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역해무문관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 부록 맹공지발(孟珙之跋)

태화당 2019. 8. 12. 09:04

達磨西來 不執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說箇直指 已是迂曲 更言成佛 郞當不少 旣是無門 因甚有關 老婆心切惡聲流布 無庵欲贅一語 又成四十九則 其間些子誵訛 剔起眉毛薦取 淳祐乙巳夏重刊

檢校少保寧武軍節度使京湖安撫制置大使兼屯田大使兼蘷路策應大使兼江陵府漢東郡開國公食邑二千一百戶食實封陸佰戶 孟珙

無庵; 孟珙 號無庵居士 見下孟珙

剔起眉毛; 禪家勸誡學人振作精神頓悟禪旨的習語 又形容領會禪義 應接禪機極爲快捷

薦取; 又作薦得 薦 領會 領悟 又識 認識 取 後綴

檢校少保; 少保 古代官名 三孤(少師 少傅 少保)之一

寧武軍; 今河北省懷來縣東南

制置大使; 制置使 官名 唐大中五年(八五一)始置 北宋不常置 南宋設置漸多 掌本路諸州軍事 多以安撫大使兼任 其秩高望重者稱制置大使 [百度百科]

蘷路; 蘷州路 宋元時代行政區劃名稱 今重慶市奉節縣 [百度百科]

; 主持 掌管

江陵府; 唐上元元年(七六) 設置南都 以荊州爲江陵府 治所在江陵 南宋建炎四年(一一三) 改江陵府爲荊南府 淳熙中(一一七四~一一八九) 複改江陵府 [百度百科]

孟珙; 一一九五~一二四六 字璞玉 號無庵居士 原籍絳州(今山西新絳) 南宋優秀的軍事家 統帥 抗金抗蒙名將 曾祖孟安祖父孟林是嶽飛部屬 隨軍至隨州 定居於隨州棗陽(今湖北棗陽) 累官樞密都承旨 京西湖北路安撫制置使 四川宣撫使兼知夔州 封漢東郡開國公 淳祐四年(一二四四) 兼知江陵府 淳祐六年(一二四六) 以檢校少師 寧武軍節度使致仕 旋卽病逝 享年五十二 後特贈太師 吉國公 諡忠襄 [百度百科]

; 文體的一種 寫在書籍文章或書畫作品的後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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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達磨)가 서래(西來)하여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 했거니와 직지(直指)를 설함이 이미 이는 우곡(迂曲)이거늘 다시 성불을 말하니 낭당(郞當)이 적지 않도다. 이미 곧 무문이거늘 무엇 때문에 관()이 있는가. 노파심(老婆心)이 간절(懇切)하여 악성(惡聲)이 유포(流布)되었도다. 무암(無庵)이 일어(一語)를 혹 붙이려() 하면 또 사십구칙(四十九則)을 이루리라. 그 사이의 조금의 효와(誵訛)는 눈썹을 치켜세우고(剔起眉毛) 천취(薦取)하라. 순우을사(淳祐乙巳. 1245) 여름에 중간(重刊)하다.

검교소보 영무군절도사 경호안무제치대사 겸둔전대사 겸기로책응대사 겸지강릉부한동군개국공 식읍이천일백호 실봉육백호(檢校少保 寧武軍節度使 京湖安撫制置大使 兼屯田大使 兼蘷路策應大使 兼江陵府漢東郡開國公 食邑二千一百戶 食實封陸佰戶) 맹공(孟珙)()하다.

무암(無庵); 맹공(孟珙)의 호()가 무암거사(無庵居士)니 아래 맹공(孟珙)을 보라.

척기미모(剔起眉毛); 선가(禪家)에서 학인(學人)에게 권계(勸誡)해 정신(精神)을 진작(振作)해 선지(禪旨)를 돈오(頓悟)하라는 습어(習語. 습관적인 언어). 또 선의(禪義)를 영회(領會)하고 선기(禪機)를 응접(應接)함이 극히 쾌첩(快捷)함을 형용(形容).

천취(薦取); 또 천득(薦得)으로 지음. ()은 영회(領會). 영오(領悟). 또 식()ㆍ인식(認識). ()는 후철(後綴).

검교소보(檢校少保); 소보(少保) 고대(古代)의 관명(官名)이니 삼고(三孤. 少師 少傅 少保)의 하나.

영무군(寧武軍);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회림현(懷來縣)의 동남(東南).

제치대사(制置大使); 제치사(制置使)는 관명(官名)이니 당() 대중오년(大中五年. 851)에 처음으로 설치(設置)했음. 북송(北宋)은 늘 설치한 게 아니며 남송(南宋)은 설치가 점점 많아졌음. 본로(本路) 제주(諸州)의 군사(軍事)를 관장(管掌)했으며 다분히 안무대사(安撫大使)를 겸임(兼任)했음. 그 서열(序列)이 높고 덕망이 두터운 자를 일컬어 제치대사(制置大使). [百度百科].

기로(蘷路); 기주로(蘷州路). 송원시대(宋元時代)의 행정구획(行政區劃)의 명칭이니 지금의 중경시(重慶市) 봉절현(奉節縣). [百度百科].

(); 주지(主持)임 장관(掌管).

강릉부(江陵府); () 상원원년(上元元年. 760) 남도(南都)에 설치했음. 형주(荊州)를 강릉부(江陵府)로 삼았으며 치소(治所)는 강릉(江陵)에 있음. 남송(南宋) 건염사년(建炎四年. 1130) 강릉부(江陵府)를 고쳐 형남부(荊南府)로 삼았고 순희중(淳熙中. 1174~1189) 강릉부(江陵府)로 복개(複改)했음. [百度百科].

맹공(孟珙); 1195~1246. ()는 박옥(璞玉)이며 호()는 무암거사(無庵居士)며 원적(原籍)은 강주(絳州. 지금의 山西 新絳). 남송(南宋)의 우수(優秀)한 군사가(軍事家)며 통수(統帥)며 항금항몽(抗金抗蒙)의 명장(名將). 증조(曾祖) 맹안(孟安)과 조부(祖父) 맹림(孟林)은 이 악비(嶽飛)의 부속(部屬)이었음. 군대를 따라 수주(隨州)에 이르러 수주조양(隨州棗陽. 지금의 湖北 棗陽)에 정거(定居)했음. 추밀도승지(樞密都承旨)ㆍ경서호북로안무제치사(京西湖北路安撫制置使)ㆍ사천선무사겸지기주(四川宣撫使兼知夔州)를 역임(歷任)했고 한동군개국공(漢東郡開國公)으로 봉()해 졌음. 순우사년(淳祐四年. 1244) 강릉부(江陵府)를 겸지(兼知)했고 순우육년(淳祐六年. 1246) 검교소사(檢校少師)로서 영무군절도사(寧武軍節度使)의 벼슬을 지냈으며 얼마 후 곧 병으로 죽었음. 향년(享年)은 쉰둘이며 후에 태사(太師)ㆍ길국공(吉國公)을 특증(特贈)했으며 시()는 충양(忠襄). [百度百科].

(); 문체(文體)의 일종(一種)이니 서적(書籍)이나 문장(文章) 혹은 서화(書畫)의 작품의 후면(後面)에 써 두는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