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福寧道者 歙州人 參五祖演 演見其立作高上 識趣超卓 每當衆譽之 復令入堂司 同學妬之 夜引寧山行道話 因毆之 傷其面目 赴衆不得 演聞之 躬往省 問曰 聞汝被那一輩無禮 何不至方丈雪屈 聽老僧與汝趕逐 寧竟不忍顯 但云 某自喫撲傷損 不干他事 演淚下曰 吾忍力不如汝 他日豈奈汝何 後出世開福 容五百衆 將示寂 預定日時坐化 以大法授月菴果 果陸沈衆底 人莫能識 唯圓悟知之 後成褫其出世 以頌送之曰 歙山老人末後句 的的親傳四絶堂 正令已行風凜凜 斗間劍氣燭天光
●開福寧; 道寧(?-1113) 宋代楊岐派僧 歙溪(安徽歙縣)汪氏 於蔣山出家 嗣五祖法演之法 任天寧寺第一座 大觀三年(1109) 駐錫潭州(湖南)開福禪寺 爲第十九世 政和三年示寂 著有開福寧禪師語錄二卷 [聯燈會要十六 五燈會元十九]
●五祖演; 法演(?-1104) 北宋楊岐派僧 綿州巴西(四川綿陽)人 俗姓鄧 年三十五始出家受具足戒 遊學成都 習百法 唯識諸論 究其奧義 後投白雲守端禪師 參究精勤 遂廓然徹悟 受印可 尋依命分座 開示來衆 初住四面山 後還遷白雲山 次住太平 次住海會 更遷蘄州五祖山(東山)東禪寺 徽宗崇寧三年六月二十五日上堂辭衆 淨髮澡身而示寂 壽八十餘 世稱五祖法演 法嗣頗多 以佛眼淸遠 太平慧懃 圜悟克勤最著 有法演下三佛之稱 [法演禪師語錄序 五燈會元十九 聯燈會要十六 釋氏稽古略四]
●高上; 志高氣昂貌
●堂司; 禪林六知事之一 又作維那 負責僧堂指導之僧 維那之居室 稱爲維那寮 亦稱堂司 維那之下 掌諸雜役之事 稱爲堂司行者 略稱堂行 又戒臘牌乃記載僧衆戒臘 堂司戒臘之牌 稱堂司牌 [百丈淸規四堂司特爲新舊侍者茶湯條 禪苑淸規一掛搭條 象器箋職位類]
●雪屈; 雪 洗也 除也 如雪仇 雪恨 설(雪)은 씻음임. 제거함임. 예컨대(如) 설구(雪仇)ㆍ설한(雪恨).
●月菴果; 善果(1079-1152) 宋代楊岐派僧 號月庵 鉛山(今屬江西)余氏 幼依七寶院元浹下髮 遊方 至鵝湖 聞二童子戲語 有省 嗣法開福道寧 出世道吾 福嚴 徙閩中黃檗及東西禪 晩居大潙 [聯燈會要十七 普燈錄十七 五燈會元二十]
●陸沈; 陸地無水而沈 莊子則陽 方且與世違 而心不屑與之俱 是陸沈者也 注云 人中隱者 譬無水而沈 則陸沈正言隱者
●圓悟; 克勤(1063-1135) 又作克懃 宋代楊岐派僧 四川崇寧人 俗姓駱 字無著 幼於妙寂院依自省出家 受具足戒後 於成都依圓明學習經論 後至五祖山參法演 蒙其印證 與佛鑑慧懃 佛眼淸遠齊名 世有演門二勤一遠之稱 被譽爲叢林三傑 崇寧(1102-1106)中 於成都昭覺寺開法 政和初年(1111)至荊州 當世名士張無盡禮謁之 與之談論華嚴要旨及禪門宗趣 復受澧州刺史之請 住夾山靈泉禪院 復徙道林 時因樞密鄧子常之奏請 敕賜紫服及佛果禪師之號 政和中 奉詔移住金陵蔣山 次住天寧萬壽 大振宗風 後居於金山 高宗幸揚州時 詔其入對 賜號圜悟 世稱圜悟克勤 後歸成都昭覺寺 紹興五年示寂 壽七十三 諡號眞覺禪師 弟子有大慧宗杲 虎丘紹隆等禪門龍象 曾於夾山之碧巖 集雪竇重顯之頌古百則 編成碧巖錄十卷 世稱禪門第一書 此外有圜悟佛果禪師語錄二十卷 [大慧普覺禪師年譜 僧寶正續傳四 嘉泰普燈錄十一 佛祖歷代通載三十 釋氏稽古略四]
●成褫; 禪林寶訓順硃一 褫 音池 成就之也
●末後句; 末後一句 謂到達徹底大悟之極處所言之至極語 更無其他語句能超越者
●的的; 確實 眞實 的 實也
●斗間劍氣; 祖庭事苑三 射斗牛 晉書(36) 雷煥善天文 張華因望斗牛間 常有異氣 乃邀煥夜登樓仰視 煥曰 僕察之久矣 乃寶劍之精上於天 在豫章酆城縣界 華乃薦煥爲酆城令 煥至 修獄 掘基得石匣 有雙劍 光甚艶發 使送一與張公 一留自佩 華後被誅 劍遂失 煥卒 子爲州從事 佩父劍之延平 於腰間忽躍墮水 使人投之 但見兩龍長數丈 燔瑩有文章 投者懼而返
○개복녕(開福寧; 道寧) 도자(道者; 禪人의 칭호)는 흡주(歙州; 지금의 安徽 歙縣) 사람이며 오조연(五祖演; 法演)을 참(參)했다. 연(演)이 그의 입작(立作; 功績과 德行 등)이 고상(高上)하고 식취(識趣; 知趣)가 초탁(超卓)함을 보고 매번 당중(當衆)하여 그(之)를 기렸고(譽) 다시 당사(堂司)에 들어가게 했다. 동학(同學)이 이(之)를 질투(嫉妬; 妬)했다. 밤에 녕(寧)을 인도(引導; 引)하여 산행(山行)하며 도화(道話; 얘기를 말하다)하다가 그(之)를 때림으로(毆) 인해 그의 면목(面目)을 손상(損傷; 傷)해 대중에 다다름(赴)을 얻지 못했다. 연(演)이 이(之)를 듣고 몸소 가서 살폈다. 문왈(問曰) 듣건대 네가 저(那) 일배(一輩; 한 무리)의 무례(無禮)를 입었다 하는데 왜 방장(方丈)에 이르러 설굴(雪屈; 억울함을 씻다)하지 않았느냐. 노승(老僧; 法演 자신)이 너를 위해(與) 간축(趕逐; 쫓아내다)함을 들어라(聽). 녕(寧)이 마침내(竟) 차마 드러내지(顯) 못했다. 단지 이르되 모(某; 나)가 스스로 끽박(喫撲; 倒地)하여 상손(傷損)했으니 그 일(他事)에 상간(相干; 干)되지 않습니다. 연(演)이 눈물을 떨어뜨리며(淚下) 가로되 나의 인력(忍力)이 너만 같지 못하나니 타일(他日)에 너를 어찌하겠는가(豈奈). 후에 개복(開福; 개복사)에서 출세했고 오백중(五百衆)을 수용(收容; 容)했다. 장차 시적(示寂)하려 하면서 일시(日時)를 예정(預定)하고 좌화(坐化; 坐脫)했다. 대법(大法)을 월암과(月菴果; 善果)에게 전수(傳授; 授)했는데 과(果)는 대중에 육침(陸沈)한 이(底)라 사람들이 능히 알지 못했다. 오직 원오(圓悟)만 그(之)를 알았고 후에 그의 출세를 성치(成褫; 成就)케 했다. 송(頌)으로써 그(之)를 송별해 가로되 흡산(歙山; 道寧) 노인의 말후구(末後句)를/ 적적(的的; 확실)히 사절당(四絶堂)에게 친히 전했다/ 정령(正令)을 이미 행해 기풍(氣風; 風)이 늠름(凜凜)한데/ 두간의 검기(斗間劍氣)가 하늘을 비추는(燭) 빛이다.
●開福寧; 도녕(道寧; ?-1113)이니 송대 양기파승. 흡계(안휘 흡현) 왕씨. 장산에서 출가했고 오조법연(五祖法演)의 법을 이었음. 천녕사 제1좌에 임명되었음. 대관 3년(1109) 담주(호남) 개복선사(開福禪寺)에 거주했으며 제19세가 됨. 정화 3년에 시적했음. 저서에 개복녕선사어록 2권이 있음 [연등회요16. 오등회원19].
●五祖演; 법연(法演; ?-1104)이니 북송 양기파승. 면주 파서(巴西; 사천 면양) 사람이며 속성은 등(鄧). 나이 35에 비로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음. 성도(成都)에 유학(遊學)하여 백법(百法)과 유식(唯識) 여러 논을 익히며 그 오의(奧義)를 연구했음. 후에 백운수단선사(白雲守端禪師)에게 투신해 참구하며 정근(精勤)했으며 드디어 휑하게 철오(徹悟)했고 인가(印可)를 받았음. 이윽고 명령에 의해 분좌(分座)하여 내중(來衆)에게 개시(開示)했음. 처음엔 사면산(四面山)에 주(住)했고 뒤에 백운산(白雲山)으로 돌아와 옮겼음. 다음에 태평(太平)에 주(住)했고 다음에 해회(海會)에 주(住)했고 다시 기주(蘄州) 오조산(五祖山; 東山) 동선사(東禪寺)로 옮겼음. 휘종(徽宗) 숭녕 3년 6월 25일에 상당하여 대중에게 고별하고 머리를 세정(洗淨)하고 몸을 씻고 시적했으니 나이는 80 남짓. 세칭이 오조법연(五祖法演)임. 법사(法嗣)가 파다(頗多)하지만 불안청원(佛眼淸遠)ㆍ태평혜근(太平慧懃)ㆍ원오극근(圜悟克勤)이 가장 저명하여 법연하(法演下)의 3불(佛)이란 칭호가 있음 [법연선사어록서. 오등회원19. 연등회요16. 석씨계고략4].
●高上; 의지(意志)가 높고 기상(氣像)이 높은(昂) 모양.
●堂司; 선림 6지사(知事)의 하나. 또 유나(維那)로 지음. 승당에서 지도의 책무를 진 승인. 유나의 거실을 일컬어 유나료라 하고 또 당사(堂司)로 일컬음. 유나의 아래 여러 잡역의 일을 관장하는 이를 일컬어 당사행자라 하며 약칭이 당행임. 또 계랍패에 곧 승중의 계랍을 기재한 당사 계랍의 패를 당사패로 일컬음 [백장청규4당사특위신구시자다탕조. 선원청규1괘탑조. 상기전직위류].
●雪屈; 설(雪)은 씻음임. 제거함임. 예컨대(如) 설구(雪仇)ㆍ설한(雪恨).
●月菴果; 선과(善果; 1079-1152)니 송대 양기파승. 호는 월암(月庵)이며 연산(지금 강서에 속함) 여씨. 어릴 적에 칠보원 원협에게 의지해 하발(下髮)했음. 유방(遊方)하다가 아호에 이르러 두 동자의 희롱하는 말을 듣다가 성찰이 있었으며 개복도녕(開福道寧)의 법을 이었음. 도오ㆍ복엄에서 출세했고 민중(閩中)의 황벽 및 동서선(東西禪)으로 옮겼으며 만년에 대위에 거주했음 [연등회요17. 보등록17. 오등회원20].
●陸沈; 육지에서 물이 없는데 침몰함. 장자 즉양(則陽). 방차(方且; 또한) 세상과 위배하면서 마음에 그들과 함께함을 달갑게 여기지 않나니 이는 육침(陸沈)한 자이다. 주(注)에 이르되 인중(人中)의 은자(隱者)는 물 없이 침몰함에 비유한다. 곧 육침은 바로 은자를 말함이다.
●圓悟; 극근(克勤; 1063-1135)이니 또 극근(克懃)으로 지음. 송대 양기파승. 사천 숭녕(崇寧) 사람이며 속성은 낙이며 자는 무착. 어릴 적에 묘적원에서 자성에게 의지해 출가했고 구족계를 받은 후에 성도(成都)에서 원명에게 의지해 경론을 학습했음. 후에 오조산에 이르러 법연(法演)을 참알해 그의 인증을 받았음. 불감혜근(佛鑑慧懃)ㆍ불안청원(佛眼淸遠)과 더불어 이름이 가지런해 세상에 연문(演門; 法演門下)의 이근일원(二勤一遠)의 칭호가 있으며 총림의 삼걸(三傑)이란 명예를 입었음. 숭녕(1102-1106) 중 성도 소각사(昭覺寺)에서 개법했음. 정화 초년(1111) 형주에 이르러 당세(當世)의 명사(名士)인 장무진을 예알해 그와 더불어 화엄의 요지(要旨) 및 선문의 종취(宗趣)를 담론했음. 다시 예주자사의 청을 받아 협산의 영천선원에 주지하다가 다시 도림으로 이사했음. 때에 추밀(樞密) 등자상의 주청(奏請)으로 인해 자복(紫服)과 및 불과선사(佛果禪師)란 호를 칙령으로 주었음. 정화(1111-1117) 중에 조칙(詔勅)을 받들어 금릉의 장산(蔣山)으로 이주했고 다음에 천녕의 만수(萬壽)에 거주하면서 종풍을 크게 진작(振作)했음. 후에 금산에 거주했는데 고종이 양주에 거둥했을 때 그를 불러 입대(入對. 궁에 들어가 마주함)했으며 원오(圜悟)란 호를 주었으니 세칭이 원오극근(圜悟克勤)임. 후에 성도 소각사로 돌아갔으며 소흥 5년에 시적했으니 나이는 73이며 시호는 진각선사(眞覺禪師). 제자에 대혜종고ㆍ호구소륭 등의 선문의 용상(龍象)이 있음. 일찍이 협산의 벽암(碧巖)에서 설두중현의 송고(頌古) 100칙을 모아 벽암록 10권을 편성했는데 세칭이 선문제일서(禪門第一書)임. 이 밖에 원오불과선사어록 20권이 있음 [대혜보각선사년보. 승보정속전4. 가태보등록11. 불조역대통재30. 석씨계고략4].
●成褫; 선림보훈순주1. 치(褫) 음이 지니 이것을 성취함이다.
●末後句; 말후일구(末後一句)니 이르자면 철저히 대오한 극처(極處)에 이르러 말하는 바의 지극한 말이니 다시 기타의 어구가 능히 초월함이 없는 것.
●的的; 확실. 진실. 적(的)은 실(實)임.
●斗間劍氣; 조정사원3. 사우두(射斗牛) 진서(36) 뇌환(雷煥)은 천문(天文)을 잘했다. 장화(張華)가 두우(斗牛; 北斗星과 牽牛星) 사이를 보매 늘 이기(異氣)가 있음으로 인하여 이에 뇌환을 불러 밤에 등루(登樓)하여 앙시(仰視)했다. 뇌환이 가로되 제(僕은 自謙辭)가 그것을 살핀 지 오래되었습니다. 곧 보검의 정기(精氣)가 하늘에 오른 것인데 예장(豫章)의 풍성현(酆城縣) 경계에 있습니다. 장화가 이에 뇌환을 천거해 풍성령(酆城令)이 되게 했다. 뇌환이 이르러 뇌옥(牢獄)을 수리하면서 기저(基底)를 파다가 석갑(石匣)을 얻었는데 쌍검이 있었고 빛이 매우 곱게 빛났다. 시켜 보내어 한 개는 장공(張公)에게 주고 한 개는 스스로 찼다. 장화가 뒤에 주살(誅殺)을 입었고 검은 드디어 잃어버렸다. 뇌환이 죽고 아들이 주(州)의 종사(從事)가 되었다. 아버지의 검을 차고 연평(延平)으로 가는데 허리 사이에서 홀연히 도약해 물에 떨어졌다. 사람을 시켜 그곳에 투입했는데 단지 두 마리의 용의 길이가 몇 장(丈)이며 번쩍거리며(燔은 사를 번. 瑩은 밝을 형) 문장(文章; 무늬)이 있음이 보였다. 투입된 자가 두려워하며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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