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보훈합주

선림보훈합주 204

태화당 2022. 11. 14. 08:11

204 萬菴顔和尙曰 妙喜先師 初住徑山 夜參 持論諸方 及*曹洞宗旨不已 次日音首座謂先師曰 夫出世利生 素非細事 必欲扶振宗敎 當隨時以捄弊 不必取目前之快 和尙前日作禪和子 持論諸方 猶不可妄 況今登寶華王座稱善知識耶 先師曰 夜來一時之說焉 首座曰 聖賢之學 本於天性 豈可*率然 先師稽首謝之 首座猶說之不已 萬菴曰 先師竄*衡陽 賢侍者錄貶詞 *僧堂前 衲子如失父母 *涕泗愁歎 居不*遑處 音首座詣衆寮白之曰 人生禍患 不可苟免 使妙喜平生如*子 陸沈*下板 緘默不言 故無今日之事 況先聖所應爲者不止於是 爾等何苦自傷 昔慈明瑯瑘*谷泉*大愚 結伴參*汾陽 適當西北用兵 遂易衣*混火隊中往 今徑山衡陽 相去不遠 道路絕間關 山川無險阻 要見妙喜 復何難乎 由是一衆寂然 翌日相繼而去廬山智林集

曹洞宗; 曹 乃撫州曹山本寂禪師 嗣洞山良介禪師 初離洞山 入曹溪禮祖塔 回吉州之吉水 衆響山名 遂請開法 師擬曹溪 凡隨所居處 立曹爲號 洞山之宗 至師最隆 故稱曹洞宗也

率然; 輕忽也

衡陽; 湖南道 衡州府 衡陽縣也

; 高擧也 張示也

涕泗; 目出汁曰涕 鼻出汁曰泗

遑處; 居處不安之貌 又急也

婦女; 但有閨門之志 而無境外之心

下板; 官謂下僚 下板 言居于下位也

谷泉; 南嶽芭蕉菴大道谷泉禪師 泉州人 嗣汾陽善昭禪師 南嶽下十世也

大愚; 瑞州大愚山 守芝禪師 嗣汾陽

汾陽; 汾州太子院 善昭禪師 太原兪氏子 嗣首山念禪師 南嶽下九世也

混火隊中; 汾陽道望天下 慈明等決志親謁 當時河東澤潞 皆屯兵 衆皆無行 惟公等 不顧危阻 渡河登太行山 易衣混軍隊中 露眠草宿 不辭勞苦 遂造汾陽參見 詳見僧寶傳

 

204 만암안(萬菴顔; 道顔) 화상이 가로되 묘희(妙喜; 宗杲) 선사(先師)가 처음 경산(徑山)에 주()했다. 야참(夜參; 晩參)으로 인해 제방을 지론(持論)했는데 조동종지(*曹洞宗)에 이르자 그치지 않았다. 차일(次日) 음수좌(音首座)가 선사(先師)에게 일러 가로되 무릇 출세하여 이생(利生)함은 본디() 세사(細事)가 아닙니다. 반드시 종교(宗敎)를 부진(扶振)하려면 마땅히 수시(隨時)하여 구폐(捄弊)해야 하고 목전의 쾌()함을 취함이 필요치 않습니다. 화상이 어제 선화자(禪和子)가 되어 제방을 지론(持論)했다면 오히려 가히 허망하지 않았겠지만 하물며 여금엔 보화왕좌(寶華王座)에 올라 선지식이라고 호칭함이겠습니까. 선사(先師)가 가로되 야래(夜來; 는 조사)의 일시(一時)의 논설이었다. 수좌가 가로되 성현지학(聖賢之學)은 천성(天性)을 근본으로 하거늘 어찌 가히 솔연(*率然)하겠습니까. 선사가 계수(稽首)하며 사과(謝過)했지만 수좌는 오히려 이를 설하며 말지 않았다. 만암이 가로되 선사가 형양(*衡陽)으로 방축(放逐; )되자 현시자(賢侍者)가 폄사(貶詞)를 기록해 승당(僧堂) 앞에 게시(*)했다. 납자들이 부모를 잃은 것과 같이 체사(*涕泗)하며 수탄(愁歎)했고 거처가 황처(*遑處; 閑暇니 한가한 곳)가 아니었다. 음수좌(音首座)가 중료(衆寮)로 나아가 알려 가로되 인생의 화환(禍患)은 가히 구면(苟免; 苟且하게 면하다)하지 못한다. 묘희(妙喜)로 하여금 평생 부인여자(*) 같거나 하판(*下板)에 육침(陸沈)하거나 함묵(緘默)하며 불언(不言)하게 했다면 짐짓 금일의 사건이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선성(先聖)이 응위(應爲)한 바의 것은 이에 그치지 않았거늘 너희 등이 어찌하여 괴롭게 자상(自傷)하는가. 지난날 자명(慈明; 楚圓)ㆍ낭야(瑯瑘; 慧覺)ㆍ곡천(*谷泉)ㆍ대우(*大愚)가 결반(結伴)하여 분양(*汾陽)을 참알(參謁)하는데 마침 서북에서 용병(用兵)함을 당해 드디어 역의(易衣)하여 화대(火隊) 속에 섞여서(*混火隊中) 갔다. 지금 경산(徑山)과 형양(衡陽)은 서로의 거리(距離; )가 멀지 않고 도로에 간관(間關)이 끊겼고 산천은 험조(險阻)가 없어 묘희를 상견하기를 요한다면 다시 무엇이 어려우리오. 이로 말미암아 일중(一衆; 衆人)이 적연(寂然)했다. 다음날(翌日) 상속(相繼)하며 떠났다. 廬山智林集.

曹洞宗; ()는 곧 무주(撫州; 江西) 조산(曹山) 본적선사(本寂禪師 840-901)니 동산양개(洞山良介; 807-869) 선사를 이었다. 처음에 동산을 떠나 조계(曹溪)에 들어가 조탑(祖塔)에 예배하고 길주(吉州; 지금의 강서성 吉安府 古安縣)의 길수(吉水)로 돌아갔는데 대중이 조산(曹山)의 명성을 향(; )한지라 드디어 개법(開法)을 청했다. 스님이 조계를 본떠() 무릇 소거처(所居處)를 따라 조()를 세워 호()로 삼았다. 동산지종(洞山之宗)이 스님에 이르러 최륭(最隆)한지라 고로 명칭이 조동종(曹洞宗)이다.

率然; 경홀(輕忽)이다.

衡陽; 호남도(湖南道) 형주부(衡州府) 형양현(衡陽縣)이다.

; 높이 듦(高擧)이다. 벌여 보임(張示)이다.

涕泗; 눈에서 즙()이 나옴을 가로되 체()며 코에서 즙이 나옴을 가로되 사().

遑處; 거처가 불안한 모양. 또 급()이다(이 글에선 閑暇의 뜻임).

婦女; 단지 규문지지(閨門之志)만 있고 경외지심(境外之心)이 없다.

下板; ()에선 하료(下僚)를 말함이니 말하자면 하위(下位)에 거처함이다.

谷泉; 남악 파초암(芭蕉菴) 대도(大道; ) 곡천선사(谷泉禪師)니 천주(泉州; 福建) 사람이며 분양(汾陽) 선소선사(善昭禪師; 首山省念法嗣)를 이었으니 남악하 10세다.

大愚; 서주(瑞州; 지금의 강서성 高安縣) 대우산(大愚山) 수지선사(守芝禪師)니 분양(汾陽; 善昭)을 이었다.

汾陽; 분주(汾州; 지금의 山西 汾陽) 태자원(太子院) 선소선사(善昭禪師; 947-1024) 태원(太原) 유씨(兪氏)의 아들이며 수산념(首山念; 省念이니 風穴延沼法嗣) 선사를 이었으니 남악하 9세다.

混火隊中; 분양(汾陽)이 천하에서 도망(道望)했고 자명(慈明) 등이 결지(決志)로 친알(親謁)하려 했다. 당시에 하동(河東) 택로(澤潞; 鎭名)에 모두 둔병(屯兵)하여 대중이 모두 다니지 않았지만 오직 공등(公等; 자명 등)은 위조(危阻)를 돌아보지 않고 도하(渡河)하여 태행산(太行山)에 올랐고 역의(易衣)하고 군대(軍隊) 속에 섞여 노면초숙(露眠草宿)하며 노고를 사양하지 않았다. 드디어 분양으로 나아가() 참견(參見)했다. 상세한 것은 승보전(僧寶傳; 선림승보전)을 보라.

 


徑山; 位於浙江省餘杭西北約二十九公里處 在天目山之東北峰 因以小徑通於天目山而得名 唐代天寶元年(742) 牛頭宗之道欽(法欽)禪師 入此山結庵 學者輻輳 大曆四年(769) 代宗慕其爲人 賜國一禪師之號 下詔 卽於其庵址建徑山寺 至宋代 圜悟克勤 維林 了一等高僧亦住此山 高宗紹興七年(1137) 圜悟之門人大慧禪師 來住此寺 弟子來集者多達一千七百餘人 孝宗皇帝親書興聖萬壽禪寺 竝賜圓覺經解 其後又有無準師範 虛堂智愚等臨濟龍象住此 [宋高僧傳九 傳燈錄四 同十 同十一 徑山志 大明一統志六十八 大淸一統志二一六]

절강성 여항 서북 약 29곳에 위치함. 천목산의 동북 봉우리에 있음. 작은 길(小徑)이 천목산으로 통함으로 인해 이름을 얻었음. 당대 천보 원년(742) 우두종의 도흠(道欽; 법흠)선사가 이 산에 들어가 암자를 엮자 학자들이 복주(輻輳)하였음. 대력 4(769) 대종이 그 사람됨을 흠모해 국일선사(國一禪師)의 호를 주고 조칙을 내려 곧 그 암자 터에 경산사를 건립했음. 송대에 이르러 원오극근ㆍ유림ㆍ요일 등의 고승이 또한 이 산에 거주했음. 고종 소흥 7(1137) 원오의 문인인 대혜선사가 이 절에 와서 거주했으며 제자가 와서 모인 자 많게는 17백여 인에 달했음. 효종황제가 친서하여 흥성만수선사라 했으며 아울러 원각경해(圓覺經解)를 주었음. 그 후에 또 무준사범ㆍ허당지우 등의 임제의 용상이 여기에 거주함이 있었음 [송고승전9. 전등록4, 10, 11. 경산지. 대명일통지68. 대청일통지216].

 

夜參; 晩參 朝參之對稱 指晩間之住持開示法要 參禪或念誦

만참(晩參)과 같음. 조참(朝參)의 대칭. 만간(晩間; 저녁 무렵)에 주지가 법요를 개시하거나 참선 혹 염송(念誦)함을 가리킴.

 

持論; 論量持正也

논량(論量; 評論)을 지정(持正; 바르게 가짐).

 

僧堂; 指禪林中僧衆日常修禪起臥之堂舍 又稱雲堂 坐堂 選佛堂 聖僧堂 枯木堂 禪宗七堂伽藍之一 卽凡於禪刹掛搭者 悉依戒臘而安排位次 凡坐禪 起臥 飮食 皆行於此堂

선림 중에 승중(僧衆)이 일상에 수선(修禪)하고 기와(起臥)하는 당사(堂舍)를 가리킴. 또 명칭이 운당(雲堂)ㆍ좌당(坐堂)ㆍ선불당(選佛堂)ㆍ성승당(聖僧堂)ㆍ고목당(枯木堂)이며 선종 칠당가람(七堂伽藍)의 하나임. 곧 무릇 선찰(禪刹)에서 괘탑(掛搭)하는 자는 모두 계랍(戒臘)에 의해 위차(位次)를 안배하며 무릇 좌선(坐禪)ㆍ기와(起臥)ㆍ음식(飮食)을 다 이 승당에서 행함.

 

衆寮; 於僧堂外所設衆僧依止之寮舍

승당 밖에 시설한 바 중승이 의지(依止)하는 요사(寮舍).

 

火隊; 謂軍隊也 唐時兵制單位 五十人爲隊 十人爲火

이르자면 군대임. 당시(唐時) 병제단위(兵制單位)50인이 대()가 되고 10인이 화()가 되었음.

 

間關; 形容旅途的艱辛 崎嶇 輾轉 禪林疏語考證二 後漢荀彧傳論曰 荀君乃越河冀 間關以從曹氏 註曰 間關 猶展轉也

여도(旅途)의 간신(艱辛)ㆍ기구(崎嶇)ㆍ전전(輾轉)을 형용함. 선림소어고증2. 후한 순욱전(荀彧傳). 논에 가로되 순군(荀君)이 이에 하기(河冀)를 건너 간관(間關)히 조씨를 좇았다. ()에 가로되 간관(間關)은 전전(展轉)과 같다.

 

曹溪; 位於韶州(今廣東曲江縣東南)之河 發源於狗耳嶺 西流與溱水合 以經曹侯塚故 又稱曹侯溪 梁天監元年(502) 天竺婆羅門三藏智藥 到曹溪口 飮其水而知此源爲勝地 乃勸村人建寺 復因其地似西國之寶林山 故稱寶林寺 智藥預言 一七年後 有肉身菩薩 於此開演無上法門 得道者如林 至唐儀鳳二年(677)春 六祖慧能從弘忍得法後 從印宗剃髮 受具足戒而歸寶林寺 大弘法化 人稱曹溪法門 指六祖慧能 慧能以曹溪寶林寺爲中心 開展敎化活動 世人尊稱爲曹溪古佛 曹溪高祖

소주(韶州; 지금의 광동 曲江縣 동남)의 강하(江河)에 위치함. 구이령(狗耳嶺)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진수(溱水)와 합함. 조후총(曹侯塚)을 경유하는 연고로써 또 호칭이 조후계(曹侯溪). () 천감원년(天監元年; 502) 천축 바라문삼장(婆羅門三藏)인 지약(智藥)이 조계의 입구에 이르러 그 물을 마시고는 이 근원이 승지(勝地)가 됨을 알았음. 이에 촌인(村人)에게 권해 사원을 세우게 하고 다시 그 땅이 서국(西國)의 보림산(寶林山)과 흡사하다 하여 고로 보림사(寶林寺)로 호칭했음. 지약이 예언해 말하되 170년 후 육신보살(肉身菩薩)이 있어 여기에서 무상법문(無上法門)을 개연(開演)할 것이며 득도(得道)하는 자가 숲과 같으리라. () 의봉2(儀鳳二年; 677) 봄에 이르자 6조 혜능(慧能)이 홍인(弘忍)을 좇아 법을 얻은 후 인종(印宗)을 좇아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고는 보림사(寶林寺)로 돌아가 법화(法化)를 크게 홍포(弘布)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조계법문(曹溪法門)이라 일컬음. 6조 혜능(慧能)을 가리킴. 혜능이 조계 보림사(寶林寺)를 중심으로 삼아 교화활동을 개전(開展)하였으므로 세인이 존칭하여 조계고불(曹溪古佛)ㆍ조계고조(曹溪高祖)라 함.

 

道望; 令譽 好聲望

영예(令譽). 아름다운 성망(聲望; 名望).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tistory.com)

 

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과. 가

pyungsimsa.tistory.com

 

'선림보훈합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림보훈합주 206  (0) 2022.11.15
선림보훈합주 205  (0) 2022.11.15
선림보훈합주 203  (0) 2022.11.14
선림보훈합주 202  (0) 2022.11.14
선림보훈합주 201  (0) 2022.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