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문무고

종문무고(宗門武庫) 027

태화당 2022. 8. 4. 07:27

27*佛眼禪師在五祖時*圓悟*臨濟*第一句*薦得 堪與佛祖爲師 *第二句下薦得 堪與*人天爲師 第三句下薦得 自救不了 一日忽謂圓悟曰 我擧三句向爾 以手指屈曰 此是第二句 第三句已說了便走 圓悟*擧似五祖 祖曰 也好* 眼乃辭五祖 參歸宗眞淨和尙去 後祖謂圓悟曰 歸宗波瀾闊 弄大旗手段 遠到彼 未必相契 未數日有書抵圓悟曰 北到歸宗偶然漏網 聞雲居淸首座作晦堂眞贊曰 聞時富貴見後貧窮 頗疑著他 及相見果契合 踰年復還祖山 衆請秉拂 却說*心性禪 祖曰 遠却如此說禪 也莫管他 圓悟和尙嘗參*蘄州北烏牙方禪師 *佛鑑和尙嘗參東林宣祕度禪師 皆得*照覺平實之旨 同到五祖室中 平生所得一句用不著 久之無契悟 皆謂 五祖强*移換他 出不遜語忿然而去 祖云 汝去遊*浙中 *一頓熱病打時 方思量我在 圓悟到金山 忽染*傷寒*困極 移入*重病閭 遂以平生參得底禪試之 無一句得力 追繹五祖之語乃自誓曰 我病稍間卽徑歸五祖 佛鑒在定慧 亦患傷寒極危 圓悟*甦省經由定慧 拉之同歸*淮西 佛鑒尙固執 且令先行 圓悟亟歸祖山 演和尙喜曰 汝復來耶 卽日參堂 便入侍者寮 經半月偶陳*提刑*解印還蜀 過山中問道 因語話次 祖曰 提刑少年曾讀*小艶詩否 有兩句頗相近 *頻呼小玉元無事 秖要*檀郞認得聲 提刑應喏喏 祖曰 且子細 圓悟適自外歸侍立次 問曰 聞和尙擧小艶詩 提刑會麽 祖曰 他秖認得聲 圓悟曰 秖要檀郞認得聲 他旣認得聲 爲什麽却不是 祖曰 如何是祖師西來意庭前柏樹子聻 圓悟忽有省 遽出去見雞飛上欄干鼓翅而鳴 復自謂曰 此豈不是聲 遂袖香入室通所悟 祖曰 佛祖*大事非小根劣器所能*造詣 吾助汝喜 祖復遍謂山中*耆舊曰 我侍者參得禪也 佛鑒和尙自浙中歸祖山 躊躇不肯挂塔 圓悟曰 我與汝相別纔踰月 比今相見時如何 鑒曰 我只疑爾這些子 遂參堂 一日同圓悟侍祖 因遊山話次擧 *東寺和尙問*仰山 汝是甚處人 仰山曰 廣南人 寺曰 我聞廣南有鎭海明珠 曾收得否 山曰收得 寺曰珠作何色 仰曰 *白月卽現*黑月卽隱 寺曰 何不*呈似老僧 仰山叉手近前曰 慧寂昨到潙山被索此珠 直得無言可對無理可伸 顧謂佛鑒曰 旣曰收得 逮索此珠時 又曰無言可對無理可伸 是如何 佛鑒無語 忽一日謂圓悟曰 仰山見東寺因緣 我有語也 東寺當時只索一顆珠 仰山當下傾出一*栲栳 圓悟深肯之

 

佛眼; 淸遠(1067-1120) 宋代楊岐派僧 號佛眼 臨邛(四川邛崍)李氏 嚴正寡言 因讀法華有疑 造舒州太平 依五祖法演參究不契 辭去 至金陵蔣山 邂逅靈源 靈源勸返 時演已遷海會 及再謁 遂得大悟 隱居大中庵 崇寧萬壽寺新成 王渙之請師開法 次補龍門 逾十二年 居和之褒禪 宣和初(1119) 歸蔣山之東堂 二年 辭世 壽五十四 臘四十 有語錄八卷 [普燈錄十一 續傳燈錄二十五]

圓悟; 同圜悟 圜悟克懃 見上16圜悟

臨濟; 義玄(?-867) 臨濟宗之祖 唐代曹州(河南)南華人 俗姓邢 幼負出塵之志 及落髮受具足戒後 便慕禪宗 初到江西參黃蘗希運 又禮謁高安大愚 潙山靈祐等 後還黃蘗 受印可 宣宗大中八年(854) 至河北鎭州 住於臨濟院 適丁兵革 師卽棄去 太尉默君和 於城中捨宅爲寺 亦以臨濟爲額 迎師居焉 後拂衣南邁至河府 府主王常侍 延以師禮 住未幾卽來大名府興化寺 居于東堂 師無疾忽一日攝衣據坐 與三聖問答畢 寂然而逝 時唐咸通八年丁亥 孟陬月十日也 門人以師全身 建塔于大名府西北隅 勅諡慧照禪師 塔號澄靈 師設三玄三要四料簡等機法 接引徒衆 更以機鋒峭峻著名於世 別成一家 遂成臨濟宗 師接化學人 每以叱喝顯大機用 世有德山棒臨濟喝之稱 [宋高僧傳十二 傳燈錄十二 臨濟語錄]

第一句; 指表達玄妙禪義 直指人心的語句 按禪家所說第一句 實爲不可用語言文字表述的 所謂宗門妙語

薦得; 又作薦取 薦 領會 領悟 又識 認識

第二句; 相對第一句而言 指表達通常意義(非玄妙禪義) 或屬方便法門的語句

人天; 一人趣與天趣 此是六道十界中之二界 皆爲迷妄之界 又指人與天神 二禪家常將法堂上聽法大衆稱作人天 此指一

擧似; 擧示 擧說言句告訴某人 似 相當于與 向

; 語氣詞 用于句尾 表示疑問 或陳述結束 正字通 聻 梵書聻爲語助 音你

心性; 卽心之本性 又稱自性

蘄州; 位於湖北省黃州府揚子江邊 隣接於安徽省江西省 此州有四祖道信駐錫的雙峰山正覺寺 與五祖弘忍所住的憑茂山 又有黃梅山 三角山 烏牙山等

佛鑑; 慧懃(1059-1117) 又作慧勤 宋代楊岐派僧 舒州(安徽)人 俗姓汪 字佛鑑 自幼師事廣敎圓深 後參五祖法演 竝爲其法嗣 曾應舒州太守孫鼎臣之請 住持太平山興國禪院 法道大播 徽宗政和(1111-1118)初年 師應詔住汴京智海寺 經五年乞歸 得旨居建康蔣山 樞密鄧子常上奏 賜師紫衣 竝賜佛鑑禪師之號 政和七年入寂 壽五十九 與佛果克勤佛眼淸遠 同被譽爲五祖法演門下之三佛 [佛祖歷代通載十九 釋氏稽古略四 五燈會元十九]

照覺; 常總(1025-1091) 宋代黃龍派僧 劍州尤谿(四川劍閣)人 俗姓施 字照覺 又稱常聰 十一歲依寶雲寺文兆出家 從契思受具足戒 後隨黃龍慧南 參究二十年 竝嗣其法 慧南歿 住泐潭寶峰寺 後移江州(江西九江)東林寺 元豐三年(1080) 敕改廬山東林律寺爲禪林 師奉命駐錫說法 其徒以爲應慧遠之讖 吾滅七百年後 有肉身大士革吾道場 遂大揚法化 曾與蘇軾交遊 五年 神宗敕主相國寺智海禪院 固辭不受 乃賜紫衣及廣惠禪師之號 元祐三年(1088) 賜號照覺禪師 六年示寂 壽六十七 [禪林僧寶傳二十四 釋氏稽古略四 續傳燈錄十六]

浙中; 浙江 今浙江省

移換; 移動變換

一頓; 頓 量詞 名量用于飯的餐數 動量用于喫飯 斥責 勸說 打罵等行爲的次數 或說 唐土之刑 打罪人二十棒爲一頓

傷寒; 因寒熱濕燥之邪氣而成得病

困極; 疲憊 疲困

重病閭; 蓋亦是延壽堂也 [象器箋二]

甦省; 蘇醒 淸醒

淮西; 淮右 爲一地域名稱 宋在蘇北和江淮設淮南東路和淮南西路 淮南東路又稱淮左 淮南西路稱淮右 淮右多山 淮左多水 一般指今江淮地區 [百度百科] 釋氏稽古略三 四祖道信大師尊者 姓司馬氏 世居河內 徙居蘄州廣濟縣 今淮西也

提刑; 古代官職名 各朝代正式官名有別 但一般均簡稱提刑 宋朝開始設立提點刑獄公事 設於各路(行政單位) 主管所屬各州的司法 刑獄和監察 兼管農桑 其官署稱憲司 [百度百科]

解印; 解下印綬 謂辭免官職

小艶詩; 委巷中衆人吟諷的詩 一段風光畫不成 洞房深處說愁情 頻呼小玉元無事 只要檀郞認得聲

頻呼小玉; 頻呼小玉元無事 只要檀郞認得聲之略 此二句禪錄頻出 然未詳典故 按網站百度 這詩出自唐人筆記霍小玉傳 小姐想通知情郞 沒有機會 故意在房裏叫丫頭的名字 使情郞知我在這裏

檀郞; 指郞君 情人

祖師西來意; 初祖達磨自西天來此土傳禪法 究竟意思如何 究此意思者 卽究佛祖之心印也

大事; 領悟禪法 超脫生死之事 禪家以此爲本分大事

造詣; 學業專門技術等達到的程度境地

耆舊; 又作長老 老宿 耆宿 卽年老德高道行深湛之老者

東寺; 如會(744-823) 唐代僧 韶州(廣東)始興人 幼卽出家 大曆八年(773)參徑山道欽 後又參訪馬祖道一 爲其法嗣 於馬祖處時 因來參者衆多 僧堂禪床爲之而折 故有折床會之稱 其後 入主長沙東寺 法門鼎盛 時號東寺禪窟 穆宗長慶三年示寂 壽八十 諡號傳明大師 [宋高僧傳十一 傳燈錄七 釋氏稽古略二]

仰山; 慧寂(807-883) 唐代僧 爲潙仰宗開山祖師之一 韶州(廣東韶關)葉氏 初生頗有異蹟 爲童穉 依番禺安和寺不語通出家 年十四 父母欲奪其志 遂斷二指以爲誓 因從剃落 通累加接引 而師無所啓發 年十八 通卒 因往謁乳源 洎筠州處微 吉州性空 鵶山躭源 皆不契 至大和三年(829) 參大潙靈祐 擧性空如人在井之緣 因而有省 山指令請戒於襄陽之大悲 師曰 慧寂平生不妄語 山云 你但依沙門法 師從之 時年三十三矣 復還潙山作直歲 尋領衆居郴州之王莽山 旣而移錫居袁州仰山 衆盈數百 一日 有梵僧負貝葉造師 師問 近離甚處 曰 早別西天 師曰 太遲生 曰 游山翫水 師曰 神通不無你 佛法未夢見 曰 來此禮文殊 却遇小釋迦 語訖隱去 大中十三年(859) 韋宙中丞 爲師創洪州觀音院居之 咸通(860-8 73)中 歸韶州之東平山 至中和三年二月十三日 集衆說偈 以兩手抱屈膝 儼然而終 歸葬於仰山 師行道於世 蒙寵賜者三 懿宗賜號知宗 僖宗賜澄虛 昭宗諡智通 [祖庭事苑七 宋高僧傳十二]

白月; 又曰白分 印度之曆法 以月之盈缺 立白黑之名 自月盈至於滿之間爲白分 稱爲白月 一日乃至白月十五日 自十六日以下 爲黑分 又爲黑月 合前之黑月與後之白月而爲一月 [西域記二]

黑月; 又曰黑分 太陰曆之下半月也 西域記二曰 月虧至晦謂之黑分 黑分或十四日十五日 月有大小故也

呈似; 示與 呈 示也 見也 似 相當于與

栲栳; 用柳條或竹篾 編成的圓形盛物器具

 

27불안선사(*佛眼禪師)가 오조(五祖; 오조산)에 있을 때 원오(*圓悟)가 거()했다. 임제(*臨濟)가 이르되 제1(*第一句) 아래에서 천득(*薦得)하면 불조에게 스승이 되어 줌을 감당하고 제2(*第二句) 아래에서 천득하면 인천(*人天)에게 스승이 되어 줌을 감당하고 제3구 아래에서 천득하면 자기를 구제함도 마치지 못한다. 어느 날 홀연히 원오(圓悟)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3구를 들어 너를 향하겠다. 손가락을 꼽으며 가로되 이것은 이 제2구다. 3구도 이미 설했다 하고는 곧 달아났다. 원오가 오조(五祖)에게 거사(*擧似)하자 오조가 가로되 또한 좋은가(*). 불안(佛眼; 淸遠)이 이에 오조에게 고별하고 귀종(歸宗) 진정화상(眞淨和尙; 克文)을 참()하러 갔다. 후에 오조가 원오에게 일러 가로되 귀종(歸宗; 克文)은 파란(波瀾)이 광활(廣闊)하여 대기(大旗)의 수단을 희롱한다. 청원(淸遠)이 거기에 이르렀으나 반드시 상계(相契)하지는 않았다. 며칠 되지 않아 서신이 있어 원오에게 이르렀으니 가로되 북방으로 귀종에 이르러 우연히 망()이 샜습니다. 운거청(雲居淸; 미상) 수좌가 회당(晦堂; 祖心)의 진찬(眞贊)을 지은 것을 들었는데 가로되 문시(聞時)엔 부귀했으나 견후(見後)에 빈궁(貧窮)하다. 자못 그를 의착(疑著)했고 상견함에 이르러 과연 계합(契合)했습니다. 해를 넘겨 다시 조산(祖山; 五祖山)으로 귀환했다. 대중의 청으로 병불(秉拂)했는데 도리어 심성선(*心性)을 설했다. 오조가 가로되 청원(淸遠)이 도리어 이와 같이 선()을 설하니 또한 그것()과 상관(相管)이 없다. 원오화상(圓悟和尙)은 일찍이 기주(*蘄州) () 오아방(烏牙方; 미상) 선사를 참했고 불감화상(*佛鑑和尙)은 일찍이 동림(東林) 선비도(宣祕度) 선사를 참했는데 다 조각(*照覺)의 평실지지(平實之旨)를 얻었다. 함께 오조의 실중(室中)에 이르렀는데 평생 얻은 바에 1구도 쓰지 못했고 오랫동안 계오(契悟)가 없었다. 다 이르기를 오조가 억지로 그것을 이환(*移換)한다. 불손(不遜)한 말을 내뱉고 분연(忿然)하며 떠났다. 오조가 이르되 너희가 절중(*浙中)으로 가서 유행(遊行)하다가 1(*一頓)의 열병(熱病)에 걸림을 만났을 때 바야흐로 나를 사량(思量)할 것이다. 원오가 금산(金山)에 이르러 홀연히 상한(*傷寒)에 감염되어 곤극(*困極)했고 중병려(*重病閭)로 이입(移入)했다. 드디어 평생 참득(參得)한 선()으로써 이를 시험했는데 득력(得力)1구도 없었다. 오조의 말씀을 추역(追繹; 추억하며 풀이함)하고 이에 자서(自誓)해 가로되 나의 병이 조금 나으면(; 病愈) 곧 오조로 경귀(徑歸)하리라. 불감(佛鑒)은 정혜(定慧)에 있으면서 또한 상한(傷寒)의 병환으로 극히 위험했다. 원오가 소성(*甦省)하자 정혜를 경유하여 그(불감)를 끌고() 회서(*淮西)로 동귀(同歸)했다. 불감은 오히려 고집(固執)하며 다만 먼저 가게 했다. 원오가 급하게 조산(祖山; 오조산)으로 돌아오자 연화상(演和尙)이 기뻐하며 가로되 네가 다시 왔느냐. 즉일(卽日)에 참당(參堂)하고 바로 시자료(侍者寮)에 들어갔다. 반 달이 경과했는데 우연히 진제형(*提刑)이 해인(*解印)하고 환촉(還蜀)하다가 산중에 이르러() 문도(問道)했다. 어화(語話)하던 차로 인해 오조가 가로되 제형(提刑)은 소년(少年)에 일찍이 소염시(*小艶詩)를 읽었는가. 양구(兩句)가 있어 자못 상근(相近)하나니 소옥을 자주 부름은 원래 무사하나니(*頻呼小玉元無事) 다만 단랑(*檀郞)이 소리를 인득(認得聲)함을 요함이다. 제형이 낙낙(喏喏; , )으로 응대했다. 오조가 가로되 다만 자세(子細)해야 한다. 원오가 마침 밖으로부터 돌아와 시립(侍立)하던 차에 물어 가로되 화상이 소옥시(小艶詩)를 듦을 듣고 제형이 알았습니까. 오조가 가로되 그는 다만 소리를 인득(認得聲)했다. 원오가 가로되 다만 단랑이 소리를 인득함을 요함이다 하매 그가 이미 소리를 인득했거늘 무엇 때문에 도리어 옳지 못합니까. 오조가 가로되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인가,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다 한 것은(). 원오가 홀연히 성찰이 있었고 급히 나가서 보니 닭이 난간(欄干)에 비상(飛上)하며 날개를 치며 울었다. 다시 스스로 일러 가로되 이것이 어찌 이 소리가 아니겠는가. 드디어 수향(袖香; 향을 소매 속에 넣음)하고 입실하여 깨친 바를 통고했다. 오조가 가로되 불조의 대사(*大事)는 소근(小根)의 열기(劣器)가 능히 조예(*造詣)할 바가 아니다. 내가 너의 기쁨에 일조(一助)한다. 오조가 다시 산중의 기구(*耆舊)에게 두루 일러 가로되 나의 시자가 선()을 참득(參得)했습니다. 불감화상(佛鑒和尙)이 절중(浙中)으로부터 조산(祖山)으로 돌아왔으나 주저(躊躇)하며 괘탑(挂塔)을 수긍하지 않았다. 원오가 가로되 내가 너와 상별(相別)한 지 겨우 달을 넘겼다. 지금의 상견할 때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불감이 가로되 나는 다만 너의 이 사자(些子; 些少)를 의심한다. 드디어 참당(參堂)했다. 어느 날 원오와 함께 오조를 시립했는데 유산(遊山)의 이야기를 하던 차로 인해 거()했다. 동사화상(*東寺和尙)이 앙산(*仰山)에게 묻되 너는 이 어느 곳의 사람인가. 앙산이 가로되 광남(廣南; 韶州) 사람입니다. 동사가 가로되 내가 듣기로 광남에 진해명주(鎭海明珠)가 있다던데 일찍이 수득(收得)했는가. 앙산이 가로되 수득했습니다. 동사가 가로되 구슬()이 어떤 색을 지었는가. 앙산이 가로되 백월(*白月)에는 곧 나타나고 흑월(*黑月)엔 곧 숨습니다. 동사가 가로되 왜 노승에게 정사(*呈似)하지 않느냐. 앙산이 차수(叉手)하고 근전(近前; 앞으로 다가가다)하여 가로되 혜적(慧寂)이 어제 위산(潙山)에 이르렀다가 이 구슬을 찾음을 입었는데 바로 가히 대답할 말이 없고 가히 펼 이치가 없음을 얻었습니다. 불감을 돌아보며 일러 가로되 이미 가로되 수득(收得)했다 했거늘 이 구슬을 찾을 때에 이르러() 또 가로되 가히 대답할 말이 없고 가히 펼 이치가 없다 했으니 이는 어떠한가. 불감이 말이 없었다. 홀연히 어느 날 원오에게 일러 가로되 앙산이 동사를 본 인연에 내가 할 말이 있다. 동사가 당시에 다만 한 알을 찾았는데 앙산이 당하(當下; 즉시)에 한 고로(*栲栳)를 경출(傾出)했다. 원오가 깊이 그것을 수긍했다.

 

佛眼; 청원(淸遠; 1067-1120)이니 송대 양기파승. 호는 불안(佛眼)이며 임공(臨邛; 사천 공래) 이씨(李氏). 엄정(嚴正)하고 말이 적었음. 법화경을 읽다가 의심이 있음으로 인해 서주(舒州) 태평(太平)으로 나아가 오조법연(五祖法演)에게 의지(依止)해 참구(參究)했으나 계합(契合)치 못하자 고별하고 떠나 금릉 장산(蔣山)에 이르렀는데 영원(靈源)을 해후(邂逅)했으며 영원이 돌아가기를 권했음. 때에 법연(法演)은 이미 해회(海會)로 옮겼는데 재알(再謁)함에 이르러 드디어 대오(大悟)를 얻었으며 대중암(大中庵)에 은거했음. 숭녕만수사(崇寧萬壽寺)를 새로 만들자 왕환지(王渙之)가 스님에게 청해 개법(開法)했음. 다음으로 용문(龍門)에 보임(補任)하여 12년을 넘자 화()의 포선(褒禪)에 거주하다가 선화 초(1119) 장산(蔣山)의 동당(東堂)으로 돌아온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는 54며 승랍은 40. 어록 8권이 있음 [보등록11. 속전등록25].

圓悟; 원오()와 같음. 원오극근(圜悟克懃)이니 위 16원오()를 보라.

臨濟; 의현(義玄; ?-867)이니 임제종의 개조(開祖). 당대 조주(曹州; 하남) 남화(南華)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형(). 어려서 출진(出塵)의 뜻을 졌으며() 그리고 낙발(落髮)하고 구족계를 받은 후에 곧 선종을 흠모했음. 처음엔 강서(江西)에 이르러 황벽희운(黃蘗希運; 百丈懷海法嗣)을 참알(參謁)하고 또 고안대우(高安大愚; 歸宗智常法嗣)ㆍ위산영우(潙山靈祐; 百丈懷海法嗣) 등을 예알(禮謁)했다가 뒤에 황벽으로 돌아가 인가(印可)를 받았음. 선종(宣宗) 대중 8(854) 하북의 진주(鎭州)에 이르러 임제원에 거주했는데 마침 병혁(兵革; 전쟁)을 당해 스님이 곧 버리고 떠났음. 태위(太尉) 묵군화(默君和)가 성 안에 집을 희사(喜捨)해 절을 만들고 또한 임제로써 편액(扁額)을 삼았으며 스님을 영접해 거처케 했음. 후에 옷을 떨치고 남쪽으로 떠나 하부(河府)에 이르자 부주(府主)인 왕상시(王常侍)가 스승의 예로써 연청(延請)했음.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대명부(大名府)의 흥화사(興化寺)에 와서 동당(東堂)에 거처했음. 스님이 질병이 없었는데 홀연히 어느 날 옷을 거두고 자리에 기대어 삼성(三聖)과 문답을 마치고는 고요히 떠났으니 때는 당 함통 8년 정해(丁亥) 맹추월(孟陬月; 정월) 10일임. 문인들이 스님의 전신(全身)으로써 대명부(大名府) 서북 모퉁이에 탑을 세웠음. 칙시(勅諡)가 혜조선사(慧照禪師)며 탑호가 징령(澄靈). 스님이 33(三玄三要)ㆍ사료간(四料簡) 등의 기법(機法)을 시설하여 도중(徒衆)을 접인(接引)하였음. 다시 기봉(機鋒)이 초준(峭峻)하여 세상에 저명하며 따로 일가(一家)를 이루어 드디어 임제종을 이룸. 스님이 학인들을 접화(接化; 接引해 교화)하면서 매양 질할(叱喝)로써 큰 기용(機用)을 나타내어 세상에 덕산방(德山棒)ㆍ임제할(臨濟喝)의 칭호가 있음 [송고승전12. 전등록12. 임제어록].

第一句; 현묘한 선의(禪義)을 표달(表達; 표현)하고 인심을 직지하는 어구를 가리킴. 선가에서 설하는 바 제1구를 안험컨대 실로 가히 어언과 문자를 써서 표술(表述)하지 못하는 것이 되니 이른 바 종문의 묘어(妙語).

薦得; 또 천취(薦取)로 지음. ()은 영회(領會; 깨달아 이해함). 영오(領悟; 깨달아 앎). 또 식(), 인식.

第二句; 1구를 상대하여 말함이니 통상의의(通常意義; 현묘한 禪義가 아님)를 표달(表達; 표현)하거나 혹 방편법문에 속하는 어구를 가리킴.

人天; 1. 인취(人趣)와 천취(天趣)니 이것은 이 6()10() 중의 2계며 다 미망(迷妄)의 경계가 됨. 또 사람과 천신(天神)을 가리킴. 2. 선가에서 늘 법당상(法堂上)의 청법대중(聽法大衆)을 가지고 인천(人天)이라 호칭함. 여기에선 1을 가리킴.

擧似; 들어 보임. 언구를 들어 설하면서 어떤 사람에게 알림. ()는 주다ㆍ향하다에 상당함.

; 어기사(語氣詞). 구미(句尾)에 쓰며 의문을 표시하거나 혹은 결속을 진술함. 정자통 니() 범서(梵書)에서 니()를 어조사로 삼는다. 음이 니().

心性; 곧 마음의 본성. 또 명칭이 자성(自性).

蘄州; 호북성 황주부 양자강변에 위치함. 안휘성과 강서성에 인접했음. 이 주에 4조 도신이 주석했던 쌍봉산 정각사와 5조 홍인이 거주했던 바의 빙무산이 있음. 또 황매산ㆍ삼각산ㆍ오아산(烏牙山) 등이 있음.

佛鑑; 혜근(慧懃; 1059-1117)니니 또 혜근(慧勤)으로 지으며 송대(宋代) 양기파승. 서주(舒州; 安徽)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왕()이며 자()는 불감(佛鑑). 어릴 적부터 광교원심(廣敎圓深)을 사사(師事)했고 후에 오조법연(五祖法演)을 참알(參謁)해 아울러 그의 법사(法嗣)가 되었음. 일찍이 서주태수(舒州太守) 손정신(孫鼎臣)의 요청에 응해 태평산(太平山) 흥국선원(興國禪院)에 주지(住持)하면서 법도(法道)를 크게 퍼뜨렸음. 휘종(徽宗) 정화(政和; 1111-1118) 초년(初年)에 스님이 조칙(詔勅)에 응해 변경(汴京) 지해사(智海寺)에 주()했고 5년이 경과하자 걸귀(乞歸)했고 성지(聖旨)를 얻어 건강(建康) 장산(蔣山)에 거주했음. 추밀(樞密) 등자상(鄧子常)이 상주(上奏)해 스님에게 자의(紫衣)를 주었으며 아울러 불감선사(佛鑑禪師)란 호를 주었음. 정화(政和) 7년에 입적(入寂)했으니 나이는 59. 불과극근(佛果克勤)ㆍ불안청원(佛眼淸遠)과 함께 오조법연문하(五祖法演門下)의 삼불(三佛)이란 명예를 입었음 [불조역대통재19. 석씨계고략4. 오등회원19].

照覺; 상총(常總; 1025-1091)이니 송대 황룡파승. 검주 우계(사천 검각) 사람이며 속성은 시()며 자는 조각(照覺)이니 또 명칭이 상총(常聰). 11세에 보운사 문조에게 의지해 출가했고 계사를 좇아 구족계를 받았음. 후에 황룡혜남(黃龍慧南)을 따르며 참구하기 20년이었고 아울러 그의 법을 이었음. 혜남이 죽자 늑담 보봉사에 주()했고 후에 강주(강서 구강) 동림사(東林寺)로 옮겼음. 원풍 3(1080) 칙명으로 여산 동림율사(東林律寺)를 고쳐 선림으로 삼았는데 스님이 명을 받들어 주석하며 설법했음. 그 도중이 혜원(慧遠)의 참()에 응함으로 삼았으니 내가 멸한 후 7백 년 후 육신대사(肉身大士)가 있어 나의 도량을 혁신하리라 했다 함. 드디어 법화를 크게 날렸음. 일찍이 소식(蘇軾)과 교유했음. 5년 신종이 칙령해 상국사 지해선원을 주지하라 했으나 고사하고 받지 않았음. 이에 자의(紫衣) 및 광혜선사(廣惠禪師)의 호를 주었음. 원우 3(1088) 조각선사(照覺禪師)란 호를 주었고 6년에 시적했음. 나이 67 [선림승보전24. 석씨계고략4. 속전등록16].]

浙中; 절강이니 지금의 절강성.

移換; 이동(移動)하여 변환(變換).

一頓; () 양사니 명량(名量)으론 밥의 먹는 수()에 쓰이고 동량(動量)으론 끽반(喫飯)ㆍ척책(斥責)ㆍ권설(勸說)ㆍ타매(打罵) 등의 행위의 차수(次數; 次例의 수)에 쓰임. 혹은 설하기를 당토(唐土)의 형벌은 죄인을 때리면서 20()1()으로 삼는다 함.

傷寒; 춥거나 덥거나 습하거나 건조함의 사기(邪氣)로 인해 득병(得病)을 이룸.

困極; 피비(疲憊; 피곤하고 고달픔). 피곤.

重病閭; 대개 역시 연수당(延壽堂)[상기전2]

甦省; 소성(蘇醒). 청성(淸醒).

淮西; 곧 회우(淮右)니 한 지역의 명칭이 됨. ()에서 소북(蘇北)과 강회(江淮)에 회남동로(淮南東路)와 회남서로(淮南西路)를 설치했는데 회남동로는 또 명칭이 회좌(淮左)며 회남서로는 명칭이 회우(淮右)니 회우엔 산이 많고 회좌엔 물이 많음. 일반으로 지금의 강회지구를 가리킴 [백도백과]. 석씨계고략3. 4조 도신대사 존자는 성이 사마씨며 세대(世代; 여러 대)로 하내(河內)에 거주했고 기주(蘄州) 광제현으로 사거(徙居)했으니 지금의 회서(淮西).

提刑; 고대 관직의 이름. 각 조대(朝代)의 정식 관명(官名)에 다름이 있으나 다만 일반으로 균일하게 간칭이 제형임. 송조(宋朝)에서 개시(開始)하여 제점형옥공사(提點刑獄公事)를 설립했고 각로(各路; 행정단위)에도 설립했음. 주관(主管)의 소속은 각주(各州)의 사법(司法)이며 형옥(刑獄)과 감찰, 농상(農桑)을 겸관(兼管)했음. 그 관서는 명칭이 헌사(憲司)[백도백과].

解印; 인수(印綬)를 해하(解下; 풀다). 이르자면 관직을 사면(辭免).

小艶詩; 위항(委巷; 좁고 지저분한 거리) 중에서 중인(衆人)이 음풍(吟諷; 읊음)하는 시니 일단(一段)의 풍광은 그림을 이루지 못하는데/ 동방(洞房; 깊숙한 방)의 깊은 곳에서 수정(愁情)을 설한다/ 자주 소옥을 부름은 원래 일이 없고/ 다만 단랑(檀郞)이 소리를 인득(認得)함을 요함이다.

頻呼小玉; 소옥을 자주 부름은 원래 일이 없고 단지 단랑(檀郞; 郞君. 情人)이 소리를 알아 얻기를 요함이다의 약어(略語). 2구는 선록에 자주 나오지만 그러나 전고(典故; 典據가 되는 故事)가 미상임. 망참(網站; Website) 백도(百度; Baidu)를 안험컨대 이 시()는 당인(唐人)의 필기(筆記)인 곽소옥전(霍小玉傳)으로부터 나왔다 함. 소저(小姐)가 정랑(情郞)에게 통지하려고 생각은 하나 기회가 있지 않는지라 고의로 방 속에 있으면서 아두(丫頭; 머리를 두 가닥으로 땋은 소녀)의 명자(名字)를 불러 정랑으로 하여금 내가 이 속에 있음을 알게 함이라 했음.

檀郞; 낭군(郞君), 정인(情人)을 가리킴.

祖師西來意; 초조 달마가 서천(西天; 인도)으로부터 차토(此土; 중국)로 와서 선법(禪法)을 전했거니와 구경(究竟; 畢竟) 의사(意思)가 어떠한가. 이 의사를 궁구하는 것이 곧 불조의 심인(心印)을 궁구하는 것임.

大事; 선법을 영오(領悟)하여 생사를 초탈하는 일. 선가에서 이것으로써 본분대사(本分大事)로 삼음.

造詣; 학업이나 전문기술 등이 달도한 정도(程度)의 경지.

耆舊; 또 장로ㆍ노숙ㆍ기숙으로 지음. 곧 나이가 많고 덕이 높고 도행이 심잠(深湛; 은 깊을 잠)한 노자(老者).

東寺; 여회(如會; 744-823)니 당대승. 소주(韶州; 광동) 시흥 사람. 어릴 적에 곧 출가하였고 대력 8(773) 경산도흠(徑山道欽)을 참알(參謁)하고 후에 또 마조도일(馬祖道一)을 참방(參訪)하여 그의 법사(法嗣)가 되었음. 마조에 거처할 때 내참(來參)하는 자의 무리가 많아 승당의 선상(禪床)이 부러진지라 고로 절상회(折床會)의 칭호가 있음. 그 후 장사(長沙)의 동사(東寺)에 들어가 주지(主持)하였는데 법문이 정성(鼎盛; 흥성)해 당시에 호하기를 동사선굴(東寺禪窟)이라 했음. 목종(穆宗) 장경 3년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80이며 시호가 전명대사(傳明大師) [송고승전11. 전등록7. 석씨계고략2].

仰山; 혜적(慧寂; 807-883)이니 당대승. 위앙종(潙仰宗)의 개산조사(開山祖師)의 하나가 됨. 소주(韶州; 광동 소관) 섭씨(葉氏)며 처음 출생하자 자못 이적(異蹟)이 있었음. 어린이(童穉)가 되자 번옹(番禺) 안화사(安和寺)의 불어통(不語通)에 의지(依止)해 출가하였음. 나이 14에 부모가 그 뜻을 뺏으려 하자 드디어 두 손가락을 잘라 맹서(盟誓)를 삼았으며 인하여 체락(剃落)을 좇았음. ()이 누차(屢次) 접인(接引)을 가했으나 스님은 계발(啓發)한 바가 없었음. 나이 18에 통이 죽자 인해 유원(乳源)에게 가서 참알(參謁)했으며 균주(筠州)의 처미(處微)ㆍ길주(吉州)의 성공(性空)ㆍ아산(鵶山)의 탐원(躭源)에 이르렀으나 다 계합(契合)치 못했음. 대화(大和) 3(829)에 이르러 대위영우(大潙靈祐)를 참알해 성공(性空), 마치 어떤 사람이 우물에 있음과 같다는 인연을 들어 인해 살핌이 있었음. 위산(潙山)이 양양(襄陽)의 대비원(大悲院)에 청계(請戒; 곧 수계)를 지령(指令)하자 스님이 가로되 혜적(慧寂)은 평생에 망어(妄語)를 하지 않았습니다. 위산이 이르되 너는 단지 사문법(沙門法)에 의지(依止)하라. 스님이 이를 좇았는데 때의 나이는 33이었음. 다시 위산으로 돌아와 직세(直歲)가 되었으며 이윽고 대중을 거느리고 침주(郴州)의 왕망산(王莽山)에 거주하였음. 그러고는 이석(移錫)하여 원주(袁州)의 앙산(仰山)에 거주했는데 대중이 수백(數百)을 채웠음. 어느 날 어떤 범승(梵僧)이 패엽(貝葉; 佛經을 가리킴)을 지고 스님에게 나아가자 스님이 묻되 최근에 어느 곳을 떠났느냐. 가로되 아침에 서천(西天)을 떠났습니다. 스님이 가로되 너무 느리다. 가로되 유산완수(游山翫水)했습니다. 스님이 가로되 신통은 너에게 없지 않으나 불법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 가로되 여기에 와서 문수(文殊)에게 예배하려 했더니 도리어 소석가(小釋迦)를 만났습니다. 말을 마치자 은몰(隱沒)했음. 대중 13(859) 위주중승(韋宙中丞)이 스님을 위해 홍주(洪州)에 관음원(觀音院)을 창건하고 거쳐하게 했음. 함통(咸通. 860-873) 중에 소주(韶州)의 동평산(東平山)으로 돌아갔다가 중화(中和) 3213일에 이르자 대중을 모아 게()를 설하고 두 손으로 무릎을 안아 구부러지게 하고는 엄연(儼然; 의젓이)히 마쳤음. 앙산으로 귀장(歸葬)했음. 스님이 세상에 도를 행해 총사(寵賜)를 입은 게 세 번이니 의종(懿宗)이 호()를 주어 지종(知宗)이라 했고 희종(僖宗)이 징허(澄虛)를 주었고 소종(昭宗)이 지통(智通)이라 시호(諡號)했음 [조정사원7. 송고승전12].

白月; 또 가로되 백분(白分). 인도의 역법은 달의 차고 이지러짐으로써 백흑의 이름을 세웠음. 달이 참으로부터 가득함에 이르기까지의 사이를 백분으로 삼으니 일컬어 백월이라 함. 1일에서 이에 백월의 15일에 이르기까지임. 16일 이하로부터 흑분이 되며 또 흑월이라 함. 앞의 흑월과 뒤의 백월을 합쳐서 한 달로 삼음 [서역기2].

黑月; 또 가로되 흑분(黑分)이니 태음력(太陰曆)의 아래 반 달임. 서역기2에 가로되 달이 이지러져 그믐에 이르기까지를 흑분이라 이르는데 흑분은 혹은 1415일이니 달이 대소가 있는 연고이다.

呈似; 보여줌. ()은 시(). (). ()는 여()에 상당함.

栲栳; 버들가지나 혹 대 껍질을 써서 엮어 만든 원형이면서 물건을 담는 기구.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tistory.com)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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