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록

전등록 권15 덕산선감(德山宣鑒)-영규선사(令珪禪師)

태화당 2025. 10. 5. 11:12

景德傳燈錄卷第十五

 

吉州靑原山行思禪師法嗣

第四世一十七人

澧州龍潭崇信禪師法嗣二人

朗州德山宣鑒禪師 1364

洪山泐潭寶峯和尙已上二人見錄1374

吉州性空禪師法嗣二人

歙州茂源和尙 1375

棗山光仁禪師已上二人見錄1375

京兆翠微無學禪師法嗣五人

鄂州淸平山令遵禪師 1376

舒州投子山大同禪師 1381

湖州道場山如訥禪師 1399

建州白雲約禪師已上四人見錄1401

伏牛山元通禪師一人無機緣語句不錄

潭州道吾山圓智禪師法嗣三人

潭州石霜山慶諸禪師 1402

潭州漸源仲興禪師 1409

祿淸和尙已上三人見錄1410

潭州雲巖曇晟禪師法嗣四人

筠州洞山良价禪師 1411

涿州杏山鑒洪禪師 1434

潭州神山僧密禪師 1435

幽谿和尙已上四人見錄1436

華亭船子德誠禪師法嗣一人

澧州夾山善會禪師一人見錄 1437

第五世上一十四人

舒州投子山大同禪師法嗣一十三人

第二世投子溫禪師 1445

福州牛頭微禪師 1445

西川香山澄照大師 1447

陿府天福和尙 1447

濠州思明和尙 1447

鳳翔府招福和尙 1448

興元中梁山遵古禪師 1448

襄州谷隱和尙 1449

安州九嵕山和尙 1450

幽州盤山第二世和尙 1450

九嵕山敬慧禪師 1451

東京觀音院巖俊禪師已上一十二人見錄 1451

桂陽龍福眞禪師一人無機緣語句不錄

鄂州淸平山令遵禪師法嗣一人

蘄州三角山令珪禪師一人見錄1453

 

行思禪師第四世

前澧州龍潭崇信禪師法嗣

朗州德山宣鑒禪師 劍南人也 姓周氏 丱歲出家依年受具 精究律藏 於性相諸經貫通旨趣 常講金剛般若 時謂之周金剛 厥後訪尋禪宗 因謂同學曰 一毛吞海海性無虧 纖芥投鋒鋒利不動 學與無學唯我知焉 因造龍潭信禪師 問答皆一語而已前章出之 師卽時辭去 龍潭留之 一夕於室外默坐 龍問 何不歸來 師對曰黑 龍乃點燭與師 師擬接 龍便吹滅 師乃禮拜 龍曰 見什麽 曰從今向去 不疑天下老和尙舌頭也 至明日便發 龍潭謂諸徒曰 可中有一箇漢 牙如劍樹口似血盆 一棒打不迴頭 他時向孤峯頂上立吾道在

性相; 漢語大字典 性 佛敎名詞 與相相對 指事物的本質 相 佛敎名詞 對性而言 佛敎把一切事物外現的形象狀態 稱之爲相

牙如劍樹口似血盆; 形容如羅刹夜叉等凶惡可怕之相

 

낭주(朗州) 덕산선감(德山宣鑒) 선사. 검남(劍南) 사람이며 성이 주씨(周氏). 관제(丱歲; 童年)에 출가했고 나이에 의해 수구(受具)했다. 율장(律藏)을 정밀히 연구했고(精究). 성상(性相)의 제경(諸經)에 지취(旨趣)를 관통(貫通)했다. 늘 금강반야를 강설했고 당시에 주금강(周金剛)이라 일컬었다. 그 후(厥後) 선종을 방심(訪尋)했고 인하여 동학(同學)에게 일러 가로되 일모(一毛)가 바다를 삼켜도 바다의 자성은 이지러짐()이 없고 섬개(纖芥)를 칼날()에 던져도 칼날의 예리함은 움직이지 않는다. ()과 무학(無學)을 오직 내가 안다. 인하여 용담신(龍潭信) 선사에게 나아갔다. 문답은 모두 일어(一語)일 따름이었다前章에 나왔다. 스님이 즉시(卽時) 고별하고 떠나는데 용담이 머물게 했다(留之). 어느 날 저녁(一夕) 실외(室外)에 묵좌(默坐)했는데 용담이 묻되 왜 돌아오지(歸來) 않느냐. 스님이 대답해 가로되 칠흑(漆黑; )입니다. 용담이 이에 점촉(點燭; 초에 불을 붙이다)하여 스님에게 주었다. 스님이 접수하려고 하자 용담이 바로 불어 껐다(). 스님이 이에 예배했다. 용담이 가로되 무엇을 보았느냐. 가로되 지금으로 좇아 향거(向去)하면서 천하 노화상의 설두(舌頭)를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명일에 이르자 바로 떠났다(). 용담이 여러 도중(徒衆)에게 일러 가로되 가중(可中; 當中)1개의 사내()가 있어 이빨은 검수와 같고 입은 혈분과 같아서(牙如劍樹口似血盆) 한 방() 때려도 머리를 돌리지 않으리니 다른 때 고봉정상(孤峯頂上)으로 향해 가서 나의 도를 세울 것이다.

性相; 한어대자전 성() 불교의 명사다. ()과 상대되며 사물의 본질을 가리킨다. () 불교의 명사다. ()을 상대해 말함이니 불교는 일체 사물의 밖으로 나타난 형상과 상태를 잡아 상()이라고 일컫는다.

牙如劍樹口似血盆; 라찰(羅刹)과 야차(夜叉) 등과 같이 흉악하고 가히 두려운 형상을 형용함.

 

師抵于潙山 從法堂西過東 迴視方丈 潙山無語 師曰 無也無也 便出至僧堂前乃曰 然雖如此不得草草 遂具威儀上再參 才跨門提起坐具喚曰 和尙 潙山擬取拂子 師喝之揚袂而出 潙山晩間問大衆 今日新到僧何在 對曰 那僧見和尙了 更不顧僧堂便去也 潙山問衆 還識遮阿師也無 衆曰 不識 潙曰 是伊將來有把茅蓋頭 罵佛罵祖去在 師住澧陽三十年 屬唐武宗廢敎 避難於獨浮山之石室 大中初武陵太守薛廷望 再崇德山精舍 號古德禪院相國裴休題額見存將訪求哲匠住持 聆師道行屢請不下山 廷望乃設詭計 遣吏以茶鹽誣之言犯禁法 取師入州瞻禮 堅請居之 大闡宗風總印禪師開山創院 鑒卽第二世住也

草草; 草 草率 簡略 不精也

把茅蓋頭; 指禪僧住持寺院 禪林寶訓音義 把茅 出世爲人而結菴 乃草菴也

哲匠; 宗匠 禪匠

詭計; 欺詐的計謀

 

스님이 위산(潙山)에 다다라 법당의 서쪽으로부터 동쪽에 이르고()는 방장(方丈)을 돌아보았다. 위산이 말이 없었다. 스님이 가로되 없구나, 없구나. 곧 나가서 법당 앞에 이르러 이에 가로되 그러하여 비록 이와 같으나 초초(草草)함을 얻어서는 안된다. 드디어 위의를 갖추고 올라가 다시 참했다. 겨우 문을 넘자() 좌구를 제기(提起)하고 불러 가로되 화상. 위산이 불자를 취하려 하자 스님이 그것을 할()하고 소매를 날리며(揚袂) 나갔다. 위산이 만간(晩間; 저녁 무렵)에 대중에게 묻되 금일의 신도승(新到僧)이 어디에 있느냐. 대왈(對曰) 그 중(那僧)은 화상을 상견해 마치자 다시 법당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갔습니다. 위산이 대중에게 묻되 도리어 이() 아사(阿師; 스님)를 아느냐, 또는 아니냐(). 대중이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위산이 가로되 이 그()는 장래에 파모개두(把茅蓋頭)함이 있으면 매불매조(罵佛罵祖)하여 가리라(去在; 는 조사). 스님이 예양(澧陽)에 거주한 지 30년이었는데 당 무종(武宗)의 폐교(廢敎)에 당해() 독부산(獨浮山) 석실에서 피난(避難)했다. 대중(大中; 847-860) 초 무릉태수(武陵太守) 설정망(薛廷望)이 덕산정사(德山精舍)를 다시 세우고(; . 建立) 호를 고덕선원(古德禪院)이라 했다相國 裴休題額見存한다. 이에() 철장(哲匠)의 주지(住持)를 방구(訪求)하다가 스님의 도행(道行)을 듣고() 누청(屢請)했으나 하산(下山)하지 않았다. 정망(廷望)이 이에 궤계(詭計)를 시설했으니 관리를 보내어 다염(茶鹽)으로써 속이고() 금법(禁法)을 범했다고 말하면서 스님을 취해 입주(入州)케 하여 첨례(瞻禮)했다. 견고하고 청해 거주했고 종풍을 크게 열었다()總印禪師開山하고 創院했으니 은 곧 第二世住.

草草; ()는 초솔(草率; 거칠고 엉성함)ㆍ간략ㆍ부정(不精).

把茅蓋頭; 선승이 사원에 주지함을 가리킴. 선림보훈음의. 파모(把茅) 출세하여 사람을 위하면서 결암(結菴)함이니 곧 초암(草菴)이다.

哲匠; 종장(宗匠). 선장(禪匠).

詭計; 기사(欺詐)의 계모(計謀).

 

師上堂謂衆曰 於己無事則勿妄求 妄求而得亦非得也 汝但無事於心無心於事 則虛而靈空而妙 若毛端許言之本末者皆爲自欺 毫氂繫念三塗業因 瞥爾生情萬劫羇鎖 聖名凡號盡是虛聲 殊相劣形皆爲幻色 汝欲求之得無累乎 及其厭之又成大患 終而無益 師上堂曰 今夜不得問話 問話者三十拄杖 時有僧出方禮拜 師乃打之 僧曰 某甲話也未問 和尙因什麽打某甲 師曰 汝是什麽處人 曰新羅人 師曰 汝未跨船舷時 便好與三十拄杖法眼云 大小德山 話語作兩橛 玄覺云 叢林中喚作隔下語且從 只如德山道問話者三十拄杖意作麽生

毫氂; 同毫釐 氂 量詞 後作釐 玄應音義三 十毫曰氂 今皆作釐

三塗; 同三途 慧琳音義三十四 三塗 又作途𨑒二形 同達胡反 言三塗者 俗書春秋有三塗危險之處 借此爲名 塗猶道也 非謂塗炭之義 若依梵本 則云何波那伽低 此云惡趣 不名惡道 道是因義 由履而行 趣是果名 已到之處 故不名惡道也

話作兩橛; 謂前後話語自相矛盾

 

스님이 상당하여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자기에 무사(無事)하면 곧 망구(妄求; 허망하게 구하다)하지 말아라. 망구(妄求)하여 얻으면 또한 얻음이 아니다. 너희가 단지 마음에 무사(無事)하고 일에 무심(無心)하면 허()하면서 영()하고 공()하면서 묘()하려니와 만약 털끝(毛端) 만큼이라도() 본말(本末)을 말하는 자는 모두 스스로 속임()이 된다. 호리(毫氂)라도 생각에 묶이면 3(三塗)의 업인(業因)이며 별안간(瞥眼間; 瞥爾) 뜻을 내면 만겁(萬劫)의 기쇄(覊鎖; 굴레와 쇠사슬)니라. 성명(聖名)과 범호(凡號)가 다 이 헛소리며 수상(殊相)과 열형(劣形)이 모두 환색(幻色)이 된다. 너희가 구하여 무루(無累)를 얻고자 하느냐. 그 싫어함에 이르면() 또 대환(大患)을 이루어 마침내 무익(無益)하다. 스님이 상당하여 가로되 오늘 밤은 문화(問話)함을 얻지 못한다. 문화하는 자(問話者)30주장(拄杖)이다. 때에 어떤 중이 나와 바야흐로 예배하는데 스님이 곧 때렸다. 승왈(僧曰) 모갑은 화도 또한 묻지 않았거늘 화상은 무엇 때문에 모갑을 때립니까. 사왈(師曰) 너는 이 어느 곳의 사람이냐. 가로되 신라 사람입니다. 사왈 네가 뱃전(船舷)에 걸터앉지 않은 때 바로 좋이 30주장(拄杖)을 주었겠다法眼이 이르되 大小 德山이 화를 두 말뚝으로 지었다(話作兩橛; 를 저본에 로 지었음). 玄覺이 이르되 叢林 中에서 隔下語로 불러 지음은 다만 좇거니와 只如 덕산이 말한 問話 하는 三十拄杖이라 한 뜻이 무엇인가(作麽生).

毫氂; 호리(毫釐)와 같음. ()는 양사니 후에 리()로 지었음. 현응음의3. 10()를 가로되 리(). 지금은 모두 리()로 짓는다.

三塗; 삼도(三途)와 같음. 혜림음의34. 3() 또 도도(途𨑒) 2()으로 짓는다. 한가지로 달호반(達胡反; )이다. 말한 3()란 것은 속서(俗書) 춘추에 3()의 위험한 곳이 있다 했는데 이것을 빌려 이름했다. ()는 도()와 같다. 도탄(塗炭)의 뜻을 이름이 아니다. 만약 범본(梵本)에 의하자면 곧 어찌하여 파나가저(波那伽低)인가 하면 여기에선 이르되 악취(惡趣)다 했으니 이름이 악도(惡道)가 아니다. ()는 이 인()의 뜻이니 밟음으로 말미암아 행함이다. ()는 이 과()의 이름이니 이미 도달한 곳이다. 고로 악도라고 이름하지 않았다.

話作兩橛; 이르자면 전후의 화어(話語)가 스스로 서로 모순됨.

 

有僧到參 師問維那 今日幾人新到 對曰 八人 師曰 將來一時生案著 龍牙問 學人仗鏌鎁擬取師頭時如何 師引頸法眼別云 汝向什麽處下手龍牙曰 頭落也 師微笑 龍牙後到洞山擧前語 洞山曰 德山道什麽 云德山無語 洞山曰 莫道無語 且將德山落底頭呈似老僧 龍牙省過懺謝 有人擧似師 師曰 洞山老人 不識好惡 遮箇漢死來多少時 救得有什麽用處 僧問 如何是菩薩 師打曰 出去莫向遮裏屙 僧問 如何是佛 師曰 佛卽是西天老比丘 雪峯問 從上宗風以何法示人 師曰 我宗無語句 實無一法與人 巖頭聞之曰 德山老人一條脊梁骨硬似鐵拗不折 然雖如此於唱敎門中猶較些子保福拈問招慶 只如巖頭出世有何言敎過於德山 便恁麽道 慶云 汝不見巖頭道 如人學射久久方中 福云 中時如何 慶云 展闍黎莫不識痛痒 福云 和尙今日非唯擧話 慶云 展闍黎是什麽心行 明招云 大小招慶錯下名言

生案著; 同生著 又作生按過 謂試驗對方(多爲學人)悟道之深淺

鏌鎁; 又作鏌邪 莫邪 古代之名劍名 莫邪乃吳(一說楚 或謂韓)之著名鑄劍匠干將之妻 夫妻二人爲協助吳王闔閭 遂鑄陰陽二劍 陽劍稱干將 陰劍稱莫邪 於禪林中 鏌鎁劍轉指自身本來具有之智慧 或師家自由自在接化學人之般若智見

脊梁骨; 脊柱 用以比喩人的志氣和精神力量 亦比喩人的節操

招慶; 當作慧稜 與保福從展同嗣雪峰義存 宗門拈古彚集二十三作長慶稜

 

어떤 중이 도참(到參)하자 스님이 유나(維那)에게 묻되 금일 몇 사람이 신도(新到)했는가. 대왈(對曰) 8인입니다. 사왈(師曰) 가져와서(將來) 일시(一時)에 생안착(生案著)하라. 용아(龍牙)가 묻되 학인이 막야검(鏌鎁)을 가지고() 스님의 머리를 취하려고 할 때 어떻습니까. 스님이 목을 늘어뜨렸다()法眼別云 네가 어느 곳을 향해 下手하겠는가. 용아가 가로되 머리가 떨어졌습니다. 스님이 미소했다. 용아가 후에 동산(洞山)에 이르러 전어(前語)를 들자 동산이 가로되 덕산이 무어라고 말하더냐. 이르되 덕산은 말이 없었습니다. 동산이 가로되 말이 없었다고 말하지 말고 다만() 덕산의 떨어진 머리를 가져다 노승에게 정사(呈似; 보여주다)하라. 용아가 허물을 성찰하고 참사(懺謝; 참회하며 사과)했다. 어떤 사람이 스님에게 들어 보이자 사왈 동산 노인이 호오(好惡)를 알지 못한다. 저개한(遮箇漢; 이 자)은 죽은 지 다소의 시일이다(死來多少時). 구득(救得)한들 무슨 용처(用處)가 있으랴. 승문(僧問) 무엇이 이 보살입니까. 스님이 때리고 가로되 나가거라. 이 속을 향해 똥누지 말아라. 승문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사왈 부처는 즉시(卽是) 서천(西天)의 늙은 비구다. 설봉이 묻되 종상(從上)의 종풍(宗風)은 무슨 법으로써 사람에게 보입니까. 사왈 나의 종()은 어구(語句)가 없나니 실로 일법(一法)도 사람에게 줌이 없다. 암두(巖頭)가 이를 듣고 가로되 덕산 노인은 일조(一條)의 척량골(脊梁骨)이 쇠와 같이 강경(强硬)하여 꺾어도() 부러지지() 않았다. 그러하여 비록 이와 같지만 창교문(唱敎門) 중에서 오히려 조금은 상당하다(較些子)保福하여 招慶에게 묻되 只如 암두가 출세하여 어떤 言敎가 덕산을 초과함이 있어 바로 이렇게 말했는가. 초경이 이르되 네가 보지 못했는가, 암두가 말하되 사람이 學射함과 같나니 久久해야 비로소 的中한다. 보복이 이르되 적중한 때 어떠한가. 초경이 이르되 展闍黎痛痒을 알지 못하지 않는가. 보복이 이르되 화상이 금일 오직 擧話함 만이 아니었다. 초경이 이르되 展闍黎, 이 무슨 心行인가. 명초(明招; 저본에 明昭로 지었음)가 이르되 大小 招慶名言錯下했다.

生案著; 생안착()과 같음. 또 생안과(生按過)로 지음. 이르자면 상대방(다분히 학인이 됨)의 오도의 심천을 시험함임.

鏌鎁; 또 막야(鏌邪)ㆍ막야(莫邪)로 지음. 고대의 명검의 이름. 막야(莫邪)는 곧 오(; 일설엔 , 혹은 이르기를 )의 저명한 주검장(鑄劍匠)인 간장(干將)의 처임. 부처(夫妻) 2인이 오왕 합려(闔閭)에게 협조하여 드디어 음양 2검을 주조했는데 양검(陽劍)은 명칭이 간장(干將)이었고 음검은 명칭이 막야였음. 선림 중에서 막야검은 전()하여 자신이 본래 갖추어 있는 지혜, 혹은 사가가 자유자재하게 학인을 접화(接化)하는 반야의 지견을 가리킴.

脊梁骨; 척주(脊柱; 등골뼈)니 사람의 지기(志氣)와 정신의 역량의 비유로 사용함. 또한 사람의 절조(節操)에 비유함.

招慶; 마땅히 혜릉(慧稜)으로 지어야 함. 보복종전(保福從展)과 더불어 설봉의존(雪峰義存)을 동사(同嗣)했음. 종문염고휘집23에 장경릉(長慶稜; 慧稜)으로 지었음.

 

師尋常遇僧到參 多以拄杖打 臨濟聞之遣侍者來參 敎令德山若打汝但接取拄杖當胸一拄 侍者到方禮拜 師乃打 侍者接得拄杖與一拄 師歸方丈 侍者迴擧似臨濟 濟云 後來疑遮箇漢巖頭云 德山老人尋常只據目前一箇杖子 佛來亦打祖來亦打 爭奈較些子 東禪齊云 只如臨濟道我從前疑遮漢 是肯底語不肯語 爲當別有道理 試斷看師上堂曰 問卽有過不問又乖 有僧出禮拜 師便打 僧曰 某甲始禮拜 爲什麽便打 師曰 待汝開口堪作什麽 師令侍者喚義存卽雪峯也存上來 師曰 我自喚義存 汝又來作什麽 存無對 師見僧來乃閉門 其僧敲門 師曰 阿誰 曰師子兒 師乃開門 僧禮拜 師便騎項曰 遮畜生什麽處去來 雪峯問 古人斬猫兒意如何 師乃打趁 却喚曰 會麽 峯曰 不會 師曰 我恁麽老婆也不會 僧問 凡聖相去多少 師便喝 師因疾有僧問 還有不病者無 師曰有 曰如何是不病者 師曰 阿邪阿邪 師復告諸徒曰 捫空追響 勞汝心神 夢覺覺非 竟有何事 言訖安坐而化 卽唐咸通六年乙酉十二月三日也 壽八十六 臘六十五 勅諡見性大師

阿邪; 亦作阿耶 阿哪 病患者的呻吟聲 呼痛聲

 

스님이 심상(尋常)에 중이 이르러 참()함을 만나면 다분히 주장자로써 때렸다. 임제(臨濟)가 이를 듣고 시자를 보내어 내참(來參)하게 하되 덕산이 만약 너를 때리거든 단지 주장자를 접취(接取)하여 당흉(當胸)해 한 번 버티게() 했다. 시자가 이르러 바야흐로 예배하는데 스님이 이에 때렸다. 시자가 주장자를 접득(接得)하자 한 번 버티어 주었다. 스님이 방장으로 돌아갔다. 시자가 돌아와() 임제에게 들어 보이자 임제가 이르되 후래(後來)에 저개한(遮箇漢; 이 자)을 의심하리라巖頭가 이르되 덕산 노인이 尋常에 다만 목전의 1개 주장자에 기대어() 이 와도 또한 때리고 가 와도 또한 때리더니 些子 어긋났음을 어찌하겠는가. 東禪齊(道齊)가 이르되 只如 臨濟가 말한 從前遮漢을 의심했다 함은 이 수긍하는 말인가, 수긍하지 않는 말인가. 마땅히 별다른 도리가 있음이 되는가. 시험 삼아 판단해 보아라. 스님이 상당해 가로되 물으면 곧 허물이 있고 묻지 않으면 또 어긋난다(). 어떤 중이 나와 예배했다. 스님이 바로 때렸다. 승왈(僧曰) 모갑은 비로소 예배하거늘 무엇 때문에 바로 때립니까. 사왈 너의 입 엶을 기다려 차마 무엇하겠는가. 스님이 시자를 시켜 의존(義存)雪峯이다을 불렀다. 의존이 올라오자 사왈 내가 스스로 의존을 불렀거늘 네가 또 와서 무엇하려느냐. 의존이 대답이 없었다. 스님이 중이 옴을 보자 이에 문을 닫았다. 그 중이 문을 두드리자 사왈 누구인가(阿誰). 가로되 사자아(師子兒)입니다. 스님이 이에 문을 열었다. 중이 예배하자 스님이 바로 목을 타고() 가로되 이() 축생(畜生), 어느 곳에 갔다 왔느냐. 설봉이 묻되 고인이 고양이(猫兒)를 벤 뜻이 무엇입니까. 스님이 이에 때려 쫓았다가 도리어 부르며 가로되(; 저본에 로 지었음) 아느냐. 설봉이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사왈 내가 이렇게(恁麽) 노파(老婆; 노파심)거늘 또한 알지 못하느냐. 승문(僧問) 범성(凡聖)이 서로 떨어짐이 얼마입니까. 스님이 바로 할()했다. 스님이 질병으로 인해 어떤 중이 묻되 도리어 병들지 않는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왈 있다. 가로되 무엇이 이 병들지 않는 자입니까. 사왈 아야(阿邪), 아야. 스님이 다시 여러 도중(徒衆)에게 고()해 가로되 허공을 더듬고 곡향(谷響)을 쫓아감(捫空追響)은 너희의 심신(心神)을 노고롭게 하나니 꿈과 깸이 그른 줄 깨달으면(夢覺覺非) 필경에 무슨 일이 있으랴. 말을 마치자 안좌(安坐)하여 화(; 죽음)했다. 곧 당 함통(咸通) 6년 을유(乙酉; 865) 123일이다. 나이는 96이며 납은 65며 칙시가 견성대사(見性大師).

阿邪; 또 아야(阿耶)ㆍ아나(阿哪)로 지음. 병환자의 신음 소리며 통증을 호소(呼訴)하는 소리임.

 

洪州泐潭寶峯和尙 有僧新到 師謂曰 其中事卽易道 不落其中事始終難道 僧曰 某甲在途時 便知有此一問 師曰 更與二十年行脚也不較多 曰莫不契和尙意麽 師曰 苦瓜那堪待客 師問僧 古人有一路接後進初心 汝還知否 曰請師指出古人一路 師曰 恁麽卽闍梨知了也 曰頭上更安頭 師曰 寶峯不合問仁者 曰問又何妨 師曰 遮裏不曾有人亂說道理出去

 

홍주(洪州) 늑담(泐潭) 보봉화상(寶峯和尙). 어떤 중이 신도(新到)하자 스님이 일러 가로되 그 중의 일(其中事)은 곧 말하기 쉽지만 그 중의 일에 떨어지지 않음은 시종(始終) 말하기 어렵다. 승왈(僧曰) 모갑이 길에 있을 때 바로 이 일문(一問)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사왈(師曰) 다시 20년을 행각하더라도 또한 많이 어긋나지() 않는다. 가로되 화상의 뜻에 계합하지 못한 게 아닙니까. 사왈 쓴 오이(苦瓜)가 어찌 가히() ()을 기다리겠는가. 스님이 중에게 묻되 고인이 일로(一路)가 있어 후진(後進)과 초심(初心)을 접인(接引)했나니 네가 도리어 아느냐. 가로되 청컨대 스님이 고인을 가리켜 내십시오. 사왈 이러하다면 곧 사리(闍梨)가 알아 마쳤다. 가로되 두상(頭上)에 다시 안두(安頭; 머리를 안치)하셨습니다. 사왈 보봉(寶峯)이 인자(仁者)에게 물음이 합당하지 않았다. 가로되 물은들 또 무엇 방애(妨礙)되겠습니까. 사왈 이 속에선 일찍이 도리를 난설(亂說)하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나가거라.

 

前吉州性空禪師法嗣

歙州茂源和尙 平田來參 師欲起身 平田乃把住曰 開口卽失閉口卽喪 去却恁麽時請師道 師以手掩耳而已 平田放手曰 一步易兩步難 師曰 有什麽死急 平田曰 若非此箇師 不免諸方點檢

 

흡주(歙州) 무원화상(茂源和尙). 평전(平田)이 내참(來參)했다. 스님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평전이 이에 파주(把住)하고 가로되 개구(開口)하면 곧 잃고 폐구(閉口)하면 곧 죽나니() 이러함을 제거해버린(去却) 때를 청컨대 스님이 말하라. 스님이 손으로써 귀를 막을 따름이었다. 평전이 손을 놓고 가로되 일보(一步)는 쉽지만 양보(兩步)는 어렵다. 사왈 무슨 사급(死急)함이 있는가. 평전이 가로되 만약 차개(此箇; . 이것)의 스님이 아니었다면 제방의 점검을 면하지 못했으리라.

 

棗山光仁禪師上堂次大衆集 師從方丈出未至禪床 謂衆曰 不負平生行脚眼目 致箇問訊將來 還有麽 方乃升堂坐時 有僧出禮拜 師曰 不負我且從 大衆何也 便歸方丈 翌日有別僧請辨前語意旨如何 師曰 齋時有飯與汝喫 夜後有床與汝眠 一向煎迫我作什麽 僧禮拜 師曰 苦苦 僧曰 請師直指 師乃垂足曰 舒縮一任老僧

煎迫; 緊緊逼迫

 

조산광인(棗山光仁) 선사. 상당하던 차에 대중이 모였다. 스님이 방장으로부터 나와서 선상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평생의 행각안목(行脚眼目)을 저버리지 않고 저() 문신(問訊)하여 가지고 옴에 이르거라(), 도리어 있느냐. 비로소 이에 승당(升堂)하여 앉았을 때 어떤 중이 나와서 예배했다. 사왈(師曰) 나를 등지지 않음(; 여러 선록에 不字가 없음)은 다만 좇겠거니와 대중은 어찌하겠느냐. 바로 방장으로 돌아갔다. 다음날(翌日) 다른 중이 있어 전어(前語)를 분변하기를 청하되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사왈 재시(齋時)에 밥이 있어 너에게 먹게 하고 야후(夜後)에 상()이 있어 너에게 자게 하거늘 일향(一向) 나를 전박(煎迫)하여 무엇하겠느냐. 중이 예배했다. 사왈 괴롭다, 괴롭다. 승왈(僧曰) 스님의 직지(直指)를 청합니다. 스님이 이에 발을 내리고 가로되 펴고 오그림(舒縮)을 노승에게 일임한다.

煎迫; 긴긴(緊緊; 아주 緊急)히 핍박(逼迫).

 

前京兆翠微無學禪師法嗣

鄂州淸平山令遵禪師 東平人也 姓王氏 少依本州北菩提寺 唐咸通六年落髮 後詣滑州開元寺受具攻律學 一旦謂同流曰 夫沙門應決徹死生玄通佛理 若乃孜孜卷軸役役拘文 悉數海沙徒勞片心 遂罷所業遠參禪會 至江陵白馬寺 堂中遇一老宿名曰慧勤 師親近詢請 勤曰 吾久侍丹霞 今旣垂老倦於提誘 汝可往謁翠微 彼卽吾同參也 師禮辭而去 造于翠微之堂 問如何是西來的的意 翠微曰 待無人卽向汝說 師良久曰 無人也請師說 翠微下禪床引師入竹園 師又曰 無人也請和尙說 翠微指竹曰 遮竿得恁麽長 那竿得恁麽短 師雖領其微言 猶未徹其玄旨 文德元年抵上蔡 會州將重法創大通禪苑 請闡宗要 師自擧初見翠微語句 謂衆曰 先師入泥入水爲我 自是我不識好惡 師自此化導將十稔 至光化中領徒百餘遊鄂州 從節度使杜洪請 居淸平山安樂院

滑州; 今河南滑縣

孜孜; 勤勉 不懈怠

役役; 勞苦不息貌

片心; 微小的心意

詢請; 詢問請敎

入泥入水; 喩指禪師苦口婆心 啓發引導學人 與拖泥帶水等語同意

 

악주(鄂州) 청평산(淸平山) 영준선사(令遵禪師). 동평(東平) 사람이며 성이 왕씨(王氏). 소년(少年)에 본주(本州) 북쪽 보리사(菩提寺)에 의지하다가 당 함통(咸通) 6(865) 낙발(落髮)했고 후에 활주(滑州) 개원사(開元寺)로 나아가 수구(受具)하고 율학(律學)을 학습(學習; )했다. 일단(一旦; 一朝)에 동류(同流)에게 일러 가로되 무릇 사문(沙門)은 응당 사생(死生)을 결철(決徹; 洞曉. 徹悟)하고 불리(佛理)를 현통(玄通; 暗中相通)해야 하거늘 약내(若乃; 이에) 권축(卷軸)에 자자(孜孜)하고 역역(役役)하며 구문(拘文; 문자에 구애됨)한다면 해사(海沙)를 실수(悉數; 모두 세다)하고 편심(片心)을 도로(徒勞)함이다. 드디어 소업(所業)을 그만두고() 멀리 선회(禪會)에 참여(參與)했다. 강릉(江陵) 백마사(白馬寺)에 이르렀는데 당중(堂中)에서 한 노숙(老宿)을 만났으니 이름해 가로되 혜근(慧勤)이었다. 스님이 친근하면서 순청(詢請)하자 혜근이 가로되 나는 단하(丹霞)를 오래 시봉했다. 이제 이미 수로(垂老; 거의 노년에 가까움)하여 제유(提誘)에 고달프니() 너는 가히 가서 취미(翠微)를 참알하라. 그는() 곧 나와 동참(同參)이다. 스님이 예사(禮辭)하고 갔다. 취미지당(翠微之堂)으로 나아가() 묻되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입니까. 취미가 가로되 사람이 없음을 기다렸다가 곧 너를 향해 말하겠다. 스님이 양구(良久)하고 가로되 사람이 없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청합니다. 취미가 선상에서 내려와 스님을 끌고() 죽원(竹園)에 들어갔다. 스님이 또 가로되 사람이 없습니다, 화상의 말씀을 청합니다. 취미가 대를 가리키며 가로되 이() 죽간(竹竿; 竿)은 이렇게 긺을 얻었고 저() 죽간은 이렇게 짦음을 얻었다. 스님이 비록 그 미언(微言; 미묘한 말)을 영회(領會; )했지만 오히려() 그 현지(玄旨)를 투철(透徹; )하지 못했다. 문덕(文德) 원년(888) 상채(上蔡)에 다다랐는데 마침() 주장(州將)이 중법(重法; 불법을 존중)하여 대통선원(大通禪苑)을 창건하여 종요(宗要)를 밝히기()를 청했다. 스님이 스스로 취미를 초견(初見)한 어구(語句)를 들고는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선사(先師)가 입니입수(入泥入水)하여 나를 위했으나 스스로 이 내가 호오(好惡)를 알지 못했다. 스님이 이로부터 화도(化導)하기 거의() 10(; )이었다. 광화(光化; 898-901) 중에 이르러 도중(徒衆) 백여(百餘; 100여 인)를 거느리고() 악주(鄂州)를 유행(遊行)하다가 절도사(節度使) 두홍(杜洪)의 청을 좇아 청평산(淸平山) 안락원(安樂院)에 거주했다.

滑州; 지금의 하남 활현(滑縣).

孜孜; 근면(勤勉). 해태(懈怠)하지 않음.

役役; 노고하며 쉬지 않는 모양.

片心; 미소(微小)한 심의(心意).

詢請; 순문(詢問)하며 가르침을 청함.

入泥入水; 선사가 고구파심(苦口婆心)으로 학인을 계발하고 인도함을 비유로 가리킴. 타니대수(拖泥帶水) 등의 말과 같은 뜻.

 

上堂曰 諸上坐 夫出家人須會佛意始得 若會佛意不在僧俗男女貴賤 但隨家豐儉安樂便得 諸上坐 盡是久處叢林遍參尊宿 且作麽生會佛意 試出來大家商量 莫空氣高 至後一事無成一生空度 若未會佛意 直饒頭上出水足下出火燒身鍊臂 聰慧多辯聚徒一千二千 說法如雲如雨 講得天華亂墜 只成箇邪說爭競是非 去佛法大遠在 諸人幸値色身安健不値諸難 何妨近前 著些工夫體取佛意好 時有僧問 如何是大乘 師曰 麻索 曰如何是小乘 師曰 錢貫 問如何是淸平家風 師曰 一斗麫作三箇蒸餠 問如何是禪 師曰 胡孫上樹尾連顚 問如何是有漏 師曰 笊籬 曰如何是無漏 師曰 木杓 問覿面相呈時如何 師曰 分付與典坐 自餘逗機方便靡徇時情 逆順卷舒語超格量 天祐十六年正月二十五日午時歸寂 壽七十有五 周顯德六年勅諡法喜禪師 塔曰善應

豐儉; 豐饒與儉約 轉義爲師家指導學人時的把住放行兩種手段 二豐年凶年 歲凶曰儉 [緇門警訓註中] 此指一

胡孫; 正作猢猻 多喩指躁動不安之心 慧琳音義十三 猨猴 上音袁 下音侯 山海經云 堂庭之山多白猿 郭璞曰 似獼猴而大 長臂便捷 鳴則聲哀 又猴 說文 卽獿也 今謂之猴孫 俗曰胡孫

逗機; 洪武正韻 逗 物相投合也

時情; 世情 當時的輿論

 

상당(上堂)하여 가로되 제상좌(諸上坐), 무릇 출가인은 모름지기 불의(佛意)를 이회(理會; )해야 비로소 옳다. 만약 불의(佛意)를 이회(理會)한다면 승속(僧俗)ㆍ남녀(男女)ㆍ귀천(貴賤)에 있지 않나니 단지 집안()의 풍검(豐儉)과 안락(安樂)을 따르면 바로 옳다(). 제상좌는 모두() , 총림에 구처(久處; 오래 거처)하고 존숙을 편참(遍參)했으리니 다만() 어떻게(作麽生) 불의(佛意)를 이회하느냐. 시험 삼아 나와서 대가(大家; 대중)와 상량(商量)하라. 공연히() 기고(氣高)하지 말지니 후에 이르러 일사(一事)도 이룸이 없고 일생(一生)을 공연히 지내리라(空度). 만약 불의(佛意)를 이회하지 못한다면 직요(直饒; 가령) 두상(頭上)에 출수(出水)하고 족하(足下)에 출화(出火)하고 소신(燒身)하고 연비(鍊臂; 팔을 달구다)하고 총혜(聰慧)하고 다변(多辯)하고 1, 2천의 도중(徒衆)을 취집(聚集)하고 설법이 구름 같고 비와 같고 강설하여 천화(天華)가 난추(亂墜)함을 얻더라도 다만 저() 사설(邪說)을 이루고 시비(是非)을 쟁경(爭競)하리니 불법과 떨어짐이 너무 멀다(大遠在; 는 조사). 제인(諸人)은 다행히() 색신이 안건(安健)함을 만났고() 제난(諸難)을 만나지() 않았으니 어찌 근전(近前)함에 방애되리오. 조금()의 공부(工夫)를 붙여() 불의(意好)를 체취(體取)해야 좋다(). 때에 어떤 중이 묻되 무엇이 이 대승(大乘)입니까. 사왈(師曰) 마삭(麻索; 삼으로 만든 끈)이다. 가로되 무엇이 이 소승(小乘)입니까. 사왈 전관(錢貫; 돈꿰미)이다. 묻되 무엇이 이 청평(淸平)의 가풍입니까. 사왈 1()의 밀가루로 3개의 증병(蒸餠; 찐떡)을 만든다. 묻되 무엇이 이 선()입니까. 사왈 호손(胡孫)이 나무에 오르니 꼬리가 이마에 잇닿았다(連顚). 묻되 무엇이 이 유루(有漏)입니까. 사왈 조리(笊籬). 가로되 무엇이 이 무루(無漏)입니까. 사왈 목작(木杓; 나무 구기)이다. 묻되 적면(覿面; 見面. 當面)하여 서로 보일() 때 어떻습니까. 사왈 전좌(典坐)에게 분부(分付)하여 준다. 자여(自餘; 以外. 此外)의 두기(逗機)한 방편과 시정(時情)에 미순(靡徇; 하며 따르다. )하고 역순(逆順)하고 권서(卷舒)한 언어(言語; )는 격량(格量; 品格器量)을 초월했다. 천우(天祐) 16(919) 정월 25일 오시(午時)에 귀적(歸寂)했고 나이는 75. () 현덕(顯德) 6(959) 칙시하여 법희선사(法喜禪師)라 했고 탑왈 선응(善應)이다.

豐儉; 1. 풍요와 검약(儉約). 전의(轉義)하여 사가가 학인을 지도할 때의 파주(把住)와 방행(放行)의 두 가지 수단이 됨. 2. 풍년과 흉년. 세흉(歲凶; 흉년)을 가로되 검()[치문경훈주중]. 여기에선 1을 가리킴.

胡孫; 바르게는 호손(猢猻)으로 지음. 다분히 조동(躁動)하며 불안한 마음을 비유로 가리킴. 혜림음의13. 원후(猨猴) 상은 음이 원이며 하는 음이 후임. 산해경에 이르되 당정(堂庭)의 산에 백원(白猿)이 많다. 곽박(郭璞)이 가로되 미후(獼猴)와 비슷하면서 크다. 긴 팔에 편첩(便捷; 재빠름)하며 울면 곧 소리가 애처롭다. 또 후()는 설문 곧 뇨(; 원숭이). 여금에 이를 일러 후손(猴孫)이라 하고 속왈(俗曰) 호손(胡孫)이다.

逗機; 홍무정운(洪武正韻) () 물건이 서로 투합함이다.

時情; 세정(世情). 당시의 여론(輿論).

 

舒州投子山大同禪師 本州懷寧人也 姓劉氏 幼歲依洛下保唐滿禪師出家 初習安般觀 次閱華嚴敎發明性海 復謁翠微山法席頓悟宗旨語見翠微章由是放任周遊歸旋故土 隱投子山結茆而居 一日趙州諗和尙至桐城縣 師亦出山途中相遇未相識 趙州潛問俗士知是投子 乃逆而問曰 莫是投子山主麽 師曰 茶鹽錢乞一箇 趙州卽先到庵中坐 師後携一缾油歸庵 趙州曰 久嚮投子 到來只見箇賣油翁 師曰 汝只見賣油翁 且不識投子 曰如何是投子 師曰 油油 趙州問 死中得活時如何 師曰 不許夜行投明須到 趙州曰 我早侯白伊更侯黑同諗二師互相問醻 廣如本集 其辭句簡捷意趣玄險 諸方謂趙州投子得逸群之用自爾師道聞天下 雲水之侶競奔湊焉

放任; 任其自然 不加干涉

茶鹽錢; 意卽糊口的錢

我早侯白伊更侯黑; 俗諺謂强手遇上更强手 按淮海集二十五 閩有侯白 善陰中人以數 鄕里甚憎而畏之 莫敢與較 一日 遇女子侯黑于路 據井旁 佯若有所失 白怪而問焉 黑曰 不幸墮珥于井 其直百金 有能取之 當分半以謝 夫子獨無意乎 白良久 計曰 彼女子亡珥 得珥固可給而勿與 因許之 脫衣井旁 繼而下 黑度白已至水 則盡取其衣 亟去 莫知所塗 故今閩人呼相賣曰 我已侯白 伊更侯黑 侯白; 隋書五十八 侯白 字君素 好學有捷才 性滑稽 尤辯俊 擧秀才 爲儒林郞 通侻不恃威儀 好爲誹諧雜說 人多愛狎之 所在之處 觀者如市 從容錄第四十則 雲門道 將謂侯白 更有侯黑 隋朝有侯白 字君素 滑稽辯給之士也 大將軍楊素見知 撰旌異記 人神報應甚詳 亦可尙也 唐朝有李白 能詩 後有李赤效之 甚不類也 人傳爲笑 今言侯黑 亦其類也 有本云 我早侯白 伊更侯黑 言更甚也

 

서주(舒州) 투자산(投子山) 대동선사(大同禪師). 본주(本州) 회녕(懷寧) 사람이며 성이 유씨(劉氏)니 유세(幼歲)에 낙하(洛下; 洛陽城) 보당만(保唐滿) 선사에게 의지해 출가했다. 처음에 안반관(安般觀; 數息觀)을 익혔고 다음에 화엄교(華嚴敎)를 열독(閱讀)하며 성해(性海)를 발명(發明; 밝히다. 明悟)했다. 다시 취미산(翠微山) 법석(法席)에 참알(參謁)하여 종지(宗旨)를 문득 깨쳤다翠微章을 보라. 이로 말미암아 방임(放任)하여 주유(周遊)하다가 고토(故土)로 귀선(歸旋; 歸來)했고 투자산에 은거하며 결모(結茆; 結茅와 같음)하여 거주했다. 어느 날 조주심(趙州諗; 從諗) 화상이 동성현(桐城縣)에 이르렀다. 스님도 또한 출산(出山)했다가 도중에 상우(相遇)했으나 서로 알지 못했다. 조주가 속사(俗士)에게 몰래 물어(潛問) 이 투자임을 알았다. 이에 맞이하며() 물어 가로되 이 투자산주(投子山主)가 아닌가. 사왈(師曰) 다염전(茶鹽錢)1개 구걸한다. 조주가 곧 먼저 암자 가운데 이르러 앉았는데 스님이 뒤에 한 병()의 기름을 가지고 귀암(歸庵)했다. 조주가 가로되 투자를 구향(久嚮)했더니 도래하매 다만 저() 매유옹(賣油翁)만 보이는구나. 사왈 너는 다만 매유옹만 보고 또() 투자를 알지 못하는가. 가로되 무엇이 이 투자인가. 사왈 기름(), 기름. 조주가 묻되 사중(死中)에 득활(得活)했을 때 어떠한가. 사왈 야행(夜行)을 허락하지 않으니 날이 밝음에 이르거든 이름을 써라(投明須到). 조주가 가로되 나는 일찍 후백이고 너는 다시 후흑이다(我早侯白伊更侯黑)同諗(大同從諗) 二師互相 問醻(문답)는 광어(廣語; )本集과 같다. 辭句簡捷(저본에 簡健으로 지었음)하고 意趣玄險(玄妙하고 險峻)하여 諸方에서 이르기를 조주와 투자는 逸群之用을 얻었다. 이로부터(自爾) 스님의 도가 천하에 알려졌고() 운수지려(雲水之侶)가 경분(競奔)하며 모였다().

放任; 그 자연에 맡기고 간섭을 가하지 않음.

茶鹽錢; 뜻이 곧 호구(糊口; 입에 풀칠하다. 겨우 연명하다)의 돈.

我早侯白伊更侯黑; 속언(俗諺; 속담)에 이르기를 강수(强手)가 위의 또 강수를 만났다. 회해집25(淮海集二十五)를 안험(按驗)하니 민()에 후백(侯白)이 있었다. 잘 음흉(陰凶)하게 술수(術數)로써 사람들을 맞힌지라 향리(鄕里)가 매우 증오하면서 그를 두려워했으며 감히 더불어 견주지 못했다. 어느 날 길에서 후흑(侯黑)이란 여자를 만났는데 우물 곁에 기대어 마치 잃은 것이 있는 체했다. ()이 괴이히 여겨 물었더니 흑()이 가로되 불행히도 우물에 귀고리를 떨어뜨렸는데 그 가치가 백금(百金)입니다. 어떤 이가 능히 이를 취하면 마땅히 반을 나누어 사례(謝禮)하겠습니다. 부자(夫子)께서 홀로 뜻이 없으십니까. 백이 양구(良久)하였다. 계산해 가로되 저 여자가 귀고리를 잃었다, 귀고리를 얻는다면 진실로() 줌이 옳지만 주지 않으리라. 인해 이를 허락했다. 우물 곁에 옷을 벗어 놓고 이어서 내려갔다. 백이 이미 물에 이르렀으리라고 흑이 추측하고는 곧 그 옷을 다 취해 급히 떠났는데 간 바의 길을 알지 못했다. 고로 지금도 민인(閩人)이 호가(呼價) 하며 서로 매매(買賣)하면서 가로되 나는 이미 후백이고 너는 다시 후흑이다(我已侯白 伊更侯黑). 侯白; 수서58(隋書五十八) 후백(侯白)은 자가 군소(君素)며 학문을 좋아했고 첩재(捷才)가 있었고 천성이 골계(滑稽; 말이 매끄럽고 익살스러워 웃음을 자아내는 일)였다. 더욱이 변준(辯俊; 辯才가 출중함)이었고 수재(秀才)에 천거되었고 유림랑(儒林郞)이 되었다. 통탈(通侻; 通脫이니 疏脫)하여 위의를 믿지 않았고(不恃) 비해(誹諧; 諧謔)의 잡설(雜說)를 좋아했다. 사람들이 많이 그를 애압(愛狎; 사랑하며 친근)했다. 소재하는 곳엔 관람하는 자가 시장과 같았다. 종용록제40. 운문(雲門)이 말하되 장차 후백이라고 이르렸더니 다시 후흑이 있구나(將謂侯白 更有侯黑). 수조(隋朝)에 후백(侯白)이 있었는데 자가 군소(君素)며 골계(滑稽)로 변급(辯給)하는 사내였다. 대장군 양소(楊素)가 보고 알아보았다. 정이기(旌異記)를 지었는데 인신(人神)의 보응(報應)이 매우 상세하니 또한 가상(可尙)하다. 당조(唐朝)에 이백(李白)이 있었는데 시()에 능했다. 후에 이적(李赤)이 있어 이를 본받았는데 매우 유사(類似)하지 못했으므로 사람들이 전하며 웃었다. 지금 말한 후흑도 또한 그 종류다. 어떤 책엔 이르기를 나는 일찍이 후백이고 너는 다시 후흑이다(我早侯白 伊更侯黑) 했는데 더욱 심함을 말함이다.

 

師謂衆曰 汝諸人來遮裏 擬覓新鮮語句 攢華四六 口裏貴有可道 我老人氣力稍劣脣舌遲鈍 汝若問我 我便隨汝答對 也無玄妙可及於汝 亦不敎汝垛根 終不說向上向下 有佛有法有凡有聖 亦不存坐繫縛 汝諸人變現千般 總是汝生解 自擔帶將來自作自受 遮裏無可與汝 不敢誑嚇汝 無表無裏可得說似 汝諸人 還知麽 時有僧問 表裏不收時如何 師曰 汝擬向遮裏垛根 僧問 大藏敎中還有奇特事也無 師曰 演出大藏敎 問如何是眼未開時事 師曰目淨脩廣如靑蓮 問一切諸佛及諸佛法皆從此經出 如何是此經 師曰 以是名字汝當奉持 問枯木中還有龍吟也無 師曰 我道髑髏裏有師子吼 問一法普潤一切群生 如何是一法 師曰 雨下也 問一塵含法界時如何 師曰 早是數塵也 問金鎖未開時如何 師曰 開也 問學人欲修行時如何 師曰 虛空不曾爛壞

四六; 四六文 文體名 騈文的一體 因以四字六字爲對偶 故名 騈文以四六對偶者 形成於南朝 盛行於唐宋 唐以來 格式完全定型 遂稱四六 也稱四六文或四六體 [百度詞典]

垛根; 又作垜根 垜 用同跥 垜根 與跥跟 挆根同 意謂定止 陷埋于虛妄境界 執著于言解分別 按挆根的作法 爲禪家所批評 故亦常用作呵斥之詞

存坐; 存身 安坐 二生活

 

스님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 제인이 이 속에 와서 신선(新鮮)한 어구(語句)와 꽃이 모인(은 모을 찬) 듯한 사륙(四六; 四六文 또는 四六騈儷文)을 찾아 입속에 가히 말할 것이 있으려고 하지만(; ) 나는 노인이라 기력이 조금 적고() 입술과 혀가 느리고 둔하다. 너희가 만약 나에게 묻는다면 내가 바로 너희를 따라 답대(答對)하겠지만 또한 너희에게 가히 미칠() 현묘(玄妙)가 없나니 또한 너희로 하여금 타근(垛根)하게 하지 않는다. 마침내 향상향하(向上向下)와 유불유법(有佛有法)과 유범유성(有凡有聖)을 설하지 않으며 또한 존좌(存坐)로 계박(繫縛)하지 않는다. 너희 제인(諸人)이 천반(千般)를 변현(變現)하더라도 모두() 이 너희가 견해(見解; )를 내어 스스로 담대(擔帶)하여 가지고 와서(將來) 자작자수(自作自受)함이다. 이 속에선 가히 너희에게 줌이 없으며 감히 너희를 광하(誑嚇; 속이고 으르다)하지 않는다. 겉도 없고 속도 없거늘(無表無裏) 가히 너희 제인에게 설사(說似; 설해 주다)함을 얻겠는가. 도리어 아느냐. 때에 어떤 중이 묻되 표리(表裏)를 거두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師曰) 네가 이 속을 향해 타근(垛根)하려고 하느냐. 승문(僧問) 대장교(大藏敎) 중에 도리어 기특사(奇特事)가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사왈 대장교를 연출(演出)하는구나. 묻되 무엇이 이 눈이 열리지 않은 때의 일입니까. 사왈 눈()이 맑고 길고() 넓어() 청련(靑蓮)과 같다. 묻되 일체제불 및 제불의 법이 모두 차경(此經)을 좇아나온다 하니 무엇이 이 차경(此經)입니까. 사왈 이 명자(名字)를 네가 마땅히 봉지(奉持)하라. 묻되 고목(枯木) 가운데 도리어 용의 읊조림(龍吟)이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사왈 내가 말하노니 촉루(髑髏) 속에 사자후(師子吼)가 있다. 묻되 일법(一法)이 일체 군생(群生)을 널리 적신다() 하니 무엇이 이 일법입니까. 사왈 비가 내린다(雨下). 묻되 일진(一塵)이 법계를 머금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벌써() 이 수진(數塵)이다. 묻되 금쇄(金鎖; 금 자물쇠)가 열리지 않은 때 어떻습니까. 사왈 열렸다. 묻되 학인이 수행하려고 할 때 어떻습니까. 사왈 허공이 일찍이 난괴(爛壞; 문드러져 무너짐)하지 않았다.

四六; 사륙문(四六文)이니 문체(文體)의 이름. 변문(騈文)1(). 네 글자나 여섯 글자로 대우(對偶; 둘이 서로 짝을 지음)를 지음으로 인해 고로 이름함. 변문을 사륙(四六)으로 대우(對偶)한 것은 남조(南朝)에서 형성되었으며 당송에서 성행했음. 당 이래 격식이 완전히 정형(定型)되어 드디어 사륙으로 명칭했음. 또 사륙문 혹 사륙체로 일컬음 [백도사전].

垛根; 또 타근(垜根)으로 지음. () ()이 타()와 같음. 타근(垜根) 타근(跥跟)ㆍ타근(挆根)과 같음. 뜻으로 이르면 정지(定止)니 허망한 경계에 함매(陷埋)하고 언해분별(言解分別)에 집착함임. 타근의 작법을 안험컨대 선가에서 비평하는 바가 되는지라 고로 또한 늘 가척지사(呵斥之詞)로 지어 씀.

存坐; 1. 존신(存身). 안좌(安坐). 2. 생활(生活).

 

雪峯侍立 師指庵前一塊石曰 三世諸佛總在裏許 雪峯曰 須知有不在裏許者 師乃歸庵中坐 一日雪峯隨師訪龍眠庵主 雪峯問 龍眠路向什麽處去 師以拄杖指前面 雪峯曰 東邊去西邊去 師曰 漆桶 雪峯異日又問 一槌便成時如何 師曰 不是性𢤁蘇到切 雪峯曰 不假一槌時如何 師曰 漆桶 師一日庵中坐 雪峯問 和尙此間還有人參否 師於床下拈钁頭拋向面前 雪峯曰 恁麽卽當處掘去也 師曰 漆桶不快 雪峯辭去 師出門送驀召曰 道者 雪峯迴首應諾 師曰 途中善爲

漆桶; 黑漆桶也 譬無明之堅厚也 對愚暗不悟者的詈稱

一槌便成; 又作一鎚便成 意謂一經啓發就徹底省悟 祖庭事苑五 一鎚便成 智覺心賦云 如王索一椎之器 言下全通 注云 王索寶器 須是一椎便成 第二第三皆不中進 此喩一言之下 便契無生 不須再問 便落陰界

性𢤁; 性燥漢 性懆漢 靈利俊快之人 𢤁 集韻 先到切 音噪 性疏也

 

설봉(雪峯)이 시립(侍立)했다. 스님이 암자 앞의 한 덩어리 돌을 가리키며 가로되 삼세제불이 모두() 이허(裏許; 裏邊)에 있다. 설봉이 가로되 이허(裏許)에 있지 않는 것도 있음을 꼭 아셔야(須知) 합니다. 스님이 이에 암자 가운데로 돌아와 앉았다. 어느 날 설봉이 스님을 따라 용면암주(龍眠庵主)를 방문했다. 설봉이 묻되 용면로(龍眠路)는 어느 곳을 향해 가야 합니까. 스님이 주장자로써 전면을 가리켰다. 설봉이 가로되 동변(東邊)으로 갑니까, 서변으로 갑니까. 사왈 칠통(漆桶). 설봉이 다른 날(異日) 또 묻되 일추로 바로 이룰(一槌便成) 때 어떻습니까. 사왈 이 성조(性𢤁)蘇到切()이 아니다. 설봉이 가로되 일추(一槌)를 빌리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칠통(漆桶). 스님이 어느 날 암자 가운데 앉았는데 설봉이 묻되 화상의 차간(此間)에 도리어 어떤 사람이 참()합니까. 스님이 상()에서 내려와 괭이(; 큰 호미)를 집어 면전을 향해 던졌다. 설봉이 가로되 이러하다면(恁麽) 곧 당처(當處)를 굴착(掘鑿)합니다(掘去也). 사왈 칠통(漆桶)이 쾌하지 못하구나(不快). 설봉이 고별하고 가자 스님이 나가 문송(門送)하다가 갑자기() 불러 가로되 도자(道者). 설봉이 머리를 돌리며 응낙했다. 사왈 도중(途中)에 잘 하거라(善爲).

漆桶; 흑칠통(黑漆桶)이니 무명의 견후(堅厚)에 비유함. 우매하여 깨닫지 못하는 자에 대한 이칭(詈稱).

一槌便成; 또 일추편성(一鎚便成)으로 지음. 뜻으로 이르면 한 번 계발(啓發)함을 겪으면서 바로 철저히 성오(省悟). 조정사원5. 일추편성(一鎚便成) 지각(智覺; 永明延壽)의 심부(心賦; 註心賦)에 이르되 마치 왕이 일추(一椎; 로 지어졌음)의 보기(寶器)를 찾으매 언하에 전통(全通)함과 같다. ()에 이르되 왕이 보기(寶器)를 찾으매 모름지기 이 일추(一椎)로 바로 이루어야 하므로 제2 3은 다 진상(進上)함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일언지하에 바로 무생에 계합함을 비유함이니 다시 물어 바로 음계(陰界; 鬼神의 세계)에 떨어짐을 쓰지()않는다.

性𢤁; 또 성조한(性燥漢)ㆍ성조한(性懆漢)과 같음. 영리(靈利)하고 준쾌(俊快)한 사람. 𢤁 집운(集韻) 선도절(先到切; ) ()이 조()니 성소(性疏).

 

僧問故歲已去新歲到來 還有不涉此二途者無 師曰有 僧曰 如何是不涉者 師曰 元正啓祚萬物惟新 問依俙似半月 彷彿若三星 乾坤收不得 師向何處明 師曰 道什麽 僧曰 想師 只有湛水之波 且無滔天之浪 師曰 閑言語 問類中來時如何 師曰 人類中來馬類中來 問佛佛授手祖祖相傳 傳箇什麽法 師曰 老僧不解謾語 問如何是出門不見佛 師曰 無所覩 曰如何是入室別爺孃 師曰無所生 問如何是火焰裏藏身 師曰 有什麽掩處 曰如何是炭堆裏藏身 師曰 我道汝黑似漆 問的的不明時如何 師曰 明也 問如何是末後一句 師曰 最初明不得 問從苗辨地因語識人 未審將何辨識 師曰 引不著 問院裏三百人 還有不在數者無 師曰 一百年前五十年後看取 師問僧 久嚮疎山薑頭莫便是否 無對法眼代云 嚮重和尙日久

元正; 正月初一日

依俙; 又作依稀 似有似無 模糊不淸 稀微

彷彿; 同髣髴 相似也 見不審貌也

佛佛授手; 祖庭事苑七 佛佛授手 泥洹經云 佛將入滅 命羅漢十萬比丘授手 又將左手伸向阿難羅云 又將阿難羅云手 授與它方化佛 表囑累故

薑頭; 禪林職位之一

 

승문(僧問) 고세(故歲; 去歲)는 이미 가고 신세(新歲)가 도래했습니다. 도리어 이 이도(二途)에 건너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왈(師曰) 있다. 승왈(僧曰) 무엇이 이 건너지 않는 것입니까. 사왈 원정(元正)에 계조(啓祚; 福祚를 열다)하니 만물이 오직 새롭다. 묻되 의희(依俙)하여 반월(半月)과 같더니 방불(彷彿; 저본에 仿象으로 지었음)하기가 삼성(三星)과 같습니다. 건곤이 거둠을 얻지 못하거늘 스님이 어느 곳을 향해 밝히겠습니까. 사왈 무어라고 말했느냐. 승왈 생각건대 스님은 다만 담수(湛水)의 파도만 있고 또 도천(滔天)의 파랑(波浪)이 없습니다. 사왈 한언어(閑言語; 쓸데없는 언어). 묻되 유중(類中)에서 올 때 어떻습니까. 사왈 인류(人類) 중에서 오느냐, 마류(馬類) 중에서 오느냐. 묻되 불불이 수수(佛佛授手)하고 조조가 상전(祖祖相傳)한다 하니 저() 무슨 법(什麽法)을 전했습니까. 사왈 노승은 만어(謾語)를 알지() 못한다. 묻되 무엇이 이 출문(出門)하여 부처를 보지 못함입니까. 사왈 보이는() 바가 없다. 가로되 무엇이 이 입실(入室)하여 야양(爺孃; 부모)을 분별함입니까. 사왈 낳은 바가 없다. 묻되 무엇이 이 화염 속에 장신(藏身)함입니까. 사왈 무슨 가리는 곳(掩處)이 있느냐. 가로되 무엇이 이 탄퇴(炭堆; 숯더미) 속에 장신(藏身)함입니까. 사왈 내가 말하노니 너는 검기가 칠()과 같다. 묻되 적적(的的; 명백)해도 밝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환하다(明也). 묻되 무엇이 이 말후일구(末後一句)입니까. 사왈 최초에 밝음을 얻지 못한다. 묻되 묘(; )로 좇아 땅을 분변하고 말로 인해 사람을 압니다(). 미심하오니 무엇을 가지고 식()을 분변합니까. 사왈 인용(引用)하지 못한다(引不著). 묻되 원리(院裏)3백 인에 도리어 수()에 있지 않는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왈 1백 년 전과 50년 후를 간취(看取)하라. 스님이 중에게 묻되 소산(疎山)의 강두(薑頭)를 구향(久嚮)했는데 바로 이것이 아니냐. 대답이 없었다法眼代云 화상을 嚮重(하며 존중)한 날이 오래입니다.

元正; 정월 초1.

依俙; 또 의희(依稀)로 지음. 있는 듯하고 없는 듯하며 모호(模糊)하여 맑지 못하고 희미(稀微).

彷彿; 방불(髣髴)과 같음. 서로 비슷함. 보매 자세하지 않은 모양임.

佛佛授手; 조정사원7. 불불수수(佛佛授手) 니원경(泥洹經)에 이르되 불타가 장차 입멸하면서 라한 십만 비구에게 명령해 손을 주고(授手) 또 왼손을 가지고 뻗어() 아난과 라운(羅云)을 향하고 또 아난과 라운의 손을 가지고 다른 지방의 화불(化佛)에게 수여하셨다. 촉루(囑累)를 표한 연고임.

薑頭; 선림 직위의 하나.

 

僧問 抱璞投師請師雕琢 師曰 不爲棟梁材 曰恁麽卽卞和無出身處也 師曰 擔帶卽伶俜辛苦 曰 不擔帶時如何 師曰 不敎汝抱璞投師更請雕琢 問那吒太子析骨還父析肉還母 如何是那吒本來身 師放下手中杖子 問佛法二字如何辨得淸濁 師曰 佛法淸濁 曰學人不會 師曰 汝適來問什麽 問一等是水爲什麽海鹹河淡 師曰 天上星地下木法眼別云 大似相違問如何是祖師意 師曰 彌勒覓箇受記處不得 問和尙住此來有何境界 師曰 丱角女子白頭絲 問如何是無情說法 師曰惡 問如何是毘盧 師曰 已有名字 曰如何是毘盧師 師曰 未有毘盧時會取 問歷落一句請師道 師曰好 問四山相逼時如何 師曰 五蘊皆空 問一念未生時如何 師曰 眞箇謾語 問凡聖相去幾何 師下禪床立

伶俜; 又作竛竮 步行踉蹌之謂

那吒太子析骨還父析肉還母; 那吒 北方毘沙門天王第三子 祖庭事苑六 那吒 叢林有析骨還父 析肉還母之說 然於乘敎無文 不知依何而爲此言 愚未之知也

一等; 乃一樣平等之意

丱角; 又作丫角 指古時兒童束髮成兩角的樣子

歷落; 淸晰分明

四山; 用以表示人身無常 必受生老病死等四相逼迫之譬喩 別譯雜阿含四 則以四山比喩老病死衰耗四相 增一阿含經二十六四意斷品 以四山比喩老病死及無常 涅槃經二十七 有四大山從四方來欲害人民 …… 四山卽是衆生生老病死

 

승문(僧問) 포박(抱璞)하고 스님에게 던지나니(投師) 스님의 조탁(雕琢; 쪼다)을 청합니다. 사왈(師曰) 동량재(棟梁材)가 되지 못한다.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변화(卞和)가 출신(出身)할 곳이 없습니다. 사왈 담대(擔帶)하면 곧 영빙(伶俜)하며 신고(辛苦)한다. 가로되 담대(擔帶)하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너로 하여금 포박(抱璞)하고 투사(投師)하고 다시 조탁(雕琢)을 청하게 하지 않았다. 묻되 나타태자가 뼈를 쪼개어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살을 쪼개어 어머니에게 돌려준다(那吒太子析骨還父析肉還母) 하니 무엇이 이 나타의 본래의 몸입니까. 스님이 수중의 주장자를 내려놓았다. 묻되 불법(佛法) 2()에 어떻게(如何) 청탁(淸濁)을 변득(辨得)합니까. 사왈 불법(佛法)이 청탁(淸濁)이다. 가로되 학인이 알지 못하겠습니다. 사왈 네가 적래(適來)에 무엇을 물었느냐. 묻되 일등(一等; 一樣)의 이 물이거늘 무엇 때문에(爲什麽; 麽字 補入) 바다는 짜고 내는 싱겁습니까(). 사왈 천상의 별이며 지하의 나무다法眼別云 매우 相違한 것 같구나. 묻되 무엇이 이 조사의(祖師意)입니까. 사왈 미륵(彌勒)이 저() 수기(受記)할 곳을 찿아도 얻지 못한다. 묻되 화상이 여기에 거주하여 오면서 어떤 경계가 있습니까. 사왈 관각여자(丱角女子)의 흰 머리카락(白頭絲)이다. 묻되 무엇이 이 무정설법(無情說法)입니까. 사왈 악()이다. 묻되 무엇이 이 비로(毘盧)입니까. 사왈 이미 명자(名字)가 있다. 가로되 무엇이 이 비로의 스승입니까. 사왈 비로가 있지 않은 때를 회취(會取)하라. 묻되 역락(歷落)1구를, 스님의 말씀을 청합니다. 사왈 좋구나(). 묻되 사산(四山)이 상핍(相逼)할 땐 어떻습니까. 사왈 5()이 다 공했다. 묻되 일념이 생하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진개(眞箇; 는 조사)의 만어(謾語). 묻되 범성(凡聖)이 서로 떨어짐이 얼마입니까. 스님이 선상에서 내려와 섰다.

伶俜; 또 영병(竛竮)으로 지음. 보행이 양창(踉蹌; 비틀거림)함을 말함.

那吒太子析骨還父析肉還母; 나타(那吒)는 북방 비사문천왕의 제3. 조정사원6 나타(那吒) 총림에 뼈를 쪼개어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살을 쪼개어 어머니에게 돌려준다는 설이 있지만 그러나 교승(乘敎)에 글이 없거늘 무엇에 의해 이 말을 짓는지 알지 못하겠다. (; 謙辭)가 알지 못한다.

一等; 곧 한 모양으로 평등함의 뜻.

丱角; 또 아각(丫角)으로 지음. 고시에 아동(兒童)이 머리카락을 묶어 양각(兩角)을 이룬 양자를 가리킴.

歷落; 청석(淸晰; 맑고 또렷함)하고 분명함.

四山; 인신(人身)이 무상(無常)하여 반드시 생ㆍ로ㆍ병ㆍ사 등 4()의 핍박을 받음을 표시하는 비유로 사용함. 별역잡아함4에선 곧 4산을 노ㆍ병ㆍ사ㆍ쇠모(衰耗)4()에 비유했고 증일아함경26 사의단품(四意斷品)에선 4산을 노ㆍ병ㆍ사 및 무상에 비유했음. 열반경27. 4대산(大山)이 있어 사방으로부터 와서 인민을 해하려고 한다 …… 4산은 곧 이 중생의 생ㆍ로ㆍ병ㆍ사다.

 

問學人一問卽和尙答 忽若千問萬問時如何 師曰 如雞抱卵 問天上天下唯我獨尊 如何是我 師曰推倒遮老胡有什麽過 問如何是和尙師 師曰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形 問塑像未成 未審身在什麽處 師曰 莫亂造作 僧曰 爭奈現不現何 師曰 隱在什麽處 問無目底人如何進步 師曰 遍十方 僧曰 無目爲什麽遍十方 師曰 著得目也無 問如何是西來意 師曰 不諱 問月未圓時如何 師曰 吞却兩三箇 僧曰 圓後如何 師曰 吐却七八箇 問日月未明 佛與衆生在什麽處 師曰 見老僧瞋便道瞋 見老僧喜便道喜 師問僧 什麽處來 曰東西山禮祖師來 師曰 祖師不在東西山 僧無語法眼代云 和尙識祖師

天上天下唯我獨尊; 佛初生時之語 是三世諸佛之常法也 長阿含經一 佛告比丘 諸佛常法 毘婆尸菩薩當其生時 從右脇出 專念不亂 從右脇出 墮地行七步 無人扶持 遍觀四方 擧手而言 天上天下唯我爲尊 要度衆生生老病死 此是常法 祖堂集一釋迦牟尼佛 普曜經云 佛初生時 放大光明 照十方界 地涌金蓮 自然捧足 東西南北各行七步 觀察四方 一手指天 一手指地 作師子吼 天上天下 唯我獨尊

老胡; 指釋迦 二指達摩 此指釋迦

 

묻되 학인이 일문(一問)하면 곧 화상이 답합니다. 홀연히 만약 천문만문(千問萬問)할 때 어떻습니까. 사왈(師曰) 닭이 알을 품음과 같다(如雞抱卵). 묻되 천상천하에 오직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天上天下唯我獨尊). 무엇이 이 나()입니까. 사왈 이() 노호(老胡)를 밀어 넘어뜨린들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묻되 무엇이 이 화상의 스승입니까. 사왈 맞이하면 그 머리()를 보지 못하고 따르면 그 형상(形相)을 보지 못한다. 묻되 소상(塑像; 形像을 빚다)하여 이루지 못하면 미심하오니 몸()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사왈 어지럽게 조작(造作)하지 말아라. 승왈(僧曰)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함을 어찌하겠습니까. 사왈 숨어() 어느 곳에 있느냐. 묻되 눈이 없는 사람(無目底人)이 어떻게 진보(進步)합니까. 사왈 시방에 두루하다(遍十方). 승왈 눈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시방에 두루합니까. 사왈 눈을 붙였느냐(著得) 또는 아니냐. 묻되 무엇이 이 서래의(西來意)입니까. 사왈 숨기지 않는다(不諱). 묻되 달이 둥글지 않은 때 어떻습니까. 사왈 두세 개를 삼켜버린다. 승왈 둥근 후엔 어떻습니까. 사왈 칠팔 개를 토해버린다. 묻되 일월(日月)이 밝지 않으면 부처와 중생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 사왈 노승이 성냄을 보면 바로 성낸다고 말하고 노승이 기뻐함을 보면 바로 기뻐한다고 말한다. 스님이 중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동서(東西)의 산에 조사를 참례(參禮)하고 왔습니다. 사왈 조사는 동서의 산에 있지 않다. 중이 말이 없었다法眼代云 화상은 조사를 압니까.

天上天下唯我獨尊; 불타가 처음 탄생했을 때의 말이니 이는 삼세제불의 상법(常法). 장아함경1. 불타가 비구에게 고하시되 제불의 상법(常法)이다. 비바시보살(毘婆尸菩薩)이 그 태어날 때에 당해 우협(右脇)으로부터 나와서 전념으로 불란(不亂)했으니 우협으로부터 나와 땅에 떨어져 일곱 걸음을 다녔는데 부지(扶持)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방을 두루 관찰하고 손을 들어 말하되 천상천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天上天下 唯我爲尊). 중생의 생로병사를 제도하려고 한다. 이것은 이 상법(常法)이다. 조당집1 석가모니불. 보요경(普曜經)에 이르되 불타가 처음 탄생했을 때 대광명을 놓아 시방계를 비추었다. 땅에서 금련이 솟아 자연히 발을 받들었고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각각 다니며 사방을 관찰하고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사자후를 지었으니 천상천하에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다.

老胡; 1. 석가를 가리킴. 2. 달마를 가리킴. 여기에선 석가를 가리킴.

 

問如何是玄中的 師曰 不到汝口裏道 問牛頭未見四祖時如何 師曰 與人爲師 又問 見後如何 師曰 不與人爲師 問諸佛出世 唯以一大事因緣 如何是一大事因緣 師曰 尹司空爲老僧開堂 問如何是佛 師曰 幻不可求 問千里尋師乞師一接 師曰 今日老僧腰痛 菜頭入方丈請益 師曰 且去待無人時來爲闍梨說 菜頭明日伺得無人又來請和尙說 師曰 近前來 菜頭近前 師曰 輒不得擧似於人 問倂却咽喉脣吻請師道 師曰 汝只要我道不得 問達磨未來時如何 師曰 遍天遍地 曰來後如何 師曰 蓋覆不得 問和尙未見先師時如何 師曰 通身不奈何 曰見先師後如何 師曰 通身撲不碎 曰還從師得也無 師曰 終不相孤負 曰恁麽卽從師得也 師曰 自著眼趁取 曰恁麽卽孤負先師也 師曰 非但孤負先師 亦乃孤負老僧

一大事; 開顯實相妙理之事業 開示佛知見之事業也 一大者 實相之妙理 謂佛知見 卽法華之妙法也 宗門一大事者 非類敎家說 直指自己本分事 云一大事也 又人之生死 謂爲大事 善導之臨終正念訣曰 世之大事 莫越生死 一息不來 乃屬後生 一念若錯 便墮輪迴 法華經一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舍利弗 云何名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諸佛世尊 欲令衆生開佛知見 使得淸淨故 出現於世 欲示衆生佛之知見故 出現於世 欲令衆生悟佛知見故 出現於世 欲令衆生入佛知見道故 出現於世 高峰和尙禪要 生死事大 無常迅速 生不知來處 謂之生大 死不知去處 謂之死大 只者生死一大事 乃是參禪學道之喉襟 成佛作祖之管轄 三世如來 恒沙諸佛 千變萬化 出現世間 蓋爲此生死一大事之本源 西天四七 唐土二三 以至天下老和尙 出沒卷舒 逆行順化 亦爲此一大事之本源

司空; 官名 三公之一 周代有太師太傅太保 秦前漢代有丞相太尉御史大夫 或大司馬大司空大司徒 後漢唐宋代有太尉司徒司空

묻되 무엇이 이 현중의 것(玄中的)입니까. 사왈(師曰) 너의 입속에 이르지 않고 말한다. 묻되 우두(牛頭; 法融)4조를 뵙지 않았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사람에게 스승이 되어 준다. 또 묻되 뵌 후엔 어떻습니까. 사왈 사람에게 스승이 되어 주지 못한다. 묻되 제불이 출세함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입니다(). 무엇이 이 일대사인연입니까. 사왈 윤사공(司空)이 노승을 위해 개당(開堂)했다. 묻되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사왈 환()이라 가히 구()하지 못한다. 묻되 천 리에서 스님을 찾았으니 스님의 일접(一接; 한 번 接引)을 구걸합니다. 사왈 금일 노승이 허리가 아프다. 채두(菜頭)가 방장에 들어가 청익(請益)하자 사왈 다만() 가고 사람이 없을 때를 기다렸다가 오면 사리(闍梨)를 위해 설하겠다. 채두가 명일(明日) 사람이 없음을 사득(伺得; 엿보다. 은 조사)하고는 또 와서 화상의 말씀을 청했다. 사왈 앞으로 다가오너라. 채두가 앞으로 다가가자 사왈 번번이() 사람에게 들어 보임을 얻지 말아라. 묻되 인후(咽喉; 목구멍)와 순문(脣吻; 입술)을 닫아버리고(倂却) 스님의 말씀을 청합니다. 사왈 너는 다만 내가 말함을 얻지 못함을 요한다. 묻되 달마가 오지 않았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하늘에 두루하고 땅에 두루하다. 가로되 온 후엔 어떻습니까. 사왈 개부(蓋覆; 덮다)함을 얻지 못한다. 묻되 화상이 선사(先師)를 뵙지 않았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온몸(通身)이 어찌하지 못한다(通身不奈何). 가로되 선사를 뵌 후엔 어떻습니까. 사왈 온몸으로 쳐도() 부서지지 않는다. 가로되 도리어 스승을 좇아 얻었습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마침내 서로 저버리지(孤負) 않는다.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스승을 좇아 얻었습니다. 사왈 스스로 착안(著眼)하여 쫓아가 취하라(趁取). 가로되 이러하다면 곧 선사(先師)를 저버렸습니다. 사왈 단지 선사를 저버림 만이 아니라 또한 이에 노승을 저버렸다.

一大事; 실상의 묘리(妙理)의 사업을 개현(開顯)하여 불지견(佛知見)의 사업을 개시(開示)함임. 일대(一大)란 것은 실상(實相)의 묘리며 불지견(佛知見)을 말함이니 곧 법화(法華)의 묘법(妙法). 종문(宗門)의 일대사란 것은 교가(敎家)의 설에 비류(類比)하지 못하나니 단지 자기의 본분사를 가리켜 일대사라고 말함. 또 사람의 생사를 대사(大事)가 된다고 일컬음. 선도(善導; 唐代僧)의 임종정념결(臨終正念訣)에 가로되 세상의 대사에 생사를 초월할 게 없나니 한숨이 돌아오지 못하면 곧 후생에 속하고 한 생각이 만약 어긋나면 곧 윤회에 떨어진다. 법화경1. 제불세존이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쓰는 고로 세상에 출현하나니 사리불이여, 무엇을 이름해 제불세존이 오직 일대사인연을 쓰는 연고로 세상에 출현함인가, 제불세존이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知見)을 열어() 청정을 얻게 함인 고로 세상에 출현하며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을 보이고자() 함인 고로 세상에 출현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깨치게() 하고자 함인 고로 세상에 출현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의 도에 들게() 하고자 함인 고로 세상에 출현한다.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생사의 일이 크고 무상이 신속하다. 출생(出生)하되 온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를 일러 생대(生大)라 하고 죽어서 가는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를 일러 사대(死大)라 한다. 단지 이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는 곧 이 참선학도(參禪學道)의 후금(喉襟; 는 목구멍 후. 은 가슴 금)이며 성불작조(成佛作祖)의 관할(管轄; 은 열쇠. 은 빗장. 쐐기)이다. 삼세여래와 항사제불이 천변만화(千變萬化)하며 세간에 출현함은 대개 이 생사 일대사(一大事)의 본원(本源) 때문이며 서천사칠(西天四七)과 당토이삼(唐土二三)과 이지(以至; 내지) 천하의 노화상이 출몰권서(出沒卷舒)하고 역행순화(逆行順化)함도 또한 이 일대사의 본원 때문이다.

司空; 벼슬 이름. 3()의 하나. 주대(周代)에 태사(太師)ㆍ태부(太傅)ㆍ태보(太保)가 있었음. () 앞의 한대(漢代)에 승상ㆍ태위ㆍ어사대부 혹 대사마(大司馬)ㆍ대사공(大司空)ㆍ대사도(大司徒)가 있었음. 후한ㆍ당ㆍ송대에 태위(太尉)ㆍ사도(司徒)ㆍ사공(司空)이 있었음.

 

問七佛是文殊弟子 文殊還有師也無 師曰 適來恁麽道也 大似屈己推人 問金雞未鳴時如何 師曰 無遮箇音響 曰鳴後如何 師曰 各自知時 問師子是獸中之王 爲什麽被六塵吞 師曰 不作大 無人我 師居投子山三十餘載 往來激發請益者 常盈于室 師縱之以無畏辯 隨問遽答 啐啄同時微言頗多 今略錄少分而已 唐中和年巢寇暴起天下喪亂 有狂徒持刃上山 問師曰此何爲 師乃隨宜說法 魁渠聞而拜伏 脫身服施之而去 師乾化四年甲戌四月六日示有微疾 大衆請醫 師謂衆曰 四大動作聚散常程 汝等勿慮 吾自保矣 言訖跏趺坐亡 壽九十有六 詔諡慈濟大師 塔曰眞寂

喪亂; 死亡禍亂 後多以形容時勢或政局動亂

魁渠; 首領 常含貶義

 

묻되 7불은 이 문수의 제자입니다. 문수는 도리어 스승이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사왈(師曰) 적래(適來; 아까) 이렇게 말함은 자기를 굽히고 남을 미는 것과(屈己推人) 매우 흡사(大似)하다. 묻되 금계(金雞)가 울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저개(遮箇; )의 음향이 없다. 가로되 운 후엔 어떻습니까. 사왈 각자 시간을 안다(知時). 묻되 사자는 이 수중(獸中)의 왕이거늘 무엇 때문에 6()이 삼킴을 입습니까. 사왈 큼()을 짓지 않고 인아(人我)가 없다. 스님이 투자산에 거주한 지 30여 재()에 왕래하며 격발(激發)하고 청익(請益)하는 자가 늘 실내(室內; )에 가득했다. 스님이 무외변(無畏辯)을 놓아() 물음 따라 급히() 답했으니 줄탁(啐啄)이 동시(同時)며 미언(微言; 미묘한 언어)이 파다(頗多)했다. 지금 소분(少分) 약록(略錄)했을 따름이다. 당 중화년(中和年; 881-884)에 소구(巢寇)가 폭기(暴起)하여 천하가 상란(喪亂)했는데 어떤 광도(狂徒)가 칼을 가지고(持刃) 산에 올라 스님에게 물어 가로되 여기에서 무엇합니까(何爲). 스님이 이에 마땅함을 따라(隨宜) 설법했는데 괴거(魁渠; 首領)가 듣더니 배복(拜伏)했고 몸의 옷을 벗어 보시하고 떠났다. 스님이 건화(乾化) 4년 갑술(甲戌; 914) 46일 미질(微疾)이 있음을 보였다. 대중이 의사(醫師; )를 청하자 스님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4()는 동작(動作)하며 취산(聚散)함이 상정(常程; 恒常法度)이다. 너희 등은 염려하지 말지니 내가 스스로 보존하리라. 말을 마치자 가부(跏趺)하고 좌망(坐亡)했다. 나이는 96이며 조시(詔諡; 敕諡)가 자제대사(慈濟大師)며 탑왈(塔曰) 진적(眞寂)이다.

喪亂; 사망의 화란(禍亂). 후에 다분히 시세 혹 정국의 동란을 형용했음.

魁渠; 수령(首領). 늘 폄의(貶義)를 함유함.

 

湖州道場山如訥禪師 僧問 如何是敎意 師曰 汝自看 僧禮拜 師曰 明月鋪霄漢 山川勢自分 問如何得聞性不隨緣去 師曰 汝聽看 僧禮拜 師曰 聾人也唱胡笳調 好惡高低自不聞 僧曰 恁麽卽聞性宛然也 師曰 石從空裏立 火向水中焚 問虛空還有邊際否 師曰 汝也太多知 僧禮拜 師曰 三尺杖頭挑日月 一塵飛起任遮天 問如何是道人 師曰 行運無蹤迹 起坐絕人知 僧曰 如何卽是 師曰 三爐力盡無煙焰 萬頃平田水不流 問一念不生時如何 師曰 堪作什麽 僧無語 師又曰 透出龍門雲雨合 山川大地入無蹤 師目有重瞳 垂手過膝 自翠微受訣 乃止于道場山薙草卓庵 學徒四至遂成禪苑 廣闡法化 所遺壞衲三事及開山拄杖木屐 今在影堂按塔銘云 師姓許氏 吳興人 七歲去家於烏墩光福寺 八年如京師受具戒 抵豫章得心印於翠微 後結廬於道場山 猛摯之獸馴戢如奉敎

霄漢; 雲霄和天河 指天空

胡笳調; 又作胡笳曲 笳 笛之類 胡人吹之爲調 名爲胡笳調

影堂; 安置宗祖或高僧影像之堂宇 又稱祖堂 祖殿 大師堂 開山堂 於日本 供奉諸佛 菩薩 諸神 祖師 先德之像 卽稱爲影供 眞言宗之法會 亦稱影供

 

호주(湖州) 도량산(道場山) 여눌선사(如訥禪師). 승문(僧問) 무엇이 이 교의(敎意)입니까. 사왈(師曰) 네가 스스로 보아라. 중이 예배했다. 사왈 명월이 소한(霄漢)에 포진(鋪陳)하니 산천의 형세가 저절로 나뉜다. 묻되 어찌해야 문성(聞性)이 인연 따라 가지 않음을 얻습니까. 사왈 네가 들어보아라(聽看). 중이 예배했다. 사왈 농인(聾人; 귀머거리)도 또한 호가조(胡笳調)을 부르지만 호오(好惡)와 고저(高低)를 스스로 듣지 못한다. 승왈(僧曰) 이러하다면 문성(聞性)이 완연(宛然)합니다. 사왈 돌은 허공 속을 좇아 섰고 불은 물 속(水中)을 향해 탄다. 묻되 허공이 도리어 변제(邊際)가 있습니까. 사왈 너는 너무 많이 안다(太多知). 중이 예배했다. 사왈 삼척(三尺)의 장두(杖頭; 주장자. 는 조사)로 일월을 메니() 일진(一塵)비기(飛起)하여 하늘을 가리는 대로 일임한다. 묻되 무엇이 이 도인입니까. 사왈 행운(行運; 運行)하매 종적(蹤迹)이 없고 기좌(起坐)하매 사람의 앎이 끊긴다. 승왈 어찌해야 곧 옳습니까(). 사왈 삼로(三爐)가 힘이 다해 연염(煙焰)이 없고 만경(萬頃)의 평전(平田; 저본에 平由로 지었음)에 물이 흐르지 않는다. 묻되 일념이 나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사왈 차마 무엇을 하겠느냐(堪作什麽). 중이 말이 없었다. 스님이 또 가로되 용문(龍門)을 투출(透出)하니 운우(雲雨)가 합하고 산천과 대지가 들어가서 종적이 없다. 스님은 눈에 중동(重瞳; 겹으로 된 눈동자)이 있었고 손을 내리면(垂手) 무릎에 이르렀다(過膝). 취미(翠微)로부터 수결(受訣)하고는 이에 도량산에 머물며() 풀을 깎아(薙草) 암자를 세웠다(卓庵). 학도(學徒)가 사방에서 이르러(四至) 드디어 선원(禪苑)을 이루었고 법화(法化)를 광천(廣闡; 널리 밝히다)했다. 남긴 바 괴납(壞衲)의 삼사(三事; 미상) 및 개산(開山)의 주장(拄杖)과 목극(木屐; 나막신)이 지금(至今) 영당(影堂) 속에 있다塔銘按驗컨대 이르되 스님의 許氏吳興人이며 七歲烏墩 光福寺에서 집을 떠났다(去家; 저본에 去氏로 지었음). 八年京師로 가서() 具戒를 받았고 豫章에 다다라 翠微에게서 心印을 얻었고 후에 道場山結廬했다. 맹지(猛摯; 사나움)의 짐승이 순집(馴戢; 길들여져 안정됨)함이 가르침을 받듦과 같았다.

霄漢; 운소(雲霄;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와 천하(天河; 은하). 천공(天空; 하늘. 공중)을 가리킴.

胡笳調; 또 호가곡(胡笳曲)으로 지음. (; 갈잎피리)는 피리 종류며 호인(胡人)이 이를 불어 곡을 만듦을 이름해 호가조(胡笳調).

影堂; 종조(宗祖) 혹은 고승의 영상(影像)을 안치하는 당우(堂宇). 또 명칭이 조당(祖堂)ㆍ조전(祖殿)ㆍ대사당ㆍ개산당임. 일본에선 제불ㆍ보살ㆍ제신(諸神)ㆍ조사ㆍ선덕(先德)의 영상을 공봉(供奉)하며 곧 호칭하여 영공(影供)이라 함. 진언종의 법회도 또한 명칭이 영공(影供).

 

建州白雲約禪師曾住江州東禪院僧問 不坐偏空堂 不居無學位 此人合向什麽處安置 師曰 靑天無電影 天台韶和尙參 師問 什麽處來 韶曰 江北來 師曰 船來陸來 曰船來 師曰 還逢見魚鼈麽 曰往往遇之 師曰 遇時作麽生 韶曰 咄縮頭去 師大笑

偏空; 指小乘所談之空理 以其所說之理 偏於空之一邊 故稱爲偏空 又作偏眞

無學; 爲有學之對稱 雖已知佛敎之眞理 但未斷迷惑 尙有所學者 稱爲有學 相對於此 無學指已達佛敎眞理之極致 無迷惑可斷 亦無可學者 聲聞乘四果中之前三果爲有學 第四阿羅漢果爲無學 [俱舍論二十四 法華玄贊一]

 

건주(建州) 백운약(白雲約) 선사일찍이 江州 東禪院했다. 승문(僧問) 편공당(偏空)에 앉지 않고 무학위(無學)에 거처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합당히 어느 곳을 향해 안치해야 합니까. 사왈(師曰) 청천(靑天)엔 전영(電影; 번개의 그림자)이 없다. 천태소(天台韶; 德韶) 화상이 참()했다. 스님이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소왈(韶曰) 강북에서 옵니다. 사왈 배로 왔는가, 뭍으로 왔는가. 가로되 배로 왔습니다. 사왈 도리어 어별(魚鼈)을 만나 보았는가. 가로되 왕왕 만났습니다. 사왈 만났을 때 어떠한가. 소왈(韶曰) (), 머리를 오그려라(縮頭去). 스님이 크게 웃었다.

偏空; 소승이 담설하는 바의 공리(空理)를 가리킴. 그 설하는 바의 도리가 공()1변에 치우치므로 고로 일컬어 편공이라 함. 또 편진(偏眞)으로 지음.

無學; 유학(有學)의 대칭이 됨. 비록 이미 불교의 진리를 알았지만 다만 미혹을 단절치 못해 아직 배울 것이 있는 자를 일컬어 유학이라 함. 이에 상대하여 무학은 이미 불교의 진리의 극치를 달통하여 가히 단절할 미혹이 없으며 또한 가히 배울 게 없는 자를 가리킴. 성문승 4() 중 앞의 3과는 유학이 되고 제4 아라한과는 무학이 됨 [구사론24. 법화현찬1].

 

潭州前道吾山圓智禪師法嗣

潭州石霜山慶諸禪師 廬陵新淦人也 姓陳氏 年十三依洪井西山紹鑾禪師落髮 二十三嵩嶽受具 就洛下學毘尼之敎 雖知聽制終爲漸宗 迴抵大潙山法會爲米頭 一日師在米寮內篩米 潙山云 施主物莫拋撒 師曰 不拋撒 潙山於地上拾得一粒云 汝道不拋撒 遮箇什麽處得來 師無對 潙山又云 莫欺遮一粒子 百千粒從遮一粒生 師曰 百千粒從遮一粒生 未審遮一粒從什麽處生 潙山呵呵笑歸方丈 晩後上堂云 大衆米裏有蟲

米頭; 又作穀頭 禪林中 任職於典座之下 掌理一寺之米穀者 [象器箋職位類]

 

담주(潭州) 석상산(石霜山) 경제선사(慶諸禪師). 여릉(廬陵) 신감(新淦) 사람이며 성이 진씨(陳氏). 나이 13에 홍정(洪井) 서산(西山) 소란선사(紹鑾禪師)에게 의지해 낙발(落髮)했고 23에 숭악(嵩嶽)에서 수구(受具)했다. 낙하(洛下; 洛陽城)로 나아가() 비니(毘尼)의 교()를 배웠는데 비록 청제(聽制; 聽許制止)를 알았으나 마침내 점종(漸宗)이 되었다. 돌아오다() 대위산(大潙山) 법회(法會)에 다다라 미두(米頭)가 되었다. 어느 날 스님이 미료 안에서(在米寮; ) 쌀을 체질했다(篩米). 위산(潙山)이 이르되 시주물(施主物)을 포살(拋撒)하지 말아라. 사왈(師曰) 포살하지 않습니다. 위산이 지상(地上)에서 1()을 습득하여 이르되 네가 포살하지 않는다 했거니와 이것(遮箇)은 어느 곳에서 얻어 왔느냐. 스님이 대답이 없었다. 위산이 또 이르되 이() 일립자(一粒子; 는 조사)를 속이지(; 여러 선록에 모두 으로 지었음) 말지니 백천립(百千粒)이 이 1()을 좇아 생겨난다. 사왈 백천립이 이 1립을 좇아 생겨나거니와 미심하오니 이 1립은 어느 곳으로 좇아 생겨납니까. 위산이 하하(呵呵) 웃으며 방장으로 돌아갔다. 만후(晩後)에 상당해 이르되 대중이여, 쌀 속에 벌레()가 있다.

米頭; 또 곡두(穀頭)로 지음. 선림 중 전좌의 아래에서 직무를 맡아 1()의 미곡을 장리(掌理; 맡아서 처리함)하는 자 [상기전직위류].

 

師後參道吾問 如何是觸目菩提 道吾喚沙彌 沙彌應諾 吾曰 添淨缾水著 吾却問師 汝適來問什麽 師乃擧前問 道吾便起去 師從此惺覺 道吾曰 我疾作將欲去世 心中有物久而爲患 誰可除之 師曰 心物俱非除之益患 道吾曰 賢哉賢哉 于時始爲二夏之僧 因避世混俗于長沙瀏陽陶家坊 朝遊夕處人莫能識 後因洞山价和尙遣僧訪尋囊錐始露 乃擧之住石霜山 他日道吾將捨衆順世 以師爲嫡嗣 躬至石霜而就之 師日勤執侍全于師禮 暨道吾歸寂 學侶雲集盈五百衆廣語出別卷

執侍; 謂執巾甁而奉侍也 廣韻 執 持也 守也

 

스님이 후에 도오(道吾)를 참()해 묻되 무엇이 이 눈에 부딪히는 보리(觸目菩提)입니까. 도오가 사미를 불렀다. 사미가 응낙했다. 도오가 가로되 정병(淨缾)의 물을 더하거라. 도오가 도리어 스님에게 묻되 네가 적래(適來)에 무엇을 물었느냐. 스님이 이에 전문(前問)을 들자 도오가 바로 일어나 떠났다. 스님이 이로 좇아 성각(惺覺)했다. 도오가 가로되 내가 질작(疾作; 질병이 發作)하여 장차 거세(去世)하려고 한다. 심중에 물건이 있어 오래도록 우환이 되었나니 누가 가히 제거하겠는가. 사왈(師曰) 마음과 물건이 모두 그르므로(俱非) 이를 제거하면 더욱() 우환입니다. 도오가 가로되 현재(賢哉)로다, 현재로다. 때에(于時) 비로소 2(; 戒臘의 단위)의 승인이 되었다. 피세(避世; 세상을 피하다)로 인해 장사(長沙) 유양(瀏陽) 도가방(陶家坊)에서 혼속(混俗)했다. 아침에 노닐고 저녁에 거처했는데 사람들이 능히 알지 못했다. 후에 동산개(洞山价) 화상이 중을 보내어 방심(訪尋)함으로 인해 낭추(囊錐)가 비로소 드러났고() 이에 천거(薦擧)하여 석상산(石霜山)에 거주했다. 다른 날(他日) 도오(道吾)가 장차 사중(捨衆)하고 순세(順世)하려 하면서 스님을 적사(嫡嗣; 正統法嗣)로 삼았고 몸소 석상(石霜)에 이르러 그에게 나아갔다. 스님이 날마다 부지런히 집시(執侍)하면서 사례를 완전히 했다(全于師禮). 도오가 귀적(歸寂)함에 이르자() 학려(學侶)가 운집했고 오백중(五百衆)을 채웠다廣語別卷에 나온다

執侍; 이르자면 수건과 병을 잡고 받들어 모심임. 광운 집() (). ().

 

一日謂衆曰 一代時敎整理時人脚手 凡有其由皆落在今時 直至法身非身 此是敎家極則 我輩沙門全無肯路 若分卽差 不分卽坐著泥水 但由心意妄說見聞 僧問 如何是西來意 師曰 空中一片石 僧禮拜 師曰 會麽 曰不會 師曰 賴汝不會 若會卽打破爾頭 問如何是和尙本分事 師曰 石頭還汗出麽 問到遮裏爲什麽却道不得 師曰 脚底著口 問眞身還出世也無 師曰 不出世 曰爭奈眞身何 師曰 瑠璃缾子口 師居方丈 有僧在明窓外問 咫尺之間爲什麽不覩師顔 師曰 我道遍界不曾藏 僧擧問雪峯 遍界不曾藏意旨如何 雪峯曰 什麽處不是石霜 僧迴擧雪峯之語呈師 師曰 老大漢有什麽死急東禪齊云 只如雪峯是會石霜意不會石霜意 若會也他爲什麽道死急 若不會作麽生 雪峰豈可不會 然法且無異 奈以師承不同解之差別 他云遍界不曾藏 也須曾學來始得會 亂說卽不可

 

어느 날 대중에게 일러 가로디 일대시교(一代時敎)는 시인(時人)의 각수(脚手)를 정리(整理)한다. 무릇 그 유래(由來: )가 있으면 모두 금시(今時)에 떨어져 있다. 바로 법신이 비신(法身)에 이르러야 이것이 이 교가(敎家)의 극칙(極則)이다. 아배(我輩) 사문(沙門)은 전부 긍로(肯路)가 없나니 만약 나누면 곧 어긋나고 나누지 않으면 곧 이수(泥水)에 좌착(坐著; 은 조사)한다. 단지 심의(心意)로 말미암아 견문(見聞)을 망설(妄說)한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서래의(西來意)입니까. 사왈 공중(空中)의 일편석(一片石)이다. 중이 예배했다. 사왈 아느냐.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사왈 다행히() 네가 알지 못했나니 만약 안다면 곧 너의() 머리를 타파했으리라. 묻되 무엇이 이 화상의 본분사(本分事)입니까. 사왈 석두(石頭; )가 도리어 땀을 내느냐. 묻되 이 속에 이르러 무엇 때문에 도리어 말함을 얻지 못합니까. 사왈 발바닥(脚底)이 입에 붙었다(著口). 묻되 진신(眞身)이 도리어 출세합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출세하지 않는다. 가로되 진신임을 어찌하겠습니까. 사왈 유리병자(瑠璃缾子; 는 조사)의 주둥이다. 스님이 방장에 거처하는데 어떤 중이 명창(明窓) 밖에 있으면서 물었다. 지척지간(咫尺之間)이거늘 무엇 때문에 스님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까. 사왈 내가 말하노니 편계(徧界)에 일찍이 감추지 않았다. 중이 들어 설봉(雪峯)에게 묻되 편계에 일찍이 감추지 않았다는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설봉이 가로되 어느 곳이 이 석상이 아니냐. 중이 돌아와 설봉의 말을 들어 스님에게 보이자() 사왈 노대한(老大漢)이 무슨 사급(死急)함이 있는가東禪齊가 이르되 只如 雪峯이 이, 석상의 뜻을 알았는가, 석상의 뜻을 알지 못했는가. 만약 알았다면 그가 무엇 때문에 사급(死急)이라 말했으며 만약 알지 못했다면 어떠한가(作麽生). 설봉이 어찌 가히 알지 못했으리오. 그러나 법은 또 다름이 없으나 師承不同한 까닭으로 理解가 다름()을 어찌하겠는가. 그가 이르되 遍界에 일찍이 감추지 않았다를, 또한 꼭 일찍이 배워 와야 비로소 理會를 얻나니 亂說하면 곧 不可하다.

 

雲蓋問萬戶俱閉卽不問 萬戶俱開時如何 師曰 堂中事作麽生 曰無人接得渠 師曰 道也大殺道 也只道得八九成 曰未審和尙作麽生道 師曰 無人識得渠東禪齊云 只如石霜意作麽生 若道一般 前來爲什麽不許伊 若道別有道理 又只重說一遍 且道古人意作麽生問佛性如虛空如何 師曰 臥時卽有坐時卽無 問忘收一足時如何 師曰不共汝同盤 問風生浪起時如何 師曰 湖南城裏大殺鬧 有人不肯過江西 因僧擧洞山參次示衆曰 兄弟秋初夏末或東去西去 直須向萬里無寸草處去始得 又曰 只如萬里無寸草處 且作麽生去 師聞之乃曰 出門便是草 僧擧似洞山 洞山曰 大唐國內能有幾人東禪齊拈云 且道石霜會洞山意否 若道會去 只如諸上座每日折旋俯仰迎來送去 爲當落路下草 爲當一一合轍 若言不會洞山意 又爭解恁麽下語 還有會處麽 上座擬什麽處去 於此若明得可謂還鄕曲也 不見也會著箇語云 恁麽卽不去也師止石霜山二十年間 學衆有長坐不臥屹若株杌 天下謂之枯木衆也 唐僖宗聞師道譽 遣使齎賜紫衣 師牢讓不受 光啓四年戊申二月二十日己亥示疾告寂 壽八十有二 臘五十九 三月十五日葬于院之西北隅 勅諡普會大師 塔曰見相

落路下草; 同落路入草 謂陷入知識見解 言句糾纏

 

운개(雲蓋)가 묻되 만호(萬戶)가 모두 닫혔을 때는 곧 묻지 않습니다. 만호가 모두 열렸을 때는 어떻습니까. 사왈(師曰) 당중사(堂中事)는 어떠한가. 가로되 거()를 접득(接得)할 사람이 없습니다. 사왈 말은 매우 심하게 말했으나(大殺道) 또한 다만 8, 9를 성취(成就; )함을 얻었다. 가로되 미심하오니 화상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사왈 거()를 식득(識得)할 사람이 없다東禪齊가 이르되 只如 石霜의 뜻이 어떠한가. 만약 一般이라고 말한다면 前來에 무엇 때문에 그()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만약 달리 도리가 있다고 말한다면 또 다만 거듭 1(; . )을 설했다. 且道하라, 古人의 뜻이 어떠한가. 묻되 불성이 허공과 같다 함이 무엇입니까. 사왈 와시(臥時)엔 곧 있고 좌시(坐時)엔 곧 없다. 묻되 한 발을 거둠을 잊었을 땐 어떻습니까. 사왈 너와 함께하는 동반(同盤)이 아니다. 묻되 바람이 생기(生起)하고 파랑이 일어날 때 어떻습니까. 사왈 호남성(湖南城) 속이 대쇄(大殺; 매우 심하게) 시끄러워() 어떤 사람이 강서(江西)에 이름()을 수긍하지 않는다. 중이, 동산(洞山)이 참차(參次)에 시중(示衆)해 가로되 형제(兄弟)가 추초하말(秋初夏末)에 동거서거(東去西去)하려니와 바로 꼭 만 리에 촌초(寸草)도 없는 곳을 향해 가야 비로소 옳다. 또 가로되 지여(只如) 만 리에 촌초도 없는 곳을 또 어떻게 가느냐를 듦으로 인해 스님이 이를 듣고 이에 가로되 출문하면 바로 이 풀이다(出門便是草). 중이 동산(洞山)에게 들어 보이자 동산이 가로되 대당국 안에 능히 몇 사람이 있겠는가東禪齊拈云 且道하라 石霜洞山의 뜻을 알았는가. 만약 알았다고 말한다면 只如 諸上座가 매일 折旋俯仰(몸을 굽히거나 회전함과 고개 숙이거나 우러러 봄)하고 迎來送去하면서 마땅히 落路下草함이 되는가. 마땅히 하나하나 合轍함이 되는가. 만약 동산의 뜻을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또 어찌 이렇게 下語할 줄 알았겠는가. 도리어 안 곳이 있느냐. 上座가 어느 곳으로 가려고 하느냐. 이에서 만약 明得한다면 可謂 還鄕曲이려니와 不見했더라도 이 말을 붙일 줄 알아야 하나니 이르되 이러하다면 곧 가지 않겠습니다. 스님이 석상산에 머문() 20년 간에 학중(學衆)에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며 우뚝 솟기가 나무 그루터기(株杌) 같은 이가 있어 천하에서 이를 일러 고목중(枯木衆)이라 했다. 당 희종(僖宗)이 스님의 도예(道譽)를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자의(紫衣)를 가져서 주었으나(齎賜) 스님이 굳게 사양하며(牢讓) 받지 않았다. 광계(光啓) 4년 무신(戊申; 888) 220일 기해(己亥) 시질(示疾)하더니 고적(告寂; 入寂을 고함)했다. 나이는 82며 납은 59. 315일 사원의 서북 모퉁이에 안장(安葬; )했다. 칙시가 보회대사(普會大師)며 탑왈 견상(見相)이다.

落路下草; 낙로입초(落路入草)와 같음. 이르자면 지식과 견해, 언구의 규전(糾纏; 서로 뒤얽힘)에 함입(陷入).

 

潭州漸源仲興禪師 在道吾處爲典座 一日隨道吾往檀越家弔喪 師以手拊棺曰 生耶死耶 道吾曰 生也不道死也不道 師曰 爲什麽不道 道吾曰 不道不道 弔畢同迴途次 師曰 和尙今日須與仲興道 儻更不道卽打去也 道吾曰 打卽任打 生也不道死也不道 師遂打道吾數拳 道吾歸院令師且去 少間主事知了打汝 師乃禮辭往石霜 擧前語及打道吾之事 今請和尙道 石霜曰 汝不見道吾道 生也不道死也不道 師於此大悟乃設齋懺悔 師一日將鍬子於法堂上 石霜曰 作麽 師曰 覓先師靈骨來 石霜曰 洪波浩渺白浪滔天 覓什麽靈骨 師曰 正好著力 石霜曰 遮裏針劄不入著什麽力太原孚上座代云 先師靈骨猶存

 

담주(潭州) 점원중흥(漸源仲興) 선사. 도오(道吾)의 처소에 있으면서 전좌(典座)가 되었다. 어느 날 도오를 따라 단월가(檀越家)에 가서 조상(弔喪)했다. 스님이 손으로써 관()을 두드리며 가로되 살았는가, 죽었는가. 도오가 가로되 살았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죽었다고도 말하지 못한다. 사왈(師曰) 무엇 때문에 말하지 못합니까. 도오가 가로되 말하지 못한다, 말하지 못한다. 조위(弔慰; )를 마치고 함께 회도(迴途)하던 차에 사왈 화상이 금일 꼭 중흥(仲興)에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만일() 다시 말씀하지 않으면 곧 때리겠습니다(打去也). 도오가 가로되 때린다면 곧 때리는 대로 맡기지만 살았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죽었다고도 말하지 못한다. 스님이 드디어 도오를 몇 주먹 때렸다. 도오가 귀원(歸院)하자 스님으로 하여금 다만 떠나게 했다. 소간(少間; 조금 후)에 주사(主事)가 알고서(知了) 너를 때릴 것이다. 스님이 이에 예사(禮辭)하고 석상(石霜)에게 가서 전어(前語) 및 도오를 때린 일을 들었다. 이제 화상의 말씀을 청합니다. 석상이 가로되 네가 도오의 말씀을 보지 못했느냐. 살았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죽었다고도 말하지 못한다. 스님이 이에서 대오하고 이에 설재(設齋)하며 참회했다. 스님이 어느 날 법당상(法堂上; 은 방면을 표시)에서 초자(鍬子; )를 가졌다. 석상이 가로되 무엇하느냐(作麽). 사왈 선사(先師)의 영골(靈骨)을 찾으러 왔습니다. 석상이 가로되 큰 파도(洪波)가 호묘(浩渺; 넓고 아득함)하고 흰 물결이 도천(滔天; 하늘에 넘실거림)하거늘 무슨 선사의 영골을 찾느냐. 사왈 바로 착력(著力)하기에 좋습니다. 석상이 가로되 이 속엔 바늘로 찔러도(針劄) 들어가지 않거늘 무슨 힘을 붙이느냐太原孚 上座代云 先師靈骨이 아직 존재합니다.

 

祿淸和尙 僧問 不落道吾機請師道 師云 庭前紅莧樹 生葉不生華 良久云 會麽 僧云 不會 師云 正是道吾機 因什麽不會 僧禮拜 師便打云 須是老僧打爾始得

 

녹청화상(祿淸和尙). 승문(僧問) 도오(道吾)의 기()에 떨어지지 않고 스님의 말씀을 청합니다. 사운(師云) 뜰 앞의 홍현수(紅莧樹)가 잎은 내지만 꽃을 내지 않는다. 양구(良久)하고 이르되 아느냐. 승운(僧云) 알지 못합니다. 사운 바로 이 도오(道吾)의 기()이거늘 무엇 때문에(因什麽) 알지 못하느냐. 중이 예배했다. 스님이 바로 때리고 이르되 모름지기 이는 노승이 너를 때려야 비로소 옳다.

 

潭州前雲巖曇晟禪師法嗣

筠州洞山良价禪師 會稽人也 姓兪氏 幼歲從師 因念般若心經 以無根塵義問其師 其師駭異曰 吾非汝師 卽指往五洩山 禮默禪師披剃 年二十一嵩山具戒 遊方首謁南泉 値馬祖諱晨修齋次 南泉垂問衆僧曰 來日設馬師齋 未審馬師還來否 衆皆無對 師乃出對曰 待有是伴卽來 南泉聞已讚曰 此子雖後生 甚堪雕琢 師曰 和尙莫壓良爲賤

般若心經; 全稱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略稱般若心經 心經 玄奘譯 收於大正藏第八冊 本經之異譯本有六 然諸譯本中 仍以本經流傳最廣遠

修齋; 執行齋會也 會僧而供齋食曰齋會

 

균주(筠州) 동산양개(洞山良价) 선사. 회계(會稽) 사람이며 성이 유씨(兪氏). 어린 나이에 스승을 좇았고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움()으로 인해 근진(根塵; 六根六塵)이 없다는 뜻으로써 그 스승에게 묻자 그 스승이 놀라고 이상하게(駭異) 여겨 가로되 나는 너의 스승이 아니다. 곧 오설산(五洩山)으로 가라고 지시했고 묵선사(默禪師; 靈默)에게 참례(參禮)하여 피체(披剃)했다. 나이 21에 숭산(嵩山)에서 구계(具戒)했고 유방(遊方)하다가 처음에() 남천(南泉)을 참알했다. 마조(馬祖)의 휘신(諱晨; 諱日의 새벽)을 만나() 수재(修齋)하던 차에 남천이 중승(衆僧)에게 물음을 내려 가로되 내일 마조(馬師)의 재()를 베풀거니와 미심하나니 마조가 도리어 오시는가. 대중이 모두 대답이 없었다. 스님이 이에 나가서 대답해 가로되 짝()이 있음을 기다렸다가 곧 오십니다. 남천이 듣고 나서 칭찬해 가로되 이 자(; 對人稱呼)는 비록 후생(後生; 후배)이지만 심히 조탁(雕琢)을 감내(堪耐)하겠다. 사왈(師曰) 화상은 압량위천(壓良爲賤)하지 마십시오.

般若心經; 전칭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며 약칭이 반야심경ㆍ심경. 현장이 번역했고 대정장 제8책에 수록되었음. 본경의 이역본으로 여섯이 있음. 그러나 모든 역본 중에 그대로 본경의 유전(流傳)이 가장 광원(廣遠)

.修齋; 재회(齋會)를 집행함. 승인을 모아 재식(齋食)을 공양함을 가로되 재회임.

 

次參潙山問曰 頃聞忠國師有無情說法 良价未究其微 潙山曰 我遮裏亦有 只是難得其人 曰便請師道 潙山曰 父母所生口 終不敢道 曰還有與師同時慕道者否 潙山曰 此去石室相連有雲巖道人 若能撥草瞻風 必爲子之所重 旣到雲巖問 無情說法什麽人得聞 雲巖曰 無情說法無情得聞 師曰 和尙聞否 雲巖曰 我若聞 汝卽不得聞吾說法也 曰若恁麽卽良价不聞和尙說法也 雲巖曰 我說法汝尙不聞 何況無情說法也 師乃述偈呈雲巖曰 也大奇也大奇 無情解說不思議 若將耳聽聲不現 眼處聞聲方可知

撥草瞻風; 又曰撥草參玄 撥無明之荒草 瞻望佛祖之玄風也 又涉險路 瞻仰知識之德風也

眼處; 又作眼入 謂眼根對色 卽能見色 是名眼入 大乘五蘊論 復有十二處(又作十二入十二入處) 謂眼處色處 耳處聲處 鼻處香處 舌處味處 身處觸處 意處法處

 

다음에 위산(潙山)을 참()해 물어 가로되 요사이() 들으니 충국사(忠國師)가 무정설법(無情說法)이 있다 하거니와 양개(良价)가 그 미지(微旨)를 연구하지 못했습니다. 위산이 가로되 나의 이 속에도 또한 있지만 다만 이, 그 사람을 얻기 어렵다. 가로되 스님의 말씀을 바로 청합니다. 위산이 가로되 부모가 낳은 바의 입으론 마침내 감히 말하지 못한다. 가로되 도리어 스님과 더불어 동시에 모도(慕道)한 분()이 있습니까. 위산이 가로되 여기에서 가면 석실(石室)이 상련(相連)했는데 운암(雲巖) 도인이 있다. 만약 능히 발초첨풍(撥草瞻風)한다면 반드시 자네가 존중하는 바가 되리라. 이미 운암에 이르자 묻되 무정설법은 어떤 사람이 득문(得聞)합니까. 운암이 가로되 무정설법은 무정이 득문한다. 사왈(師曰) 화상은 듣습니까. 운암이 가로되 내가 만약 들으면 너는 곧 나의 설법을 득문(得聞)하지 못한다. 가로되 만약 이러하다면 곧 양개는 화상의 설법을 듣지 못하겠습니다. 운암이 가로되 나의 설법도 네가 오히려 듣지 못하거늘 어찌 하물며 무정설법이겠는가. 스님이 이에 술게(述偈)하여 운암에게 보여() 가로되 또한 기이하고 또한 기이하나니/ 무정의 해설(解說)은 부사의(不思議)하다/ 만약 귀를 가지고 들으면 소리가 나타나지 않고/ 안처(眼處)로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가히 안다.

撥草瞻風; 또 가로되 발초참현(撥草參玄)이니 무명의 거친 잡초를 헤치고 불조의 현풍(玄風)을 첨망(瞻望). 또 험로를 건너면서 지식의 덕풍을 첨앙함.

眼處; 또 안입(眼入)으로 지음. 이르자면 안근이 색을 대해 곧 능히 색을 보나니 이 이름이 안입임. 대승오온론. 다시 12(十二入十二入處로 지음)가 있다. 이르자면 안처(眼處)ㆍ색처(色處)ㆍ이처ㆍ성처ㆍ비처ㆍ향처ㆍ설처ㆍ미처ㆍ신처ㆍ촉처ㆍ의처ㆍ법처다.

 

遂辭雲巖 雲巖曰 什麽處去 師曰 雖離和尙未卜所止 曰莫湖南去 師曰無 曰莫歸鄕去 師曰無 曰早晩却來 師曰 待和尙有住處卽來 曰自此一去難得相見 師曰 難得不相見 又問雲巖 和尙百年後忽有人問還貌得師眞不 如何祇對 雲巖曰 但向伊道卽遮箇是 師良久 雲巖曰 承當遮箇事大須審細 師猶涉疑 後因過水覩影大悟前旨 因有一偈曰 切忌從他覓 迢迢與我疎 我今獨自往 處處得逢 渠今正是我 我今不是渠 應須恁麽會 方得契如如

; 他 第三人稱代詞 二指本來面目 眞如法身 此指二

 

드디어 운암(雲巖)에게 고별하자 운암이 가로되 어느 곳으로 가느냐. 사왈(師曰) 비록 화상을 여의지만 머물 곳(所止)을 점치지() 못했습니다. 가로되 호남(湖南)으로 가지 않느냐. 사왈 아닙니다(). 가로되 귀향(歸鄕)하지 않느냐. 사왈 아닙니다. 가로되 조만(早晩; 어느 때)에 돌아오느냐(却來). 사왈 화상이 주처(住處)가 있음을 기다렸다고 곧 오겠습니다. 가로되 이로부터 한 번 가면(一去) 상견함을 얻기 어렵다. 사왈 상견하지 않음을 얻기 어렵습니다. 또 운암에게 묻되 화상의 백년후(百年後; 死滅後) 홀연히 어떤 사람이 묻되 도리어 스님의 진(; 肖像)을 막득(貌得; 描寫해 그림)하겠는가 한다면 어떻게 지대(祇對; 응대)해야 합니까. 운암이 가로되 단지 그()를 향해 말하되 곧 저개가 이것이다(遮箇是) 하라. 스님이 양구(良久)했다. 운암이 가로되 저개사(遮箇事)를 승당(承當)하려면 매우() 심세(審細)함을 써야() 한다. 스님이 오히려 의심에 건넜다(涉疑). 후에 과수(過水)하다가 그림자를 봄으로 인해 전지(前旨)를 대오했다. 인하여 1게가 있어 가로되 그를 좇아 찾음을 간절히 꺼리나니/ 자꾸 멀어져 나와 소원하다/ 나는 이제 홀로 스스로 가노니/ 곳곳마다 거()를 만남을 얻는다/ ()는 이제 바로 이 나지만/ 나는 이제 이 거()가 아니다/ 응당 모름지기 이렇게 알아야/ 비로소 여여에 계합함을 얻는다.

; 1. ()니 제3인칭대사. 2. 본래면목ㆍ진여법신을 가리킴. 여기에선 2를 가리킴.

 

他日因供養雲巖眞 有僧問曰 先師道只遮是莫便是否 師曰是 僧曰 意旨如何 師曰 當時幾錯會先師語 曰未審先師還知有也無 師曰 若不知有爭解恁麽道 若知有爭肯恁麽道長慶稜云 旣知有爲什麽恁麽道 又云 養子方知父慈師在泐潭見初上座示衆云 也大奇也大奇 佛界道界不思議 師曰 佛界道界卽不問 且如說佛界道界 是什麽人 只請一言 初良久無對 師曰 何不急道 初曰 爭卽不得 師曰 道也未曾道 說什麽爭卽不得 初無對 師曰 佛之與道只是名字 何不引敎 初曰 敎道什麽 師曰 得意忘言 初曰 猶將敎意向心頭作病在 師曰 說佛界道界病大小 初因此遷化

養子方知父慈; 自己養育兒子 始知父母慈愛

佛界; 十界之一 又作佛法界 自覺覺他 覺行共滿之境界 又指佛之國土也

心頭; 心上 心間

 

다른 날(他日) 운암(雲巖)의 진(; 肖像)에 공양함으로 인해 어떤 중이 물어 가로되 선사(先師)가 말씀하되 다만 이것이 이것이다(只遮是) 하셨으니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莫便是否). 사왈(師曰) 그렇다. 승왈(僧曰)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사왈 당시에 거의 선사의 말씀을 잘못 알 뻔했다. 가로되 미심하오니 선사(先師)가 도리어 지유(知有)하셨습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만약 지유(知有)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말할 줄 아실 것이며(). 만약 지유(知有)했다면 어찌 이렇게 말함을 긍낙(肯諾; )하셨겠는가長慶稜이 이르되 이미 知有했다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가. 또 이르되 자식을 양육해야 비로소 父慈를 안다(養子方知父慈). 스님이 늑담(泐潭)에 있으면서 초상좌(初上座)가 시중(示衆)함을 보았는데 이르되 또한 매우 기이하고(也大奇) 또한 매우 기이하나니 불계(佛界)와 도계(道界; 의 경계)가 부사의(不思議)하다. 사왈 불계와 도계는 곧 묻지 않는다. 차여(且如; 假如) 불계와 도계를 설하는 이는 이 어떤 사람인가. 다만 일언(一言)을 청한다. ()가 양구(良久)하며 대답이 없었다. 사왈 왜 급히 말하지 않는가. 초가 가로되 다투면() 곧 얻지 못한다. 사왈 말도 일찍이 말하지 않았거늘 무슨(什麽) 다투면 곧 얻지 못한다고 설하느냐. 초가 대답이 없었다. 사왈 불()과 도()는 다만 이 명자(名字)거늘 왜 교()를 인용(引用; )하지 않느냐. 초가 가로되 교()에서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사왈 뜻을 얻고 말을 잊어라(得意忘言) 했다. 초가 가로되 오히려 교의(敎意)를 가지고 심두(心頭)를 향하면 병()을 짓는다. 사왈 불계와 도계를 설하는 병은 큰가(大小). 초가 이로 인해 천화(遷化)했다.

養子方知父慈; 자기가 아자(兒子; 아이)를 양육해야 비로소 부모의 자애를 앎.

佛界; 10()의 하나. 또 불법계로 지음. 자각각타(自覺覺他)와 각행(覺行)이 모두 원만한 경계임. 또 불타의 국토를 가리킴.

心頭; 심상(心上). 마음 사이(心間).

 

師至唐大中末 於新豐山接誘學徒 厥後盛化豫章高安之洞山今筠州也 因爲雲巖諱日營齋 有僧問 和尙於先師處得何指示 師曰 雖在彼中不蒙他指示 僧曰 旣不蒙指示 又用設齋作什麽 師曰 然雖如此焉敢違背於他 僧問 和尙初見南泉發迹 爲什麽與雲巖設齋 師曰 我不重先師道德 亦不爲佛法 只重不爲我說破 又因設忌齋 僧問 和尙爲先師設齋還肯先師也無 師曰 半肯半不肯 曰爲什麽不全肯 師曰 若全肯卽孤負先師也

 

스님이 당 대중(大中; 847-860) 말에 이르러 신풍산(新豐山)에서 학도(學徒)를 접유(接誘; 接引하고 敎導)했다. () 후 예장(豫章) 고안(高安)의 동산(洞山)지금의 筠州에서 성화(盛化)했다. 운암(雲巖)을 위해 휘일(諱日)에 영재(營齋; 를 짓다)함으로 인해 어떤 중이 묻되 화상이 선사(先師)의 처소에서 어떤 지시를 얻었습니까. 사왈(師曰) 비록 그 가운데 있었지만 그의 지시를 입지() 않았다. 승왈(僧曰) 이미 지시를 입지 않았다면 또 설재(設齋)를 써서() 무엇합니까(作什麽). 사왈 그러하여 비록 이와 같지만 어찌 감히 그를 위배하겠는가. 승문(僧問) 화상은 처음에 남천(南泉)을 뵙고 발적(發迹; 發達. 得意)했거늘 무엇 때문에 운암을 위해() 설재(設齋)합니까. 사왈 나는 선사(先師)의 도덕을 존중함이 아니며 또한 불법(佛法) 때문()도 아니며 다만 나를 위해 설파(說破)하지 않으셨음을 존중한다. 또 기재(忌齋)를 베풂으로 인해 중이 묻되 화상이 선사(先師)를 위해 설재(設齋)하시니 도리어 선사를 긍정(肯定; )합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반은 긍정하고 반은 긍정하지 않는다. 가로되 무엇 때문에 전부 긍정(全肯)하지 않습니까. 사왈 만약 전긍(全肯)하면 곧 선사를 저버림이다(孤負).

 

僧問 欲見和尙本來師 如何得見 曰年涯相似卽無阻矣 僧再擧所疑 師曰 不躡前蹤更請一問 僧無對 雲居代云 恁麽卽某甲不見和尙本來師也後皎上坐拈問長慶 如何是年涯相似者 長慶云 古人恁麽道 皎闍梨又向這裏覓箇什麽師又曰 還有不報四恩三有者無 若不體此意 何超始終之患 直須心心不觸物 步步無處所 常不間斷稍得相應 師問僧 什麽處來 曰遊山來 師曰 還到頂否 曰到 師曰 頂上還有人否 曰無人 師曰 恁麽卽闍梨不到頂也 曰若不到頂爭知無人 師曰 闍梨何不且住 曰某甲不辭住 西天有人不肯

四恩; 心地觀經二 四恩者 一父母恩 二衆生恩 三國王恩 四三寶恩 釋氏要覽中 四恩者 一父母恩 二師長恩 三國王恩 四施主恩

三有; 謂欲有 色有 無色有 義同三界 欲界天 人 修羅 畜生 餓鬼 地獄 各隨其業因而受果報 稱爲欲有 色界四禪諸天 雖離欲界粗染之身 而有淸淨之色 稱爲色有 無色界四空諸天 雖無色質爲礙 亦隨所作之因 受其果報 稱爲無色有 [大智度論三 集異門足論四 大毘婆沙論六十]

 

승문(僧問) 화상의 본래사(本來師)를 보려고 합니다. 어찌해야 득견(得見)합니까. 가로되 연애(年涯; 年齡)가 상사(相似)해야 곧 막힘()이 없다. 중이 의심하는 바를 다시 들었다. 사왈(師曰) 앞의 발자취()를 밟지 말고 다시 일문(一問)을 청하라. 중이 대답이 없었다. 운거(雲居)가 대운(代云)하되 이러하다면 곧 모갑은 화상의 본래사(本來師)를 보지 못합니다후에 皎上坐가 들어 長慶에게 묻되 무엇이 이 年涯相似한 자입니까. 장경이 이르되 古人이 이렇게 말했거늘 皎闍梨는 또 這裏를 향해 저 무엇을 찾느냐. 스님이 또 가로되 도리어 사은(四恩)과 삼유(三有)에 보은(報恩)하지 않을 자가 있느냐, 없느냐. 만약 이 뜻을 체득(體得)하지 못한다면 어찌 시종지환(始終之患)을 초월하겠는가. 바로 모름지기 심심(心心)이 사물에 접촉하지 않고 보보(步步)가 처소(處所)가 없으며 늘 간단(間斷)하지 않아야 조금() 상응함을 얻는다. 스님이 중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유산(遊山)하고 왔습니다. 사왈 도리어 산정(山頂; )에 이르렀는가. 가로되 이르렀습니다. 사왈 정상(頂上)에 도리어 사람이 있더냐. 가로되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왈 이러하다면 곧 사리(闍梨)는 산정에 이르지 못했다. 가로되 만약 산정에 이르지 않았다면 어찌 사람이 없는 줄 알겠습니까. 사왈 사리는 왜 다만 거주하지 않았는가. 가로되 모갑이 거주를 사양(辭讓; )하지 않으나 서천(西天)에 어떤 사람이 수긍하지 않습니다.

四恩; 심지관경2. 4()이란 것은 1은 부모은이며 2는 중생은이며 3은 국왕은이며 4는 삼보은이다. 석씨요람중. 4()이란 것은 1은 부모은이며 2는 사장은(師長恩)이며 3은 국왕은이며 4는 시주은이다.

三有; 이르자면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니 뜻이 3계와 같음. 욕계(欲界)의 천ㆍ인ㆍ수라ㆍ축생ㆍ아귀ㆍ지옥이 각기 그 업인(業因)을 따라 과보를 받음을 일컬어 욕유라 함. 색계 4()의 제천(諸天)이 비록 욕계의 조염(粗染)의 몸을 여의었으나 청정한 색이 있음을 일컬어 색유라 함. 무색계의 4() 제천이 비록 색질(色質)에 장애됨이 없으나 또한 소작(所作)의 인()을 따라 그 과보를 받음을 일컬어 무색유라함 [대지도론3. 집이문족론4. 대비바사론60].

 

師問太長老曰 有一物 上拄天下拄地 黑如漆 常在動用中 過在什麽處 太曰 過在動用同安顯別云 不知師乃咄云 出去 問如何是西來意 師曰 大似駭雞犀 師問雪峯 從什麽處來 雪峯曰 天台來 師曰 見智者否 曰義存喫鐵棒有分 僧問 蛇吞蝦蟇 救卽是不救卽是 師曰 救卽雙目不覩 不救卽形影不彰 因夜間不點燈 有僧出問話退後 師令侍者點燈 乃召適來問話僧出來 其僧近前 師曰 將取三兩粉來與遮箇上坐 其僧拂袖而退 自此惺發玄旨 遂罄捨衣資設齋 得三年後辭師 師曰 善爲 時雪峯侍立次 問曰 只如遮僧辭去幾時却來 師曰 他只知一去不解再來 其僧歸堂就衣鉢下坐化 雪峯上報師 師曰 雖然如此 猶較老僧三生在

駭雞犀; 抱朴子十七曰 又通天犀角有一赤理如糸延 有自本徹末 以角盛米 置群雞中 雞欲啄之 未至數寸 卽驚卻退 故南人或名通天犀爲駭雞犀 以此犀角著谷(通穀)積上 百鳥不敢集 大霧重露之夜 以置中庭 終不沾濡也 此犀獸在深山中 晦冥之夕 其光正赫然如炬火也 註心賦二 有駭雞犀枕 四面觀之 其形常正

智者; 智者大師 開皇十一年晉王廣任總江淮 十一月二十三日於楊州總管金城 請大師設僧會 授菩薩戒 奉師號曰智者

衣資; 謂錢財經費

坐化; 謂端坐時遷化 又作坐脫

 

스님이 태장로(太長老)에게 물어 가로되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는 하늘을 버티고 아래론 땅을 버티고 검기로는 칠()과 같고 늘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있다. 허물이 어느 곳에 있느냐. 태왈(太曰) 허물이 동용(動用)에 있습니다同安顯(紹顯)別云 알지 못합니다. 스님이 이에 꾸짖으며() 이르되 나가거라. 묻되 무엇이 이 서래의(西來意)입니까. 사왈(師曰) 해계서(駭雞犀)와 매우 흡사하다(大似). 스님이 설봉(雪峯)에게 묻되 어느 곳으로부터 왔느냐. 설봉이 가로되 천태(天台)에서 왔습니다. 사왈 지자(智者)를 보았느냐. 가로되 의존(義存)이 철방(鐵棒)을 먹을 분한(分限; )이 있습니다. 승문(僧問) 뱀이 두꺼비(蝦蟇)를 삼키면 구제함이 곧 옳습니까(), 구제하지 않음이 곧 옳습니까. 사왈 구제하면 곧 두 눈(雙目)으로 보지() 못하고 구제하지 않으면 곧 형영(形影)이 나타나지() 않는다. 야간에 점등(點燈)하지 않음으로 인해 어떤 중이 나와서 문화(問話)하고 물러간 후에 스님이 시자를 시켜 점등하게 하고 이에 적래(適來; 조금 전) 문화(問話)한 중을 불러 오게 했다. 그 중이 근전(近前)하자 사왈 이에() 세 냥()의 분()을 취해 와서 이(遮箇) 상좌(上坐)에게 주어라. 그 중이 소매를 떨치고 물러갔다. 이로부터 현지(玄旨)를 성발(惺發; 領會)했고 드디어 의자(衣資)를 모두() 희사(喜捨; )하여 설재(設齋)했고 3년이 지나() 스님에게 고별했다. 사왈 잘 하거라(善爲). 때에 설봉이 시립(侍立)하던 차에 문왈(問曰) 지여(只如) 이 중(遮僧)이 고별하고 가면 어느 때에 돌아옵니까(却來). 사왈 그는 다만 한 번 갈 줄 만 알고 다시 올 줄 알지 못한다(不解再來). 그 중이 귀당(歸堂)하여 의발하(衣鉢下)로 나아가 좌화(坐化)했다. 설봉이 올라와 스님에게 보고하자 사왈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으나 오히려 노승과 삼생(三生) 어긋나() 있다.

駭雞犀; 포박자17에 가로되 또 통천서(通天犀)의 뿔에 실이 늘어진 것과 같은 하나의 붉은 결이 있는데 뿌리로부터 끝까지 통함이 있다. 뿔에다 쌀을 채워 뭇 닭 가운데 두면 닭이 그것을 쪼으려다가 몇 치에 이르지 않아서 곧 놀라 물러난다. 고로 남인(南人)이 혹 이름해 통천서(通天犀)를 혜계서(駭雞犀)라 한다. 이 무소의 뿔(犀角)을 곡식(; 과 통함) 더미 위에 놓으면 온갖 새가 감히 모이지 못한다. 심한 안개와 중첩한 이슬의 밤에 안뜰에 놓으면 마침내 젖지 않는다. 이 무소 짐승은 깊은 산중에 있으며 어두운 밤에 그 빛이 바로 환해서(赫然) 마치 횃불과 같다. 주심부2. 혜계서의 베개(駭雞犀枕)가 있는데 사면에서 그것을 보면 그 형상이 늘 바르다.

智者; 지자대사(智者大師; 智顗)니 개황 11년 진왕 광()이 총강회(總江淮)에 임명되었고 1123일 양주(楊州) 총관금성(總管金城)에서 대사를 청해 승회(僧會)를 베풀고 보살계를 받았으며 스님을 받들어 호해 가로되 지자라 했음.

衣資; 이르자면 전재(錢財)의 경비(經費).

坐化; 이르자면 단좌(端坐)했을 때 천화(遷化). 또 좌탈(坐脫)로 지음.

 

雪峯上問訊 師曰 入門來須得語 不得道早箇入了也 雪峯曰 義存無口 師曰 無口且從還我眼來 雪峯無語雲居膺別前語云 待某甲有口卽道 長慶稜別云 恁麽卽某甲謹退師問僧 什麽處來 曰三祖塔頭來 師曰 旣從祖師處來 又要見老僧作什麽 曰祖師卽別 學人與和尙不別 師曰 老僧欲見闍梨本來師還得否 曰亦須待和尙自出頭來始得 師曰 老僧適來暫時不在 雲居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曰 闍梨向後有把茅蓋頭 或有人問闍梨 且作麽生向伊道 官人問 有人修行否 師曰 待公作男子卽修行 僧問 承古有言 相逢不擎出 擧意便知有時如何 師乃合掌頂戴 師問德山侍者 從何方來 曰德山來 師曰 來作什麽 曰孝順和尙來 師曰 世間什麽物最孝順 侍者無對

問訊; 合掌而口問安否也 但敬揖以表問安否之心 亦云問訊 說文 訊 問也

 

설봉(雪峯)이 올라와 문신(問訊)했다. 사왈(師曰) 입문(入門)하여 왔으면 꼭 득어(得語)해야 하지만 일찍(早箇; 는 조사) 들었다(入了)라고 말함을 얻지 말아야 한다. 설봉이 가로되 의존(義存)은 입이 없습니다. 사왈(師曰) 입이 없음은 다만() 좇겠거니와 나에에 눈을 송환(送還)해 오너라. 설봉이 말이 없었다雲居膺(道膺)前語와 다르게 이르되 某甲이 입이 있음을 기다렸다가 곧 말하겠습니다. 長慶稜別云 이러하다면 곧 모갑은 삼가 물러가겠습니다(謹退). 스님이 중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가로되 3()의 탑두(塔頭; 後綴)에서 옵니다. 사왈 이미 조사의 처소로 좇아왔거늘 또 노승을 보고자 하여 무엇하겠느냐. 가로되 조사는 곧 다르지만() 학인과 화상은 다르지 않습니다. 사왈 노승이 사리(闍梨)의 본래사(本來師)를 보고자 하는데 도리어 얻겠느냐. 가로되 또한 꼭 화상이 스스로 출두(出頭)하여 오심을 기다려야 비로소 옳습니다. 사왈 노승이 적래(僧適)에 잠시 있지 않았다. 운거(雲居)가 묻되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입니까. 사왈 사리(闍梨)가 향후(向後)에 파모개두(把茅蓋頭)함이 있는데 혹 어떤 사람이 사리에게 묻는다면 또() 어떻게(作麽生) ()를 향해 말하겠는가. 관인(官人)이 묻되 수행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왈 공(男子)이 남자가 됨을 기다렸다가 곧 수행한다. 승문(僧問) 듣건대() 고인(古人; . 丹霞天然)이 말이 있기를 상봉하여 경출(擎出)하지 않아도 거의(擧意)하면 바로 지유(知有)한다 했을 때 어떻습니까. 스님이 이에 합장하여 정대(頂戴; 머리에 이다)했다. 스님이 덕산(德山)의 시자에게 묻되 어느 방면으로부터 오느냐. 가로되 덕산에서 옵니다. 사왈 와서 무엇하려느냐. 가로되 화상에게 효순(孝順)하려고 왔습니다. 사왈 세간에서 어떤 물건이 가장 효순한가. 시자가 대답이 없었다.

問訊; 합장하면서 입으로 안부를 물음임. 다만 경읍(敬揖)하면서 안부를 표문(表問)하는 마음도 또 이르되 문신임. 설문(說文) () ()이다.

 

師有時云 體得佛向上事 方有些子語話分 僧便問 如何是語話 師曰 語話時闍梨不聞 曰和尙還聞否 師曰 待我不語話時卽聞 僧問 如何是正問正答 師曰 不從口裏道 曰若有人問 師還答否 師曰 也未問 問如何是從門入者非寶 師曰 便休便休 師問講維摩經僧曰 不可以智知 不可以識識 喚作什麽語 對曰 讚法身語 師曰 法身是讚何用更讚 師有時垂語曰 直道本來無一物 猶未消得他鉢袋子 僧便問 什麽人合得 師曰 不入門者 僧曰 只如不入門者還得也無 師曰 雖然如此不得不與他 師又曰 直道本來無一物 猶未消得他衣鉢 遮裏合下得一轉語 且道下得什麽語 有一上坐下語九十六轉不愜師意 末後一轉始可師意 師曰 闍梨何不早恁麽道 有一僧聞請擧 如是三年執侍巾甁終不爲擧 上坐因有疾 其僧曰 某甲三年請擧前話不蒙慈悲 善取不得惡取 遂持刀向之曰 若不爲某甲擧 卽便殺上坐也 上坐悚然曰 闍梨且待 我爲汝擧 乃曰 直饒將來亦無處著 其僧禮謝

佛向上事; 略稱佛向上 謂成佛雖爲修行之理想 然眞正之修行竝不執著於此 而應超越此一境界 一般形容超佛越祖 解脫佛縛法縛而眞正得證之人 稱爲佛向上人 又修持佛向上之道者 稱爲佛向上機 機 根機之意

鉢袋子; 卽鉢袋 子 助詞 本爲僧人盛裝鉢盂 以便於攜行之囊袋 轉喩正式傳承之禪法

 

스님이 어떤 때 이르되 불향상사(佛向上事)를 체득(體得)해야 비로소 조금(些子) 어화(語話)할 분한(分限)이 있다. 중이 바로 묻되 무엇이 이 어화(語話)입니까. 사왈(師曰) 어화할 때 사리(闍梨)는 듣지 못한다. 가로되 화상은 도리어 듣습니까. 사왈 내가 어화하지 않을 때를 기다려야 곧 듣는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정문정답(正問正答)입니까. 사왈 입속으로 좇아 말하지 못한다. 가로되 만약 어떤 사람이 묻는다면 스님이 도리어 답합니까. 사왈 또한 묻지 않았다. 묻되 무엇이 이 문으로 좇아 들어온 것은 보배가 아님입니까. 사왈 바로 쉬어라(便休), 바로 쉬어라. 스님이 유마경을 강설하는 중에게 물어 가로되 가히 지()로써 알지() 못하고 가히 식()으로써 식()하지 못한다(維摩經下에 나옴) 하니 무슨 말이라고 불러 짓느냐. 대왈(對曰) 법신을 칭찬(稱讚; )한 말입니다. 사왈 법신이 이 찬()이거늘 어찌 다시 찬()을 쓰느냐. 스님이 어떤 때 수어(垂語)하여 가로되 바로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 慧能語)고 말하더라도 오히려 그(五祖)의 발대자(鉢袋子)를 소득(消得; 삭이다)하지 못한다. 중이 바로 묻되 어떤 사람이 합당히 얻습니까. 사왈 입문(入門)하지 못한 자다. 승왈(僧曰) 지여(只如) 입문하지 못한 자가 도리어 얻습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비록 그러하여 이와 같으나 그에게 주지 않음을 얻지 못한다. 스님이 또 가로되 바로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말하더라도 오히려 그의 의발을 소득(消得)하지 못한다. 이 속(遮裏)에 합당히 1전어(轉語)를 내려야(下得) 하리니 그래 말하라, 무슨 말을 내려야 하느냐. 1상좌가 있어 96(; 양사. ) 하어(下語)했으나 스님의 뜻에 맞지() 않았고 말후의 하나가 비로소() 스님의 뜻에 적합(適合; )했다. 사왈 사리(闍梨)는 왜 일찍 이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어떤 1()이 듣고서 들기를 청했다(請擧). 이와 같이 3년 동안 건병(巾甁)을 집시(執侍)했으나 마침내 들지() 않았고 상좌가 인하여 질병이 있었다. 그 중이 가로되 모갑이 3년 동안 전화(前話)를 들기를 청했으나 자비를 입지 못했다. 선취(善取)함을 얻지 못했으니 악취(惡取)하리라. 드디어 칼을 가지고 그를 향해 가로되 만약 모갑을 위해 들지 않으면 곧 바로 상좌를 죽일 것이다. 상좌가 송연(悚然)하여 가로되 사리(闍梨), 다만 기다려라(且待). 내가 너를 위해 들겠다. 이에 가로되 직요(直饒; 設令) 가지고 오더라도 또한 둘() 곳이 없다 하였네. 그 중이 예사(禮謝)했다.

佛向上事; 약칭이 불향상(佛向上). 이르자면 성불이 비록 수행의 이상이 되지만 그러나 진정한 수행은 모두 이에 집착하지 않고 응당 이 한 경계를 초월해야 함. 일반적으로 초불월조(超佛越祖)를 형용함. 불박법박(佛縛法縛)에서 해탈하여 진정으로 증득한 사람을 일컬어 불향상인이라 함. 또 불향상의 도를 수지(修持)하는 자를 일컬어 불향상기(佛向上機)라 함. ()는 근기의 뜻.

鉢袋子; 즉 발대(鉢袋)니 자()는 조사. 본래 승인이 발우를 성장(盛裝; 담다)하여 휴대하고 다니기에 편리한 주머니가 됨. ()하여 정식으로 전승(傳承)한 선법에 비유함.

 

僧問 師尋常敎學人行鳥道 未審如何是鳥道 師曰 不逢一人 曰如何行 師曰 直須足下無絲去 曰只如行鳥道莫便是本來面目否 師曰 闍梨因什麽顚倒 曰什麽處是學人顚倒 師曰 若不顚倒因什麽認奴作郞 曰如何是本來面目 師曰 不行鳥道 師謂衆曰 知有佛向上人方有語話分 時有僧問 如何是佛向上人 師曰 非常保福別云 佛非 法眼別云 方便呼爲佛師問僧 去什麽處來 僧曰 製鞋來 師曰 自解依他 僧曰 依他 師曰 他還指敎闍梨也無 僧曰 允卽不違 僧來擧 問茱萸如何是沙門行 茱萸曰 行卽不無人覺卽乖 師令彼僧去 進語曰 未審是什麽行 茱萸曰 佛行佛行 僧迴擧似師 師曰 幽州猶似可 最苦是新羅東禪齊拈云 此語還有疑訛也無 若有且道什麽處不得 若無他又道最苦是新羅 還點檢得出麽 他道行卽不無人覺卽乖 師令再問是什麽行 又道佛行 那僧是會了問不會而問 請斷看僧却問師 如何是沙門行 師曰 頭長三尺頸長二寸有僧擧問歸宗權和尙 只如洞山意作麽生 權云 封皮厚二寸

鳥道; 禪道至難 險如鳥道 鳥道者 至道寥廓 如空中鳥跡也 洞山悟本語錄曰 我有三路接人 鳥道玄路展手 洞山悟本語錄玄中銘序曰 寄鳥道而寥空 以玄路而該括 然雖空體寂然 不乖群動 同銘曰 擧足下足 鳥道無殊 坐臥經行 莫非玄路 祖庭事苑四云 鳥道 猶虛空也 南中入志曰 鳥道四百里 以其險絶獸尙無蹊 特上有飛鳥之道

足下無絲; 謂行走自由自在 毫無束縛 是不爲物拘 處處通暢的禪悟境界

佛向上人; 體得佛向上事人

幽州猶似可 最苦是新羅; 謂最惡之幽州猶似樂 最好之新羅猶似苦

 

승문(僧問) 스님이 심상(尋常)에 학인으로 하여금 조도(鳥道)를 행하게 하십니다. 미심하오니 무엇이 이 조도(鳥道)입니까. 사왈(師曰) 한 사람도 만나지 않음이다. 가로되 어떻게 행합니까. 사왈 바로 모름지기 발 아래 무사(足下無絲)히 가야 한다. 가로되 지여(只如) 조도를 행함이 바로 이 본래면목이 아니겠습니까. 사왈 사리(闍梨)는 무엇으로 인해 전도(顚倒)하는가. 가로되 어느 곳이 이 학인의 전도(顚倒)입니까. 사왈 만약 전도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인해 인노작랑(認奴作郞; 奴僕을 인정해 주인으로 삼다)하는가. 가로되 무엇이 이 본래면목입니까. 사왈 조도(鳥道)도 행하지 않음이다. 스님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불향상인(佛向上人)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이라야 바야흐로 어화(語話)할 분한(分限)이 있다. 때에 어떤 중이 묻되 무엇이 이 불향상인입니까. 사왈 비상(非常)이다保福別云 佛非. 法眼別云 방편으로 호칭해 이라 한다. 스님이 중에게 묻되 어느 곳에 갔다 왔느냐. 승왈(僧曰) 제혜(製鞋; 신을 製作하다)하고 왔습니다. 사왈 스스로 아느냐(自解), 남에게 의탁했느냐(依他). 승왈 의타(依他)했습니다. 사왈 그가 도리어 사리(還闍)에게 지교(指敎; 指導하여 가르침)했느냐, 또는 아니냐. 승왈 윤허(允許; )하면 곧 위배(違背)하지 않습니다. 중이 와서 들었다(), 수유(茱萸)에게 묻되 무엇이 이 사문행(沙門行)입니까. 수유가 가로되 행()은 곧 없지 않으나 사람이 깨치면 곧 어긋난다(). 스님이 그 중으로 하여금 가서 진어(進語; 말을 진행)하게 하였으니 가로되 미심하오니 이 무슨 행입니까. 수유가 가로되 불행(佛行)이다. 불행이다. 종이 돌아와 스님에게 들어 보이자 사왈 유주(幽州)는 오히려 가한 것 같으나 최고(最苦)는 이 신라다(幽州猶似可 最苦是新羅)東禪齊拈云 此語에 도리어 疑訛(疑惑訛謬)가 있느냐 또는 아니냐. 만약 있다면 且道하라, 어느 곳이 적합하지() 못한가. 만약 없다면 그가 또 말하되 最苦는 이 新羅라 했다. 도리어 點檢하여 냄을 얻겠는가. 그가 말하되 은 곧 없지 않으나 사람이 깨치면 곧 어긋난다. 스님이 再問하게 하되 이 무슨 행인가. 또 말하되 佛行이다. 那僧은 이 알고 나서 물었는가, 알지 못하고 물었는가. 청컨대 판단해 보아라. 중이 도리어 스님에게 묻되 무엇이 이 사문행(沙門行)입니까. 사왈 머리의 길이는 3()이며 목의 길이는 2()이다어떤 중이 들어 歸宗權(澹權) 화상에게 묻되 只如 洞山의 뜻이 무엇입니까. 權云 봉피(封皮; 물건을 싼 종이)의 두께가 2촌이다

鳥道; 선도(禪道)가 지극히 어려워 험하기가 조도(鳥道)와 같음. 조도란 것은 지도(至道)가 요확(寥廓)하여 마치 공중의 새 자취와 같음. 동산오본어록에 가로되 나에게 3()가 있어 사람을 접인한다. 조도(鳥道)ㆍ현로(玄路)ㆍ전수(展手). 동산오본어록 현중명서(玄中銘序)에 가로되 조도(鳥道)를 기탁하여 요공(寥空; 텅 비어 휑함)하고 현로(玄路)로써 해괄(該括)하였다. 그렇게 비록 공체(空體)가 적연하지만 무리가 움직임에 위배되지 않는다. 동명(同銘)에 가로되 거족하족(擧足下足)이 조도(鳥道)와 다름 없고 좌와경행(坐臥經行)이 현로(玄路)가 아님이 없다. 조정사원4에 이르되 조도는 허공과 같다. 남중입지(南中入志)에 가로되 조도가 4백 리니 그것이 험악하여 짐승도 오히려 길이 없다. 특별히 위에 비조(飛鳥)의 길이 있다.

足下無絲; 이르자면 행주(行走)하면서 자유자재라 터럭만큼도 속박이 없음. 이는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곳곳에 통창(通暢)하는 선오(禪悟)의 경계.

佛向上人; 불향상사(佛向上事)를 체득(體得)한 사람.

幽州猶似可 最苦是新羅; 이르자면 최악(最惡)의 유주(幽州)는 오히려 즐거운 것 같고 최호(最好)의 신라(新羅)는 오히려 괴로운 것 같음.

 

師見幽上坐來 遽起向禪床後立 幽曰 和尙爲什麽迴避學人 師曰 將謂闍梨覓老僧 問如何是玄中又玄 師曰 如死人舌 師洗鉢次見兩烏爭蝦蟇 有僧便問曰 遮箇因什麽到恁麽地 師曰 只爲闍梨 僧問 如何是毘盧師法身主 師曰 禾莖粟榦 問三身之中阿那身不墮衆數 師曰 吾常於此切僧問曹山 先師道 吾常於此切 意作麽生 曹山云 要頭卽斫將去 又問雪峯 雪峯以拄杖擬之云 我亦曾到洞山來師因看稻田次 朗上坐牽牛 師曰 遮箇牛須好看 恐喫稻去 朗曰 若是好牛應不喫稻 師問僧 世間何物最苦 僧曰 地獄最苦 師曰 不然 曰師意如何 師曰 在此衣線下不明大事 是名最苦 師問僧 名什麽 僧曰 某甲 師曰 阿那箇是闍梨主人公 僧曰 見祇對次 師曰 苦哉苦哉 今時人例皆如此 只是認得驢前馬後將爲自己 佛法平沈此之是也 客中辨主尙未分 如何辨得主中主 僧便問 如何是主中主 師曰 闍梨自道取 僧曰 某甲道得卽是客中主 如何是主中主 師曰 恁麽道卽易 相續也大難雲居別云 某甲道得 不是客中主

衣線; 指袈裟

主人公; 禪家提倡自心是佛 自我爲主 因稱自心爲主人公

驢前馬後; 驢前馬後漢 謂隨逐於驢馬前後之奴隸 禪宗用以指斥追從他人言行 而無自己獨特之機用者

平沈; 一沈沒 二衰落 三消失 此指二

主中主; 五家宗旨纂要中洞宗四賓主 主中主 物我雙忘 人境俱泯 不涉正偏位也

客中主; 賓中主 五家宗旨纂要中洞宗四賓主 賓中主 用中體也

 

스님이 유상좌(幽上坐)가 옴을 보고 급히() 일어나 선상의 뒤를 향해 섰다. 유왈(幽曰) 화상은 무엇 때문에 학인을 회피(迴避)하십니까. 사왈(師曰) 다만 이르나니(將謂) 사리(闍梨)가 노승을 찾아서이다. 묻되 무엇이 이 현중(玄中)에 우현(又玄)입니까. 사왈 사인(死人)의 혀와 같다. 스님이 세발(洗鉢)하던 차에 두 까마귀가 두꺼비(蝦蟇)를 다툼을 보았다. 어떤 중이 바로 물어 가로되 이것(遮箇)이 무엇으로 인해 임마지(恁麽地; 이러한 地境)에 이르렀습니까. 사왈 다만 사리(闍梨) 때문이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비로()毘盧의 스승이며 법신의 주인입니까. 사왈 벼 줄기와 조 줄기다(禾莖粟榦). 묻되 3() 중에 어느 신(阿那身)이 중수(衆數)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사왈 내가 늘 여기에 간절하다중이 曹山에게 묻되 先師가 말씀하신 내가 늘 여기에 간절하다 한 뜻이 무엇입니까. 조산이 이르되 머리를 요한다면 곧 베어() 가지고 가거라. 雪峯에게 묻자 설봉이 주장자로써 그를 향하며() 이르되 나도 또한 일찍이 洞山에 이르렀다가 왔다. 스님이 도전(稻田)을 보던 차에 낭상좌(朗上坐)가 견우(牽牛)함으로 인해 사왈 저개(遮箇; )의 소를 잘 봄(好看)을 써라, ()를 먹을까 염려스럽다. 낭왈(朗曰) 만약 이 호우(好牛)라면 응당 벼를 먹지 않을 것입니다. 스님이 중에게 묻되 세간에서 어떤 물건이 가장 괴로운가. 승왈(僧曰) 지옥이 가장 괴롭습니다. 사왈 그렇지 않다. 가로되 스님의 뜻은 어떻습니까. 사왈 이 의선(衣線; 袈裟) 아래 있으면서 대사(大事)를 밝히지 못하면 이 이름이 가장 괴로움이다. 스님이 중에게 묻되 이름이 무엇인가. 승왈 모갑입니다. 사왈 어느 것(阿那箇)이 이 사리(闍梨)의 주인공(主人公)인가. 승왈 현재(見在; ) 지대(祇對; 응대)하는 차()입니다. 사왈 고재(苦哉)로다, 고재로다. 금시인(今時人)이 모두 다(例皆; ) 이와 같나니 다만 이 여전마후(驢前馬後)를 인득(認得; 認定)하여 장차 자기로 삼으니 불법이 평침(平沈)한다 함이 이것이 이것이다(此之是也). 객중(客中)에 변주(辨主)함도 오히려 분별하지 못하거늘 어떻게 주중주(主中主)를 변득(辨得)하겠는가. 중이 바로 묻되 무엇이 이 주중주입니까. 사왈 사리(闍梨)가 스스로 말하라(道取; 는 조사). 승왈(僧曰) 모갑이 말하면(道得) 즉시(卽是) 객중주(客中主)입니다. 무엇이 이 주중주입니까. 사왈 이렇게 말함은 곧 쉽지만 상속(相續)하기가 매우 어렵다(大難)雲居別云 某甲이 말함을 얻음은 이 客中主가 아닙니다.

衣線; 가사(袈裟)를 가리킴.

主人公; 선가에선 자기의 마음이 이 부처라고 제창(提倡; 提唱)하며 자아(自我)를 주()로 삼는지라 인하여 자기의 마음을 일컬어 주인공이라 함.

驢前馬後; 여전마후한(驢前馬後漢)이니 이르자면 나귀나 말의 전후를 따라 쫓는 노예임. 선종에서 인용하여 타인의 언행을 추종(追從)하고 자기의 독특한 기용(機用)이 없는 자를 가리킴.

平沈; 1 침몰(沈沒). 2. 쇠락(衰落). 3. 소실(消失). 여기에선 2를 가리킴.

主中主; 오가종지찬요중 동종사빈주(洞宗四賓主). 주중주(主中主) 물아(物我)를 쌍망(雙忘)하고 인경(人境)이 구민(俱泯)하여 정편위(正偏位)에 건너지 않음이다.

客中主; 빈중주(賓中主)와 같음. 오가종지찬요중 동종사빈주(洞宗四賓主). 빈중주(賓中主) 용중(用中)의 체().

 

師示疾令沙彌去雲居傳語 又曰 他忽問汝和尙有何言句 但道雲巖路欲絕也 汝下此語須遠立 恐他打汝去 沙彌領旨去 語未終早被雲居打一棒 沙彌無語同安顯代云 恁麽卽雲巖一枝不墜也 後雲居錫云 上座且道 雲巖路絕不絕 崇壽稠云 古人打此一棒意作麽生師將圓寂謂衆曰 吾有閑名在世 誰爲吾除得 衆皆無對 時沙彌出曰 請和尙法號 師曰 吾閑名已謝石霜云 無人得他肯 雲居云 若有閑名非吾先師 曹山云 從古至今無人辨得 疎山云 龍有出水之機 無人辨得問 和尙違和還有不病者也無 師曰 有 僧曰 不病者還看和尙否 師曰 老僧看他有分 曰和尙爭得看他 師曰 老僧看時卽不見有病 師又曰 離此殼漏子向什麽處與吾相見 衆無對

法號; 又作戒名 法諱 法名 出家受戒時所受於師之名 又僧死後之諡號

違和; 身體不適 有病

 

스님이 시질(示疾)하더니 사미를 시켜 운거(雲居)에게 가서 전어(傳語)하게 했다. 또 가로되 그가 홀연히 너에게 묻되 화상이 어떤 언구(言句)가 있던가 하거든 단지 말하되 운암로(雲巖路)가 단절되려고 합니다 하라. 네가 이 말을 내리면서 꼭 멀리 서야 하나니 그가 너를 때릴까 염려스럽다. 사미가 의지(意旨)를 수령(受領)해 갔는데 말이 마치지도 아니하여 벌써() 운거가 1() 때림을 입었다. 사미가 말이 없었다同安顯代云 이러하다면 곧 雲巖一枝가 추락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雲居錫이 이르되 上座且道하라, 雲巖路가 단절되었는가, 단절되지 않았는가. 숭수조(崇壽稠)가 이르되 古人이 이 一棒을 때린 뜻이 무엇인가(作麽生). 스님이 장차 원적(圓寂)하려 하면서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나에게 한명(閑名; 쓸데없는 이름)이 있어 재세(在世)한다. 누가 나를 위해 제거함을 얻겠는가(除得). 대중이 모두 대답이 없었다. 때에 사미가 나와서 가로되 화상의 법호(法號)를 청합니다. 사왈 나의 한명(閑名)이 이미 사라졌다()石霜이 이르되 그의 수긍을 얻을 사람이 없다. 雲居가 이르되 만약 閑名이 있다면 나의 先師가 아니다. 曹山이 이르되 옛으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辨得할 사람이 없다. 疎山이 이르되 出水가 있으나 辨得할 사람이 없다. 묻되 화상이 위화(違和; 저본에 遺和로 지었음)하니 도리어 병들지 않는 자가 있습니까 또는 없습니까. 사왈 있다. 승왈(僧曰) 병들지 않는 자가 도리어 화상을 봅니까. 사왈 노승이 그를 볼 분한이 있다. 가로되 화상이 어찌 그를 봄을 얻습니까. 사왈 노승이 볼 때 곧 병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스님이 또 가로되 이 각루자(殼漏子; 肉體)를 여의면 어느 곳에서 나와 상견하겠는가. 대중이 대답이 없었다.

法號; 또 계명(戒名)ㆍ법휘ㆍ법명으로 지음. 출가하여 수계할 때 스승에게서 받은 바의 이름. 또 승려가 죽은 후의 시호.

違和; 신체가 쾌적하지 않음. 병이 있음.

 

唐咸通十年三月 命剃髮披衣 令擊鍾儼然坐化 時大衆號慟移晷 師忽開目而起曰 夫出家之人心不附物 是眞修行 勞生息死於悲何有 乃召主事僧令辦愚癡齋一中 蓋責其戀情也 衆猶戀慕不已延至七日 食具方備 師亦隨齋畢曰 僧家勿事大率臨行之際喧動如斯 至八日浴訖端坐長往 壽六十有三 臘四十二 勅諡悟本大師 塔曰慧覺師昔在泐潭尋譯大藏 纂出大乘經要一卷幷激勵道俗偈頌誡等 流布諸方

移晷; 日影移動 猶言經過了一段時間

勞生息死; 禪林疏語考證三 莊子曰 大塊(地球 大地 大自然)載我以形 勞我以生 佚我以老 息我以死 故善吾生者乃所以善吾死也

愚癡齋; 洞山良价 臨命終時設僧齋名爲愚癡齋 以誡弟子之戀情也

一中; 一堂 一座之義 乃禪宗於點茶時之用語 又稱點茶一中 卽設齋食時 於能容納全部人之堂中行點茶

 

당 함통(咸通) 10(869) 3월 체발(剃髮)하고 옷을 입히라고 명()하고 종을 치게 하고는 엄연(儼然)히 좌화(坐化)했다. 때에 대중이 호통(號慟; 號哭하며 哀痛)하면서 이귀(移晷)하자 스님이 홀연히 눈을 뜨고 일어나 가로되 무릇 출가한 사람은 마음이 사물에 붙지() 않아야 이것이 참다운 수행이다. 삶에 노고하다가 죽어서 쉬거늘(勞生息死) 슬품이 어찌 있겠는가. 이에 주사승(主事僧)을 불러 우치재(愚癡齋; 저본에 愚癡齊로 지었음)를 일중(一中; 一堂)에 판비(辦備하게 했다. 대개 그 연정(戀情)을 책망했음이다. 대중이 오히려 연모(戀慕)하며 말지 않자 연명(延命)함이 7일에 이르렀다. 식구(食具; 喫飯用具)를 바야흐로 갖추자 스님도 또한 재를 따라(隨齋) 마치고() 가로되 승가(僧家)는 대솔(大率; 大槪) 임행지제(臨行之際)에 이와 같이(如斯) 훤동(喧動)함을 일삼지 말아야(勿事) 한다. 8일에 이르자 목욕을 마치고 단좌(端坐)하여 장왕(長往; 逝世)했다. 나이는 63이며 납은 42. 칙시가 오본대사(悟本大師)며 탑왈 혜각(慧覺)이다스님이 지난날 泐潭에 있으면서 大藏을 찾아 번역했는데 大乘經要 1권과 아울러 道俗激勵하는 偈頌등을 纂出하여 諸方流布했다.

移晷; 일영(日影)이 이동함. 일단(一段)의 시간이 경과했다고 말함과 같음.

勞生息死; 선림소어고증3. 장자(대종사)에 가로되 대괴(大塊; 큰 덩어리. 지구. 대지. 대자연)가 형체로써 나를 싣고 삶으로써 나를 노고롭게 하고(勞我以生) 늙음으로써 나를 편안케 하고 죽음으로써 나를 쉬게 하나니(息我以死) 고로 나의 삶을 잘하는 자는 곧 나의 죽음을 잘하는 소이(所以).

愚癡齋; 동산양개가 목숨을 마침에 임한 때 베푼 승재(僧齋)를 이름하여 우치재니 제자의 연정(戀情)을 훈계했음.

一中; 1() 1()의 뜻이니 곧 선종에서 점다(點茶)할 때의 용어임. 또 명칭이 점다일중(點茶一中)이니 곧 재식을 베풀 때 능히 전부의 사람을 용납하는 당중(堂中)에서 점다를 행함.

 

涿州杏山鑒洪禪師 臨濟問 如何是露地白牛 師曰吽 濟曰 啞却杏山口 師曰 老兄作麽生 濟曰 遮畜生 師乃休與石室問答 如彼章出之師五詠十秀皆暢玄風 滅後茶毘收五色舍利

 

탁주(涿州) 행산(杏山) 감홍선사(鑒洪禪師). 임제(臨濟)가 묻되 무엇이 이 노지백우(露地白牛)인가. 사왈(師曰) (; 소 울음 소리). 제왈(濟曰) 행산(杏山)의 입이 벙어리가 되었구나(啞却). 사왈 노형(老兄)은 어떠한가(作麽生). 제왈(濟曰) 이 축생(畜生), 스님이 이에 쉬었다石室과의 문답은 彼章에 나온 것과 같다. 스님은 오영(五詠)하면 십수(十秀)했고 모두 현풍(玄風)이 화창(和暢)했다. 멸후(滅後)에 다비(茶毘)하여 오색 사리를 거두었다.

 

潭州神山僧密禪師 師在南泉打羅次 南泉問 作什麽 師曰 打羅 曰汝以手打脚打 師曰 却請和尙道 南泉曰 分明記取 向後遇明眼作家 但恁麽擧似雲巖代云 無手脚者始解打師與洞山渡水 洞山曰 莫錯下脚 師曰 錯卽過不得也 洞山曰 不錯底事作麽生 師曰 共長老過水 一日與洞山鋤茶園 洞山擲下钁頭曰 我今日困 一點氣力也無 師曰 若無氣力 爭解恁麽道得 洞山曰 汝將謂有氣力底是也 裴大夫問僧 供養佛還喫否 僧曰 如大夫祭家神 大夫擧似雲巖 雲巖代曰 有幾般飯食 但一時下來 雲巖却問師 一時下來後作麽生 師曰 合後鉢盂 巖肯之 僧問 如何是無所聞者乃曰聽經 師曰 惡會麽 僧曰 要會 師曰 未解聽經在 問一地不見二地如何 師曰 汝莫錯否 汝是何地 有行者問 生死事乞師一言 師曰 汝何時生死去來 曰某甲不會請師說 師曰 不會須死一場去

打羅; 用篩籮篩麵 羅 一種密孔篩子 又用羅篩東西

 

담주(潭州) 신산(神山) 승밀선사(僧密禪師). 스님이 남천(南泉)에 있으면서 타라(打羅)하던 차에 남천이 묻되 무엇하느냐. 사왈(師曰) 타라(打羅)합니다. 가로되 네가 손으로써 치느냐(以手打) 발로 치느냐(脚打). 사왈 도리어 화상의 말씀을 청합니다. 남천이 가로되 분명히 기취(記取; 기억하다)하라. 향후에 명안(明眼)의 작가를 만나거든 단시 이렇게(恁麽) 들어 보여라雲巖代云 手脚이 없는 자라야 비로소 칠 줄 압니다(解打). 스님이 동산(洞山)과 더불어 물을 건넜다(渡水). 동산이 가로되 잘못() 하각(下脚)하지 말아라. 사왈 잘못하면() 곧 지남()을 얻지 못한다. 동산이 가로되 잘못되지 않는 일(不錯底事)이 어떠한가. 사왈 장로(長老)와 함께 물을 지난다. 어느 날 동산(洞山)과 더불어 다원(茶園)을 김매는데() 동산이 곽두(钁頭; 괭이. 큰 호미)를 던져 떨어뜨리고 가로되 내가 금일 피곤하여 일점(一點)의 기력(氣力)도 없다. 사왈 만약 기력이 없다면 어찌() 이렇게 말할(道得) 줄 알겠는가(). 동산이 가로되 너는 장차 기력이 있는 것이 이것()이라고 이르려 하느냐. 배대부(裴大夫)가 중에게 묻되 부처에게 공양하면 도리어 먹습니까. 승왈(僧曰) 대부가 가신(家神)에게 제사(祭祀)함과 같습니다. 대부가 운암(雲巖)에게 들어 보이자 운암이 대왈(代曰; 代云과 같음) 몇 가지 반식(飯食)이 있거든 단지 일시에 하래(下來)하시오. 운암이 도리어 스님에게 묻되 일시에 하래한 후 어떠한가. 사왈 합한 후(合後)의 발우(鉢盂)입니다. 운암이 이를 수긍했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듣는 바가 없는 것을 이에 가로되 청경(聽經)이라 합니까. 사왈 알기를 싫어하느냐(惡會麽). 승왈 알고자 합니다. 사왈 청경(聽經)을 알지() 못하는구나. 묻되 일지(一地)가 이지(二地)를 보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사왈 네가 착오()한 게 아니냐. 너는 이 어떤 지(). 어떤 행자가 묻되 생사사(生死事)에 스님의 일언을 구걸합니다. 사왈 네가 어느 때(何時) 생사하고 거래했는가. 가로되 모갑이 알지() 못하오니 스님의 말씀을 청합니다. 사왈 알지 못하거든 한바탕(一場) 죽음을 써거라().

打羅; 사라(篩籮; )를 사용해 밀가루를 제질함. ()는 일종의 빽빽한 구멍의 체(篩子). 또 체를 써서 동서(東西; 물건)를 체질함.

 

幽谿和尙 僧問 大用現前不存軌則時如何 師起繞禪床一匝而坐 僧欲進語 師與一蹋 僧歸位而立 師曰 汝恁麽我不恁麽 汝不恁麽我却恁麽 僧再擬進語 師又與一蹋曰 三十年後吾道大行

三十年後; 意謂領悟禪法尙待三十年後 此是禪家常用譏斥語

大用現前; 隨時隨地實踐 授受禪法

 

유계화상(幽谿和尙). 승문(僧問) 대용이 현전하여(大用現前) 궤칙(軌則)을 두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스님이 일어나 선상을 한 바퀴 돌고 앉았다. 중이 진어(進語; 말을 진행)하려고 하자 스님이 한 번 밟아 주었다. 중이 자리로 돌아가 섰다. 사왈(師曰) 네가 이러하면(恁麽) 나는 이러하지 않고 네가 이러하지 않으면 나는 도리어 이러한다. 중이 다시 진어하려고 하자(擬進語) 스님이 또 한 번 밟아 주고 가로되 삼십 년 후(三十年後) 나의 도가 대행(大行)하리라.

三十年後; 뜻으로 이르자면 선법을 영오(領悟)하려면 오히려 30년 후를 기다린다 함이니 이것은 이 선가에서 상용하는 기척어(譏斥語).

大用現前; 시절 따라 지역 따라 실천하고 선법을 수수(授受).

 

前華亭船子德誠禪師法嗣

澧州夾山善會禪師 廣州峴亭人也 姓廖氏 九歲於潭州龍牙山出家 依年受戒 往江陵聽習經論 該練三學 遂參禪會勵力參承 初住京口 一夕道吾策杖而至 遇師上堂 僧問 如何是法身 師曰 法身無相 曰如何是法眼 師曰 法眼無瑕 師又曰 目前無法意在目前 不是目前法 非耳目所到 道吾乃笑 師乃生疑問吾 何笑 吾曰 和尙一等出世未有師 可往淛中華亭縣參船子和尙去 師曰 訪得獲否 道吾曰 彼師上無片瓦遮頭 下無卓錐之地 師遂易服直詣華亭 會船子鼓櫂而至 師資道契微眹不留語見船子章

 

예주(澧州) 협산선회(夾山善會) 선사. 광주(廣州) 현정(峴亭) 사람이며 성이 류씨(廖氏). 9세에 담주(潭州) 용아산(龍牙山)에서 출가했고 나이에 의해 수계했다. 강릉(江陵)으로 가서 경론(經論)을 청습(聽習)했고 삼학(三學)을 해련(該練; 모두 練磨)했다. 드디어 선회(禪會; 선종 법회)에 참여(參與)하여 여력(勵力; 힘쓰다)하여 참승(參承)했다. 처음 경구(京口)에 주()했는데 일석(一夕; 어느 날 저녁)에 도오(道吾)책장(策杖; 주장자에 기댐)하고 이르렀고 스님의 상당(上堂)을 만났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법신(法身)입니까. 사왈(師曰) 법신은 무상(無相)이다. 가로되 무엇이 이 법안(法眼)입니까. 사왈 법안은 무하(無瑕; 티가 없음). 스님이 또 가로되 목전(目前)에 법이 없으나 뜻이 목전에 있다. 이 목전의 법이 아닌지라 이목(耳目)이 이를() 바가 아니다. 도오가 이에 웃었다. 스님이 이에 의심이 나서 도오에게 묻되 왜 웃습니까. 도오가 가로되 화상은 일등(一等; 一樣으로 평등) 출세했으나 스승이 있지 않다. 가히 절중(淛中; 浙中과 같음. 浙江) 화정현(華亭縣)으로 선자화상(船子和尙)을 참알하게나. 사왈 참방(參訪; )하면 득획(得獲)합니까. 도오가 가로되 그 스님은 위로는 머리를 가릴() 편와(片瓦)도 없고 아래론 탁추(卓錐; 송곳을 세우다)할 땅이 없다. 스님이 드디어 옷을 바꿔 입고(易服) 바로 화정으로 나아갔다. 마침 선자(船子)가 도(; . 상앗대)를 두드리며 이르렀고 사자(師資)의 도()가 계합(契合)했고 미진(微眹; 조금의 兆朕)도 유류(遺留; )하지 않았다船子章을 보라.

 

師比遁世忘機 尋以學者交湊 廬室星布 曉夕參依 唐咸通十一年庚寅 海衆卜于夾山遽成院宇 師上堂示衆曰 夫有祖以來 時人錯會相承至今 以佛祖句爲人師範 如此却成狂人無智人去 他只指示汝 無法本是道 道無一法 無佛可成 無道可得 無法可捨 故云目前無法意在目前 他不是目前法 若向佛祖邊學 此人未有眼目 皆屬所依之法不得自在 本只爲生死茫茫 識性無自由分 千里萬里求善知識 須有正眼永脫虛謬之見 定取目前生死 爲復實有 爲復實無 若有人定得許汝出頭 上根之人言下明道 中下根器波波浪走 何不向生死中定當取 何處更疑佛疑祖替汝生死 有智人笑汝 偈曰 勞持生死法 唯向佛邊求 目前迷正理 撥火覓浮漚

院宇; 有院牆的屋宇 院落

出頭; 出 出來 二出生到人世 三謂越他人 此指三

波波; 奔走的樣子 奔波

浪走; 四處奔走 胡亂奔走

定當; 辨識 判明

 

스님이 둔세(遁世; 隱居)하며 망기(忘機)함에 이르렀다(). 이윽고 학자가 교주(交湊; 匯合이니 모이다)하여 여실(廬室)에 성포(星布; 星羅棋布)했고 효석(曉夕; 日夜)으로 참의(參依; 參問하며 依止)했다. 당 함통(咸通) 11년 경인(庚寅; 870) 해중(海衆)이 협산(夾山)을 선택(選擇; )해 급히() 원우(院宇)를 이루었다. 스님이 상당하여 시중(示衆)해 가로되 무릇 조사(祖師; )가 있은 이래(以來)로 시인(時人)이 착회(錯會)하여 상승(相承)하며 여금에 이르기까지(至今) 불조(佛祖)의 언구(言句; )로써 사람의 사범(師範)을 삼으니 이와 같이 도리어 광인(狂人)과 무지인(無智人)을 이루었다. 그는 다만 너희에게 지시하되 무법(無法)이 본시(本是) ()니 도는 일법(一法)도 없어 가히 이룰 부처가 없고 가히 얻을 도가 없고 가히 버릴 법이 없다 하였다. 고로 이르나니 목전에 법이 없으나 뜻이 목전에 있거니와 그것은 이 목전의 법이 아니다. 만약 불조변(佛祖邊)을 향해 배운다면 이 사람은 안목이 있지 않나니 모두 소의(所依)의 법에 속해 자재(自在)를 얻지 못하며 본래 다만 생사(生死)가 망망(茫茫)하기 때문에 식성(識性)이 자유(自由)의 분한이 없다. 천 리 만 리에서 선지식을 구()하되 모름지기 정안(正眼)이 있어야 길이 허류지견(虛謬之見)을 벗어난다. 목전의 생사를 정취(定取)하라, 다시 실유(實有)가 되느냐, 다시 실무(實無)가 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정득(定得)하면 너의 출두(出頭)를 허락하겠다. 상근지인(上根之人)은 언하(言下)에 도를 밝히고 중하(中下)의 근기(根器)는 파파(波波)하며 낭주(浪走)한다. 왜 생사 가운데를 향해 정당(定當)하여 취하지 않느냐. 어느 곳에서 다시 의불의조(疑佛疑祖)하며 너희의 생사를 대체(代替)하려 하느냐. 지혜가 있는 사람이 너희를 비웃는다. 게왈(偈曰) 생사법(生死法)을 노고롭게 가져서/ 오직 불변(佛邊)을 향해 구하네/ 목전에 정리(正理)를 미()하면/ 불을 헤쳐 부구(浮漚; 뜬 거품)를 구함이다.

院宇; 원장(院牆)이 있는 옥우(屋宇), 원락(院落; 굉장히 큰 집).

出頭; 1. (). 출래(出來). 2. 출생하여 인간세상에 이름. 3. 타인을 초월함을 말함. 여기에선 3을 가리킴.

波波; 분주한 양자(樣子). 분파(奔波).

浪走; 사처(四處; 사방)로 분주함. 호란(胡亂; )하게 분주함.

定當; 변식(辨識). 판명(判明).

 

僧問 從上立祖意敎意 和尙此間爲什麽言無 師曰 三年不食飯 目前無饑人 曰旣無饑人 某甲爲什麽不悟 師曰 只爲悟迷却闍梨 師說頌曰 明明無悟法 悟法却迷人 長舒兩脚睡 無僞亦無眞 僧問 如何是道 師曰 太陽溢目萬里不掛片雲 曰如何得會 師曰 淸淨之水游魚自迷 問如何是本 師曰 飮水不迷源 問古人布髮掩泥當爲何事 師曰 九烏射盡一翳猶存 一箭墮地天下不黑 問祖意與敎意同別 師曰 風吹荷葉滿池靑 十里行人較一程

九烏射盡; 楚辭章句三 淮南(淮南子)言 堯時十日並出 草木焦枯 堯命羿仰射十日 中其九日 日中九烏皆死 墮其羽翼 故留其一日也

 

승문(僧問) 종상(從上; 從前. 以前)에 조의(祖意)와 교의(敎意)를 세웠거늘 화상의 차간(此間)에선 무엇 때문에 없다고 말합니까. 사왈(師曰) 3년 동안 밥을 먹지(食飯) 않아 목전에 주린 사람(饑人)이 없다. 가로되 이미 주린 사람이 없거늘 모갑은 무엇 때문에 깨치지 못했습니까(不悟). 사왈 다만 깨침() 때문에 사리(闍梨)를 미해 버렸다(迷却). 스님이 설송(說頌)해 가로되 밝디밝게 깨침()이 없는 법인지라/ 법을 깨치니(悟法) 도리어 미한 사람이다/ 양 다리를 길게 뻗고() 자나니/ 거짓도 없고 또한 진실도 없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도입니까. 사왈 태양이 눈에 넘치니(溢目) 만 리에 편운(片雲)도 걸리지 않았다. 가로되 어떻게 이회(理會)를 얻어야 합니까. 사왈 청정한 물에 유어(游魚)가 스스로 미(; 昏迷)한다. 묻되 무엇이 이 본()입니까. 사왈 음수(飮水)하면 근원을 미()하지 않는다. 묻되 고인이 머리카락을 펴서 진흙을 가렸거니와 마땅히 무슨 일을 위함입니까. 사왈 구오를 쏘아 없앴으나(九烏射盡) 일예(一翳)가 아직 남았고 일전(一箭)이 땅에 떨어지매 천하가 어둡지 않다. 묻되 조의(祖意)와 교의(敎意)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사왈 바람이 하엽(荷葉; 연잎)에 부니 못 가득히 푸르고 십 리의 행인이 일정(一程) 어긋났다.

九烏射盡; 초사장구3. 회남(淮南; 淮南子)에 말하되 요()의 시절에 열 개의 해가 아울러 나와 초목이 타고 말랐다. 요가 예(羿)에게 칙명하자 열 개의 해를 우러러 쏘아 그 아홉 개의 해를 맞혔다. 해 가운데의 아홉 까마귀가 다 죽었으며 그 날개가 떨어졌다. 고로 그 하나의 해만 남았다.

 

師有小師隨侍日久 師住後遣令行脚 游歷禪肆無所用心 聞師聚衆道播他室 迴歸省覲而問曰 和尙有如是奇特事 何不早向某甲說 師曰 汝蒸飯吾著火 汝行益吾展鉢 什麽處是孤負汝處 小師從此悟入 師一日喫茶了 自烹一椀過與侍者 侍者擬接 師乃縮手曰 是什麽 侍者無對 有一大德來問師 若是敎意某甲卽不疑 只如禪門中事如何 師曰 老僧也只解變生爲熟 問如何是實際之理 師曰 石上無根樹 山含不動雲 問如何是出窟師子 師曰 虛空無影象 足下野雲生

禪肆; 指禪宗寺院 爲對稱講肆

行益; 指僧堂行食事時 依次序而分配粥飯之事

 

스님에게 소사(小師)가 있었는데 수시(隨侍)한 날이 오래되었다. 스님이 주후(住後)에 보내어 행각하게 했다. 선사(禪肆)를 유력(游歷)했으나 용심(用心)할 바가 없었고 들으니 스님이 취중(聚衆)하여 도가 타실(他室)에 전파(傳播)되었다. 회귀(迴歸)하여 성근(省覲)하며 물어 가로되 화상에게 이와 같은 기특사(奇特事)가 있거늘 왜 일찍 모갑을 향해 설하지 않았습니까. 사왈 네가 밥을 찌면(蒸飯) 내가 불을 붙였고(著火) 네가 행익(行益)하면 내가 발우를 폈거늘(展鉢) 어느 곳이 이 너를 저버린(孤負) 곳인가. 소사(小師)가 이로 좇아 오입(悟入)했다. 스님이 어느 날 끽다(喫茶)하고 나서 스스로 한 사발 끓여() 시자에게 건네 주었다(過與). 시자가 접수하려고 하자 스님이 이에 손을 옴츠리고() 가로되 이 뭣고. 시자가 대답이 없었다. 어떤 한 대덕(大德)이 와서 스님에게 묻되 만약 이 교의(敎意)라면 모갑이 곧 의심하지 않습니다. 지여(只如) 선문 중의 일이 어떻습니까. 사왈 노승은 다만 생것을 변화해 익게 할 줄만 안다(). 묻되 무엇이 이 실제지리(實際之理)입니까. 사왈 석상(石上)엔 뿌리 없는 나무며 산은 부동(不動)의 구름을 머금었다. 묻되 무엇이 이 굴에서 나온 사자입니까. 사왈 허공엔 영상(影象; 여러 선록에 모두 影像으로 지었음)이 없고 족하(足下)엔 야운(野雲)이 생기(生起)한다.

禪肆; 선종 사원을 가리킴. 강사(講肆)의 대칭이 됨.

行益; 승당에서 식사를 행할 때 차서(次序)에 의해 죽반(粥飯)을 분배하는 일을 가리킴.

 

西川首座遊方至白馬 擧華嚴敎語問曰 一塵含法界無邊時如何 白馬曰 如鳥二翼 如車二輪 首座曰 將謂禪門別有奇特事 元來不出敎乘 乃迴本地 尋嚮夾山盛化 遣小師持前語而問師 師曰 雕沙無鏤玉之譚 結草乖道人之思 小師迴擧似首座 首座乃讚 將謂禪門與敎意不殊 元來有奇特之事 問如何是夾山境 師曰 猿抱子歸靑嶂裏 鳥銜華落碧巖前 師再闢玄樞逮于一紀 唐中和元年辛丑十一月七日 召主事曰 吾與衆僧話道累歲 佛法深旨各應自知 吾今幻質時盡卽去 汝等善保護如吾在日 勿得雷同世人輒生惆悵 言訖至于夜奄然而逝 其月二十九日塔于本山 壽七十七臘五十七 勅諡傳明大師 塔曰永濟

敎乘; 卽敎門也 宗乘(宗門)之對語

玄樞; 玄妙之樞要

幻質; 幻軀 質 形體 廣雅 質 軀也

雷同; 附和雷同 古人認爲打雷時 萬物都同時響應 後常用來比喩隨聲附和

 

서천(西川) 수좌(首座)가 유방(遊方)하다 백마(白馬)에 이르러 화엄교(華嚴敎)의 말을 들어 물어 가로되 일진(一塵)이 법계를 포함(包含)하여 무변(無邊)할 때 어떠한가. 백마가 가로되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수좌가 가로되 장차 선문에 달리 기특사(奇特事)가 있다고 이르려 했더니 원래(元來) 교승(敎乘)을 벗어나지 않는구나. 이에 본지(本地)로 돌아갔다. 이윽고 협산(夾山)의 성화(盛化)를 향()한지라 소사(小師)를 보내 전어(前語)를 가지고 스님에게 물었다. 사왈(師曰) 모래에 새기면() 옥에 새기는() 얘기()가 없고 결초(結草)하면 도인(道人)의 사상(思想; )에 어긋난다. 소사가 돌아가 수좌에게 들어 보이자 수좌가 이에 칭찬하되 장차 선문과 교의가 다르지() 않다고 이르려 했더니 원래 기특한 일이 있구나. 묻되 무엇이 이 협산경(夾山境)입니까. 사왈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청장(靑嶂) 속으로 돌아가고 새는 꽃을 물어다 벽암(碧巖) 앞에 떨어뜨린다. 스님이 현추(玄樞)를 다시 열어(再闢) 일기(一紀; 12)에 이르렀다. 당 중화(中和) 원년 신축(辛丑; 881) 117일 주사(主事)를 불러 가로되 내가 중승(衆僧)과 더불어 도를 얘기한 지 여러 해(累歲)였다. 불법의 심지(深旨)는 각자 응당 스스로 알 것이다. 나의 지금의 환질(幻質)이 때가 다해 곧 떠난다. 너희 등은 내가 있던 날(在日)과 같이 잘 보호하고 세인(世人)과 뇌동(雷同)하여 자주 추창(惆悵)을 냄을 얻지 말아라. 말을 마치고 밤에 이르러 엄연(奄然; 忽然)히 떠났다(). 그 달 29일 본산(本山)에 탑을 세웠다. 나이는 77이며 납은 57이다. 칙시가 전명대사(傳明大師)며 탑왈 영제(永濟).

敎乘; 즉 교문(敎門)이니 종승(宗乘; 종문)의 대어(對語).

玄樞; 현묘한 추요(樞要).

幻質; 환구(幻軀)니 질()은 형체. 광아 질() ().

雷同; 부화뇌동(附和雷同). 고인이 인식하기를 천둥 칠 때 만물이 모두 동시에 향응(響應; 소리에 따라서 마주쳐 그 소리와 같이 울림)한다 했음. 후에 늘 써서 소리 따라 부화(附和)함에 비유했음.

 

行思禪師第五世

前舒州投子山大同禪師法嗣

投子感溫禪師第二世住 僧問 師登寶座接示何人 師曰 如月覆千谿 僧曰 恁麽卽滿地不虧也 師曰 莫恁麽道 僧問 父不投爲什麽却投子 師曰 豈是別人屋裏事 僧曰 父與子還屬功也無 師曰 不屬 曰不屬功底如何 師曰 父子各自脫 曰爲什麽如此 師曰 汝與我會 師遊山見蟬蛻殼 侍者問曰 殼在遮裏蟬子向什麽處去也 師拈殼就耳畔 搖三五下作蟬響聲 其僧於是開悟

 

투자감온(投子感溫) 선사第二世住. 승문(僧問) 스님이 보좌(寶座)에 올라 어떤 사람을 접인(接人)하여 보입니까(接示). 사왈(師曰) 달이 천계(千谿)를 덮음()과 같다. 승왈(僧曰) 이러하다면 곧 땅 가득히 모자라지() 않습니다. 사왈 이렇게 말하지 말아라. 승문 부()에겐 투입(投入; )하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도리어 자()에게 투입합니까. 사왈 어찌 이 다른 사람의 옥리(屋裏)의 일이겠는가. 승왈 부()와 자()가 도리어 공()에 속합니까 또는 아닙니까. 사왈 속하지 않는다. 가로되 공에 속하지 않는 것은 어떻습니까(如何). 사왈 부자(父子) 각자 벗어난다(). 가로되 무엇 때문에 이와 같습니까. 사왈 너와 내가 안다(). 스님이 유산(遊山)하다가 매미의 허물 껍질(蟬蛻殼)을 보았는데 시자가 물어 가로되 껍질은 이 속에 있거니와 매미(蟬子)는 어느 곳으로 향해 갔습니까. 스님이 껍질을 집어 귓가에 나아가 서댓 번(三五下) 흔들면서 매미 우는 소리(蟬響聲)를 짓자 그 중이 이에 개오(開悟)했다.

 

福州牛頭微禪師 師上堂示衆曰 三世諸佛用一點伎倆不得 天下老師口似匾擔 諸人作麽生 大不容易 除非知有 莫能知之 僧問 如何是和尙家風 師曰 山畬粟米飯 野菜澹黃韲 僧曰 忽遇上客來又作麽生 師曰 喫卽從君喫 不喫任東西 問不問驪龍頷下珠 如何識得家中寶 師曰 忙中爭得作閑人

口似匾擔; 形容杜口無言貌 匾 薄也 又不圓貌 擔 同檐

山畬; 山中田地

驪龍頷下珠; 莊子列禦寇曰 河上有家貧恃緯蕭而食者 其子沒於淵 得千金之珠 其父謂其子曰 取石來鍛之 夫千金之珠 必在九重之淵而驪龍頷下 子能得珠者 必遭其睡也 使驪龍而寤 子尙奚微之有哉

 

복주(福州) 우두미(牛頭微) 선사. 스님이 상당하여 시중(示衆)해 가로되 삼세제불이 일점(一點)의 기량(伎倆; 技倆과 같음)을 씀도 얻지 못하고 천하의 노사(老師)가 입이 편담과 같거늘(口似匾擔) 제인(諸人)은 어떠한가. 매우 용이(容易)하지 않다. 제비(除非; 다만) 지유(知有)라야 하나니 능히 이를 알지 못한다. 승문(僧問) 무엇이 이 화상의 가풍입니까. 사왈(師曰) 산여(山畬)의 속미반(粟米飯; 좁쌀밥)과 야채와 담황(淡黃)의 양념이다. 승왈(僧曰) 홀연히 상객(上客)이 옴을 만나면 또 어떻습니까. 사왈 먹는다면 곧 그대의 먹는 대로 따르지만 먹지 않으면 동서(東西)에 맡긴다(동서로 흩어진다). 묻되 이룡의 턱 아래 구슬(驪龍頷下珠)은 묻지 않습니다. 어찌해야 가중보(家中寶)를 식득(識得)합니까. 사왈 망중(忙中)에 어찌() 한인(閑人)이 됨을 얻겠는가.

口似匾擔; 입을 닫고 말이 없는 모양을 형용. ()은 얇음임. 또 둥글지 않은 모양. ()은 담()과 같음.

山畬; 산중의 전지(田地).

驪龍頷下珠; 장자 열어구(列禦寇)에 가로되 하상(河上)에 집안이 가난해 위소(緯蕭; 는 짤 위, 씨줄 위, 蘆草니 곧 갈대를 엮음)에 의지해 의식(衣食)하는 자가 있었다. 그 아들이 연못에 잠몰(潛沒)하여 천금(千金)의 구슬을 얻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일러 가로되 돌을 취해 와서 그것을 부수어라(라 함). 무릇 천금의 구슬은 반드시 구중(九重)의 연못, 이룡(驪龍)의 턱 아래(頷下) 있으리니 자네가 능히 구슬을 얻은 것은 반드시 그 수면을 만났으리라. 이룡으로 하여금 깨게 했다면 자네가 오히려 어찌 조금이라도 남아 있겠는가.

 

西川靑城香山澄照大師 僧問 諸佛有難向火焰裏藏身 未審衲僧有難向什麽處藏身 師曰 水精甕裏著波斯 問如何是初生月 師曰 太半人不見

太半; 大半 漢書五十三膠王傳 削其國 去大半 注 張晏曰 分三之二爲大半 一爲小半

 

서천(西川) 청성(靑城) 향산(香山) 징조대사(澄照大師). 승문(僧問) 제불이 난()이 있으면 화염 속을 향해 몸을 숨깁니다. 미심하오니 납승이 난이 있으면 어느 곳을 향해 몸을 숨깁니까. 사왈(師曰) 수정옹(水精甕) 속에 파사(波斯; 波斯人)를 안치하라(). 묻되 무엇이 이 초생월(初生月)입니까. 사왈 태반(太半)의 사람이 보지 못한다.

太半; 대반(大半)과 같음. 한서53 교왕전(膠王傳). 그 나라를 깎아서 대반(大半)을 제거했다. () 장안(張晏; 3세기 경 魏國人)이 가로되 셋으로 나누면 둘이 대반(大半)이 되고 하나가 소반(小半)이 된다.

 

陝府天福和尙 僧問 如何是佛法大意 師曰 黃河無滴水 華嶽總平沈

 

섬부(陝府) 천복화상(天福和尙). 승문(僧問) 무엇이 불법의 대의(大意)입니까. 사왈(師曰) 황하가 한방울의 물도 없고 화악(華嶽)이 모두 평침(平沈; 저본에 平治로 지었음)한다.

 

濠州思明和尙 在投子衆時 有僧問 如何是上座沙彌童行 師曰諾 僧問 如何是淸淨法身 師曰 屎裏蛆兒頭出頭沒

濠州; 隋立 現在安徽鳳陽縣以東

 

호주(濠州) 사명화상(思明和尙). 투자의 대중에 있을 때 어떤 중이 묻되 무엇이 이 상좌의 사미(沙彌)와 동행(童行)입니까. 사왈(師曰) (; 응답하는 소리). 승문(僧問) 무엇이 이 청정법신입니까. 사왈 똥 속에 저아(蛆兒; 구더기. 後綴)가 두출두몰(頭出頭沒)한다.

濠州; ()에서 설립했고 현재의 안휘 봉양현 이동(以東).

 

鳳翔府招福和尙 僧問 東牙烏牙皆出隊 和尙爲什麽不出隊 師曰 住持各不同 闍梨爭得怪

出隊; 又作出鄕 指住持離大衆之隊 出發向遠方有緣之地 勸募財糧 亦卽托鉢 住持出隊歸寺後之上堂說法 或出隊之際所行之上堂說法 皆稱爲出隊上堂 [象器箋雜行類]

 

봉상부(鳳翔府) 초복화상(招福和尙). 승문(僧問) 동아(東牙; 旗名)와 오아(烏牙)가 모두 출대(出隊)하는데 화상은 무엇 때문에 출대하지 않습니까. 사왈(師曰) 주지(住持)함이 각자 같지 못하거늘 사리(闍梨)가 아찌 괴이히 여김을 얻는가.

出隊; 또 출향(出鄕)으로 지음. 주지가 대중의 무리()에서 떠나 먼 지방의 유연(有緣)의 땅을 향해 출발하여 재량(財糧)을 권모(勸募)함을 가리킴. 또한 곧 탁발(托鉢). 주지가 출대(出隊)하여 귀사(歸寺)한 후의 상당설법(上堂說法)이나 혹은 출대할 즈음에 행하는 바의 상당설법을 다 일컬어 출대상당이라 함 [상기전잡행류].

 

興元府中梁山遵古禪師 問空劫無人能問法 卽今有問法何安 師曰 大悲菩薩甕裏坐 問如何是祖師西來意 師曰 道士擔漏巵

興元府; 三國時期設置的梁州 治所在陝西漢中 隋大業三年(607)廢 乾元元年(758) 復爲梁州 唐德宗改其爲興元府 此後不再稱梁州 [百度百科]

道士; 本爲釋子之稱 後遂爲神仙家之名 猶如言道敎也 法苑珠林五十五 姚書云 始乎漢魏終暨符姚 皆號衆僧以爲道士 至魏太武世 有寇謙之 始竊道士之;行事鈔資持記下三 道士本釋氏之美稱 後爲黃巾濫竊 遂不稱之

 

흥원부(興元府) 중량산(中梁山) 준고선사(遵古禪師). 묻되 공겁(空劫)엔 능히 문법(問法)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즉금 문법함이 있으면 어디에 안치합니까(何安). 사왈(師曰) 대비보살의 독() 속에 앉아라. 묻되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입니까. 사왈 도사(道士)가 누치(漏巵; 새는 잔)를 짊어졌다.

興元府; 삼국시기 설치한 양주(梁州)니 치소(治所)는 섬서 한중에 있었음. 수 대업 3(607) 폐했고 건원 원년(758) 다시 양주라 했음. 당 덕종이 그것을 고쳐 흥원부라 했고 이 후에 다시 양주라고 일컫지 않았음 [백도백과].

道士; 본래 석자(釋子)의 명칭이 되었으나 후에 드디어 신선가의 명호가 되었으니 오히려 도교라고 말함과 같음. 법원주림55. 요서(姚書)에 이르되 한위(漢魏)에서 비롯하여 부요(符姚)에서 마치기까지 모두 중승을 호칭하여 도사(道士)라 했다. () 태무의 시대에 이르러 구겸지(寇謙之)가 있어 처음으로 도사의 명칭을 훔쳤다. 행사초자지기하3. 도사(道士)는 본래 석씨의 미칭이었다. 후에 황건(黃巾; 황건적)이 남절(濫竊; 함부로 훔침)함이 되어 드디어 그것을 일컫지 않았다.

 

襄州谷隱和尙 僧問 如何是不觸白雲機 師曰 鶴帶鵶顔浮生不棄

 

양주(襄州) 곡은화상(谷隱和尙). 승문(僧問) 무엇이 이 백운의 기()에 저촉(抵觸)하지 않음입니까. 사왈(師曰) 학이 까마귀의 얼굴을 가지니() 부생(浮生)이 버리지 않는다.

 

安州九𡽀山和尙 僧問 如何是佛 師曰 卽汝是 問遠聞九𡽀 及至到來 只見一𡽀 師曰 闍梨只見一𡽀不見九𡽀 曰如何是九𡽀 師曰 水急浪華麁

 

안주(安州) 구종산(九𡽀山) 화상. 승문(僧問)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사왈(師曰) 곧 네가 이것이다. 묻되 멀리서 구종(九𡽀)을 들었는데 도래함에 이르러선(及至) 다만 일종(一𡽀)만 보입니다. 사왈 사리(闍梨)는 다만 일종만 보고 구종을 보지 못하는가. 가로되 무엇이 이 구종입니까. 사왈 물이 급하니 낭화(浪華; 물보라. 水沫)가 거칠다().

 

盤山和尙幽州第二世住 僧問 如何出得三界 師曰 在裏頭來多少時耶 曰如何出得 師曰 靑山不礙白雲飛 問承敎有言 如化人煩惱如石女兒 此理如何 師曰 闍梨直如石女兒去

石女; 舊譯石女 新譯虛女 本爲女之無子 不能爲淫者 禪門機語中 每以石女與木人相對稱 乃喩指遠離情識 天眞無作之妙用 又有木人木童木馬等等語

 

반산화상(盤山和尙)幽州 第二世住. 승문(僧問) 어찌해야 3()를 벗어남을 얻습니까. 사왈(師曰) 이두(裏頭; 裏邊)에 있어 온 지 다소(多少)의 시절인가. 가로되 어찌해야 벗어남을 얻습니까. 사왈 청산이 백운의 낢()을 방애(妨礙)하지 못한다. 묻되 듣건대() ()에 말씀이 있어 화인(化人)의 번뇌와 같고 석녀(石女)의 아이()와 같다 했거니와 이 이치가 무엇입니까. 사왈 사리(闍梨)가 바로 석녀의 아이와 같아야 한다.

石女; 구역은 석녀며 신역은 허녀(虛女)니 본래 여자가 자식이 없음이 되며 능히 음(; 淫行)을 하지 못하는 자가 됨. 선문의 기어(機語) 중에 매양 석녀와 목인을 상대하여 일컬으며 곧 정식(情識)을 원리(遠離)한 천진의 무작의 묘용을 비유로 가리킴. 또 목인ㆍ목동ㆍ목마 등등의 말이 있음.

 

安州九𡽀敬慧禪師第二世住僧問 解脫深坑如何過得 師曰 不求過 僧曰 如何過得 師曰 求過亦非

解脫深坑; 執著於解脫而不能圓滿自利利他之行 譬如墮於深坑 故稱解脫深坑 大集經十三 譬如有人墜墮深坑 是人不能自利利他 聲聞 緣覺亦復如是 墮解脫坑 不能自利及以利他

 

안주(安州) 구종(九𡽀) 경혜선사(敬慧禪師)第二世住. 승문(僧問) 해탈심갱(解脫深坑)을 어찌해야 지나감을 얻습니까. 사왈(師曰) 지나감을 구하지 말아라. 승왈(僧曰) 어찌해야 지나감을 얻습니까. 사왈 지나감을 구함도 또한 그르다.

解脫深坑; 해탈에 집착하여 능히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이 원만하지 못함이 비유컨대 심갱(深坑)에 떨어짐과 같은지라 고로 명칭이 해탈심갱임. 대집경13. 비유컨대어떤 사람이 심갱(深坑)에 추타(墜墮)하면 이 사람은 능히 자리이타(自利利他)하지 못함과 같이 성문과 연각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해탈갱(解脫坑)에 떨어져 능히 자리(自利) 및 이타(利他)하지 못한다.

 

東京觀音院巖俊禪師 邢臺人也 姓廉氏 初參祖席遍歷衡廬岷蜀 嘗經鳳林深谷 歘覩珍寶發現 同侶相顧意將取之 師曰 古人鋤園觸黃金若瓦礫 待吾菅茆覆頂 須此供四方僧 言訖捨去 造謁投子 投子問曰 子昨宿何處 師曰 在不動道場 曰旣言不動曷由至此 師曰 至此豈是動耶 曰元來宿不著處 然投子默認許之 尋抵東京 會有梁少保李鄑 卽河陽節度使罕之兄也 雅信內典尤重于師 因捨宅建院曰觀音明聖 請師居之 周高祖世宗二帝潛隱時 每登方丈必施跪禮 及卽位特賜紫 號淨戒大師 衆常數百 乾德丙寅三月示疾 垂誡門人訖 怡顔合掌而滅 壽八十五 臘六十五 其年四月八日塔于東郊豐臺村

祖席; 禪家法會 禪院

衡廬; 衡山和廬山的合稱

岷蜀; 指四川 岷 岷山 在四川

菅茆覆頂; 指僧人住持寺院

少保; 古代官名 三孤(少師 少傅 少保)之一 太師太傅太保都是東宮官職 太師敎文 太傅敎武 太保保護其安全 少師少傅少保均是他們的副職 [百度百科]

雅信; 雅 助詞 用于句首 無實義

 

동경(東京) 관음원(觀音院) 암준선사(巖俊禪師). 형대(邢臺) 사람이며 성이 염씨(廉氏). 조석(祖席)을 초참(初參)하고는 형려(衡廬)와 민촉(岷蜀)을 편력(遍歷)했다. 일찍이 봉림(鳳林)의 깊은 계곡을 경과하다가 문득(; ) 진보(珍寶)가 발현(發現: 숨겨져 있던 것이 바깥으로 드러나 보임)함을 보았다. 동려(同侶; 伴侶)가 서로 돌아보며 뜻에 장차 이것을 취하려 했다. 사왈(師曰) 고인은 전원(田園)을 매다가 황금을 접촉했으나 기왓조각과 같이 여겼다. 내가 관모부정(菅茆覆頂; 은 골풀 관. 와 같음)함을 기다려라. 이것을 써서() 사방승(四方僧)에게 공양하리라. 말을 마치자 버리고 떠났다. 투자(投子)에게 나아가 예알(禮謁)하자 투자가 물어 가로되 자네는 어제 어느 곳에서 숙박(宿泊; 宿)했는가. 사왈 부동도량(不動道場)에 있었습니다. 가로되 이미 부동이라고 말했거늘 무엇으로 말미암아(曷由) 여기에 이르렀는가. 사왈 여기에 이름이 어찌 이 동()이겠습니까. 가로되 원래(元來) 숙박(宿泊)이 붙을 곳이 아니다. 그러나 투자가 묵연히 허가(許可)했다. 이윽고 동경(東京)에 다다랐는데 마침() 양소보(少保) 이자(李鄑)가 있었으니 곧 하양절도사(河陽節度使) ()의 형이며 내전(內典)을 아신(雅信)했고 더욱이() 스님을 존중했다. 인하여 집을 희사해 건원(建院)하고 가로되 관음명성(觀音明聖)이라 했고 스님을 청해 거주케 했다. () 고조(高祖)와 세종(世宗) 2()가 잠은(潛隱; 隱居)할 때 매번 방장에 오르면 반드시 궤례(跪禮)를 베풀었는데 및 즉위하자 특별히 사자(賜紫)하고 호()를 정계대사(淨戒大師)라 했다. 대중이 늘 수백(數百)이었다. 건덕(乾德) 병인(丙寅; 966) 3월 시질(示疾)했고 문인(門人)에게 수계(垂誡)하여 마치고는 기쁜 얼굴로 합장하고 멸(; 入滅)했다. 나이는 85며 납은 65. 그 해 48일 동교(東郊) 풍대촌(豐臺村)에 탑을 세웠다.

祖席; 선가의 법회. 선원.

衡廬; 형산(衡山)과 여산(廬山)의 합칭.

岷蜀; 사천(四川)을 가리킴. ()은 민산(岷山)이니 사천에 있음.

菅茆覆頂; 승인이 사원에 주지(住持)함을 가리킴.

少保; 고대의 벼슬 이름. 삼고(三孤; 少師少傅少保)의 하나. 태사(太師)ㆍ태부(太傅)ㆍ태보(太保)는 모두 이 동궁의 관직이며 태사는 글을 가르치고 태부는 무()를 가르치고 태보는 그의 안전을 보호함. 소사ㆍ소부ㆍ소보는 균일하게 이 그들의 부직(副職)[백도백과].

雅信; ()는 조사니 구수(句首)에 씀. 실의(實義)가 없음.

 

前鄂州淸平山令遵禪師法嗣

蘄州三角山令珪禪師 初參淸平 淸平問曰 來作麽 師曰 來禮拜 曰禮拜阿誰 師曰 特來禮拜和尙 淸平咄曰 遮鈍根阿師 師乃禮拜 淸平於師頸上以手斫一下 師從此摳衣密領宗旨 住後僧問 如何是佛 師曰 明日來向汝道 如今道不得

 

기주(蘄州) 삼각산(三角山) 영규선사(令珪禪師). 청평(淸平)을 초참(初參)하자 청평이 문왈(問曰) 와서 무엇하려느냐. 사왈(師曰) 와서 예배합니다. 가로되 누구(阿誰)에게 예배하느냐. 사왈 특별히 와서 화상에게 예배합니다. 청평이 꾸짖으며() 가로되 이() 둔근(鈍根) 아사(阿師). 스님이 이에 예배하자 청평이 스님의 목 위에 손으로써 한 번(一下) 쪼개었다. 스님이 이로 좇아 구의(摳衣)하고 종지(宗旨)를 비밀히 영오(領悟)했다. 주후(住後)에 승문(僧問) 무엇이 이 부처입니까. 사왈 명일(明日) 온다면 너를 향해 말하겠다. 여금엔 말함을 얻지 못한다.

 

景德傳燈錄卷第十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