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淸稅孤貧
❶曹山和尙 因僧問云 淸稅孤貧 乞師賑濟 山云 稅❷闍梨 稅應諾 山曰 ❸青原白家酒三盞 喫了猶道未沾唇
無門曰 淸稅❹輸機 是何❺心行 曹山具眼深辨❻來機 然雖如是 且道 那裏是稅闍梨喫酒處
頌曰 貧似❼范丹 氣如❽項羽 ❾活計雖無 敢與鬪富
❶曹山; ㊀位於江西宜黃縣北約二十公里處 舊稱吉水 荷玉山 梅山 唐末 本寂禪師(八四○~九○一)住錫此山 本寂受法於洞山良价 蔚成曹洞宗 以仰慕六祖慧能之德 遂以六祖所居之曹溪 而改山名爲曹山 ㊁指本寂禪師 曾居曹山 故以曹山爲號 本寂(八四○~九○一) 僧寶傳一謂師諱躭章(耽章) 唐代僧 泉州莆田(福建古田)人 俗姓黃 幼習儒學 十九歲入福州福唐縣靈石山出家 二十五歲受具足戒 咸通年間 禪風極盛 乃謁洞山良价 遂得密受宗門玄旨 後開堂於撫州吉水 改名曹山 以表思慕曹谿之情 未久 遷住荷玉山(或謂師以此山改名曹山) 學徒雲集 大振洞門宗風 講授洞山五位之旨訣 成爲叢林之標準 竝注解寒山詩以饗學人 時有洪州鍾氏 屢請不赴 天復元年六月 焚香安坐而終 壽六十二 敕諡元證禪師 其後 洞山曹山之風益盛 門徒日衆 遂稱曹洞宗 著有曹山語錄二卷 [宋高僧傳十三 傳燈錄十七]
❷闍梨; 梵語阿闍梨的簡稱 又作闍黎 意爲僧人之師 常用作對僧人的稱呼 ▲玄應音義九 阿祇利 或言阿闍黎 皆訛也 正言阿遮利耶 或作夜 此譯云正行 或言軌範師也 ▲慧琳音義五十九 阿闍梨 經中或作阿祇利 皆訛也 應言阿遮利夜 此云正行 又言阿遮利耶 此云軌範 舊云 於善法中敎授令知 名阿闍梨也
❸青原; 靑原山 禪書或稱淸源山 位於江西廬陵(今吉安)東南十五公里處 又稱靑原安隱山 六祖慧能法嗣行思禪師(?~七四○) 嘗於此山開創靜居寺 北宋治平三年(一○六六)受賜安隱寺之額 至淸太宗崇德年間(一六三六~一六四三)恢復舊名 元末燒燬 明末復修爲叢林 於今尙存 [大明一統志四十六 大淸一統志二四九 靑原山志略]
❹輸機; 謂遇事不能決斷 坐失機會
❺心行; 心爲念念遷流者 故曰心行 又善惡之所念 謂之心行
❻來機; 向禪師提問的學人 也指禪語問答中對方所示機鋒
❼范丹; 一一二~一八五 漢朝人 一作范冉 字史雲 東漢永初五年 出生於陳留外黃(今河南民權縣) 東漢名士 古代廉吏典範 桓帝時爲萊蕪長 有時絕糧斷炊 但窮居自若 在漢末年樂府古詩中 有首民謠贊頌范丹 甑中生塵范史雲 釜中生魚范萊蕪 卒於漢靈帝中平二年 年七十四歲 靈帝詔諡貞節先生 [百度百科]
❽項羽; 前二三二~前二〇二 名籍 字羽 楚國下相(今江蘇宿遷)人 楚國名將項燕之孫 項羽早年跟隨叔父項梁在吳中(今江蘇蘇州) 起義反秦 項梁陣亡後他率軍渡河救趙王歇 於巨鹿之戰擊破章邯 秦亡後稱西楚霸王 定都彭城(今江蘇徐州) 實行分封制 封滅秦功臣及六國貴族爲王 而後漢王劉邦從漢中出兵進攻項羽 項羽與其展開了歷時四年的楚漢戰爭 期間雖然屢屢大破劉邦 但項羽始終沒有固定的後方補給 糧草殆盡 又猜疑亞父范增 最後反被劉邦所滅 公元前二〇二年 項羽戰敗於垓下(今安徽靈璧縣南) 突圍至烏江(今安徽和縣烏江,鎭)邊 自刎而死 [百度百科]
❾活計; 此指生活的家産 活計 ㊀生活之計策 禪錄中多比喩禪法或種種機用作略 ▲洞山悟本語錄 森羅萬象 古佛家風 碧落靑霄 道人活計 ㊁生活的工具家産 比喩俗情妄念 ▲禪宗雜毒海一 靈照 爺將活計沈湘水 累汝街頭賣笊篱 不是家貧連子苦 此心能有幾人知(無際派)
⑩청세고빈(淸稅孤貧)
❶조산화상(曹山和尙)이, 중이 물어 이르되 청세(淸稅)가 고빈(孤貧)하니 스님의 진제(賑濟)를 걸구(乞求)합니다 함으로 인해 조산이 이르되 세사리(稅❷闍梨)야, 청세가 응낙했다. 조산이 가로되 ❸청원백가(青原白家)의 술 석 잔을 먹고 나서 오히려 입술을 적시지 않았다고 말하느냐.
무문(無門)이 가로되 청세(淸稅)의 ❹수기(輸機)는 이 무슨 ❺심행(心行)인가. 조산이 구안(具眼)하여 ❻내기(來機)를 깊이 분변하였다. 그러하여 비록 이와 같으나 그래 말하라 어느 속이 이 세사리(稅闍梨)가 술을 먹은 곳인가.
송왈(頌曰) 가난하기는 ❼범단(范丹)과 같고/ 의기(意氣)는 ❽항우(項羽)와 같아/ ❾활계(活計)가 비록 없지만/ 감히 더불어 부(富)를 다투도다.
❶조산(曹山); ㊀강서(江西) 의황현(宜黃縣) 북쪽 약 25㎞ 곳에 위치함. 구칭(舊稱)은 길수(吉水)ㆍ하옥산(荷玉山)ㆍ매산(梅山)임. 당말(唐末)에 본적선사(本寂禪師. 840~901)가 이 산에 주석(住錫)했는데 본적은 동산양개(洞山良价)에게서 법을 받아 조동종(曹洞宗)을 위성(蔚成)했으며 육조혜능(六祖慧能)의 덕을 앙모(仰慕)하였으므로 드디어 육조가 거주한 바의 조계(曹溪)로써 산 이름을 고쳐 조산이라 했음. ㊁본적선사(本寂禪師)를 가리킴. 일찍이 조산(曹山)에 거주한지라 고로 조산으로써 호(號)를 삼음. 본적(本寂. 840~901) 승보전일(僧寶傳一)에 이르되 스님의 휘(諱)가 탐장(躭章. 耽章)이라 했음. 당대(唐代)의 승려며 천주(泉州) 보전(莆田. 福建 古田)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황(黃)임. 어려서 유학(儒學)을 익혔으며 열아홉 살에 복주(福州) 복당현(福唐縣)의 영석산(靈石山)에 들어가 출가했으며 스물다섯 살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음. 함통년간(咸通年間) 선풍이 극히 성했으며 이에 동산양개를 알현(謁見)하고 드디어 종문(宗門)의 현지(玄旨)를 몰래 받음을 얻었음. 후에 무주(撫州) 길수(吉水)에서 개당(開堂)하고 조산(曹山)으로 개명(改名)했으니 조계(曹谿)를 사모(思慕)하는 정을 표했음임. 오래지 않아 하옥산(荷玉山. 혹 이르기를 스님이 이 산을 조산으로 개명했다 함)으로 옮겨 거주했음. 학도(學徒)가 운집하였고 동문(洞門)의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음. 동산(洞山)의 오위(五位)의 지결(旨訣)을 강수(講授)하여 총림의 표준을 이루게 되었음. 아울러 한산시(寒山詩)를 주해(注解)하여 학인을 대접(饗)했음. 때에 홍주(洪州)의 종씨(鍾氏)가 있어 누차 청했으나 다다르지 않았음. 천복원년(天復元年) 유월에 분향하고 안좌(安坐)하여 마쳤으니 나이는 예순둘이며 칙시(敕諡)가 원증선사(元證禪師)임. 그 후 동산과 조산의 종풍(宗風)이 더욱 성해 문도가 날로 많아지자 드디어 조동종(曹洞宗)으로 일컬었음. 저서에 조산어록(曹山語錄) 2권이 있음. [宋高僧傳十三 傳燈錄十七].
❷사리(闍梨); 범어 아사리(阿闍梨)의 간칭(簡稱). 또 사리(闍黎)로 지음. 뜻은 승인(僧人)의 스승이 됨. 늘 써서 승인(僧人)에 대한 칭호(稱呼)로 씀. ▲현응음의구(玄應音義九). 아지리(阿祇利) 혹은 말하되 아사리(阿闍黎) 다 와류(訛謬)다. 바른 말로는 아자리야(阿遮利耶) 혹은 야(夜)로 짓는다. 여기에선 번역해 이르되 정행(正行)이며 혹은 말하되 궤범사(軌範師)다. ▲혜림음의오십구(慧琳音義五十九). 아사리(阿闍梨) 경중(經中)에 혹 아지리(阿祇利)로 짓는데 다 와류(訛謬)다. 응당 아자리야(阿遮利夜)라고 말해야 한다. 여기에선 이르되 정행(正行)이다. 또 말하되 아자리야(阿遮利耶)니 여기에선 이르되 궤범(軌範)이다. 구역(舊譯)에 이르기를 선법(善法) 가운데 교수(敎授)하여 알게 하는 이를 이름해 아사리(阿闍梨)다.
❸청원(青原); 청원산(靑原山)임. 선서(禪書)에 혹 청원산(淸源山)으로 일컬음. 강서(江西) 여릉(廬陵. 지금의 吉安) 동남 15㎞의 곳에 위치함. 또 명칭이 청원안은산(靑原安隱山)임. 육조혜능(六祖慧能)의 법사(法嗣) 행사선사(行思禪師. ?~740)가 일찍이 이 산에서 정거사(靜居寺)를 개창(開創)했고 북송(北宋) 치평삼년(治平三年. 1066) 안은사(安隱寺)의 편액(扁額)을 하사(下賜)함을 받았으며 청(淸) 태종(太宗) 숭덕년간(崇德年間. 1636~1643)에 이르러 구명(舊名)을 회복(恢復)했음. 원말(元末)에 소훼(燒燬)되었다가 명말(明末)에 다시 수복(修復)하여 총림(叢林)이 되었고 지금(至今)에도 아직 존재함. [大明一統志四十六 大淸一統志二四九 靑原山志略].
❹수기(輸機); 이르자면 일을 만나 능히 결단치 못함임. 앉아서 기회를 놓침임. [百度詞典]
❺심행(心行); 마음은 염념(念念)에 천류(遷流)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로 가로되 심행(心行)임. 또 선악(善惡)의 소념(所念)이니 이를 일러 심행이라 함.
❻내기(來機); 선사(禪師)를 향해 문제를 제기(提起)하는 학인(學人)임. 또 선어(禪語)의 문답(問答) 중에 상대방이 보이는 기봉(機鋒)을 가리킴.
❼범단(范丹); 112~185. 한조(漢朝)의 사람이며 일작(一作) 범염(范冉)이며 자(字)는 사운(史雲)임. 동한(東漢) 영초오년(永初五年) 진류외황(陳留外黃. 지금의 河南 民權縣)에서 출생했으며 동한의 명사(名士)며 고대(古代) 염리(廉吏)의 전범(典範)임. 환제(桓帝) 때 내무장(萊蕪長)이 되었음. 어떤 때 양식이 끊기고 땔감이 떨어졌으나 단지 궁거(窮居)하며 자약(自若)했음. 한(漢)의 말년(末年)에 있은 악부(樂府)의 고시(古詩) 중 첫 민요(民謠)에 범단을 찬송(贊頌)함이 있으니 시루 중에 먼지가 나는 범사운(范史雲)이며 솥 속에 물고기가 나는 범래무(范萊蕪)로다 했음. 한(漢) 영제(靈帝) 중평이년(中平二年)에 죽었으니 나이는 일흔네 살이며 영제가 조시(詔諡)하여 정절선생(貞節先生)이라 했음. [百度百科]
❽항우(項羽); 전(前) 232~전(前) 202. 이름은 적(籍)이며 자(字)는 우(羽)며 초국(楚國) 하상(下相. 지금의 江蘇 宿遷) 사람이며 초국의 명장(名將) 항연(項燕)의 손자(孫子)임. 항우는 젊은 나이에 숙부(叔父)인 항량(項梁)을 따라 오중(吳中. 지금의 江蘇 蘇州)에 있으면서 기의(起義)하여 진(秦)에 반역(反逆)했으며 항량이 진중(陣中)에서 사망한 후 그가 군대를 인솔하여 도하(渡河)하여 조왕(趙王) 헐(歇)을 구제(救濟)하고 거록(巨鹿)의 전투에서 장감(章邯)을 격파했음. 진(秦)이 망한 후 서초패왕(西楚霸王)이라 일컬으며 도읍을 팽성(彭城. 지금의 江蘇 徐州)으로 정했음. 분봉제(分封制)를 실행했으니 진(秦)을 멸한 공신(功臣)과 및 육국(六國)의 귀족을 봉(封)하여 왕(王)으로 삼았음. 이후(而後)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한중(漢中)으로부터 출병(出兵)하여 항우를 진공(進攻)하자 항우가 그와 더불어 사 년의 시절을 경과하는 초한전쟁(楚漢戰爭)을 전개(展開)했음. 기간(期間)에 비록 그러히 여러 차례 유방을 대파했지만 단지 항우는 시종 고정적(固定的)인 후방보급(後方補給)이 있지 않아서 양초(糧草)가 거의 다했으며 또 아부(亞父)인 범증(范增)을 시기(猜忌)하고 의심해 최후에 도리어 유방에게 멸망되는 바를 입었음. 공원전(公元前) 202년 항우가 해하(垓下. 지금의 安徽 靈璧縣 南)에서 전패(戰敗)하자 포위를 뚫고 오강(烏江. 지금의 安徽 和縣 烏江鎭) 가에 이르러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음. [百度百科].
❾활계(活計); 여기에선 생활의 가산(家産)을 가리킴. 활계(活計) ㊀생활(生活)의 계책(計策)이니 선록(禪錄) 중에 다분히 선법(禪法) 혹은 갖가지 기용작략(機用作略)에 비유(比喩)함. ▲동산오본어록(洞山悟本語錄).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고불의 가풍이며 벽락(碧落)의 푸른 하늘은 도인의 활계(活計)로다. ㊁생활의 공구(工具)와 가산(家産)임. 속정(俗情)의 망념(妄念)에 비유(比喩)함. ▲선종잡독해일(禪宗雜毒海一). 영조(靈照) 아버지가 활계(活計)를 가지고 상수(湘水)에 빠뜨려/ 너에게 누를 끼쳐 가두에서 조리(笊篱)를 팔게 되었다/ 이 가빈(家貧)을 자식에게 이어 고달프게 함이 아니니/ 이 마음을 능히 몇 사람이나 아는 이 있을까. (無際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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