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태화선학대사전 10책(ㅎ)

국역태화선학대사전(國譯泰華禪學大辭典) 10책(ㅎ) 435쪽

태화당 2019. 12. 29. 09:52

慧忠】 ①(682-769) 又作惠忠 唐代牛頭宗僧 潤州(江蘇)上元人 俗姓王 二十三歲時 受業於莊嚴寺 隨侍金陵牛頭山六世智威之左右 竝嗣其法 後辭智威 行脚諸方 後居止延祚寺 平素生活 僅一鉢一衲 樸實謹嚴 曾應請住莊嚴舊寺 一時四方學侶雲集會下 嗣法者多達三四十人 大曆四年六月示寂 世壽八十七 [宋高僧傳十九 傳燈錄四 五燈會元二] (?-775) 又作惠忠 唐代僧 浙江諸曁人 俗姓冉 自幼學佛 初習戒律 長通經論 聞六祖慧能大師之名 卽踰嶺叩謁 獲其心印 而入南陽白崖山黨子谷(白草谷) 靜坐長養 四十餘年足不出山 而學者就之 恆逾百千 開元年中 玄宗欽其道譽 迎赴京師 敕住龍興寺 未久逢安史之亂 師乃遁歸 肅宗上元二年(761) 再召赴京 住千福寺西禪院 公卿士庶參叩求法 不捨晝夜 代宗繼位 優禮有加 遷住光宅寺 後歸南陽 於大曆十年在黨子谷示寂 年壽當在八十以上 諡號大證禪師 世稱南陽慧忠 南陽國師 [宋高僧傳九 傳燈錄五 傳法正宗記七] (817-882) 唐代曹洞宗僧 泉州(福建)僊遊人 姓陳 九歲(一說十五歲)時 依泉州龜洋山無了出家 後在襄州(湖北)龍興寺受具足戒 師曾參遊諸方 後參廬陵之草庵法義(良价下二世) 竝嗣其法 再歸龜洋山時 適値會昌法難 受迫還俗而逃難 中和二年示寂 世壽六十六 黃瑫爲之撰碑銘 門徒爲之建東塔 與其師龜洋無了之西塔相望 此外 師之法系傳承 諸禪籍中 各有異說 [傳燈錄二十三 五燈會元十四 五燈嚴統十四] 宋代黃龍派僧 號毬堂 居福州雪峰 嗣法雪峰有需 [五燈會元十八 續傳燈錄三十]

혜충(慧忠) (682-769) 또 혜충(惠忠)으로 지음. 당대 우두종승. 윤주(潤州; 강소) 상원 사람이며 속성은 왕. 23세 시 장엄사에서 수업(受業)했음. 금릉 우두산 6세 지위(智威)의 좌우를 수시(隨侍)했고 아울러 그의 법을 이었음. 후에 지위에게 고별하고 제방에 행각했고 후에 연조사(延祚寺)에 거지(居止)했음. 평소 생활이 다만 11(一鉢一衲)이었고 박실(樸實; 質樸하고 성실)하고 근엄(謹嚴)했음. 일찍이 요청에 응해 장엄구사(莊嚴舊寺)에 주()하자 일시에 사방의 학려(學侶)가 회하에 운집했고 법을 이은 자가 많기로는 3, 4십 인에 달했음. 대력 46월 시적했고 세수는 87 [송고승전19. 전등록4. 오등회원2]. (?-775) 또 혜충(惠忠)으로 지음. 당대승. 절강(浙江) 제기(諸曁)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염(). 어릴 적부터 불법을 배웠으며 처음엔 계율을 학습하고 장성(長成)하자 경론(經論)을 통달했음. 6조 혜능대사(慧能大師)의 명성(名聲)을 듣고 곧 재를 넘어 고알(叩謁)하여 그의 심인(心印)을 얻었음. 남양(南陽)의 백애산(白崖山) 당자곡(黨子谷; 白草谷)에 들어가 정좌(靜坐)하며 장양(長養)했는데 40여 년 동안 발이 산을 벗어나지 않았음. 학자들이 그에게 나아갔는데 늘 백천(百千)을 넘었음. 개원년(開元年) 중에 현종(玄宗)이 그의 도예(道譽)를 흠모(欽慕)하여 맞이해 경사(京師)에 다다랐으며 칙명(勅命)으로 용흥사(龍興寺)에 주()했음. 오래지 않아 안사(安史)의 난()을 만나 스님이 이에 둔귀(遁歸; 달아나 회귀)했음. 숙종(肅宗) 상원(上元) 2(761) 다시 불러 경사(京師)에 다다랐고 천복사(千福寺) 서선원(西禪院)에 주()했음. 공경(公卿)과 사서(士庶)가 참고(參叩)하며 구법(求法)했는데 주야를 놓치지 않았음. 대종(代宗)이 계위(繼位)하자 우례(優禮)를 더함이 있었으며 광택사(光宅寺)로 천주(遷住)했음. 후에 남양(南陽)으로 돌아갔다가 대력(大曆) 10년 당자곡(黨子谷)에 있으면서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응당 80 이상(以上)에 있음. 시호(諡號)는 대증선사(大證禪師)며 세칭이 남양혜충(南陽慧忠)ㆍ남양국사(南陽國師) [송고승전9. 전등록5. 전법정종기7]. (817-882) 당대 조동종승. 천주(泉州; 복건) 선유 사람이며 성은 진. 9(一說15) 때 천주 귀양산(龜洋山) 무료(無了)에게 의지해 출가했고 후에 양주(襄州; 호북) 용흥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음. 스님이 일찍이 제방을 참유(參遊)했고 후에 여릉의 초암법의(草庵法義; 양개하 2)를 참했고 아울러 그의 법을 이었음. 다시 귀양산으로 회귀했을 때 마침 회창법난(會昌法難)을 만났고 환속(還俗)의 핍박을 받자 도난(逃難)했음. 중화 2년 시적했고 세수(世壽)66. 황도(黃瑫)가 그를 위해 비명을 지었고 문도들이 그를 위해 동탑(東塔)을 건립하여 그의 스승 귀양무료의 서탑과 상망(相望)하게 했음. 이 밖에 스님의 법계(法系)의 전승(傳承)에 여러 선적(禪籍) 중 각기 이설(異說)이 있음 [전등록23. 오등회원14. 오등엄통14]. 송대 황룡파승. 호가 구당이며 복주 설봉에 거주했고 설봉유수(雪峰有需)의 법을 이었음 [오등회원18. 속전등록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