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주해

벽암록 제31칙 본칙평창

태화당 2021. 8. 26. 07:46

古人行脚 遍歷*叢林 直以此事爲念 要辨他*曲錄木床上老和尙 具眼不具眼 古人一言相契卽住 一言不契卽去 看他麻谷到章敬 遶禪床三匝 振錫一下 卓然而立 章敬云是是 殺人刀活人劍 須是本分作家 雪竇云錯 落在兩邊 爾若去兩邊會 不見雪竇意 他卓然而立 且道 爲什麽事 雪竇爲什麽却道錯 什麽處是他錯處 章敬道是 什麽處是是處 雪竇如坐讀判語 麻谷檐箇是字 便去見南泉 依然遶禪床三匝 振錫一下 卓然而立 泉云 不是不是 殺人刀活人劍 須是本分宗師 雪竇云錯 章敬道是是 南泉云 不是不是 爲復是同是別 前頭道是 爲什麽也錯 後頭道不是 爲什麽也錯 若向章敬句下薦得 自救也不了 若向南泉句下薦得 可與祖佛爲師 雖然恁麽 衲僧家須是自肯始得 莫一向取人口辯 他問旣一般 爲什麽一箇道是 一箇道不是 若是通方作者 得大解脫底人 必須別有生涯 若是機境不忘底 決定滯在這兩頭 若要明辨古今 坐斷天下人舌頭 須是明取這兩錯始得 及至後頭雪竇頌 也只頌這兩錯 雪竇要提活鱍鱍處 所以如此 若是皮下有血底漢 自然不向言句中作解會 不向繫驢橛上作道理 有者道 雪竇代麻谷下這兩錯 有什麽交涉 殊不知 古人著語 鎖斷要關 這邊也是 那邊也是 畢竟不在這兩頭 慶藏主道 持錫遶禪床是與不是俱錯 其實亦不在此 爾不見 永嘉到曹溪見六祖 遶禪床三匝 振錫一下 卓然而立 祖云 夫沙門者 具*三千威儀 八萬細行 大德從何方而來 生大我慢 爲什麽六祖却道他生大我慢 此箇也不說是 也不說不是 是與不是都是繫驢橛 唯有雪竇下兩錯 猶較些子 麻谷云 章敬道是 和尙爲什麽道不是 這老漢不惜眉毛 漏逗不少 南泉道章敬則是是汝不是 南泉可謂見兔放鷹 慶藏主云 南泉忒殺郞當 不是便休 更與他出過道 此是風力所轉 終成敗壞 *圓覺經云 我今此身 *四大和合 所謂髮毛爪齒 皮肉筋骨 髓腦垢色 皆歸於地 唾涕膿血 皆歸於水 暖氣歸火 動轉歸風 四大各離 今者妄身 當在何處 他麻谷持錫遶禪床 旣是風力所轉 終成敗壞 且道畢竟*發明*心宗底事 在什麽處 到這裏 也須是生鐵鑄就底箇漢始得 豈不見 *張拙*秀才*西堂藏禪師 問云 山河大地 是有是無 三世諸佛 是有是無 藏云 有 張拙秀才云 錯 藏云 先輩曾參見什麽人來 拙云 參見徑山和尙來 某甲凡有所問話 徑山皆言無 藏云 先輩有什麽*眷屬 拙云 有一*山妻兩箇癡頑 又却問 徑山有甚眷屬 拙云 徑山古佛 和尙莫謗渠好 藏云 待先輩得似徑山時 一切言無 張拙俛首而已 大凡作家宗師 要與人解粘去縛 抽釘拔楔 不可只守一邊 左撥右轉 右撥左轉 但看仰山到*中邑*謝戒 邑見來 於禪床上拍手云 *和尙 仰山卽東邊立 又西邊立 又於中心立 然後謝戒了 却退後立 邑云 什麽處得此*三昧來 仰山云 於曹溪*印子上 脫將來 邑云 汝道曹溪用此三昧接什麽人 仰云 接*一宿覺 仰山又復問中邑云 和尙什麽處得此三昧來 邑云 我於馬祖處得此三昧來 似恁麽說話 豈不是擧一明三 見本逐末底漢 龍牙示衆道 夫參學人 須透過祖佛始得 *新豐和尙道 見祖佛言敎 如生*冤家 始有參學分 若透不得 卽被祖佛瞞去 時有僧問 祖佛還有瞞人之心也無 牙云 汝道江湖還有礙人之心也無 又云 江湖雖無礙人之心 自是時人過不得 所以江湖却成礙人去 不得道江湖不礙人 祖佛雖無瞞人之心 自是時人透不得 祖佛却成瞞人去也 不得道祖佛不瞞人 若透得祖佛過 此人卽過却祖佛 也須是體得祖佛意 方與向上古人同 如未透得 儻學佛學祖 則萬劫無有得期 又問 如何得不被祖佛瞞去 牙云 直須自悟去 到這裏須是如此始得 何故 爲人須爲徹 殺人須見血 南泉雪竇是這般人 方敢拈弄 頌云

 

叢林; 指僧衆聚居之寺院 尤指禪宗寺院 祖庭事苑二 叢林 梵語貧婆那 此云叢林 大論(大智度論三)云 僧伽 秦言衆 多比丘一處和合 是名僧伽 譬如大樹叢聚 是名爲林 一一樹不名爲林 如一一比丘不名爲僧 諸比丘和合故名僧 僧聚處得名叢林 又大莊嚴論(大莊嚴論經一)云 如是衆僧者 乃是勝智之叢林 一切諸善行 運集在其中 …… 今禪庭稱叢林也

曲錄木床; 同曲彔木床 見上第一五則曲彔木床

三千威儀八萬細行; 爲佛弟子持守日常威儀之作法 坐作進退有威德儀則 稱爲威儀 比丘所應持守之二百五十戒 配以行住坐臥四威儀 合爲一千戒 循轉三世(一說三聚淨戒) 卽成三千威儀 再配以身口七支(殺 盜 淫 兩舌 惡口 妄言 綺語) 貪瞋癡三毒及等分等四種煩惱 共成八萬四千 諸經擧其大數 但稱八萬細行 又有異說 避煩省略 最早採用三千威儀之名目者 卽中庸之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 [楞嚴經文句五 法華三大部補注十一 大藏法數六十八]

圓覺經;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全一卷 略稱圓覺修多羅了義經 圓覺經 唐代佛陀多羅譯 凡十二章 佛爲文殊師利等十二菩薩說大圓覺之妙理 開元釋敎錄九曰 沙門佛陀多羅 唐云覺救 北印度罽賓人也 於東都白馬寺譯圓覺了義經一部 此經近出不委何年 且弘道爲懷務甄詐妄 但眞詮不謬 豈假具知年月耶

四大; 四大種之略稱 又稱四界 一地大 二水大 三火大 四風大 智度論五十二云 四大無處不有 故名爲大

心宗; 禪宗 禪宗提倡直指人心 明心見性 故稱

發明; 明悟 發現 廣雅 發 明也 開也 圓覺經普覺章 心花發明 照十方刹

張拙; 唐代居士 曾擧秀才 因貫休指點 參石霜慶諸 慶諸問 秀才何姓 張拙答曰 姓張名拙 慶諸曰 覓巧尙不可得 拙自何來 張拙忽然省悟 乃呈偈曰 光明寂照遍河沙 凡聖含靈共我家 一念不生全體現 六根纔動被雲遮 斷除煩惱重增病 趣向眞如亦是邪 隨順世緣無罣礙 涅槃生死等空花 蒙慶諸印可 遂嗣其法 [聯燈會要二十二 五燈會元六]

秀才; 秀才是中國古代選拔官吏的科目 亦曾作爲學校生員的專稱 漢武帝改革選官制度 令地方官府考察和推擧人才 卽爲察擧 元封四年(107) 命公卿 諸州每年各擧薦秀才一名 意爲優秀人才 東漢因避光武帝名諱 遂改稱茂才 三國曹魏時沿襲察擧 複改稱秀才 至南北朝時 擧薦秀才尤爲重視 隋代始行科擧制 設秀才科 唐初沿置此科 及第者稱秀才 後廢秀才科 秀才遂作爲一般讀書人的泛稱 宋代爲士子和應擧者的統稱 明代曾一度采用薦擧之法 亦有擧秀才 明淸時期 秀才亦專用以稱府州縣學生員 [百度百科]

西堂藏; 西堂智藏 馬祖道一法嗣 見下第七三則

眷屬; 眷爲親愛 屬爲隸屬 指親近順從者 上已出

山妻; 山 謙辭

中邑; 中邑洪恩 洪恩 唐代僧 師事馬祖道一 得其密傳 出居朗州(今湖南常德)中邑 人稱中邑洪恩 每見僧來 拍口作和和聲 [五燈會元三 傳燈錄六]

謝戒; 沙彌得度受戒後 至戒師處致拜謝禮 稱爲謝戒

和尙; 傳燈錄六五燈會元三中邑章 皆作和和 和和 象聲詞 和 喜悅 唐孟郊 擇友 雖笑未必和 雖哭未必戚 又聲音相應 說文 咊 相應也 玉篇 咊爲和

三昧; 祖庭事苑五 三昧者 三之曰正 昧之曰定 亦云正受 謂正定不亂 能受諸法 憶持揀擇 故名正受 亦云等持 爲正定能發生正慧 等持諸法 是故名之爲等持 翻譯名義集四 三昧 此云調直定 又云正定 亦云正受 圭峰疏云 不受諸受 名爲正受

印子; 圖章 喩指以心印心爲傳承方式的禪法

一宿覺; 指唐代僧人玄覺 見上第一則古人

新豐和尙; 指良价 傳燈錄十五洞山良价 師至唐大中(847-859)末 於新豐山接誘學徒 厥後盛化豫章高安之洞山

冤家; 怨讐 寃與怨通 家 助詞

 

고인이 행각하며 총림(*叢林)을 편력(遍歷)하되 바로 차사(此事; 宗門一大事)로써 생각을 삼아 저 곡록목상(*曲錄木床) 위의 노화상이 구안(具眼; 눈을 갖춤)인지 구안이 아닌지를 분변하고자 했으며 고인은 1()이 상계(相契)하면 곧 머물고 1언이 계합하지 못하면 곧 떠났다. 저 마곡을 보아라 장경에 이르러 선상을 세 바퀴 돌고 석장을 한 번(一下) 떨치고 탁연(卓然; 의젓한 모양)히 서니 장경이 이르되 옳다, 옳다 하니 살인도며 활인검인지라 반드시 이 본분작가라야 하리라(분분작가가 아니면 살인도와 활인검을 쓰지 못함). 설두가 이르되 틀렸다() 하니 양변(兩邊; 貧家主家)에 떨어져 있찌만 너희가 만약 양변(兩邊)으로 가서 이회한다면 설두의 뜻을 보지 못하리라. 그가 탁연(卓然)히 서니 그래 말하라 무슨 일을 위함이며 설두는 무엇 때문에 도리어 틀렸다고 말했으며 어느 곳이 이 그(마곡)의 틀린 곳인가. 장경이 말하되 옳다 하니 어느 곳이 이 옳은 곳인가. 설두가 앉아서 판어(判語; 판결문)를 읽음과 같다. 마곡이 저() 시자(是字)를 짊어지고 곧 가서 남천을 상견하되 의연(依然; 依前)히 선상을 세 바퀴 돌고 석장을 한 번 떨치고 탁연(南泉)히 서니 남천이 이르되 옳지 않다 옳지 않다 하니 살인도며 활인검인지라 반드시 이 본분종사라야 하리라. 설두가 이르되 틀렸다() 하고 장경은 이르되 옳다 옳다 하고 남천은 이르되 옳지 않다 옳지 않다 하니 다시 이 한가지가 되는가, 이 다른가. 전두(前頭; 최초)의 옳다 라고 말함에는 무엇 때문에 또한 틀렸다고 했으며 후두(後頭)의 옳지 않다고 말함에는 무엇 때문에 또한 틀렸다고 하였는가. 만약 장경의 구하(句下)를 향해 천득(薦得; 領解)하면 자기를 구제함도 마치지 못할 것이며 만약 남천의 구하(句下)를 향해 천득(薦得)하면 가히 조불과 더불어 스승이 되리라.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지만 납승가(衲僧家)가 반드시 이 스스로 긍정해야 비로소 옳나니 한결같이 타인의 구변(口辯)만을 취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의 물음이 이미 한 가지이거늘 무엇 때문에 한 개(장경)는 말하되 옳다 하고 한 개(남천)는 말하되 옳지 않다고 하였는가. 만약 이 통방작자(通方作者)라면 대해탈을 얻은 사람이므로 반드시(必須) 별다른 생애가 있으려니와 만약 이 기경(機境)을 잊지 못한 놈()이라면 결정코 이 양두(兩頭; 不是)에 체재(滯在)하리라. 만약 고금을 명변(明辨)하여 천하인의 혀(舌頭)를 좌단(坐斷)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곧() 이 양착(兩錯)을 명취(明取)해야 비로소 옳다. 후두(後頭; 후면)의 설두의 송에 이르러서는(及至) 또한 다만 이 양착을 송했으니 설두가 활발발(活鱍鱍)한 곳을 제기(提起; )하고자 하였으므로 소이로 이와 같나니 만약 이 피하(皮下)에 피가 있는 사내라면 자연히 언구 가운데를 향해 해회(解會)를 짓지 않으며 나귀 묶는 말뚝 위를 향해 도리를 짓지 않으리라. 어떤 자는 말하되 설두가 마곡을 대신하여 이 양착(兩錯)를 내렸다 하나니 무슨 교섭이 있으리오. 너무 알지 못하나니 고인의 착어가 요관(要關)을 쇄단(鎖斷)하면서 저변(這邊; 이쪽)도 옳다() 하며 나변(那邊; 저쪽)도 옳다 하지만 필경 이 양두(兩頭)에 있지 않는다. 경장주(慶藏主)가 말하되 석장을 가지고 선상을 돈 것과 시()와 불시(不是)를 모두 틀렸다() 하지만 기실(其實)은 또한 여기에 있지 않다 하였다. 너희기 보지 못하느냐, 영가(永嘉)가 조계(曹溪)에 이르러 6조를 친견하되 선상을 세 바퀴 돌고 석장을 한 번(一下) 떨치고 탁연(卓然)히 서자 6조가 이르되 무릇 사문(沙門)이란 것은 삼천 위의와 팔만 세행(*三千威儀 八萬細行)을 갖추어야 하거늘 대덕(大德)은 어느 지방으로부터 왔기에 큰 아만을 내는가 하였으니 무엇 때문에 6조가 도리어 그(영가)가 큰 아만을 낸다고 말했는가. 차개(此箇)는 또한 시()를 설하지 않고 또한 불시(不是)를 설하지 않나니 시()와 불시(不是)가 모두 이 나귀 매는 말뚝인지라 오직 설두가 양착(兩錯)을 내림이 있어 오히려 조금은 상당하다. 마곡이 이르되 장경은 옳다고 말했거늘 화상은 무엇 때문에 옳지 않다고 말하는가 하니 이 노한(마곡)이 눈썹을 아끼지 않아 누두(漏逗; 泄漏)가 적지 않다. 남천이 이르되 장경은 곧 옳지만 이 너는 옳지 않다 하니 남천은 가히 토끼를 보고 매를 놓음이라고 이를 만하다. 경장주(慶藏主)가 이르되 남천이 낭당(郞當; 정신이 느슨하여 振作하지 못함)이 특쇄(忒殺; 너무 심함)하다, 옳지 않다 하고 곧 쉬었어야 하거늘 다시 그에게 과실(過失)을 내어 주어 말하되 이것은 이 풍력의 소전(所轉)인지라 마침내 패괴(敗壞)를 이룬다 하였다. 원각경(*圓覺經)에 이르되 나의 이제의 이 몸은 4(*四大)의 화합(和合)이니 이른 바 발모조치(髮毛爪齒; 머리카락ㆍ털ㆍ발톱 손톱ㆍ치아)와 피육근골(皮肉筋骨; 가죽ㆍ살갗ㆍ근육ㆍ뼈)과 수뇌구색(髓腦垢色; 골수ㆍ뇌ㆍ때ㆍ색)은 다 지()로 돌아가고 타체농혈(唾涕膿血; 침ㆍ눈물ㆍ고름ㆍ피)은 다 물로 돌아가고 난기(暖氣)는 불로 돌아가고 동전(動轉)은 바람으로 돌아가 4대가 각기 흩어지면 금자(今者; 는 조사)의 허망한 몸이 마땅히 어느 곳에 있으리오 하였다. 저 마곡이 석장을 가지고 선상을 돈 것이 이미 이 풍력의 소전(所轉)이라서 마침내 패괴(敗壞)를 이룰진대 그래 말하라 필경 심종(*心宗)을 발명(*發明)하는 일이 어느 곳에 있느냐. 이 속에 이르러선 또한 반드시 이 생철로 부어 만든 개한(箇漢; 這漢)이라야 비로소 옳다. 어찌 보지 못하는가 장졸(*張拙) 수재(*秀才)가 서당장(*西堂藏; 西堂智藏) 선사를 참()하여 물어 이르되 산하대지가 이 있습니까 이 없습니까. 삼세제불이 이 있습니까 이 없습니까. 지장(智藏)이 이르되 있다. 장졸수재가 이르되 틀렸습니다. 지장이 이르되 선배가 일찍이 어떤 사람을 참(; 參見)하고 왔는가. 장졸이 이르되 경산화상(徑山和尙)을 참견하고 왔나니 모갑이 무릇 화()를 묻는 바 있으면 경산이 모두 없다고 하시더이다. 지장이 이르되 선배는 어떤 권속(*眷屬)이 있는가. 장졸이 이르되 하나의 산처(*山妻)와 두 개의 치완(癡頑; 어리석고 완고한 두 자식이니 곧 謙辭)이 있습니다. 또 도리어 묻되 경산은 어떤 권속이 있는가. 장졸이 이르되 경산은 고불(古佛)이시니 화상은 그를 비방하지 말아야 좋을 것입니다. 지장이 이르되 선배가 경산과 흡사함을 얻은 때를 기다렸다가 일체가 없다고 말하겠다. 장졸이 고개 숙일 따름이었다. 대범 작가종사는 요컨대 사람들에게 붙은 것을 떼고 묶인 것을 제거하며 못을 빼고 말뚝을 뽑아주는지라 다만 1()만 고수(固守)함은 옳지 않으므로 좌로 돌고() 우로 돌고() 우로 돌고 좌로 돈다. 단지 앙산을 보아라, 중읍(*中邑)의 처소에 이르러 사계(*謝戒)하는데 중읍이 오는 것을 보고 선상 위에서 박수(拍手)하며 이르되 화상(*和尙)아 하니 앙산이 곧 동쪽에 섰다가 또 서쪽에 서고 또 중심에 선 연후에 사계하여 마치고 도리어 뒤로 물러나 서니 중읍이 이르되 어느 곳에서 이 삼매(*三昧)를 얻어 왔느냐. 앙산이 이르되 조계(曹溪) 인자상(*印子)에서 이탈하여 가지고 왔습니다. 중읍이 이르되 네가 말하라 조계가 이 삼매를 써서 어떤 사람을 접인(接引)하였느냐. 앙산이 이르되 일숙각(*一宿覺)을 접인했습니다. 앙산이 또 다시 중읍에게 물어 이르되 화상은 어느 곳에서 이 삼매를 얻어 오셨습니까. 중읍이 이르되 나는 마조의 처소에서 이 삼매를 얻어 왔다 하였다. 이러한 설화와 같은 것이 어찌 이 하나를 들매 셋을 밝히며 본()을 보매 말()을 쫓아가는 자()가 아니리오. 용아(龍牙)가 시중해 말하되 무릇 참학인(參學人)은 모름지기 조불(祖佛)을 투과(透過)해야 비로소 옳나니 신풍화상(*新豐和尙)이 말씀하시되 조불(祖佛)의 언교(言敎)를 보면 마치 원가(*冤家; 怨讐)라는 (생각을) 내어야 비로소 참학(參學)할 분(; 分限)이 있나니 만약 투과함을 얻지 못하면 곧 조불의 속임을 입어 가리라 하셨다. 때에 어떤 중이 묻되 조불이 도리어 사람을 속일 마음이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용아가 이르되 네가 말하라, 강호(江湖)가 도리어 사람을 격애(隔碍)할 마음이 있느냐 또는 없느냐, 또 이르되 강호가 비록 사람을 격애할 마음이 없지만 스스로 이 시인(時人)이 지나감을 얻지 못하는지라 소이로 강호가 도리어 사람을 격애함을 이루어 가므로 강호가 사람을 격애하지 않는다고 말함을 얻지 못하며 조불이 비록 사람을 속일 마음이 없지만 스스로 이 시인(時人)이 투과함을 얻지 못하는지라 조불이 도리어 사람을 속임을 이루어 가므로 조불이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고 말함을 얻지 못한다. 만약 조불을 투득(透得)해 지나가면 이 사람은 곧 조불을 지나가버린 것이니 또한 모름지기 이는 조불(祖佛)의 뜻을 체득(體得)해야 바야흐로 향상(向上)의 고인과 더불어 동등하려니와 투득치 못하고서 혹() 부처를 배우고 조사를 배울 것 같으면 곧 만겁(萬劫)토록 얻을 기약이 있지 않다. 또 묻되 어떻게 해야 조불에게 속임을 입지 않음을 얻겠습니까. 용아가 이르되 바로 모름지기 자오(自悟)하여 가야 하나니 이 속(조불을 투과한 곳)에 이르러선 모름지기 이와 같아야 비로소 옳다 하였다. 무슨 연고냐, 사람을 위함에는 반드시 철저해야 하며 사람을 죽임엔 반드시 피를 보아야 하여서이다. 남천과 설두가 이 저반(這般; 이런 종류)의 사람인지라 바야흐로 감히 염롱(拈弄)한다. 송해 이르되

 

叢林; 승중(僧衆)이 모여 거처하는 사원을 가리킴. 특히 선종사원(禪宗寺院)을 가리킴. 조정사원2. 총림(叢林) 범어로 빈바나(貧婆那)는 여기에선 이르되 총림임. 대론(大論; 대지도론3)에 이르되 승가(僧伽)는 진()나라 말로 중()이며 많은 비구가 한 곳에서 화합함이니 이 이름이 승가(僧伽). 비유컨대 큰 나무가 빽빽히 모여야 이를 이름해 숲이라 하고 하나하나의 나무는 숲이라고 이름하지 않음과 같으며 마치 하나하나의 비구는 승(. 중 승)이라고 이름하지 않고 여러 비구가 화합해야 고로 승이라 이름함과 같나니 승이 모인 곳이라야 총림이란 이름을 얻는다. 또 대장엄론(대장엄론경1)에 이르되 이와 같은 중승(衆僧)이란 것은 곧 이 승지(勝智)의 총림이니 일체의 모든 선행(善行)이 운집해 그 가운데 있다 …… 지금은 선정(禪庭)을 총림이라 일컬음.

曲錄木床; 곡록목상(曲彔木床)과 같음. 위 제15칙 곡록목상(曲彔木床)을 보라.

三千威儀八萬細行; 불제자가 지수(持守)하는 일상의 위의의 작법이 됨. 앉고 일하고 나아가고 물러서면서 위덕과 의칙(儀則)이 있음을 일컬어 위의라 함. 비구가 응당 지수(持守)하는 바의 250계를 행ㆍ주ㆍ좌ㆍ와 4위의에 배합하면 합계가 1천 계()가 되고 삼세(三世; 일설엔 三聚淨戒)에 순전(循轉)하면 곧 3천 위의(威儀)를 이룸. 다시 신구(身口)의 칠지(七支; 兩舌惡口妄言綺語)와 탐ㆍ진ㆍ치 3독 및 등분(等分) 4종 번뇌에 다시 배합하면 공히 84천을 이룸. 여러 경에서 그 대수(大數)를 들어 다만 팔만세행(八萬細行)으로 일컬음. 정 또 이설(異說)이 있지만 번거로움을 피해 생략함. 가장 일찍 삼천위의의 명목을 채용한 것은 곧 중용의 우우대재(優優大哉)라 예의가 3백이며 위의가 3천이다 [릉엄경문구5. 법화삼대부보주11. 대장법수68].

圓覺經;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이니 모두 1권이며 약칭(略稱)이 원각수다라요의경(圓覺修多羅了義經)ㆍ원각경임. 당대(唐代) 불타다라(佛陀多羅)가 번역했고 무릇 12(). 부처가 문수사리(文殊師利) 12보살을 위해 대원각(大圓覺)의 묘리(妙理)를 설했음. 개원석교록9에 가로되 사문 불타다라는 당()에선 이르되 각구(覺救)니 북인도 계빈(罽賓) 사람이다. 동도(東都) 백마사(白馬寺)에서 원각요의경(圓覺了義經) 1부를 번역했다. 이 경은 최근에 나왔지만 어떤 해인지 알지 못한다. 또 홍도(弘道)를 품고 사망(詐妄)을 힘써 밝혔따. 단지 진전(眞詮)이라 그릇되지 않거늘 어찌 연월(年月)을 갖추어 앎을 빌리려 하는가.

四大; 4대종(大種)의 약칭. 4()라 일컬음. 1. 지대(地大). 2. 수대(水大). 3. 화대(火大). 4. 풍대(風大). 지도론52에 이르되 4대는 있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고로 이름하여 대().

心宗; 선종이니 선종은 직지인심(直指人心)ㆍ명심견성(明心見性)을 제창(提倡)하는지라 고로 일컬음.

發明; 명오(明悟; 환히 깨침). 발현(發現; 숨겨져 있던 것이 바깥으로 드러나 보임. 또는 드러나게 함). 광아 발() ()이다. (). 원각경 보각장. 심화(心花)가 발명(發明)하여 시방찰(十方刹)을 비추다.

張拙; 당대 거사. 일찍이 수재(秀才)에 천거(薦擧)되었음. 관휴(貫休)의 지점(指點; 提說)으로 인해 석상경제(石霜慶諸)를 참알(參謁)했음. 경제가 묻되 수재는 무슨 성()인가. 장졸이 답해 가로되 성은 장()이고 이름은 졸()입니다. 경제가 가로되 교()를 찾아도 오히려 가히 얻지 못하거늘 졸()이 어디로부터 오는가. 장졸이 홀연히 성오(省悟)하고 이에 게()를 드려 가로되 광명이 적조(寂照)하여 하사(河沙)에 두루하니/ 범성(凡聖)과 함령(含靈)이 모두 나의 집이다/ 일념이 나지 않으면 전체가 나타나지만/ 6()이 겨우 동()하면 구름에 가림을 입는다/ 번뇌를 단제(斷除)하면 거듭 병()을 더하고/ 진여로 취향해도 또한 이는 삿됨이다/ 세연(世緣)을 수순(隨順)해도 괘애(罣礙)가 없나니/ 열반과 생사가 제등(齊等)히 공화(空花). 경제의 인가를 입고 드디어 그의 법을 이었음 [연등회요22. 오등회원6].

秀才; 수재는 이 중국 고대 관리를 선발하는 과목이며 또한 일찍이 학교 생원(生員)의 전칭(專稱)으로 지었음. 한무제(漢武帝)가 선관제도(選官制度)를 개혁해 지방 관부(官府)에 인재를 고찰(考察)하고 그리고 추거(推擧; 추천)하게 했으니 곧 찰거(察擧)가 됨. 원봉 4(107) 공경(公卿)과 제주(諸州)에 명해 매년 각기 수재 1명을 거천(擧薦; 천거)하게 했으니 뜻이 우수한 인재가 됨. 동한(東漢)은 광무제(光武帝)의 명휘(名諱)를 피함으로 인해 드디어 무재(茂才)로 개칭했음. 삼국 조위(曹魏) 때 연습(沿襲; 전례를 따라서 함)하여 찰거(察擧; 선발)하면서 다시 수재로 개칭했음. 남북조 때에 이르러 수재를 거천(擧薦)함을 더욱 중시했음. 수대(隋代)에 과거제(科擧制)를 시행(始行)했고 수재과(秀才科)를 설치했음. 당초(唐初) 이 과()를 따라서 설치했고 급제한 자를 일컬어 수재라 했음. 후에 수재과를 폐지했으며 수재는 드디어 일반 독서인(讀書人)의 범칭(泛稱)이 되었음. 송대엔 사자(士子; 지식인)와 응거자(應擧者; 과거에 응시하는 자)의 통칭(統稱)이 되었음. 명대에 일찍이 천거(薦擧)의 법을 한 차례 채용했고 또한 수재를 천거함이 있었음. 명ㆍ청 시기 수재는 또한 부주현(府州縣)의 학생원(學生員)의 명칭으로 전용했음 [백도백과].

西堂藏; 서당지장(西堂智藏)이니 마조도일의 법사. 아래 73칙을 보라.

眷屬; ()은 친애가 되며 속()은 예속이 됨. 친근하면서 순종하는 자를 가리킴. 위에 이미 나왔음.

山妻; ()은 겸사(謙辭).

中邑; 중읍홍은임. 홍은(洪恩) 당대승. 마조도일(馬祖道一)을 사사(師事)해 그 밀전(密傳)을 얻었음. 출세해 낭주(朗州; 지금의 호남 상덕) 중읍에 거주했고 사람들이 호칭하기를 중읍홍은(中邑洪恩)이라 했음. 매번 중이 옴을 보면 입을 두드리며 화화성(和和聲)을 지었음 [오등회원3. 전등록6].

謝戒; 사미가 득도(得度)하여 수계한 후에 계사의 처소에 이르러 예배하고 감사하는 예의니 사계라고 일컬음.

和尙; 전등록6과 오등회원3 중읍장(中邑章)에 모두 화화(和和)로 지어졌음. 화화(和和)는 상성사(象聲詞)니 화()는 희열(喜悅). () 맹교(孟郊)의 택우(擇友) 비록 웃지만 꼭 화()는 아니며 비록 곡하지만 꼭 척(; 슬픔)은 아니다. 또 성음(聲音)이 상응함이니 설문 화() 상응이다. 옥편 화()는 화()가 된다.

三昧; 조정사원5. 삼매(三昧)란 것은 삼()은 가로되 정()이며 매()는 가로되 정(). 또한 이르되 정수(正受)니 이르자면 정정(正定)이 불란(不亂)하여 능히 제법(諸法)을 받아 억지(憶持)하며 간택하므로 고로 이름이 정수(正受). 또한 이르되 등지(等持)니 정정(正定)이 능히 정혜(正慧)를 발생하여 제법을 등지(等持; 가지런히 가짐)하므로 이런 고로 이를 이름해 등지라 함. 번역명의집4. 삼매(三昧) 여기에선 이르되 조직정(調直定)이며 또 이르되 정정(正定)이며 또는 이르되 정수(正受). 규봉소(圭峯疏)에 이르되 모든 수()를 받지 않으므로 정수(正受)라고 이름한다.

印子; 도장(圖章)이니 마음으로써 마음에 인()을 찍음을 전승(傳承)으로 삼는 방식의 선법을 비유로 가리킴.

一宿覺; 당대 승인(僧人) 현각(玄覺)을 가리킴. 위 제1칙 고인(古人)을 보라.

新豐和尙; 양개(良价)를 가리킴. 전등록15 동산양개. 스님이 당 대중(大中; 847-859) 말에 이르러 신풍산(新豐山)에서 학도를 접유(接誘)했다. 그 후 예장(豫章) 고안(高安)의 동산(洞山)에서 성화(盛化)했다.

冤家; 원수(怨讐)니 원()과 원()과 통함. ()는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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