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문무고

종문무고(宗門武庫) 030

태화당 2022. 8. 5. 08:20

30*法雲杲和尙 遍歷諸家門庭 到*圓通璣道者會中 入室次 擧*趙州*投子*大死底人却活時如何 子云 不許夜行*投明須到 意作麽生 杲曰 恩大難酬 圓通大稱賞之 後數日擧立僧秉拂 *機思遲鈍 *閧堂大笑 杲有慚色 次日特爲大衆茶 安茶具在案上 慚無以自處 偶打翻茶具 *瓢子落地跳數跳 悟得答話 機鋒迅捷無敢當者 復至眞淨處 因看*祖師偈云 心同虛空界 示等虛空法 證得虛空時 無是無非法 豁然大悟 後出世時 上堂小參常謂人曰 和尙*紹聖三年十一月二十一日 悟得*方寸禪 又言 和尙*熙寧三年*文帳 *鳳翔府供申 當年陷了*華山一十八州 爾輩*茄子瓠子那裏得知 詔住法雲 開堂日 *中使*御香至 要語錄進呈 時*洪覺範在會下 令侍者請來編語錄云 且看老和尙面 覺範編次呈之 讀畢謂曰 若要了死生底禪 須還和尙 若是*攢花簇錦 *四六文*閑言長語 須是我洪兄始得 法雲平生氣吞諸方*孩撫時輩 蓋所得有大過人處 乃敢爾也

 

法雲杲; 又稱佛照杲 宋代黃龍派僧 眞淨克文法嗣 見上18佛照杲

圓通璣; 圓璣(1036-1118) 宋代黃龍派僧 福州(今屬福建)林氏 出家福淸應天寺 後依慧南於黃檗 及遷黃龍 携以俱往 南歿 首衆於東林 後出世翠巖 又十年 移住圓通 崇寧二年(1103)住保寧 [續燈錄十二 聯燈會要十五 佛祖綱目三十七]

趙州; 從諗(778-897) 唐代僧 曹州郝鄕(一說靑州臨淄)人 俗姓郝 法號從諗 幼年於曹州扈通院(一說靑州龍興院)出家 受具足戒前 卽往池陽參南泉普願 南泉深器之 復往嵩山琉璃壇受戒 尋返南泉 依止二十年 其後 歷參黃檗 寶壽 鹽官 夾山 五臺等諸大德 八十歲時 衆請住趙州城東觀音院 四十年間 大揚禪風 師夙居北地 振南宗禪 其玄言法語遍布天下 世稱趙州古佛 昭宗乾寧四年示寂 壽一百二十 敕諡眞際大師 著有眞際大師語錄三卷 [傳燈錄十 宋高僧傳十一 聯燈會要六 五燈會元四 佛祖歷代通載十七]

投子; 大同(819-914) 唐代僧 安徽懷寧人 俗姓劉 幼年出家 初閱華嚴經 頗有啓發 其後參翠微無學禪師 大悟玄旨 周遊諸方後 隱栖於投子山三十餘年 激發往來 請益者盈室 以無畏之辯才 隨問隨答 乾化四年示微疾 隨卽坐化 壽九十六 諡號慈濟大師 [祖堂集六 傳燈錄十五 釋氏稽古略三]

大死底人; 言一切妄想都斷盡之人也

投明須到; 謂至天明而須到 投 介詞 相當于至 到 臨

機思; 機鋒才思

閧堂大笑; 形容滿屋子的人同時大笑

瓢子; 瓢勺

祖師; 婆須密 又作婆須蜜 此云天友 世友 禪宗第七祖 北天竺國人 姓頗羅墮 常服淨衣 執酒器 遊行里閈 或吟或嘯 人謂之狂 及遇彌遮迦尊者 宣如來往誌 自惺前緣投器出家 得法行化 [傳燈錄一 慧琳音義二十三]

紹聖; (1094-1098) 是宋哲宗趙煦的第二個年號

方寸禪; 謂僅僅得到少許領悟之禪

熙寧; (1068-1077) 是北宋神宗趙頊的一個年號

文帳; 公文案卷

鳳翔府; 今陝西省鳳翔縣 唐初置岐州 天寶元年(742) 改爲扶風郡 至德二年(757) 肅宗幸臨扶風郡 同年收復長安洛陽 十二月設置鳳翔府 號西京 與成都 京兆 河南 太原合稱五京 [百度百科]

華山; 古稱西嶽 五嶽之一 位於陝西渭南華陰市

茄子瓠子; 指平庸的人

中使; 宫中派出的使者 多指宦官

御香; 帝王之香 御 對帝王所作所爲及所用物的敬稱

洪覺範; 德洪(1071-1128) 宋代黃龍派僧 瑞州(江西高安)人 俗姓喩(或謂彭 兪) 字覺範 號寂音尊者 年十九 試經於東京天王寺而得度 初名慧洪 參眞淨克文而得法 崇寧(1102-1106)年中 住持臨川北禪院 後遷金陵淸涼寺 未久 爲狂僧誣以度牒冒名旁連訕謗事 誣陷入獄 張無盡特奏得度改今名 太尉郭天民奏賜椹服 號寶覺圜明 自稱寂音尊者 政和元年(1111)頃 坐交張郭厚善 張罷政事 有嫉之者 誣指師與二人交通 詔奪袈裟 發配然州 三年始得歸 同年冬 復拘之於幷州獄 踰年獲釋 遂棄僧服入九峰洞山 以文章自娛 其後將赴湘西 途經南昌 復爲道士誣陷下獄 幸遇赦得免 遂入居南臺明白庵 靖康元年(1126) 蒙賜再度剃髮 恢復慧洪舊名 建炎二年寂於同安 壽五十八 著林間錄二卷 僧寶傳三十卷 高僧傳十二卷 智證傳十卷 志林十卷 冷齋夜話十卷 天厨禁臠一卷 石門文字禪三十卷 語錄偈頌一編 法華合論七卷 楞嚴尊頂義十卷 圓覺皆證義二卷 金剛法源論一卷 起信論解義二卷 並行于世 [佛祖歷代通載十九 普燈錄七 續傳燈錄二十二]

攢花簇錦; 形容五色繽紛 繁盛豔麗的景象

四六文; 文體名 騈文的一體 因以四字六字爲對偶 故名 騈文以四六對偶者 形成於南朝 盛行於唐宋 唐以來 格式完全定型 遂稱四六 也稱四六文或四六體 [百度詞典]

閑言長語; 閑言語 多餘無用之語

孩撫; 意與撫慰孩兒一般 含有俯視小看之義

 

30법운고(*法雲杲) 화상이 제가(諸家)의 문정(門庭)을 편력(遍歷)하고 원통기(*圓通璣) 도자(道者)의 회중(會中)에 이르렀다. 입실한 차에 거()했다. 조주(*趙州)가 투자(*投子)에게 묻되 대사지인(*大死底人)이 각활(却活; 부활)할 때 어떠한가. 투자가 이르되 야행을 허락하지 않으니 날이 새거든 이름을 써라(*投明須到). 뜻이 무엇인가. ()가 가로되 은혜를 매우 갚기 어렵습니다. 원통이 그것을 매우 칭상(稱賞)했다. 며칠 후 입승(立僧)으로 천거하여 병불(秉拂)했는데 기사(*機思)가 지둔(遲鈍)하여 홍당대소(*閧堂大笑)했다. ()가 참색(慚色)이 있었다. 다음날 특위대중다(特爲大衆茶)하면서 다구(茶具)를 안상(案上)에 안치하는데 부끄러워 자처(自處)하지 못했다. 우연히 다구를 타번(打翻; 엎다)하여 표자(*瓢子)가 땅에 떨어지며 뛰기를 몇 번 뛰었다. 답화(答話)를 오득(悟得)했고 기봉이 신첩(迅捷)하여 감당(敢當)할 자가 없었다. 다시 진정(眞淨)의 처소에 이르렀다. 조사(*祖師)의 게에 이르되 마음이 허공계(虛空界)와 같아서/ 허공과 같은 법을 보인다/ 허공을 증득할 때/ ()도 없고 비법(非法)도 없다 한 것을 봄으로 인해 휑하게(豁然) 대오했다. 후에 출세한 때 상당(上堂)과 소참(小參)에 늘 사람들에게 일러 가로되 화상이 소성(*紹聖) 3(1096) 1121일에 방촌선(*方寸禪)을 오득(悟得)했다. 또 말하되 화상이 희녕(*熙寧) 3(1070)의 문장(*文帳; 저본에 丈帳으로 지었음)이 봉상부(*鳳翔府) 공신(供申)에 있거니와 당년(當年)에 화산(*華山) 18 ()가 함몰했거늘 너희 무리 가자호자(*茄子瓠子)가 어느 속에서 득지(得知)하겠는가. 조칙으로 법운(法雲)에 주지했다. 개당일(開堂日)에 중사(*中使)가 어향(*御香)을 받들고 이르렀고 어록(語錄)을 진정(進呈)하기를 요쳥했다. 때에 홍각범(*洪覺範)이 회하(會下)에 있었는데 시자를 시켜 청하여 어록을 편()하게 하면서 이르되 다만 노화상의 얼굴을 보라. 각범이 편차(編次)하여 그것을 주었다. 읽어 마치고 일러 가로되 만약 사생(死生)을 깨닫는 선()을 요한다면 모름지기 화상에게 돌려주어야 하거니와 만약 이 찬화족금(*攢花簇錦)의 사륙문장(*四六文)이나 한언장어(*閑言長語)일진대 모름지기 이는 우리 홍형(洪兄)이라야 비로소 옳다. 법운(法雲)은 평생 기()가 제방을 삼켰고 시배(時輩)를 해무(*孩撫)했는데 대개 얻은 바가 크게 과인(過人)하는 곳이 있는지라 이에 감히 그러했다.

 

法雲杲; 또 명칭이 불조고(佛照杲)이 송대 황룡파승. 진정극문의 법사. 18불조고(佛照杲)를 보라.

圓通璣; 원기(圓璣; 1036-1118)니 송대 황룡파승. 복주(지금 복건에 속함) 임씨(林氏). 복청 응천사에서 출가했고 후에 혜남을 황벽에서 의지했는데 황룡으로 천거(遷居)함에 이르러 데리고 함께 갔음. 혜남이 죽자 동림에서 수중(首衆)했고 후에 취암에서 출세했음. 10년 만에 원통(圓通)으로 이주했다가 숭녕 2(1103) 보녕에 주지했음 [속등록12. 연등회요15. 불조강목37].

趙州; 종심(從諗; 778-897)이니 당대승. 조주(曹州) 학향(郝鄕; 일설엔 청주 임치) 사람이니 속성(俗姓)은 학()이며 법호(法號)는 종심(從諗). 어린 나이에 조주(曹州) 호통원(扈通院; 일설엔 靑州 龍興院)에서 출가하였음. 구족계를 받기 전에 곧 지양(池陽)으로 가서 남천보원(南泉普願)을 참알(參謁)했으며 남천이 깊이 그를 법기(法器)로 여겼음. 다시 숭산(嵩山) 유리단(琉璃壇)으로 가서 수계하고는 이윽고 남천으로 돌아와 의지하기가 20년이었음. 그 후 황벽(黃檗)ㆍ보수(寶壽)ㆍ염관(鹽官)ㆍ협산(夾山)ㆍ오대(五臺) 등의 여러 대덕을 역참(歷參; 다니면서 참알)하였음. 80세 때 대중이 청하여 조주성(趙州城) 동쪽의 관음원(觀音院)에 거주했는데 40년 간 선풍(禪風)을 크게 드날렸음. 스님이 일찍 북지(北地)에 거주하면서 남종선(南宗禪)을 진작(振作)하였으며 그 현언(玄言)과 법어가 천하에 두루 분포하였음. 세칭 조주고불(趙州古佛). 소종(昭宗) 건녕(乾寧) 4년 시적했으니 나이는 120. 칙시(敕諡)는 진제대사(眞際大師)며 저서에 진제대사어록(眞際大師語錄) 3권이 있음 [전등록10. 송고승전11. 연등회요6. 오등회원4. 불조역대통재17].

投子; 대동(大同; 819-914)이니 당대승. 안휘 회녕 사람. 속성은 유. 어린 나이에 출가했고 처음엔 화엄경을 열람하다가 자못 계발(啓發)이 있었음. 그 후 취미무학선사(翠微無學禪師)를 참알해 현지(玄旨)를 대오했음. 제방을 주유(周遊)한 후에 투자산에 숨어 쉬기가 30여 년이었으며 왕래인을 격발(激發)하매 청익하는 자가 방에 가득했음. 무외(無畏)의 변재로 질문을 따라 그대로 답했음. 건화 4년 미질(微疾)을 보이다가 그대로 곧 좌화(坐化. 앉아 죽음)했음. 나이 96. 시호는 자제대사 [조당집6. 전등록15. 석씨계고략3].

大死底人; 말하자면 일체의 망상을 모두 끊어 없앤 사람임.

投明須到; 이르자면 천명(天明)에 이르러 이름()을 씀(). ()는 개사(介詞)니 지()ㆍ도()ㆍ림()에 상당함.

機思; 기봉과 재사(才思; 재주가 있는 사고력).

閧堂大笑; 옥자(屋子; 家屋)에 가득한 사람이 동시에 대소(同時)大笑함을 형용.

瓢子; 표작(瓢勺; 표주박).

祖師; 바수밀(婆須密; Vasumitra)을 가리킴. 또 바수밀(婆須蜜)로 지음. 여기에선 이르되 천우(天友)ㆍ세우(世友)며 선종 제7. 북천축국 사람이며 성()이 파라타(頗羅墮). 늘 깨끗한 옷을 입고 주기(酒器)를 가지고 이한(里閈; 마을)에 유행(遊行)하면서 혹은 읊고 혹은 휘파람 불었음. 사람들이 이르기를 미치광이라 했는데 및 미차가존자(彌遮迦尊者)가 여래의 지난 기록(記錄; )을 선설(宣說)함을 만나 스스로 전연(前緣)을 깨닫고 주기(酒器)를 던지고 출가했으며 득법하고 행화(行化)했음 [전등록1. 혜림음의23].

紹聖; (1094-1098) 이는 송 철종 조후(趙煦)의 제2개 연호.

方寸禪; 이르자면 근근히 조금 영오(領悟)에 이름을 얻은 선.

熙寧; (1068-1077) 이는 북송 신종 조욱(趙頊)1개 연호.

文帳; 공문의 안권(案卷: 문건. 문안).

鳳翔府; 지금의 섬서성 봉상현. 당 초에 기주를 설치했고 천보 원년(742) 고쳐 부풍군이라 했음. 지덕 2(757) 숙종이 부풍군에 행림(幸臨; 그곳에 거둥)하였고 같은 해 장안과 낙양을 수복했으며 12월에 봉상부를 설치하고 서경(西京)으로 일컬었음. 성도ㆍ경조ㆍ하남ㆍ태원과 더불어 합칭이 5경임 [백도백과].

華山; 옛 명칭이 서악이니 5()의 하나. 섬서 위남 화음시에 위치함.

茄子瓠子; 평용(平庸; 평범)한 사람을 가리킴.

中使; 궁중에서 파출(派出)한 사자니 다분히 환관을 가리킴.

御香; 제왕의 향. ()는 제왕의 소작(所作)과 소위(所爲) 및 소용(所用)의 사물에 대한 경칭임.

洪覺範; 덕홍(德洪; 1071-1128)이니 송대 황룡파승. 서주(강서 고안) 사람이며 속성은 유(. 혹은 이르되 )며 자는 각범(覺範)이며 호는 적음존자(寂音尊者). 나이 19에 동경 천왕사에서 시경(試經)하여 득도했음. 처음의 이름은 혜홍(慧洪)이었으며 진정극문(眞淨克文)을 참알해 법을 얻었음. 숭녕(1102-1106)년 중에 임천 북선원에 주지했으며 후에 금릉 청량사로 옮겼음. 오래지 않아 광승(狂僧), 도첩(度牒)의 모명(冒名)과 두루 산방(訕謗)의 일을 연결해 무고(誣告)하는 통에 무함(誣陷)으로 감옥에 들어갔는데 장무진이 특주(特奏)하여 득도(得度)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음. 태위 곽천민이 주청하여 침복(椹服. 僧服)과 보각원명이란 호를 주었음. 자칭이 적음존자(寂音尊者). 정화 원년(11 11) 무렵() 장곽과 교유(交遊)하며 후선(厚善)함에 연좌되었으니 장곽은 정사(政事)를 그만두었으며 질투하는 자가 있어 스님이 두 사람과 교통(交通)했다고 무고(誣告)로 가리키는 통에 조칙으로 가사를 뺏고 연주로 유배를 떠났음. 3년 만에 비로소 돌아옴을 얻었으나 같은 해 겨울에 다시 병주옥에 구속되었다가 해를 넘기자 석방됨을 얻었음. 드디어 승복을 버리고 구봉의 동산(洞山)에 들어가 문장으로 자오(自娛)했음. 그 후 장차 상서(湘西)에 이르려는데 길이 남창을 경유했으며 다시 도사(道士)의 무함(誣陷)으로 하옥되었음. 다행히 사면을 만나 면함을 얻었음. 드디어 남대 명백암으로 들어가 거주했는데 정강 원년(1126) 재도(再度. 再次) 체발(剃髮)을 몽사(蒙賜)하여 구명(舊名) 혜홍(慧洪)을 회복했음. 건염 2년 동안(同安)에서 입적했으니 나이는 58. 저서에 임간록 2권ㆍ승보전 30권ㆍ고승전 12권ㆍ지증전 10권ㆍ지림 10권ㆍ냉재야화 10권ㆍ천주금련 1권ㆍ석문문자선 30권ㆍ어록게송 1()ㆍ법화합론 7권ㆍ릉엄존정의 10권ㆍ원각개증의 2권ㆍ금강법원론 1권ㆍ기신론해의 2권이 있어 모두 세상에 행함 [불조역대통재19. 보등록7. 속전등록22].

攢花簇錦; 오색이 빈분(繽紛; 어지럽게 흩어지는 모양)하면서 번성하고 염려(豔麗; 선명하고 미려함)한 경상(景象)을 형용.

四六文; 문체의 이름. 변문(騈文)1(). 네 글자나 여섯 글자로 대우(對偶; 둘이 서로 짝을 지음)를 지음으로 인해 고로 이름함. 변문을 사륙(四六)으로 대우(對偶)한 것은 남조(南朝)에서 형성되었으며 당송에서 성행했음. 당 이래 격식이 완전히 정형(定型)되어 드디어 사륙으로 명칭했음. 또 사륙문 혹 사륙체로 일컬음 [백도사전].

閑言長語; 한언어(閑言語)니 많이 남아 무용(無用)한 말.

孩撫; 뜻이 해아(孩兒)를 무위(撫慰)함과 일반임. 부시(俯視; 내려다 봄)하며 소간(小看; 輕視)하는 뜻을 함유했음.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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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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