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림성사

총림성사권하(叢林盛事卷下) 소자유(蘇子由)

태화당 2026. 3. 10. 07:00

穎濵先生蘇子由 甞謫筠陽 與眞淨道契 甞有頌寄香城順和尙曰 融却無窮事 都成一片心 此心仍不有 從古至如今 又曰 如見復如亡 相逢咲幾場 此間無首尾 尺寸不須量 欲識東坡老 堂堂一丈夫 近來知此事 也不讀文書 東坡亦在貶所 聞公深向此道 榜其所居曰東軒 以詩戲之 有盛取東軒長老來之句 子由答之曰 縱使盛來無用處 雪堂自有老師兄 又甞和淵明一詩云 佛法行中原 儒者耻論茲 功施冥冥中 而何負當時 此方舊染雜 渾渾無名緇 治生守家室 坐使斯人疑 未知酒肉非 寧與生死辭 熾然吾閩中 佛事不可思 生子多穎悟 得報不汝欺 時有正法眼 一出照曜之 誰謂邑中豪 請誦我此詩

蘇子由; 蘇轍(1039-1112) 宋代居士 字子由 號潁濱(或作穎濵)遺老 眉山(今屬四川)人 歷官右司諫 中書舍人 戶部侍郞 翰林學士知制誥 御史中丞 元祐六年(1091) 拜尙書右丞 次年進門下侍郞 哲宗親政 落職知汝州 徽宗時 提擧宮觀 在筠州(今江西高安)監鹽酒稅時 與黃檗道全交遊 道全勸他參禪 後謁上藍順禪師省悟 從此喜與僧人交遊 常居寺中數月不返 爲蜀學派重要人物 主張三敎合一 著有栾城集 老子解 [宋史三三九 五燈會元十八]

香城順; 宋代黃龍派僧 西蜀人 出家後 與圓通居訥同行赴蜀 後參黃龍慧南 得其心法 歷住洪州(江西)上藍禪院 景福 香城 雙峰諸刹 以其接化親切 人稱順婆婆 壽八十餘 於香城山坐化 [普燈錄四 續傳燈錄十六]

淵明; 陶潛(365-427) 東晉人 號淵明 字元亮 門栽五柳 自號五柳先生 爲彭澤令 是時郡遣督郵至 縣吏當束帶見督郵 潛乃嘆曰 我不能爲五斗米折腰 向閭里小兒 乃自解印去居尋陽桑柴 及宋受禪 與周續之劉遺民 並不應辟命 世號尋陽三隱 性不解音 畜素琴一張 絃徽不具 每朋酒之會 則撫而和之曰 但識琴中趣 何勞絃上聲 與廬山相近 時訪遠公 遠愛其曠達 招之入白蓮社 陶性嗜酒 謂許飮卽來 遠許之 陶入山 久之以無酒 攢眉而去 門人諡稱靖節先生 [佛祖統紀八 佛祖歷代通載七 祖庭事苑三 禪林寶訓音義 東林十八高賢傳]

 

영빈선생(穎濵先生) 소자유(蘇子由; 蘇轍)가 일찍이 균양(筠陽)으로 폄적(貶謫; ; 降職 流配)되었고 진정(眞淨; 克文)과 더불어 도계(道契; 도로써 結交)했다.일찍이 송()이 있어 향성순(香城順) 화상에게 기탁해 가로되 무궁사(無窮事)를 녹여버리니/ 모두() 일편심(一片心)을 이루었다/ 차심(此心)은 잉연(仍然; )히 있지 않나니/ 옛으로 좇아 여금에 이른다. 우왈(又曰) ()과 같고 다시 망()과 같나니/ 상봉하여 웃은 게 몇 마당()이었나/ 차간(此間)엔 수미(首尾)가 없나니/ 척촌(尺寸)으로 잼()을 쓰지() 않는다. 동파로(東坡老; 蘇軾)를 알고자 한다면/ 당당(堂堂)한 한 장부(丈夫)/ 근래에 차사(此事)를 알아/ 또한() 문서(文書)를 읽지 않는다. 동파(東坡)도 또한 폄소(貶所; 流配地)에 있었는데 공()이 깊이 차도(此道)를 향한다 함을 들었다. 그 소거(所居)에 방()하여 가로되 동헌(東軒)이라 했고 시로써 그것()을 희롱했는데() 동헌장로(東軒長老)를 성취(盛取)하여 오라는 구가 있었다. 자유(子由)가 이()에 답해 가로되 종사(縱使; 설령. 설사) 성래(盛來)하여도 쓸 곳이 없나니 설당(雪堂; 道行)에게 스스로 노사형(老師兄)이 있다. 또 일찍이 연명(淵明; 陶潛)의 일시(一詩)에 화()해 이르되 불법이 중원(中原)에 행하매/ 유자(儒者)는 이()를 논함을 수치(羞恥; )로 여긴다/ ()을 명명(冥冥; 幽暗하고 深遠) 가운데 베풀거늘/ 어찌해야 당시(當時)를 짊어지느냐()/ 차방(此方)은 오래() 염잡(染雜; 오염되고 잡됨)되었고/ 혼혼(渾渾; 渾濁貌. 紛亂貌)하여 명치(名緇; 名僧)가 없었다/ 치생(治生; 生活方道를 차림)하며 가실(家室)를 지키고/ 문득() 사인(斯人)으로 하여금 의심케 했다/ 주육(酒肉)의 그름()을 알지 못하거늘/ 어찌() 생사(生死)와 고별(告別; )하겠는가/ 치연(熾然)히 나의 민중(閩中)/ 불사(佛事)를 가히 사의(思議; )치 못한다/ 자식을 낳으면 다분히 영오(穎悟)하고/ 과보를 얻음엔 너를 속이지 않는다(不汝欺)/ 때에 정법안(正法眼)이 있어/ 일출(一出)하매 이()를 조요(照曜; 照射)한다/ 누가 읍중(邑中)의 호귀(豪貴; )를 이르느냐()/ 청컨대 나의 이 시를 외워라.

蘇子由; 소철(蘇轍; 1039-1112)이니 송대 거사. 자는 자유(子由)며 호는 영빈(潁濱; 穎濵으로 지음)ㆍ유로(遺老)니 미산(지금 사천에 속함) 사람. 우사간ㆍ중서사인ㆍ호부시랑ㆍ한림학사지제고ㆍ어사중승을 역관(歷官; 벼슬을 경력함)했음. 원우 6(1091) 상서우승에 제배(除拜)되었고 다음해 문하시랑으로 승진했음. 철종이 친정(親政)하자 낙직(落職; 벼슬자리에서 떨어짐)하여 여주를 지(; 主管)했음. 휘종 때 제거궁관(提擧宮觀)이 되었음. 균주(지금의 강서 고안)에 있으면서 염주세(鹽酒稅)를 감독할 때 황벽도전(黃檗道全)과 교유(交遊)했고 도전이 그에게 참선을 권했음. 후에 상람순선사(上藍順禪師)를 참알해 성오(省悟)했음. 이로부터 승인과 교유하기를 좋아했음. 일찍이() 사중(寺中)에 거주하며 몇 달 동안 돌아가지 않았음. 촉학파(蜀學派)의 중요한 인물이며 3() 합일(合一)을 주장했음. 저서에 난성집ㆍ노자해가 있음 [송사339. 오등회원18].

香城順; 송대 황룡파승. 서촉 사람. 출가 후에 원통거눌과 동행하여 촉에 이르렀고 후에 황룡혜남(黃龍慧南)을 참해 그의 심법을 얻었음. 홍주(강서) 상람선원(上藍禪院)ㆍ경복ㆍ향성(香城)ㆍ쌍봉 여러 사찰을 역주(歷住)했음. 그의 접화(接化)가 친절하여 사람들이 순파파(順婆婆)로 호칭했음. 나이는 80여며 향성산에서 좌화(坐化)했음 [보등록4. 속전등록16].

淵明; 도잠(陶潛; 365-427)이니 동진 사람. 호는 연명(淵明)이며 자는 원량. 문 앞에 5()를 심고는 스스로 호하기를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했음. 팽택령(彭澤令)이 되었는데 이때 군에서 독우(督郵)를 파견해 이르렀음. 현리(縣吏)는 마땅히 속대(束帶)하고 독우를 뵈어야 했음. 도잠이 이에 탄식하며 가로되 내가 능히 5()의 쌀을 위해 허리 굽혀 여리(閭里)의 소아를 향하지 못하겠다. 이에 스스로 인수(印綬; 는 인끈 수)를 풀고 떠나가서 심양의 상시(桑柴)에 거주했음. ()이 수선(受禪)함에 이르러 주속지ㆍ유유민과 더불어 모두 벽명(辟命; 불러서 任命하다)에 응하지 않았으며 세상에서 호하기를 심양삼은(尋陽三隱)이라 했음. 성격이 음()을 알지 못했으나 소금(素琴) 1()을 수용(受容)했고 현휘(絃徽)를 갖추지 않았음. 매번 붕주(朋酒)의 모임에 곧 이를 두드리며 화응해 가로되 다만 거문고 속의 지취를 안다면 어찌 줄 위의 소리에 노고하겠는가(但識琴中趣 何勞絃上聲). 여산과 서로 가까운지라 때로 원공(遠公)을 방문했는데 원공이 그 광달(曠達)을 사랑했고 그를 초청해 백련사(白蓮社)에 들어오라 했음. 도잠은 성품이 술을 좋아했으므로 이르기를 음주를 허락한다면 곧 오겠습니다. 원공이 이를 허락했고 도잠이 입산했음. 오래되어도 술이 없는지라 눈썹을 찌푸리고 떠났음. 문인이 시()하여 정절선생이라 호칭했음 [불조통기8. 불조역대통재7. 조정사원3. 선림보훈음의. 동림십팔고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