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萬菴曰 先師*移梅陽 衲子間有竊議者 音首座曰 大凡評論於人 當於有過中求無過 詎可於無過中求有過 夫不察其心 而疑其跡 誠何以慰叢林公論 且妙喜道德才器 出於天性 立身行事 惟義是從 其量度固過於人 今造物抑之 必有道矣 安得不知其爲法門異時之福耶 聞者自此不復議論矣〈智林集〉
●移梅陽; 卽廣東潮州府 梅陽縣也 侍郞張九成 未第時 因談楊文公呂微仲 諸儒所造精妙 皆由學禪而至 於是慕禪學 聞寶印楚明禪師道風 敬往參請 師擧柏樹子話 令時時提撕 一日聞蛙鳴釋然契入 有偈曰 春天月下一聲蛙 撞破乾坤共一家 正恁麽時誰會得 嶺頭脚痛有玄沙 宋高宗紹興七年 七月十一日 詔妙喜住徑山能仁寺 至紹興十一年 張九成與諸大夫輩往謁 評議格物話 妙喜曰 公祇知有格物 不知有物格 諸公茫然 妙喜大笑 公曰 師能開諭乎 喜曰 不見小說載 唐人與安祿山叛者 其人先爲閬州守 有𦘕像在焉 時唐明皇 幸蜀見之怒 令使臣以劍擊之像首落 時閬州守 隱居陝西 首忽然墮地 公聞頓領深旨 呈偈題於軒壁 曰 子韶格物 妙喜物格 欲識一貫 兩個五百 妙喜重其悟入 時爲上堂 引神臂弓一發 透過千層甲 老僧拈來看 直甚臭皮襪之句 是時軍國邊事 方議神臂弓之用 右相秦檜 以爲譏議朝政 五月民佛日 竄衡陽 貶九成爲南康軍 妙喜紹興七年 住徑山 十一年五月內貶衡陽 著正法眼藏三帙 被人重譖 復貶梅陽 未幾 詔復形服 時四方虗席以邀 不就 紹興二十年十一月 詔住明州阿育王寺 二十八年 再詔住徑山 孝宗隆興元年八月初一日 示寂 宋時自秦檜專國 士大夫名望者 悉屛之遠方 齷齪委靡不振之徒 一言契合 卽登正府 仍止除一廳 謂之伴拜 稍出一言 斥而去之 不異奴隷也
【205】 만암(萬菴; 道顔)이 가로되 선사(先師)가 매양으로 이동하자(*移梅陽) 납자들 사이에 몰래 의논하는 자가 있었다. 음수좌(音首座)가 가로되 대범(大凡) 사람을 평론하려면 마땅히 유과(有過; 허물이 있음) 속에서 무과(無過)를 구해야 하거늘 어찌 가히 무과(無過) 속에서 유과(有過)를 구하는가. 무릇 그 마음을 살피지 않고 그 행적(行跡)을 의심한다면 참으로(誠) 무엇으로써 총림의 공론(公論)을 안위(安慰)하겠는가. 또(且) 묘희의 도덕과 재기(才器)는 천성(天性)에서 나왔고 입신(立身)과 행사(行事)는 오직 의(義)를 이 좇았고 그 양도(量度)는 참으로(固) 타인을 초과하거늘 여금에 조물(造物)이 이를 억제(抑制)함은 반드시 도리(道理)가 있는 듯하다. 어찌 그것이 법문(法門)의 이시(異時)의 복이 됨을 알지 못함다 함을 얻겠는가. 듣는 자가 이로부터 다시 의논하지 않았다. 〈智林集〉.
●移梅陽; 곧 광동(廣東) 조주부(潮州府) 매양현(梅陽縣)이다. 시랑(侍郞) 장구성(張九成)이 급제(及第)하지 않았을 때 양문공(楊文公; 楊億)ㆍ여미중(呂微仲) 제유(諸儒)의 소조(所造; 나아간 바)가 정묘(精妙)함은 모두 학선(學禪)으로 말미암아 이르렀다고 담론함으로 인해 이에 선학(禪學)을 흠모(欽慕)했다. 보인(寶印) 초명(楚明) 선사의 도풍(道風)을 듣고 경왕(敬往)하여 참청(參請)했다. 스님(師; 楚明)이 백수자화(柏樹子話)를 들어 시시(時時)로 제시(提撕; 探究. 參究)하게 했다. 어느 날 개구리 울음을 듣다가 석연(釋然)하여 계입(契入)했다. 게가 있어 가로되 춘천(春天)의 월하(月下)에 한 소리 개구리여/ 건곤을 쳐서 깨뜨려 한가지로 일가(一家)로다/ 바로 이러한 때 누가 회득(會得)하는가/ 영두(嶺頭)에 발이 아픈 현사(玄沙; 師備)가 있다(嶺頭脚痛有玄沙). 송 고종 소흥(紹興) 7년(1137) 7월 11일 조칙(詔勅)으로 묘희가 경산(徑山) 능인사(能仁寺)에 주(住)했다. 소흥 11년(1141)에 이르자 장구성(張九成)이 여러 대부배(大夫輩)와 더불어 왕알(往謁)하여 격물화(格物話)를 평의(評議)했다. 묘희가 가로되 공(公)은 다만 격물(格物; 物에 이르다)이 있는 줄만 알고 물격(物格; 物이 이르다)이 있는 줄 알지 못합니다. 제공(諸公)이 망연(茫然)했다. 묘희가 대소(大笑)했다. 공왈(公曰) 스님이 능히 개유(開諭; 啓發하여 解說)하시겠습니까. 묘희가 가로되 소설(小說)에 실린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당인(唐人)에 안녹산(安祿山)과 더불어 모반(謀叛)한 자가, 그 사람은 먼저 낭주수(閬州守)가 되었는데 화상(𦘕像)이 존재해 있었다. 때에 당(唐) 명황(明皇)이 촉(蜀)에 거둥했다가 이를 보고 노해서 사신(使臣)을 시켜 검으로 그것을 치게 했더니 상수(像首)가 떨어졌다. 때에 낭주수(閬州守)는 섬서(陝西)에 은거했는데 머리가 홀연히 땅에 떨어졌다. 공(公)이 듣고 심지(深旨)를 문득 영회(領會)했다. 정게(呈偈)하여 헌벽(軒壁)에 제(題)했으니 가로되 자소(子韶; 張九成의 字)는 격물(格物)이며/ 묘희는 물격(物格)이다/ 1관(貫)을 알고자 한다면/ 양개(兩個)의 5백이다. 묘희가 그 오입(悟入)을 존중했다. 때에 상당(上堂)하여 신비궁(神臂弓)을 한 번 발사하매 천층갑(千層甲)을 투과한다. 노승(老僧)이 집어 와서 보니 바로 심히 냄새 나는 피말(皮襪; 가죽 버선)이더라 란 구(句)를 인용했다. 이때 군국변사(軍國邊事)로 바야흐로 신비궁(神臂弓)의 용도(用度)를 의논했는데 우상(右相) 진회(秦檜)가 조정(朝政)을 기의(譏議)했다 하여 5월 불일(佛日; 宗杲의 賜號)을 민(民; 승복을 벗기고 민간인의 옷을 입힘)하여 형양(衡陽)으로 내쫓고(竄) 구성(九成)을 폄(貶; 貶職)하여 남강군(南康軍)을 위했다. 묘희가 소흥 7년에 경산(徑山)에 주(住)했다가 11년 5월 내에 형양(衡陽)으로 폄(貶)되어 정법안장(正法眼藏) 3질(帙)을 지었는데 타인의 중참(重譖)을 입어 다시 매양(梅陽)으로 폄(貶)되었다. 오래지 않아 조칙으로 다시 형복(形服; 승복을 입은 形狀)했는데 당시에 사방에서 주석(主席; 席)을 비워 맞이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소흥 20년 11월 조칙으로 명주(明州) 아육왕사(阿育王寺)에 주(住)했고 28년 다시 조칙으로 경산(徑山)에 주(住)했고 효종(孝宗; 1127-1194 재위 1162–1189) 융흥(隆興) 원년(1163) 8월 초하루에 시적(示寂)했다. 송시(宋時)에 진회(秦檜)가 전국(專國; 國政을 잡다)함으로부터 사대부(士大夫)의 명망자(名望者)는 모두 원방(遠方)으로 내쫓겼으며(屛) 악착(齷齪)하고 위미(委靡)하여 부진(不振)하던 무리가 일언에 계합(契合)하여 곧 정부(正府)에 올랐고 인하여 일청(一廳)에서 지제(止除; 廢止와 除拜)했으니 이를 일러 반배(伴拜)라 한다. 조금(稍) 일언(一言)을 토출(吐出)했다가는 배척하고 제거했으며 노예(奴隷)와 다르지 않았다.
造物; 指創造萬物 也指創造萬物的神力
만물을 창조함. 또한 만물을 창조하는 신력을 가리킴.
楚明; 宋代雲門宗僧 字寶印 百粵(廣東廣州)張氏 祝髮後 謁法雲大通善本 契悟得法 出住杭之淨慈 [普燈錄八 五燈會元十六]
송대 운문종승. 자는 보인(寶印)이며 백월(광동 광주) 장씨. 머리를 깎은 후 법운 대통선본(大通善本)을 참알해 계오(契悟)하고 득법했으며 출세해 항(杭)의 정자에 주(住)했음 [보등록8. 오등회원16].
柏樹子話; 柏樹子 柏樹 子 後綴 五燈會元四趙州從諗 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曰 庭前栢樹子
백수자(柏樹子)는 백수(柏樹; 잣나무. 측백나무)니 자는 후철(後綴; 접미사). 오등회원4 조주종심. 묻되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입니까. 스님이 가로되 뜰 앞의 백수자(栢樹子)다.
嶺頭脚痛有玄沙; 正法眼藏二云 玄沙和尙欲徧歷諸方 參尋知識 攜囊出嶺 築著脚指流血 痛楚歎曰 是身非有 痛從何來 便回雪峰
정법안장2에 이르되 현사화상이 제방을 편력(徧歷)하면서 지식을 참심(參尋)하려고 했다. 행낭(行囊)을 휴대하고 출령(出嶺)하다가 발가락이 부딪혀(築著) 피를 흘렸다. 통초(痛楚: 심히 아프고 괴로움)하다가 탄식하며 가로되 이 몸이 있음이 아니거늘 통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바로 설봉으로 회귀했다.
明皇; 唐玄宗(685-762 在位712-756) 諡號至道大聖大明孝皇帝 後世詩文多稱爲明皇 諱隆基 睿宗第三子 初封楚王 改封臨淄王 景雲初立爲皇太子 先天元年(712)八月卽位 在位四十三年 壽七十八 尊睿宗爲太上皇 [釋氏稽古略三 百度百科]
당현종(685-762. 재위 71 2-756)의 시호가 지도대성대명효황제(至道大聖大明孝皇帝)니 후세에 시문에서 다분히 호칭하기를 명황(明皇)이라 했음. 휘는 융기며 예종의 제3자. 처음은 초왕에 봉해졌고 임치왕으로 개봉(改封)했음. 경운 초 책립(冊立)하여 황태자가 되었고 선천 원년(712) 8월에 즉위했음. 재위 43년, 나이 78. 예종을 높여 태상황이라 했음 [석씨계고략3. 백도백과].
神臂弓; 夢溪筆談十九 熙寧(1068-1077)中 李定獻偏架弩 似弓而施榦鐙 以鐙距地而張之 射三百步 能洞重紮 謂之神臂弓 最爲利器 李定本黨項羌酋 自投歸朝廷 官至防團而死 諸子皆以驍勇雄於西邊
몽계필담19. 희녕(1068-1077) 중 이정(李定)이 편가노(偏架弩)를 바쳤는데 활과 같으면서 간등(榦鐙)을 시설했다. 등(鐙; 등잔)을 땅과 떨어지게 해서 그것을 벌인다. 3백 보를 쏘며 능히 중찰(重紮; 紮은 활 줌통 싸개)을 꿰뚫었다. 이를 일러 신비궁(神臂弓)이라 하나니 가장 날카로운 병기가 된다. 이정의 본당(本黨)은 항강(項羌)의 추장이다. 스스로 조정에 투귀(投歸)하여 벼슬이 방단(防團)에 이르렀다가 죽었다. 여러 아들도 모두 서변(西邊)에서 날래고 용감하고 웅맹했다.
秦檜; (1090-1155) 字會之 漢族 生於黃州 籍貫江寧(今江蘇南京) 南宋著名奸臣 主和派代表人物 靖康二年(1127) 因上書金帥反對立張邦昌 隨徽欽二帝被俘至金 爲撻懶信用 紹興元年(1131) 擢參知政事 隨後拜相 次年被劾落職 紹興八年再相 十一年謀殺抗金名將岳飛 前後執政十九年 歷封秦魏二國公 深得高宗寵信 紹興二十五年病逝 [百度百科 佛祖歷代通載二十]
(1090-1155) 자는 회지며 한족. 황주에서 출생했고 적관(籍貫)은 강녕(江寧; 지금의 강소 남경). 남송의 저명한 간신(奸臣)이니 주화파(主和派)의 대표인물. 정강 2년(1 127) 방창(邦昌)과 반대의 입장을 금수(金帥)에게 상서(上書)함으로 인해 휘흠(徽欽) 2제(帝)를 따라 포로가 되어 금(金)에 이르렀는데 달라(撻懶; 金의 대장)가 신용(信用)하였음. 소흥 원년(1131) 참지정사에 발탁되었고 뒤따라 배상(拜相; 재상에 除拜됨)했음. 다음해 탄핵을 받아 낙직(落職)했고 소흥 8년 다시 배상(拜相)했음. 11년 항금명장(抗金名將) 악비(岳飛)를 모살(謀殺)했음. 전후로 19년 동안 집정했고 진위(秦魏) 2국공(國公)에 역봉(歷封)되었음. 깊이 고종의 총신(寵信)을 얻었고 소흥 25년 병서(病逝)했음 [백도백과. 불조역대통재20].
委靡; 精神不振 意志消沉
정신이 부진(不振)하고 의지가 소침(消沉)함.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tistory.com)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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