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림성사

총림성사권상(叢林盛事卷上) 원통수(圓通秀)

태화당 2025. 12. 20. 08:45

法雲圓通秀禪師 初習華嚴 一日 嘆曰 吾觀善財始見文殊 復過百十城 事五十三善知識 又聞達磨西來 老盧南去 敎外別傳 無上心印 吾豈止方隅 滯性相之宗耶 因棄所業 束裝南遊 至無爲謁懷禪師 懷問曰 座主講甚麽經 秀曰 粗習華嚴 懷曰 華嚴以何爲宗 秀曰 以法界爲宗 懷曰 法界以何爲宗 秀曰 以心爲宗 懷曰 心以何爲宗 秀不能答 懷曰 毫𨤲有差 天地懸隔 汝當自肯 會有省發 後十七日 聞僧擧 白兆問報慈情生智隔 想變體殊 情未生時如何 慈云 隔 師於此大悟 直到方丈陳所得 懷喜曰 前後座主見吾者多 唯汝一人堪承大法 吾宗異日在汝一人行矣 師遂服勤八年 懷推爲上首 出世舒之四面 後居東京法雲 雲門正宗由茲大闡

圓通秀; 法秀(1027-1090) 宋代雲門宗僧 俗姓辛 秦州隴城(今甘肅秦安)人 十九歲時試經得度 受具足戒後勵志講肆 習圓覺華嚴 妙入精義 因聞無爲軍(今安徽無爲)鐵佛寺天衣義懷禪師法席之盛 徑往參謁 有所證悟 得到印可 奉侍十年 出住淮西四面山 遷住眞州長蘆 後因東京法雲寺落成 應請爲開山第一祖 世稱法雲法秀 賜號圓通禪師 性剛直 面目嚴冷 平生以詈罵爲佛事 人稱秀鐵面 法嗣有法雲惟白 保寧子英等五十九人 [禪林僧寶傳二十六 五燈會元十六 續傳燈錄八]

華嚴; 華嚴經 全稱大方廣佛華嚴經 又稱雜華經 有三種 ()六十華嚴 凡六十卷 東晉佛馱跋陀羅譯 又稱舊華嚴 晉經 總成七處八會三十四品 據出三藏記集九 華嚴經探玄記一等所擧 華嚴經之梵本 原有十萬偈 由東晉支法領從于闐國攜入三萬六千偈 自安帝義熙十四年(418)三月 由佛馱跋陀羅譯成六十卷 稱爲六十華嚴 此卽第一譯 然六十華嚴中之入法界品尙有缺文 直至唐永隆元年(680) 始補譯之 ()八十華嚴 凡八十卷 唐代實叉難陀譯 又稱新華嚴 唐經 總成七處九會三十九品 爲六十華嚴之異譯 八十華嚴之梵本 乃實叉難陀應武則天之請 從于闐國攜入中華 自唐武則天證聖元年(695)三月 於遍空寺內始譯 武后親臨譯場 揮毫首題品名 至聖曆二年(699)十月功畢 此卽第二譯 本經之西藏譯本 總成四十五品 其中 前四十四品相當於本經之前三十八品 第四十五品相當於本經第三十九入法界品 ()四十華嚴 凡四十卷 唐代般若譯 全稱大方廣佛華嚴經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 略稱普賢行願品 又稱貞元經 爲新舊兩譯華嚴經入法界品之別譯 唐德宗貞元十一年(795)十一月 由南天竺烏荼國師子王派使者進貢其所親寫華嚴經之梵本 翌年六月 於長安崇福寺 由罽賓般若三藏譯之 澄觀及圓照鑑虛等諸師詳定 至貞元十四年二月譯畢 共四十卷 此卽四十華嚴 宗統編年五 祖(十四祖龍樹) 入龍宮看藏見華嚴經有三本 上本 十三世界微塵數偈 一四天下微塵數品 中本四十九萬八千八百偈 一千二百品 下本十萬偈 四十八品 上本非佛不能知 中本惟住地菩薩乃能知之 遂記下本回歸西土 傳至東震 僅八十卷三十九品 乃前分三萬六千偈 尙有六萬四千偈九品在西土

善財; 按華嚴經入法界品 文殊師利在福城東 住莊嚴幢娑羅林中 其時福城長者子有五百童子 善財其一人也 善財生時 種種珍寶自然涌出 以此事故 父母親屬及善相師 共呼此兒名曰善財 善財詣文殊師利所發心 從此漸次南行 參五十三知識而證入法界

文殊; 三藏法數七 文殊三名[出翻譯名義] 一文殊師利 梵語文殊師利 華言妙德 謂具不可思議種種微妙功德 故名妙德 二滿殊尸利 梵語滿殊尸利 華言妙首 謂具不可思議微妙功德 在諸菩薩之上 故名妙首 三曼殊室利 梵語曼殊室利 華言妙吉祥 謂具不可思議微妙功德 最勝吉祥 故名妙吉祥

五十三善知識; 按華嚴經入法界品 善財童子遍求法門要義 初參文殊師利菩薩 復遊行南方 先參德雲比丘 次第輾轉指示 終參普賢菩薩 卽得一切佛刹微塵數三昧門 善財如是歷一百十城 參五十三位善知識

達磨; 菩提達磨 <> Bodhidharma 此云道法 又稱菩提達摩 菩提達磨多羅 達磨多羅 菩提多羅 通稱達磨 東土禪宗初祖 西天第二十八祖 南天竺香至國國王之第三子 從般若多羅學道 與佛大先竝稱爲門下二甘露門 梁武帝普通元年(520 西來年度 異說紛紜) 師泛海至廣州番禺 武帝遣使迎至建業 然與武帝語不相契 遂渡江至魏 止嵩山少林寺 面壁坐禪 時人不解其意 稱壁觀婆羅門 經九載 欲歸西方 囑慧可一宗之祕奧 授袈裟及楞伽經四卷 未久卽入寂 葬於熊耳山定林寺 師之示寂年代 有梁大通二年(528) 梁大同元年(535)或二年等異說 又梁武帝尊稱師爲聖胄大師 唐代宗賜圓覺大師之諡號 塔名空觀 [續高僧傳十六 傳燈錄三 傳法正宗記五 祖庭事苑二 同五 同八 舊唐書列傳一四一神秀傳]

敎外別傳; 不依文字語言 直悟佛陀所悟之境界 卽稱爲敎外別傳 又稱單傳 此敎外別傳之禪法 亦卽菩提達磨所傳之祖師禪

心印; 禪之本意 不立文字 不依言語 直以心爲印 故曰心印 心者佛心 印者印可印定之義 此印能印可或印定佛法之實義也

懷禪師; 義懷(989-1060) 宋代僧 永嘉樂淸(浙江樂淸)人 俗姓陳 及長 入京師之景德寺爲童行 天聖(1023-1031)年中 試經得度 初參金鑾善 又謁葉縣歸省 皆不契 乃東遊姑蘇翠峰 謁雪竇重顯 因汲水次 擔墮于地 豁然大悟 顯卽印可 後出世於鐵佛寺 提倡法要 未久 住越州天衣寺 凡五遷法席 所到皆興其荒廢 大振雲門之法道 嘉祐五年入寂 壽七十二 世稱天衣義懷 諡號振宗禪師 法嗣有慧林圓照 法雲法秀 長蘆應夫 佛日智才等八十餘人 [續傳燈錄六 禪林僧寶傳十一 佛祖歷代通載二十七 五燈會元十六 釋氏稽古略四]

座主; 大衆一座之主也 如言上座首座 禪家云住持 敎家云座主 爲大衆一座之主 統理一山者 如天台山修禪寺座主道邃是也 又禪家名敎家皆曰座主 釋氏要覽上 摭言曰 有司謂之座主 今釋氏取學解優贍穎拔者名座主 謂一座之主 古高僧呼講者爲高座 或是高座之主

法界; 一意識(六識之一)所認知的一切對象的統稱 二全部世界 一切事物 三萬事萬物的本源和本性 此指三

報慈; 藏嶼 五代後晉曹洞宗僧 字匡化 依龍牙居遁受法 住潭州報慈院 [傳燈錄二十 五燈會元十三]

情生智隔; 華嚴經疏一 良以衆生包性德而爲體 依智海以爲源 但相變體殊 情生智隔 華嚴經疏演義鈔二 所以相變體殊者 迷眞如以成名相故 情生智隔者 失正智而成妄想故

方丈; 一丈四方之室 又作方丈室 丈室 卽禪寺中住持之居室或客殿 亦稱函丈 正堂 堂頭 印度之僧房多以方一丈爲制 維摩禪室亦依此制 遂有方一丈之說 轉而指住持之居室 今轉義爲禪林住持 或對師家之尊稱 通稱方丈 或方丈和尙 [維摩經文疏二十二 法苑珠林二十九 大唐西域求法高僧傳上慧輪傳]

服勤; 謂服持職事勤勞 服 事也

出世; 禪師於自身 修持功成後 再次歸還人間敎化衆生 亦稱出世 或被任命住持之職 昇進高階位之僧官等 皆稱爲出世

雲門; 文偃(864-949) 唐末五代僧 爲雲門宗之祖 浙江嘉興人 俗姓張 法名文偃 幼懷出塵之志 從嘉興空王寺志澄出家 未久 至毘陵壇受具足戒 遍覽諸經 深究四分律 後至睦州(浙江省建德)參學於道明門下 經數載 盡得其道 又謁雪峰義存 依住三年 受其宗印 後歷叩諸方 參究玄要 名聲漸著 後梁乾化元年(911) 至曹溪(廣東省)禮六祖塔 後投於靈樹如敏會下 如敏推爲首座 貞明四年(918) 如敏示寂 師嗣其法席 主持靈樹寺 同光元年(923) 於雲門山創建光泰禪院 道風愈顯 海衆雲集 法化四播 後漢隱帝乾祐元年(948) 南漢王劉晟敕賜匡眞禪師 二年四月十日上表辭王 垂誡徒衆 端坐示寂 壽八十六 僧臘六十六 北宋乾德四年(966) 太祖復追諡大慈雲匡眞弘明禪師 師之機鋒險峻 門風殊絶 世稱雲門文偃 有雲門匡眞禪師廣錄三卷 語錄一卷行世 [古尊宿語錄十八 傳燈錄十九 禪林僧寶傳二 釋氏稽古略三 釋氏疑年錄五]

 

법운(法雲; 법운사) 원통수(圓通秀; 法秀) 선사가 처음 화엄(華嚴)을 학습(學習; )했다. 어느 날 탄식해 가로되 내가 보건대() 선재(善財)가 처음() 문수(文殊)를 뵙고 다시 백십 성()을 지나면서 오십삼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모셨고() 또 듣건대 달마(達磨)가 서래(西來)했고 노로(老盧; 혜능의 성이 )가 남거(南去; 남방으로 가다)했나니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위없는 심인(心印)이다. 내가 어찌 방우(方隅; 사방의 한 모퉁이)에 머물며 성상(性相)의 종()에 체류(滯留; )하겠는가. 인하여 소업(所業)을 버리고 속장(束裝; 行裝整理)하여 남유(南遊)했다. 무위(無爲; 無爲軍)에 이르러 회선사(懷禪師; 義懷)를 참알했다. ()가 문왈(問曰) 좌주(座主)는 무슨 경을 강()하는가. 수왈(秀曰) 조금() 화엄을 학습했습니다. 회왈(懷曰) 화엄은 무엇으로써 종()을 삼는가. 수왈(秀曰) 법계(法界)로써 종을 삼습니다. 회왈 법계는 무엇으로써 종을 삼는가. 수왈 심()으로써 종을 삼습니다. 회왈 심은 무엇으로써 종을 삼는가. ()가 능히 답하지 못했다. 회왈 호리(毫𨤲)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천지(天地)처럼 현격(懸隔)하다. 너는 마땅히 자긍(自肯)할지니 성발(省發; 領會)함이 있음을 만날 것이다(). 17일 후 중이 거()함을 들었는데 백조(白兆)가 보자(報慈)에게 물어 이르되 정이 나면 지가 막히고(情生智隔) 상이 변하면 체가 달라진다(想變體殊) 하니 정이 나지 않았을 때 어떻습니까. 자운(慈云) 막혔다(). 스님이 이에서 대오(大悟)했다. 바로() 방장(方丈)에 이르러 소득(所得)을 진술(陳述; )하자 회()가 기뻐하며 가로되 전후(前後)로 좌주(座主)가 나를 본 자가 많지만 오직 너 한 사람 만이 대법(大法; 불법)을 감승(堪承; 承受堪耐)한다. 오종(吾宗; 운문종)이 다른 날 너 한 사람에게 있으면서 행하리라. 스님이 드디어 복근(服勤)하기 8년이었고 회()가 추거(推擧; )하여 상수(上首; 首座)가 되었다. (; 舒州)의 사면(四面; 사면산)에서 출세(出世)했고 후에 동경(東京) 법운(法雲; 법운사)에 거주했다. 운문(雲門; 文偃)의 정종(正宗)이 이로 말미암아 대천(大闡; 크게 드러남. 크게 擴張)했다.

圓通秀; 법수(法秀; 1027-1090)니 송대 운문종승. 속성은 신()이며 진주 농성(지금의 감숙 진안) 사람. 19세 때 시경득도(試經得度)하고 구족계를 받은 후 강사(講肆)에 뜻을 힘써 원각과 화엄을 학습하여 정의(精義)에 묘입(妙入)했음. 무위군(無爲軍; 지금의 안휘 무위) 철불사(鐵佛寺) 천의의회선사(天衣義懷禪師)의 법석(法席)이 성()하다 함을 들음으로 인해 질러가서 참알(參謁)했고 증오(證悟)한 바가 있었으며 인가(印可)에 이름을 얻었으며 봉시(奉侍)하기 10년이었음. 출세해 회서(淮西) 사면산에 거주하다가 진주(眞州)의 장로(長蘆)로 천주(遷住)했으며 후에 동경(東京) 법운사(法雲寺)의 낙성(落成)으로 인해 요청에 응해 개산제일조(開山第一祖)가 되었으니 세칭이 법운법수(法雲法秀)며 사호(賜號)가 원통선사(圓通禪師). 성품이 강직하고 면목(面目)이 엄랭(嚴冷)하고 평생 꾸짖고 욕함으로써 불사를 삼았으며 사람들이 수철면(秀鐵面)으로 일컬었음. 법사(法嗣)에 법운유백(法雲惟白)ㆍ보녕자영(保寧子英) 59인이 있음 [선림승보전26. 오등회원16. 속전등록8].

華嚴; 화엄경이니 전칭이 대방광불화엄경이며 또 명칭이 잡화경(雜華經). 3종이 있음. (1). 육십화엄(六十華嚴) 무릇 60권이며 동진(東晉)의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번역했음. 또 명칭이 구화엄(舊華嚴)ㆍ진경(晉經)이니 총() 78(七處八會) 34()으로 이루어졌음. 출삼장기집9ㆍ화엄경탐현기1 등에서 든 바에 의거하면 화엄경의 범본(梵本)은 원래 10만 게가 있고 동진 지법령(支法領)이 우전국(于闐國)으로부터 36천 게를 휴입(攜入)함으로 말미암아 안제(安帝) 의희(義熙) 14(418) 3월로부터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60권을 역성(譯成)했기 때문에 일컬어 60화엄(華嚴)이라 했으니 이것이 곧 제1(). 그러나 60화엄 중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 오히려 결문(缺文)이 있었고 바로 당 영륭(永隆) 원년(680)에 이르러 비로소 보역(補譯)했음. (2). 팔십화엄(八十華嚴) 무릇 80권이며 당대(唐代)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했음. 또 명칭이 신화엄(新華嚴)ㆍ당경(唐經)이며 총() 79(七處九會) 39()으로 이루어졌으니 60화엄의 이역(異譯)이 됨. 80화엄의 범본은 곧 실타난타가 무측천(武則天)의 요청에 응해 우전국(于闐國)으로부터 중화로 휴입(攜入)했음. 당 무측천 증성(證聖) 원년(695) 3월로부터 편공사(遍空寺) 안에서 처음 번역했고 무후(武后)가 역장(譯場)에 친림해 수제(首題)의 품명(品名)을 휘호(揮毫)했음. 성력 2(699) 10월에 이르러 공()을 마쳤으니 이것이 곧 제2(). 본경의 서장역본(西藏譯本)은 총() 45품으로 이루어졌고 그 중 전() 44품은 본경의 전 38품에 상당하고 제45품은 본경의 제39 입법계품에 상당함. (3). 사십화엄(四十華嚴) 무릇 40권이며 당대(唐代) 반야(般若)가 번역했음. 전칭(全稱)이 대방광불화엄경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大方廣佛華嚴經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이며 약칭이 보현행원품이며 또 명칭이 정원경(貞元經). 신구(新舊) 양역(兩譯) 화엄경의 입법계품의 별역(別譯). 당 덕종(德宗) 정원(貞元) 11(795) 11월 남천축 오다국(烏荼國) 사자왕(師子王)이 사자를 파견해 그가 친사(親寫)한 바 화엄경의 범본을 진공(進貢)했기 때문에 다음해 6월 장안 숭복사(崇福寺)에서 계빈(罽賓; 계빈국) 반야삼장(般若三藏)이 그것을 번역함으로 말미암아 징관(澄觀) 및 원조감허(圓照鑑虛) 등 여러 스님이 상정(詳定)했고 정원(貞元) 142월에 번역을 마쳤음. 공히 40권이며 이것이 곧 40화엄임. 종통편년5. (14龍樹)가 용궁에 들어가 장경을 보는데 화엄경(華嚴經)3()이 있음을 보았다. 상본(上本)은 십삼세계(十三世界; 10삼천대천세계)의 미진수게(微塵數偈)1사천하(四天下)의 미진수품(微塵數品)이었고 중본(中本)4988백 게며 12백 품()이었고 하본(下本)10만 게며 48품이었다. 상본은 부처가 아니면 능히 알지 못하고 중본은 오직 주지보살(住地菩薩; 10하는 보살)이라야 이에 능히 그것을 알겠는지라 드디어 하본을 기()하여 서토(西土)로 회귀했다. ()하여 동진(東震)에 이른 것은 겨우 8039품이니 곧 전분(前分)36천 게라, 오히려 64천 게 9품이 있어 서토에 있다.

善財; 화엄경 입법계품을 안험컨대 문수사리가 복성(福城)의 동쪽에 있으면서 장엄당사라림 중에 머물렀다. 그때 복성의 장자(長者)가 아들이 5백 동자가 있었는데 선재도 그 한 사람이다. 선재가 태어났을 때 갖가지 진보(珍寶)가 자연히 용출했다. 이 일을 쓴 고로 부모와 친속 및 선상사(善相師)가 모두 이 아이를 호칭하며 이름해 가로되 선재라 했다. 선재가 문수사리의 처소에 나아가서 발심하여 여기로부터 점차 남행하여 53지식을 참알하여 법계에 증입(證入)했다.

文殊; 삼장법수7. 문수삼명(文殊三名) [출번역명의] 1. 문수사리(文殊師利; Manjusri) 범어 문수사리는 화언(華言)으론 묘덕(妙德)이다. 이르자면 불가사의한 갖가지 미묘한 공덕을 갖춘지라 고로 이름이 묘덕이다. 2. 만수시리(滿殊尸利) 범어 만수시리는 화언으론 묘수(妙首). 이르자면 불가사의한 미묘한 공덕을 갖추어 모든 보살의 상()에 있는지라 고로 이름이 묘수다. 3. 만수실리(曼殊室利) 범어 만수실리는 화언으론 묘길상(妙吉祥)이다. 이르자면 불가사의한 미묘한 공덕을 갖추어 가장 수승(殊勝)한 길상인지라 고로 이름이 묘길상이다.

五十三善知識; 화엄경입법계품을 안험컨대 선재동자가 법문의 요의(要義)를 두루 구하면서 처음에 문수사리보살을 참()하고 다시 남방으로 유행(遊行)하며 먼저 덕운비구를 참하고 차제로 전전(輾轉)히 지시하여 마지막에 보현보살을 참해 곧 일체의 불찰미진수 삼매문(三昧門)을 얻었음. 선재가 이와 같이 110()을 경력하며 53위 선지식을 참했음.

達磨; 보리달마(菩提達磨; Bodhidharma)니 여기에선 이르되 도법(道法). 또 호칭이 보리달마(菩提達摩)ㆍ보리달마다라(菩提達磨多羅)ㆍ달마다라(達磨多羅)ㆍ보리다라(菩提多羅)며 통칭이 달마임. 동토(東土)의 선종 초조며 서천(西天)의 제28조임. 남천축(南天竺) 향지국(香至國) 국왕의 셋째 아들이며 반야다라(般若多羅)를 좇아 도를 배웠으며 불대선(佛大先)과 아울러 문하(門下)의 두 감로문(甘露門)이라고 호칭하였음. () 무제(武帝) 보통원년(普通元年; 520. 西來年度異說紛紜) 스님이 바다에 떠서 광주(廣州)의 번옹(番禺)에 이르자 무제가 사자를 보내 영접해 건업(建業)에 이르렀음. 그러나 무제와 말이 서로 계합(契合)치 못해 드디어 도강(渡江)하여 위()에 이르러 숭산(嵩山)의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면서 면벽(面壁)하며 좌선했음. 당시의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해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 일컬었음. 아홉 해가 지나 서방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혜가(慧可)에게 1()의 비오(祕奧)를 부촉하고 가사(袈裟)와 릉가경(楞伽經) 4권을 주었음. 오래지 않아 입적했고 웅이산(熊耳山) 정림사(定林寺)에 장사 지냈음. 스님의 시적(示寂) 연대는 양() 대통이년(大通二年; 528)ㆍ양 대동원년(大同元年; 535) 2년 등의 이설(異說)이 있음. 또 양무제가 스님을 존칭해 성주대사(聖胄大師)라 했으며 당() 대종(代宗)은 원각대사(圓覺大師)란 시호를 주었음. 탑 이름은 공관(空觀) [속고승전16. 전등록3. 전법정종기5. 조정사원2, 5, 8. 구당서열전141신수전].

敎外別傳; 문자와 어언(語言)에 의하지 않고 바로 불타가 깨친 바의 경계를 깨침을 곧 일컬어 교외별전이라 함. 또 명칭이 단전(單傳). 이 교외별전의 선법은 또한 곧 보리달마가 전한 바의 조사선임.

心印; ()의 본의는 문자를 세우지 않고 언어에 의하지 않고 바로 심()으로 인()을 삼는지라 고로 가로되 심인임. 심이란 것은 불심이며 인이란 것은 인가인정(印可印定)의 뜻이니 이 인()이 불법의 실의(實義)를 능히 인가(印可)하거나 혹 인정(印定).

懷禪師; 의회(義懷; 989-1060)니 송대승. 영가 낙청(절강 낙청)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진(). 성장함에 이르자 경사(京師; 首都)의 경덕사에 들어가 동행(童行)이 되었으며 천성(1022-1031)년 중에 시경득도(試經得度)했음. 처음엔 금란선(金鑾善; 慈明高弟)을 참알했고 또 섭현귀성(葉縣歸省; 임제하 5)을 참알했으나 다 계합(契合)하지 못했음. 이에 동쪽으로 고소(姑蘇)의 취봉(翠峰)에 노닐다가 설두중현(雪竇重顯; 운문하 3)을 참알했는데 물 긷던 차에 멜대가 땅에 떨어짐으로 인해 휑하게 대오했으며 중현이 곧 인가(印可)했음. 후에 철불사(鐵佛寺)에서 출세해 법요를 제창(提倡)했음. 오래지 않아 월주(越州)의 천의사(天衣寺)에 주지(住持)했으며 무릇 다섯 번 법석을 옮겼음. 이르는 곳마다 그 황폐(荒廢)를 부흥(復興)했으며 운문의 법도(法道)를 크게 떨쳤음. 가우 5년 입적(入寂)했으니 나이는 72며 세칭이 천의의회(天衣義懷). 시호는 진종선사(振宗禪師)며 법사(法嗣)에 혜림원조(慧林圓照)ㆍ법운법수(法雲法秀)ㆍ장로응부(長蘆應夫)ㆍ불일지재(佛日智才) 80여 인이 있음 [속전등록6. 선림승보전11. 불조역대통재27. 오등회원16. 석씨계고략4].

座主; 대중일좌(大衆一座)의 주(). 상좌(上座)ㆍ수좌(首座)라고 말함과 같음. 선가(禪家)에선 이르되 주지(住持)며 교가(敎家)에선 이르되 좌주(座主)니 대중일좌(大衆一座)의 주()가 되어 일산(一山)을 통리(統理)하는 자임. 천태산 수선사(修禪寺) 좌주 도수(道邃) 같은 게 이것임. 또 선가(禪家)에선 교가를 이름해 다 가로되 좌주라 함. 석씨요람상. 척언(摭言; 은 주울 척. 五代十國 시절 王定保가 지었음. 혹은 이고 혹은 首尾가 갖추어지지 못해 족히 저술이라고 일컫지 못하므로 고로 이름이 척언임)에 가로되 유사(有司)를 좌주라고 일컫나니 지금 석씨(釋氏; 釋迦. 佛家. 僧侶)가 학해(學解)가 넉넉하고 영발(穎拔; 特出)한 자를 취해 좌주라고 이름하니 이르자면 일좌(一座)의 주(). 옛날에 고승이, 강설하는 자를 호칭해 고좌(高座)라 했으니 혹 이는 고좌의 주().

法界; 1. 의식(6식의 하나)으로 인지하는 바의 일체의 대상의 통칭. 2. 전부의 세계. 일체의 사물. 3. 만사와 만물의 본원과 본성. 여기에선 3을 가리킴.

報慈; 장서(藏嶼)니 오대 후진 조동종승. 자는 광화(匡化)며 용아거둔(龍牙居遁)에게 의지해 법을 받았고 담주 보자원(報慈院)에 주()했음 [전등록20. 오등회원13].

情生智隔; 화엄경소1. 진실로 중생이 성덕(性德)을 포괄하여 체()를 삼고 지해(智海)에 의하여 원()을 삼거니와 다만 상()이 변하므로 체()가 달라지고(相變體殊) ()이 생하므로 지()가 막힌다(情生智隔). 화엄경소연의초2. 소이로 상()이 변하므로 체()가 달라진다는 것은 진여를 미()하여 명상(名相)을 이루는 연고이다. ()이 생하므로 지()가 막힌다 한 것은 정지(正智)를 잃어 망상을 이루는 연고이다.

方丈; 1()의 사방의 실()이니 또 방장실ㆍ장실로 지음. 곧 선사(禪寺) 중 주지의 거실 혹 객전(客殿). 또 명칭이 함장(函丈)ㆍ정당(正堂)ㆍ당두(堂頭). 인도의 승방은 다분히 사방 1장을 제도(制度)로 삼았으며 유마의 선실(禪室)도 또한 이 제도에 의했으니 드디어 사방 1장의 설이 있음. ()하여 주지의 거실을 가리키며 이제 전의(轉義)하여 선림의 주지가 됨. 혹 사가(師家)에 대한 존칭이니 통칭이 방장이며 혹 방장화상임 [유마경문소22. 법원주림29. 대당서역구법고승전상혜륜전].

服勤; 이르자면 직사(職事)를 복지(服持)하여 근로함. ()은 사().

出世; 선사(禪師)가 자신을 수지(修持)하여 공()을 이룬 후에 재차(再次) 인간으로 귀환하여 중생을 교화함을 또한 출세라고 일컬음. 혹은 주지(住持)의 직()에 임명됨을 입거나 높은 계위(階位)의 승관(僧官)에 승진(昇進)하는 등을 다 일컬어 출세라고 함.

雲門; 문언(文偃; 864-949)이니 당말(唐末) 오대승. 운문종(雲門宗)의 개조(開祖)가 됨. 절강 가흥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장()이며 법명은 문언(文偃). 어려서 출진(出塵)의 뜻을 품고 가흥(嘉興) 공왕사(空王寺)의 지징(志澄)을 좇아 출가했음. 오래지 않아 비릉단(毘陵壇)에 이르러 구족계를 받았음. 여러 경을 편람(遍覽)하였고 사분율(四分律)을 깊이 연구했음. 후에 목주(睦州; 절강성 建德)에 이르러 도명(道明. 黃檗希運法嗣)의 문하(門下)에서 참학(參學)해 몇 해가 지나 그 도를 다 얻었음. 또 설봉의존(雪峰義存)을 알현(謁見)3년을 의지하며 머물고 그의 종인(宗印)을 받았음. 후에 제방을 다니며 고문(叩問)하면서 현요(玄要)를 참구하였고 명성이 점차 드러났음. 후량(後梁) 건화 원년(911) 조계(曹溪. 廣東省)에 이르러 육조탑(六祖塔)에 예배하고 뒤에 영수여민(靈樹如敏)의 회하(會下)에 투입했는데 여민이 추천(推薦)해 수좌가 되었음. 정명 4(918) 여민이 시적하자 스님이 그 법석을 이어 영수사(靈樹寺)를 주지(主持)했음. 동광 원년(923) 운문산에 광태선원(光泰禪院)을 창건하자 도풍(道風)이 더욱 환해져 해중(海衆)이 운집하였고 법화(法化)가 사방으로 퍼졌음. 후한(後漢) 은제(隱帝) 건우 원년(948) 남한왕(南漢王) 유성(劉晟)이 광진선사(匡眞禪師)로 칙사(敕賜)했으며 2410일에 표()를 올려 왕을 고별하고 도중(徒衆)에게 훈계(訓戒)를 내리고는 단정히 앉아 시적(示寂)했음. 나이는 86이며 승랍은 66. 북송 건덕 4(966) 태조(太祖)가 다시 추시(追諡)하여 대자운광진홍명선사(大慈雲匡眞弘明禪師)라 했음. 스님의 기봉(機鋒)이 험준하고 문풍(門風)이 수절(殊絶)했으며 세칭이 운문문언(雲門文偃). 운문광진선사광록(雲門匡真禪師廣錄) 3권과 어록 1권이 있어 행세(行世)[고존숙어록18. 전등록19. 선림승보전2. 석씨계고략3. 석씨의년록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