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穴乃臨濟下尊宿 臨濟當初在黃檗會下栽松次 檗云 深山裏栽許多松作什麽 濟云 一與山門作境致 二與後人作*標榜 道了便*钁地一下 檗云 雖然如是 子已喫二十棒了也 濟又打地一下云 *噓噓 檗云 吾宗到汝大興於世 潙山喆云 臨濟恁麽 大似*平地喫交 雖然如是 臨危不變 始稱眞丈夫 檗云 吾宗到汝大興於世 大似*憐兒不覺醜 後來潙山問仰山 黃檗當時 只囑付臨濟一人 別更有在 仰山云 有 只是年代深遠 不欲擧似和尙 潙山云 雖然如是 吾亦要知 但擧看 仰山云 一人指南吳越令行 遇大風卽止 此乃*讖風穴也 穴初參雪峰五年 因請益 臨濟入堂 兩堂首座齊下一喝 僧問臨濟 還有賓主也無 濟云 賓主歷然 穴云 未審意旨如何 峰云 吾昔與巖頭欽山 去見臨濟 在途中聞已遷化 若要會他賓主話 須是參他宗派下尊宿 穴後又見*瑞巖 常自喚*主人公 自云喏 復云 惺惺著 他後莫受人瞞却 穴云 自拈自弄 有什麽難 後在*襄州鹿門與*廓侍者過夏 廓指他 來參南院 穴云 入門須辨主 端的請師分 一日遂見南院 擧前話云 某甲特來親覲 南院云 雪峰古佛 一日見鏡淸 淸問 近離甚處 穴云 自離東來 淸云 還過*小江否 穴云 大舸獨飄空 小江無可濟 淸云 *鏡水圖山 鳥飛不渡 子莫盜聽遺言 穴云 滄溟尙怯*蒙輪勢 *列漢飛帆渡五湖 淸竪起拂子云 爭奈這箇何 穴云 這箇是什麽 淸云 果然不識 穴云 出沒卷舒 與師同用 淸云 *杓卜聽虛聲 熟睡饒譫語 穴云 澤廣藏山理能伏豹 淸云 赦罪放愆 速須出去 穴云 出卽失 乃便出至法堂上 自謂言 大丈夫 公案未了 豈可便休 却回再入方丈 淸坐次 便問 某適來輒呈騃見 冐瀆尊顔 伏蒙和尙慈悲 未賜罪責 淸云 適來從東來 豈不是翠嚴來 穴云 *雪竇親棲*寶蓋東 淸云 不逐*亡羊狂解息 却來這裏念詩篇 穴云 路逢劍客須呈劍 不是詩人莫獻詩 淸云 詩速祕却 略借劍看 穴云 梟首*甑人携劍去 淸云 不獨觸風化 亦自顯顢頇 穴云 若不觸風化 焉明古佛心 淸云 何名古佛心 穴又云 再許允容 師今何有 淸云 東來衲子*菽麥不分 穴云 只聞不以而以 何得抑以而以 淸云 巨浪湧千尋 澄波不離水 穴云 一句截流萬機寢削 穴便禮拜 淸以拂子點三點云 俊哉 且坐喫茶 風穴初到南院 入門不禮拜 院云 入門須辨主 穴云 端的請師分 院左手拍膝一下 穴便喝 院右手拍膝一下 穴亦喝 院擧左手云 這箇卽從闍黎 又擧右手云 這箇又作麽生 穴云 瞎 院遂拈拄杖 穴云 作什麽 某甲奪却拄杖 打著和尙 莫言不道 院便擲下拄杖云 今日被這黃面浙子 鈍置一上 穴云 和尙大似持鉢不得 詐道不飢 院云 闍黎莫曾到此間麽 穴云 是何言歟 院云 好好借問 穴云 也不得放過 院云 且坐喫茶 爾看俊流自是機鋒峭峻 南院亦未辨得他 至次日南院只作平常問云 今夏在什麽處 穴云 鹿門與廓侍者同過夏 院云 元來親見作家來 又云 他向爾道什麽 穴云 始終只敎某甲一向作主 院便打推出方丈云 這般納敗缺底漢 有什麽用處 穴自此*服膺 在南院會下作*園頭 一日院到園裏問云 南方一棒作麽生商量 穴云 作奇特商量 穴云 和尙此間作麽生商量 院拈棒起云 棒下*無生忍 臨機不讓師 穴於是豁然大悟 是時五代*離亂 郢州牧主請師度夏 是時臨濟一宗大盛 他凡是問答垂示 不妨語句*尖新 *攢花簇錦 字字皆有下落 一日牧主 請師上堂 示衆云 祖師心印 狀似鐵牛之機 去卽印住 住卽印破 只如不去不住 印卽是不印卽是 何故不似石人木馬之機 直下似鐵牛之機 無爾撼動處 爾才去卽印住 爾才住卽印破 敎爾百雜碎 只如不去不住 印卽是不印卽是 看他恁麽垂示 可謂鉤頭有餌 是時座下有盧陂長老 亦是臨濟下尊宿 敢出頭來與他對機 便轉他話頭 致箇問端 不妨奇特 道某甲有鐵牛之機 請師不搭印 爭奈風穴是作家 便答他道 慣釣鯨鯢澄巨浸 却嗟蛙步輾泥沙 也是言中有響 雲門云 垂鉤四海只釣獰龍 格外玄機爲尋知已 巨浸乃十二頭水牯牛 爲鉤餌 却只釣得一蛙出來 此語且無玄妙 亦無道理計較 古人道 若向事上覻則易 若向意根下卜度則沒交涉 盧陂佇思 見之不取千載難逢 可惜許 所以道 直饒講得千經論 一句臨機下口難 其實盧陂要討好語對他 不欲行令 被風穴一向用攙旗奪皷底機鋒 一向逼將去 只得沒奈何 俗諺云 陣敗不禁苕菷掃 當初更要討鎗法敵他 等爾討得來 卽頭落地 牧主亦久參風穴 解道佛法與王法一般 穴云 爾見箇什麽 牧主云 當斷不斷返招其亂 風穴渾是一團精神 如水上葫蘆子相似 捺著便轉 按著便動 解隨機說法 若不隨機翻成妄語 穴便下座 只如臨濟有*四賓主話 夫參學之人 大須子細 如賓主相見 有語論賓主往來 或應物見形 全體作用 或把*機權喜怒 或現半身 或乘獅子 或乘象王 如有眞正學人便喝 先拈出一箇*膠盆子 善知識不辨是境 便上他境上 作模作樣 便學人又喝 前人不肯放下 此是*膏肓之病 不堪醫治 喚作賓看主 或是善知識 不拈出物 隨學人問處便奪 學人被奪 抵死不放 此是主看賓 或有學人 應一箇淸淨境 出善知識前 知識辨得是境 把他拋向坑裏 學人言 大好善知識 知識卽云 咄哉不識好惡 學人禮拜 此喚作主看主 或有學人 披枷帶鎖 出善知識前 知識更與他安一重枷鎖 學人歡喜 彼此不辨 呼爲賓看賓 大德山僧所擧 皆是辨魔揀異 知其邪正 不見僧問*慈明 一喝分賓主 照用一時行時如何 慈明便喝 又*雲居弘覺禪師示衆云 譬如獅子捉象亦全其力 捉兔亦全其力 時有僧問 未審全什麽力 雲居云 不欺之力 看他雪竇頌出
●標榜; 標準 榜樣 法式
●钁; 一大鋤 二鏟除 挖掘
●噓噓; 噓 吹也 吹噓也 出氣急曰吹 緩曰嘘
●平地喫交; 又作平地上喫交 謂平白無故地摔跤 譏刺禪人做作多事 其施爲作略不契禪法 徒勞且有害 喫交 跌倒也 交 脚脛相交 說文 交 交脛也
●憐兒不覺醜; 因爲親愛己兒而不覺自己醜態 比喩佛祖亦因爲學人 向第二義門 不覺染汚而拖泥帶水
●讖; 驗也 言將來之驗也 慧琳音義四十六 讖 秘密書也
●瑞巖; 瑞巖師彦 師彦 五代後梁僧 俗姓許 閩中人 幼年出家 巖頭全豁法嗣 出居台州(今浙江臨海)丹丘瑞巖院 坐磐石 終日如愚 每自喚主人公 復應諾 乃曰 惺惺著 他後莫受人謾 師統衆嚴整 江表稱之 卒諡空照禪師 [宋高僧傳十三 五燈全書十三]
●主人公; 禪家提倡自心是佛 自我爲主 因稱自心爲主人公
●襄州; 今湖北省襄樊 荷澤神會 大梅法常出生地 西北地域有雲門宗洞山守初道場
●廓侍者; 守廓侍者 宋代臨濟宗僧 興化存獎法嗣 [聯燈會要十一 五燈會元十一]
●小江; 指越曹娥江 [碧巖錄第三八則種電鈔]
●鏡水圖山; 碧巖錄第三十八則種電鈔云 鏡水乃鏡湖也 越王后妃沈鏡於湖底 因名焉 圖山者秦望山也 始皇所遊地
●蒙輪; 五燈會元十一等諸禪錄皆作艨䑳 卽戰船也
●列漢飛帆; 漢 天也 飛帆之勢高列于天也
●杓卜; 古代求吉凶占卜之方法 古時風俗 用抛杓來占卜 禪家以喩思量卜度 ▲祖庭事苑六 風俗拋杓以卜吉凶者 謂之杓卜
●雪竇; 雪竇山 位於浙江省明州寧波 上已出
●寶蓋; 又在明州 [碧巖錄第三八則種電鈔]
●亡羊; 列子說符 楊子之鄰人亡羊 旣率其黨 又請楊子之豎追之 楊子曰 嘻 亡一羊何追者之衆 鄰人曰 多歧路 旣反 問 獲羊乎 曰 亡之矣 曰 奚亡之 曰 歧路之中又有歧焉 吾不知所之 所以反也 楊子戚然變容 不言者移時 不笑者竟日 ▲祖庭事苑五 亡羊 莊子 臧與糓牧羊 而俱亡羊 問臧何爲 挾策讀書 問穀何事 博塞以遊 亦亡其羊 二人者 業雖不同 其於亡羊一也
●甑人; 甑山人 見下第一〇〇則
●菽麥不分; 緇門警訓註上 左傳 周公有兄而不慧 不能辨菽麥 故不可立云
●服膺; 銘記在心 衷心信奉
●園頭; 禪林中 司掌栽培耕作菜園之職稱
●無生忍; 無生法忍 謂觀諸法無生無滅之理而諦認之 安住且不動心 又作無生忍 無生忍法 大智度論五十 無生法忍者 於無生滅諸法實相中 信受通達 無礙不退 是名無生忍
●離亂; 變亂 常指戰亂
●尖新; 猶新穎 新奇 尖 超出同類的人或物
●攢花簇錦; 形容五色繽紛 繁盛豔麗的景象 同花攢錦簇
●四賓主; 一賓看主(賓乃客之意) 卽學人透知師家之機略 二主看賓 卽師家能透知學人之內心 三主看主 卽具有禪機禪眼者相見 四賓看賓 卽不具眼目之兩者相見 風穴延沼禪師 將上記四語改稱爲賓中主 主中賓 主中主 賓中賓 其義亦同
●機權; 謂隨機而用權以應之機 機 事物變化的原由 莊子外篇至樂 萬物皆出於機 皆入於機 成玄英疏 機者發動 所謂造化也 禮記大學 其機如此 鄭玄注 機 發動所由也 權 佛敎名詞 方便的異名 廣雅 錘謂之權 廣韻 權 稱錘也
●膠盆子; 盛膠之盆 喩文字葛藤 子 後綴
●膏肓之病; 必死之病 禪林疏語考證二 膏肓 左(左典)成(成公)十年(前581) 晉公疾病 求醫於秦 秦伯使醫緩爲之 未至 公夢疾爲二竪子曰 彼良醫也 懼傷我 我焉逃之 其一曰 居肓之上膏之下 若我何 醫至曰 疾不可爲也
●慈明; 慈明楚圓 楚圓(986-1039) 宋代臨濟宗僧 全州淸湘(廣西桂林)人 俗姓李 少爲儒生 潛心擧業 二十二歲迴心向道 於湘山隱靜寺得度 未久遊襄沔之間 與守芝谷泉結伴入洛陽 聞善昭之道望爲天下第一 遂赴汾州 依止二年 未許入室 每見必詬罵 或毁詆諸方 所訓亦皆流俗鄙事 師一夕訴之 語未竟 昭熟視而罵曰 是惡知識 敢裨販我 擧杖逐之 師欲伸解 昭掩其口 師忽大悟曰 是知臨濟道出常情 遂服役約十二年(一說七年) 盡領其旨 後至幷州 訪唐明智嵩 更與當世名士楊大年李遵勗 時聚論道 後欲歸鄕省母 過筠州(四川) 於洞山見曉聰 依止三年 又遊仰山 時楊大年寄書宜春太守黃宗且 請師住於袁州(江西)南源廣利寺 居三年 辭而省母 又謁神鼎洪諲 洪諲大加讚賞 由是聲名大揚 旣主潭州(湖南)道吾之席 次住石霜山崇勝寺 又轉南嶽福嚴寺 後遷潭州興化寺 寶元二年正月 於潭州興化寺示寂 壽五十四 諡號慈明禪師 法嗣五十人中 以黃龍慧南 楊岐方會最爲知名 各成一派 遺有石霜楚圓禪師語錄一卷(慧南重編) [續傳燈錄三 禪林僧寶傳二十一]
●雲居弘覺禪師示衆云; 雲居弘覺 唐代曹洞宗僧道膺(835-902) 住雲居山(江西建昌西南) 敕諡弘覺禪師 傳燈錄十七雲居道膺章及諸禪綠無此語 五燈會元六 昔有一老宿 因僧問 師子捉兔亦全其力(云云)
풍혈은 곧 임제하(臨濟下)의 존숙이다. 임제가 당초(當初)에 황벽회하(黃檗會下)에 있으면서 소나무를 심던 차에 황벽이 묻되 깊은 산속에 허다한 소나무를 심어서 무엇하려느냐. 임제가 이르되 하나는 산문에 경치(境致)를 지어 줌이며 둘은 후인에게 표방(*標榜)을 지어 줌입니다. 말을 마치고는 땅에다 한 번(一下) 곽(*钁; 괭이로 파다)했다. 황벽이 이르되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으나 자네는 이미 20방(棒) 먹었다. 임제가 또 한 번 땅을 때리고 이르되 허허(*噓噓). 황벽이 이르되 오종(吾宗)이 너에 이르러 세상에 대흥하리라. 위산철(潙山喆; 慕喆)이 이르되 임제의 이러함이 평지끽교(*平地喫交)와 매우 비슷하다(두 번 打地한 것을 拈함).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으나 위험에 임해서 변하지 않아야 비로소 참다운 장부라고 일컫는다. 황벽이 이르되 오종(吾宗)이 너에 이르러 세상에 대흥하리라 하니 아이를 귀여워하느라 추태(醜態)를 깨닫지 못함(*憐兒不覺醜)과 매우 흡사하다. 후래에 위산이 앙산에게 묻되 황벽이 당시에 다만 임제 1인에게 촉부(囑付)했는가 따로 다시 어떤 이가 있는가. 앙산이 이르되 있습니다만 다만 이 연대(年代)가 심원(深遠)하여 화상에게 거사(擧似)하고 싶지 않습니다. 위산이 이르되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으나 내가 또한 알고 싶으니 단지 들어 보아라. 앙산이 이르되 1인이 지남(指南)하여 오월(吳越)에서 영(令)을 행하다가 대풍(大風)을 만나면 곧 그칠 것입니다 했으니 이것은 곧 풍혈(風穴)을 참(*讖)한 것이다. 풍혈이 처음 설봉을 참(參)한지 5년에 인하여 청익(請益)하되 임제가 입당(入堂)하매 양당(兩堂; 東堂ㆍ西堂)의 수좌가 일제히 1할(喝)을 내리자 중이 임제에게 묻되 도리어 빈주(賓主)가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임제가 이르되 빈주가 역연(歷然)하다. 풍혈이 이르되 미심(未審)합니다,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설봉이 이르되 내가 지난날 암두ㆍ흠산과 함께 가서 임제를 뵙고자 했는데 도중에 있으면서 이미 천화(遷化)하셨다 함을 들었다. 만약 그의 빈주화(賓主話)를 알고자 할진대 모름지기 이는 그 종파하(宗派下)의 존숙에게 참문(參問)해야 하리라 하였다. 풍혈이 또 서암(*瑞巖)을 참견(參見)하니 늘 스스로 주인공(*主人公)을 부르고는 자기가 이르되 스스로 이르되 낙(喏; 예, 대답하는 소리). 다시 이르되 성성착(惺惺著; 著은 조사)하여 타후(他後)에 남의 속임(瞞却; 却은 조사)을 받지 말아라 하거늘 풍혈이 이르되 자념자롱(自拈自弄)하니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하였다. 후에 양주(*襄州) 녹문(鹿門)에 있으면서 곽시자(*廓侍者)와 더불어 과하(過夏)하는데 곽(廓)이 그에게 지시하므로 남원(南院; 慧顒이니 興化存獎의 法嗣)을 내참(來參)하였다. 풍혈이 이르되 입문(入門)하면 모름지기 주(主)를 분변해야 하나니 단적(端的; 진실. 확실)을 스님이 분변함을 청합니다 하였다. 어느 날 드디어 남원을 뵙고 전화(前話; 설봉에게 물었던 賓主話)를 들고 이르되 모갑이 특별히 와서 친근(親覲)합니다. 남원이 이르되 설봉은 고불(古佛)이로다 하였따. 어느 날 경청(鏡淸; 道怤니 설봉의 法嗣)을 참견하니 경청이 묻되 최근에 어느 곳을 떠났느냐. 풍혈이 이르되 동(東; 明州니 鏡淸은 越州에 있음)으로부터 떠나왔습니다. 경청이 이르되 도리어 소강(*小江)을 지나왔느냐. 풍혈이 이르되 대가(大舸; 큰 배)는 홀로 허공에 나부끼는지라 소강(小江)은 가히 건널 게 없습니다. 경청이 이르되 경수와 도산(*鏡水圖山)에는 새도 날아 건너지 못하거늘 자네는 유언(遺言)을 도청(盜聽)하지 말아라. 풍혈이 이르되 창명(滄溟; 四海)이 오히려 몽륜(*蒙輪)의 기세를 겁내지만 열한의 비범(*列漢飛帆)은 오호(五湖)를 건넙니다. 경청이 불자를 세워 일으키고 이르되 이것은 어찌하겠는가. 풍혈이 이르되 이것은 이 무엇입니까. 경청이 이르되 과연 알지 못하는구나. 풍혈이 이르되 출몰권서(出沒卷舒)를 스님과 함께 동용(同用)합니다. 경청이 이르되 작복(*杓卜)하여 헛된 소리를 듣는 것이며 숙수(熟睡; 푹 자다)하면서 풍요한 헛소리(譫; 헛소리 섬)를 지껄이는구나. 풍혈이 이르되 못이 넓으면 산을 감추고 이치로 능히 표범을 굴복시킵니다. 경청이 이르되 죄를 사면(赦免; 赦)하고 허물(愆; 음 건)을 방면(放免; 放)하니 속히 나감을 써라(須). 풍혈이 이르되 나가면 곧 잃습니다 하고 이에 곧 나가서 법당상(法堂上)에 이르러 스스로 일러 말하되 대장부가 공안을 깨치지 못했거늘 어찌 가히 곧 쉬리오 하고 곧 돌아와서 방장에 다시 들어갔다. 경청이 앉은 차라 곧 묻되 모(某)가 적래(適來; 조금 전)에 번번이(輒) 어리석은 견해(騃見)를 보여드려 존안(尊顔)을 모독(冐瀆)하였으나 화상의 자비를 복몽(伏蒙)하여 죄책(罪責)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경청이 이르되 적래에 동쪽으로부터 왔다 하였으니 어찌 이 취암(翠嚴)에서 온 게 아니겠는가. 풍혈이 이르되 설두(*雪竇; 설두산)가 친히 보개(*寶蓋)의 동쪽에 서식(棲息)합니다. 경청이 이르되 망양(*亡羊)을 쫓아가는 광해(狂解)도 쉬지 못했거늘 도리어 이 속에 와서 시편(詩篇)을 외우는가(念). 풍혈이 이르되 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모름지기 검을 주어야(呈) 하고 이 시인(詩人)이 아니면 시를 바치지 않습니다. 경청이 이르되 시는 속히 숨겨버리고(祕却) 조금(略) 검을 빌려주어 보아라(看; 저본에 峰으로 지어졌음. 他本에 의해 고쳤음). 풍혈이 이르되 효수증인(梟首*甑人)이 검을 가지고 갔습니다. 경청이 이르되 유독(惟獨; 獨) 풍화(風化; 풍습과 교화)만 촉오(觸忤; 觸)함이 아니라 또한 스스로 만한(顢頇; 糊塗)을 나타내는구나. 풍혈이 이르되 만약 풍화를 촉오하지 않는다면 어찌 고불의 마을을 밝히겠습니까. 경청이 이르되 무엇을 고불의 마음이라고 이름하는가. 풍혈이 또 이르되 거듭 윤용(允容; 允許容納)을 허락하시나 스님은 지금 무엇이 있습니까. 경청이 이르되 동에서 온 납자가 숙맥도 분간하지 못하는구나(*菽麥不分). 풍혈(會元11에 풍혈 2자가 없음)이 이르되 다만 마치지(以는 已와 통함)못하고서 마쳤다고 함을 듣나니 어찌 마치고나서 마친 것을 억누름을 얻으리오. 경청이 이르되(會元에 穴云으로 지어졌음) 거랑(巨浪)이 천심(千尋; 1尋은 8尺)을 솟구치지만 징파(澄波)는 물을 여의지 못한다. 풍혈이 이르되(會元에 淸云으로 지어졌음) 1구(句)로 흐름을 절단하면 만기(萬機)가 침삭(寢削)합니다 하고 풍혈이 곧 예배했다. 경청이 불자(拂子)로써 3점(點)을 점 찍고 이르되 준재(俊哉)로다, 다만 앉아서 끽다(喫茶)하게나 하였다. 풍혈이 처음 남원에 이르러 문에 들어가 예배하지 않자 남원이 이르되 문에 들어왔으면 모름지기 주인(主)을 분변해야 하리라. 풍혈이 이르되 단적(端的; 진실)을 스님이 분변하시기를 청합니다. 남원이 왼손으로 한 번(一下) 무릎을 쳤다 풍혈이 곧 할(喝)했다. 남원이 오른손으로 한 번 무릎을 쳤다. 풍혈이 또 할했다. 남원이 왼손을 들고 이르되 이것(這箇)은 곧 사리(闍黎)를 좇겠지만, 또 오른손을 들고 이르되 이것(這箇)은 또 어찌하겠는가. 풍혈이 이르되 눈 멀었습니다. 남원이 드디어 주장자를 집었다. 풍혈이 이르되 무엇하시렵니까, 모갑이 주장자를 뺏아버려서 화상을 때리더라도(打著) 도가 아니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남원이 곧 주장자를 던져 떨어뜨리고 이르되 금일 이 황면(黃面) 절자(浙子; 浙江 남자)에게 일상(一上; 一回) 둔치(鈍置; 괴롭히다)됨을 입었다. 풍혈이 이르되 화상은 발우를 소지(所持; 持)함도 얻지 못하고서 배고프지 않다고 거짓말(詐道)하심과 매우 흡사합니다. 남원이 이르되 사리(闍黎)가 일찍이 차간(此間)에 이르지 않았는가. 풍혈이 이르되 이 무슨 말씀입니까. 남원이 이르되 차문(借問; 물어봄)을 매우 좋아하노라(好好). 풍혈이 이르되 또한 방과(放過; 放棄)함을 얻지 말아야 합니다. 남원이 이르되 다만 앉아서 차나 마시게 하였다. 너희가 보아라, 준류(俊流; 靈利漢. 流는 品類)는 스스로 이 기봉이 초준(峭峻)하다. 남원도 또한 그를 분변함을 얻지 못했다. 다음날에 이르러 남원이 다만 평상문(平常問)을 지어 이르되 금년 여름은 어느 곳에 있었는가. 풍혈이 이르되 녹문(鹿門)에서 곽시자(廓侍者)와 더불어 함께 여름을 지냈습니다. 남원이 이르되 원래 작가를 친견하고 왔구나 하고 또 이르되 그가 너를 향해 무어라고 말하더냐. 풍혈이 이르되 시종(始終) 다만 모갑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작주(作主)하라 하더이다. 남원이 문득 때리고 방장에서 밀어내며(推出; 퇴출) 이르되 저반(這般; 이런 종류)의, 패결(敗缺; 受挫)을 용납하는 놈을 어디에 쓸 곳이 있으리오. 풍혈이 이로부터 복응(*服膺)하고 남원의 회하(會下)에 있으면서 원두(*園頭)가 되었다. 어느 날 남원이 채원(菜園; 園) 안에 이르러 물어 이르되 남방에선 1방(棒)을 어떻게 상량(商量)하는가. 풍혈이 이르되 기특하다는 상량을 짓습니다 하고는 풍혈이 이르되 화상의 차간(此間)에선 어떻게 상량합니까. 남원이 방(棒)을 집어 일으키면서 이르되 방하(棒下)의 무생인(*無生忍)은 기(機)에 임해서는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다. 풍혈이 이에서 활연(豁然)하여 대오했다. 이때 오대(五代)는 이란(*離亂)했는데 영주(郢州) 목주(牧主)가 스님에게 여름을 지낼 것을 청하니 이때 임제 1종(宗)이 대성(大盛)했다. 그(풍혈)의 무릇 이 문답수시(問答垂示)가 어구(語句)의 첨신(*尖新)함이 찬화족금(*攢花簇錦)에 방애되지 않아 글자마다 다 하락(下落; 落著處)이 있었다. 어느 날 목주가 스님의 상당(上堂)을 청하자 시중하여 이르되 조사의 심인(心印)은 철우지기(鐵牛之機) 와 상사(狀似; 類似)하여 떼면(去) 곧 인(印)이 머물고 머물면(住) 곧 인(印)이 깨어진다. 지여(只如) 떼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면 인(印)을 침이 곧 옳으냐, 인을 치지 않음이 곧 옳으냐 하였으니 무슨 연고로 석인(石人)이나 목마(木馬)의 기(機)와 상사(似)하다 하지 않고 직하(直下; 즉각)에 철우지기(鐵牛之機)와 상사하다 했는가. 너희가 감동(撼動; 흔들어 움짐이다)할 곳이 없다. 너희가 겨우 떼면(去) 곧 곧 인(印)이 주(住)하고 너희가 겨우 머물면(住) 곧 인(印)이 깨어지나니(破) 너희를 백잡쇄(百雜碎; 산산조각나다)케 함이다. 지여(只如) 불거부주(不去不住)한다면 인(印)을 침이 곧 옳으냐, 인을 치지 않음이 곧 옳으냐 하니 그의 이러히 수시(垂示)함을 보건대 가위(可謂) 갈고리(鉤頭; 낚시의 갈고리)에 먹이(餌)가 있다. 이때 좌하(座下)에 노파장로(盧陂長老)가 있었으니 역시(亦是) 임제하의 존숙이다. 감히 출두하여 와서 그(풍혈)와 대기(對機)하되 곧 그의 화두를 돌려 저(箇) 문단(問端)을 보내니(致; 送詣) 기특함에 방애되지 않는다. 말하되 모갑이 철우지기(鐵牛之機)가 있습니다. 스님의 탑인(搭印; 인을 치다)하지 않으심을 청합니다 하였으나 풍혈이 이 작가임을 어찌하랴. 곧 그에게 답해 말하되 고래를 낚아 거침(巨浸; 大海)을 맑힘에 익숙한지라 도리어 개구리 걸음으로 진흙 모래에 허우적거림(輾은 말 땅에 구를 전)을 탄식한다 하니 또한 이 언중(言中)에 음향이 있다. 운문이 이르되 사해에 갈고리(낚시의 갈고리)를 내림(垂)은 다만 영룡(獰龍)을 낚음이며 격외(格外)의 현기(玄機)는 지기(知已)를 찾기 위함이다 하였다. 거침(巨浸)에는 이에 12두(頭; 量詞)의 수고우(水牯牛; 물소)로 갈고리(낚시의 갈고리)의 먹이로 삼거늘 도리어 다만 1와(蛙; 개구리)가 출래(出來)함을 조득(釣得)했다 함이니 이 말은 또한(且) 현묘(玄妙)도 없고 도리와 계교(計較)도 없다 함이다. 고인이 말하되 만약 사상(事上)을 향해 엿본다면 곧 쉽지만 만약 의근(意根) 아래를 향해 복탁(卜度)한다면 곧 교섭이 없다 하였다. 노파(盧陂)가 우두커니 서서 생각했으니 이를 보고도 취하지 않으면 천재(千載)에도 만나기 어렵거늘 가석하다(可惜許) 하리라. 소이로 말하되 직요(直饒; 縱然) 천(千) 경론을 강득(講得)하더라도 1구(句) 임기(臨機)하여 하구(下口; 開口)하기 어렵다 하였다. 기실(其實)은 노파(盧陂)가 호어(好語)를 찾아 그(풍혈)에게 응대하고자 하고 영(令)을 행하려고 하지 않은지라 풍혈의, 일향(一向; 한결같음) 참기탈고(攙旗奪皷)의 기봉을 써서 일향(一向) 핍박하여 나아감(將去)을 입었으므로 다만 교섭 없음을 얻었다. 속언(俗諺; 속담)에 이르되 진(陣; 戰陣)이 패하면 초추(苕菷; 비)로 쓰는 것을 금하지 못한다(사상자가 많음을 형용) 하니 당초(當初)에 다시 창법(鎗法)을 찾아 그(풍혈)에게 대적(對敵)하려고 했다면 그(노파)의 찾아 얻어 옴(討得來)을 기다렸다가(等) 곧 머리(노파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목주(牧主)도 또한 풍혈을 구참(久參)한지라 이해하여 말하되 불법과 왕법(王法)이 일반입니다. 풍혈이 이르되 네가 저(箇) 무슨 도리를 보았는가. 목주가 이르되 마땅히 자를 것을 자르지 않으면(當斷不斷) 도리어 그 난(亂)을 초래합니다. 풍혈이 온통(渾) 이 한 덩어리의 정신(精神)인지라 마치 물 위의 호로자(葫蘆子; 호리병박. 子는 조사)와 상사하여 날착(捺著; 누르다, 著은 조사)하면 곧 돌고 안착(按著; 만지다. 누르다)하면 곧 움직여 수기설법(隨機說法)할 줄 아나니 만약 수기(隨機; 근기를 따르다)하지 않으면 도리어 망어를 이루리라. 풍혈이 곧 하좌했다. 지여(只如) 임제에 사빈주화(*四賓主)가 있다. 무릇 참학하는 사람은 매우 자세(子細)함을 써야 하나니 빈주가 상견함과 같아서 빈주의 왕래를 어론(語論)함이 있으니 혹은 사물에 응해 형체를 나타내어(見) 전체로 작용하며 혹은 기권(*機權)을 잡아 희노(喜怒)하며 혹은 반신을 나타내며 혹은 사자를 타며 혹은 상왕(象王)을 탄다. 예컨대(如) 어떤 진정(眞正)한 학인이 곧 할(喝)하여 먼저 한 개의 교분자(*膠盆子; 아교 동이)를 집어내매 선지식이 이 경계인 줄 분변하지 못하여 곧 그 경상(境上)에 올라 모범을 짓고 양식을 짓는다(作模作樣). 곧 학인이 또 할한다. 앞의 사람이 놓기(放下)를 긍정하지 않으면 이것은 이 고황지병(*膏肓之病)인지라 의치(醫治)를 감당하지 못하나니 객이 주인을 본다(賓看主)고 불러 짓는다. 혹은 이 선지식이 물건을 집어내지 않고 학인의 묻는 곳을 따라 곧 뺏는다. 학인이 빼앗김을 입으면 죽음에 이르더라도 놓지 않는다. 이것이 이 주인이 객을 봄(主看賓)이다. 혹은 어떤 학인이 한 개의 청정한 경계에 응하여 선지식 앞에 내면 선지식이 이 경계임을 변득(辨得)하고는 그것을 잡아 구덩이 속을 향해 던진다. 학인이 말하되 매우 훌륭한(大好) 선지식이십니다. 선지식이 곧 이르되 돌재(咄哉)로다, 좋고 나쁨을 알지 못하는구나. 학인이 예배하면 이것을 주인이 주인을 본다(主看主)고 불러 짓는다. 혹은 어떤 학인이 칼을 쓰고 차꼬를 가지고 선지식 앞에 나온다. 선지식이 다시, 그에게 한 번 거듭된 칼과 차꼬를 안치하여 주매 학인이 환희하나니 피차 분변하지 못하므로 객이 객을 본다(賓看賓)고 불러 짓는다. 대덕이여, 산승(임제)이 든 바는 다 이 마(魔)를 분변하고 이(異)를 간택(辨魔揀異)하여 그 삿됨과 바름을 아는 것이다(이상은 임제의 4빈주화를 인용한 것). 보지 못하는가, 중이 자명(*慈明)에게 묻되 1할(喝)로 빈주를 나누고 조용(照用)을 일시에 행할 때는 어떻습니까. 자명이 곧 할했다. 또 운거 홍각선사가 시중해 이르되(*雲居弘覺禪師示衆云) 비여(譬如) 사자가 코끼리를 잡을 적에도 그 힘을 다하며(全) 토끼를 잡을 적에도 그 힘을 다한다. 때에 어떤 중이 묻되 미심합니다, 무슨 힘을 다합니까. 운거가 이르되 속이지 않는 힘이다. 저 설두의 송해 냄을 보아라.
●標榜; 표준, 방양(榜樣), 법식.
●钁; 1. 대서(大鋤; 괭이). 2. 깎아 제거함. 알굴(挖掘; 파내다. 파다)임.
●噓噓; 허(噓)는 취(吹)임. 취허(吹噓)임. 출기(出氣)가 급함을 가로되 취(吹)며 느림을 가로되 허(嘘)임.
●平地喫交; 또 평지상끽교(平地上喫交)로 지음. 이르자면 평백무고지(平白無故地; 조금의 이유도 없음. 공연히)에서 솔교(摔跤; 넘어지다. 씨름)함이니 선인(禪人)이 많은 일을 지어 그 시위(施爲)와 작략(作略)이 선법에 맞지 않으며 헛수고에 또 해(害)가 있음을 기자(譏刺; 헐뜯고 비꼼)함. 끽교(喫交)는 미끄러져 거꾸러짐임. 교(交)는 다리 정강이가 서로 꼬임임. 설문(說文) 교(交) 정강이가 꼬임이다.
●憐兒不覺醜; 자기의 아이를 친애함으로 인해 자기의 추태를 깨닫지 못함이니 불조도 또한 학인을 위함으로 인해 제2의문(第二義門)을 향하는지라 불각에 염오(染汚)하여 타니대수(拖泥帶水)함에 비유.
●讖; 험(驗; 증험)임. 장래의 험(驗)을 말함. 혜림음의46 참(讖) 비밀서(祕密書)다.
●瑞巖; 서암사언임. 서암(師彦) 오대 후량승. 속성은 허며 민중(閩中) 사람. 어린 나이에 출가했고 암두전활(巖頭全豁)의 법사임. 출세해 대주(台州; 지금의 절강 임해) 단구(丹丘) 서암원(瑞巖院)에 거주하면서 반석에 앉아 종일 우둔한 것 같았고 매번 스스로 주인공을 부르고 다시 응낙하고는 곧 가로되 성성착(惺惺著)하라, 타후에 남의 속임을 받지 말아라 했음. 스님은 통중(統衆)하면서 엄정(嚴整)했고 강표(江表)에서 칭찬했음. 졸시(卒諡)는 공조선사 [송고승전13. 오등전서13].
●主人公; 선가에선 자기의 마음이 이 부처라고 제창(提倡; 提唱)하며 자아(自我)를 주(主)로 삼는지라 인하여 자기의 마음을 일컬어 주인공이라 함.
●襄州; 지금의 호북성 양번(襄樊)이니 하택신회와 대매법상의 출생지며 서북지역에 운문종 동산수초의 도량이 있음.
●廓侍者; 수곽시자(守廓侍者)니 송대 임제종승이며 흥화존장(興化存獎)의 법사 [연등회요11. 오등회원11].
●小江; 월() 조아강(曹娥江)을 가리킴 [벽암록 제38칙 종전초]
●鏡水圖山; 벽암록 제38칙 종전초에 이르되 경수(鏡水)는 곧 경호(鏡湖)다. 월왕의 후비(后妃)가 거울을 호수 밑에 빠뜨린지라 인하여 이름했다. 도산(圖山)이란 것은 진망산(秦望山)이니 시황(始皇)이 노닐던 바의 땅이다.
●蒙輪; 오등회원11 등 여러 선록에 모두 몽륜(艨䑳)으로 지어졌음. 곧 전선(戰船)임.
●列漢飛帆; 한(漢)은 천(天)이니 비범(飛帆)의 기세가 하늘에 높이 나열함임.
●杓卜; 고대 길흉을 구하는 점복의 방법이니 고시의 풍속에 포작(拋杓; 구기를 던짐)을 써서 점복했음. 선가에서 사량복탁(思量卜度)함에 비유함. ▲조정사원6. 풍속에 구기를 던져 길흉을 점치는 것을 이를 일러 작복(杓卜)이라 함.
●雪竇; 설두산이니 절강성 명주(明州) 영파(寧波)에 위치함. 위에 이미 나왔음.
●寶蓋; 또 명주(明州)에 있음 [벽암록 제38칙 종전초].
●亡羊; 열자 설부(說符). 양자(楊子)의 이웃 사람이 망양(亡羊; 양을 잃음)했다. 이윽고 그 무리를 거느리고 또 양자의 아이(豎)를 요청하여 그것을 추격했다. 양자가 가로되 의(嘻; 아. 감동하여 내는 소리). 한 마리의 양이 도망갔거늘 왜 추격하는 자가 많은가. 이웃 사람이 가로되 갈림길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돌아오자 묻되 양을 획득했는가. 가로되 놓쳤습니다. 가로되 어찌하여 그것을 놓쳤는가. 가로되 갈림길 가운데 또 갈림길이 있은지라 내가 간 곳을 알지 못했습니다. 소이로 돌아왔습니다. 양자가 슬퍼하며 변용(變容; 안색을 바꿈)했다. 말하지 않은 게 이시(移時; 一段의 시간을 지남)였으며 웃지 않은 것이 하루 종일이었다. ▲조정사원5. 망양(亡羊) 장자(莊子) 장(臧)과 곡(糓)이 양을 치면서 다 양을 망실했다. 장에게 묻되 무엇을 했느냐. 책(策; 冊이니 종이가 없던 시절 대나무에 글을 새겼음)을 끼고 독서했다. 곡에게 묻되 무슨 일을 했느냐. 박새(博塞; 도박. 雙六. 주사위놀이)하며 놀다가 또한 양을 망실했다. 두 사람이 업은 비록 같지 않으나 그 양을 망실한 것은 하나다.
●甑人; 증산인(甑山人)이니 아래 제100칙을 보라.
●菽麥不分; 치문경훈주상. 좌전 주공(周公)에게 형이 있었는데 불혜(不慧; 지혜가 없음)며 능히 숙맥(菽麥; 콩과 보리)을 분변하지 못하는지라 고로 가히 세우지 못했다.
●服膺; 명기(銘記)하여 마음에 둠이니 충심(衷心; 속에서 眞情으로 우러나는 마음)으로 신봉함.
●園頭; 선림 중에서 채원(菜園)의 재배와 경작을 사장(司掌)하는 직칭(職稱).
●無生忍; 무생법인(無生法忍)임. 이르자면 제법의 무생무멸의 이치를 관하여 그것을 체인(諦認; 자세하게 분변하고 인식함)하고 안주하면서 또 마음을 움직이지 않음. 또 무생인(無生忍)ㆍ무생인법(無生忍法)으로 지음. 대지도론50. 무생법인이란 것은 생멸이 없는 제법의 실상 중에서 신수(信受)하여 통달하고 무애하면서 불퇴하나니 이 이름이 무생인(無生忍)이다.
●離亂; 변란(變亂). 늘 전란(戰亂)을 가리킴.
●尖新; 신영(新穎; 새롭고 별다른 풍치)ㆍ신기(新奇)와 같음. 첨(尖)은 동류를 초출하는 사람이나 물건.
●攢花簇錦; 오색이 빈분(繽紛; 어지럽게 흩어지는 모양)하면서 번성하고 염려(豔麗; 선명하고 미려함)한 경상(景象)을 형용. 화찬금족(花攢錦簇)과 같음.
●四賓主; 1. 빈간주(賓看主; 賓은 곧 客의 뜻) 곧 학인이 사가(師家)의 기략(機略)을 투명하게 앎. 2. 주간빈(主看賓) 곧 사가가 능히 학인의 내심을 투명하게 앎. 3. 주간주(主看主) 곧 선기와 선안(禪眼)을 갖추어 있는 자가 상견함. 4. 빈간빈(賓看賓) 곧 안목을 갖추지 못한 양자가 상견함. 풍혈연소화상이 상기(上記)의 4어(語)를 가지고 개칭하여 빈중주ㆍ주중빈ㆍ주중주ㆍ빈중빈으로 삼았으나 그 뜻은 또한 같음.
●機權; 이르자면 근기를 따라 권(權)을 써서 그에 응하는 기(機)임. 기(機)는 사물의 변화의 원유(原由). 장자 외편 지락. 만물이 모두 기(機)에서 나와 모두 기로 들어간다. 성현영(成玄英) 소(疏) 기(機)란 것은 발동이다. 이른 바 조화이다. 예기 대학 그 기(機)가 이와 같다. 정현 주(注) 기(機)는 발동의 소유(所由; 유래하는 곳)이다. 권(權)이란 불교의 명사니 방편의 다른 이름임. 광아 추(錘)를 일러 권(權)이라 한다. 광운 권(權) 칭추(稱錘; 저울의 추)다.
●膠盆子; 아교를 담은 동이니 문자와 갈등에 비유함. 자는 후철.
●膏肓之病; 필사(必死)의 병. 선림소어고증2. 고황(膏肓) 좌(左典) 성(成公) 10년(前 581) 진공(晋公)이 질병에 걸려 진(秦)에 의원을 구하자 진백(秦伯)이 의원으로 하여금 그것을 완화하게 하였다. 이르지 아니해서 진공의 꿈에 질병이 두 수자(竪子. 더벅머리. 子는 조사)가 되어 가로되 그는 양의(良醫)이므로 나를 다치게 할까 두렵나니 내가 어찌 그에게서 도망하리오. 그 하나가 가로되 황(肓. 명치 황)의 위와 고(膏. 명치 끝 고)의 아래에 거처한다면 나를 어찌 하겠는가. 의원이 이르러 가로되 질병을 가히 다스리지 못합니다 하였다.
●慈明; 자명초원임. 초원(楚圓) (986-1039) 송대 임제종승. 전주(全州) 청상(淸湘; 廣西 桂林)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이(李). 어릴 적에 유생(儒生)이 되어 거업(擧業; 科擧에 應試하는 일)에 마음을 담갔는데 22세에 마음을 돌려 도(道)로 향했으며 상산(湘山) 은정사(隱靜寺)에서 득도(得度)했음. 오래지 않아 양면(襄沔)의 사이를 유람하다가 수지(守芝; 善昭의 法嗣)ㆍ곡천(谷泉; 善昭의 法嗣)과 결반(結伴)하여 낙양(洛陽)에 들어갔음. 선소(善昭; 임제하 5세)의 도가 천하제일(天下第一)을 바라본다 함을 듣고 드디어 분주(汾州)에 다다라 2년을 의지(依止)했으나 입실(入室)을 허락하지 않았음. 매번 보기만 하면 반드시 꾸짖고 욕하였으며 혹은 제방(諸方)을 헐뜯고 흉보았으며 가르치는 바는 또한 다 유속(流俗; 世俗)의 비사(鄙事)였음. 스님이 어느 날 저녁 이를 하소연했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소가 찬찬히 보다가 욕하며 가로되 이 악지식(惡知識)이 감히 나를 비판(裨販; 裨는 附)하느냐, 주장자를 들어 쫓아내자 스님이 해설(解說)을 펴려고 하는데 선소가 그 입을 막았음. 스님이 홀연히 대오하고 가로되 이로 알지니 임제의 도가 상정(常情; 범상한 정)을 초출했다. 드디어 약 12년(일설엔 7년)을 복역(服役)하면서 그 지취를 다 영오(領悟)했음. 후에 병주(幷州)에 이르러 당명지숭(唐明智嵩; 首山省念의 法嗣)을 방문했고 다시 당세(當世)의 명사(名士) 양대년(楊大年)ㆍ이준욱(李遵勗)과 때때로 모여 도를 논했음. 후에 귀향하여 성모(省母; 모친을 살핌)하려고 균주(筠州; 四川)를 지나다가 동산(洞山)에서 효총(曉聰)을 뵙고 3년을 의지(依止)했음. 또 앙산(仰山)을 유람했는데 때에 양대년(楊大年)이 의춘태수(宜春太守) 황종차(黃宗且)에게 서신을 기탁해 스님을 원주(袁州; 江西) 남원(南源)의 광리사(廣利寺)에 주지(住持)하도록 청했음. 3년을 거주하다가 사퇴하고 성모(省母)했음. 또 신정홍인(神鼎洪諲; 임제하 5세)을 알현(謁見)했는데 홍인이 찬상(讚賞)을 크게 더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성명(聲名)을 크게 날렸음. 이미 담주(潭州; 湖南) 도오(道吾)의 법석을 주재(主宰)하고는 다음으로 석상산(石霜山) 숭승사(崇勝寺)에 주지(住持)했으며 또 남악 복엄사(福嚴寺)로 전이(移轉)하였고 후에 담주(潭州) 흥화사(興化寺)로 옮겼으며 보원(寶元) 2년 정월 담주 흥화사에서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54며 시호(諡號)는 자명선사(慈明禪師)임. 법사(法嗣) 50인 중에 황룡혜남(黃龍慧南)과 양기방회(楊岐方會)가 가장 이름이 알려졌으며 각기 일파(一派)를 이루었음. 유작(遺作)에 석상초원선사어록(石霜楚圓禪師語錄; 慧南 重編) 1권이 있음 [속전등록3. 선림승보전21].
●雲居弘覺禪師示衆云; 운거홍각(雲居弘覺)은 당대 조동종승 도응(道膺; 835-902)이니 운거산(강서 건창 서남)에 거주했으며 칙시(敕諡)가 홍각선사. 전등록17 운거도응장(雲居道膺章) 및 여러 선록에 이 말이 없음. 오드회원6 옛적에 한 노숙이 있었다. 중이 묻되 사자가 토끼를 잡음에도 또한 그 힘을 다하고 (운운)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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