 佛敎分爲大乘小乘兩大宗派 大乘佛敎于公元一世紀左右在印度形成 提倡發大慈悲心 普度衆生 爲大衆服務 追求成佛濟世 建立佛國淨土 其主要經典有般若經 維摩經 法華經 華嚴經等 向北流傳至中國 朝鮮 日本等國 故又稱北傳佛敎
●根器; 植物之根 能生長枝幹花葉 器物能容物 然所生所容 有大小多寡之不同 修道者能力 亦有高下 故以根器喩之
●得得; 特地
●單傳; 祖庭事苑五 單傳 傳法諸祖 初以三藏敎乘兼行 後達摩祖師單傳心印 破執顯宗 所謂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迷塗; 又作迷途 迷之境界 指衆生輪迴轉生的三界六道之世界
●見性; 見自心之佛性也
●脫體; 脫 全部 脫體卽全體
●現成; 現前成就的略語 自然出來 不假造作安排者
●後頭; 表時間 後時
●二祖安心; 見下第九九則評唱 二祖 二祖慧可 慧可(487-593) 又作惠可 亦作僧可 東土禪宗二祖 南北朝之僧 河南洛陽人 俗姓姬 初名神光 幼時於洛陽龍門香山 依寶靜出家 於永穆寺受具足戒 早年周遊聽講 精硏孔老之學與玄理 北魏正光元年(520) 參達磨祖師於嵩山少林寺 從學六年 達磨乃傳大法竝衣鉢 師於北齊天保三年(552) 傳法僧璨 其後赴河南鄴都 演說楞伽經意 凡三十餘年 韜光晦跡 人莫能識 後於筦城縣匡救寺三門下 談無上道 聽者林會 時有辯和法師者 於寺中講涅槃經 學徒聞師闡法 稍稍引去 辯和不勝其憤 興謗于邑宰翟仲侃 仲侃惑其邪說 加師以非法 師怡然委順 時年一百七歲 卽隋文帝開皇十三(一說十二)年癸丑歲三月十六日也 唐德宗諡大祖禪師 [傳燈錄三 寶林傳八 傳法正宗記六]
●情塵; 俗情妄念之塵垢
●洒洒落落; 又作灑灑落落 灑灑 形容心不迷惑 落落 謂不停滯於物 卽心不執著 遠離所有束縛與染汚
●袈裟; 指纏縛於僧衆身上之法衣 以其色不正而稱名 ▲祖庭事苑三 袈裟 梵云袈裟 此言不正色 律云 一切上色衣不得畜 當作袈裟
●放光般若經; 二十卷 或三十卷 西晉無羅叉(無叉羅) 竺叔蘭等共譯 收於大正藏第八冊 又作放光般若波羅蜜經 放光摩訶般若經 摩訶般若放光經 光般若波羅蜜經 放光經 計九十品 又本經與竺法護之光讚經十卷 鳩摩羅什之摩訶般若波羅蜜經(大品般若) 玄奘之大般若波羅蜜多經第二會等經 有部分相同之處 而相當於現存梵文二萬五千頌般若 [出三藏記集二 歷代三寶紀六 開元釋敎錄二]
●辨道; 又作辦道 修行也
●度僧; 度者 出世俗 離生死 卽擧行一定之儀式 令俗人出家爲僧
●惡水; 惡 不好 垢穢
●驀頭; 忽然 突然 頭 助詞
●這箇; 又作者箇 指物之辭也 正字通 者 又此也
●婁約法師; 南朝梁代僧慧約 俗姓婁 故稱婁約 [佛祖統紀三十七]
●傅大士; 指傅翕(497-569) 南朝梁代禪宗著名之尊宿 見下第六七則
●昭明太子; (499-529) 南朝梁武帝蕭衍之長子 名統 字德施 生而敏睿 三歲受孝經論語 五歲遍讀五經 天監元年(502)立爲皇太子 武帝大興佛敎 太子亦深信奉 受菩薩戒 奉持唯謹 遍覽衆經 深究敎旨 大通三年三月得疾 四月薨 享年三十一 朝野莫不惋惜 諡號昭明 著有文集二十卷 又編撰古今典誥文言正序十卷 英華集二十卷 文選三十卷等 [梁書八 居士傳九]
●持論; 論量持正也
●極則; 至極妙理的法則
●弄精魂; 弄玄虛 虛妄施爲 常指禪家示機應機之作略 因多係接人之方便法門 非眞實大法 故用例多含貶義 ◆精魂 精靈 指人之神識或物之精 又作精神 魂神 精識 按灌頂經六 塚墓因緣四方神咒經 首楞嚴經六 凡是人之精魂 鬼魅及五穀之精等 皆稱爲精靈 蓋將人之心識 稱爲魂神或精魂
●且喜沒交涉; 意謂與禪法毫無關系 根本不符合禪法 是禪家習用批評語 且喜者 種電鈔一乾以爲一往隨順許之辭 一往隨喜前人之語而後否定之也
●五祖先師; 指五祖法演 法演(?-1104) 北宋楊岐派僧 綿州巴西(四川綿陽)人 俗姓鄧 年三十五始出家受具足戒 遊學成都 習百法 唯識諸論 究其奧義 後投白雲守端禪師 參究精勤 遂廓然徹悟 受印可 尋依命分座 開示來衆 初住四面山 後還遷白雲山 次住太平 次住海會 更遷蘄州五祖山東禪寺 徽宗崇寧三年六月二十五日上堂辭衆 淨髮澡身而示寂 壽八十餘 世稱五祖法演 法嗣頗多 以佛眼淸遠 太平慧懃 圜悟克勤最著 有法演下三佛之稱 [法演禪師語錄序 五燈會元十九 聯燈會要十六 釋氏稽古略四]
●一等; 乃一樣平等之意
●打葛藤; 糾纏言句
●打破漆桶; 表示徹悟之狀態 漆桶 黑漆桶也 譬無明之堅厚也
●就中; 就 代詞 相當于此 其
●古人; 指玄覺(665-713) 唐代僧 溫州永嘉(位於浙江)人 俗姓戴 字明道 號永嘉玄覺 八歲出家 博探三藏 尤通天台止觀 後於溫州龍興寺側巖下自構禪庵 獨居硏學 常修禪觀 偶因左溪玄朗之激勵 遂起遊方之志 與東陽玄策共遊方尋道 至韻陽時 謁曹溪慧能 與慧能相問答而得其印可 慧能留之一宿 翌日卽歸龍興寺 時人稱之一宿覺 其後 學者輻湊 號眞覺大師 玄朗贈書招之山棲 師覆書辭退 先天二年(七一三 一說開元二年 或先天元年)十月十七日 趺坐入寂 壽四十九 賜諡無相大師 塔曰淨光 著證道歌一篇 梵僧傳歸天竺 彼皆欽仰目爲東土大乘經 又著禪宗悟修圓旨十篇 及觀心十門 永嘉集十卷 並盛傳于世 [宋高僧傳八 佛祖歷代通載十三 佛祖統紀十 傳燈錄五 五燈會元二]
●劈頭; 最初之義 [碧巖錄第一則種電鈔]
●一拶; 謂匆促談話也 是師僧試學人者
●漏逗; 逗 透也 露也 漏逗 泄露 泄漏 禪錄用例常指泄露禪法玄旨 按禪旨强不可言說 然高手宗師本分示人 自可直指心地 泄露禪旨的說法 帶有詼諧意味 或云老衰雜亂之義
●人我見; 二我見之一 一切凡夫不悟人身乃五蘊假和合 强立主宰 計我爲人 卽執人有常一我體之惡見 稱爲人我見
●慈悲; 慈愛衆生竝給與快樂(與樂) 稱爲慈 同感其苦 憐憫衆生 竝拔除其苦(拔苦) 稱爲悲 二者合稱爲慈悲 佛陀之悲 乃是以衆生苦爲己苦之同心同感狀態 故稱同體大悲 又其悲心廣大無盡 故稱無蓋大悲(無有更廣更大更上於此悲者)
●忒殺; 同太殺 副詞 表示程度過分 忒 太 殺 所八切 所拜切 表示程度深
●眼目定動; 又作眼睛定動 猶豫 遲疑 茫然不悟的樣子 定動 眨動
●落處; 又作落著處 歸屬處也
●端和尙; 白雲守端和尙 守端(1025-1072) 宋代楊岐派僧 湖南衡陽人 俗姓周(一作葛) 二十歲依茶陵郁得度 後至諸方參學 於楊岐方會處得悟 承其法嗣 其後由圓通居訥推擧 住於江西承天禪院 歷住圓通崇勝禪院 安徽法華山證道禪院 龍門山乾明禪院 興化禪院 白雲山海會禪院等處 弘揚佛法 宋神宗熙寧五年示寂 壽四十八 門人法演編有白雲守端禪師語錄二卷 白雲端和尙廣錄四卷 [續傳燈錄十三 五燈會元十九 釋氏稽古略四]
●少室峰; 同小室峰 又稱少室山 文苑彙志地理志曰 龍魚河圖云 五嶽中嶽嵩山 三十六峰 東謂大室 西少室 相去十七里 嵩者其總名也 謂之室者 以其下有石室焉 少室高八百六十丈 ▲大明一統志二十九 河南府少林寺 在登封縣西少室北麓 後魏時建 梁時達磨居此面壁九年
●魏孝明帝; (510-528) 北魏王公 名詡 元氏 宣武第二子 在位十四年 神龜元年(518) 詔諸郡立五級浮圖 是年胡太后敕宋雲與沙門慧生等 往西天求經 四年 宋雲等還 得佛經一百七十部 正光元年(520) 達磨自梁入魏 至嵩山居少林寺 面壁而坐 帝聞師異跡 三詔不至 賜磨衲袈裟金鉢等 不納 三返而後受之 [北史四 佛法金湯編五]
●拓跋; 緇門警訓註上 拓跋後魏姓 北人謂土爲拓 謂後爲跋 魏之先 出於黃帝 以土德王 故爲拓跋氏
●少林; 少林寺 位于河南省登封縣城之北十五公里少室山五乳峰下 北魏太和十九年(495) 孝文帝爲天竺僧佛陀禪師所建
●婆羅門; 玄應音義十八 婆羅門 此言訛略也 應云婆羅賀磨拏 此義云承習梵天法者 其人種類自云 從梵天口生 四姓中勝 故獨取梵名 唯五天竺有 諸國卽無 經中梵志亦此名也 正言靜胤 言是梵天之苗胤也
●作麽生; 又作怎麽生 作麽 作生 作麽 卽何 生 語助辭 有時可作樣字或然字解 本爲宋代俗語 禪宗多用於公案之感歎 或疑問之詞
●祇對; 又作秖對秪對 回答 應對 祇 與秖秪用同
●搽胡; 亦作搽糊 茶糊 塗糊等 塗糊 猶糢糊也 塗 汚染之義
●阿那箇; 那箇 阿 助詞
●端的; 確實 眞實
●光統; 北齊鄴城大覺寺慧光律師 地論之宗匠 入鄴而任國統之官 故呼爲光統 [唐僧傳二十一]
●菩提流支; 北魏僧 北天竺三藏也 又作菩提留支 此云道希 大乘瑜伽系之學者 北魏宣武帝永平元年(508) 至洛陽 帝甚重之 敕住於永寧寺 從而翻譯梵經 凡三十九部一二七卷 [十地經論序 續高僧傳一 歷代三寶紀三] ▲祖庭鉗鎚錄下 元魏時菩提流支 與達磨同時 下藥以毒達磨者 是也
●相; 漢語大字典 相 佛敎名詞 對性而言 佛敎把一切事物外現的形象狀態 稱之爲相
●褊局; 狹窄 狹小
●化緣; 敎化之因緣 又指敎化
●熊耳山; 位於河南盧氏縣南方 與永寧(今洛寧縣)爲界 山之兩峰竝峙如熊耳 故稱熊耳山 乃禪宗初祖菩提達磨之塔所 [大明一統志二十九 大淸一統志一六二]
●宋雲; 北魏敦煌人 爲北魏孝明帝時之使臣 孝明帝神龜元年(五一八 一說熙平元年或正光二年)十一月 奉胡太后之命 與沙門法力慧生等 自洛陽出發 途經赤嶺 土谷渾 鄯善 末城 波斯 賖彌等地 翌年十二月抵烏場國 謁烏場國王 竝爲說孔孟老莊之德及神仙方術 正光元年(520)四月中旬入乾陀羅國 後更西行 渡辛頭河(卽印度河) 巡禮雀離浮圖 大塔等佛蹟 翌年二月(一說三年或四年)返洛陽 攜回大乘梵文經典凡一七○部 其後事蹟不詳 又宋雲歸國後 將西域旅遊之見聞 撰成宋雲行紀 其後收於洛陽伽藍記五中[洛陽伽藍記五 釋迦方志下 魏書西域傳 魏書釋老志 河南通志三十三]
●曠劫; 曠 久也 遠也 久遠 曠劫卽無限長遠的時間
●刹那; 指極短的時間 ▲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上 一念中有九十刹那 一刹那經九百生滅 諸有爲法悉皆空故 ▲俱舍論十二 如壯士一疾彈指頃 六十五刹那 如是名爲一刹那量
●妙覺; 自覺覺他 覺行圓滿 而不可思議 曰妙覺 卽佛果之無上正覺也 二乘止於自覺 無覺他之功 菩薩雖自覺覺他並行 而未圓滿 獨佛二覺圓滿 覺體不可思議也 [四敎儀四 三藏法數二十六]
●蹉過; 同錯過 蹉 跌也
달마가 멀리서 이 국토에 대승(*大乘)의 근기(*根器)가 있음을 보고는 드디어 바다에 떠서 특별히(*得得) 도래(到來; 來)하여 심인(心印)을 홑으로 전하여(*單傳) 미도(*迷塗)에게 열어 보이되 문자를 세우지 않고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견성(*見性)하고 성불케 하니 만약 이렇게 보아 얻으면 곧 자유로운 분한(分限)이 있어서 일체의 어언(語言)을 따라 구르지 않고 탈체(*脫體; 전체)가 현성(*現成)하여 곧 능히 후두(*後頭; 後時)에 무제와의 대담(對譚; 對談)과 아울러 이조의 안심처(*二祖安心處)에도 자연히 보아 얻어 계교(計較)의 정진(*情塵)이 없고 일도(一刀)로 절단하여 쇄쇄낙락(*洒洒落落)하리니 하필 다시 시(是)를 나누고 비(非)를 나누며 득(得)을 분변하고 실(失)을 분변하겠는가. 비록 그러하여 이러하긴 하지만 능히 몇 사람이 있을까. 무제가 일찍이 가사(*袈裟)를 입고 스스로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을 강설하매 천화(天花)가 어지럽게 떨어지고 땅이 황금으로 변함을 감득(感得)하였다. 변도(*辨道; 수행)하고 봉불(奉佛)하면서 천하에 고조(誥詔; 詔勅을 내림)하여 기사(起寺; 절을 세움)하고 도승(*度僧)하며 불교에 의지하여 수행하니 사람들이 불심천자(佛心天子)라고 일컬었다. 달마가 처음 무제를 상견하자 무제가 묻되 짐이 기사(起寺)하고 도승(度僧)하니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달마가 이르되 공덕이 없습니다 하니 벌써 이 더러운 물(*惡水)로 갑자기(*驀頭) 끼얹었다. 만약 저개(*這箇)의 무공덕화(無功德話)를 투득(透得)한다면 너희에게 달마를 친견했다고 허락하리라. 그래 말하라, 기사(起寺)하고 도승(度僧)했거늘 무엇 때문에 도무지 공덕이 없느냐. 이 뜻이 어느 곳에 있느냐. 무제가 누약법사(*婁約法師)ㆍ부대사(*傅大士)ㆍ소명태자(*昭明太子)와 더불어 진속(眞俗) 2제(諦)를 지론(*持論)했다. 교중(敎中)의 설에 의거하자면 진제(眞諦)는 비유(非有)임을 밝히고 속제(俗諦)는 비무(非無)임을 밝히니 진속(眞俗)이 둘이 아님이 곧 이 성제(聖諦)의 제일의(第一義)이거니와 이것은 이 교가(敎家)의 묘를 다하고 현을 다한(極妙窮玄) 곳이므로 무제가 곧 이 극칙처(*極則處)를 잡아 달마에게 묻되 무엇이 이 성제의 제일의입니까. 달마가 이르되 확연하여 무성(無聖)입니다 하니 천하납승이 뛰어 벗어나지 못한다. 달마가 그에게 일도(一刀)로 절단하여 주었거늘 여금의 사람은 다소(多少) 착회(錯會; 잘못 理會)하여 도리어 가서 정혼을 희롱(*弄精魂)하여 눈동자를 부릅뜨고 이르되 확연하여 무성이라 하나니 또한 교섭이 없음을 기뻐하노라(*且喜沒交涉). 오조선사(*五祖先師)가 일찍이 설하되 다만이 확연무성(廓然無聖)을 어떤 사람이 투득(透得)한다면 귀가(歸家)하여 온좌(穩坐)하리라. 일등(*一等) 이는 타갈등(*打葛藤)이지만 그(무제)에게 칠통을 타파(*打破漆桶)해 줌에 방애(妨礙)되지 않는다. 달마가 그 중(*就中)에 기특하다(이상은 五祖語) 하였다. 소이로 말하되 1구(一句)를 참득(參得)해 뚫으면 천구만구(千句萬句)를 일시에 뚫어 자연히 앉혀서(坐; 止. 頓의 뜻이 있음) 끊음을 얻고 잡아서 정(定)함을 얻는다 하며 고인(*古人)이 말하되 분골쇄신하여도 족히 갚지 못하나니(粉骨碎身未足酬) 1구가 요연(了然)히 백억(百億)을 초월했다(이상 2구는 證道歌에 나옴) 하였다. 달마가 벽두(*劈頭; 최초)에 그에게 일찰(*一拶)하여 주니 다소 누두(*漏逗)해 마쳤으되 무제가 성찰하지 못하고 도리어 인아견(*人我見)을 쓰는(以) 연고로 다시 묻되 짐을 대한 자는 누구입니까 하니 달마가 자비가 특쇄(*忒殺)하여 또 향해 말하되 알지 못합니다 하니 바로 무제가 안목이 정동(*眼目定動)함을 얻으면서 낙처(*落處)를 알지 못하여 이 무슨 언설인고 하나니 이 속에 이르러선 유사무사(有事無事)를 집어 오면 곧 감당치 못한다. 단화상(*端和尙)이 송이 있어 이르되 한 화살로 심상(尋常)에 한 마리의 독수리를 떨어뜨리고/ 다시 한 화살을 더하여 이미 서로 넉넉하게 하였다/ 바로 소실봉(*少室峰) 앞으로 돌아가 앉으니/ 양주(梁主)여 다시 가서 초빙한다는 말을 하지 말아라 하고 다시 이르되 누가 초빙하려고 하는가 하였다. 무제가 계합하지 못하자 드디어 몰래 출국하니 이 노한(老漢)이 다만 마라(懡㦬; 부끄러움)를 얻고서 도강(渡江)하여 위(魏)에 이르렀다. 때는 위효명제(*魏孝明帝)가 당위(當位; 在位)했으니 곧 이 북인종족(北人種族)이다. 성은 탁발씨(*拓跋氏)며 후래(後來; 來는 조사)에 비로소 중국이라 이름했다. 달마가 거기에 이르러 또한 나가 상견하지 않고 바로 소림(*少林)에 이르러(過) 면벽구년(面壁九年)하다가 2조(祖)를 접득(接得)하니 그 지방에서 호하기를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 했다. 양무제가 후에 지공(志公)에게 묻자 지공이 이르되 폐하는 이 사람을 아십니까. 무제가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不識) 했으니 그래 말하라, 달마가 말한 것과 이 같은가 이 다른가. 비슷하기야 곧 또한 비슷하지만 옳기야(是) 곧 옳지 않도다. 사람들이 많이들 착회(錯會)하여 말하되 전래(前來; 來는 조사)의 달마는 이 그에게 선(禪)을 답했고 후래(後來)의 무제는 이 저 지공을 상대함인지라 곧(乃) 상식(相識)의 식(識)이라 하나니 또한(且) 몰교섭(沒交涉; 교섭이 없음)을 얻었다. 당시에 지공이 이렇게 물었으니 그래 말하라, 어떻게(作麽生) 지대(*祇對)하겠는가. 어찌하여 한 방(棒)으로 때려 죽여 차호(*搽胡; 糢糊)를 봄을 면하지 않고 무제가 도리어 그(지공)에게 관(款; 情款이니 정다운 마음)을 바쳐 말하되 알지 못합니다(不識) 라고 했는가. 지공이 근기(根機; 機)를 보고 지어서(作) 바로 말하되 이 분은 이 관음대사니 불타의 심인(心印)을 전수(傳受)했습니다. 무제가 후회하여 드디어 사자(使者)를 보내어 가서 취하려 하니 매우(好) 부즉류(不唧?)로다. 당시에 그가 이 분은 관음대사니 불타의 심인(心印)을 전수(傳受)했습니다 라고 말함을 기다렸다가(等) 또한 좋게 그를 물리쳐 나라에서 쫓아내었더라면 오히려 조금은 상당했으리라(較些子). 사람들이 전하기를 지공은 천감(天鑒) 13년(514)에 화거(化去; 逝世)했고 달마는 보통(普通) 원년(520)에 비로소 왔다 하니 저절로 7년이 격절(隔絶; 隔)커늘 무슨 연고로 도리어 동시에 상견했다고 말하는가. 이것은 필시(必是) 그릇 전해졌음이나 전중(傳中; 傳記 중)에 기재된 바에 의거했음이다. 여금에 이 일은 논하지 않고 다만 그(달마)의 대강(大綱)을 알고자 하였음이다. 그래 말하라, 달마가 이 관음인가, 지공이 이 관음인가. 어느 것(*阿那箇)이 이 단적(*端的)한 관음인가. 이미 이 관음이라면 무엇 때문에 도리어 두 개가 있는가. 어찌 두 개에 그치겠는가, 성군작대(成群作隊; 무리를 이룸)니라. 때에 후위(後魏)의 광통율사(*光統律師)ㆍ보리류지삼장(*菩提流支三藏)이 스님과 더불어 논의(論議)했는데 스님이 상(*相)을 배척(排斥)하고 심(心)을 가리키자 편국(*褊局; 협소)의 사량(思量; 量)인지라 감임(堪任)하지 못하고 해심(害心)을 경기(競起)하여 수차례 독약을 가하더니 제육도(第六度; 여섯 번째)에 이르자 화연(*化緣)을 이미 마치고(畢) 법을 전하고 사람(慧可 등)을 얻은지라 드디어 다시 구제(救濟; 救)하지 않고 단거(端居)히 떠나매 웅이산(*熊耳山) 정림사(定林寺)에 안장(安葬; 葬)했따. 후위의 송운(*宋雲)이 봉사(奉使; 사신의 일을 받들어 행함)하다가 총령(葱嶺; 파미르高原)에서 스님이 외짝 신을 손으로 가지고 감을 만났다. 무제가 추억하며 스스로 비문을 지어 이르되 슬프도다(嗟夫), 견(見)하고도 견(見)하지 못하고 봉(逢)하고도 봉(逢)하지 못하고 우(遇)하고도 우(遇)하지 못하니 지금이나 옛이나 원(怨)하고 한(恨)한다. 다시 찬(讚)해 이르되 마음이 있으면 광겁( *曠劫)토록 범부에 침체(沈滯; 滯하고 마음이 없으면 찰나(*刹那)에 묘각(*妙覺)에 오른다. 그래 말하라, 달마가 즉금 어느 곳에 있느냐, 차과(*蹉過)하고도 알지 못하는구나.
●大乘; 불교를 대승과 소승 양대종파(兩大宗派)로 나눔. 대승불교는 공원(公元; 서기) 1세기 좌우로 인도에서 형성했음. 대자비심을 내어 널리 중생을 제도하고 대중을 위해 복무하며 성불제세(成佛濟世)를 추구하고 불국정토를 건립하기를 제창했음. 그 주요경전에 반야경ㆍ유마경ㆍ법화경ㆍ화엄경 등이 있으며 북으로 향해 유전(流傳)하여 중국ㆍ조선ㆍ일본 등의 나라에 이른지라 고로 또 명칭이 북전불교(北傳佛敎)임.
●根器; 식물의 근(根)은 능히 지간(枝幹; 가지)과 화엽(花葉)을 생장하고 기물(器物)은 능히 물건을 용납함. 그러나 생장하는 바와 용납하는 바가 대소다과(大小多寡; 크고 작고 많고 적음)의 같지 않음이 있음. 수도자의 능력도 또한 고하가 있으므로 고로 근기(根器)로써 이에 비유함.
●得得; 특지(特地).
●單傳; 조정사원5. 단전(單傳) 전법한 제조가 처음엔 삼장교승(三藏敎乘)을 겸행(兼行)했다. 뒤에 달마조사가 심인을 단전(單傳)하며 집착을 깨뜨리고 종(宗; 근본 宗이니 心을 가리킴)을 나타냈으니 이른 바 교 밖에 따로 전하여 문자를 세우지 않고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견성하고 성불함이다.
●迷塗; 또 미도(迷途)로 지음. 미혹의 경계. 중생이 윤회하며 전생(轉生)하는 삼계육도(三界六道)의 세계를 가리킴.
●見性; 자심(自心)의 불성을 봄임.
●脫體; 탈(脫)은 전부. 탈체는 곧 전체.
●現成; 현전성취(現前成就)의 약어(略語)니 자연으로 출래(出來)했고 조작과 안배(安排)를 빌리지 않는 것임.
●後頭; 시간을 표(表)함. 후시(後時).
●二祖安心; 아래 제99칙 평창(評唱)을 보라. 이조(二祖)는 이조혜가(二祖慧可). 혜가(慧可) (487-593) 또 혜가(惠可)로 지으며 또한 승가(僧可)로 지음. 동토선종(東土禪宗)의 2조(祖). 남북조(南北朝)의 승인이며 하남(河南) 낙양(洛陽) 사람이며 속성(俗姓)이 희(姬)며 처음의 이름은 신광(神光)이었음. 어릴 때 낙양 용문(龍門)의 향산(香山)에서 보정(寶靜)을 의지(依止)해 출가하였고 영목사(永穆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음. 젊은 나이에 돌아다니며 청강(聽講)하였으며 공로(孔老; 孔子와 老子)의 학문과 현리(玄理)를 정밀하게 연구했음. 북위(北魏) 정광(正光) 원년(520)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달마조사(達磨祖師)를 참알(參謁)해 좇아 배우기가 6년이었으며 달마가 이에 대법(大法)과 아울러 의발(衣鉢)을 전수(傳授)했음. 스님이 북제(北齊) 천보(天保) 3년(552)에 승찬(僧璨)에게 전법(傳法)했고 그 후에 하남의 업도(鄴都)에 다다라 릉가경(楞伽經)의 뜻을 연설했음. 무릇 30여 년 동안 도광회적(韜光晦跡; 빛을 감추고 자취를 어둡게 함)하여 사람들이 능히 알지 못했음. 뒤에 관성현(筦城縣)의 광구사(匡救寺) 3문(門) 아래에서 무상도(無上道)를 얘기하자 듣는 자가 숲처럼 모였음. 때에 변화법사(辯和法師)란 자가 있어 사중(寺中)에서 열반경을 강설했는데 배우는 무리가 스님의 법 여심을 듣고 조금씩 인도(引導)해 떠나자 변화가 그 분을 이기지 못해 읍재(邑宰)인 적중간(翟仲侃)에게 비방을 일으켰으며 적중간이 그 삿된 설에 현혹(眩惑)되어 스님에게 비법(非法)을 가했음. 스님이 기쁜 듯(怡然) 위순(委順; 세상을 떠남)했으며 당시의 나이가 107세였으니 곧 수(隋) 문제(文帝) 개황(開皇) 13년(一說엔 12) 계축세(癸丑歲) 3월 16일임. 당(唐) 덕종(德宗)이 시호(諡號)하여 대조선사(大祖禪師)라 했음 [전등록3. 보림전8. 전법정종기6].
●情塵; 속정(俗情)과 망념(妄念)의 진구(塵垢).
●洒洒落落; 또 쇄쇄낙락(灑灑落落)으로 지음. 쇄쇄(洒洒)는 마음이 미혹하지 않음을 형용하고 낙락(落落)은 이르자면 사물에 정체하지 않음임. 곧 마음이 집착하지 않고 소유한 속박과 염오(染汚)를 멀리 여읨.
●袈裟; 승중(僧衆)의 몸 위를 전박(纏縛)하는 법의를 가리킴. 그 색의 부정(不正)으로써 칭명함. ▲조정사원3. 가사(袈裟; 梵 kaṣāya) 범어로 이르되 가사는 여기 말로든 부정색(不正色; 정색인 적ㆍ황ㆍ백ㆍ청ㆍ흑이 아님)임. 율에 이르되 일체의 상색(上色; 좋은 색)의 옷은 수용(受容; 畜)함을 얻지 못하나니 마땅히 가사를 지어야 한다.
●放光般若經; 20권, 혹 30권. 서진(西晉) 무라차(無羅叉; 無叉羅)ㆍ축숙란(竺叔蘭) 등이 공역(共譯)했으며 대정장 제8책에 수록되었음. 또 방광반야바라밀경ㆍ방광마하반야경ㆍ마하반야방광경ㆍ광반야바라밀경ㆍ방광경으로 지으며 총계가 90품임. 또 본경은 축법호(竺法護)의 광찬경(光讚經) 10권ㆍ구마라집의 마하반야바라밀경(대품반야)ㆍ현장의 대반야바라밀다경 제2회 등의 경과 부분적으로 서로 같은 곳이 있으며 현존하는 범문(梵文) 이만오천송반야(二萬五千頌般若)에 상당함 [출삼장기집2. 역대삼보기6. 개원석교록2].
●辨道; 또 판도(辦道)로 지음. 수행임.
●度僧; 도(度)란 것은 세속을 벗어나서 생사를 여읨임. 곧 일정한 의식을 거행하여 속인으로 하여금 출가하여 승인이 되게 함.
●惡水; 악(惡)은 불호(不好), 구예(垢穢).
●驀頭; 홀연, 돌연. 두(頭)는 조사.
●這箇; 또 자개(者箇)로 지음. 사물을 가리키는 사(辭). 정자통 자(者) 또 차(此)다.
●婁約法師; 남조 양대(梁代) 승려 혜약(慧約)의 속성이 누(婁)인지라 고로 호칭이 누약(婁約)임 [불조통기37].
●傅大士; 부흡(傅翕; 497-569)을 가리킴. 남조 양대(梁代) 선종의 저명한 존숙. 아래 제67칙을 보라.
●昭明太子; (499-529) 남조(南朝) 양무제 소연(蕭衍)의 장자니 이름은 통(統)이며 자는 덕시(德施). 출생하면서 민예(敏睿)하여 3세에 효경과 논어를 수학(受學)했고 5세에 두루 5경을 읽었음. 천감(天監) 원년(502) 세워 황태자로 삼았음. 무제가 불교를 대흥(大興)시켰고 태자도 또한 깊이 신봉했으며 보살계를 받아 봉지(奉持)하면서 오직 삼갔음. 뭇 경을 편람(遍覽)했고 교지(敎旨)를 깊이 연구했음. 대통(大通) 3년 3월에 질병을 얻어 4월에 훙(薨)했으니 향년은 31이며 조야(朝野)가 완석(惋惜)하지 않음이 없었음. 시호는 소명(昭明). 저서에 문집 20권이 있으며 또 고금전고문언정서(古今典誥文言正序) 10권ㆍ영화집(英華集) 20권ㆍ문선(文選) 30권 등을 편찬(編撰)했음 [양서8. 거사전9].
●持論; 논량(論量; 評論)을 지정(持正; 바르게 가짐)함.
●極則; 지극한 묘리(妙理)의 법칙.
●弄精魂; 현허(玄虛; 玄遠虛無)를 희롱함이니 허망한 시위(施爲). 늘 선가가 시기응기(示機應機)하는 작략을 가리킴. 다분히 접인(接人)의 방편법문에 관계되고 진실한 대법이 아니기 때문에 고로 용례가 많이 폄의(貶義)를 함유함. ◆精魂 정령(精靈)이니 사람의 신식(神識) 혹 물건의 정(精)을 가리킴. 또 정신(精神)ㆍ혼신(魂神)ㆍ정식(精識)으로 지음. 관정경6 총묘인연사방신주경ㆍ수릉엄경6을 안험컨대 무릇 이는 사람의 정혼(精魂)ㆍ귀매(鬼魅) 및 오곡(五穀)의 정(精) 등을 다 일컬어 정령이라 하지만 대개 사람의 심식(心識)을 가지고 혼신(魂神) 혹은 정혼(精魂)이라 호칭함.
●且喜沒交涉; 뜻으로 이르자면 선법과 터럭만큼도 관계가 없음. 근본이 선법에 부합하지 않음. 이는 선가의 습용(習用)의 비평어. 차희(且喜)란 것은 종전초1건(乾)에 일왕(一往)은 수순(隨順)하면서 허락하는 사(辭)로 삼고 일왕(一往)은 전인(前人)의 말에 수희(隨喜)하고는 후에 부정함이다 했음.
●五祖先師; 오조법연(五祖法演)을 가리킴. 법연(法演) (?-1104) 북송 양기파승. 면주(綿州) 파서(巴西; 사천 綿陽) 사람이며 속성은 등(鄧). 나이 35에 비로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음. 성도(成都)에 유학(遊學)하여 백법(百法)과 유식(唯識) 여러 논을 익히며 그 오의(奧義)를 연구했음. 후에 백운수단선사(白雲守端禪師)에게 투신해 참구하며 정근(精勤)했으며 드디어 휑하게 철오(徹悟)했고 인가(印可)를 받았음. 이윽고 명령에 의해 분좌(分座)하여 내중(來衆)에게 개시(開示)했음. 처음엔 사면산(四面山)에 주(住)했고 뒤에 백운산(白雲山)으로 돌아와 옮겼음. 다음에 태평(太平)에 주(住)했고 다음에 해회(海會)에 주(住)했고 다시 기주(蘄州) 오조산(五祖山) 동선사(東禪寺)로 옮겼음.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 6월 25일에 상당하여 대중에게 고별하고 머리를 세정(洗淨)하고 몸을 씻고 시적했으니 나이는 80 남짓. 세칭이 오조법연(五祖法演)임. 법사(法嗣)가 파다(頗多)하지만 불안청원(佛眼淸遠)ㆍ태평혜근(太平慧懃)ㆍ원오극근(圜悟克勤)이 가장 저명하여 법연하(法演下)의 3불(佛)이란 칭호가 있음 [법연선사어록서. 오등회원19. 연등회요16. 석씨계고략4].
●一等; 곧 일양(一樣)으로 평등함의 뜻.
●打葛藤; 언구에 규전(糾纏; 뒤얽힘)됨.
●打破漆桶; 철오(徹悟)의 상태를 표시함. 칠통은 흑칠통이니 무명의 견후(堅厚)에 비유함.
●就中; 취(就)는 대사(代詞)니 차(此), 기(其)에 상당함.
●古人; 현각(玄覺; 665-713)을 가리킴. 당대승. 온주(溫州) 영가(永嘉; 浙江에 위치)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대(戴), 자(字)는 명도(明道), 호는 영가현각(永嘉玄覺). 8세에 출가하여 3장(藏)을 널리 탐구했으며 특히 천태지관(天台止觀)에 정통했음. 뒤에 온주(溫州)의 용흥사(龍興寺) 곁 바위 아래 스스로 선암(禪庵)을 구축(構築)하고 독거하며 학문을 연마했는데 늘 선관(禪觀)을 닦았음. 우연히 좌계현랑(左溪玄朗)의 격려로 인해 드디어 유방(遊方)할 뜻을 일으켜 동양현책(東陽玄策)과 함께 유방하며 도를 찾았음. 운양(韻陽)에 이르렀을 때 조계혜능(曹溪慧能)을 알현(謁見)했으며 혜능과 서로 문답하고 그 인가(印可)를 얻었음. 혜능이 그를 머물러 일숙(一宿)케 했는데 다음날 곧 용흥사(龍興寺)로 돌아간지라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일숙각(一宿覺)이라 했음. 그 후 학자가 복주(輻湊)하였으며 호가 진각대사(眞覺大師)임. 현랑(左溪)이 글을 주어 산서(山棲)로 그를 초대하자 스님이 복서(覆書; 편지의 회답. 返信)하고 사퇴(辭退)했음. 선천(先天) 2년(713. 一說엔 開元二年 혹은 先天元年) 10월 17일에 부좌(趺坐; 책상다리)하고 입적했으니 나이는 49. 무상대사(無相大師)란 시호(諡號)를 주었으며 탑은 가로되 정광(淨光). 증도가(證道歌) 1편(篇)을 지었는데 범승(梵僧)이 천축으로 돌아가 전하자 그곳에서 다 흠앙(欽仰)하며 제목하기를 동토(東土)의 대승경(大乘經)이라 했음. 또 선종오수원지(禪宗悟修圓旨) 10편(篇) 및 관심십문(觀心十門)ㆍ영가집(永嘉集) 10권을 지었는데 모두 세상에 왕성히 전함 [송고승전8. 불조역대통재13. 불조통기10. 전등록5. 오등회원2].
●劈頭; 최초의 뜻 [벽암록 제1칙 종전초]
●一拶; 이르자면 바쁘게 재촉하며 담화함이니 이는 사승(師僧)이 학인을 시험하는 것.
●漏逗; 두(逗)는 투(透)임. 로(露)임. 누두(漏逗)는 설로(泄露; 누설하여 노출함)임. 설루(泄漏; 漏泄)임. 선록(禪錄)의 용례는 늘 선법의 현지(玄旨)를 설로(泄露)함을 가리킴. 안험(按驗; 查驗)컨대 선지(禪旨)는 강력히 언설을 옳지 않다 함. 그리하여 고수종사(高手宗師)는 본분을 사람에게 보이므로 심지(心地)를 직지하여 선지를 설로(泄露)하는 설법을 스스로 옳다 함. 회해(詼諧; 조롱하며 농담함)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 혹은 이르기를 노쇠하여 잡란(雜亂)하다 란 뜻.
●人我見; 2아견의 하나. 일체 범부가 인신(人身)이 곧 5온의 가화합(假和合)임을 깨닫지 못하고 주재(主宰)를 강립(强立)하여 헤아리되 아(我)가 인(人)이 된다 하나니 곧 인(人)에 상일(常一)한 아체(我體)가 있다고 집착하는 악견(惡見)을 일컬어 인아견이라 함.
●慈悲; 중생을 자애하면서 아울러 쾌락을 급여(給與)함을(與樂) 일컬어 자(慈)라 하고 그 고통에 동감(同感)하여 중생을 연민하고 아울러 그 고통을 발제(拔除)함을(拔苦) 일컬어 비(悲)라 함. 2자의 합칭이 자비가 됨. 불타의 비(悲)는 곧 이 중생의 고(苦)를 자기의 고로 삼는 동심동감(同心同感)의 상태인지라 고로 명칭이 동체대비(同體大悲)임. 또 그 비심(悲心)이 광대무진한지라 고로 명칭이 무개대비(無蓋大悲; 이 悲보다 更廣更大更上할 게 있지 않는 것)임.
●忒殺; 태쇄(太殺)와 같음. 부사니 정도가 과분함을 표시함. 특(忒)은 태(太)며 쇄(殺)는 소팔절(所八切; 살)이며 소배절(所拜切; 쇄)이니 정도의 깊음을 표시.
●眼目定動; 또 안정정동(眼睛定動으로 지음. 유예. 지의(遲疑; 의심하고 주저함). 망연(茫然)하여 깨닫지 못하는 양자(樣子). 정동(定動)은 잡동(眨動; 눈을 깜작이며 움직임)임.
●落處; 또 낙착처(落著處)로 지음. 귀속처(歸屬處)임.
●端和尙; 백운수단화상임. 수단(守端) (1025-1072) 송대 양기파승. 호남 형양(衡陽)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주(周; 한편으론 葛로 지음). 20세에 다릉욱(茶陵郁)에 의지해 득도(得度)했으며 후에 제방에 이르러 참학(參學)하다가 양기방회(楊岐方會)의 처소에서 깨침을 얻었고 그 법사(法嗣)를 승계했음. 그 후 원통거눌(圓通居訥; 운문하 4세)의 추거(推擧; 추천)로 말미암아 강서 승천선원(承天禪院)에 주지했음. 원통 숭승선원(崇勝禪院)ㆍ안휘 법화산 증도선원(證道禪院)ㆍ용문산 건명선원(乾明禪院)ㆍ흥화선원(興化禪院)ㆍ백운산 해회선원(海會禪院) 등의 곳을 역주(歷住)하며 불법을 홍양(弘揚)하다가 송 신종(神宗) 희녕(熙寧) 5년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48. 문인 법연(法演)이 편(編)한 백운수단선사어록 2권과 백운단화상광록 4권이 있음 [속전등록13. 오등회원19. 석씨계고략4].
●少室峰; 소실봉(小室峰)과 같음. 또 명칭이 소실산(少室山). 문원휘지(文苑彙志) 지리지地理志)에 가로되 용어하도(龍魚河圖)에 이르되 5악(嶽)의 중악(中嶽)인 숭산은 36봉(峰)이다. 동은 일러 대실(大室)이며 서는 소실(少室)이니 서로의 거리가 17리다. 숭(嵩)이란 것은 그 총명(總名)이다. 이를 일러 실(室)이란 것은 그 아래 석실이 있기 때문이다. 소실은 높이가 860장(丈)이다. ▲대명일통지29(大明一統志二十九). 하남부(河南府) 소림사. 등봉현(登封縣) 서쪽 소실 북쪽 기슭에 있다. 후위(後魏) 때 건립했고 양시(梁時)에 달마가 여기에 거주하며 면벽하기 9년이었다.
●魏孝明帝; (510-528) 북위의 왕공. 이름은 후(詡)며 원씨(元氏). 선무의 제2자며 재위는 14년. 신귀 원년(518) 모든 군(郡)에 조칙하여 5급(級) 부도(浮圖)를 세웠음. 이 해에 호태후(胡太后)가 송운(宋雲)과 사문 혜생 등에게 칙명하여 서천에 가서 경을 구하게 했음. 4년 송운 등이 환국했는데 불경 170부를 얻었음. 정광 원년(520) 달마가 양(梁)으로부터 위(魏)에 들어가 숭산에 이르러 소림사에 거주하며 면벽하고 앉았음. 제(帝)가 스님의 이적(異跡)을 듣고 세 번 불렀으나 이르지 않자 마납가사와 금발(金鉢) 등을 주었는데 받지 않고 세 번 반환한 후에 그것을 받았음 [북사4. 불법금탕편5].
●拓跋; 치문경훈주상(緇門警訓註上). 탁발(拓跋)은 후위(後魏)의 성임. 북인은 토(土)를 일러 탁(拓)이라 하고 후(後)를 일러 발(跋)이라 함. 위(魏)의 선조는 황제(黃帝)에게서 나왔고 토덕(土德)으로 왕 노릇한지라 고로 탁발씨라 함.
●少林; 소림사니 하남성 등봉현성(登封縣城)의 북쪽 12㎞의 소실산(少室山) 오유봉(五乳峰) 아래에 위치함. 북위(北魏) 태화 19년(495) 효문제(孝文帝)가 천축승 불타선사(佛陀禪師)를 위해 건립한 것임.
●婆羅門; 현응음의18(玄應音義十八). 바라문(婆羅門; 梵 brāhmaṇa) 이 말은 와략(訛略)이다. 응당 이르되 바라하마나(婆羅賀磨拏)니 이는 뜻에 이르되 범천법(梵天法)을 승습(承習)하는 자다. 그 사람들의 종류가 스스로 이르기를 범천의 입으로 좇아 나왔다. 4성(姓) 중에 최승(最勝)이므로 고로 홀로 범(梵)이란 이름을 취한다. 오직 5천축에만 있고 제국(諸國)에는 곧 없다. 경중의 범지(梵志)도 또한 이 이름이다. 바른 말로는 정윤(靜胤)이니 말하자면 이 범천의 묘윤(苗胤)이다.
●作麽生; 또 즘마생(怎麽生)ㆍ작마(作麽)ㆍ작생(作生)으로 지음. 작마(作麽)는 곧 하(何)며 생(生)은 어조사임. 어떤 때엔 가히 양자(樣字) 혹은 연자(然字)로 지어 해석함. 본래 송대(宋代)의 속어(俗語)가 되는데 선종에서 다분히 공안의 감탄(感歎), 혹은 의문의 말로 사용함.
●祇對; 또 지대(秖對)ㆍ지대(秪對)로 지음. 회답임. 응대임. 지(祇)는 지(秖)ㆍ지(秪)와 용이 같음.
●搽胡; 또한 차호(搽糊)ㆍ차호(茶糊)ㆍ도호(塗糊) 등으로 지음. 도호(塗糊)는 모호(糢糊)와 같음. 도(塗)는 오염의 뜻.
●阿那箇; 나개(那箇; 어느 것)니 아(阿)는 조사.
●端的; 확실, 진실.
●光統; 북제 업성(鄴城) 대각사의 혜광율사(慧光律師)니 지론(地論)의 종장임. 업(鄴)에 들어가 국통(國統)의 승관(僧官)에 임명된지라 고로 부르기를 광통이라 했음. [당승전21].
●菩提流支; 북위(北魏)의 승려니 북천축의 삼장(三藏)임. 또 보리류지(菩提留支)로 지으며 여기에선 이르되 도희(道希)니 대승유가계(大乘瑜伽系)의 학자임. 북위 선무제(宣武帝) 영평(永平) 원년(508) 낙양에 이르렀으며 제(帝)가 매우 그를 존중해 칙령으로 영녕사(永寧寺)에 거주케 했음. 이로부터 범경(梵經)을 번역했는데 무릇 39부(部) 127권이 있음 [십지경론서. 속고승전1. 역대삼보기3]. ▲조정겸추록하(祖庭鉗鎚錄下). 원위(元魏) 때 보리류지(菩提流支)는 달마와 같은 시대이다. 약을 내려 달마를 독해(毒害)한 자가 이것이다.
●相; 한어대자전. 상(相) 불교의 명사(名詞)니 성(性)을 상대해 말함이다. 불교에선 일체의 사물과 밖으로 나타난 형상(形象)과 상태(狀態)를 잡아 이를 일컬어 상(相)이라 한다.
●褊局; 협착(狹窄). 협소(狹小).
●化緣; 교화의 인연. 또 교화를 가리킴.
●熊耳山; 하남 노씨현(盧氏縣) 남방과 영녕(永寧; 지금의 洛寧縣)의 경계에 위치함. 산의 두 봉우리가 병치(竝峙)한 게 웅이와 같은지라 고로 명칭이 웅이산임. 곧 선종 초조 보리달마의 탑소(塔所)임 [대명일통지29. 대청일통지162].
●宋雲; 북위 돈황 사람. 북위 효명제(孝明帝) 때의 사신이 됨. 효명제 신귀(神龜) 원년(518; 일설에 희평 원년 혹 정광2년) 11월 호태후(胡太后)의 명을 받들어 사문 법력ㆍ혜생 등과 낙양으로부터 출발하여 장도(長途)에 적령ㆍ토곡혼ㆍ선선ㆍ말성ㆍ파사(波斯)ㆍ사미(賖彌) 등지(等地)를 경과하여 다음해 12월 오장국(烏場國)에 다다라 오장국왕을 알현했고 아울러 공맹(孔孟)과 노장(老莊)의 덕 및 신선의 방술을 설했음. 정광 원년(520) 4월 중순 건타라국(乾陀羅國; 梵 gandhāra)에 들어갔고 후에 다시 서행(西行)하여 신두하(辛頭河; 곧 印度河)를 건넜음. 작리부도(雀離浮圖)ㆍ대탑 등의 불적(佛蹟)을 순례했음. 다음해 2월(일설에 3년 혹 4년) 낙양으로 돌아왔는데 대승 범문(梵文) 경전 무릇 170부를 가지고 회귀했음. 그 후의 사적(事蹟)은 불상임. 또 송운이 귀국한 후 서역 여유(旅遊)의 견문을 가지고 송운행기(宋雲行紀)를 찬성(撰成)했는데 그 후 낙양가람기5 중에 수입(收入)했음 [낙양가람기5. 석가방지하. 위서서역전. 위서석로지. 하남통지33].
●曠劫; 광(曠)은 구(久)며 원(遠)이니 구원(久遠)임. 광겁은 곧 무한히 길고 먼 시간.
●刹那; 극히 짧은 시간을 가리킴.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상. 1념(念) 가운데 90찰나가 있으며 1찰나에 9백 생멸을 경과한다. 모든 유위법이 모두 다 공(空)인 연고이다. ▲구사론12. 예컨대(如) 장사(壯士)가 한 번 급히 손가락을 퉁기는 경각에 65찰나이다. 이와 같음을 1찰나의 양(量)이라고 이름한다.
●妙覺; 스스로 깨닫고(自覺) 남을 깨우쳐서(覺他) 각행(覺行)이 원만하여 불가사의함을 가로되 묘각이니 곧 불과(佛果)의 위없는 정각임. 2승(乘)은 자각(自覺)에 그치고 각타(覺他)하는 공이 없으며 보살은 비록 자각각타(自覺覺他)를 병행하지만 원만하지 못하며 오직 불타라야 2각(自覺ㆍ覺他)이 원만하고 각체(覺體)가 불가사의함 [사교의4. 삼장법수26].
●蹉過; 착과(錯過; 失去니 놓침의 뜻)와 같음. 차(蹉)는 질(跌; 지나치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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