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역주 조정사원

석자역주(釋字譯註) 조정사원(祖庭事苑) 卷第四 雪竇祖英下 47 고흥(高興)

태화당 2019. 9. 6. 08:46

高興

當作高與

) --> 

마땅히 高與로 지어야 함.

) --> 

武夷

山名 在建州

) --> 

山名이니 건주에 있음.

) --> 

十八人

社主遠法師 鴈門人 年二十一 聞道安講般若 豁然大悟 乃嘆曰 儒道九流皆糠粃爾 遂與弟慧持 投簪落髮 常以大法爲己任 後之廬山西林之側 山神闢地運木 建寺居之 於是謹律之侶 絶塵之客 不期而至 所謂宗雷等一十八人 同修淨土 影迹不至塵俗 每送客 以虎溪爲界 年八十三 順寂于寺 劉遺民 名程之 字仲思 旣慕遠公之名 乃錄潯陽柴桑 以爲入山之資 公侯辟之皆不應 遂易名遺民 感疾 便依念佛三昧 果見白毫相 次見佛眞影 合掌向西而逝 雷次宗 字仲倫 立館東林僧房 宋文帝徵至都 立學於雞籠山 主生員百餘人 久之 復還社中 周續之 字道祖 與劉遺民陶淵明爲潯陽三隱 武帝於東郭外開館待之 乘輿降幸 或問之曰 時踐王庭 何也 笑曰 心馳魏闕者 以江湖爲桎 情致兩忘者 市朝亦巖穴爾 宗炳 字少文 善琴書 累辟不起 衡陽王至其廬 命之角巾布衣 引見不拜 王曰 屈先生重祿可乎 曰 祿如腐草 衰盛幾何 嘗游荊巫衡岳 晚年畫圖於室 曰 吾老矣 名山不可再覩 唯澄懷觀道 臥以遊之 撫琴動操 欲令衆山皆響 張野 字萊民 累徵不就 一味之甘 一庾之粟 與九族分之 躬自菲薄 師敬遠公 自稱門人 張詮 字秀碩 雖耕鉏 猶帶經自樂 累徵不就 西林慧永 內外洞達 言常含笑 別立禪室於嶺上習禪 年八十三而逝 山中聞香 七日不絶 竺道生 預遠公社 元嘉十一年冬講次 法席將畢 忽見麈尾紛然而墜 端坐正容 隱几而逝 慧持 遠公弟也 徧學衆經 遊刃三藏 風神俊爽 衲衣半脛 常躡革屣 社中往來三千 持爲上首 佛陀耶舍 此云覺明 入長安 羅什使姚興迎之 誦曇無德律 興疑其謬 令誦羗籍方 可五萬言 二日覆之 不誤一字 預社後 還罽廬山記卷第三으로 지어졌음. 佛陀跋陀 甘露飯王裔 神變不一 與遠公傾蓋如舊 年七十一 示疾建鄴 慧叡 博學執節 晉有四聖 叡其一也 曇順 義論精博 志道不群 多以利濟爲本 曇恒 年十三 講大乘經論 德行孤淸 歲寒不改 道昺 遠公弟子 深達經律 獵涉外書 一覽不再 道敬 遠公弟子 每嘆戒律終身難全 願淨六根 但稟一戒 師亦聽之 後入若耶山 曇詵 遠公弟子 善別識鳥獸俊鈍之性 草木甘苦之味 昺 音으로 의심됨.

) --> 

社主(白蓮社主) 慧遠法師(334-416)鴈門 사람이다. 나이 二十一道安이 반야를 강설함을 듣고 豁然히 대오했다. 이에 탄식하며 가로되 儒道九流(班固著書 漢書藝文志에서 분류한 儒家 道家 陰陽家 法家 名家 墨家 縱橫家 雜家 農家의 아홉 學派. 여기에다 小說家를 더해 十家라고도 함)가 다 糠粃(은 겨 강. 는 쭉정이 비)일 뿐이다. 드디어 동생 慧持와 더불어 비녀를 던지고 落髮했고 늘 大法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뒤에 廬山西林의 곁으로 가자 山神이 땅을 열고() 나무를 운송했으며 절을 세워 거기에 거주했다. 이에 계율을 삼가는 벗들과 俗塵을 끊은 들이 기약하지 않고도 이르렀으니 이른 바 宗雷 一十八人이다. 한가지로 정토를 닦아 그림자와 자취가 塵俗에 이르지 않았다. 매양 객을 전송하면서 虎溪로써 경계를 삼았으며 나이 八十三에 절에서 順寂(을 따른다는 뜻이니 곧 죽음)했다. 劉遺民은 이름이 程之仲思. 이미 遠公의 이름을 흠모하여 이에 潯陽柴桑(는 땔나무 시)을 취해() 入山資糧으로 삼았다. 公侯로 그에게 벼슬 주었으나 다 응하지 않고 드디어 遺民으로 이름을 바꿨다. 질병에 감염되자 곧 念佛三昧依支했더니 과연 白毫相을 보았고 다음으로 부처의 眞影을 보았으며 합장한 채 서쪽을 향하여 逝去했다. 雷次宗仲倫이다. 東林僧房館舍를 세웠다. 宋文帝(재위 424-453)가 불러 도읍에 이르자 雞籠山에 학교를 세워 生員 百餘人主宰케 했다. 거기에 오래 있다가 다시 社中으로 復還(復歸)했다. 周續之道祖劉遺民 陶淵明과 더불어 潯陽三隱이 된다. 武帝가 동쪽 성곽 밖에 開館하여 그를 기다렸으며 가마를 타고 강림하여 (御駕가 이르는 곳을 臣民僥倖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라 함. 과 통함)했다. 혹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당시에 王庭(왕이 있는 뜨락. 宮中)을 밟은 건 어찌하여서입니까. 웃으며 가로되 마음이 의 궁궐로 달리는 자는 江湖로써 桎梏(은 차꼬 질. 은 수갑 곡)을 삼지만 이 둘을 잊음에 이른 자는 시장과 朝廷도 또한 巖穴일 뿐입니다. 宗炳少文이며 거문고와 서예를 잘했다. 여러 차례 벼슬을 주었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衡陽王이 그 草廬에 이르러 그에게 角巾(隱人들이 쓴 . 궁중 잔치 때 舞童들이 쓰기도 했음)布衣分付하고(分付할 명) 引見(사람을 불러 면회함.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불러들이어 봄)했으나 절하지 않았다. 이 가로되 先生屈節케 해 重祿(祿俸하게 줌) 하려는데 합니까. 가로되 祿腐草와 같거늘 衰盛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일찍이 荊山(荊州에 있는 산 이름)巫山(四川省 巫山縣에 있음. 그 소재지에 여러 설이 있음)衡岳(衡山이니 五嶽의 하나)에 노닐다가 만년에 실내에 그림을 그리고는 가로되 나도 늙었다. 名山을 가히 다시 보지 못하겠다. 오직 心懷澄淸하고 도를 관찰하며 누워서 거기에 노닐었다.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곡조()를 움직여 뭇 산으로 하여금 다 울리게() 했다. 張野萊民이다.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一味의 달콤함과 한 노적가리의 좁쌀로 九族(高祖로부터 玄孫까지의 친족의 범위. 자기를 기준으로 直系親은 위로 四代高祖 아래로 四代玄孫까지이며 傍系親高祖四代孫兄弟 從兄弟 再從兄弟 三從兄弟가 포함됨)과 함께 그것을 분배했으며 몸소 스스로 菲薄(는 엷을 비. 곧 검소하게 사는 것)했다. 遠公을 스승으로 공경했으며 門人이라 자칭했다. 張詮秀碩이다. 비록 耕鉏(는 호미 서. 김맬 서. 곧 경작하며 김매는 것)하면서도 오히려 을 휴대하면서 스스로 즐거워했다.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西林慧永內外洞達(은 통할 통. 밝을 통)했으며 말에 항상 웃음을 머금었다. 따로 禪室을 고개 위에 세우고 習禪했다. 나이 八十三에 서거했는데 山中에 향기가 풍겼으며 七日 동안 끊기지 않았다. 竺道生遠公結社(다수인이 공동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常設團體를 결성함. 또는 그 단체)參預했으며 元嘉十一年434 겨울 강설하던 차에 法席을 거의 마치려는데 홀연히 (총채. 拂子)가 어지럽게 떨어짐을 보았다. 단정히 앉아 바른 顔容으로 안석에 기대어(隱几) 서거했다. 慧持遠公의 동생이다. 두루 뭇 경을 배웠으며 三藏(經藏 律藏 論藏)遊刃(칼날을 놀림)했다. 風神(風采)俊爽(은 시원할 상. 俊秀하고 시원함)했고 衲衣半脛(정강이를 반쯤 덮음)했고 늘 가죽신을 신었다(은 신을 신을 섭). 社中에 왕래하는 이가 三千이었는데 上首가 되었다. 佛陀耶舍는 여기에선 이르되 覺明이다. 장안에 들어오자 라집이 姚興(재위 394-416. 後秦第二代 高祖文桓帝)으로 하여금 그를 맞이하게 했다. 曇無德律을 외웠는데 이 그 오류를 의심해 羗籍(의 서적)藥方을 외우게 했다. 五萬言 가량이었는데 二日 만에 그것을 되외우되 一字도 틀리지 않았다. 結社에 참예한 후에 罽賓으로 돌아갔다. 佛陀跋陀甘露飯王後裔神變이 하나가 아니었다. 遠公傾蓋함이 친구 같았다. 나이 七十一建鄴에서 示疾했다. 慧叡(는 밝을 예. 슬기 예)는 널리 배우고 절개를 가졌으며 四聖이 있었는데 가 그 하나다. 曇順義論精博했으며 志道(뜻한 도)不群(무리에서 뛰어남)이었으며 많이 利濟(중생에게 이익되게 하고 救濟)로써 근본을 삼았다. 曇恒은 나이 十三에 대승경론을 강설했고 덕행이 孤淸(는 우뚝할 고. 곧 우뚝히 淸雅)했으며 歲寒(설 전후의 추위라는 뜻으로 매우 심한 한겨울의 추위)에도 改變치 않았다. 道昺(은 밝을 병)遠公의 제자다. 경률을 깊이 통달했으며 外書獵涉했고 一覽하면 再讀하지 않았다. 道敬遠公의 제자다. 매양 탄식하기를 계율을 종신토록 온전히 하기 어려우니 원컨대 六根을 청정히 하여 단지 一戒 만이라도 稟受해야 한다 하매 스님도 또한 그것을 들었으며 뒤에 若耶山으로 들어갔다. 曇詵遠公의 제자다. 새와 짐승의 俊秀함과 우둔함의 성질과 풀과 나무의 달거나 쓴 맛을 잘 분별해 알았다. 은 음이 병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