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주해

벽암록 제10칙 송평창

태화당 2021. 8. 25. 07:39

雪竇不妨有爲人處 若不是作者 只是*胡喝亂喝 所以古人道 有時一喝不作一喝用 有時一喝却作一喝用 有時一喝如踞地獅子 有時一喝如金剛王寶劍 *興化道 我見爾諸人 東廊下也喝 西廊下也喝 且莫胡喝亂喝 直饒喝得興化 上*三十三天 *撲下*氣息一點也無 待我甦醒起來 向汝道*未在 何故 興化未曾向*紫羅帳裏撤眞珠 與爾諸人在 只管胡喝亂喝作什麽 *臨濟道 我聞汝等 總學我喝 我且問爾 *東堂有僧出 *西堂有僧出 兩箇齊下喝 那箇是賓 那箇是主 爾若分賓主不得 已後不得學老僧 所以雪竇頌道 作者知機變 這僧雖被睦州收 他却有識機變處 且道什麽處是這僧識機變處 鹿門智禪師 點這僧云 識法者懼 巖頭道 若論戰也 箇箇立在轉處 *黃龍心和尙道 窮則變 變則通 這箇些子 是祖師坐斷天下人舌頭處 爾若識機變 擧著便知落處 有般漢云 管他道三喝四喝作什麽 只管喝將去 說什麽三十二十喝 喝到彌勒佛*下生 謂之騎虎頭 若恁麽知見 不識睦州則故是 要見這僧太遠在 如人騎虎頭 須是手中有刀 兼有轉變始得 雪竇道 若恁麽 二俱成瞎漢 雪竇似*倚天長劍 凜凜全威 若會得雪竇意 自然千處萬處一時會 便見他雪竇後面頌 只是下*注脚 又道誰瞎漢 且道是*賓家瞎 是*主家瞎 莫是賓主一時瞎麽 拈來天下與人看 此是活處 雪竇一時頌了也 爲什麽却道 拈來天下與人看 且道作麽生看 *開眼也著 合眼也著 還有人免得麽

 

胡喝亂喝; 不知其用而隨意亂喝 胡亦亂之義

興化; 興化存獎 存獎(830-888) 五代後唐臨濟宗僧 孔子後裔 流寓甘泉縣 初硏敎旨 聞臨濟義玄盛化滹沱 乃往親依 有省得法 未幾轉謁三聖慧然 魏府大覺 後住大明府興化院 學子甚衆 大闡祖道 寂謚廣濟禪師 [傳燈錄十二 廣燈錄十二]

三十三天; 忉利天也 此云三十三天 爲欲界之第二天 在須彌山頂上 中央爲帝釋天 四方各有八天 故合成三十三天也

撲下; 撲 傾覆 倒下

氣息; 原意爲出息入息之氣 卽呼吸之氣 轉義爲某種氣質給人的感覺

未在; 不契(禪法) 在 助詞 又不然

紫羅帳裏撒眞珠; 方語盡情揭示 紫羅帳 原指用紫色薄絹所作之羅帳 垂掛於高官貴人之居處 於禪林中 轉指向上之一關 用以表示主人公 君主之所在

臨濟; 臨濟義玄 義玄(?-867) 臨濟宗之祖 唐代曹州(河南)南華人 俗姓邢 幼負出塵之志 及落髮受具足戒後 便慕禪宗 初到江西參黃蘗希運 又禮謁高安大愚 潙山靈祐等 後還黃蘗 受印可 宣宗大中八年(854) 至河北鎭州 住於臨濟院 適丁兵革 師卽棄去 太尉默君和 於城中捨宅爲寺 亦以臨濟爲額 迎師居焉 後拂衣南邁至河府 府主王常侍 延以師禮 住未幾卽來大名府興化寺 居于東堂 師無疾忽一日攝衣據坐 與三聖問答畢 寂然而逝 時唐咸通八年丁亥 孟陬月十日也 門人以師全身 建塔于大名府西北隅 勅諡慧照禪師 塔號澄靈 師設三玄三要四料簡等機法 接引徒衆 更以機鋒峭峻著名於世 別成一家 遂成臨濟宗 師接化學人 每以叱喝顯大機用 世有德山棒臨濟喝之稱 [宋高僧傳十二 傳燈錄十二 臨濟語錄]

東堂; 禪寺中的僧堂因人多而分爲東堂西堂 或前堂後堂 合稱兩堂 又禪林稱當寺前住之人名爲東堂 他山隱退之長老來住本寺 名爲西堂 以西是賓位故也 東堂又稱東庵

西堂; 禪寺中的僧堂因人多而分爲東堂西堂 或前堂後堂 合稱兩堂 又指他山隱退之長老來住本寺者 又稱西庵 以東方爲主位 西方爲賓位(客位)故也

黃龍心; 黃龍祖心 祖心(1025-1100) 宋代黃龍派僧 廣東始興人 俗姓鄔 號晦堂 年十九依龍山寺惠全 翌年試經得度 住受業院奉持戒律 後參雲峰文悅 隨侍三年 未久參黃檗山慧南 留侍四年 後還文悅 時文悅示寂 乃依止石霜楚圓 一日 閱傳燈錄 讀多福禪師之語大悟 後隨慧南移黃龍山 慧南示寂 遂繼黃龍之席 居十二年 後入京師 駙馬都尉王詵盡禮迎之 然師僅菴居國門之外 晩年移菴深入 棧絶學者二十餘年 宋元符三年十一月示寂 壽七十六 諡號寶覺禪師 遺有寶覺祖心禪師語錄一卷 冥樞會要三卷等 [禪林僧寶傳二十三 續傳燈錄十五 五燈會元十七 釋氏稽古略四]

下生; 謂自天上界 降生於下界 此指從兜率下生

倚天長劍; 祖庭事苑四 倚天長劍 宋玉大言賦 方地爲轝 圓天爲蓋 彎弓射扶桑 長劍倚天外

注脚; 同註脚 註釋(注釋) 註解(注解) 禪門拈頌集第一四一八則 拈頌說話曰 凡書註云 皆歧分而作脚書之 故云注脚 或云脚注 又云測注

賓家; 禪機問答 可分主賓兩方 大抵法會住持 接人 師匠等爲主家 參詣客僧 年輕後學等爲賓家

主家; 見上貧家

開眼也著; 著 接觸 受到

 

설두가 사람을 위하는 곳이 있음에 방애되지 않는다. 만약 이 작자가 아니었다면 다만 이 호할난할(*胡喝亂喝)했으리라. 소이로 고인(임제)이 말하되 어떤 때의 1할은 1할의 씀으로 짓지 않으며 어떤 때의 1할은 도리어 1할의 씀으로 지으며 어떤 때의 1할은 거지사자(踞地獅子)와 같고 어떤 때의 1할은 금강왕보검과 같다 하였다. 흥화(*興化)가 말하되 내가 너희 제인을 보니 동랑(東廊) 아래에서도 할하고 서랑(西廊) 아래에서도 할하니 다만() 호할난할(胡喝亂喝)하지 말아라. 직요(直饒; 縱然) 흥화를 할득(喝得; 은 조사)하여 삼십삼천(*三十三天)에 올라갔다가 도리어 거꾸로 떨어져 내려와(*撲下) 기식(*氣息)이 한 점도 없더라도 내가 생성(甦醒; 깨어남)하여 일어남을(는 조사) 기다렸다가 너희를 향해 말하되 그렇지 않다(*未在)하리라. 무슨 연고냐, 흥화가 일찍이 자라장 속을 향해 진주를 뿌려 너희 제인에게 주지 않았거늘(는 조사) 다만 관대(管帶)하여 호할난할하여 무엇하리오 하였다. 임제(*臨濟)가 말하되 네가 듣건데 너희 등이 모두 나의 할을 배웠다 하니 내가 다만() 너희에게 묻는다, 동당(*東堂)에서 어떤 중이 나오고 서당(*西堂)에서 어떤 중이 나와 두 개가 일제히 하할(下喝)하면 어느 것이 이 빈()이며 어느 것이 이 주()인가. 너희가 만약 빈주(賓主) 나눔을 얻지 못하거든 이후론 노승을 배움을 얻지 말아라 하였다. 소이로 설두가 송해 말하되 작자가 기변(機變)을 안다 하였으니 이 중이 비록 목주에게 거두어짐을 입었지만 그가 도리어 기변을 아는 곳이 있다. 그래 말하라, 어느 곳이 이, 이 중이 기변을 안 곳인가. 녹문지(鹿門智; 미상) 선사가 이 중을 점검(點檢; )해 이르되 법을 아는 자라서 두려워한 것이라 하며 암두(巖頭)가 말하되 만약 법전(法戰; )을 논할진대 개개가 전처(轉處)에 서 있다 하며 황룡심(*黃龍心) 화상이 말하되 궁한 즉 변하고 변한 즉 통한다 하니 이것(這箇)의 사자(些子)는 이 조사가 천하인의 혀(舌頭)를 좌단(坐斷)한 곳이므로 너희가 만약 기변을 알진대 거착(擧著)하면 곧 낙처를 알리라. 어떤 종류(; )의 사내는 이르되 그(목주)가 말한 34할을 상관(相管; 相關과 같음)하여 무엇하리오, 다만 관대(管帶)하여 할해 나아가거늘 무슨 30, 20할을 설하는가, 할하여 미륵불이 하생(*下生)함에 이르더라도 범의 머리를 탄 것이라고 이르겠다 하나니 만약 이런 지견이라면 목주를 알지 못함은 곧 짐짓 옳다고 하려니와 이 중을 보고자 한다면 너무 멀었다(는 조사). 예컨대() 사람이 범의 머리를 탔다면 반드시 이는 수중에 칼이 있고 겸하여 전변(轉變)이 있어야 비로소 옳다. 설두가 말하되 만약 이러할진대 둘 다 눈 먼 자(瞎漢)가 되리라() 하니 설두가 하늘에 기댄 장검(*倚天長劍)의 늠름한 전위(全威)와 흡사하다. 만약 설두의 뜻을 회득(會得)한다면 자연히 천처만처(千處萬處)를 일시에 회득하여 하여 저 설두의, 후면에 송하여서 다만 이 주각(*注脚)을 내린 것을 보리라. 또 말하되 누가 눈 먼 자인지 라고 하니 그래 말하라, 이 빈가(*賓家)가 눈 멀었는가, 이 주가(*主家)가 눈 멀었는가, 이 빈주가 일시에 눈 먼 것은 아닐까. 천하에 집어와서(拈來) 사람들에게 보여주어라 하니 이것이 이 활처(活處). 설두가 일시에 송해 마쳤거늘 무엇 때문에 도리어 말하되 천하에 집어와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어라 했는가. 그래 말하라, 어떻게 보겠는가(). 눈을 뜨도 부딪히고(*開眼也著) 눈을 감아도 부딪치거늘 도리어 면득(免得; 은 조사)하는 사람이 있느냐.

 

胡喝亂喝; 그 용도를 알지 못하고 뜻에 따라 난할(亂喝). ()도 또한 란()의 뜻.

興化; 흥화존장임. 존장(存獎) (830-888) 오대 후당(後唐)의 임제종승. 공자(孔子)의 후예(後裔)니 감천현(甘泉縣)에 유입(流入)하여 살았음. 처음엔 교지(敎旨)를 연구하다가 임제의현(臨濟義玄)이 호타(滹沱)에서 성화(盛化)한다 함을 듣고 이에 가서 친히 의지하다가 깨침이 있어 득법(得法)했음. 얼마 안되어 삼성혜연(三聖慧然)ㆍ위부대각(魏府大覺)을 옮겨가며 참알(參謁)했고 뒤에 대명부(大明府) 흥화원(興化院)에 거주했음. 배우는 제자가 매우 많았으며 조도(祖道)를 크게 열었음. 입적하자 광제선사(廣濟禪師)로 시호했음 [전등록12. 광등록12].

三十三天; 도리천(忉利天)이니 여기에선 이르되 삼십삼천임. 욕계의 제2천이 되며 수미산 정상에 있음. 중앙은 제석천이 되며 사방에 각기 8천이 있는지라 고로 합계 삼십삼천을 이룸.

撲下; ()은 경복(傾覆; 기울어져 엎어짐). 도하(倒下; 거꾸로 떨어짐).

氣息; 원래의 뜻은 날숨과 들숨의 기()가 됨. 곧 호흡의 기. 전의(轉義)하여 모종의 기질을 사람에게 준 감각이 됨.

未在; (禪法)에 계합하지 못함. ()는 조사니 또 불연(不然).

紫羅帳裏撒眞珠; 방어니 진정(盡情)으로 게시(揭示). 자라장(紫羅帳)은 원래는 자색의 박견(薄絹)을 써서 만든 바의 나장(羅帳)을 가리킴이니 고관이나 귀인의 거처에 수괘(垂掛). 선림 중에선 전()하여 향상의 1()을 가리킴이니 써서 주인공이나 군주의 소재를 표시함.

臨濟; 임제의현임. 의현(義玄) (?-867) 임제종의 개조(開祖). 당대 조주(曹州; 하남) 남화(南華)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형(). 어려서 출진(出塵)의 뜻을 졌으며() 그리고 낙발(落髮)하고 구족계를 받은 후에 곧 선종을 흠모했음. 처음엔 강서(江西)에 이르러 황벽희운(黃蘗希運; 百丈懷海法嗣)을 참알(參謁)하고 또 고안대우(高安大愚; 歸宗智常法嗣)ㆍ위산영우(潙山靈祐; 百丈懷海法嗣) 등을 예알(禮謁)했다가 뒤에 황벽으로 돌아가 인가(印可)를 받았음. 선종(宣宗) 대중 8(854) 하북의 진주(鎭州)에 이르러 임제원에 거주했는데 마침 병혁(兵革; 전쟁)을 당해 스님이 곧 버리고 떠났음. 태위(太尉) 묵군화(默君和)가 성 안에 집을 희사(喜捨)해 절을 만들고 또한 임제로써 편액(扁額)을 삼았으며 스님을 영접해 거처케 했음. 후에 옷을 떨치고 남쪽으로 떠나 하부(河府)에 이르자 부주(府主)인 왕상시(王常侍)가 스승의 예로써 연청(延請)했음.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대명부(大名府)의 흥화사(興化寺)에 와서 동당(東堂)에 거처했음. 스님이 질병이 없었는데 홀연히 어느 날 옷을 거두고 자리에 기대어 삼성(三聖)과 문답을 마치고는 고요히 떠났으니 때는 당 함통 8년 정해(丁亥) 맹추월(孟陬月; 정월) 10일임. 문인들이 스님의 전신(全身)으로써 대명부(大名府) 서북 모퉁이에 탑을 세웠음. 칙시(勅諡)가 혜조선사(慧照禪師)며 탑호가 징령(澄靈). 스님이 33(三玄三要)ㆍ사료간(四料簡) 등의 기법(機法)을 시설하여 도중(徒衆)을 접인(接引)하였음. 다시 기봉(機鋒)이 초준(峭峻)하여 세상에 저명하며 따로 일가(一家)를 이루어 드디어 임제종을 이룸. 스님이 학인들을 접화(接化; 接引해 교화)하면서 매양 질할(叱喝)로써 큰 기용(機用)을 나타내어 세상에 덕산방(德山棒)ㆍ임제할(臨濟喝)의 칭호가 있음 [송고승전12. 전등록12. 임제어록].

東堂; 선사(禪寺) 중의 승당은 사람이 많음으로 인해 동당과 서당, 혹 전당과 후당으로 분리하며 합칭이 양당(兩堂). 또 선림에서 당사(當寺)에 전부터 거주한 사람을 이름해 동당(東堂)이라 하고 타산에서 은퇴한 장로가 본사에 와서 거주하는 이를 이름해 서당(西堂)이라 함. (西)는 이 빈위(賓位)인 연고임. 동당은 또 명칭이 동암(東庵).

西堂; 선사(禪寺) 중의 승당은 사람이 많음으로 인해 동당과 서당, 혹 전당과 후당으로 분리하며 합칭이 양당임. 또 타산에서 은퇴한 장로가 본사(本寺)에 내주(來住)하는 자를 가리켜 또 서암(西庵)으로 호칭함. 동방은 주위(主位)가 되고 서방은 빈위(賓位; 客位)가 되는 연고임.

黃龍心; 황룡조심임. 조심(祖心) (1025-1100) 송대 황룡파승. 광동 시흥 사람이니 속성(俗姓)은 오()며 호는 회당(晦堂). 나이 19에 용산사 혜전에게 의지했고 다음해에 시경득도(試經得度)했음. 수업원(受業院)에 머물며 계율을 봉지(奉持)하다가 뒤에 운봉문열(雲峰文悅)을 참알(參謁)해 수시(隨侍)하기 3년이었으며 오래지 않아 황벽산(黃檗山)의 혜남(慧南)을 참알해 머물며 시봉하기 4년이었음. 뒤에 문열에게 돌아갔는데 때에 문열은 시적(示寂)한지라 이에 석상초원(石霜楚圓)에게 의지했음. 어느 날 전등록을 열람했는데 다복선사(多福禪師)의 말을 읽다가 대오했음. 후에 혜남을 따라 황룡산(黃龍山)으로 이주했고 혜남이 시적하자 드디어 황룡의 법석을 승계했으며 거주하기 12년이었음. 후에 경사(京師)에 들어갔더니 부마도위(駙馬都尉) 왕선(王詵)이 예()를 다해 환영했지만 그러나 스님은 근근(僅僅)히 국문(國門)의 밖에 암거(菴居)하였음. 만년에 암자를 옮겨 깊이 들어가 잔도(棧道)로 학자를 사절(辭絶)하기 20여년이었음. () 원부(元符) 311월에 시적했으니 나이는 76이며 시호는 보각선사(寶覺禪師). 유작(遺作)에 보각조심선사어록(寶覺祖心禪師語錄) 1권과 명추회요(冥樞會要) 3권 등이 있음 [선림승보전23. 속전등록15. 오등회원17. 석씨계고략4].

下生; 이르자면 천상계(天上界)로부터 하계(下界)에 강생함. 여기에선 도솔천으로 좇아 하생함을 가리킴.

倚天長劍; 조정사원4. 의천장검(倚天長劍) 송옥(宋玉)의 대언부(大言賦) 방지(方地; 네모 난 땅)로 가마(는 가마 여. 輿와 같음)를 삼고/ 원천(圓天)으로 덮개를 삼았다/ 활을 당겨 부상(扶桑)을 쏘고/ 장검은 하늘 밖에 기대었다.

注脚; 주각(註脚)과 같음. 주석(註釋; 注釋), 주해(註解; 注解). 선문염송집 제1418. 염송설화에 가로되 무릇 서책(書冊)의 주()를 말함이다. 다 갈래로 나누어 다리()를 지어 그것을 쓰는지라 고로 이르되 주각(注脚)이며 혹은 이르되 각주(脚注)며 또 이르되 측주(測注).

賓家; 선기(禪機)의 문답을 가히 주빈 양방(兩方)으로 나눔. 대저 법회의 주지ㆍ접인(接人)ㆍ사장(師匠) 등은 주가가 되고 참예(參詣)한 객승이나 나이가 적은 후학 등은 빈가가 됨.

主家; 위의 빈가(貧家)를 보라.

開眼也著; ()은 접촉, 수도(受到).

 

佛果圜悟禪師碧巖錄卷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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