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주해

벽암록 제6칙 본칙평창

태화당 2021. 8. 24. 15:39

雲門初參*睦州 州旋機電轉 直是難湊泊 尋常接人 纔跨門便*搊住云 道道 擬議不來 便推出云 *秦時?轢鑽 雲門凡去見 至第三回 纔敲門 州云 誰 門云 文偃 纔開門便跳入 州搊住云 道道 門擬議 便被推出門一足在門閫內 被州急合門 拶折雲門脚 門忍痛作聲 忽然大悟 後來語脈接人 一摸脫出睦州 後於*陳操*尙書宅 住三年 睦州指往雪峰處去 至彼出衆便問 如何是佛 峰云 莫寐語 雲門便禮拜 一住三年 雪峰一日問 子見處如何 門云 某甲見處 與從上諸聖 不移易一絲毫許 *靈樹二十年 不請首座 常云 我首座生也 又云 我首座牧牛也 復云 我首座行脚也 忽一日令撞鐘 *三門前接首座 衆皆訝之 雲門果至 便請入首座寮 解包 靈樹人號曰知聖禪師 過去未來事皆預知 一日*廣主劉王 將興兵 躬入院 請師決臧否 靈樹已先知 怡然坐化 廣主怒曰 和尙何時得疾 侍者對曰 師不曾有疾 適封一*合子 令俟王來呈之 廣主開合得一*帖子云 人天眼目 堂中首座 廣主悟旨 遂寢兵 請雲門出世 住靈樹 後來方住雲門 師*開堂說法 有鞠*常侍致問 靈樹*果子熟也未 門云 什麽年中 得*信道生 復引劉王昔爲*賣香客等因緣 劉王後諡靈樹爲知聖禪師 靈樹生生不失通 雲門凡三生爲王 所以失通 一日劉王詔師入內過夏 共數人*尊宿 皆受*內人*問訊說法 唯師一人不言 亦無人親近 有一直殿使 書一偈 貼在碧玉殿上云 大智修行始是禪 *禪門宜默不宜喧 萬般巧說爭如實 *輸却雲門總不言 雲門尋常愛說三字禪 *顧鑒咦 又說一字禪 僧問 殺父殺母 佛前*懺悔 殺佛殺祖 向什麽處懺悔 門云 露 又問 如何是*正法眼藏 門云 普 直是不容擬議 到*平鋪處 又却罵人 若下一句語 如鐵橛子相似 後出四哲 乃*洞山初 *智門寬 *德山密 *香林遠 皆爲大宗師 香林十八年爲侍者 凡接他 只叫遠侍者 遠云 喏 門云 是什麽 如此十八年 一日方悟 門云 我今後更不叫汝 雲門尋常接人 多用睦州手段 只是難爲湊泊 有抽釘拔楔底鉗鎚 雪竇道 我愛*韶陽*新定機 一生與人抽釘拔楔 垂箇*問頭示衆云 十五日已前不問汝 十五日已後道將一句來 坐斷千差不通凡聖 自代云 日日是好日 十五日已前 這語已坐斷千差 十五日已後 這語也坐斷千差 是他不道明日是十六 後人只管隨語生解 有什麽交涉 他雲門立箇*宗風 須是有箇爲人處 垂語了 却自*代云 日日是好日 此語通貫古今 從前至後 一時坐斷 山僧如此說話 也是隨語生解 他殺不如自殺 纔作道理 *墮坑落塹 雲門一句中 三句俱備 蓋是他家*宗旨如此 垂一句語 須要歸宗 若不如此 只是*杜撰 此事無許多論說 而未透者 却要如此 若透得 便見古人意旨 看取雪竇打葛藤

 

睦州; 睦州道明 嗣黃檗希運 見下第十則

搊住; 搊 拘也 持也

秦時?轢鑽; ?轢鑽 謂藉車拉轉 以使之鑽物之大錐 秦始皇建阿房宮(一說萬里長城)時 曾造巨大之錐 其後 此大錐已無用 禪林遂以秦時轢鑽 比喩無用之人

陳操; 唐代居士 睦州陳尊宿法嗣 見下第三三則

尙書; 官名 最初是掌管文書奏章的官員 始置於戰國時 隋代始設六部 唐代確定六部爲吏 戶 禮 兵 刑 工 各部以尙書侍郞爲正副長官

靈樹; 靈樹如敏 如敏(?-920) 五代後漢僧 福建閩川人 初謁黃檗希運 後至福州謁長慶大安(嗣百丈懷海) 嗣其法 出住韶州(今廣東韶關)靈樹禪院 爲人寬厚純篤 尤善占卜 南漢諸主常迎其入宮決疑難事 賜號知聖大師 師化被嶺南四十餘年 頗多異迹 南漢乾亨四年(920)示寂 諡號靈樹禪師 [祖堂集十九 傳燈錄十一]

三門; 山門之制形如闕 開三門 故亦曰三門 又只有一門 亦呼爲三門 蓋標幟空無相無作三解脫門之稱也 釋氏要覽上 寺院三門 凡寺院有開三門者 只有一門亦呼爲三門者何 佛地論云 大宮殿 三解脫門 爲所入處 大宮殿喩法空涅槃也 三解脫門謂空門 無相門 無作門 今寺院是持戒修道 求至涅槃人居之 故由三門入也

廣主劉王; 上蔡(今河南上蔡)人 封州刺史劉謙長子 唐末五代十國時期嶺南藩鎭南漢政權奠基人 劉謙死後代任封州刺史 天祐元年(904) 授任淸海節度使 乾化元年(911) 進封其爲南海王 同年劉隱病逝 時年三十八歲 其弟劉龑繼任其位 貞明三年(917) 劉龑稱帝 建立大越(南漢)政權 追諡劉隱爲襄皇帝 [百度百科]

合子; 盒子 子 後綴

帖子; 字帖

開堂; 禪院新任住持 始初上堂說法稱作開堂

常侍; 中常侍或散騎常侍的簡稱 秦與西漢的中常侍 東漢以宦官充之 魏晉以下的散騎常侍 均由士人充當 [百度百科]

果子; 一果實 二餜子 泛指糖食糕點 此指果實

信道生; 信 確實 字彙 信 不差爽也 生 植物果實未成熟的

賣香客; 客 商客

尊宿; 德尊年長者 觀無量壽佛經疏二云 德高曰尊 耆年曰宿

內人; 古代宮女的代稱

問訊; 合掌而口問安否也 但敬揖以表問安否之心 亦云問訊 說文 訊 問也

禪門; 指禪宗之法門 又作禪宗門流 禪宗 佛心宗 禪家

輸却; 輸 負 在較量中失敗 却 助詞

顧鑒咦; 禪宗頌古聯珠通集三十二 雲門每見僧 必顧視曰鑒 僧擬議 乃曰咦 後德山圓明大師 刪去顧字謂之抽顧 叢林目雲門顧鑒咦

懺悔; 止觀七曰 懺名陳露先惡 悔名改往修來 然懺爲梵語懺摩之略 而非漢語 故台宗之子弟不取之 金光明經文句記三 懺悔二字 乃雙擧二音 梵語懺摩 華言悔過 寄歸傳二 舊云懺悔 非關說罪 何者 懺摩乃是西音 自當忍義 悔乃東夏之字 追悔爲目 懺之與忍 逈不相干

正法眼藏; 又曰淸淨法眼 禪家以之爲敎外別傳之心印

平鋪; 顯豁明白 平直

洞山初; 洞山守初 嗣雲門文偃 見下第一二則

智門寬; 智門師寬 師寬 五代後晉僧 號明敎 參雲門文偃得悟 住隨州雙泉山 後住智門 [傳燈錄二十二 五燈會元十五]

德山密; 德山緣密 緣密 五代楚僧 號圓明 雲門文偃法嗣 住鼎州德山 [五燈會元十五 傳燈錄二十二 聯燈會要二十六]

香林遠; 香林澄遠 嗣雲門文偃 見下第十七則

韶陽; 廣東韶陽 指雲門文偃 佛祖歷代通載十七曰 師居靈樹 久之遷韶陽(廣東)雲門

新定機; 不藉舊轍 以斬新靈機接人者 [碧巖錄第六則種電鈔]

問頭; 問題 頭 助詞

宗風; 指一宗之各別風貌 又稱風儀 禪風 禪宗特稱宗師家之風儀爲宗風

代云; 上文拈擧之公案話頭 若缺答語 禪家代擬答語 示以代云 是禪家說法的一種形式 也是禪家語錄的一種類型

墮坑落塹; 又作墮坑落壍 跌落坑裏溝裏 多喩陷入言辭知解 不契禪法

宗旨; 指經典與論書等之主要旨趣 與宗趣 宗要 宗體等 意義相同 於禪宗 則稱禪之要旨爲宗旨 亦稱宗風 宗趣 宗乘

杜撰; 原指在詩文或其他著作中 妄作論述而毫無根據之情形 其語由來下列諸說 一漢代之田何精通易學 遷居杜陵 世稱杜田生 然或謂其易學實無師承之處 故世人多以杜田 或杜園 譏之 後訛稱爲杜撰 二據傳 道家五千餘卷之書中 除道德經二卷外 其餘均爲唐末文人杜光庭所撰述 多屬虛誕之說 故後人多稱僅憑臆造而無所本之說爲杜撰 三宋代文人杜默作詩時 常不合律 時人遂以行事不合法式者 謂之杜撰

 

운문이 처음 목주(*睦州)를 참()했는데 목주의 선기(旋機)가 번개처럼 도는지라 바로 이 주박(湊泊)하기 어려웠다. 심상(尋常)에 접인(接人)하되 겨우 문을 넘으면 곧 추주((*搊住)하여 이르되 말하라, 말하라. 의의(擬議)하면서 오지 못하면 곧 밀어 내쫓으며 이르되 진나라 때의 탁력찬(*秦時?轢鑽)이로구나 하였다. 운문도 무릇 가서 뵙되 제3회에 이르러선 겨우 문을 두드리자 목주가 이르되 누구냐. 운문이 이르되 문언(文偃)입니다. 겨우 문을 열자 곧 뛰어들어가니 목주가 추주(搊住)하고 이르되 말하라, 말하라. 운문이 의의(擬議)하다가 곧 밀어 내쫓임을 입되 운문의 한 발이 문지방 안에 있는데 목주의 급히 문 닫음을 입어 운문의 발이 찰절(拶折; 끼어 부러짐)하였으며 운문이 아픔을 참느라 소리를 지르다가 홀연히 대오하였다. 후래(後來)에 접인(接人)하는 어맥(語脈)이 목주를 한결같이() 모방(模倣; 와 같음. 모방임)하여 탈출(脫出)하였다(빼다박았다는 뜻). 후에 진조(*陳操) 상서(*尙書) 집에서 3년을 머물렀는데 목주가 설봉의 처소로 가라고 지시하였다. 거기(설봉)에 이르러 대중에서 나와 곧 묻되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설봉이 이르되 잠꼬대(寐語)하지 말아라. 운문이 곧 예배하고 한 번에 3년을 머물렀다. 설봉이 어느 날 묻되 자네의 견처가 어떠한가. 운문이 이르되 모갑의 견처는 종상(從上)의 제성(諸聖)과 더불어 한 실터럭만큼도 이역(移易; 옮김과 바꿈)치 않습니다 하였다. 영수(*靈樹)20년 동안 수좌를 초청하지 않고 심상(尋常; 평상시)에 이르되 나의 수좌가 태어났다. 또 이르되 나의 수좌가 소를 친다. 다시 이르되 나의 수좌가 행각한다. 홀연히 어느 날 종을 치게 하고 삼문(*三門) 앞에서 수좌를 영접하라 하거늘 대중이 모두 이를 의아(疑訝)하게 여겼는데 운문이 과연 이르렀으므로 곧 청하여 수좌료(首座寮)에 들어가 보따리를 풀었다. 영수를 사람들이 호하여 가로되 지성선사(知聖禪師)라 하였는데 과거ㆍ미래의 일을 모두 미리 알았다. 어느 날 광주 유왕(*廣主劉王)이 장차 흥병(興兵; 兵亂을 일으킴)코자 하여 몸소 입원(入院)하여 스님에게 청하여 장부(臧否; 좋은지 아닌지)를 결정하려 했는데 영수가 이미 먼저 알고 이연(怡然; 평안한 모양)히 좌화(坐化; 앉아 죽음)하였다. 광주(廣主)가 노해 가로되 화상이 어느 때 질병을 얻었습니까. 시자가 대답해 가로되 스님은 일찍이 질병이 있지 않으셨습니다만 마침 하나의 합자(*合子; 盒子)를 봉()하여 왕이 오심을 기다렸다가 이를 드리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광주가 합자를 열어 하나의 첩자(*帖子; 字帖)을 얻었으니 이르되 인천의 안목은 당중(堂中)의 수좌입니다. 광주가 지취를 깨닫고 드디어 침병(寢兵; 전쟁을 그만둠)하였다. 운문에게 출세를 청하매 영수에 주()하다가 후래에 바야흐로 운문(韶州 운문산 光泰院)에 주()하였다. 스님이 개당(*開堂)하여 설법하매 국상시(*常侍)가 있어 질문을 보내되(致問; 送詣) 영수의 과자(*果子)가 익었습니까 또는 아닙니까. 운문이 이르되 어느 해 가운데엔들 확실히 설익었다고 말함(*信道生)을 얻겠는가. 다시 유왕(劉王)이 옛적(; 전생)에 매향객(*賣香客; 향을 파는 商客)이 되었던 등의 인연을 인용하였다. 유왕이 후에 영수를 시(; 시호 내릴 시)하여 지성선사라 하였다. 영수는 생생(生生)에 신통을 잃지 않았고 운문은 무릇 3()에 왕이 된지라 소이로 신통을 잃었다. 어느 날 유왕이 스님(운문)을 불러() 궁내에 들어와 여름을 지내게 했는데 함께한 몇 사람의 존숙(尊宿)은 다 나인(*內人; 궁녀)의 문신(*問訊)을 받고 설법했지만 오직 스님 한 사람은 말하지 않았고 또한 친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 직전사(直殿使)가 있어 1게를 써서() 벽옥전(碧玉殿) 위에다 붙여 두었으니 이르되 대지(大智)로 수행해야 비로소 이 선()인지라/ 선문(*禪門)은 잠잠함이 마땅하고 시끄러움은 마땅치 않다/ 만 가지 교설(巧說)일지라도 어찌 실다움만 같으랴/ 운문의 총불설(總不言; 아무 말도 아니함)에 져버렸다(*輸却). 운문이 심상(尋常)에 삼자선(三字禪)을 설하기 좋아했으니 고감이(*顧鑒咦). 또 일자선(一字禪)을 설했으니 중이 묻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면 불전(佛前)에 참회(*懺悔)하려니와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면 어느 곳을 향해 참회합니까. 운문이 이르되 노(; 드러날 로). 또 묻되 무엇이 이 정법안장(*正法眼藏)입니까. 운문이 이르되 보(). 바로 이 의의(擬議)를 용납하지 않았다. 평포처(*平鋪)에 이르러선 또 도리어 사람을 욕하며 만약 1구어(句語)를 내리면 마치 쇠말뚝과 상사(相似)하였다. 후에 4()을 배출했으니 곧 동산초(*洞山初)ㆍ지문관(*智門寬)ㆍ덕산밀(*德山密)ㆍ향림원(*香林遠)이며 모두 대종사가 된다. 향림이 18년 동안 시자(侍者)가 되었는데 무릇 그(향림)를 접인(接引)하면서 다만 원시자(遠侍者)야 하고 부르면 원이 이르되 낙(; 대답하는 소리니 곧 예). 운문이 이르되 이 뭣고. 이와 같이 하기가 18년이었다. 어느 날 비로소 깨치자 운문이 이르되 내가 금후(今後)론 다시 너를 부르지 않겠다. 운문이 심상(尋常)에 접인(接人)하면서 목주(睦州)의 수단을 많이 썼는지라 다만 이 주박(湊泊)하기 어려웠지만 못을 빼고 말뚝을 뽑는 겸추(鉗鎚)가 있었다. 설두가 말하되 내가 소양(*韶陽)의 신정기(*新定機)를 사랑하노니 일생토록 사람들에게 못을 빼고 말뚝을 뽑아 주었다. 저 문두(*問頭)를 드리워 시중헤 이르되 15일 이전은 너희에게 묻지 않거니와 15일 이후를 말해 가져오너라 하니 천차(千差)를 좌단(坐斷)하고 범성(凡聖)이 통하지 않는다. 자대(自代)하여 이르되 날마다 이 좋은 날이다 하니 15일 이전이라 한 이 말씀도 이미 천차를 좌단하며 15일 이후라고 한 이 말씀도 또한 천차를 좌단한다. 이는 그(운문)가 명일이 이 16이라고 말하지 않았건만 후인이 다만 관대(管帶)하여 말씀을 따라 앎을 내니 무슨 교섭이 있으리오. 저 운문이 저 종풍(*宗風)을 세운지라 반드시 이는 저 위인(爲人)하는 곳이 있다. 수어(垂語)하고는 도리어 스스로 대운(*代云)하되 날마다 이 좋은 날이다 하니 이 말씀이 고금을 통관(通貫)하여 앞을 좇아 뒤에 이르기까지 일시에 좌단했음이다. 산승의 이와 같은 설화도 또한 이, 말씀을 다라 앎을 냄인지라 남이 죽임이 스스로 죽음만 같지 못하거늘 겨우 도리를 지으면 구덩이에 떨어지고 웅덩이에 떨어지느니라(*墮坑落塹). 운문의 1() 중엔 3구를 구비하니 대개 이는 타가(他家)의 종지(*宗旨)가 이와 같은지라 1구어(句語)를 드리움에도 반드시 귀종(歸宗)을 요하나니 만약 이와 같지 못할진대 다만 이 두찬(*杜撰)이다. 차사(此事; 宗門一大事, 자기의 분분사)는 허다한 논설이 없는지라 투득(透得)치 못한 자일진대 도리어 이와 같음을 요하거니와 만약 투득하면 곧 고인(古人)의 의지(意旨)를 보리라. 설두의, 타갈등(打葛藤; 언구에 뒤얽힘)함을 간취(看取)하라.

 

睦州; 목주도명(睦州道明)이니 황벽희운(黃檗希運)을 이었음. 아래 제10칙을 보라.

搊住; ()는 구(; 잡다). ().

秦時?轢鑽; 탁력찬(?轢鑽)은 이르자면 수레를 빌려 잡아 돌려서 이를 사용해 물건을 뚫는 큰 송곳임. 진시황이 아방궁(阿房宮; 일설엔 만리장성)을 건립할 때 일찍이 거대한 송곳을 만들었는데 그 후에 이 큰 송곳이 이미 쓸 데가 없었음. 선림에서 드디어 진시탁력찬으로써 쓸데없는 사람에 비유함.

陳操; 당대 거사. 목주 진존숙(陳尊宿)의 법사(法嗣)니 아래 제33칙을 보라.

尙書; 벼슬 이름. 최초엔 이 문서와 주장(奏章)을 장관(掌管)하는 관원이었음. 전국 시 처음 설치했고 수대(隋代)에 비로소 6()를 설치했고 당대에 6부를 이()ㆍ호()ㆍ예()ㆍ병()ㆍ형()ㆍ공()으로 삼음을 확정했음. 각 부에 상서와 시랑(侍郞)을 정부(正副) 장관으로 삼았음.

靈樹; 영수여민임. 여민(如敏) (?-920) 오대 후한승(後漢僧). 복건 민천(閩川) 사람. 처음에 황벽희운(黃檗希運)을 참알(參謁)했다가 뒤에 복주(福州)에 이르러 장경대안(長慶大安; 백장회해를 이었음)을 참알하고 그의 법을 이었음. 출세하여 소주(韶州; 지금의 광동 韶關) 영수선원(靈樹禪院)에 주()했음. 사람됨이 관후순독(寬厚純篤)했으며 특히 점복(占卜)을 잘했으므로 남한(南漢)의 제주(諸主)가 항상 그를 맞이해 입궁(入宮)케 하여 의심과 난사(難事)를 결택(決擇)했으며 지성대사(知聖大師)란 호를 주었음. 스님의 교화가 영남(嶺南)을 입히기 40여 년이었는데 이적(異迹)이 파다(頗多)했음. 남한(南漢) 건형(乾亨) 4(920)에 시적했으며 시호는 영수선사(靈樹禪師) [조당집19. 전등록11].

三門; 산문(山門)의 제형(制形)이 궁궐과 같이 3문을 여는지라 고로 또한 가로되 3(). 또 다만 1문만 있어도 또한 칭호(稱號)하여 3문이라 하나니 대개 공()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3해탈문(解脫門)을 표치(標幟)하는 명칭임. 석씨요람상. 사원삼문(寺院三門) 무릇 사원에 3문을 엶이 있는 것인데 다만 1문만 있어도 또한 호칭하여 3문이라 하는 것은 왜인가. 불지론(佛地論)에 이르되 대궁전과 3해탈문은 소입처(所入處)가 된다. 대궁전은 법공열반(法空涅槃)에 비유하고 3해탈문은 이르자면 공문(空門)ㆍ무상문(無相門)ㆍ무작문(無作門)이다. 여금의 사원은 이 지계하고 수도하면서 열반에 이름을 구하는 사람이 거주하는지라 고로 3문으로 말미암아 들어간다.

廣主劉王; 유은(劉隱) (873-911)이니 상채(上蔡; 지금의 하남 상채) 사람. 봉주자사(封州刺史) 유겸(劉謙)의 장자. 당말 오대십국 시기에 영남 번진(藩鎭)인 남한(南漢) 정권의 존기인(奠基人; 創始人). 유겸이 죽은 후에 대신하여 봉주자사를 맡았음. 천우(天祐) 원년(904) 청해절도사(淸海節度使)에 수임(授任; 임무나 직무를 줌. 임명)했음. 건화(乾化) 원년(911) 그를 진봉(進封; 封爵을 더함)하여 남해왕(南海王)으로 삼았음. 같은 해 유은(劉隱)이 병으로 서거했는데 때의 나이 38세였음. 그의 아우 유엄(劉龑)이 그 지위를 승계해 맡았음. 정명 3(917) 유엄이 칭제(稱帝)하고 대월(大越; 南漢) 정권을 건립했으며 유은을 추시(追諡)하여 양황제(襄皇帝)라 했음 [백도백과].

合子; 합자(盒子)니 자()는 후철(後綴).

帖子; 자첩(字帖).

開堂; 선원의 신임 주지가 처음으로 상당하여 설법함을 일컬어 개당이라 함.

常侍; 중상시(中常侍) 혹 산기상시(散騎常侍)의 간칭(簡稱). ()과 서한의 중상시는 동한에선 환관으로 이에 충당했음. 위진(魏晉) 이하의 산기상시(散騎常侍)는 균일하게 사인(士人)으로 말미암아 충당했음 [백도백과].

果子; 1. 과실(과일). 2. 과자(餜子; 菓子). 널리 당식(糖食; 설탕으로 만든 식품)과 고점(糕點; 케이크ㆍ과자ㆍ빵 따위의 총칭)을 가리킴.

信道生; ()은 확실임. 자휘(字彙) ()은 어긋나지(差爽) 않음이다. ()은 식물의 과실이 성숙하지 않은 것임.

賣香客; 객은 상객(商客).

尊宿; 덕이 높은 연장자. 관무량수불경소2. 덕고(德高)를 가로되 존()이며 기년(耆年)을 가로되 숙(宿)이다.

內人; 고대 궁녀의 대칭(代稱).

問訊; 합장하면서 입으로 안부를 물음임. 다만 경읍(敬揖)하면서 안부를 표문(表問)하는 마음도 또 이르되 문신임. 설문(說文) () ()이다.

禪門; 선종의 법문을 가리킴. 또 선종문류(禪宗門流)ㆍ선종ㆍ불심종ㆍ선가로 지음.

輸却; ()는 부(; 지다)니 교량(較量)중에 실패함. 각은 조사.

顧鑒咦; 선종송고연주통집32. 운문이 매번 중을 보면 반드시 돌아보고(顧視) 가로되 감(). 중이 의의(擬議; 헤아려 의논하려 함)하면 곧 가로되 이() 했다. 후에 덕산원명대사(德山圓明大師)가 고자(顧字)를 깎아 제거하고는 이를 일러 추고(抽顧)라 했는데 총림에서 제목해 운문의 고감이(顧鑒咦)라 했다.

懺悔; 지관7에 가로되 참()은 이름이 선악(先惡)을 진로(陳露)함이며 회()는 이름이 개왕수래(改往修來; 과거를 고쳐서 미래를 닦음). 그러나 참()은 범어 참마(懺摩; kṣama)의 약칭이며 한어(漢語)가 아니다. 고로 천태종의 자제들은 이를 취하지 않는다. 금광명경문구기3. 참회(懺悔) 2자는 곧 2음을 쌍거(雙擧)했다. 범어 참마(懺摩)는 화언으로 회과(悔過). 기귀전2. 구역(舊譯)에 이른 참회(懺悔)는 설죄(說罪)와 상관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참마(懺摩)는 곧 이 서음(西音)이며 스스로 인()의 뜻에 상당한다. ()는 동하(東夏)의 글자니 추회(追悔)로 명목한다. ()과 인()은 멀어서 상간(相干)되지 않는다.

正法眼藏; 또 가로되 청정법안이니 선가가 이로써 교외별전의 심인(心印)으로 삼음.

平鋪; 현활(顯豁; 환함)히 명백함. 평직(平直).

洞山初; 동산수초(洞山守初)니 운문문언(雲門文偃)을 이었음. 아래 제12칙을 보라.

智門寬; 지문사관(智門師寬). 사관(師寬) 오대 후진승(後晉僧). 호는 명교(明敎)며 운문문언을 참해 깨침을 얻었고 수주(隨州) 쌍천산(雙泉山)에 거주하다가 후에 지문(智門)에 거주했음 [전등록22. 오등회원15].

德山密; 덕산연밀(德山緣密). 연밀(緣密) 오대 초승(楚僧). 호는 원명이며 운문문언의 법사며 정주(鼎州) 덕산에 거주했음 [오등회원15. 전등록22. 연등회요26].

香林遠; 향림징원(香林澄遠)이니 운문문언을 이었음. 아래 제17칙을 보라.

韶陽; 광동(廣東) 소양이니 운문문언을 가리킴. 불조역대통재17에 가로되 스님이 영수(靈樹)에 거주하다가 오래되자 소양(韶陽; 廣東) 운문으로 옮겼다.

新定機; 구철(舊轍; 전철)을 빌리지 않고 참신한 영기(靈機)로 접인하는 것 [벽암록 제6칙 종전초].

問頭; 문제니 두는 조사.

宗風; 1()의 각기 다른 풍모를 가리킴. 또 명칭이 풍의(風儀)ㆍ선풍(禪風). 선종에서 종사가의 풍의를 특칭(特稱)하여 종풍이라 함.

代云; 상문(上文)에 염거(拈擧)한 공안화두에 만약 답어(答語)가 결손하면 선가(禪家)가 대신해 답어하려 하면서 대운(代云)으로 보임. 이는 선가의 설법의 일종 형식임. 또 이는 선가어록의 일종 유형임.

墮坑落塹; 또 타갱낙참(墮坑落壍)으로 지음. 미끄러져 구덩이 속 도랑 속에 떨어짐. 다분히 언사와 지해에 함입(陷入)하여 선법에 계합하지 못함에 비유함.

宗旨; 경전과 논서 등의 주요한 지취를 가리킴. 종취(宗趣)ㆍ종요(宗要)ㆍ종체(宗體) 등과 의의가 서로 같음. 선종에선 곧 선의 요지를 일컬어 종지(宗旨)라 함. 또한 명칭이 종풍ㆍ종취(宗趣)ㆍ종승(宗乘).

杜撰; 원래 시문(詩文)이나 혹은 기타의 저작 가운데 있어 망령(妄靈)되이 논술을 지어 터럭만큼도 근거가 없는 정형(情形)을 가리킴. 그 말의 유래는 아래에 여러 설을 나열하겠음. 1. 한대(漢代)의 전하(田何)가 역학(易學)을 정통하였으며 두릉(杜陵)에 옮겨 거주했는데 세칭이 두전생(杜田生). 그러나 혹은 이르기를 그 역학이 실은 사승(師承)한 곳이 없는지라 고로 세인이 많이 두전(杜田) 혹은 두원(杜園)이라 하여 그를 비웃었음. 후에 잘못 호칭하여 두찬(杜撰)이라 했음. 2. ()에 의거하건대 도가(道家)5천여 권의 책 중에 도덕경 2(道經德經)을 제한 밖에 그 나머지는 균일하게 당말(唐末)의 문인인 두광정(杜光庭)이 찬술한 것이며 많이 허탄(虛誕)의 설에 속한지라 고로 후인이 많이들 겨우 억설(臆說)에 의빙하여 조작하고 근본할 바의 설이 없는 것을 일컬어 두찬(杜撰)이라 하였음. 3. 송대(宋代)의 문인 두묵(杜默)이 시를 지을 때 늘 율()에 맞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사람이 드디어 행사(行事)가 법식에 맞지 않는 것을 두찬(杜撰)이라고 말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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