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燈會元卷第十
法眼宗
靑原下八世
羅漢琛禪師法嗣
金陵淸涼院文益禪師
餘杭魯氏子 七歲依新定智通院全偉禪師落髮 弱齡稟具於越州開元寺 屬律匠希覺師盛化於明州鄮山育王寺 師往預聽 習究其微旨 復傍探儒典 遊文雅之場 覺師目爲我門之游夏也 師以玄機一發 雜務俱捐 振錫南邁 抵福州參長慶 不大發明 後同紹修法進三人欲出嶺 過地藏院 阻雪少憩 附爐次 藏問 此行何之 師曰 行脚去 藏曰 作麽生是行脚事 師曰 不知 藏曰 不知最親切 又同三人擧肇論 至天地與我同根處 藏曰 山河大地 與上座自己是同是別 師曰 別 藏竪起兩指 師曰 同 藏又竪起兩指 便起去 雪霽辭去 藏門送之 問曰 上座尋常說三界唯心 萬法唯識 乃指庭下片石曰 且道此石在心內 在心外 師曰 在心內 藏曰 行脚人著甚麽來由 安片石在心頭 師窘無以對 卽放包依席下求決擇 近一月餘 日呈見解 說道理 藏語之曰 佛法不恁麽 師曰 某甲詞窮理絕也 藏曰 若論佛法 一切見成 師於言下大悟 因議留止 進師等以江表叢林 欲期歷覧 命師同往 至臨川 州牧請住崇壽院 開堂日 中坐茶筵未起 時僧正白師曰 四衆已圍繞和尙法座了也 師曰 衆人却參眞善知識 少頃陞座 僧問 大衆雲集 請師擧唱 師曰 大衆久立 乃曰 衆人旣盡在此 山僧不可無言 與大衆擧一古人方便 珍重 便下座
●弱齡; 一弱冠之年 二泛指幼年 靑少年
●文雅; 謂溫和有禮貌 溫文爾雅 講禮儀而不粗鄙 也指文敎 文才 文士等
●遊夏; 同游夏 指孔子弟子子游子夏也 子游 吳國人 姓言 名偃 與子夏善文學 子夏 姓卜 名商 字子夏 四十有四年下於孔子 傳孔子之詩學 ▲論語先進 德行 顔淵 閔子騫 冉伯牛 仲弓 言語 宰我 子貢 政事 冉有 季路 文學 子游 子夏
●僧正; 又稱僧主 統領敎團 竝匡正僧尼行爲之僧官 本制始於魏晉南北朝時代 爲中央僧官之職稱 惟自唐宋以來 多爲地方僧官 中央另設僧職機構 按大宋僧史略中立僧正條 正 政之意 僧正卽須先自正始得正人 蓋比丘戒律漸弛 習染俗風 乃揀擇僧衆中有德望者爲僧正 後秦姚興時 以僧䂮(道䂮)任僧主 統管秦地僧尼 爲僧正之初例 此後南朝歷代皆設有僧正之職 朝代不同 名稱亦互異
금릉(金陵) 청량원(淸涼院) 문익선사(文益禪師)
여항(餘杭) 노씨(魯氏)의 아들이다. 7세에 신정(新定) 지통원(智通院) 전위선사(全偉禪師)에게 의지해 낙발(落髮)했고 약령(弱齡)에 월주(越州) 개원사(開元寺)에서 품구(稟具)했다. 율장(律匠) 희각(希覺) 스님이 명주(明州) 무산(鄮山) 육왕사(育王寺)에서 성화(盛化)함에 속한지라 스님이 가서 예청(預聽; 參預하여 聽聞)하면서 그 미지(微旨)를 습구(習究; 학습하며 연구)했고 다시 유전(儒典)을 방탐(傍探; 곁으로 탐구)하며 문아지장(文雅之場)에 노닐었다. 각사(覺師)가 명목(名目)하여 아문(我門)의 유하(遊夏)라 했다. 스님이 현기(玄機)가 일발(一發)하자 잡무(雜務)를 모두(俱) 버리고(捐) 석장(錫杖)을 떨치며 남매(南邁; 남쪽으로 出行)하여 복주(福州)에 다다라(抵) 장경(長慶)을 참(參)했으나 크게 발명(發明; 明悟)하지 못했다. 후에 소수(紹修)ㆍ법진(法進)과 함께 3인(人)이 출령(出嶺)하려 했고 지장원(地藏院)에 이르러(過) 눈에 막혀 조금(少) 쉬었다. 부로(附爐)하던 차에 지장(地藏)이 묻되 이러히 감은 어디로 가려고 함인가. 사왈 행각하여 갑니다. 장왈(藏曰) 무엇이 이 행각하는 일인가. 사왈 알지 못합니다. 장왈(藏曰) 알지 못함이 가장 친절하다. 또 3인이 함께 조론을 들었는데(擧) 천지가 나와 동근(同根)이라 한 곳에 이르러 장왈(藏曰) 산하대지와 상좌의 자기가 이 같은가 이 다른가. 사왈 다릅니다. 지장이 두 손가락을 세워 일으켰다. 사왈 같습니다. 지장이 또 두 손가락을 세워 일으키더니 바로 일어나서 갔다. 눈이 개이자 고별하고 떠났다. 지장이 문송(門送)하면서 물어 가로되 상좌가 심상(尋常)에 설하기를 삼계가 유심이며 만법이 유식이라 한다. 이에 뜰 아래 편석(片石)을 가리키며 가로되 그래 말하라, 이 돌이 마음 안에 있는가, 마음 밖에 있는가. 사왈 마음 안에 있습니다. 장왈(藏曰) 행각인이 무슨 내유를 이루어(著甚麽來由) 편석을 심두(心頭)에 안치해 두는가. 스님이 군색(窘塞; 窘)하여 대답할 게 없었다. 곧 보따리를 내리고 석하(席下)에 의지해 결택(決擇)을 구했다. 근 한 달 남짓 날마다 견해를 보이며 도리를 해설했는데 지장이 말해 가로되 불법이 이러하지 않다. 사왈 모갑은 말이 다하고 이치가 끊겼습니다(詞窮理絕也). 장왈(藏曰) 만약 불법을 논하자면 일체에 현성(見成)했다. 스님이 언하에 대오했고 인하여 의논해 머물려는데(留止) 법진(法進) 스님 등이 강표(江表)의 총림을 역람(歷覽)함을 기약(期約)하려 하면서 스님에게 명령해 함께 갔다. 임천(臨川)에 이르자 주목(州牧)이 청해 숭수원(崇壽院)에 거주했다. 개당하던 날에 다연(茶筵) 가운데 앉아 일어나지 않자 때에 승정(僧正)이 스님에게 알려(白) 가로되 사중(四衆)이 이미 화상의 법좌를 위요(圍繞)해 마쳤습니다. 사왈 중인(衆人)이 도리어 참 선지식을 뵈었습니다(參). 소경(少頃; 片刻)에 승좌(陞座)하자 중이 묻되 대중이 운집했습니다. 스님의 거창(擧唱)을 청합니다. 사왈 대중이 구립(久立)했다. 이에 가로되 중인이 이미 다 여기에 있으니 산승이 말이 없음은 옳지 못하다. 대중에게 하나의 고인의 방편을 들어 주겠다. 진중(珍重)하라 하고 바로 하좌했다.
●弱齡; 1. 약관(弱冠)의 나이. 2. 널리 유년ㆍ청소년을 가리킴.
●文雅; 이르자면 온화하고 예의가 있는 모양. 온문이아(溫文爾雅; 태도가 온화하고 행동거지가 우아하다)하고 예의를 익혀 조비(粗鄙)하지 않음. 또 문교(文敎)ㆍ문재(文才)ㆍ문사(文士) 등을 가리킴.
●遊夏; 유하(游夏)와 같음. 공자의 제자인 자유(子游)와 자하(子夏)를 가리킴. 자유는 오나라 사람이며 성이 언(言)이며 이름이 언(偃)임. 자하와 더불어 문학을 잘했음. 자하는 성이 복(卜)이며 이름이 상(商)이며 자가 자하임. 공자보다 44년 아래며 공자의 시학(詩學)을 전했음. ▲논어 선진. 덕행(德行)은 안연ㆍ민자건ㆍ염백우ㆍ중궁이다. 언어(言語)는 재아ㆍ자공이다. 정사(政事)는 염유ㆍ계로다. 문학(文學)은 자유(子游)와 자하(子夏)다.
●僧正; 또 승주(僧主)라고 일컬음. 교단을 통령하며 아울러 승니의 행위를 바르게 하는 승관(僧官)임. 본래의 제도는 위진남북조시대에 비롯했으며 중앙 승관의 직칭(職稱)이 됨. 오직 당송 이래로부터는 다분히 지방의 승관이 되며 중앙에 따로 승직의 기구를 설치했음. 대송승사략중(大宋僧史略中) 입승정조(立僧正條)를 안험컨대 정(正)은 정(政)의 뜻이니 승정은 곧 모름지기 먼저 스스로 발라야 비로소 사람들을 바르게 함을 얻는다. 대개 비구의 계율이 점차 느슨해져 속풍을 익히고 물들어 이에 승중 가운데 덕망이 있는 자를 간택해 승정으로 삼았다. 후진(後秦)의 요흥(姚興) 때 승략(僧䂮; 道䂮)을 승주(僧主)에 임명해 진지(秦地)의 승니를 통솔 관리했으며 승정의 처음 사례가 된다. 차후에 남조의 역대가 다 승정의 직을 설치해 있었음. 조대(朝代)가 같지 못하고 명칭도 또한 서로 달랐음.
子方上座自長慶來 師擧長慶偈問曰 作麽生是萬象之中獨露身 子方擧拂子 師曰 恁麽會又爭得 曰 和尙尊意如何 師曰 喚甚麽作萬象 曰 古人不撥萬象 師曰 萬象之中獨露身 說甚麽撥不撥 子方豁然悟解 述偈投誠 自是諸方會下 有存知解者翕然而至 始則行行如也 師微以激發 皆漸而服膺 海參之衆 常不減千計
●海參; 謂僧人信徒從四面八方來參拜請益
자방(子方) 상좌가 장경(長慶)으로부터 왔다. 스님이 장경(長慶; 慧稜)의 게를 들어 문왈(問曰) 무엇이 이 만상지중에 독로하는 몸인가(萬象之中獨露身). 자방이 불자를 들었다. 사왈(師曰) 이렇게 안다면 또 어찌 옳겠는가(得). 가로되 화상의 존의(尊意)는 어떠한가. 사왈 무엇을 일러 만상이라 하는가. 가로되 고인은 만상을 제거하지(撥) 않았다. 사왈 만상 가운데 독로한 몸이거늘 무슨 발(撥)과 불발(不撥)을 설하는가. 자방이 활연(豁然)히 오해(悟解)하고 술게(述偈)하여 투성(投誠)했다. 이로부터 제방의 회하(會下)에서 지해(知解)를 두어 있는 자들이 흡연(翕然; 대중의 뜻이 하나로 쏠리는 정도가 대단하게)히 이르렀다. 비로소 곧 행위마다 여(如)였다. 스님이 조금씩(微) 격발(激發)하매 다 점점 복응(服膺)했다. 해참(海參)의 무리가 늘 1천의 계수(計數)를 감하지 않았다.
●海參; 이르자면 승인이나 신도가 사면팔방으로부터 와서 참배하고 청익함.
上堂 大衆立久 乃謂之曰 祇恁麽便散去 還有佛法道理也無 試說看 若無 又來這裏作麽 若有 大市裏人叢處亦有 何須到這裏 諸人各曾看還源觀百門義海華嚴論涅槃經 諸多䇿子 阿那箇敎中有這箇時節 若有 試擧看 莫是恁麽經裏有恁麽語 是此時節麽 有甚麽交涉 所以道 微言滯於心首 嘗爲緣慮之場 實際居於目前 翻爲名相之境 又作麽生得翻去 若也翻去 又作麽生得正去 還會麽 莫祇恁麽念䇿子 有甚麽用處
●還源觀; 全稱修華嚴奧旨妄盡還源觀 一卷 略稱還源觀 又作還原觀 唐 法藏述 收於大正藏第四十五冊
●百門義海; 唐代李通玄長者著
●華嚴論; 新華嚴經論 釋氏稽古略三云 開元二十二年(734) 太原李長者 名通玄 日食一柏葉棗小餠 因呼棗柏大士 初開元七年(719) 太原孟縣高仙奴舘之齋中造論 逾三年遷馬氏古佛堂側 閱十年負經書而去之 山行二十里偶一虎 長者撫之曰 吾著華嚴論 能爲擇棲止處否 卽以經囊負其背 行至神福山原下土龕前駐止 長者乃於龕著論 每夕口出白光以代燈燭 日有二女子汲水炷香 每食時具饌 齋畢撤而去 如是五載 長者著論畢 遂滅跡不見也 論成四十卷 開元二十八年(740)三月長者卒 壽九十五歲 又著決疑論 會釋 十門玄義 緣生解 迷十明等論 十玄六相 百門義海 偈讚語等 竝傳於世
●䇿子; 䇿 策的俗字 子 助詞 策 泛指書籍 又簡冊 集韻 冊 通作策
상당(上堂) 대중이 선 지 오래였다. 이에 일러 가로되 다만 이러하고 바로 흩어져 간다면 도리어 불법도리가 있느냐 또는 없느냐, 시험 삼아 설해 보아라. 만약 없다면 또 이 속에 와서 무엇하리오. 만약 있다면 대시(大市) 속의 사람이 모인(叢) 곳에도 또한 있거늘 어찌 이 속에 이름을 쓰겠는가(須). 제인은 각자 일찍이 환원관(還源觀)ㆍ백문의해(百門義海)ㆍ화엄론(華嚴論)ㆍ열반경을 보았는가. 여러 많은 책자(䇿子; 䇿은 策의 俗字)의 어느 것(阿那箇)의 교중(敎中)에 저개(這箇) 시절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시험 삼아 들어 보아라. 이는 이러한 경 속에 이러한 말이 있음이 이는 이 시절이 아닌가 한다면 무슨 교섭(交涉)이 있으리오. 소이로 말하되 미언(微言)이 심수(心首)에 체재(滯在)한다면 일찍이(嘗) 연려(緣慮)의 마당이 되고 실제(實際)가 목전에 거처한다면 도리어(翻) 명상(名相)의 경계가 되거늘 또 어떻게 번(飜; 翻覆)을 얻어 가겠는가. 만약에 번하여 간다면 또 어떻게 정(正; 正常)을 얻어 가겠는가. 도리어 아느냐. 다만 이렇게 책자(䇿子)를 외우지(念) 말지니 무슨 용처(用處)가 있으리오.
●還源觀; 전칭이 수화엄오지망진환원관(修華嚴奧旨妄盡還源觀)이니 1권. 약칭이 환원관(還源觀)이며 또 환원관(還原觀)으로 지음. 당(唐) 법장(法藏)이 술(述)했고 대정장 제45책에 수록되었음.
●百門義海; 당대 이통현 장자가 지었음.
●華嚴論; 신화엄경론이니 석씨계고략3에 이르되 개원(開元) 22년(734) 태원(太原)의 이장자(李長者)는 이름이 통현(通玄)이다. 하루에 하나의, 잣잎과 대추의 작은 떡을 먹었으므로 인하여 조백대사(棗柏大士)라 부른다. 처음에 개원 7년(719) 태원 맹현(孟縣) 고선노(高仙奴)의 별관(別舘)의 집 속에서 논을 지었다. 3년을 넘기자 마씨(馬氏)의 고불당 곁으로 옮겼는데 10년을 지내고는 경서를 지고 떠났다. 20리를 산행하다가 한 호랑이를 만났다(偶는 遇임). 장자가 어루만지며 가로되 내가 화엄론을 지으려 하는데 능히 살며 머물 곳을 간택하겠는가. 곧 경낭을 그 등에 실었다. 가다가 신복산(神福山) 언덕 아래의 토감(土龕) 앞에 이르자 멈추었다. 장자가 이에 토감에서 논을 짓는데 매일 밤마다 입에서 백광을 내어 등촉에 대체했다. 날마다 두 여자가 있어 물을 긷고 향을 사루었으며 매번 식사 때는 음식을 갖추었고 재식을 마치면 거두어 갔다. 이와 같이 하기를 다섯 해에 장자가 저론(著論)을 마쳤고 드디어 종적을 없애고 보이지 않았다. 논은 40권을 이루었다. 개원 28년(740) 3월에 장자가 죽었는데 나이는 95세다. 또 결의론(決疑論)ㆍ회석(會釋)ㆍ십문현의(十門玄義)ㆍ연생해(緣生解)ㆍ미십명(迷十明) 등의 논을 지었다. 십현육상(十玄六相)ㆍ백문의해(百門義海)ㆍ게찬어(偈讚語) 등이 모두 세상에 전해졌다.
●䇿子; 책(䇿) 책(策)의 속자(俗字). 자(子)는 조사임. 책(策)은 널리 서적을 가리킴. 또 간책(簡冊)임. 집운 책(冊) 책(策)으로 지음과 통한다.
僧問 如何披露卽得與道相應 師曰 汝幾時披露卽與道不相應 問 六處不知音時如何 師曰 汝家眷屬一羣子 師又曰 作麽生會 莫道恁麽來問 便是不得 汝道六處不知音 眼處不知音 耳處不知音 若也根本是有 爭解無得 古人道 離聲色 著聲色 離名字 著名字 所以無想天修得 經八萬大劫 一朝退墮 諸事儼然 蓋爲不知根本眞實 次地修行三生六十劫 四生一百劫 如是直到三祇果滿 他古人猶道 不如一念緣起無生 超彼三乘權學等見 又道彈指圓成八萬門 刹那滅却三祇劫 也須體究 若如此用多少氣力 僧問 指卽不問 如何是月 何曰 阿那箇是汝不問底指 又僧問 月卽不問 如何是指 師曰 月 曰 學人問指 和尙爲甚麽對月 師曰 爲汝問指
●披露; 陳述 表白
●六處; 十二因緣之一 在母胎內具足眼等六根而出母胎之位也 處乃十二處之處 爲六根六境之通稱 根境爲生識之依處 故名處
●耳處; 十二處之一 又作耳入 耳根也 耳根與聲境涉入 故曰入 新譯曰耳處
●無想天; 無想有情之天處也 有部與經部攝之於第四禪之廣果天 不立別處 上座部於廣果天之上 立無想天之一處 ▲俱舍論五 無想有情居在何處 居在廣果 廣果天中有高勝處 如中間靜慮 名無想天
●三祇; 又作三祗 三阿僧祇劫也
●權學; 卽權敎 實敎之對稱 隨他意方便之敎說 稱爲權敎 如來隨自意眞實之敎法 稱爲實敎 天台宗立藏通別圓四敎 其中以藏通別三敎爲權敎 圓敎爲實敎 [摩訶止觀三下]
●體究; 體 履踐 體達
승문(僧問) 어떻게 피로(披露)해야 귿 도와 상응함을 얻겠습니까. 사왈(師曰) 네가 어느 때 피로하여 곧 도와 상응하지 않던가. 묻되 6처(六處)가 음(音)을 알지 못할 때 어떻습니까. 사왈 네 집 권속(眷屬)의 일군자(一羣子; 子는 조사)다. 스님이 우왈(又曰) 어떻게 아느냐. 이렇게 와서 물음이 바로 이 얻지 못함이라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말하되 6처가 음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안처(眼處)가 음을 알지 못함이냐.. 이처(耳處)가 음을 알지 못함이냐. 만약에 근본이 이 유(有)라면 어찌 무득(無得)을 알겠는가(爭解). 고인이 말하되 성색(聲色)을 여의면 성색에 붙고(著) 명자(名字)를 여의면 명자에 붙는다. 소이로 무상천(無想天)에서 수득(修得)하여 8만 대겁(大劫)을 경과했다가 일조(一朝)에 퇴타(退墮)하니 제사(諸事)가 엄연(儼然)했다. 대개 근본진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니 차지(次地)에 삼생육십겁(三生六十劫), 사생일백겁(四生一百劫)을 수행하되 이와 같이 바로 3기(三祇)의 과만(果滿)에 이르더라도 저 고인이 오히려 말하되 일념 연기(緣起)의 무생(無生)만 같지 못하나니 저(彼) 3승(乘)의 권학(權學) 등의 견해를 초월한다. 또 말하되 탄지(彈指)하매 팔만문(八萬門)을 원성(圓成)하고 찰나에 삼기겁(三祇劫)을 멸각(滅却)한다(증도가의 2구). 또한 모름지기 체구(體究)해야 하나니 만약 이와 같다면 다소(多少)의 기력(氣力)을 쓰겠는가. 승문(僧問) 손가락은 곧 묻지 않나니 무엇이 이 달입니까. 사왈(師曰) 어느 것(阿那箇)이 이 네가 묻지 않은 손가락이냐. 또 승문 달은 곧 묻지 않나니 무엇이 이 손가락입니까. 사왈 달이다. 가로되 학인이 손가락을 물었거늘 화상은 무엇 때문에 달이라고 대답합니까. 사왈 네가 손가락을 물었기 때문이다.
●披露; 진술. 표백(表白).
●六處; 12인연의 하나. 모태 속에 있으면서 안(眼) 등의 6근을 구족하여 모태에서 나오는 위(位)임. 처(處)는 곧 12처의 처니 6근과 6경(境)의 통칭이 됨. 근경(根境)은 식(識)을 내는 의처(依處)가 되는지라 고로 이름이 처임.
●耳處; 12처의 하나. 또 이입(耳入)으로 짓나니 이근(耳根)임. 이근과 성경(聲境)이 섭입(涉入)하는지라 고로 가로되 입(入)이며 신역에 가로되 이처(耳處)임.
●無想天; 무상유정(無想有情)의 천처(天處)임. 유부(有部)와 경부(經部)는 제4선의 광과천(廣果天)에 거두고 다른 곳을 세우지 않았으며 상좌부(上座部)는 광과천 위에 무상천의 1처를 세웠음. ▲구사론5. 무상유정(無想有情)은 어느 곳에 거주해 있는가 하면 광과에 거주해 있다. 광과천 중에 높고 수승한 곳이 있으며 중간의 정려(靜慮) 같은 것을 이름해 무상천이다.
●三祇; 또 삼기(三祗)로 지음. 3아승기겁(阿僧祇劫)임.
●權學; 곧 권교(權敎)니 실교(實敎)의 대칭. 타인의 뜻에 따르는 방편의 교설을 일컬어 권교라 하고 여래가 자기의 뜻에 따르는 진실한 교법을 일컬어 실교라 함. 천태종에서 장ㆍ통ㆍ별ㆍ원의 4교를 세웠는데 그 중에 장ㆍ통ㆍ별 3교는 권교가 되고 원교는 실교가 됨 [마하지관3하].
●體究; 체(體)는 이천(履踐; 履行), 체달(體達; 사물의 진상을 통달함).
江南國主重師之道 迎住報恩禪院 署淨慧禪師 僧問 洪鐘纔擊 大衆雲臻 請師如是 師曰 大衆會 何似汝會 問 如何是古佛家風 師曰 甚麽處看不足 問 十二時中 如何行履 卽得與道相應 師曰 取捨之心成巧僞 問 古人傳衣 當記何人 師曰 汝甚麽處見古人傳衣 問 十方賢聖皆入此宗 如何是此宗 師曰 十方賢聖皆入 問 如何是佛向上人 師曰 方便呼爲佛 問 如何是學人一卷經 師曰 題目甚分明 問 聲色兩字 甚麽人透得 師却謂衆曰 諸上座且道 這箇僧還透得也未 若會此僧問處 透聲色也不難 問 求佛知見 何路最徑 師曰 無過此 問 瑞草不凋時如何 師曰 謾語 問 大衆雲集 請師頓決疑網 師曰 寮舍內商量 茶堂內商量 問 雲開見日時如何 師曰 謾語眞箇 問 如何是沙門所重處 師曰 若有纖毫所重 卽不名沙門 問 千百億化身 於中如何是淸淨法身 師曰 總是 問 簇簇上來 師意如何 師曰 是眼不是眼 問 全身是義 請師一決 師曰 汝義自破 問 如何是古佛心 師曰 流出慈悲喜捨
●簇簇; 叢列成行貌
강남국주(江南國主)가 스님의 도를 존중했고 영입(迎入)하여 보은선원(報恩禪院)에 주(住)하게 하고 서(署)하여 정혜선사(淨慧禪師)라 했다. 승문(僧問) 홍종(洪鐘; 大鍾)을 겨우 치자(擊) 대중이 운진(雲臻; 雲集)했으니 스님의 여시(如是)를 청합니다. 사왈(師曰) 대중의 회(會; 理會)가 너의 회(會)와 어찌 같겠는가(何似). 묻되 무엇이 이 고불의 가풍입니까. 사왈 어느 곳에서 봄(看)이 부족한가. 묻되 12시 중에 어떻게 행리(行履)해야 곧 도와 상응함을 얻습니까. 사왈 취사지심(取捨之心)은 교위(巧僞)를 이룬다. 묻되 고인이 전의(傳衣)함은 마땅히 어떤 사람에게 기(記; 授記)함입니까. 사왈 네가 어느 곳에서 고인이 전의(傳衣)함을 보았는가. 묻되 시방의 현성(賢聖)이 모두 차종(此宗)에 든다(入) 하니 무엇이 이 차종입니까. 사왈 시방의 현성이 모두 든다. 묻되 무엇이 이 불향상인(佛向上人)입니까. 사왈 방편으로 호칭(呼稱)하여 불(佛)이라 한다. 묻되 무엇이 이 학인의 1권(卷)의 경입니까. 사왈 제목이 심히 분명하다. 묻되 성색(聲色) 양자(兩字)를 어떤 사람이 투득(透得)합니까. 스님이 도리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제상좌(諸上座)여, 그래 말하라 저개(這箇; 이) 중은 도리어 투득했느냐 또는 아니냐. 만약 이 중의 문처(問處)를 이회(理會; 會)한다면 성색을 투과하기가 어렵지 않으리라. 묻되 불지견(佛知見)을 구(求)하려면 어느 길이 가장 지름길(徑)입니까. 사왈 이것을 초과할 게 없다. 묻되 서초(瑞草)가 시들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헛된 말이다(謾語; 謾은 漫과 통함). 묻되 대중이 운집했으니 청컨대 스님이 의망(疑網)을 단박에 결단(決斷)하십시오. 사왈 요사(寮舍) 안에서 상량(商量)하고 다당(茶堂) 안에서 상량했다. 묻되 구름이 열려 해를 볼 때 어떻습니까. 사왈 헛된 말(謾語)이라 함이 진개(眞箇; 진짜)다. 묻되 무엇이 이 사문의 소중(所重)한 곳입니까. 사왈 만약 섬호(纖毫)라도 소중한 게 있으면 곧 사문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묻되 천백억(千百億) 화신(化身) 가운데에 무엇이 이 청정법신입니까. 사왈 모두 이것이다(總是). 묻되 족족(簇簇)히 올라왔는데 스님의 뜻은 어떻습니까. 사왈 이 눈(眼)인가 이 눈이 아닌가. 묻되 전신(全身)이 이 의(義; 뜻)니 스님의 일결(一決)을 청합니다. 사왈 너의 의(義)가 저절로 깨어졌다. 묻되 무엇이 이 고불심(古佛心)입니까. 사왈 자비희사(慈悲喜捨)를 유출(流出)한다.
●簇簇; 빽빽이 나열하여 줄을 이룬 모양.
問 百年暗室 一燈能破 如何是一燈 師曰 論甚麽百年 問 如何是正眞之道 師曰 一願也敎汝行 二願也敎汝行 問 如何是一眞之地 師曰 地則無一眞 曰 如何卓立 師曰 轉無交涉 問 如何是古佛 師曰 卽今也無嫌疑 問 十二時中如何行履 師曰 步步蹋著 問 古鏡未開 如何顯照 師曰 何必再三 問 如何是諸佛玄旨 師曰 是汝也有 問 承敎有言 從無住本立一切法 如何是無住本 師曰 形興未質 名起未名 問 亡僧衣衆人唱 祖師衣甚麽人唱 師曰 汝唱得亡僧甚麽衣 問 蕩子還鄕時如何 師曰 將甚麽奉獻 曰 無有一物 師曰 日給作麽生
묻되 백 년 암실을 1등(燈)으로 능히 깨뜨린다 하니 무엇이 이 1등입니까. 사왈(師曰) 무슨 백 년을 논하느냐. 묻되 무엇이 이 정진지도(正眞之道)입니까. 사왈 1원(願)도 너로 하여금(敎) 행하게 하고 2원(願)도 너로 하여금 행하게 한다. 묻되 무엇이 이 일진지지(一眞之地)입니까. 사왈 지(地)는 곧 일진(一眞)이 없다. 가로되 어떻게 탁립(卓立; 세우다)합니까. 사왈 더욱(轉) 교섭(交涉)이 없다. 묻되 무엇이 이 고불입니까. 사왈 즉금도 혐의하는 곳이 없다. 묻되 12시 중에 어떻게 행리(行履)해야 합니까. 사왈 걸음마다 답착(蹋著)하라. 묻되 고경(古鏡)을 열지 않았는데 어떻게 환히(顯) 비춥니까. 사왈 재삼(再三)이 어찌 필요하랴. 묻되 무엇이 이 제불의 현지(玄旨)입니까. 사왈 이 너에게도 있다. 묻되 듣건대(承) 교(敎; 維摩經中)에 말씀이 있어 무주의 근본으로 좇아 일체법을 세운다(從無住本立一切法). 무엇이 이 무주의 근본입니까. 사왈 형상이 일어나면 바탕이 아니며 이름이 일어나면 이름이 아니다. 묻되 망승(亡僧)의 옷은 중승(衆僧)이 창(唱)합니다만 조사의 옷은 어떤 사람이 창합니까. 사왈 네가 망승의 어떤 옷을 창득(唱得)했느냐. 묻되 탕자(蕩子)가 환향(還鄕)할 때 어떻습니까. 사왈 무엇을 가지고 봉헌(奉獻)하느냐. 가로되 일물(一物)도 있지 않습니다. 사왈 일급(日給)하여 무엇하려느냐(作麽生).
師後住淸涼 上堂曰 出家人但隨時及節便得 寒卽寒熱卽熱 欲知佛性義 當觀時節因緣 古今方便不少 不見石頭和尙因看肇論云 會萬物 爲己者 其唯聖人乎 他家便道 聖人無己 靡所不己 有一片言語喚作參同契 末上云 竺土大僊心 無過此語也 中間也秖隨時說話 上座今欲會萬物爲自己去 葢爲大地無一法可見 他又囑云 光陰莫虛度 適來向上座道 但隨時及節便得 若也移時失候 卽是虛度光陰 於非色中作色解 上座於非色中作色解 卽是移時失候 且道色作非色解 還當不當 上座若恁麽會 便是沒交涉 正是癡狂兩頭走 有甚麽用處 上座但守分隨時過好 珍重
●癡狂兩頭走; 意謂癡迷不悟 執著地用分別 對立的眼光看待事理 按禪家認爲萬法一如 事物沒有分別對立的兩頭
스님이 후에 청량(淸涼)에 거주했다. 상당(上堂)해 가로되 출가한 사람은 단지 시(時) 및 절(節)을 따라야 곧 옳나니 추우면 곧 춥고 더우면 곧 덥다. 불성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시절인연을 관(觀)하라. 고금의 방편이 적지 않나니 보지 못하는가 석두화상(石頭和尙)이, 조론(肇論)에 이르되 만물을 모아 자기로 삼는 자는 그 오직 성인(聖人)인가 하노라 함을 봄으로 인해 타가(他家; 석두)가 바로 말하되 성인은 자기가 없는지라 자기가 아닌 것이 없다 하고는 일편(一片)의 언어가 있어 참동계(參同契)라고 불러 지었다. 말상(末上; 여기에선 최초를 가리킴)에 이르되 축토(竺土)의 대선(大僊; 佛陀)의 마음이다 했는데 이 말을 초과할 게 없나니 중간은 다만 수시(隨時)하여 설화(說話)했다. 상좌(上座)가 여금에 만물을 모아 자기로 삼고자 한다면 대개(大葢) 대지(大地)에 1법도 가히 볼 게 없음이 된다(爲). 그가 또 부촉(付囑)해 이르되 광음(光陰)을 헛되이 지내지 말아라. 적래(適來)에 상좌를 향해 말하되 단지 시(時) 및 절(節)을 따르면 곧 옳다 했는데 만약에 이시실후(移時失候; 시일을 옮기고 절후를 잃음)한다면 즉시(卽是) 헛되이 광음을 지냄이며 비색(非色) 중에 색이란 앎을 지음이다. 상좌여, 비색 중에 색이란 앎을 지음이 즉시 이시실후(移時失候)니 그래 말하라 색을 비색이란 앎을 지으면 도리어 마땅한가 마땅하지 않는가. 상좌여, 만약 이렇게 이회(理會)한다면 바로(便) 이 교섭이 없나니 바로(正) 이는 치광하여 양두로 달림이거늘(癡狂兩頭走) 무슨 용처(用處)가 있겠는가. 상좌여, 단지 본분을 지켜(守分) 시절 따라(隨時) 지내야 좋다. 진중(珍重)하라.
●癡狂兩頭走; 뜻으로 이르자면 치미(癡迷)하여 깨닫지 못하고 집착하여 분별을 써서 대립적인 안광으로 사리(事理)를 간대(看待)함. 안험컨대 선가는 인식하기를 만법이 일여(一如)라서 사물에 분별대립의 양두(兩頭)가 있지 않음.
僧問 如何是淸涼家風 師曰 汝到別處 但道到淸涼來 問 如何得諸法無當去 師曰 甚麽法當著上座 曰 爭奈日夕何 師曰 閑言語 問 觀身如幻化 觀內亦復然時如何 師曰 還得恁麽也無 問 要急相應 唯言不二 如何是不二之言 師曰 更添些子得麽 問 如何是法身 師曰 這箇是應身 問 如何是第一義 師曰 我向你道是第二義 師問修山主 毫氂有差 天地懸隔 兄作麽生會 修曰 毫氂有差 天地懸隔 師曰 恁麽會又爭得 修曰 和尙如何 師曰 毫氂有差 天地懸隔 修便禮拜〈東禪齊云 山主恁麽祇對 爲甚麽不肯 及乎再請益 法眼亦祇恁麽道便得去 且道疑訛在甚麽處 若看得透 道上座有來由〉
●閑言語; 多餘無用之語
승문(僧問) 무엇이 이 청량(淸涼)의 가풍입니까. 사왈(師曰) 네가 다른 곳에 이르거든 단지 청량에 이르렀다가 왔다고 말해라. 묻되 어떻게 해야 제법이 당함이 없음을 얻습니까. 사왈 무슨 법이 상좌에게 당했는가(當著). 가로되 일석(日夕)은 어찌하겠습니까. 사왈 한언어(閑言語; 쓸데없는 말)다. 묻되 몸을 관(觀)하매 환화(幻化)와 같고 안을 관하매 또한 다시 그러할 때 어떻습니까. 사왈 도리어 이러함을 얻느냐 또는 아니냐. 묻되 급히 상응함을 요(要)한다면 오직 말하되 불이(不二)라 하니 무엇이 이 불이지언(不二之言)입니까. 사왈 다시 사자(些子; 些少)를 더함을 얻겠는가. 묻되 무엇이 이 법신입니까. 사왈 이것(這箇)은 이 응신(應身)이다. 묻되 무엇이 이 제1의(第一義)입니까. 사왈 내가 너를 향해 말함은 이 제2의다. 스님이 수산주(修山主)에게 묻되 호리(毫氂)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 하니 형은 어떻게 이회(理會)하는가. 수왈(修曰) 호리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천지현격이다. 사왈 이렇게 이회한다면 또 어찌 얻겠는가. 수왈(修曰) 화상은 어떠한가. 사왈 호리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천지현격이다. 수(修)가 바로 예배했다〈東禪齊가 이르되 山主가 이렇게 祇對하매 무엇 때문에 不肯했고 다시 청익함에 이르러 법안도 또한 다만 이렇게 말하매 바로 얻어 갔으니 그래 말하라 의와(疑訛; 의문과 訛謬)가 어느 곳에 있느냐. 만약 보아 투과함을 얻으면 상좌가 來由가 있다고 말하겠다〉.
●閑言語; 많이 남아 무용한 말.
師與悟空禪師向火 拈起香匙問曰 不得喚作香匙 兄喚作甚麽 空曰 香匙 師不肯 空後二十餘日 方明此語 僧參次 師指簾 時有二僧同去捲 師曰 一得一失〈東禪齊云 上座作麽生會 有云 爲伊不明旨便去捲簾 亦有道指者卽會 不指而去者卽失 恁麽會還可不可 旣不許恁麽會 且問上座阿那箇得 阿那箇失〉 雲門問僧 甚麽處來 曰 江西來 門曰 江西一隊老宿寱語住也未 僧無對 後僧問師 不知雲門意作麽生 師曰 大小雲門被這僧勘破
스님이 오공선사(悟空禪師)와 더불어 향화(向火)하다가 향시(香匙)를 집어 일으켜 물어 가로되 향시라고 불러 지음을 얻지 못한다. 형은 무엇이라고 불러 짓겠는가. 오공이 가로되 향시다. 스님이 불긍(不肯)했다. 오공이 20여 일 후에 비로소 이 말을 밝혔다. 중이 참차(參次)에 스님이 발(簾)을 가리켰다. 때에 두 중이 있어 함께 가서 걷었다(捲). 사왈(師曰) 하나는 얻었고 하나는 잃었다〈東禪齊가 이르되 상좌는 어떻게 理會하느냐. 이름이 있기를(有云) 그가 旨趣를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바로 가서 捲簾했다. 또 말함이 있기를 가리킨 자는 곧 이회했고 가리키지 않았는데 간 자는 곧 잃었다. 이렇게 이회한다면 도리어 옳은가 옳지 않은가. 이미 이렇게 이회함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다만(且) 상좌에게 묻나니 어느 것(阿那箇)이 얻었고 어느 것이 잃었는가〉. 운문(雲門)이 중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강서에서 옵니다. 문왈(門曰) 강서의 일대(一隊) 노숙(老宿)이 예어(寱語; 잠꼬대)하며 주(住)하느냐 또는 아니냐. 중이 대답이 없었다. 후에 중이 스님에게 묻되 알지 못하오니 운문의 뜻이 무엇입니까. 사왈 대소(大小) 운문이 이 중의 감파(勘破)를 입었다.
問僧 甚處來 曰 道場來 師曰 明合暗合 僧無語 師令僧取土添蓮盆 僧取土到 師曰 橋東取 橋西取 曰 橋東取 師曰 是眞實 是虛妄 問僧 甚處來 曰 報恩來 師曰 衆僧還安否 曰 安 師曰 喫茶去 問僧 甚處來 曰 泗州禮拜大聖來 師曰 今年大聖出塔否 曰 出 師却問傍僧曰 汝道伊到泗州不到 師問寶資長老 古人道 山河無隔礙 光明處處透 且作麽生是處處透底光明 資曰 東畔打羅聲〈歸宗柔別云 和尙擬隔礙〉 師指竹問僧 還見麽 曰 見 師曰 竹來眼裏 眼到竹邊 曰 總不恁麽〈法燈別云 當時但擘眼向師 歸宗柔別云 和尙祇是不信某甲〉 有俗士獻畵障子 師看了 問曰 汝是手巧心巧 曰 心巧 師曰 那箇是汝心 士無對〈歸宗柔代云 某甲今日却成容易〉 僧問 如何是第二月 師曰 森羅萬象 曰 如何是第一月 師曰 萬象森羅
●泗州大聖; 泗州 卽今江蘇省泗洪 泗陽 宿遷一帶 祖庭事苑六 僧伽 釋僧伽 何國人 姓何氏 始至西凉府 次歷江淮 當龍朔(661-663)初年也 卽隷名於山陽龍興寺 初將弟子慧儼同至臨淮 就信義坊居人乞地 下標志之言 決於此處建立伽藍 遂穴土 獲古碑 乃齊國香積寺也 得金像 衣葉刻普照王佛 居人歎異 嘗臥賀跋氏家 身忽長其牀榻各三尺許 次現十一面觀音形 其家擧族欣慶 遂捨宅焉 卽今寺是也 中宗景龍二年(708) 遣使詔赴內道場 帝御法筵 言談造膝 占對休咎 契若合符 仍褒飾其寺 曰普光王寺 四年 示疾 敕自內中往薦福寺安置 三月二日 儼然坐亡 神彩猶生 止瞑目爾 俗齡八十三 僧臘罔知 帝慘悼黯然 于時穢氣充塞而形體宛如 多見靈迹 敕有司給絹三百匹 俾回葬淮上 令郡官祖送 五月五日 抵于今所 帝以仰慕不忘 因問萬回公曰 彼僧伽何人也 曰 觀音菩薩也 經不云乎 應以比丘身得度者 故見沙門相也 見宋僧傳 ▲宋高僧傳十八唐泗州普光王寺僧伽傳 咸通中(860-873)龐勛者 本徐州戍卒 擅離桂管 沿路劫掠 而攻泗州圍逼其城 伽於塔頂現形 外寇皆睡城中 偶出擊之 驚竄而陷宿州 以事奏聞 仍錫號證聖大師也 ▲佛祖統紀四十六崇寧三年(1104)條 楊州奏 泗州大聖屢見於普慧塔
●擘眼; 以手扒眼目 瞪眼作憤怒狀
중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도량(道場)에서 옵니다. 사왈(師曰) 명(明)과 합하는가, 암(暗)과 합하는가. 중이 말이 없었다. 스님이 중으로 하여금 취토(取土)하여 연분(蓮盆)에 더하게 하였다. 중이 취토하여 이르자 사왈 교동(橋東)에서 취했는가 교서(橋西)에서 취했는가. 가로되 교동에서 취했습니다. 사왈 이 진실인가 이 허망인가. 중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보은(報恩)에서 옵니다. 사왈 중승(衆僧)이 도리어 평안한가. 가로되 평안합니다. 사왈 차 먹고 가게. 중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사주(泗州)에서 대성(大聖)에게 예배하고 왔습니다. 사왈 금년에 대성(大聖)이 출탑(出塔)했는가. 가로되 나왔습니다(出). 스님이 도리어 곁의 중에게 물어 가로되 네가 말하라, 그가 사주(泗州)에 이르렀는가 이르지 못했는가. 스님이 보자(寶資) 장로에게 묻되 고인이 말하되 산하(山河)가 격애(隔礙)가 없어 광명이 곳곳마다 투과한다. 그래 무엇이(作麽生) 이 곳곳마다 투과하는 광명인가. 자왈(資曰) 동반(東畔)에 타라성(打羅聲)이다〈歸宗柔가 別云 화상은 격애하려고 한다(擬隔礙)〉. 스님이 대를 가리키며 중에게 묻되 도리어 보느냐. 가로되 봅니다. 사왈 대가 안리(眼裏)에 왔는가, 눈이 죽변(竹邊)에 이르렀는가. 가로되 모두 이러하지 않습니다〈法燈이 別云 당시에 단지 擘眼하여 스님을 향했겠다. 歸宗柔가 別云 화상은 다만 이, 모갑을 믿지 않습니다〉. 어떤 속사(俗士)가 화장자(畫障子; 그림을 그린 屛障)를 바쳤다. 스님이 보고 나서 문왈(問曰) 너는 이 손이 교묘한가 마음이 교묘한가. 가로되 마음이 교묘합니다. 사왈 어느 것(那箇)이 이 너의 마음인가. 속사가 대답이 없었다〈歸宗柔가 代云 某甲은 금일 도리어 용이함을 이루었습니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제2월입니까. 사왈 삼라만상이다. 가로되 무엇이 이 제1월입니까. 사왈 만상삼라다.
●泗州大聖; 사주(泗州)는 즉금의 강소성 사홍ㆍ사양ㆍ숙천 일대. 조정사원6. 승가(僧伽) 석승가(釋僧伽; 628-710)는 하국(何國) 사람이며 성이 하씨(何氏)다. 처음 서량부에 이르렀고 다음으론 강회(江淮; 揚子江과 淮水)를 경력했는데 용삭(661–663) 초년에 해당한다. 곧 산양의 용흥사에 이름을 붙여(隷) 놓고 처음에 제자 혜엄을 데리고 함께 임회(臨淮)에 이르러 신의방(信義坊)의 거인(居人; 住民)에게 나아가 땅을 구걸해 푯말을 내려 거기에 기록(志)하고 말하되 결정코 이곳에 가람을 건립하리라. 드디어 땅을 파자(穴은 뚫을 혈) 고비(古碑)를 획득했는데 곧 제국(齊國)의 향적사였으며 금상(金像)을 얻었는데 옷자락(葉)에 보조왕불(普照王佛)이 새겨져 있었다. 거인(居人)이 탄이(歎異; 괴이함을 감탄함)했다. 일찍이 하발씨(賀跋氏)의 집에 누웠는데 몸이 홀연히 길어져 그 상탑(牀榻; 榻은 平床)의 각 3척 가량(許)이었고 다음엔 11면 관음형(觀音形)을 나타냈다. 그 집의 거족(擧族; 擧는 다 거. 곧 온 가족)이 흔경(欣慶; 欣은 기쁠 흔. 좋아할 흔)했고 드디어 집을 희사했으니 즉금의 사(寺)가 이것이다. 중종 경룡 2년(708) 사자를 보내 조칙으로 내도량(內道場; 궁궐 안에서 佛道를 닦던 집)에 다다르게 하고 제(帝)가 법연(法筵; 筵은 대자리. 좌석)에 거둥했다(御). 언담(言談)하며 무릎을 나아가 휴구(休咎; 길흉)를 점쳐 대답했는데 계합함이 합부(合符; 符는 符節이니 이를 써서 신분을 증명한 고대의 符信. 合符는 곧 合致하는 符節)와 같았다. 인하여 그 사(寺)를 포식(褒飾; 褒賞하여 꾸밈)하여 가로되 보광왕사(普光王寺)라 했다. 4年 시질(示疾)하매 칙령해 내중(內中; 內道場 안)으로부터 천복사로 가서 안치하게 했다. 3월 2일에 엄연(儼然)히 좌망(坐亡)했는데 신채(神彩; 정신과 풍채. 뛰어나게 훌륭한 풍채)가 생시와 같았으되 단지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속령(俗齡)은 83이며 승랍은 알지 못한다. 제(帝)가 참도(慘悼; 慘은 비참할 참. 悼는 슬플 도. 곧 매우 슬퍼함)하여 암연(黯然; 黯은 어두울 암. 슬플 암)했는데 이때 더러운 기운이 가득 찼으며 형체가 완여(宛如)했다. 많이 영적(靈迹)을 나타냈다. 유사(有司)에게 칙령하여 비단 3백 필(匹)을 공급하여 회상(淮上)으로 회장(回葬)하게 하면서 군(郡)의 관리에게 조송(祖送; 祖는 길제사 조. 餞送할 조. 곧 떠나는 사람을 전송함)하게 했다. 5월 5일에 지금의 장소에 이르렀다. 제(帝)가 앙모하여 잊지 못한지라 인해 만회공(萬回公)에게 물어 가로되 그 승가(僧伽)는 어떤 사람입니까. 가로되 관음보살입니다. 경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응당 비구신(比丘身)을 써서 득도(得度)할 자라 했으므로 고로 사문의 모양을 나타낸 것입니다. 송승전(宋僧傳)을 보라. ▲송고승전18 당사주보광왕사승가전(唐泗州普光王寺僧伽傳) 함통(860-873) 중 방훈(龐勛)이란 자는 본래 서주(徐州)의 수졸(戍卒)이었다. 계관(桂管)을 마음대로 떠나(擅離) 길을 따라 겁략하더니 사주(泗州)를 공격하면서 그 성을 둘러싸 핍박했다. 승가(僧伽)가 탑 꼭대기에 형상을 나타냈다. 외구(外寇)가 다 성 안에서 잠들었는데 마침(偶) 나가서 그들을 격파했다. 놀라서 달아났으며 숙주(宿州)를 함락했다. 사건을 주문(奏聞)하자 곧 증성대사(證聖大師)란 호를 주었다. ▲불조통기46 숭녕 3년(1104) 조(條). 양주(楊州)에서 아뢰기를 사주대성(泗州大聖)이 누차 보혜탑에 나타났습니다.
●擘眼; 손으로써 안목을 붙잡아 징안(瞪眼; 부릅뜬 눈)으로 분노(憤怒)하는 형상(形狀)을 지음.
上堂 盡十方世界 皎皎地無一絲頭 若有一絲頭 卽是一絲頭〈法燈云 若有一絲頭 不是一絲頭〉 師指凳子曰 識得凳子 周匝有餘〈雲門云 識得凳子 天地懸殊〉 僧問 如何是塵劫來事 師曰 盡在于今 師因患脚 僧問訊次 師曰 非人來時不能動 及至人來動不得 且道佛法中下得甚麽語 曰 和尙且喜得較 師不肯 自別云 和尙今日似減 因開井被沙塞却泉眼 師曰 泉眼不通被沙礙 道眼不通被甚麽礙 僧無對 師代曰 被眼礙 師見僧搬土次 乃以一塊土放僧擔上曰 吾助汝 僧曰 謝和尙慈悲 師不肯 一僧別云 和尙是甚麽心行 師便休去 師謂小兒子曰 因子識得你爺 你爺名甚麽 兒無對〈法燈代云 但將衣袖掩面〉 師却問僧 若是孝順之子 合下得一轉語 且道合下得甚麽語 僧無對 師代曰 他是孝順之子 師問講百法論僧曰 百法是體用雙陳 明門是能所兼擧 座主是能 法座是所 作麽生說兼擧〈有老宿代云 某甲喚作箇法座 歸宗柔云 不勞和尙如此〉
●凳子; 又作橙子 有腿無靠背的坐具
●百法論; 大乘百法明門論之略稱 一卷 天親菩薩造 唐玄奘譯 收於大正藏第三十一冊 自瑜伽論本事分中 略錄百法之名數者
상당(上堂) 온 시방세계가 교교지(皎皎地; 地는 조사) 일사두(一絲頭; 頭는 조사)도 없다. 만약 일사두가 있다면 즉시(卽是) 일사두다〈法燈云 만약 一絲頭가 있다면 이 일사두가 아니다〉 스님이 등자(凳子)를 가리키며 가로되 등자(橙子)를 식득(識得)하면 주잡(周匝)하고도 나머지가 있다〈雲門云 凳子를 識得하면 天地懸殊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진겁래(塵劫來)의 일입니까. 사왈 모두 우금(于今; 如今)에 있다. 스님이 발의 병환으로 중이 문신하던 차로 인해 사왈 비인(非人)이 올 때 능히 움직이지 못하다가 및 사람이 옴에 이르러선 움직임을 얻지 못한다. 그래 말하라, 불법 중에 어떤 말을 내려야 하는가. 가로되 화상이여, 다만 병 나음(較) 얻음을 기뻐합니다. 스님이 긍정하지 않고 스스로 별운(別云) 화상이여, 금일 감소(減少)한 것 같습니다. 우물을 개착(開鑿)하는데 모래에 천안(泉眼)이 막혀버림을 입음으로 인해 사왈 천안이 불통함은 모래에 막힘을 입어서이거니와 도안(道眼)이 불통함은 무엇에 막힘을 입어서인가. 중이 대답이 없었다. 스님이 대왈(代曰) 눈에 막혀서이다. 스님이, 중이 흙을 운반함을 보던 차에 이에 한 덩이의 흙을 중의 짐 위에 놓으며 가로되 내가 너를 도운다. 중이 가로되 화상의 자비에 감사합니다. 스님이 긍정하지 않았다. 한 중이 별운(別云) 화상은 이 무슨 심행(心行)입니까. 스님이 곧 쉬러 갔다. 스님이 어린아이(小兒子)에게 일러 가로되 너(子)를 인해 너(你)의 아버지를 안다. 너의 아버지 이름이 무엇이냐. 아이가 대답이 없었다〈法燈이 代云 다만 옷소매를 가져 얼굴을 가렸겠다〉. 스님이 도리어 중에게 묻되 만약 이 효순한 자식이라면 합당히 한마디의 말(一轉語)을 내렸어야 한다. 그래 말하라, 합당히 무슨 말을 내려야 하느냐. 중이 대답이 없었다. 스님이 대왈(代曰) 그는 이 효순한 자식입니다. 스님이 백법론(百法論)을 강설하는 중에게 물어 가로되 백법(百法)은 이 체용(體用)을 쌍으로 베풀고(陳) 명문(明門)은 이 능소(能所)를 겸해 든다. 좌주는 이 능이며 법좌는 이 소다. 어떻게 겸해 듦을 설하겠는가〈어떤 老宿이 代云 모갑은 저 법좌라고 불러 짓겠습니다. 歸宗柔가 이르되 화상을 이와 같이 노고롭게 하지 않겠습니다〉.
●凳子; 또 등자(橙子)로 지음. 다리는 있지만 등받이가 없는 좌구.
●百法論; 대승백법명문론의 약칭. 1권. 천친보살이 짓고 당 현장이 번역했으며 대정장 제31책에 수록되었음. 유가론 본사분(本事分) 가운데로부터 간략히 백법의 명수(名數)를 기록한 것임.
師一日與李王論道罷 同觀牡丹花 王命作偈 師卽賦曰 擁毳對芳叢 由來趣不同 髮從今日白 花是去年紅 豔冶隨朝露 馨香逐晩風 何須待零落 然後始知空 王頓悟其意 師頌三界唯心曰 三界唯心 萬法唯識 唯識唯心 眼聲耳色 色不到耳 聲何觸眼 眼色耳聲 萬法成辦 萬法匪緣 豈觀如幻 山河大地 誰堅誰變 頌華嚴六相義曰 華嚴六相義 同中還有異 異若異於同 全非諸佛意 諸佛意總別 何曾有同異 男子身中入定時 女子身中不留意 不留意絕名字 萬象明明無理事
●賦; 毛詩大義云 詩有六義焉 一曰風 二曰賦 三曰比 四曰興 五曰雅 六曰頌
●擁毳; 毳 指僧人衣服 毳 鳥獸的細毛
●豔冶; 冶 艶麗 妖媚
●六相; 華嚴經三十四十地品云 又發大願 願一切菩薩行 廣大無量 不壞不雜 攝諸波羅蜜 淨治諸地 總相別相 同相異相 成相壞相 所有菩薩行 皆如實說 敎化一切 ▲三藏法數十九 六相[出華嚴一乘敎義分齊章] 六相者 謂一眞法界之體 而有六種名義之相也 然法界體同 本無異相 由法入於義 遂有六名 名雖有六 不離一體 交徹融通 一多無礙故也 一總相 一卽具多爲總 謂一法界之體 能具多種之義也 如人之身 能具眼耳等諸根 而爲一體 故云總相 二別相 多卽非一爲別 謂理體雖一 而有種種差別之義也 如身體雖一 而眼耳鼻舌諸根 各各不同 故云別相 三同相 義不相違名同 謂義雖有種種差別 而同一法界緣起故也 如眼耳等諸根 雖各不同 而共一身 不相違背 故曰同相 四異相 多異相望爲異 謂種種差別之義 雖同一體 而各適其宜 不相混濫也 如眼耳等諸根 各得其用 而不雜亂 故云異相 五成相 一多緣起和合爲成 謂種種緣起之義 共成法界總相之體也 如眼耳等諸根 共成一身之用 故云成相 六壞相 諸法各住本位爲壞 謂諸法之義 各各自住本位 則總相不成也 如眼耳等諸根 各住自位 一體不成 故云壞相 ▲祖庭事苑六 六相 金師子云 師子是總相 五根差別是別相 共一緣起是同相 眼耳各不相知是異相 諸根共會是成相 諸緣各住自位是壞相 顯法界中 無孤單法 隨擧一法 具此六相 緣起集成 各無自性 一一相中含無盡相 一一法中具無盡法也 又頌云 總則擧體不分 別則諸緣各別 同則諸緣和合 異則功用各異 成則互徧相資 壞則各住自位
스님이 어느 날 이왕(李王)과 도를 논해 마치고 함께 모란화(牡丹花)를 보는데 왕이 명령해 게를 짓게 했다. 스님이 곧 부(賦)해 가로되 옹취(擁毳)하여 방총(芳叢)을 대했나니/ 유래(由來)로 취향이 같지 못하다/ 머리카락은 금일로부터 희거니와/ 꽃은 이 지난해의 붉음이다./ 염야(豔冶)는 아침 이슬을 따르고/ 형향(馨香)은 저녁 바람을 쫓는다/ 어찌 반드시 영락(零落)을 기다린/ 연후에 비로소 공(空)임을 알리오. 왕이 그 뜻을 돈오했다. 스님이 삼계유심(三界唯心)을 송해 가로되 삼계가 유심이며/ 만법이 유식이니/ 유식과 유심이여/ 눈의 소리며 귀의 색이다/ 색이 귀에 이르지 않거늘/ 소리가 어찌 눈에 부딪치랴/ 눈의 색과 귀의 소리니/ 만법을 성판(成辦)했다/ 만법이 인연이 아니거늘/ 어찌 여환(如幻)을 보리오/ 대지와 산하가/ 무엇이 견고하며 무엇이 변함인가. 화엄육상(華嚴六相)의 뜻을 송해 가로되 화엄 6상의 뜻은/ 동(同) 중에 도리어 이(異)가 있나니/ 이(異)가 만약 동(同)과 다르다면/ 전혀 제불의 뜻이 아니다/ 제불의 뜻은 총별(總別)이니/ 어찌 일찍이 동이(同異)가 있으리오/ 남자의 몸속에 입정(入定)할 때/ 여자의 몸속에 뜻을 두지 않나니/ 뜻을 두지 않음이여, 명자가 끊겼나니/ 만상이 밝디밝아 이사(理事)가 없다.
●賦; 모시대의(毛詩大義)에 이르되 시에 여섯 뜻이 있다. 1은 가로되 풍(風)이며 2는 가로되 부(賦)며 3은 가로되 비(比)며 4는 가로되 흥(興)이며 5는 가로되 아(雅)며 6은 가로되 송(頌)이다.
●擁毳; 취(毳)는 승인(僧人)의 의복을 가리킴. 취(毳)는 새나 짐승의 가는 털임.
●豔冶; 야(冶)는 염려(艶麗; 곱고 화려함)임. 요미(妖媚; 아름다움)임.
●六相; 화엄경34 십지품(十地品)에 이르기를 또 대원을 발하되 일체의 보살행을 서원합니다. 광대하고 무량하며 파괴되지도 않고 잡란하지도 않으며 모든 바라밀을 섭수하여 제지(諸地)를 깨끗이 다스리나니 총상(總相)ㆍ별상(別相)ㆍ동상(同相)ㆍ이상(異相)ㆍ성상(成相)ㆍ괴상(壞相)이다. 소유한 보살행을 다 여실히 설해 일체를 교화하리라. ▲삼장법수19 육상(六相) [출화엄일승교의분제장] 6상(相)이란 것은 이르자면 하나의 1진법계(眞法界)에 6종의 명의(名義)의 상(相)이 있음이다. 그러나 법계의 체가 한가지므로 본래 다른 모양이 없다. 법으로 말미암아 의(義)에 드나니 드디어 6명(名)이 있다. 이름은 비록 6이 있으나 1체를 여의지 않고 교철(交徹)하여 융통하면서 일다(一多)가 걸림 없는 연고이다. 1. 총상(總相) 일(一)이 곧 다(多)를 갖춤이 총(總)이 된다. 이르자면 1법계의 체에 능히 여러 가지의 뜻을 갖춤이다. 예컨대(如) 사람의 몸이 능히 눈ㆍ귀 등의 여러 제근(諸根)을 갖추어 1체가 되므로 고로 이르되 총상임. 2. 별상(別相) 다(多)는 곧 일(一)이 아님이 별이 되니 이르자면 이체(理體)는 비록 일(一)이나 갖가지 차별의 뜻이 있음이다. 예컨대(如) 신체는 비록 일(一)이나 눈ㆍ귀ㆍ코ㆍ혀의 제근이 각각 같지 못하므로 고로 이르되 별상임. 3. 동상(同相) 뜻이 서로 위배되지 않음을 이름해 동(同)이다. 이르자면 뜻에 비록 갖가지 차별이 있지만 동일한 법계의 연기(緣起)인 연고다. 예컨대(如) 눈ㆍ귀 등 제근이 비록 각기 같지 않지만 한가지로 1신(身)이라서 서로 위배되지 않으므로 고로 가로되 동상임. 4. 이상(異相) 다이(多異)가 서로 바라봄이 이(異)가 된다. 이르자면 갖가지 차별의 뜻이 비록 동일한 체지만 각기 그 의당함으로 가므로 서로 혼람하지 않음이다. 예컨대(如) 눈ㆍ귀 등의 제근이 각자 그 씀을 얻어 잡란하지 않으므로 고로 이르되 이상임. 5. 성상(成相) 일다(一多)의 연기가 합해 성(成)이 된다. 이르자면 갖가지 연기의 뜻이 함께 법계의 총상(總相)의 체를 이룸이다. 예컨대(如) 눈ㆍ귀 등 제근이 함께 1신(身)의 씀을 이루므로 고로 이르되 성상임. 6. 괴상(壞相) 제법이 각자 본위에 머묾이 괴(壞)가 된다. 이르자면 제법의 뜻이 각각 스스로 본위(本位)에 머묾이니 곧 총상이 성립하지 않는다. 예컨대(如) 눈ㆍ귀 등의 제근이 각자 자위(自位)에 머물어 1체(體)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고로 이르되 괴상임. ▲조정사원6. 육상(六相) 금사자장(金師子章; 1권. 宋 承遷註)에 이르되 사자(師子)는 이 총상(總相)이며 5근(根)의 차별은 이 별상(別相)이며 한가지로 한 연기(緣起)임은 이 동상(同相)이며 안이(眼耳)가 각자 서로 알지 못함은 이 이상(異相)이며 제근(諸根)이 함께 모임은 이 성상(成相)이며 제연(諸緣)이 각자 자기 자리에 머묾은 이 괴상(壞相)이다. 법계를 나타낸 가운데 고단법(孤單法)이 없으니 1법을 듦(擧)을 따라 이 6상을 갖추거니와 연기(緣起)로 집성한지라 각기 자성이 없다. 낱낱의 상중(相中)에 무진상(無盡相)을 머금었고 낱낱의 법중(法中)에 무진법을 갖추었다. 또 송에 이르되 총(總)은 곧 거체(擧體; 全體)가 나뉘지 않음이며/ 별(別)은 곧 제연(諸緣)이 각기 다름이며/ 동(同)은 곧 제연이 화합함이며/ 이(異)는 곧 공용(功用)이 각기 다름이며/ 성(成)은 곧 호편(互徧)하여 서로 도움이며/ 괴(壞)는 곧 각기 자위(自位)에 머묾이다.
師緣被於金陵 三坐大道場 朝夕演旨 時諸方叢林 咸遵風化 異域有慕其法者 涉遠而至 玄沙正宗 中興於江表 師調機順物 斥滯磨昏 凡擧諸方三昧 或入室呈解 或叩激請益 皆應病與藥 隨根悟入者 不可勝紀 周顯德五年戊午七月十七日示疾 國主親加禮問 閏月五日剃髮澡身 告衆訖 跏趺而逝 顔貌如生 壽七十有四 臘五十四 城下諸寺院 具威儀迎引 公卿李建勳以下素服 奉全身於江寧縣丹陽起塔 諡大法眼禪師 塔曰無相 後李主剏報慈院 命師門人玄覺言導師開法 再諡師大智藏大導師
스님의 인연이 금릉(金陵)에 미쳤고(被) 대도량(大道場)에 3좌(坐)하면서 조석으로 연지(演旨)했다. 당시에 제방의 총림에서 모두(咸) 풍화(風化; 風俗과 敎化)를 준수(遵守)했고 이역(異域)에서 그 법을 흠모하는 자가 멀리 건너 이르렀으니 현사(玄沙)의 정종(正宗)이 강표(江表)에 중흥했다. 스님이 근기(根機)를 조절(調節)하며 사람에 순했고(調機順物) 체재(滯在)를 배척하고 혼미를 연마했다(斥滯磨昏). 무릇 제방의 삼매를 들면서(擧) 혹 입실하여 정해(呈解)커나 혹 고격(叩激)하며 청익하면 모두 응병여약(應病與藥)했으니 근기 따라 오입(悟入)한 자를 가히 다(勝) 기록(記錄; 紀)하지 못한다. 주(周) 현덕(顯德) 5년 무오(戊午; 958) 7월 17일에 시질(示疾)하자 국주(國主)가 친히 예문(禮問)을 더했다. 윤월(閏月) 5일 체발(剃髮)하고 조신(澡身)하고 고중(告衆)해 마치고 가부(跏趺)하여 서거(逝去)했는데 안모(顔貌)가 생시와 같았다. 나이는 74며 납은 54다. 성하(城下)의 여러 사원에서 위의를 갖추어 영인(迎引)했고 공경(公卿) 이근훈(李建勳) 이하(已下)가 소복(素服)했다. 전신(全身)을 받들어 강녕현(江寧縣) 단양(丹陽)에서 기탑(起塔)했고 시호가 대법안선사(大法眼禪師)며 탑왈 무상(無相)이다. 후에 이주(李主)가 보자원(報慈院)을 창건하고 스님의 문인(門人) 현각언(玄覺言; 行言) 도사(導師)에게 개법(開法)을 명했고 스님을 재시(再諡)하여 대지장대도사(大智藏大導師)라 했다.
靑原下九世
淸涼益禪師法嗣
天台山德韶國師
處州龍泉陳氏子也 母葉氏 夢白光觸體 因而有娠 及誕尤多奇異 年十五 有梵僧勉令出家 十七依本州龍歸寺受業 十八納戒於信州開元寺 後唐同光中遊方 首詣投子見同禪師 次謁龍牙 乃問 雄雄之尊 爲甚麽近之不得 牙曰 如火與火 師曰 忽遇水來又作麽生 牙曰 去 汝不會我語 師又問 天不葢 地不載 此理如何 牙曰 道者合如是 師經十七次問 牙祇如此答 師竟不諭旨 再請垂誨 牙曰 道者 汝已後自會去 師後於通玄峯澡浴次 忽省前話 遂具威儀 焚香遙望龍牙禮拜曰 當時若向我說 今日決定罵也 又問疎山 百匝千重 是何人境界 山曰 左搓芒繩縛鬼子 師曰 不落古今 請師說 曰 不說 師曰 爲甚麽不說 曰 箇中不辯有無 師曰 師今善說 山駭之
천태산 덕소국사(德韶國師)
.처주(處州) 용천(龍泉) 진씨(陳氏)의 아들이다. 모(母) 섭씨(葉氏)가 백광(白光)이 몸에 닿는 꿈을 꾸었고 인하여 임신(妊娠)이 있었고 탄생함에 이르러 더욱(尤) 기이(奇異)가 많았다. 나이 15에 어떤 범승(梵僧)이 권하여(勉) 출가하게 했고 17에 본주(本州) 용귀사(龍歸寺)에 의지해 수업(受業)했고 18에 신주(信州) 개원사(開元寺)에서 납계(納戒)했다. 후당(後唐) 동광(同光; 923-926) 중 유방(遊方)하다 처음(首) 투자(投子; 투자산)로 나아가 동선사(同禪師; 大同)를 참견(參見)했고 다음으로 용아둔(龍牙; 居遁)를 참알해 묻되 웅웅지존(雄雄之尊)을 무엇 때문에 친근함을 얻지 못합니까. 아왈(牙曰) 화(火)와 화(火)와 같다. 사왈 홀연히 물이 옴을 만나면 또 어떻습니까. 아왈(牙曰) 가거라, 네가 나의 말을 알지 못했다. 스님이 또 묻되 하늘이 덮지 못하고 땅이 싣지 못한다 하니 이 이치가 무엇입니까. 아왈(牙曰) 도자(道者)야, 합당히 이와 같다. 스님이 17차(次)에 걸쳐( 물었는데 용아가 다만 이와 같이 답했다. 스님이 마침내 의지(意旨)를 깨치지(諭) 못해 수회(垂誨)를 재청(再請)하자 아왈(牙曰) 도자(道者)야 네가 향후에 스스로 이회(理會)하여 가리라. 스님이 후에 통현봉(通玄峯)에서 조욕(澡浴)하던 차에 전어(前話)를 홀연히 성찰했다. 드디어 위의를 갖추어 분향(焚香)하고 용아(龍牙)를 멀리서 바라보며 예배하고 가로되 당시에 만약 나를 향해 설하셨다면 금일 결정코 욕했으리라. 또 소산(疎山; 匡仁)에게 묻되 백잡천중(百匝千重)은 이 어떤 사람의 경계입니까. 소산이 가로되 왼손으로 망승(芒繩; 고삐)을 잘라(搓) 귀자(鬼子; 子는 後綴)를 묶는다. 사왈 고금에 떨어지지 말고 스님의 설(說)을 청합니다. 가로되 설하지 못한다. 사왈 무엇 때문에 설하지 못합니까. 가로되 개중(箇中)에 유무(有無)를 분변하지 못한다. 사왈 스님이 지금 선설(善說)하십니다. 소산이 놀랐다(駭之).
如是歷參五十四員善知識 皆法緣未契 最後至臨川謁法眼 眼一見深器之 師以徧涉叢林 亦倦於參問 但隨衆而己 一日法眼上堂 僧問 如何是曹源一滴水 眼曰 是曹源一滴水 僧惘然而退 師於坐側 豁然開悟 平生凝滯 渙若氷釋 遂以所悟聞於法眼 眼曰 汝向後當爲國王所師 致祖道光大 吾不如也 自是諸方異唱 古今玄鍵 與之決擇 不留微迹 尋回本道 遊天台山 覩智者顗禪師遺蹤 有若舊居 師復與智者同姓 時謂之後身也 初止白沙 時忠懿王 爲王子 時刺台州 嚮師之名 延請問道 師謂曰 他日爲霸主 無忘佛恩 漢乾祐元年戊申 王嗣國位 遣使迎之 伸弟子之禮
●曹源; 曹溪根源 卽指曹溪慧能
●凝滯; 停留不動 拘泥
●光大; 使更加發展興盛
●玄鍵; 謂玄妙祕要
이와 같이 54원(員) 선지식을 역참(歷參)했으나 모두 법연(法緣)이 계합하지 못했다. 최후에 임천(臨川)에 이르러 법안(法眼)을 참알했는데 법안이 한 번 보자 깊이 법기(法器)로 여겼다. 스님이 총림을 편섭(徧涉)했고 또한 참문(參問)에 게을러져(倦) 단지 수중(隨衆)할 따름이었다. 어느 날 법안이 상당하자 중이 묻되 무엇이 이 조원(曹源)의 한방울 물입니까. 안왈(眼曰) 이것이 조원의 한방울 물이다. 중이 망연(惘然; 멍한 모양)하여 물러났는데 스님이 좌측(坐側)에서 활연(豁然)히 개오(開悟)하여 평생의 응체(凝滯)가 풀림(渙)이 얼음이 풀리는 듯했다. 드디어 깨친 바를 법안에게 알리자(聞) 안왈(眼曰) 너는 향후에 마땅히 국왕이 스승으로 삼는 바(所師)가 되어 조도(祖道)를 광대(光大)하게 함에 이르리니(致) 내가 같지 못하리라. 이로부터 제방의 이창(異唱)과 고금의 현건(玄鍵)을 더불어 결택(決擇)하여 미적(微迹)도 머물지(留) 않았다. 이윽고 본도(本道)로 돌아와 천태산을 유람하다가 지자의(智者顗; 智顗) 선사의 유종(遺蹤)을 보매 또한 구거와 같았다(有若舊居). 스님이 다시 지자(智者)와 동성(同姓)인지라 당시에 이르기를 후신(後身)이라 했다. 처음에 백사(白沙)에 머물렀는데(止) 때에 충의왕(忠懿王)이 왕자(國王)가 되어 때로 태주(台州)를 정찰(偵察; 刺)했는데 스님의 명성을 향(嚮)했고 연청(延請)하여 문도(問道)했다. 스님이 일러 가로되 타일(他日)에 패주(覇主)가 되시거든 불은을 잊지 마십시오. 한(漢) 건우(乾祐) 원년 무신(戊申; 948) 왕이 국위(國位)를 이었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맞이해 제자의 예(禮)를 폈다.
●曹源; 조계 근원이니 곧 조계혜능을 가리킴.
●凝滯; 정류하여 움직이지 않음. 구니(拘泥; 구애. 구속).
●光大; 다시 발전과 흥성을 가하게 함.
●玄鍵; 이르자면 현묘한 비요(祕要).
有傳天台智者敎羲寂者〈卽螺谿也〉 屢言於師曰 智者之敎 年祀浸遠 慮多散落 今新羅國其本甚備 自非和尙慈力 其孰能致之乎 師於是聞於王 王遣使及齎師之書往彼國繕寫 備足而回 迄今盛行於世矣 住後 上堂 古聖方便猶如河沙 祖師道非風幡動 仁者心動 斯乃無上心印法門 我輩是祖師門下客 合作麽生會祖師意 莫道風幡不動 汝心妄動 莫道不撥風幡 就風幡通取 莫道風幡動處是甚麽 有云 附物明心 不須認物 有云 色卽是空 有云 非風幡動 應須妙會 如是解會 與祖師意旨有何交涉 旣不許如是會 諸上座便合知悉 若於這裏徹底悟去 何法門而不明 百千諸佛方便 一時洞了 更有甚麽疑悔 所以古人道 一了千明 一迷萬惑 上座豈是今日會得一則 明日又不會也 莫是有一分向上事難會 有一分下劣凡夫不會 如此見解 設經塵劫 祇自勞神乏思 無有是處
●螺谿; 義寂(919-987) 宋代天台宗第十五祖 浙江永嘉人 俗姓胡 字常照 世稱淨光大師 螺溪義寂 螺溪尊者 十二歲出家於溫州開元寺 十九歲受具足戒 後入天台山 從淸竦姸學止觀 淸竦寂後 乃興建螺溪道場居之 又以唐末以來 戰亂頻仍 天台典籍蕩然無存 師乃勸吳越王錢俶遣使高麗日本 覓求抄寫天台宗書典 以饗學人 天台宗由是獲得中興之機 於雍熙四年十月入寂 世壽六十九 撰有止觀義例 法華十鈔等 門下有義通 諦觀 澄育 宗昱等名師輩出 [釋門正統四 佛祖統紀八 螺溪振祖集 百丈清規證義記七之下]
천태지자(天台智者)의 교(敎)를 전하는 희적(羲寂; 義寂의 誤)이란 자〈곧 螺谿다〉가 있어 누차 스님에게 말해 가로되 지자(智者)의 교가 연사(年祀; 年歲)가 침원(寖遠; 漸遠)하여 많이 산락(散落)했음을 염려합니다. 지금 신라국에 그 본(本; 책)이 심히 구비(具備)되었는데 스스로 화상의 자력(慈力)이 아니라면 그 누가(孰) 능히 이를 이루겠습니까(致之乎). 스님이 이에 충의왕(忠懿王)에게 주문(奏聞)했고 왕이 사신(使臣)을 파견(派遣)하되 및 스님의 서신을 가지고서(齎) 그 나라에 가서 선사(繕寫)하여 비족(備足)하여 돌아왔으니(迴) 지금에 이르기까지(迄今) 세상에 성행한다. 주후(住後) 상당(上堂) 고성(古聖)의 방편이 마치 하사(河沙)와 같다. 조사가 말하되 풍번(風幡; 바람과 깃발)이 동(動)함이 아니라 인자(仁者)의 마음이 동함이다. 이는 곧(斯乃) 무상(無上)의 심인(心印)의 법문이다. 아배(我輩)는 이 조사문하객(祖師門下客)이니 합당히 어떻게 조사의 뜻을 이회(理會)해야 하는가. 풍번이 동함이 아니라 네 마음이 망동(妄動)함이라고 말하지 말며 풍번을 제거하지(撥) 않고 풍번으로 나아가(就) 통취(通取; 통틀어 취함)한다고 말하지 말며 풍번이 동하는 곳이 이 무엇인가 라고 말하지 말아라. 유운(有云) 사물에 붙어 마음임을 밝히나니 사물을 인정함을 쓰지 않는다. 유운 색이 곧 이 공이다. 유운(有云) 풍번이 동함이 아니니 응당 묘하게 이회(理會)함을 써라. 이와 같은 해회(解會)는 조사의 의지(意旨)와 무슨 교섭이 있으리오. 이미 이와 같이 이회함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제상좌(諸上座)가 바로 합당히 지실(知悉; 알다)해야 하리라. 만약 이 속에서 철저히 오거(悟去)한다면 무슨 법문인들 밝히지 못하겠는가. 백천제불(百千諸佛)의 방편을 일시에 통달했다면(洞了) 다시 무슨 의정(疑情)이 있겠는가. 소이로 고인이 말하되 일료(一了)면 천명(千明)이며 일미(一迷)면 만혹(萬惑)이다. 상좌가 어찌 이 금일에 1칙(則)을 회득(會得)하고서 명일 또 불회(不會)하겠는가. 이는 일분(一分)의 향상사(向上事)가 있어 난회(難會)하고 일분의 하열범부(下劣凡夫)가 있어 불회(不會)함이 아닐까 하나니 이와 같은 견해는 설사 진겁(塵劫)을 경과하더라도 다만 스스로 노신핍사(勞神乏思; 정신을 노고롭게 하고 사유를 결핍하게 하다)하는지라 옳은 곳이 있지 않다.
●螺谿; 의적(義寂; 919-987)이니 송대 천태종 제15조. 절강 영가 사람이며 속성은 호(胡)며 자는 상조니 세칭이 정광대사(淨光大師)ㆍ나계의적(螺溪義寂)ㆍ나계존자. 12세에 온주 개원사에서 출가했고 19세에 구족계를 받았음. 후에 천태산에 들어가 청송(淸竦)을 좇아 지관을 연학(姸學)했음. 청송이 입적한 후 곧 나계도량(螺溪道場)을 흥건(興建)하여 거기에 거주했음. 또 당말 이래 전란이 빈잉(頻仍; 여러 차례 연속함)하여 천태 전적이 쓸은 듯이 남음이 없었는데 스님이 이에 오월왕 전숙(錢俶)에게 권하여 고려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태종 서전(書典)을 멱구(覓求)하고 초사(抄寫)하게 했으며 학인에게 주었으니 천태종이 이로 말미암아 중흥의 계기를 획득했음. 옹희 4년 10월에 입적했고 세수는 69. 찬술(撰述)에 지관의례와 법화십초 등이 있음. 문하에 의통ㆍ체관ㆍ징육ㆍ종욱 등의 명사가 배출되었음 [석문정통4. 불조통기8. 나계진조집. 백장청규증의기7지하].
僧問 諸法寂滅相 不可以言宣 和尙如何爲人 師曰 汝到諸方 更問一徧 曰 恁麽則絕於言句去也 師曰 夢裏惺惺 問 艣棹俱停 如何得到彼岸 師曰 慶汝平生 問 如何是三種病人 師曰 恰問著 問 如何是古佛心 師曰 此問不弱 問 如何是六相 師曰 卽汝是 問 如何是方便 師曰 此問甚當 問 亡僧遷化向甚麽處去也 師曰 終不向汝道 曰 爲甚麽不向某甲道 師曰 恐汝不會 問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 如何是一華開五葉 師曰 日出月明 曰 如何是結果自然成 師曰 天地皎然 問 如何是無憂佛 師曰 愁殺人 問 一切山河大地 從何而起 師曰 此問從何而來 問 如何是數起底心 師曰 爭諱得 問 如何是沙門眼 師曰 黑如漆 問 絕消息時如何 師曰 謝指示 問 如何是轉物卽同如來 師曰 汝喚甚麽作物 曰 恁麽則同如來也 師曰 莫作野干鳴
승문(僧問) 제법의 적멸상(寂滅相)은 가히 말로써 선양(宣揚)하지 못하거늘(이상 2구는 법화경1에 나옴) 화상이 어떻게 위인(爲人)하겠습니까. 사왈(師曰) 네가 제방에 이르거든 다시 1편(徧; 次. 回) 물어라.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언구가 단절되어 갈 것입니다. 사왈 꿈 속에서 성성(惺惺)하구나. 묻되 노도(艣棹; 상앗대와 노)가 다 멈추었다면(俱停) 어떻게 피안에 득도(得到)합니까. 사왈 너의 평생을 경하(慶賀)한다. 묻되 무엇이 이 삼종병인(三種病人; 盲聾瘂三種病人)입니까. 사왈 마침 물었다(恰問著). 묻되 무엇이 이 고불심(古佛心)입니까. 사왈 차문(此問)이 약하지 않다. 묻되 무엇이 이 육상(六相)입니까. 사왈 곧 네가 이것이다. 묻되 무엇이 이 방편입니까. 사왈 차문(此問)이 심히 합당하다. 묻되 망승(亡僧)이 천화(遷化)하여 어느 곳을 향해 갔습니까. 사왈 마침내 너를 향해 말하지 못한다. 가로되 무엇 때문에 모갑을 향해 말하지 못합니까. 사왈 네가 알지 못할까 염려한다. 묻되 일화(一華)에 오엽(五葉)이 열려 결과를 자연히 이룬다 하니 무엇이 이 일화에 오엽이 열림입니까. 사왈 해가 나오고 달이 밝다. 가로되 무엇이 이 결과를 자연히 이룸입니까. 사왈 천지(天地)가 교연(皎然)하다. 묻되 무엇이 이 무우불(無憂佛)입니까. 사왈 사람을 너무 수심케 하는구나(愁殺人). 묻되 일체의 산하대지가 어디로 좇아 일어납니까. 사왈 차문(此問)은 어디로 좇아왔느냐. 묻되 무엇이 이 삭기지심(數起底心; 자주 일어나는 마음)입니까. 사왈 어찌 숨김을 얻겠는가(諱得). 묻되 무엇이 이 사문안(沙門眼)입니까. 사왈 검기가 칠(漆; 옻)과 같다. 묻되 소식이 끊겼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지시에 감사한다. 묻되 무엇이 이 전물(轉物)하면 곧 여래와 같음입니까. 사왈 네가 무엇을 일러 물(物)이라 하느냐.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여래와 같음입니다. 사왈 야간(野干)의 울음(鳴)을 짓지 말아라.
問 那吒太子析肉還母 析骨還父 然後於蓮華上 爲父母說法 未審如何是太子身 師曰 大家見上座 問曰 恁麽則大千同一眞性也 師曰 依俙似曲纔堪聽 又被風吹別調中 問 六根俱泯 爲甚麽理事不明 師曰 何處不明 曰 恁麽則理事俱如也 師曰 前言何在 上堂 大凡言句 應須絕滲漏始得 時有僧問 如何是絕滲漏底句 師曰 汝口似鼻孔 問 如何是不證一法 師曰 待言語在 曰 如何是證諸法 師曰 醉作麽 乃曰 祇如山僧恁麽對他 諸上座作麽生體會 莫是眞實相爲麽 莫是正恁麽時無一法可證麽 莫是識伊來處麽 莫是全體顯露麽 莫錯會好 如此見解 喚作依草附木 與佛法天地懸隔 假饒答話揀辨如懸河 祇成得箇顚倒知見 若祇貴答話揀辨 有甚麽難 但恐無益於人 翻成賺悞 如上座從前所學揀辨問答記持 說道理極多 爲甚麽疑心不息 聞古聖方便 特地不會 祇爲多虛少實 上座不如從脚跟下一時覻破 看是甚底道理 有多少法門 與上座作疑求解 始知從前所學底事 祇是生死根源陰界裏活計 所以古人道 見聞不脫 如水裏月 無事珍重 師有偈曰 通玄峯頂 不是人間 心外無法 滿目靑山 法眼聞云 卽此一偈 可起吾宗
●依草附木; 又曰依草附葉 謂精靈之依附草木者 對人之精靈而云 禪宗轉指對無力自行證悟而一向追隨他人言語之學者 稱爲依草附木精靈
●貴; 欲也
●通玄峯; 碧巖錄第七則同種電鈔云 天台山有通玄峰
묻되 나타태자(那吒太子)가 살을 쪼개어 어머니에게 돌려주고 뼈를 쪼개어 아버지에게 돌려준 연후에 연화(蓮華) 위에서 부모를 위해 설법한다. 미심하오니 무엇이 이 태자의 몸입니까. 사왈(師曰) 대가(大家; 대중)가 상좌를 본다. 문왈(問曰) 이러하다면 곧 대천(大千)이 동일한 진여성(眞如性)입니다. 사왈 어슴푸레(依俙) 곡조와 같아서 겨우 들을 만하더니 또 바람 붊을 입어 별다른(別) 곡조 가운데로다. 묻되 6근(根)이 모두 민(泯; 消滅)했거늘 무엇 때문에 이사(理事)가 밝지 못합니까. 사왈 어느 곳이 밝지 않은가.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이사가 모두 여(如)입니다. 사왈 전언(前言)은 어디에 있는가. 상당(上堂) 대범(大凡) 언구는 응당 꼭 삼루(滲漏)가 끊겨야 비로소 옳다. 때에 어떤 중이 묻되 무엇이 이 삼루가 끊긴 구(句)입니까. 사왈 너의 입이 콧구멍과 같다. 묻되 무엇이 이 일법(一法)도 증(證)하지 않음입니까. 사왈 언어를 기다리고 있다. 가로되 무엇이 이 제법(諸法)을 증(證)함입니까. 사왈 취(醉)해서 무엇하리오. 이에 가로되 지여(祇如) 산승이 이렇게 대타(對他)하거니와 여러 상좌는 어떻게 체회(體會; 理解)하는가. 이 진실로 상위(相爲)함이 아닐까. 이는 바로 이러할 때 일법(一法)도 가히 증(證)함이 없음이 아닐까. 이는 그(伊)의 내처(來處)를 앎이 아닐까. 이 전체가 현로(顯露)함이 아닐까. 착회(錯會)하지 말아야 좋으니라. 이와 같은 견해는 의초부목(依草附木)이라 불러 짓나니 불법과는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가요(假饒; 가령) 답화(答話)하고 간변(揀辨)함이 현하(懸河)와 같더라도 다만 저(箇) 전도(顚倒)된 지견을 성득(成得)한다. 만약 다만 답화하고 간변하고자(貴) 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마는 단지 사람에게 무익하고 도리어(翻) 잠오(賺誤; 속이고 그르침)를 이룰까 염려한다. 예컨대(如) 상좌가 종전(從前)에 배운 바로 간변(揀辨)하고 문답하고 기지(記持)하고 도리를 설함이 극다(極多)지만 무엇 때문에 의심(疑心)을 쉬지 못하는가. 고성(古聖)의 방편을 듣고 특지(特地) 불회(不會)함은 다만 다허소실(多虛少實)이기 때문이다. 상좌가 각근하(脚跟下)로 좇아 일시에 처파(覻破; 저본에 覤破로 지었음)하고 이 무슨 도리인지 봄만 같지 못하다. 다소의 법문이 있어 상좌에게 작의(作疑)하고 구해(求解)하여 주거니와 비로소 알지니 종전(從前)에 배운 바의 일은 다만 이 생사의 근원이며 음계(陰界) 속의 활계(活計)다. 소이로 고인이 말하되 견문을 벗어나지 못함이 물 속의 달과 같다. 무사(無事)하니 진중(珍重)하라. 스님이 게가 있어 가로되 통현봉정(通玄峯頂)은/ 이 인간이 아니다/ 마음 밖에 법이 없어/ 눈 가득히 청산이다. 법안(法眼)이 듣고 이르되 곧 이 1게가 가히 오종(吾宗)을 일으키리라.
●依草附木; 또 가로되 의초부엽(依草附葉)임. 이르자면 정령(精靈)이 초목에 의부(依附)한 것이니 사람의 정령에 대해서 이른 것임. 선종에서 전(轉)하여 자행(自行)으로 증오(證悟)할 힘이 없고 일향(一向) 타인의 언어를 추수(追隨)하는 학자를 상대해 가리켜 의초부목정령(依草附木精靈)이라 일컬음.
●貴; 욕(欲)임.
●通玄峯; 벽암록 제7칙 동 종전초에 이르되 천태산에 통현봉이 있다.
師後於般若寺開堂說法十二會 上堂 毛呑巨海 海性無虧 纖芥投鋒 鋒利無動 見與不見 會與不會 唯我知焉 乃有頌曰 暫下高峰已顯揚 般若圜通遍十方 人天浩浩無差別 法界縱橫處處彰 珍重
스님이 후에 반야사(般若寺)에서 개당하여 설법하기 12회(會)였다. 상당(上堂) 터럭이 거해(巨海)를 삼켜도 해성(海性)은 이지러짐(虧)이 없고 섬개(纖芥)를 칼날(鋒)에 던져도 칼날의 예리함은 움직임이 없다. 견(見)과 불견(不見), 회(會)와 불회(不會)를 오직 나만이 안다. 이에 송이 있어 가로되 잠시 고봉(高峰)에서 내려와 이미 현양(顯揚)했나니/ 반야(般若)의 원통(圜通; 圓通과 같음)이 시방에 두루한다/ 인천(人天)이 호호(浩浩)하되 차별이 없고/ 법계에 종횡으로 곳곳에 나타난다(彰). 진중(珍重).
上堂 僧問 承古有言 若人見般若 卽被般若縛 若人不見般若 亦被般若縛 旣見般若 爲甚麽却被縛 師曰 你道般若見甚麽 曰 不見般若 爲甚麽亦被縛 師曰 你道般若甚麽處不見 乃曰 若見般若 不名般若 不見般若 亦不名般若 且作麽生說見不見 所以古人道 若欠一法 不成法身 若剩一法 不成法身 若有一法 不成法身 若無一法 不成法身 此是般若之眞宗也 僧問 乍離凝峯丈室 來坐般若道場 今日家風 請師一句 師曰 虧汝甚麽處 曰 恁麽則雷音震動乾坤界 人人無不盡霑恩 師曰 幸然未會 且莫探頭 僧禮拜 師曰 探頭卽不中 諸上座相共證明 令法久住 國土安寧 珍重
●探頭; 原爲刺探之意 轉指師家之勘辨
상당(上堂) 승문(僧問) 듣건대(承) 고인이 말씀이 있어 만약 사람이 반야를 보면 곧 반야에 묶임을 입으며 만약 사람이 반야를 보지 못하면 또한 반야에 묶임을 입는다 하였거니와 이미 반야를 보았거늘 무엇 때문에 도리어 묶임을 입습니까. 사왈 네가 말하라, 반야가 무엇을 보느냐. 가로되 반야를 보지 못하면 무엇 때문에 또한 묶임을 입습니까. 사왈 네가 말하라, 반야를 어느 곳에서 보지 못하느냐. 이에 가로되 만약 반야를 보면 반야라고 이름하지 못하고 반야를 보지 못하면 또한 반야라고 이름하지 못하나니 또 어떻게 견(見)과 불견(不見)을 설하겠느냐. 소이로 고인(古人)이 말하되 만약 일법(一法)이 모자라면 법신을 이루지 못하고 만약 일법이 남으면 법신을 이루지 못하고 만약 일법이 있으면 법신을 이루지 못하고 만약 일법이 없으면 법신을 이루지 못한다 했나니 이것이 이 반야의 진종(眞宗)이다, 승문(僧問) 처음으로(乍) 응봉(凝峯)의 장실(丈室)을 떠나와서 반야도량에 앉으셨습니다. 금일 가풍을, 스님의 1구를 청합니다. 사왈 너의 어느 곳이 모자라느냐(虧).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뇌음(雷音)이 건곤계(乾坤界)를 진동(震動)하매 사람마다 모두 은혜에 젖지 않음이 없습니다. 사왈 다행히(幸然) 알지 못했으니 다만(且) 탐두(探頭)하지 말아라. 중이 예배했다. 사왈 탐두하면 곧 맞지 않다. 제상좌(諸上座)여, 서로 함께(相共) 증명하여 법이 구주(久住)하고 국토가 안녕하게 하자. 진중(珍重).
●探頭; 원래는 자탐(刺探; 偵探)의 뜻이 됨. 전(轉)하여 사가의 감변(勘辨)을 가리킴.
上堂 僧問 承敎有言 歸源性無二 方便有多門 如何是歸源性 師曰 你問我答 曰 如何是方便門 師曰 你答我問 曰 如何趣向 師曰 顚倒作麽 問 一身卽無量身 無量身卽一身 如何是無量身 師曰 一身 曰 恁麽則昔日靈山 今日親覩 師曰 理當卽行 乃曰 三世諸佛 一時證明上座 上座且作麽生會 若會時不遷 無絲毫可得移易 何以故 爲過去未來見在三際是上座 上座且非三際 澤霖大海 滴滴皆滿 一塵空性 法界全收 珍重
●澤霖; 雨水充足
상당(上堂) 승문(僧問) 듣건대(承) 교(敎)에 말씀이 있어 귀원성(歸源性)은 무이(無二)나 방편에 다문(多門)이 있다. 무엇이 이 귀원성입니까. 사왈 네가 묻고 내가 답한다. 가로되 무엇이 이 방편문입니까. 사왈 네가 답하고 내가 묻는다. 가로되 어떻게 취향(趣向)해야 합니까. 사왈 전도(顚倒)하여 무엇하리오. 묻되 일신(一身)이 곧 무량신(無量身)이며 무량신이 곧 일신이라 하니 무엇이 이 무량신입니까. 사왈 일신이다.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석일(昔日)의 영산(靈山)을 금일 친히 봅니다(覩). 사왈 이치가 합당하면 곧 행하라. 이에 가로되 삼세제불이 일시에 상좌를 증명하리니 상좌가 또 어떻게 이회(理會)하느냐. 만약 이회할 때는 변천(變遷; 遷)하지 않아서 사호(絲毫)도 가히 이역(移易)함을 얻지 못한다. 무슨 연고냐, 과거ㆍ미래ㆍ현재 3제(際)가 이 상좌이기 때문이지만 상좌는 또 3제가 아니다. 대해에 택림(澤霖)하면 적적(滴滴)이 모두 충만하고 일진(一塵)의 공성(空性)이 법계를 전부 거둔다. 진중(珍重).
●澤霖; 우수(雨水)가 충족함.
上堂 僧問 四衆雲集 人天恭敬 目覩尊顔 願宣般若 師曰 分明記取 曰 師宣妙法 國王萬歲 人民安樂 師曰 誰向你道 曰 法爾如然 師曰 你却靈利 問 三世諸佛不知有 狸奴白牯却知有 旣是三世諸佛 爲甚麽却不知有 師曰 却是你知有 曰 狸奴白牯 爲甚麽却知有 師曰 你甚麽處見三世諸佛 問 承敎有言 眼不見色塵 意不知諸法 如何是眼不見色塵 師曰 却是耳見 曰 如何是意不知諸法 師曰 眼知 曰 恁麽則見聞路絕 聲色喧然 師曰 誰向汝道 乃曰 夫一切問答 如針鋒相投 無纖毫參差 事無不通 理無不備 良由一切言語 一切三昧 橫竪深淺 隱顯去來 是諸佛實相門 秖據如今 一時驗取 珍重
상당(上堂) 승문(僧問) 사중(四衆)이 운집했고 인천이 공경하며 눈으로 존안(尊顔)을 바라보니(覩) 원컨대 반야를 선양(宣揚)하십시오. 사왈 분명히 기취(記取)하라. 가로되 스님이 묘법을 선양하니 국왕이 만세(萬歲)하시고 인민이 안락합니다. 사왈 누가 너를 향해 말했느냐. 가로되 법이 그렇게 여연합니다(法爾如然). 사왈 네가 도리어 영리(靈利)하다. 묻되 삼세제불은 지유(知有)하지 못하고 이노백고(狸奴白牯)는 도리어 지유한다. 이미 이 삼세제불이거늘 무엇 때문에 도리어 지유하지 못합니까. 사왈 도리어 이 네가 지유한다. 가로되 이노백고는 무엇 때문에 도리어 지유합니까. 사왈 네가 어느 곳에서 삼세제불을 보느냐. 묻되 듣건대(承) 교(敎)에 말씀이 있어 눈이 색진(色塵)을 보지 못하고 뜻(意)이 제법(諸法)을 알지 못한다. 무엇이 이 눈이 색진을 보지 못함입니까. 사왈 도리어 이 귀가 본다. 가로되 무엇이 이 뜻이 제법을 알지 못함입니까. 사왈 눈이 안다.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견문(見聞)의 길이 끊기고 성색(聲色)이 훤연(喧然)합니다. 사왈 누가 너를 향해 말했느냐. 이에 가로되 무릇 일체의 문답은 침봉(針鋒)을 서로 던짐과 같아서 섬호(纖毫)의 참치(參差)함이 없나니 사(事)는 불통(不通)함이 없고 리(理)는 불비(不備)함이 없다. 진실로(良) 일체의 언어와 일체의 삼매로 말미암아 횡수(橫竪)로 심천(深淺)하고 은현(隱顯)하며 거래하나니 이것이 제불의 실상문(實相門)이다. 다만 여금에 의거하여 일시에 험취(驗取)하라. 진중(珍重).
上堂 古者道 如何是禪 三界綿綿 如何是道 十方浩浩 因甚麽道三界綿綿 何處是十方浩浩底道理 要會麽 塞却眼 塞却耳 塞却舌身意 無空闕處 無轉動處 上座作麽生會 橫亦不得 竪亦不得 縱亦不得 奪亦不得 無用心處 亦無施設處 若如是會得 始會法門絕揀擇 一切言語絕滲漏 曾有僧問 作麽生是絕滲漏底語 向他道 口似鼻孔甚好 上座如此會 自然不通風去 如識得盡 十方世界是金剛眼睛 無事 珍重
상당(上堂) 고자(古者; 古人)가 말하되 무엇이 이 선(禪)인가, 3계(界)에 면면(綿綿)하다. 무엇이 이 도인가, 시방에 호호(浩浩)하다. 무엇으로 인해 말하되 3계에 면면하다 했으며 어느 곳이 이 시방에 호호한 도리인가. 알고자 하느냐, 눈을 막아버리고(塞却) 귀를 막아버리고 혀ㆍ몸ㆍ뜻을 막아버려야 공결처(空闕處)가 없고 전동처(轉動處)가 없다. 상좌가 어떻게(作麽生) 이회(理會)하느냐. 가로(橫)도 또한 얻지 못하고 세로(竪)도 또한 얻지 못하고 놓아줌(縱)도 또한 얻지 못하고 뺏음(奪)도 또한 얻지 못하나니 용심(用心)할 곳이 없고 또한 시설(施設)할 곳도 없다. 만약 이와 같이 회득(會得)한다면 비로소 법문에 간택이 끊어졌음을 알며(會) 일체의 언어에 삼루(滲漏)가 끊긴다. 일찍이 어떤 중이 묻되 무엇이(作麽生) 이 삼루가 끊긴 언어입니까. 그를 향해 말하되 입이 콧구멍과 같아야 심히 좋다. 상좌여 이와 같이 알아야 자연히 바람도 통하지 않으며 식득(識得)하여 다할 것 같으면 시방세계가 이 금강안정(金剛眼睛)이다. 무사(無事)하니 진중(珍重)하라.
上堂 僧問 天下太平 大王長壽 如何是王 師曰 日曉月明 曰 如何領會 師曰 誰是學人 乃曰 天下太平 大王長壽 國土豐樂 無諸患難 此是佛語 古不易今 不遷一言 可以定古定今 會取好 諸上座 又僧問 承古有言 有物先天地 無形本寂寥 如何是有物先天地 師曰 非同非合 曰 如何是無形本寂寥 師曰 誰問先天地 曰 恁麽則境靜林間獨自遊去也 師曰 亂道作麽 乃曰 佛法不是這箇道理 要會麽 言發非聲 色前不物 始會天下太平 大王長壽 久立 珍重
상당(上堂) 승문(僧問) 천하가 태평하고 대왕이 장수하시니 무엇이 이 왕입니까. 사왈 해가 밝고 달이 밝다(日曉月明). 가로되 어떻게 영회(領會)해야 합니까. 사왈 누가 이 학인(學人)인가. 이에 가로되 천하가 태평하고 대왕이 장수하시고 국토가 풍락(豐樂)하고 여러 환난(患難)이 없다. 이것은 이 불어(佛語)다. 옛을 지금과 바꾸지 못하고 일언(一言)도 옮기지 않아야 가이(可以) 정고정금(定古定今)하나니 회취(會取)해야 좋다, 제상좌(諸上座)여. 또 승문(僧問) 듣건대(承) 고인(古人; 傅大士)이 말씀이 있어 물건이 있어 천지보다 앞이니 무형(無形)이며 본래 적료(寂寥)하다. 무엇이 이 물건이 있어 천지보다 앞입니까. 사왈 동도 아니고 합도 아니다(非同非合). 가로되 무엇이 무형이며 본래 적료함입니까. 사왈 누가 천지보다 앞임을 묻는가.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경정(境靜)한 임간(林間)에 독자(獨自)로 노닐겠습니다. 사왈 어지럽게 말해 무엇하랴. 이에 가로되 불법이 이 저개(這箇) 도리가 아니다. 알고자 하느냐. 말을 발(發)해도 소리가 아니며 색 앞은 물건이 아니라야 비로소 천하태평과 대왕장수를 안다. 구립(久立)했다. 진중(珍重)하라.
上堂 佛法現成 一切具足 豈不見道圓同太虛 無欠無餘 若如是也 且誰欠誰剩 誰是誰非 誰是會者 誰是不會者 所以道 東去亦是上座 西去亦是上座 南去亦是上座 北去亦是上座 因甚麽得成東西南北 若會得 自然見聞覺知路絕 一切諸法現前 何故如此 爲法身無相 觸目皆形 般若無知 對緣而照 一時徹底會取好 諸上座 出家兒合作麽生 此是本有之理 未爲分外 識心達本源 故名爲沙門 若識心皎皎地 實無絲毫障礙 上座久立 珍重
상당(上堂) 불법은 현성(現成)했고 일체에 구족했다. 어찌 말함을 보지 못했는가. 원만하기가 태허(太虛)와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 만약 이와 같다면 또 누가 모자라며 누가 남으며 누가 옳으며 누가 그르며 누가 이 아는 자(會者)며 누가 이 알지 못하는 자이겠는가. 소이로 말하되 동으로 가도 역시(亦是) 상좌며 서로 가도 역시 상좌며 남으로 가도 역시 상좌며 북으로 가도 역시 상좌다. 무엇으로 인해 동서남북을 득성(得成)하는가. 만약 회득(會得)한다면 자연히 견문각지(見聞覺知)의 길이 끊기고 일체제법이 현성(現前)한다. 무슨 연고로 이와 같은가. 법신은 무상(無相)이지만 촉목(觸目)하면 모두 형상(形狀)하고 반야는 무지(無知)지만 대연(對緣)하면 비추기 때문이다(爲). 일시에 철저히 회취(會取)해야 좋다. 제상좌(諸上座)여, 출가아(出家兒)가 합당히 어찌해야 하는가. 이것은 이 본유지리(本有之理)니 분한 밖이 되지 않는다. 마음을 알아 본원(本源)을 통달(通達; 達)해야 고로 이름하여 사문이다. 만약 마음을 알아 교교지(皎皎地)면 실로 사호(絲毫)의 장애도 없다. 상좌여 구립(久立)했다. 진중(珍重)하라.
上堂 僧問 欲入無爲海 先乘般若船 如何是般若船 師曰 常無所住 曰 如何是無爲海 師曰 且會般若船 問 古德道 登天不借梯 徧地無行路 如何是登天不借梯 師曰 不遺絲髮地 曰 如何是徧地無行路 師曰 適來向你道甚麽 乃曰 百千三昧門 百千神通門 百千妙用門 盡不出得般若海中 何以故 爲於無住本建立諸法 所以道 生滅去來 邪正動靜 千變萬化 是諸佛大定門 無過於此 諸上座大家究取 增於佛法壽命 珍重
상당(上堂) 승문(僧問) 무위해(無爲海)에 들고자 한다면 먼저 반야선(般若船)을 타라 하니 무엇이 이 반야선입니까. 사왈 늘 머무는 바가 없다. 가로되 무엇이 이 무위해입니까. 사왈 다만(且) 반야선을 알아라. 묻되 고덕(古德)이 말하되 하늘에 오르면서 사다리(梯)를 빌리지 않고 온 땅(徧地)에 행로(行路)가 없다. 무엇이 이 하늘에 오르면서 사다리를 빌리지 않음입니까. 사왈 사발지(絲髮地)도 유실(遺失; 遺)하지 않았다. 가로되 무엇이 이 온 땅에 행로가 없음입니까, 사왈 아까 너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했느냐. 이에 가로되 백천(百千) 삼매문(三昧門)ㆍ백천 신통문(神通門)ㆍ백천 묘용문(妙用門)이 모두(盡) 반야해(般若海) 가운데를 출득(出得)하지 못한다. 무슨 연고냐, 무주(無住)의 본(本)에 제법을 건립하기 때문이다. 소이로 말하되 생멸거래(生滅去來)ㆍ사정동정(邪正動靜)ㆍ천변만화(千變萬化)가 이 제불의 대정문(大定門)이니 이것을 초과할 게 없다. 제상좌여, 대가(大家)가 구취(究取)하여 불법의 수명을 더하게 하라. 진중(珍重).
上堂 僧問 世尊以正法眼付囑摩訶迦葉 祇如迦葉在畢鉢羅窟 未審付囑何人 師曰 敎我向誰說 曰 恁麽則靈山付囑 不異今日 師曰 你甚麽處見靈山 問 法眼寶印 和尙親傳 未審今日當付何人 師曰 鼕鼕鼓 一頭打 兩頭鳴 曰 恁麽則千聖同儔 古今不異 師曰 禪河浪靜 尋水迷源 僧淸遇問 帝王請命師赴王恩 般若會中 請師擧唱 師曰 分明記取 曰 恁麽則雲臺寶網 同演妙音 師曰 淸遇何在 曰 法王法如是 師曰 阿誰證明 乃曰 靈山付囑分明 諸上座一時驗取 若驗得更無別理 祇是如今 譬如太虛 日明雲暗 山河大地 一切有爲世界 悉皆明現 乃至無爲 亦復如是 世尊付囑 迄至于今 竝無絲毫差別 更付阿誰 所以祖師道 心自本來心 本心非有法 有法有本心 非心非本法 此是靈山付囑榜樣 諸上座徹底會取好 莫虛度時光 國王恩難報 諸佛恩難報 父母師長恩難報 十方施主恩難報 況建置如是次第 佛法興隆 若非國王恩力 焉得如此 若要報恩 應須明徹道眼 入般若性海始得 久立 珍重
●鼕鼕鼓; 祖庭事苑六 鼕鼕鼓 京師街衢置鼓於小樓上 以警昏曉 本朝(宋)太宗時 張公洎製坊名 列牌於樓上 按唐司馬周始建議置鼕鼕鼓 唯兩京有之 後北都亦有鼕鼕鼓 是則京都之製也 近不作街鼓之聲 金吾職廢矣 見春明集
상당(上堂) 승문(僧問) 세존이 정법안(正法眼)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했거니와 지여(祇如) 가섭은 필발라굴(畢鉢羅窟)에 있으면서 미심하오니 어떤 사람에게 부촉했습니까. 사왈 나로 하여금 누구를 향해 설하게 하느냐.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영산의 부촉이 금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왈 네가 어느 곳에서 영산을 보느냐. 묻되 법안(法眼)의 보인(寶印)을 화상이 친히 전수(傳受)했거니와 미심하오니 금일은 마땅히 어떤 사람에게 부촉합니까. 사왈 동동고(鼕鼕鼓)는 일두(一頭; 一邊)를 치면 양두(兩頭; 兩邊)가 울린다.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천성(千聖)이 동주(同儔; 同伴)며 고금이 불이(不異)합니다. 사왈 선하(禪河)의 파랑이 고요한데 물을 찾으면 근원을 미(迷)한다. 승(僧) 청우(淸遇)가 묻되 제왕(帝王)이 청명(請命)하여 스님이 왕은(王恩)에 다다랐으니 반야의 회중(會中)에 스님의 거창(擧唱)을 청합니다. 사왈 분명히 기취(記取)하라.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운대(雲臺)와 보망(寶網)이 묘음(妙音)을 함께 연설합니다. 사왈 청우(淸遇)는 어디에 있느냐. 가로되 법왕의 법이 이와 같습니다. 사왈 누가(阿誰) 증명하느냐. 이에 가로되 영산의 부촉이 분명하니 제상좌(諸上座)는 일시에 험취(驗取)하라. 만약 험득(驗得)한다면 다시 다른 이치가 없고 다만 이 여금(如今)이다. 비유컨대 태허(太虛)에 일명운암(日明雲暗)하고 산하대지와 일체의 유위세계(有爲世界)가 모두 다 환히 나타남과 같나니 내지 무위(無爲)도 또한 다시 이와 같다. 세존이 부촉하여 우금(于今; 至今)에 이르기까지(迄至) 모두(竝) 사호(絲毫)의 차별이 없거늘 다시 누구(阿誰)에게 부촉하느냐. 소이로 조사(祖師; 四祖 優波毱多)가 말하되 마음은 스스로 본래의 마음이니/ 본래의 마음은 법이 있지 않다/ 법이 있으면 본심이 있나니/ 마음도 아니고 본법도 아니다. 이것이 이 영산에서 부촉한 방양(榜樣)이다. 제상좌(諸上座)가 철저히 회취(會取好)해야 좋나니 헛되이 시광(時光)을 지내지(度) 말아라. 국왕의 은혜를 갚기 어렵고 제불의 은혜를 갚기 어렵고 부모와 사장(師長)의 은혜를 갚기 어렵고 시방 시주의 은혜를 갚기 어렵다. 하물며 이와 같이 차제(次第)를 건치(建置; 건립하고 설치)하여 불법이 흥륭(興隆)함이겠는가. 만약 국왕의 은력(恩力)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음을 얻겠는가. 만약 보은(報恩)을 요한다면 응당 모름지기 도안(道眼)이 명철(明徹; 明晰. 明白)해 반야의 성해(性海)에 들어가야 비로소 옳다. 구립(久立)했다. 진중(珍重)하라.
●鼕鼕鼓; 조정사원6. 동동고(鼕鼕鼓) 경사의 가구(街衢; 衢는 네거리 구)의 작은 누각 위에 북을 설치해 혼효(昏曉; 저녁과 새벽. 밤과 낮)를 경각했음. 본조(本朝; 宋) 태종 때 장공(張公)이 방명(坊名)을 지음에 이르러 누상에 패를 나열했음. 안험하건대 당의 사마주가 처음으로 건의하여 동동고를 설치했는데 오직 양경(兩京; 낙양과 장안)에만 그것이 있었으나 뒤에 북도(北都; 太原)에도 또한 동동고가 있었으니 이러한 즉 경도(京都)의 제작임. 근래엔 가고(街鼓)의 소리를 짓지 않으므로 금오직(金吾職)이 폐지되었음. 춘명집을 보라.
上堂 僧問 古德道 人空法亦空 二相本來同 師曰 山河大地 曰 學人不會 乞師方便 師曰 甚麽處不是方便 問 名假法假 人空法空 向去諸緣 請師直指 師曰 謝此一問 曰 不覩王居壯 焉知天子尊 師曰 貪觀天上月 失却手中橈 問 敎中道 心淸淨故法界淸淨 如何是淸淨心 師曰 迦陵頻伽 共命之鳥 曰 與法界是一是二 師曰 你自問別人 乃曰 大道廓然 詎齊今古 無名無相 是法是修 良由法界無邊 心亦無際 無事不彰 無言不顯 如是會得 喚作般若現前 理同眞際 一切山河大地 森羅萬象 墻壁瓦礫 竝無絲毫可得虧闕 無事久立 珍重
●迦陵頻伽; <梵> kalaviṅka 此翻爲好聲鳥 美音鳥 此鳥産於印度 本出自雪山 山谷曠野亦多 其色黑似雀 羽毛甚美 喙部呈赤色 在卵殼中卽能鳴 音聲淸婉 和雅微妙 一切鳥聲所不能及 [新華嚴經七十八 大智度論二十八 翻譯名義集六]
●共命之鳥; 法華天台文句輔正記十云 命命鳥者亦名共命之鳥 命共形殊以命從形 故云命命 三藏法數三十七云 共命鳥者 一身二頭之鳥也 謂如來所說法音 吉祥如彼禽之聲也
상당(上堂) 승문(僧問) 고덕(先德)이 말하되 인공(人空)이며 법도 또한 공(空)이니 2상(相)이 본래 같다(同). 사왈 산하대지다. 가로되 학인(學人)이 알지 못하겠으니 스님의 방편을 구걸합니다. 사왈 어느 곳이 이 방편이 아닌가. 묻되 명(名)도 가(假)며 법(法)도 가(假)며 인(人)도 공(空)이며 법(法)도 공(空)이니 향거(向去; 向後)의 제연(諸緣)을 청컨대 스님이 직지(直指)하십시오. 사왈 이 일문(一問)에 감사(感謝; 謝)한다. 가로되 왕의 거처의 장려(壯麗)함을 보지 않았다면 어찌 천자의 지존(至尊)을 알겠습니까. 사왈 천상의 달을 탐해 보다가 수중(手中)의 노를 잃어버렸다. 묻되 교(敎; 저본에 敬으로 지었음) 중에 말하되 마음이 청정한 연고로 법계도 청정하다. 무엇이 이 청정한 마음입니까. 사왈 가릉빈가(迦陵頻伽)와 공명지조(共命之鳥)다. 가로되 법계와 이 하나입니까 이 둘입니까. 사왈 네가 스스로 별인(別人)에게 물어라. 이에 가로되 대도(大道)가 확연(廓然)하니 어찌(詎) 금고(今古)와 제등(齊等)한가. 무명무상(無名無相)인 이 법을 이 닦는다. 진실로(良) 법계가 무변함으로 말미암아 마음도 또한 무제(無際)니 나타나지(彰) 않는 사(事)가 없고 나타나지(顯) 않는 언(言)이 없다. 이와 같이 회득(會得)해야 반야가 현전한다고 불러 짓나니 이치가 진제와 같다(理同眞際). 일체의 산하대지와 삼라만상과 장벽와력(墻壁瓦礫)이 모두(竝) 사호(絲毫)만큼이라도 가히 휴궐(虧闕)함을 얻음이 없다. 무사(無事)하거늘 구립(久立)했다. 진중(珍重)하라.
●迦陵頻伽; <범> kalaviṅka. 여기에선 호성조(好聲鳥)ㆍ미음조(美音鳥)로 번역함. 이 새는 인도에서 생산되는데 본래 설산으로부터 나왔으며 산곡과 광야에도 또한 많음. 그 색은 검고 참새와 비슷하며 깃털이 매우 아름다우며 부리 부분에 적색을 보임. 알껍질 속에 있으면서 곧 능히 우는데 음성이 청완(淸婉)하며 화아하고 미묘하여 일체의 새소리가 능히 미치지 못하는 바임 [신화엄경78. 대지도론28. 번역명의집6].
●共命之鳥; 법화천태문구보정기10에 이르되 명명조(命命鳥)란 것은 또한 이름이 공명지조(共命之鳥)다. 명(命)은 한가지며 형(形)은 다르나니 명이 형을 좇는지라 고로 이르되 명명(命命)이다. 삼장법수37에 이르되 공명조(共命鳥)란 것은 일신이두(一身二頭)의 새다. 이르자면 여래가 설하는 바 법음의 길상(吉祥)이 그 새(禽)의 소리와 같음이다.
上堂 僧問 承師有言 九天擎玉印 七佛兆前心 如何是印 師曰 不露文 曰 如何是心 師曰 你名安嗣 乃曰 法界性海 如函如葢 如鉤如鎻 如金與金 位位皆齊 無纖毫參差 不相混濫 非一非異 非同非別 若歸實地去 法法皆到底 不是上來問箇如何若何便是 不問時便非 在長連牀上坐時是有 不坐時是無 祇如諸方老宿 言敎在世 如恒河沙 如來一大藏經 卷卷皆說佛理 句句盡言佛心 因甚麽得不會去 若一向織絡言敎 意識解會 饒上座經塵沙劫 亦不能得徹 此喚作顚倒知見 識心活計 竝無得力處 此葢爲根脚下不明 若究盡諸佛法源 河沙大藏 一時現前 不欠絲毫 不剩絲毫 諸佛時常出世 時常說法度人 未曾間歇 乃至猿啼鳥呌 草木叢林 常助上座發機 未有一時不爲上座 有如是奇特處 可惜許 諸上座大家究取 令法久住世間 增益人天壽命 國王安樂 無事 珍重
●九天; 又稱九霄 天的最高處 形容極高 祖庭事苑五 九天者 中央鈞天 東方蒼天 東北方玄天 西北幽天 西方浩天 西南朱天 南方炎天 東南陽天 其說見淮南子(天文訓)
●到底; 同到頭 最終 結果
●長連牀; 又作長連床 禪林僧堂所置之大床也 長大而連坐多人者
●根脚; 同脚根 卽脚跟 有行步作用
상당(上堂) 승문(僧問) 듣건대(承) 스님이 말씀이 있어 구천(九天)은 옥인(玉印)을 받들고(擎) 칠불(七佛)은 짐조(朕兆; 兆) 전의 심(心)이다. 무엇이 이 인(印)입니까. 사왈 문채(文彩; 文)가 드러나지 않는다. 무엇이 이 심(心)입니까. 사왈 너의 이름은 안사(安嗣)다. 이에 가로되 법계의 성해(性海)가 여함여개(如函如葢)하고 여구여쇄(如鉤如鎻)하고 금(金)과 금과 같나니 위위(位位)가 모두 가지런하고 섬호(纖毫)의 참치(參差)가 없고 서로 혼람(混濫)하지 않고 비일비이(非一非異)며 비동비별(非同非別)이다. 만약 실지(實地)로 돌아간다면 법법(法法)이 모두 도저(到底)라 이는 상래(上來)에 물은 여하약하(如何若何)는 바로 옳고 묻지 않을 때는 바로 그르고 장련상(長連牀) 위에 앉았을 때는 이 있고 앉지 않았을 때는 이 없음이 아니다. 지여(祇如) 제방의 노숙의 언교(言敎)가 재세(在世)함이 항하사와 같고 여래의 일대장경(一大藏經)의 권권(卷卷)마다 모두 불리(佛理)를 설하고 구구(句句)마다 모두 불심을 말하거늘 무엇 때문에(因什麽) 알지 못함을 얻느냐. 만약 일향(一向) 언교(言敎)를 직락(織絡; 짜서 이음)하거나 의식으로 해회(解會)한다면 가령(饒) 상좌가 진사겁(塵沙劫)을 경과하더라도 또한 능히 득철(得徹)하지 못한다. 이것을 전도된 지견이며 식심(識心)의 활계(活計)라고 불러 짓나니 모두(竝) 득력처(得力處)가 없다. 이것은 대개 근각(根脚) 아래가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제불의 법원(法源)을 구진(究盡)한다면 하사(河沙)의 대장(大藏)이 일시에 현전하며 사호(絲毫)도 모자라지 않고 사호(絲毫)도 남지 않는다. 제불이 때로 늘 출세하고 때로 늘 설법하여 사람을 제도하되 일찍이 간헐(間歇)하지 않나니 내지 원제조규(猿啼鳥呌)와 초목총림이 상좌의 발기(發機)를 늘 도우되 일시라도 상좌를 위하지 아니함이 있지 않다. 이와 같은 기특처(奇特處)가 있거늘 가석하구나(可惜許). 제상좌여 대가(大家)가 구취(究取)하여 법으로 하여금 세간에 오래 머물게 하고 인천의 수명을 증익(增益)하고 국왕이 안락하소서. 무사(無事)하니 진중(珍重)하라.
●九天; 또 명칭이 구소(九霄)니 하늘의 가장 높은 곳. 극히 높음을 형용. 조정사원5 구천(九天)이란 것은 중앙은 균천이며 동방은 창천이며 동북방은 현천이며 서북은 유천이며 서방은 호천이며 서남은 주천이며 남방은 염천이며 동남은 양천이다. 그 설은 회남자(천문훈)를 보라.
●到底; 도두(到頭)와 같음. 최종. 결과.
●長連牀; 또 장련상(長連床)으로 지음. 선림의 승당에 설치한 바의 대상(大床)이니 장대(長大)하고 많은 사람이 연좌(連坐)하는 것임.
●根脚; 각근(脚根)과 같음. 곧 각근(脚跟; 발뒤꿈치). 행보(行步; 보행)의 작용이 있음.
上堂 擧古者道 吾有一言 天上人間 若人不會 綠水靑山 且作麽生是一言底道理 古人語須是曉達始得 若是將言而名於言 未有箇會處 良由究盡諸法根蔕 始會一言 不是一言半句思量解會喚作一言 若會言語道斷 心行處滅 始到古人境界 亦不是閉目藏睛 暗中無所見 喚作言語道斷 且莫賺會 佛法不是這箇道理 要會麽 假饒經塵沙劫說 亦未曾有半句到 諸上座 經塵沙劫不說 亦未曾欠少半句 應須徹底會去始得 若如是斟酌名言 空勞心力 竝無用處 與諸上座共相證明 後學初心 速須究取 久立 珍重
상당(上堂)하여 들었다(擧). 고자(古者; 古人)가 말하되 나에게 일언(一言)이 있나니 천상인간(天上人間)이며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한다면 녹수청산(綠水靑山)이다. 그래 무엇이(作麽生) 이 일언(一言)의 도리인가. 고인의 말을 모름지기 이 효달(曉達)해야 비로소 옳다. 만약 이 언(言)을 가지고 언(言)이라 이름한다면 이(箇) 아는 곳(會處)이 있지 않나니 진실로(良) 제법의 근체(根蔕)를 구진(究盡)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일언을 안다(會). 이는 일언반구(一言半句)로 사량(思量)하고 해회(解會)하여 일언이라 불러 짓지 않나니 만약 언어의 길이 끊기고(言語道斷) 심행의 처소가 멸함을 안다면 비로소 고인의 경계에 이른다. 또한 이는 눈을 감아 눈동자를 감추거나(閉目藏睛) 암중(暗中)에 보이는 바가 없음을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불러 짓지 않나니 다만 잘못 알지 말아라(且莫賺會). 불법은 이 저개(這箇) 도리가 아니다. 알고자 하느냐, 가요(假饒; 가령) 진사겁(塵沙劫)을 경과하며 설하더라도 또한 일찍이 반구(半句)에 이름이 있지 않으며 제상좌(諸上坐)가 진사겁을 경과하며 불설(不說)하더라도 또한 일찍이 반구(半句)가 흠소(欠少)하지 않나니 응당 꼭 철저히 알아야(會去) 비로소 옳다. 만약 이와 같이 명언(名言; 名稱과 언구)을 짐작(斟酌)하면 공연히 심력(心力)을 노고롭게 하고 모두(竝) 쓸 곳(用處)이 없다. 제상좌와 더불어 함께 서로 증명하나니 후학과 초심은 속히 구취(究取)함을 써라. 구립(久立)했다. 진중(珍重)하라.
上堂 僧問 髑髏常干世界 鼻孔摩觸家風 如何是髑髏常干世界 師曰 更待答話在 曰 如何是鼻孔摩觸家風 師曰 時復擧一徧 問 一人執炬自燼其身 一人抱冰橫屍於路 此二人阿誰辨道 師曰 不遺者 曰 不會 乞師指示 師曰 你名敬新 曰 未審還有人證明也無 師曰 有 曰 甚麽人證明 師曰 敬新 問 牛頭未見四祖時如何 師曰 異境靈蹤 覩者皆羨 曰 見後如何 師曰 適來向你道甚麽 問 古者道 敲打虛空鳴觳觳 石人木人齊應諾 六月降雪落紛紛 此是如來大圓覺 如何是敲打虛空底 師曰 崑崙奴著鐵袴 打一棒行一步 曰 恁麽則石人木人齊應諾也 師曰 你還聞麽 乃曰 諸佛法門 時常如是 譬如大海 千波萬浪 未甞暫住 未甞暫有 未甞暫無 浩浩地光明自在 宗三世於毛端 圓古今於一念 應須徹底明達始得 不是問一則語 記一轉話 巧作道理 風雲水月 四六八對 便當佛法 莫自賺諸上座 究竟無益 若徹底會去 實無可隱藏 無刹不彰 無塵不現 直下凡夫 位齊諸佛 不用纖毫氣力 一時會取好 無事 珍重
●崑崙奴; 又作崑崙子 卽崑崙國(南海諸國)之黑人 或對來自印度西域人之蔑稱
상당(上堂) 승문(僧問) 촉루(髑髏)가 세계를 상간(常干; 늘 범하다)하고 비공(鼻孔)이 가풍을 마촉(摩觸)한다. 무엇이 이 촉루가 세계를 상간함입니까. 사왈 답화(答話)를 다시 기다린다. 가로되 무엇이 이 비공이 가풍을 마촉함입니까. 사왈 때에 다시 일편(一徧; 一回) 들어라(擧). 묻되 한 사람은 횃불을 가지고(執炬) 그 몸을 스스로 태우고(燼) 한 사람은 얼음을 안고 길에 시체를 가로놓았습니다(橫屍). 이 두 사람에 누가(阿誰) 도를 분변했습니까. 사왈 남기지 않는 자다(不遺者). 가로되 알지 못하오니 스님의 지시를 구걸합니다. 사왈 너의 이름은 경신(敬新)이다. 가로되 미심하오니 도리어 증명할 사람이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사왈 있다. 가로되 어떤 사람이 증명합니까. 사왈 경신(敬新)이다. 묻되 우두(牛頭)가 4조를 뵙지 않았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이경(異境)과 영종(靈蹤)은 보는 자(覩者)가 모두 부러워한다(羨). 가로되 뵌 후엔 어떻습니까. 사왈 아까 너를 향해 무어라고 말했는가. 묻되 고자(古者)가 말하되 허공을 고타(敲打)하니 울면서 자꾸 곱송그리고(鳴觳觳)/ 석인과 목인이 일제히 응낙한다/ 6월에 강설(降雪)하여 분분(紛紛)히 떨어지나니/ 이것이 이 여래의 대원각(大圓覺)이다. 무엇이 이, 허공을 고타(敲打)하는 것입니까. 사왈 곤륜노(崑崙奴)가 철고를 입었나니(著鐵袴) 1방(棒) 때리매 1보(步) 간다(行).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석인과 목인이 일제히 응낙함입니다. 사왈 네가 도리어 듣느냐. 이에 가로되 제불의 법문이 때로 늘 이와 같나니 비유컨대 대해의 천파만랑(千波萬浪)이 일찍이 잠주(暫住)하지 않고 일찍이 잠유(暫有)하지 않고 일찍이 잠무(暫無)하지 않음과 같다. 호호지(浩浩地)에 광명이 자재하고 모단(毛端)에 삼세(三世)를 조종(朝宗; 宗)하고 일념에 고금을 원만(圓滿; 圓)히 하나니 응당 꼭 철저히 명달(明達)해야 비로소 옳다. 1칙어(則語)를 묻고 1전화(轉話)를 기록하여 교묘히 도리를 지어 풍운수월과 사륙팔대(四六八對; 저본에 八을 入으로 지었음)로 바로 불법에 당함은 옳지 못하다. 스스로 제상좌(諸上座)를 속이지(賺) 말지니 구경(究竟)에 무익하다. 만약 철저히 알면(會去) 실로 가히 은장(隱藏)함이 없어 나타나지(彰) 않는 찰토(刹土; 刹)가 없고 나타나지(現) 않는 티끌이 없다. 직하(直下; 즉시)에 범부가 제불과 지위가 가지런하여 섬호(纖毫)의 기력을 쓰지 않나니 일시에 회취(會取)해야 좋다. 무사(無事)하니 진중(珍重)하라.
●崑崙奴; 또 곤륜자(崑崙子)로 지음. 곧 곤륜국(崑崙國; 남해의 여러 나라)의 흑인. 혹은 인도와 서역으로부터 온 사람에 대한 멸칭.
師因興敎明和尙問曰 飮光持釋迦丈六之衣 在鷄足山候彌勒下生 將丈六之衣披在千尺之身 應量恰好 祇如釋迦身長丈六 彌勒身長千尺 爲復是身解短邪 衣解長邪 師曰 汝却會 明拂袖便出去 師曰 小兒子 山僧若答汝不是 當有因果 汝若不是 吾當見之 明歸七日 吐血 浮光和尙勸曰 汝速去懺悔 明乃至師方丈 悲泣曰 願和尙慈悲 許某懺悔 師曰 如人倒地 因地而起 不曾敎汝起倒 明又曰 若許懺悔 某當終身給侍 師爲出語曰 佛佛道齊 宛爾高低 釋迦彌勒 如印印泥 開寶四年辛未 華頂西峰忽摧 聲震一山 師曰 吾非久矣 明年六月 大星殞於峯頂 林木變白 師乃示疾於蓮華峯 參問如常 二十八日 集衆言別 跏趺而逝
스님이, 흥교명(興敎明) 화상이 문왈(問曰) 음광(飮光)이 석가(釋迦)의 장륙(丈六)의 옷을 가지고 계족산(鷄足山)에 있으면서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 했는데 장륙의 옷을 가지고 천척(千尺)의 몸에 입혀 있으려면 응량(應量)이 흡호(恰好; 正好)라야 하거늘 지여(祇如) 석가의 신장(身長)은 장륙이고 미륵의 신장은 천척(千尺)이니 다시 이는 몸이 짧아질 줄 앎(身解短)이 됩니까, 옷이 길어질 줄 압니까(衣解長邪) 함으로 인해 사왈 네가 도리어 안다(會). 명(明)이 소매를 떨치고 바로 나갔다. 사왈 소아자(小兒子)야, 산승이 만약 너에게 답한 게 옳지 못하다면 마땅히 인과(因果)가 있을 것이며 네가 만약 옳지 못하다면 내가 마땅히 그것을 보리라. 명(明)이 돌아간 지 7일 만에 피를 토했다. 부광화상(浮光和尙)이 권(勸)해 가로되 너는 속히 가서 참회하라. 명(明)이 이에 스님의 방장에 이르러 비읍(悲泣)하며 가로되 원컨대 화상은 자비로 모(某)의 참회를 허락하십시오. 사왈 사람이 땅에서 넘어졌으면 땅으로 인해 일어남과 같나니 일찍이 너로 하여금 기도(起倒)하게 하지 않았다. 명(明)이 또 가로되 만약 참회를 허락하신다면 모(某)가 마땅히 종신(終身)토록 급시(給侍)하겠습니다. 스님이 위하여 출어(出語)해 가로되 불불(佛佛)의 도가 제등(齊等)하며 고저(高低)가 완이(宛爾)하다. 석가와 미륵이 인(印)으로 진흙에 인(印)을 침과 같다. 개보(開寶) 4년 신미(辛未; 971) 화정(華頂) 서봉(西峰)이 홀연히 꺾이면서 소리가 일산(一山)을 진동(震動)했다. 사왈(師曰) 내가 오래지 못하리라. 명년 6월 대성(大星)이 봉정(峯頂)에 떨어졌고(隕) 임목(林木)이 백색으로 변했고 스님이 이에 연화봉에서 시질(示疾)했다. 참문(參問)은 여상(如常)했고 28일 집중(集衆)하여 이별을 말하고는 가부(跏趺)하여 서거했다.
金陵淸涼泰欽法燈禪師
魏府人也 生而知道 辯才無礙 入法眼之室 海衆歸之 僉曰敏匠 初住洪州雙林院 開堂日 指法座曰 此山先代尊宿曾說法來 此座高廣 不才何陞 古昔有言 作禮須彌燈王如來 乃可得坐 且道須彌燈王如來今在何處 大衆要見麽 一時禮拜 便陞座 良久曰 大衆祇如此也 還有會處麽 僧問 如何是雙林境 師曰 畫也畫不成 曰 如何是境中人 師曰 且去 境也未識且討人 又僧問 一佛出世 震動乾坤 和尙出世 震動何方 師曰 甚麽處見震動 曰 爭奈卽今何 師曰 今日有甚麽事 有僧出禮拜 師曰 道者 前時謝汝請 我 將甚麽與汝好 僧擬問次 師曰 將謂相悉 却成不委 問 如何是西來密密意 師曰 苦 問 一佛出世 普潤群生 和尙出世 當爲何人 師曰 不徒然 曰 恁麽則大衆有賴也 師曰 何必 乃曰 且住得也 久立 尊官及諸大衆 今日相請勤重 此箇殊功 比喻何及 所以道 未了之人聽一言 祇這如今誰動口 便下座 立倚拄杖而告衆曰 還會麽 天龍寂聽而雨華 莫作須菩提幀子畵將去 且恁麽信受奉行
●須彌燈王如來; 東方須彌相世界之如來 據吳支謙所譯維摩詰經上不思議品載 此佛身長八萬四千由延 其獅子座高六萬八千由延 以維摩詰顯神通力 故此佛卽時遣三萬二千獅子座 入於維摩詰丈室
●勤重; 惜重 愛重
금릉(金陵) 청량(淸涼) 태흠(泰欽) 법등선사(法燈禪師)
위부(魏府) 사람이며 태어나자 도를 알았고 변재(辯才)가 무애(無礙)했다. 법안지실(法眼之室)에 들어가자 해중(海衆)이 귀의했고 다 가로되(僉曰) 민장(敏匠)이라 했다. 홍주(洪州) 쌍림원(雙林院)에 초주(初住)했다. 개당일(開堂日) 법좌를 가리키며 가로되 이 산은 선대(先代)의 존숙이 일찍이 설법하여 왔고 이 법좌는 고광(高廣)하거늘 부재(不才)가 어찌 오르겠는가. 고석(古昔; 往昔)에 말이 있었으니 수미등왕여래(須彌燈王如來)에게 작례(作禮)해야 이에 가히 득좌(得坐)한다. 그래 말하라, 수미등왕여래가 지금 어느 곳에 있느냐. 대중이 보기를 요하느냐. 일시에 예배하라. 바로 승좌하여 양구(良久)하고 가로되 대중이여, 다만 이와 같나니 도리어 아는 곳이 있느냐. 승문(僧問) 무엇이 이 쌍림경(雙林境)입니까. 사왈(師曰) 그리려고 해도 그림을 이루지 못한다. 가로되 무엇이 이 경중인(境中人)입니까. 사왈 다만 가거라(且去). 경(境)도 알지 못하거늘 또 사람을 찾는가(討). 또 중이 묻되 1불이 출세하면 건곤을 진동(震動)하거니와 화상은 출세하여 어느 지방을 진동합니까. 사왈 어느 곳에서 진동을 보느냐. 가로되 즉금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사왈 금일 무슨 일이 있느냐. 어떤 중이 나와서 예배하자 사왈 도자(道者)야 전시(前時)에 너의 청을 물리쳤거늘(謝) 내가 무엇을 가져 너에게 주어야 좋겠는가. 중이 물으려고 하던 차에 사왈 다만(將) 이르기를 상실(相悉; 서로 알다)한다 했더니 도리어 알지(委) 못함을 이루었구나. 묻되 무엇이 이 서래(西來)의 밀밀의(密密意)입니까. 사왈 괴롭다(苦). 묻되 1불이 출세하면 군생(群生)을 널리 윤택하게 하거니와 화상이 출세하여 마땅히 어떤 사람을 위합니까. 사왈 도연(徒然)하지 않다.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대중이 신뢰함이 있을 것입니다. 사왈 하필(何必). 이에 가로되 다만 주득(住得)하였고 또한 구립(久立)했나니 존관(尊官) 및 여러 대중이 금일 상청(相請)하며 근중(勤重)했다. 차개(此箇)의 수공(殊功)은 비유가 어찌 미치겠는가. 소이로 말하되 미료지인(未了之人)은 일언(一言)을 들을지니 다만 이(這) 여금이거늘 누가 동구(動口)하겠는가. 바로 하좌하여 서서 주장자에 기대어 고중(告衆)해 가로되 도리어 아느냐, 천룡(天龍; 천과 용)이 적청(寂聽)하매 꽃을 비 내리나니 수보리가 되어 정자(幀子; 그림 簇子)에 그려 가지고 가지 말아라. 다만 이렇게 신수봉행(信受奉行)하라.
●須彌燈王如來; 동방 수미상세계의 여래니 오(吳) 지겸이 번역한 바 유마힐경상 부사의품의 기재에 의거하면 이 부처의 신장은 8만4천 유연(由延)이며 그 사자좌의 높이는 6만8천 유연임. 유마힐이 신통력을 나타낸지라 고로 이 부처가 즉시 3만2천 사자좌를 보내어 유마힐의 장실(丈室)에 들였음.
●勤重; 석중(惜重; 아끼며 존중함). 애중(愛重).
問新到 近離甚處 僧曰 廬山 師拈起香合曰 廬山還有這箇也無 僧無對 師自代云 尋香來禮拜和尙 問 百骸俱潰散 一物鎭長靈 未審百骸一物 相去多少 師曰 百骸一物 一物百骸 次住上藍護國院 僧問 十方俱擊皷 十處一時聞 如何是聞 師曰 汝從那方來 問 善行菩薩道 不染諸法相 如何是菩薩道 師曰 諸法相 曰 如何得不染去 師曰 染著甚麽處 問 不久開選場 還許學人選也無 師曰 汝是點額人 又曰 汝是甚麽科目 問 如何是演大法義 師曰 我演何似汝演
●香合; 入香之器 合 盒子 後作盒
신도(新到)에게 묻되 최근에 어느 곳을 떠났느냐. 승왈(僧曰) 여산(廬山)입니다. 스님이 향합(香合)을 집어 일으키고 가로되 여산에 도리어 이것이 있느냐 또는 없느냐. 중이 대답이 없었다. 스님이 스스로 대운(代云) 향을 찾으러 와서(尋香來) 화상에게 예배합니다. 묻되 백해(百骸)가 모두 궤산(潰散)하면 일물(一物)만 늘(鎭) 장령(長靈)하다. 미심하오니 백해와 일물이 서로의 거리(去)가 얼마입니까. 사왈 백해가 일물이며 일물이 백해다. 다음으로 상람(上藍) 호국원(護國院)에 주(住)했다. 승문(僧問) 시방에서 모두 북을 치면 십처(十處)에서 일시에 듣습니다. 무엇이 이 들음입니까. 사왈(師曰) 너는 어느 방면(那方)으로 좇아왔느냐. 묻되 보살도(菩薩道)를 잘 행하면 모든 법상(法相)에 물들지 않는다 하니 무엇이 이 보살도입니까. 사왈 모든 법상이다. 가로되 어찌해야 물들지 않음을 얻습니까. 사왈 어느 곳에 물들었느냐(染著). 묻되 오래지 않아 선장(選場)을 열거니와 도리어 학인이 뽑힘(選)을 허락합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너는 이 점액인(點額人)이다. 우왈(又曰) 너는 이 어떤 과목이냐(甚麽科目). 묻되 무엇이 이 대법의(大法義)를 폄(演)입니까. 사왈 나의 폄이 너의 폄과 어찌 같은가(何似).
●香合; 향을 넣는 기구. 합(合)은 합자(盒子). 후에 합(盒)으로 지었음.
次住金陵龍光院 上堂 維那白椎云 法筵龍象衆 當觀第一義 師曰 維那早是第二義 長老卽今是第幾義 乃擧衣袖曰 會麽 大衆 此是手舞足蹈 莫道五百生前曾爲樂主來 或有疑情 請垂見示 時有僧問 如何是諸佛正宗 師曰 汝是甚麽宗 曰 如何 師曰 如何卽不會 問 上藍一曲師親唱 今日龍光事若何 師曰 汝甚麽時到上藍來 曰 諦當事如何 師曰 不諦當卽別處覓 問 如何是佛法大意 師曰 且問小意 却來與汝大意
●手舞足蹈; 形容人極度高興時的動作狀態 ▲孟子離婁上 不知足之蹈之 手之舞之
다음으로 금릉(金陵) 용광원(龍光院)에 주(住)했다. 상당(上堂) 유나(維那)가 백추(白椎)하고 이르되 법연(法筵)의 용상중(龍象衆)이여 마땅히 제1의(第一義)를 관(觀)하라. 사왈(師曰) 유나는 벌써 이 제2의니 장로는 지금 이 몇 번째의 의(第幾義)냐. 이에 옷소매를 들고 가로되 아느냐. 대중이여 이것은 이 수무족도(手舞足蹈)니 오백생(五百生) 전에 일찍이 악주(樂主)가 되어 왔다고 말하지 말아라. 혹 의정(疑情)이 있다면 청컨대 현시(見示; 보이다)를 내려라. 때에 어떤 중이 묻되 무엇이 이 제불의 정종(正宗)입니까. 사왈 너는 이 무슨 종(宗)이냐. 가로되 무엇입니까(如何). 사왈 무엇인가(如何) 한다면 곧 알지 못했다. 묻되 상람(上藍)의 일곡(一曲)은 스님이 친창(親唱)했거니와 금일 용광(龍光)의 일은 어떻습니까. 사왈 네가 어느 때 상람(上藍)에 이르렀다 왔느냐. 가로되 체당(諦當; 穩當)한 일이 무엇입니까. 사왈 체당하지 않다면 곧 다른 곳에서 찾아라. 묻되 무엇이 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 사왈 다만(且) 소의(小意)를 물었다가 돌아오면(却來) 너에게 대의를 주겠다.
●手舞足蹈; 사람이 극도로 고흥(高興)일 때의 동작의 상태를 형용함. ▲맹자 이루상. 발이 밟는지 손이 춤추는지를 알지 못하다.
師後住淸涼大道場 上堂 僧出禮拜次 師曰 這僧最先出 爲大衆答國主深恩 僧便問 國主請命 祖席重開 學人上來 請師直指心源 師曰 上來却下去 問 法眼一燈 分照天下 和尙一燈 分照何人 師曰 法眼甚麽處分照來 師乃曰 某甲本欲居山藏拙養病過時 奈緣先師有未了底公案 出來與他了却 時有僧問 如何是先師未了底公案 師便打曰 祖禰不了 殃及兒孫 曰 過在甚麽處 師曰 過在我殃及你 江南國主 爲鄭王時 受心法於法眼之室 暨法眼入滅 復甞問師曰 先師有甚麽不了底公案 師曰 見分㭊次 異日又問曰 承聞長老於先師有異聞底事 師作起身勢 國主曰 且坐 師謂衆曰 先師法席五百衆 今祇有十數人 在諸方爲導首 你道莫有錯指人路底麽 若錯指 敎他入水入火 落坑落壍 然古人又道 我若向刀山 刀山自摧折 我若向鑊湯 鑊湯自消滅 且作麽生商量 言語卽熟 及問著便生疎去 何也 祇爲隔闊多時 上座但會我甚麽處去不得 有去不得者 爲眼等諸根色等諸法 諸法且置 上座開眼見甚麽 所以道 不見一法卽如來 方得名爲觀自在 珍重
●祖禰; 古代對已在宗廟中立牌位的亡父的稱謂
●導首; 卽敎化引導衆生入於佛道之導師 法華經五云 一一菩薩 皆是大衆唱導之首
스님이 후에 청량대도량((淸涼大道場)에 주(住)했다. 상당(上堂) 중이 나와 예배하던 차에 사왈(師曰) 이 중이 가장 먼저 나와서 대중을 위해 이미 국주(國主)의 심은(深恩)에 답(答)했다. 중이 바로 묻되 국주의 청명(請命)으로 조석(祖席)을 거듭 열었습니다. 학인이 상래(上來)하여 스님에게 청하오니 심원(心源)을 직지(直指)하십시오. 사왈 상래(上來)했으면 도리어 하거(下去)하라. 묻되 법안(法眼)의 1등(燈)은 천하에 분조(分照)하거니와 화상의 1등은 어떤 사람에게 분조합니까. 사왈 법안이 어느 곳에서 분조(分照)하여 오느냐. 스님이 이에 가로되 모갑이 본래 거산(居山)하면서 장졸양병(藏拙養病)하며 시절을 지내려 했으나 선사(先師)가 마치지(了) 못한 공안(公案)이 있으시기 때문에 나와서 그(先師)에게 요각(了却)해 주려고 함임을 어찌하리오. 때에 어떤 중이 묻되 무엇이 이 선사의 마치지 못한 공안입니까. 스님이 바로 때리고 가로되 조녜(祖禰)가 마치치(了) 못해 앙화가 아손에 미친다. 가로되 허물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사왈 허물은 나에게 있고 앙화는 너에게 미친다. 강남국주(江南國主)가 정왕(鄭王)이 되었을 때 법안의 장실(丈室; 室)에서 심법을 받았는데 법안이 입멸하메 이르렀다(暨). 다시 일찍이 스님에게 물어 가로되 선사(先師)가 무슨 마치지(了) 못한 공안이 있습니까. 사왈 현재 분석(分㭊)하는 차(次)입니다. 다른 날 또 문왈(問曰) 승문(承聞)컨대 장로가 선사(先師)에게서 달리 들은 일이 있다 합디다. 스님이 몸을 일으키는 자세를 지었다. 국주가 가로되 다만 앉으시오(且坐). 스님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선사(先師)의 법석(法席)엔 오백중(五百衆)이었지만 여금엔 다만 십수인(十數人)이 있어 제방에 있으면서 도수(導首)가 되었거니와 너희가 말하라 인로(人路)를 착지(錯指)하는 이가 있지 않느냐. 만약 착지(錯指)하면 그들로 하여금 입수입화(入水入火)하고 낙갱낙참(落坑落塹)하게 하리라. 그러나 고인이 또 말하되 내가 도산(刀山)을 향하면 도산이 저절로 최절(摧折)하고 내가 만약 확탕(鑊湯)을 향하면 확탕이 저절로 소멸한다. 그래 어떻게 상량(商量)하느냐. 언어(言語)는 곧 익숙하지만(熟) 및 문착(問著)하면 바로 생소하나니(生疎去) 왜냐 하면 다만 격활(隔闊)한 지 다시(多時)이기 때문이다. 상좌는 단지, 내가 어느 곳에 감을 얻지 못하는지 알아야 하나니 감을 얻지 못함이 있는 것은 안(眼) 등의 제근(諸根)과 색 등의 제법(諸法) 때문이다. 제법은 차치(且置)하고 상좌가 개안(開眼)하면 무엇을 보느냐. 소이로 말하되 일법(一法)도 보지 않아야 곧 여래니 바야흐로 이름해 관자재라 함을 얻는다(증도가의 2구). 진중(珍重)하라.
●祖禰; 고대 이미 종묘 중에 패위(牌位)를 세운 망부(亡父)에 대한 칭위(稱謂).
●導首; 즉 중생을 교화하고 인도하여 불도에 들게 하는 도사(導師). 법화경5에 이르되 하나하나 보살이 모두 이 대중의 창도지수(唱導之首)다.
師開寶八年六月示疾 告衆曰 老僧臥疾 强牽拖與汝相見 如今隨處道場 宛然化城 且道作麽生是化城 不見古導師云 寶所非遙 須且前進 及至城所 又道我所化作 今汝諸人試說箇道理看 是如來禪祖師禪 還定得麽 汝等雖是晩生 須知僥忝 我國主凡所勝地建一道場 所須不闕 祇要汝開口 如今不知阿那箇是汝口 爭答効他四恩三有 欲得會麽 但識口必無咎 縱有咎因汝有我 今火風相逼 去住是常道 老僧住持 將逾一紀 每承國主助發 至于檀越十方道侶 主事小師 皆赤心爲我 默而難言 或披麻帶布 此卽順俗 我道違眞 且道順好違好 然但順我道 卽無顚倒 我之遺骸 必於南山大智藏和尙左右 乞一墳冢 升沉皎然 不淪化也 努力 珍重 二十四日安坐而終
●晩生; 一後輩對前輩自謙之稱 二後進 晚輩 此指二
●僥忝; 謙辭 僥幸愧居其列
●赤心; 純眞之心 赤 喩純眞 如赤誠
스님이 개보(開寶) 8년(975) 6월 시질(示疾)하더니 고중(告衆)해 가로되 노승이 와질(臥疾)하면서 억지로 끌어다(牽拕) 너희와 상견했다. 여금에 수처(隨處)의 도량이 완연(宛然)히 화성(化城)이다. 그래 말하라 무엇이 이 화성인가. 보지 못하느냐 옛 도사(導師)가 이르되 보소(寶所)가 멀지 않나니 모름지기 다만(須且) 전진하라. 및 성소(城所)에 이르자 또 말하되 내가 화작한 것이다(我所化作). 이제 너희 제인이 저(箇) 도리를 시험 삼아 설해 보아라. 이 여래선인가, 조사선인가. 도리어 정(定)함을 얻겠는가. 너희 등이 비록 이 만생(晩生)이지만 모름지기 요첨(僥忝)을 알아야 하나니 우리 국주(國主)가 무릇 수승한 바의 땅에 1도량(道場)을 건립하고 소수(所須; 需要하는 바)를 궐(闕)하지 않음은 다만 너희의 개구(開口)를 요하심이다. 여금에 알지 못하나니(不知) 어느 것(阿那箇)이 이 너희의 입인가. 어떻게 답해야(爭答) 저 사은삼유(四恩三有)를 본받겠는가(効). 이회(理會)를 얻고자 하느냐. 단지 입을 알면 반드시 허물(咎)이 없나니 비록(縱) 허물이 있더라도 너희의 유아(有我)를 인(因)한다. 여금에 화풍(火風)이 상핍(相逼)하며 거주(去住)함은 이 상도(常道)다. 노승이 주지한 지 거의(將) 1기(一紀; 12년)가 넘었는데(逾) 매번 국주(國主)의 조발(助發; 협조하고 啓發함)을 승수(承受)했고 단월ㆍ시방의 도려(道侶)ㆍ주사(主事)ㆍ소사(小師)가 모두 적심(赤心)으로 나를 위함에 이르렀으니 침묵하며 말하기 어려웠다. 혹 마대포(麻帶布)를 입는다면 이것은 곧 순속(順俗)이며 나의 도가 진리에 위배된다. 그래 말하라 순(順)함이 좋으냐 위(違)함이 좋으냐. 그러나 단지 나의 도에 순한다면 곧 전도(顚倒)가 없다. 나의 유해(遺骸)는 반드시 남산(南山) 대지장화상(大智藏和尙)의 좌우에 한 분총(墳冢)을 구걸한다면 승침(升沈)이 교연(皎然)하고 윤화(淪化; 變化)하지 않으리라. 노력(努力)하라. 진중(珍重). 24일 안좌(安坐)하여 마쳤다.
●晩生; 1. 후배가 전배(前輩; 선배)에 대한 자겸(自謙)의 호칭. 2. 후진(後進). 만배(晚輩). 여기에선 2를 가리킴.
●僥忝; 겸사(謙辭)니 요행(僥幸)으로 부끄럽게도 그 대열(隊列)에 거처함.
●赤心; 순진(純眞)한 마음. 적(赤)은 순진에 비유하니 예컨대(如) 적성(赤誠).
杭州靈隱淸聳禪師
福州人也 初參法眼 眼指雨謂師曰 滴滴落在上座眼裏 師初不喻旨 後因閱華嚴感悟 承眼印可 回止明州四明山卓庵 節度使錢億執事師之禮 忠懿王命於臨安兩處開法 後居靈隱上寺 署了悟禪師
항주(杭州) 영은산(靈隱山) 청용선사(淸聳禪師)
복주(福州) 사람이다. 법안(法眼)을 초참(初參)했다. 법안이 비를 가리키며 스님에게 일러 가로되 방울방울 상좌의 눈 속에 떨어진다. 스님이 처음엔 의지(意旨)를 깨닫지(喻) 못했는데 후에 화엄경을 열람함으로 인해 감오(感悟)했고 법안의 인가(印可)를 승수(承受)했다. 회귀하여 명주(明州) 사명산(四明山)에 머물면서(止) 탁암(卓庵)했다. 절도사(節度使) 전억(錢億)이 사사지례(師事之禮)를 가졌고(執) 충의왕(忠懿王)이 명(命)하여 임안(臨安)의 두 곳에서 개법(開法)했다. 후에 영은(靈隱) 상사(上寺)에 거주했고 서(署)하여 요오선사(了悟禪師)라 했다.
上堂曰 十方諸佛常在汝前 還見麽 若言見 將心見 將眼見 所以道 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又曰 見色便見心 且喚甚麽作心 山河大地 萬象森羅 靑黃赤白 男女等相 是心不是心 若是心 爲甚麽却成物象去 若不是心 又道見色便見心 還會麽 祇爲迷此而成顚倒 種種不同 於無同異中强生同異 且如今直下承當 頓豁本心 皎然無一物可作見聞 若離心別求解脫者 古人喚作迷波討源 卒難曉悟
●一切法不生下; 華嚴經十六云 一切法無生 一切法無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상당해 가로되 시방제불이 늘 너희 앞에 있나니 도리어 보느냐. 만약 본다고 말한다면 마음을 가지고 보느냐 눈을 가지고 보느냐. 소이로 말하되 일체법이 불생이며(一切法不生) 일체법이 불멸이니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안다면 제불이 늘 현전(現前)한다. 우왈(又曰) 색을 보면 바로 마음을 본다. 그래 무엇을 일러 마음이라 하느냐. 산하대지ㆍ만상삼라ㆍ청황적백ㆍ남녀 등의 상(相)이 이 마음인가 이 마음이 아닌가. 만약 이 마음이라면 무엇 때문에 도리어 물상(物象)을 이루며 만약 이 마음이 아니라면 또 말하되 색을 보면 바로 마음을 본다 하였다. 도리어 아느냐. 다만 이것을 미(迷)했기 때문에(爲) 전도(顚倒)를 이루어 갖가지로 부동(不同)하여 동이(同異)가 없는 가운데 억지로 동이를 낸다. 다만(且) 여금에 직하(直下)에 승당(承當)하여 문득 본심(本心)이 환하면(豁) 교연(皎然)하여 일물(一物)도 가히 견문(見聞)을 지음이 없겠지만 만약 마음을 여의고 달리 해탈을 구하는 자는 고인이 불러 짓기를 물결을 미하고 수원(水源)을 찾는다(討) 했으니 마침내 효오(曉悟)하기 어렵다.
●一切法不生下; 화엄경16에 이르되 일체법이 무생이며/ 일체법이 무멸이니/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안다면/ 제불이 늘 현전한다.
僧問 根塵俱泯 爲甚麽事理不明 師曰 事理且從 喚甚麽作俱泯底根塵 問 如何是觀音第一義 師曰 錯 問 無明實性卽佛性 如何是佛性 師曰 喚甚麽作無明 問 如何是和尙家風 師曰 亘古亘今 問 不問不答時如何 師曰 寐語作麽 問 牛頭未見四祖時如何 師曰 靑山綠水 曰 見後如何 師曰 綠水靑山 師問僧 汝會佛法麽 曰 不會 師曰 汝端的不會 曰 是 師曰 且去 待別時來 其僧珍重 師曰 不是這箇道理 問 如何是摩訶般若 師曰 雪落茫茫 僧無語 師曰 會麽 曰 不會 師示偈曰 摩訶般若 非取非捨 若人不會 風寒雪下
●根塵; 指六根(眼耳鼻舌身意)與 六塵(色聲香味觸法) 又作根境
●亘古亘今; 又作亘今亘古 貫串古今 從古至今 形容久遠長久
승문(僧問) 근진(根塵)이 모두 사라졌거늘(俱泯) 무엇 때문에 사리(事理)가 밝지 않습니까. 사왈(師曰) 사리는 다만 좇거니와(且從) 무엇을 일러 구민(俱泯)의 근진(根塵)이라 하는가. 묻되 무엇이 이 관음(觀音)의 제1의(第一義)입니까. 사왈 틀렸다(錯). 묻되 무명(無明)의 실성(實性)이 곧 불성이라 하니 무엇이 이 불성입니까. 사왈 무엇을 일러 무명이라 하느냐. 묻되 무엇이 이 화상의 가풍입니까. 사왈 긍고긍금(亘古亘今)이다. 묻되 묻지 않고 답하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잠꼬대(寐語)하여 무엇하려느냐. 묻되 우두(牛頭)가 4조를 뵙지 않은 때 어떻습니까. 사왈 청산녹수(靑山綠水)다. 가로되 뵌 후엔 어떻습니까. 사왈 녹수청산이다. 스님이 중에게 묻되 너는 불법을 아느냐.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사왈 네가 단적(端的; 확실)히 알지 못하느냐. 가로되 그렇습니다. 사왈 다만 가고(且去) 다른 때를 기다렸다가 오너라. 그 중이 진중(珍重)이라 하자 사왈 이는 저개(這箇) 도리가 아니다. 묻되 무엇이 이 마하반야입니까. 사왈 눈이 떨어져 망망하다(雪落茫茫). 중이 말이 없자 사왈 아느냐.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스님이 게를 보여 가로되 마하반야(摩訶般若)는/ 비취비사(非取非捨)다/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한다면/ 바람이 차고 눈이 내린다(風寒雪下).
●根塵; 6근(六根;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과 6진(六塵;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을 가리킴. 또 근경(根境)으로 지음.
●亘古亘今; 또 긍금긍고(亘今亘古)로 지음. 옛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임. 구원(久遠; 몹시 오래됨)하고 장구함을 형용.
廬山歸宗義柔禪師
開堂陞座 維那白槌曰 法筵龍象衆 當觀第一義 師曰 若是第一義 且作麽生觀 恁麽道 落在甚麽處 爲復是觀 爲復不許人觀 先德上座 共相證明 後學初心 莫喚作返問語倒靠語 有疑請問 僧問 諸佛出世 說法度人 感天動地 和尙出世 有何祥瑞 師曰 人天大衆前寐語作麽 問 優曇華拆人皆覩 達本無心事若何 師曰 謾語 曰 恁麽則南能別有深深旨 不是心心人不知 師曰 事須飽叢林 問 昔日金峯 今日歸宗 未審是一是二 師曰 謝汝證明 問 法眼一箭 直射歸宗 歸宗一箭 當射何人 師曰 莫謗我法眼
●飽叢林; 謂長期於禪林中參禪辨道 與少叢林相對 又長期從事參禪修業者 亦稱飽叢林 或稱舊參 老參 久參
●倒靠; 承接他人話語 就勢應對詰責 是禪家較量機鋒的一種方式
여산(廬山) 귀종(歸宗) 의유선사(義柔禪師)
개당(開堂)하여 승좌하자 유나가 백추(白槌)하고 가로되 법연(法筵)의 용상중(龍象衆)이여, 마땅히 제1의(第一義)를 관(觀)하라. 사왈(師曰) 만약 이 제1의일진대 그래 어떻게 관하는가. 이러한 말이 어느 곳에 떨어져 있느냐. 다시 이 관(觀)이 되는가, 다시 사람의 관을 허락하지 않음이 되는가. 선덕(先德)과 상좌(上座)는 함께 서로 증명하려니와 후학과 초심은 반문어(返問語)나 도고어(倒靠語)라고 불러 짓지 말아라. 의심이 있으면 청문(請問)하라. 승문(僧問) 제불이 출세하여 설법하고 도인(度人)하매 감천동지(感天動地; 천지를 感動케 함)하거니와 화상이 출세하매 어떤 상서(祥瑞)가 있습니까. 사왈 인천(人天)의 대중 앞에서 잠꼬대(寐語)하여 무엇하리오. 묻되 우담화(優曇華)가 터져(拆; 저본에 折로 지었음) 사람이 모두 보거니와(覩) 근본을 통달한 무심사(達本無心事)는 어떻습니까(若何). 사왈 헛된 말이다(謾語).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남능(南能; 南宗慧能)이 따로 심심(深深)한 의지(意旨)가 있습니다만 이 심심(心心)의 사람이 아니면 알지 못합니다. 사왈 사실(事實; 事)은 꼭 포총림(飽叢林)이라야 한다. 묻되 석일(昔日)의 금봉(金峯)이 금일의 귀종(歸宗)입니다. 미심하오니 이 하나입니까 이 둘입니까. 사왈 너의 증명에 감사한다. 묻되 법안(法眼)의 1전(箭)이 바로 귀종(歸宗)을 쏘았습니다만 귀종의 1전은 마땅히 어떤 사람을 쏩니까. 사왈 나의 법안(法眼)을 비방하지 말아라.
●倒靠; 타인의 화어(話語)를 승접(承接)하여 형세에 나아가 응대하면서 힐책함이니 이는 선가에서 기봉을 교량(較量)하는 일종의 방식임.
●飽叢林; 이르자면 장기간 총림 중에서 참선변도(參禪辨道)했음이니 소총림(少叢林)과 상대됨. 또 장기간 참선에 종사하며 수업한 자도 또한 일컬어 포총림 혹은 호칭이 구참(舊參)ㆍ노참(老參)ㆍ구참(久參)임.
問 此日知軍親證法 師於何處答深恩 師曰 敎我道甚麽卽得 乃曰 一問一答 也無了期 佛法也不是恁麽道理 大衆 此日之事 故非本心 實謂祇箇住山寧有意 向來成佛亦無心 蓋緣是知軍請命 寺衆誠心 旣到這裏 且說箇甚麽卽得 還相悉麽 若信不及 古人便道 相逢欲相喚 脉脉不能語 作麽生會 若會 堪報不報之恩 足助無爲之化 若也不會 莫道長老開堂祇擧古人語 此之盛事 天高海深 況喻不及 更不敢讚祝皇風 回向淸列 何以故 古人道 吾禱久矣 豈況當今聖明者哉 珍重
●知軍; 官名 卽知軍事 宋朝地方行政區劃軍的長官
●脉脉不能語; 脉脉 含情無語
●淸列; 高貴的官位
●吾禱久矣; 祖庭事苑一 吾禱 論語云 子疾病 子路請禱 子曰 有諸 子路曰 有之 誄曰 禱爾于上下神祇 子曰 丘之禱久矣
묻되 이날 지군(知軍)이 법을 친증(親證)했으니 스님이 어느 곳으로 좇아 심은(深恩)에 답하겠습니까. 사왈(師曰) 나로 하여금 무엇을 말하게 해야 곧 옳겠는가. 이에 가로되 일문일답(一問一答)하면 또한 마칠 기약이 없나니 불법은 이 이러한 도리가 아니다. 대중이여, 차일지사(此日之事)는 짐짓 본심이 아니다. 실로 이르나니 다만 이(祇箇) 주산(住山)에 어찌(寧) 뜻이 있겠으며 향래(向來; 以前)의 성불도 또한 무심하지만 대개 이 지군(知軍)의 청명(請命)과 사중(寺衆)의 성심(誠心) 때문(緣)이다. 이미 이 속에 이르렀으니 그래 저(箇) 무엇을 설해야 곧 옳겠는가. 도리어 상실(相悉; 알다)하느냐. 만약 믿음이 미치지 못한다면 고인이 바로 말했으니 상봉하여 상환(相喚)하고 싶지만 맥맥하며 능히 말하지 못한다(脉脉不能語) 하였다. 어떻게 이회(理會; 會)해야 하느냐, 만약 이회한다면 가히(堪) 갚지 못한 은혜를 갚고 족히 무위지화(無爲之化)를 도우겠지만 만약에 이회하지 못한다면 장로가 개당하여 다만 고인의 말을 들었다고 말하지 말아라. 이것의 성사(盛事)는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어서(天高海深) 황유(況喻; 比喩)가 미치지 못하나니 다시 감히 황풍(皇風)을 찬축(讚祝)하거나 청렬(淸列)에게 회향(回向)하지 못한다. 무슨 연고냐, 고인이 말하되 내가 기도한 지 오래되었다(吾禱久矣) 했거늘 어찌 하물며 당금(當今)의 성명(聖明)임에랴. 진중(珍重)하라.
●知軍; 관명(官名)이니 곧 지군사(知軍事). 송조(宋朝) 지방 행정구획(行政區劃) 군(軍)의 장관(長官).
●脉脉不能語; 맥맥(脉脉)은 정을 머금고 말이 없음임.
●淸列; 고귀한 관위(官位).
●吾禱久矣; 조정사원1. 오도(吾禱) 논어(論語)에 이르되 공자가 병을 앓자 자로(子路)가 기도(祈禱)를 청했다. 공자가 가로되 있는가(諸는 조사). 자로가 가로되 그것이 있으니 뇌(誄; 祭文 뢰)에 가로되 상하(上下; 天地)의 신기(神祇; 祇는 땅 귀신 기)에게 기도한다고 하더이다. 공자가 가로되 구(丘; 공자의 이름)가 기도한 지 오래되었다(丘之禱久矣).
僧問 如何是空王廟 師曰 莫少神 曰 如何是廟中人 師曰 適來不謾道 問 靈龜未兆時如何 師曰 是吉是凶 問 未達其源 乞師方便 師曰 達也 曰 達後如何 師曰 終不恁麽問 問僧 看甚麽經 曰 寶積經 師曰 旣是沙門 爲甚麽看寶積經 僧無語 師代云 古今用無極
●寶積經; 大寶積經 一二○卷 又作寶積經 收於大正藏第十一冊 前後諸師譯一會或譯數會而別行之 唐菩提流志新譯三十六會三十九卷 取舊來諸師所譯二十三會八十一卷合之 以四十九會一百二十卷爲全本 寶積者法寶之集積也 爲大乘深妙之法 故目之爲寶 無量法門攝在此中故謂之積
승문(僧問) 무엇이 이 공왕묘(空王廟)입니까. 사왈 신이 적지 않다(莫少神). 가로되 무엇이 이 묘중인(廟中人)입니까. 사왈 아까 헛되이 말하지 않았다(不謾道). 묻되 영귀(靈龜)가 짐조(朕兆)하지 않았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이 길(吉)인가, 이 흉(凶)인가. 묻되 그 근원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스님의 방편을 구걸합니다. 사왈 도달했다(達也). 가로되 도달한 후엔 어떻습니까. 사왈 마침내 이렇게 묻지 않는다. 중에게 묻되 무슨 경을 보느냐. 가로되 보적경(寶積經)입니다. 사왈 이미 이 사문이거늘 무엇 때문에 보적경을 보느냐. 중이 말이 없자 스님이 대운(代云) 고금에 쓰면서 다함(極)이 없다.
●寶積經; 대보적경(大寶積經)이니 120권. 또 보적경으로 지음. 대정장 제11책에 수록되었음. 전후로 여러 스님이 1회(會)를 번역하기도 하고 혹 몇 회를 번역하기도 하여 따로 이것을 행했음. 당 보리류지가 36회 39권을 신역하면서 구래(舊來)의 여러 스님이 번역한 바 23회 81권을 취해 그것과 합하여 49회 120권으로 전본(全本)을 만들었음. 보적이란 것은 법보의 집적(集積)이니 대승의 심묘한 법이 되므로 고로 이를 제목해 보(寶)라 하고 무량한 법문이 여기에 거두어져 있으므로 고로 이를 일러 적(積)임.
洪州百丈道恒禪師
參法眼 因請益外道問佛 不問有言 不問無言 敘語未終 眼曰 住 住 汝擬向世尊良久處會那 師從此悟入 住後 上堂 乘此寶乘 直至道場 每日勞諸上座訪及 無可祇延 時寒不用久立 却請回車 珍重 僧問 如何是學人行脚事 師曰 拗折拄杖得也未 問 古人有言 釋迦與我同參 未審參見何人 師曰 唯有同參方知 曰 未審此人如何親近 師曰 恁麽則你不解參也 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曰 往往問不著 問 還鄕曲子作麽生唱 師曰 設使唱 落汝後
홍주(洪州) 백장(百丈) 도항선사(道恒禪師)
법안(法眼)을 참했다. 인하여 청익(請益)하되 외도가 불타에게 묻되 유언(有言)을 묻지 않고 무언(無言)을 묻지 않습니다. 서어(敘語)를 마치지도 않았는데 법안이 가로되 멈추어라(住), 멈추어라. 네가 세존이 양구(良久)한 곳을 향해 이회(理會)하려고 하느냐. 스님이 이로 좇아 오입(悟入)했다. 주후(住後) 상당(上堂) 이 보승(寶乘)을 타고 바로 도량에 이르나니 매일 제상좌를 노고롭게 방급(訪及; 參訪해 이르다)하게 하거니와 가히 지연(祇延; 應待)할 게 없다. 때가 추우니 구립(久立)함을 쓰지 말고 도리어 청컨대 회거(回車)하라. 진중(珍重). 승문(僧問) 무엇이 이 학인의 행각사(行脚事)입니까. 사왈 주장자를 요절(拗折)함을 얻었느냐 또는 아니냐. 묻되 고인이 말씀이 있어 석가와 내가 동참(同參)이다. 미심하오니 어떤 사람을 참견(參見)했습니까. 사왈 오직 동참이 있어야 바야흐로 안다. 가로되 미심하오니 이 사람은 어떻게 친근합니까. 사왈 이러하다면 곧 네가 참(參)할 줄 알지 못한다. 묻되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입니까. 사왈 왕왕(往往) 묻지 못하더라(問不著). 묻되 환향곡자(還鄕曲子; 子는 조사)를 어떻게 창(唱)합니까. 사왈 설사 창하더라도 너의 뒤에 떨어진다
問 如何是百丈境 師曰 何似雲居 問 如何是百丈爲人一句 師曰 若到諸方 總須問過 乃曰 實是無事 諸人各各是佛 更有何疑得到這裏 古人道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且作麽生是心空 不是那裏閉目冷坐是心空 此正是意識想解 上座要會心空麽 但且識心 便見心空 所以道 過去已過去 未來更莫算 兀然無事坐 何曾有人喚 設有人喚 上座應他好 不應他好 若應他 阿誰喚上座 若不應他 又不患聾也 三世體空 且不是木頭也 所以古人道 心空得見法王 還見法王麽 也祇是老病僧 又莫道渠自伐好 珍重
묻되 무엇이 이 백장경(百丈境)입니까. 사왈(師曰) 운거와 어찌 같은가(何似雲居). 묻되 무엇이 이 백장의 위인(爲人)하는 1구입니까. 사왈 만약 제방에 이르거든 모두(總) 문과(問過; 過는 조사)함을 써라. 이에 가로되 실로 이 무사(無事)하여 제인이 각각 이 부처거늘 다시 무슨 의심이 있어 이 속에 이름을 얻는가. 고인(古人; 龐居士)이 말하되 시방이 함께 취회(聚會)하여/ 개개가 무위를 배운다/ 여기(此)는 이 선불장(選佛場)이니/ 마음이 공해야(心空) 급제(及第)하여 돌아간다. 마음이 공해야 급제(及第)해 돌아간다. 그래 무엇이 이 심공(心空)이냐. 이는 나리(那裏)에서 눈을 감고 냉좌(冷坐)함이 이 심공이 아니니 이것은 바로 이 의식(意識)으로 상상(想像)해 이해함이다(想解). 상좌가 마음이 공하기를 요하느냐, 단지 다만(且) 마음을 알면 바로 심공(心空)을 본다. 소이로 말하되 과거는 이미 과거며/ 미래를 다시 계산하지 말아라/ 올연(兀然)히 일 없이 앉았거늘/ 어찌 일찍이 부르는 사람이 있겠는가(이상은 南嶽懶瓚和尙歌의 4구). 설사 부르는 사람이 있더라도 상좌가 그에게 응함이 좋으냐, 그에게 불응함이 좋으냐. 만약 그에게 응한다면 누가(阿誰) 상좌를 부르며 만약 그에게 불응한다면 또 환롱(患聾)이 아니다. 삼세(三世)의 체(體)가 공했지만 또(且) 이 목두(木頭; 木材. 頭는 조사)가 아니다. 소이로 고인이 말하되 마음이 공해야 법왕을 득견(得見)한다. 도리어 법왕을 보느냐. 또한 다만 이 늙은 병승(病僧)이다. 또 거(渠)가 스스로 자랑함(伐)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좋다. 진중(珍重)하라.
問 如何是佛 師曰 汝有多少事不問 僧擧 人問玄沙 三乘十二分敎卽不問 如何是祖師西來意 沙曰 三乘十二分敎不要 某甲不會 請師爲說 師曰 汝實不會 曰 實不會 師示偈曰 不要三乘要祖宗 三乘不要與君同 君今欲會通宗旨 後夜猿啼在亂峰
●後夜; 卽後分之夜 乃晝夜六時之一 印度之夜間區分爲初中後三時 此爲其後分 相當於寅時 近於日出之時
묻되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사왈 너는 다소사(多少事)가 있거늘 묻지 않는구나. 중이 거(擧)했다. 사람이 현사에게 묻되 삼승 십이분교는 곧 묻지 않습니다.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입니까. 현사가 가로되 삼승 십이분교를 요하지 않는다 했거니와 모갑이 알지 못하니 청컨대 스님이 설하십시오. 사왈 네가 실로 알지 못하느냐. 가로되 실로 알지 못합니다. 스님이 게를 보여 가로되 삼승을 요하지 않고 조종(祖宗)을 요하나니/ 삼승을 요하지 않아야 그대와 더불어 한가지다/ 그대가 이제 알아서 종지를 통하고 싶다면/ 후야(後夜)에 원숭이가 울며 난봉(亂峯)에 있다.
●後夜; 곧 후분(後分)의 밤이니 곧 주야 6시의 하나. 인도의 야간은 초ㆍ중ㆍ후 3시로 구분하며 이것은 그 후분이 됨. 인시(寅時)에 상당하며 일출할 시간에 가까움.
上堂 諸上座適來從僧堂裏出來 脚未跨門限便回去 已是重說偈言了也 更來這裏 不可重重下切脚也 古人云 參他不如自參 所以道森羅萬象 是善財之宗師 業惑塵勞 乃普賢之境界 若恁麽參 得與善財同參 若不肯與麽參 却歸堂向火 參取勝熱婆羅門 珍重 上堂 衆纔集 便曰 喫茶去 或時衆集 便曰 珍重 或時衆集 便曰 歇 後有頌曰 百丈有三訣 喫茶珍重歇 直下便承當 敢保君未徹 師終于本山
●切脚; 切 反切的簡稱 反切是中華傳統的一種注音方法 卽用兩箇字相拼(貼也)的方法 來注另一箇字的音 反切上字卽切字的聲母相同 反切下字卽切字的韻母和聲調相同 如東 德紅切 切脚卽用反切以注脚也
●勝熱婆羅門; 善財童子五十三參 第九參勝熱婆羅門
상당(上堂) 제상좌(諸上座)여 아까 승당 속으로 좇아 나와 발이 문한(門限; 문지방. 저본에 門眼으로 지었음)을 넘지(跨) 않고 바로 돌아갔다. 이미 이, 게언(偈言)을 중설(重說)해 마쳤거늘 다시 이 속에 오니 중중(重重)으로 절각(切脚)을 내림은 옳지 않다. 고인이 이르되 남에게 참(參)함이 스스로 참(參)함만 같지 못하다. 소이로 말하되 삼라만상은 이 선재(善財)의 종사(宗師)며 업혹(業惑)과 진로(塵勞)는 곧(乃) 보현의 경계다. 만약 이렇게(恁麽) 참(參)한다면 선재와 동참함을 얻거니와 만약 그렇게(與麽) 참함을 불긍(不肯)한다면 도리어 귀당(歸堂)하여 향화(向火)하면서 승열바라문(勝熱婆羅門)을 참취(參取)하라. 진중(珍重). 상당(上堂)하여 대중이 겨우 모이자 바로 가로되 끽다(喫茶)하라. 어떤(或) 때 대중이 모이자 바로 가로되 진중(珍重)하라. 어떤 때 대중이 모이자 바로 가로되 헐(歇; 쉬다)하라. 후에 송이 있어 가로되 백장이 3결(訣)이 있나니/ 끽다ㆍ진중ㆍ헐이다/ 직하(直下)에 곧 승당(承當)하더라도/ 감히 보증하노니 그대는 사무치지 못했다. 스님이 본산에서 마쳤다.
●切脚; 절(切)은 반절(反切)의 간칭(簡稱). 반절(反切)은 이 중화(中華)의 전통적인 일종의 주음방법(注音方法)임. 곧 두 개의 글자를 써서 서로 붙이는(拼; 貼임) 방법으로, 가져와서 다른 한 개의 글자의 음을 주석하는 것임. 반절의 위의 글자는 곧 절자(切字)의 성모(聲母)와 서로 같고 반절의 아래 글자는 곧 절자(切字)의 운모(韻母)ㆍ성조(聲調)와 서로 같음. 예컨대(如) 동(東)은 덕홍절(德紅切. 동)임. 절각(切脚)은 곧 반절(反切)을 써서 주각(注脚)함임.
●勝熱婆羅門; 선재동자 53참에서 제9참이 승열바라문임.
오등회원 주역(五燈會元 註譯) 주문 제본
2024. 12월 말 번역 필. 5책 1질. 합4,615쪽. 本註와 補註 총 6,500 目. 미출간. 원문과 출처가 분명한 한문 주석을 넣고 다시 전체를 한글 번역. 주문 요청이 있을 시 인쇄소 에 부탁해 5일 내에 복사 제
pyungsims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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