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림성사

총림성사권상(叢林盛事卷上) 설당이 부모를 뵙다(雪堂見父母)

태화당 2025. 12. 23. 08:36

雪堂行 括蒼人 少登上庠 因見殺生者 衋然有感 遂棄家 直抵泗州普照王寺出家 以掃塔爲務 旣剃髮 乃往舒之龍門 依佛眼禪師爲侍者 一衲度寒暑 又且養蝨 隣肩皆厭之 每於殿堂僻處坐禪 一日 看玄沙築著脚指頭話 大有發明 佛眼乃川人 上堂次 因行侍立 戲曰 川僧藞苴 淅僧瀟灑 諸人若也不信 看取山僧侍者 一衆大咲 後見其父從大常博士出守三衢 行時母老來歸 閽者見其繿縷 再三不與進 行乃解衣與之 纔通覆 而其母聞之 不覺仆地曰 我兒猶在耶 遂迎入宅堂 逼令換衣澡浴 及浴 其衣盡換去 只得著其新衣 行泣曰 我幾年與他爲眷屬 豈一旦遽相捨耶 卽抵吉祥寺作宿 次日 父母兄弟俱來報謁 而行以黎明去矣 竟不及見 但見壁間留偈云 莫嫌心似鐵 自己尙爲冤 掃盡門前雪 方開火裡蓮 萬般休更問 一等是忘緣 箇事相應處 金剛種現前 其母因憶師失明 行再歸括蒼 其父逼令出世南明 遷衢之烏巨 其道大振 終於饒之薦福 玅喜親爲撰語錄序 流傳于世

雪堂行; 道行(1089-1151) 宋代楊岐派僧 字雪堂 處州(位於浙江)人 俗姓葉 十九歲從覺印子英出家 參禮龍門寺佛眼淸遠 得其玄旨 竝嗣其法 建炎二年(1128)開法於壽寧 歷住法海 天寧 烏巨等諸刹 紹興二十一年示寂 壽六十三 [普燈錄十六 聯燈會要十七]

佛眼; 淸遠(1067-1120) 宋代楊岐派僧 號佛眼 臨邛(四川邛崍)李氏 嚴正寡言 因讀法華有疑 造舒州太平 依五祖法演參究不契 辭去 至金陵蔣山 邂逅靈源 靈源勸返 時演已遷海會 及再謁 遂得大悟 隱居大中庵 崇寧萬壽寺新成 王渙之請師開法 次補龍門 逾十二年 居和之褒禪 宣和初(1119) 歸蔣山之東堂 二年 辭世 壽五十四 臘四十 有語錄八卷 [普燈錄十一 續傳燈錄二十五]

侍者; 伺候寺院主持僧 爲其服務的職事僧 有燒香請客書狀侍者之職

又且; 猶而且 表示進一層意思的連詞

上堂; ()上法堂 爲演法而上法堂也 此有旦望上堂 五參上堂 九參上堂 謝秉拂上堂 謝都寺上堂 出隊上堂 出鄕上堂等 () 上僧堂 爲喫粥飯而上僧堂也 此指()

藞苴; 不整潔 不檢束 麁疏 不成熟等義 是貶義詞 禪家用之 有時含戱謔意味 又宋時中原人認爲四川人頗不檢束 故以翥苴稱之 多含戱謔意味 又作川藞苴 川䖃苴

一衆; 所有人 大衆 指寺院所有僧人

大常博士; 太常博士 官職名 太常寺屬官有博士 掌敎弟子 分經任職 如詩 分魯齊韓三家 各置一人 國有疑事 則備咨詢 秩四百石 漢宣帝增爲比六百石 其職相當於後世的國子博士 三國魏文帝初置太常博士 晉以後沿置 職稱淸要 而品級不高 唐從七品上 宋太常博士職守同前代 明淸亦置 均正七品 [百度百科]

三衢; 浙江衢州府 州有三衢山 故名 [大慧書栲栳珠]

通覆; 謂白事而通達其志也 小補疑會曰 覆 通作復 復 房六切 白也

眷屬; 眷爲親愛 屬爲隸屬 指親近順從者

玅喜; 宗杲(1089-1163) 宋代僧 字曇晦寧國(安徽宣州)奚氏 年十七出家 登寶峰謁湛堂文準 準指以入道要徑 準卒 趨謁無盡居士求塔銘 無盡一見奇之 名其庵曰妙喜 後往參圓悟克勤得法 右丞相呂舜奏賜紫衣 及佛日大師之號 後於雲居山創庵以居 久之 入閩結茅於長樂洋嶼 又徙小溪雲門庵 應丞相張浚之命 住徑山 道法之盛 冠於一時 侍郞張九成亦從之遊 因議朝政 被秦檜所忌 流於嶺南 檜死召還 翌年春復僧伽梨 奉命住育王 逾年有旨改徑山 道俗歆慕如初 孝宗卽位 召對稱旨 賜號大慧禪師 御書妙喜庵三字賜之 隆興元年八月微恙 十日親書遺奏 又書遺偈 擲筆委然而入寂 壽七十五 臘五十八 謚曰普覺禪師 有大慧語錄等 [統要續集二十二 聯燈會要十七 嘉泰普燈錄十五 五燈會元十九 佛祖通載二十]

 

설당행(雪堂行)은 괄창(括蒼) 사람이다. 소년(少年; )에 상상(上庠; 고대의 大學)에 올랐다(). 살생하는 자를 봄으로 인해 혁연(衋然; 哀痛해 하다)히 유감(有感)이었고 드디어 기가(棄家)하고 바로() 사주(泗州; 지금의 江蘇 盱眙東北) 보조왕사(普照王寺)에 다다라() 출가했고 소탑(掃塔)으로써 복무(服務; )했다. 이미 체발(剃髮)하자 곧() (; 舒州)의 용문(龍門; 용문사)으로 가서 불안선사(佛眼禪師; 淸遠)에게 의지하며 시자(侍者)가 되었다. 일납(一衲; 하나의 衲衣)으로 한서(寒暑)를 지냈고 우차(又且; 而且) 양슬(養蝨; 이를 기르다)해 인견(隣肩; 鄰單人)이 모두 그것()을 싫어했다(). 매양 전당(殿堂)의 외진 곳(僻處)에서 좌선(坐禪)했다. 현사(玄沙), 발가락(脚指頭; 는 조사)을 축착(築著; )한 화()를 간()하다가 크게 발명(發明; 省悟)함이 있었다. 불안(佛眼)은 곧 천인(川人; 四川 사람)이다. 상당(上堂)한 차()에 행()이 시립(侍立)함으로 인해 희롱하며 가로되 천승(川僧)은 라저(藞苴)며 절승(浙僧; 浙江僧. 저본에 淅僧으로 지었음)은 소쇄(瀟灑)하다. 제인(諸人)이 만약에 믿지 못하겠거든 산승(山僧; 山野僧이니 謙辭)의 시자(侍者)를 간취(看取)하라. 일중(一衆)이 대소(大咲)했다. 후에 그의 부친이 태상박사(大常博士)를 좇아, 나가서 삼구(三衢)를 다스림()을 보았다. ()이 때에 모친이 노쇠(老衰; )해 내귀(來歸)했는데 혼자(閽者; 문지기)가 그 남루(繿縷; 의복이 해진 모양)함을 보고 재삼(再三) 진입하지 못하게 했다. ()이 이에 옷을 벗어() ()에게 주고 겨우 통복(通覆)했다. 그의 모친이 이를 듣고 불각(不覺)에 부지(仆地; 땅에 쓰러짐)하고 가로되 나의 아들이 아직 있었더냐. 드디어 택당(宅堂)으로 영입(迎入)했고 핍박(逼迫; )해 환의(換衣)하고 조욕(澡浴)하게 했다. 및 조욕하자 그 옷을 모두 바꾸어(換去) 다만 그 신의(新衣)를 입음()을 얻었다. ()이 울며() 가로되 내가 몇 년이나 그와 더불어 권속(眷屬)이 되었거늘 어찌 하루아침에 급()히 상사(相捨)하겠는가. 곧 길상사(吉祥寺)에 다다라 숙박(宿泊)했다(作宿). 차일(次日) 부모형제가 모두 와서 참알(參謁)을 알렸다(報謁). ()이 여명(黎明)을 써 떠났고 마침내 상견(相見; )에 미치지 못했다. 단지 벽간(壁間)에 유게(留偈)를 보였으니 이르되 마음이 쇠와 같음을 혐의(嫌疑; )하지 말지니/ 자기도 오히려() 원수(怨讎; 과 통함)가 된다/ 문 앞의 눈을 쓸어 없애야/ 비로소 불 속의 연꽃이 핀다/ 만반(萬般)을 다시 물음을 그칠지니()/ 일등(一等; 一樣으로 평등함) 이 망연(忘緣)이다/ 개사(箇事; 此事)가 상응하는 곳에/ 금강종(金剛種)이 현전(現前)한다. 그의 모친이 스님이 실명(失明)했음을 추억함으로 인해 행()이 괄창(括蒼)으로 재귀(再歸)했다. 그의 부친이 핍령(逼令)하여 남명(南明)에서 출세했고 구(; 衢州)의 오거(烏巨; 오거사)로 옮겼다. 그 도를 대진(大振)했고 요(; 饒州)의 천복(薦福; 천복사)에서 마쳤다. 묘희(玅喜; 宗杲)가 친히 어록의 서()를 찬()했고 세상에 유전(流傳)한다.

雪堂行; 도행(道行; 1089-1151)이니 송대 양기파승. 자는 설당(雪堂)이며 처주(절강에 위치함) 사람이며 속성은 섭(). 19세에 각인자영을 좇아 출가했고 용문사 불안청원(佛眼淸遠)을 참례하여 그의 현지(玄旨)를 얻었으며 아울러 그의 법을 이었음. 건염 2(1128) 수녕에서 개법했고 법해ㆍ천녕ㆍ오거 등 여러 사찰을 역주(歷住)했음. 소흥 21년 시적했음. 나이 63 [보등록16. 연등회요17].

佛眼; 청원(淸遠; 1067-1120)이니 송대 양기파승. 호는 불안(佛眼)이며 임공(臨邛; 사천 공래) 이씨(李氏). 엄정(嚴正)하고 말이 적었음. 법화경을 읽다가 의심이 있음으로 인해 서주(舒州) 태평(太平)으로 나아가 오조법연(五祖法演)에게 의지(依止)해 참구(參究)했으나 계합(契合)치 못하자 고별하고 떠나 금릉 장산(蔣山)에 이르렀는데 영원(靈源)을 해후(邂逅)했으며 영원이 돌아가기를 권했음. 때에 법연(法演)은 이미 해회(海會)로 옮겼는데 재알(再謁)함에 이르러 드디어 대오(大悟)를 얻었으며 대중암(大中庵)에 은거했음. 숭녕만수사(崇寧萬壽寺)를 새로 만들자 왕환지(王渙之)가 스님에게 청해 개법(開法)했음. 다음으로 용문(龍門)에 보임(補任)하여 12년을 넘자 화()의 포선(褒禪)에 거주하다가 선화 초(1119) 장산(蔣山)의 동당(東堂)으로 돌아온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는 54며 승랍은 40. 어록 8권이 있음 [보등록11. 속전등록25].

侍者; 사원의 주지승을 사후(伺候; 살피다)하며 그를 위해 복무하는 직사승(職事僧)이니 소향ㆍ청객ㆍ서장시자(書狀侍者)의 직이 있음.

又且; 이차(而且)와 같음. 진일층(進一層)한 의사(意思)를 표시하는 연사(連詞).

上堂; (1). 법당(法堂)에 오름이니 연법(演法)하기 위해 법당에 오름임. 이에 단망상당(旦望上堂)ㆍ오참상당(五參上堂)ㆍ구참상당(九參上堂)ㆍ사병불상당(謝秉拂上堂)ㆍ사도사상당(謝都寺上堂)ㆍ출대상당(出隊上堂)ㆍ출향상당(出鄕上堂) 등이 있음. (2). 승당(僧堂)에 오름이니 죽반(粥飯)을 먹기 위해 승당에 오름임. 여기에선 (1)을 가리킴.

藞苴; 정결(整潔)하지 못함ㆍ검속(檢束)하지 않음ㆍ추소(麁疏)ㆍ성숙하지 못함 등의 뜻. 이는 폄의사(貶義詞)니 선가에서 이를 쓰면 어떤 때 희학(戱謔; 희롱하며 놀림)의 의미를 함유함. 또 송시(宋時)의 중원(中原) 사람이 인식하기를 사천(四川) 사람들은 자못 검속(檢束)하지 않는다 하여 고로 저저(翥苴)로 호칭했으니 희학(戱謔)의 의미를 많이 함유함. 또 천라저(川藞苴)ㆍ천라저(川䖃苴)로 지음.

一衆; 있는 바의 사람. 대중. 사원에 있는 바 승인을 가리킴.

大常博士; 태상박사(太常博士)와 같음. 관직의 이름. 태상시(太常寺)의 속관(屬官)에 박사와 장교(掌敎)하는 제자가 있어 분경(分經)하여 임직(任職)했으니 예컨대() ()는 노제한(魯齊韓) 3()로 나누고 각기 한 사람을 두었음. 나라에 의사(疑事)가 있으면 곧 자순(咨詢)에 대비했음. ()4백 석()이었는데 한선제(漢宣帝)는 증첨(增添)하여 6백 석에 가까웠음. 그 관직은 후세의 국자박사에 상당했음. 삼국 위문제(魏文帝)가 처음으로 태상박사를 설치했고 진() 이후 따라 설치했으며 직칭(職稱)은 청요(淸要)였고 품급은 높지 않았음. ()은 종7품상이었고 송()의 태상박사의 직수(職守)는 전대(前代)와 같았고 명ㆍ청도 또한 설치했고 균일하게 정7품이었음 [백도백과].

三衢; 절강 구주부(衢州府) ()에 삼구산이 있는지라 고로 이름했음 [대혜서고로주].

通覆; 이르자면 사정을 알려 그의 의지를 통달(通達; 통해 전달). 소보의회(小補疑會)에 가로되 복()은 복()으로 지음과 통한다. ()은 방륙절(房六切)이니 백(; 알림)이다.

眷屬; ()은 친애가 되며 속()은 예속이 됨. 친근하면서 순종하는 자를 가리킴.

玅喜; 종고(宗杲; 1089-1163)니 송대승. ()가 담회(曇晦)며 영국(寧國; 安徽 宣州) 해씨(奚氏). 나이 17에 출가했음. 보봉(寶峰)에 올라 담당문준(湛堂文準)을 알현(謁見)했는데 문준이 입도(入道)의 요경(要徑)을 지도하였음. 문준이 죽자 무진거사(無盡居士; 張商英이니 황룡하 3)에게 달려가 참알(參謁)하고 탑명(塔銘)을 구했는데 무진이 한 번 보고 그를 기이하게 여겼으며 그 암자를 이름해 묘희(妙喜)라 했음. 후에 원오극근(圓悟克勤; 양기하 3)을 참알해 법을 얻었음. 우승상(右丞相) 여순(呂舜)이 주청(奏請)하여 자의(紫衣)와 및 불일대사(佛日大師)란 호를 주었음. 후에 운거산(雲居山)에 암자를 창건해 거처했으며 오래되자 민()에 들어가 장락(長樂)의 양서(洋嶼)에 결모(結茅; 띠로 암자를 엮음)했고 또 소계(小溪)의 운문암(雲門庵)으로 이사했음. 승상(丞相) 장준(張浚)의 명에 응해 경산(徑山)에 머물렀는데 도법(道法)의 성함이 한 때에 으뜸()이었음. 시랑(侍郞) 장구성(張九成; 宗杲法嗣)도 또한 좇아 교유(交遊)했음. 조정(朝政)을 논의함으로 인해 진회(秦檜)의 시기(猜忌)를 입어 영남(嶺南)에 유배(流配)되었다가 진회가 죽자 소환(召還)되었고 다음해 봄 승가리(僧伽梨)를 회복(回復)했으며 칙명을 받들어 육왕(育王)에 주지(住持)했는데 해를 넘겨 성지(聖旨)가 있어 경산(徑山)으로 개명했음. 도속(道俗; 僧俗)이 흠모(歆慕; 心服할 흠)하기가 처음과 같았음.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불러 대화하고는 뜻에 맞는지라 대혜선사(大慧禪師)란 호를 주었으며 묘희암(妙喜庵) 3자를 어서(御書)하여 주었음. 융흥원년(隆興元年) 8월에 조금 병들었는데 10일에 유주(遺奏)를 친히 쓰고 또 유게(遺偈)를 쓰고는 붓을 던지고 의젓하게(委然) 입적했으니 나이는 75, 승랍은 58. 시호(諡號)를 가로되 보각선사(普覺禪師)며 대혜어록(大慧語錄) 등이 있음 [통요속집22. 연등회요17. 가태보등록15. 오등회원19. 불조통재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