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大覺曰 前輩有*聰明之資 無安危之慮 如*石門聰 *棲賢舜 二人者可爲戒矣 然則人生定業 固難明辨 細詳其原 安得不知其爲忽慢不思之過*歟 故曰 禍患藏於*隱微 發於人之所忽 用是觀之 尤宜謹畏〈九峯集〉
●聰明; 見聞不惑 故曰聰明
●石門聰; 襄州谷隱山石門寺 蘊聰禪師 嗣首山念禪師 南嶽下九世 得法後住石門日 襄州太守 以私意笞辱 旣歸 衆僧迎於道側 首座趨前問訊曰 太守無辜曲辱和尙 師以手指地云 平地起骨堆 隨手湧一骨堆 太守聞知 令人削去 復湧如初 太守全家死於襄州也
●棲賢舜; 南康軍雲居曉舜禪師 字老夫 嗣洞山聰 瑞州胡氏子 淸源下十世 住廬山棲賢日 槐都官守南康 多貪墨蹟 舜不忍以常住物 結情固位 被人譖於郡守問還俗 民其衣 大覺昔曾入舜之室 故往京都訪大覺 讓舜正𥨊 璉居偏室 仁宗數詔入內問道 竟不言舜事 偶一日聖旨勑淨慈飯僧 見大覺侍舜甚恭 歸奏 帝召見之 乃嘆曰 道韻奇偉 眞山林達士 遂於扇書曰賜曉舜依舊爲僧 再住棲賢 仍賜紫衣銀鉢 舜罷棲賢日 有二壯力 舁轎至羅漢寺前 二人相謂曰 今不是我院長老 不須遠送 棄轎而回 舜旣再來 令人安撫曰 你當時做得是 但安心不必疑懼 入院上堂曰 無端被譖枉遭迍 半年有餘作俗人 今日再歸三峽寺 幾多歡喜幾多嗔
●歟; 疑辭 謙退而不敢質言 而言歟也
●隱微; 上幽暗也 下細事也 謂事之首不足慮 禍隱微深可憂也 葢著者人所易見 故得爲之 隱者人所難知 故當謹而不可忽也
【14】 대각(大覺; 懷璉)이 가로되 전배(前輩)에 총명(*聰明)한 자질(資質)이 있으면서 안위(安危)의 우려(憂慮)가 없음은 석문총(*石門聰)과 서현순(*棲賢舜) 같은 이니 두 사람을 가히 경계(警戒)로 삼아야 한다. 그러하여 곧 인생의 정업(定業)을 참으로(固) 명변(明辨)하기 어렵지만 그 원인(原因)을 세상(細詳; 상세)히 하면 어찌 그것이 홀만(忽慢; 輕慢)이 되어 사의(思議)치 못할 허물인 줄 알지 못함을 얻겠는가(*歟). 고왈(故曰) 화환(禍患)이 은미(*隱微)에 감추어졌다가 사람이 홀만(忽慢)하는 바에서 발생한다. 이를 써서 관찰하건대 더욱 의당(宜當) 근외(謹畏)해야 한다. 〈九峯集〉.
●聰明; 견문(見聞)에 미혹하지 않는지라 고로 가로되 총명이다.
●石門聰; 양주(襄州; 지금의 호북성 襄樊) 곡은산(谷隱山) 석문사(石門寺) 온총선사(蘊聰禪師; 965-1032)는 수산념(首山念; 省念이니 風穴延沼를 이었음) 선사를 이었으니 남악하 9세다. 득법한 후 석문(石門)에 주(住)하던 날, 양주태수(襄州太守)가 사의(私意)로 태욕(笞辱; 매질해 욕을 보임)했다. 이미 귀환하자 중승이 도로 가에서 영접했다. 수좌가 앞으로 달려가 문신하며 가로되 태수가 무고(無辜)히 화상을 곡욕(曲辱; 굴욕)했습니다. 스님이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이르되 평지에 골퇴가 일어난다(平地起骨堆). 손을 따라 한 골퇴가 솟았다. 태수가 문지(聞知)하고는 사람을 시켜 삭거(削去)하게 했는데 다시 솟음이 처음과 같았다. 태수의 전가(全家)가 양주에서 죽었다.
●棲賢舜; 남강군(南康軍) 운거(雲居) 효순선사(曉舜禪師)는 자가 노부(老夫)며 동산총(洞山聰; 曉聰이니 文殊應眞을 이었음)을 이었고 서주(瑞州; 지금의 강서성 高安縣) 호씨의 아들이니 청원하 10세다. 여산(廬山) 서현(棲賢)에 주지하던 날, 괴도관(槐都官)이 남강을 수비했는데 묵적(墨蹟)을 많이 탐했다. 효순(曉舜)이 상주물(常住物)로, 결정(結情)하여 자리를 견고하게 함을 인내하지 못했다. 사람이 군수에게 참소하매 문책하여 환속함을 입었고 민기의(民其衣; 그 옷을 민간인과 같이 함)했다. 대각(大覺)이 지난날(昔) 일찍이 효순의 실(室)에 입(入)한지라 고로 경도(京都)에 가서 대각을 방문하자 효순에게 정침(正𥨊)을 양보하고 회련(懷璉)은 편실(偏室)에 거처했다. 인종(仁宗)이 자주 불러(詔) 입내(入內)하여 문도(問道)했으나 마침내 순사(舜事)를 말하지 않았다. 우연히 어느 날 성지(聖旨)로 칙령(勑令)해 정자(淨慈)에서 반승(飯僧; 齋僧)했는데 보매 대각(大覺)이 효순(曉舜)을 모심이 매우 공경스러웠다. 회귀하여 상주(上奏)하자 황제가 불러 그를 보고 이에 감탄하며 가로되 도운(道韻; 氣韻)이 기위(奇偉)하니 참으로 산림(山林)의 달사(達士)로다. 드디어 부채에 써서(書) 가로되 효순이 의구히 위승(爲僧; 승인이 됨)함을 내린다(賜曉舜依舊爲僧). 다시 서현(棲賢)에 주(住)하게 하고 인하여 자의(紫衣)와 은발(銀鉢)을 주었다. 효순이 서현에서 파면되던 날 두 장력(壯力; 力士)을 써서 가마를 마주들게 했는데 라한사(羅漢寺) 앞에 이르자 두 사람이 서로 일러 가로되 여금에 이 우리 사원의 장로(長老)가 아니니 멀리 전송함을 쓰지 말자. 가마를 버리고 돌아갔다. 효순이 이미 재래(再來)하매 사람을 시켜 안무(安撫)하여 가로되 너희가 당시에 지은 것은 옳음을 얻었으니 단지 안심하고 의구(疑懼)할 필요가 없다. 입원(入院)하여 상당(上堂)해 가로되 무단(無端)히 참소(讒訴)를 입어 왕굴(枉屈)하게 곤돈(困頓; 迍)을 만났으니/ 반 년 남짓(有餘) 속인이 되었다/ 금일 다시 삼협사(三峽寺)로 귀환하매/ 기다(幾多)의 환희며 기다(幾多)의 진심(嗔心; 嗔)인가.
●歟; 의사(疑辭)니 겸손히 물러나며 감히 질언(質言; 질문의 말)하지 않음을 여(歟)라고 말한다.
●隱微; 상(上)은 유암(幽暗)이며 하(下)는 세사(細事)다. 이르자면 사정(事情)이 드러남(首)은 족히 우려(憂慮)할 게 아니며 화(禍)는 은미(隱微)하고 깊음을 가히 우려해야 한다. 대개 현저(顯著)한 것은 사람이 쉽게 볼 바인지라 고로 그것을 함을 얻지만 은미(隱微)한 것은 사람이 알기 어려운 바인지라 고로 마땅히 삼가면서 가히 경홀(輕忽)하지 말아야 한다.
南康軍; 宋置南康軍 元升南康路 明初廢爲西寧府 尋曰南康府 淸因之 民國廢 故治(治所)卽今江西星子縣 [百度百科]
송에서 남강군을 설치했고 원에서 남강로로 승격했으며 명초에 폐하고 서녕부로 삼았으며 이윽고 가로되 남강부라 했음. 청은 이를 따랐으며 민국에서 폐했음 옛 치(治; 치소)는 즉금의 강서 성자현 [백도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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