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別峰印自金山遷乳峰 有毉生陸安者 夜夢神人報云 師卽達觀穎之後身也 師天資閑暇 嗣華藏民 自出蜀 卽抵雙徑見妙喜 喜問云 甚處來 印云 西川 喜云 未離劒關 與你三十棒 印云 合起動和尙 喜舘於楞伽室 待之甚厚 後歷居大刹 晚奉詔居徑山 一住九年 每以華嚴作佛事 紹興庚辰 示寂於菖蒲田 辭徑山塗毒 毒曰 和尙幾時行止 印曰 水到渠成 卽更衣端坐而逝 其年臘月八日也 臨行 門人覔偈 卽大書曰 千偈萬偈 總是熱荒 我有一句 死後擧揚 塗毒亟捧龕返歸法堂正𥨊 七日以當代禮送之 時感之 後二年 塗毒示歸寂 人懷報德之心 印有山中書懷 一味林間飽黑甜 儘敎氣焰日炎炎 不將無病自求病 多是解粘添得粘 粗有芋煨如懶瓚 更無錐卓似香嚴 枕邊留得靑山在 雨後層層翠滴簷 又甞題農夫醉打圖一絶 農夫何事損天和 醉後依前擊壤歌 不似當年劉項飮 胸中各自有干戈
●毉生; 同醫生 掌握醫藥衛生知識 從事疾病預防和治療的專業人員的統稱
●神人; 新華嚴經四十二與菩薩本業經所擧的佛十名之一 又俗稱之神人則多指具有神通力之仙人
●達觀穎; 曇穎(989-1060) 宋代臨濟宗僧 杭州(浙江)錢塘人 俗姓丘 號達觀 十三歲投龍興寺出家 初禮謁大陽警玄 後參於谷隱蘊聰(臨濟下五世) 嗣其法 住於潤州(江蘇)金山龍游寺 嘉祐五年示寂 壽七十二 臘五十三 [續燈錄四 禪林僧寶傳二十七 聯燈會要十三 釋氏稽古略四]
●華藏民; 安民 宋代楊岐派僧 字密印 嘉定(今屬上海)朱氏 初講楞嚴於成都 爲義學所歸 時圓悟居昭覺 往參 一日 悟擧古帆未挂因緣 師聞領悟 受法 尋開法金陵保寧 遷常州華藏 後寂於中峰 [五燈會元十九 明高僧傳四]
●舘; 同館 指使居住 安置
●水到渠成; 水流到過的地方 自然形成溝渠 比喩到一定時機 事情自然成就
●熱荒; 焦躁 焦急 猶燥熱
●黑甜; 一酣睡 二指鴉片 鴉片色黑 吸後有快感 故稱
●芋煨如懶瓚; 懶瓚 明瓚 唐代僧 初參嵩山普寂 默證心契 竝嗣其法 然人罕推重 乃閑居衡巖 衆僧營作 師則晏如 縱被詆訶 殊無愧恥 人稱懶瓚 懶殘 好食衆人之殘食 逐之則所出言語皆契佛理 時人疑是彌陀應身 天寶元年(742)頃 至南嶽寺執役 夜止群牛之下 如是經二十年 李泌隱居衡山時 曾往拜謁 卒諡大明禪師 塔存南嶽 有南嶽懶瓚和尙歌行世 [宋高僧傳十九 傳燈錄三十] ▲碧巖錄第三十四則 懶瓚和尙 隱居衡山石室中 唐德宗聞其名 遣使召之 使者至其室宣言 天子有詔 尊者當起謝恩 瓚方撥 牛糞火 尋煨芋而食 寒涕垂頤未甞答 使者笑曰 且勸尊者拭涕 瓚曰 我豈有工夫爲俗人拭涕耶 竟不起 使回奏 德宗甚欽嘆之
●錐卓似香嚴; 智閑(?-898) 唐代僧 靑州(山東益都)人 初從百丈懷海出家 後謁潙山靈祐禪師 不契 泣涕辭去 偶於山中芟草 瓦礫擊竹作聲 廓然有省 乃悟潙山祕旨 因嗣其法 住於鄧州香嚴山 化法大行 淨侶千餘人 後世稱之爲香嚴禪師 師生性嚴謹 語喜簡直 有偈頌二百餘首 諸方盛行 後敕諡襲燈大師 [傳燈錄十一 宋高僧傳十三] ▲祖堂集十九香嚴 香嚴便造偈對曰 去年未是貧 今年始是貧 去年無卓錐之地 今年錐亦無
●擊壤歌; 是一首遠古先民詠贊美好生活的歌謠 據帝王世紀記載 帝堯之世 天下大和 百姓無事 有八九十老人 擊壤而歌 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於我何有哉 [百度百科]
●劉項飮; 劉項 劉邦與項羽 祖庭事苑五 鴻門 項羽與沛公 爲鴻門之會 亞父謀欲殺沛公 令項莊拔劍舞坐中 欲擊沛公 項伯常屛蔽之 時獨沛公與張良得入坐 樊噲居營門外 事急 直撞入立帳下 沛公如廁 走還霸上
○별봉인(別峰印; 寶印)이 금산(金山)으로부터 유봉(乳峰)으로 옮겼다. 의생(毉生) 육안(陸安)이란 자가 있어 야몽(夜夢)에 신인(神人)이 알려 이르되 스님은 곧 달관영(達觀穎; 曇穎)의 후신(後身)이다. 스님은 천자(天資)가 한가(閑暇)했고 화장민(華藏民; 安民이니 저본에 華藏珉으로 지었음)을 이었다. 출촉(出蜀)함으로부터 곧(卽) 쌍경(雙徑; 쌍경사)에 다다라 묘희(妙喜)를 참견했다. 묘희가 문운(問云) 어느 곳에서 오느냐. 인운(印云) 서천(西川)입니다. 희운(喜云) 검관(劒關)을 떠나지 아니한 전에 너(你)에게 30방(棒) 준다. 인운(印云) 합당히(合) 화상을 기동(起動)케 했습니다. 묘희가 릉가실(楞伽室)에 거주케 하고(舘) 그(之)를 우대(優待; 待)함이 심히 돈독(敦篤; 厚)했다. 후에 대찰(大刹)을 역거(歷居)했고 만년에 봉조(奉詔)하여 경산(徑山)에 거주했는데 일주(一住)에 9년이었다. 매양 화엄으로써 불사를 지었다. 소흥(紹興) 경진(庚辰; 1160) 창포전(菖蒲田)에서 시적(示寂)했는데 경산(徑山) 도독(塗毒; 智策)에게 고별(辭)하자 독왈(毒曰) 화상은 어느 때 행지(行止; 행위를 멈춤)합니까. 인왈(印曰) 물이 이르면 도랑을 이룹니다(水到渠成). 곧 옷을 갈아 입고(更衣) 단좌(端坐)하여 떠났으니 그 해 납월 8일이다. 임행(臨行)에 문인(門人)이 게(偈)를 찾자 곧 대서(大書)해 가로되 천게만게(千偈萬偈)가/ 모두(總) 이 열황(熱荒)이다/ 나에게 1구가 있나니/ 사후에 거양(擧揚; 擧說 闡揚)하리라. 도독(塗毒)이 급히(亟) 봉감(捧龕)하여 법당의 정침(正𥨊)으로 반귀(返歸)했고 7일 만에 당대(當代)로써 그(之)를 예송(禮送)했다. 시인(時人; 時)이 이(之)에 감동(感動; 感)했다. 2년 후 도독이 귀적(歸寂; 逝世)을 보이자 사람들이 보덕지심(報德之心)을 품었다(懷). 인(印; 보인)이 산중서회(山中書懷)가 있다. 일미(一味)로 임간(林間)에서 흑첨(黑甜)에 배부르나니(飽)/ 언제나(儘) 기염(氣焰)을 날로 염염(炎炎)하게 한다/ 무병(無病)을 가지고 스스로 병을 구하지 말지니/ 다분히 이는 붙은 것을 떼다가(解粘) 붙음을 첨득(添得)함이다/ 대략(大略; 粗) 토란을 구움이 나찬과 같음(芋煨如懶瓚)이 있고/ 다시, 송곳을 세움이 향엄과 같음(錐卓似香嚴)이 없다/ 침변(枕邊)엔 청산을 유득(留得)하여 있고(在)/ 우후(雨後)에 층층(層層)이 푸른 물방울(翠滴)의 처마(簷)다. 또 일찍이 농부취타도(農夫醉打圖)에 일절(一絶; 하나의 絶句)을 제(題)했다. 농부가 무슨 일로 천화(天和; 天地의 和氣)를 손상(損傷; 損)하는가/ 취후(醉後)에 의전(依前)히 격양가(擊壤歌)로다/ 당년(當年)의 유항음(劉項飮; 유방과 항우의 宴會)과 같지 않나니/ 흉중에 각자 간과(干戈; 방패와 창)과 있었다.
●毉生; 의생(醫生)과 같음. 의약과 위생(衛生)의 지식을 장악하여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종사하는 전업인원(專業人員)의 통칭(統稱).
●神人; 신화엄경42와 보살본업경에 든 바 불타 10명(名)의 하나. 또 속칭의 신인은 곧 다분히 신통을 갖춘 선인(仙人)을 가리킴.
●達觀穎; 담영(曇穎; 989-1060)이니 송대 임제종승. 항주(절강) 전당 사람. 속성은 구며 호가 달관(達觀). 13세에 용흥사에 투입해 출가했음. 처음엔 대양경현을 예알했고 후에 곡은온총(谷隱蘊聰; 임제하 5세)을 참해 그의 법을 이었음. 윤주(강소) 금산 용유사에 주(住)했으며 가우 5년에 시적했음. 나이는 72며 납은 53 [속등록4. 선림승보전27. 연등회요13. 석씨계고략4].
●華藏民; 안민(安民)이니 송대 양기파승. 자는 밀인이며 가정(지금 상해에 속함) 주씨. 처음에 성도에서 릉엄을 강설하며 의학(義學)이 귀의하는 바가 되었음. 당시에 원오(圓悟)가 소각에 거주했고 가서 참했음. 어느 날 원오가 고범미괘(古帆未挂)의 인연을 들자 스님이 듣고 영오(領悟)했고 수법(受法)했음. 이윽고 금릉 보녕에서 개법했고 상주 화장(華藏)으로 옮겼음. 후에 중봉에서 적(寂)했음 [오등회원19. 명고승전4].
●舘; 관(館)과 같음. 거주하게 함을 가리킴. 안치함.
●水到渠成; 물이 흘러 도과(到過; 이르거나 통과)하는 지방은 자연히 구거(溝渠; 도랑)를 형성함. 일정한 시기에 이르면 사정을 자연히 성취함에 비유함.
●熱荒; 초조(焦躁). 초급(焦急). 조열(燥熱)과 같음.
●黑甜; 1. 감수(酣睡). 2. 아편(鴉片)을 가리킴. 아편의 색이 검고 마신 후에 쾌감이 있는지라 고로 일컬음.
●芋煨如懶瓚; 나찬(懶瓚)은 명찬(明瓚)이니 당대승. 처음에 숭산보적(嵩山普寂)을 참해 묵묵히 증득하고 마음에 계합했으며 아울러 그의 법을 이었음. 그러나 사람들이 추중(推重)함이 드물었고 이에 형암(衡巖)에 한가히 거처했음. 중승이 영작(營作; 집 따위를 짓거나 물건을 만듦)해도 스님은 곧 안여(晏如; 편안한 모양)했으며 비록 저가(詆訶; 꾸짖고 책망함)를 입어도 특수히 부끄러움이 없었음. 사람들이 나찬(懶瓚)ㆍ나잔(懶殘)으로 호칭했음. 중인(衆人)의 남은 밥을 먹기를 좋아했으며 그를 축출하면 곧 내뱉는 언어가 모두 불리(佛理)에 계합했음. 당시의 사람들이 이 미타의 응신이라고 의심했음. 천보 원년(742) 무렵 남악사(南嶽寺)에 이르러 집역(執役; 服役)했는데 밤에는 뭇 소 아래에 머물렀으며 이와 같이 20년을 경과했음. 이비(李泌)가 형산에 은거할 때 일찍이 가서 배알(拜謁)했음. 졸시(卒諡)는 대명선사며 탑이 남악에 존재함. 남악나찬화상가(南嶽懶瓚和尙歌)가 있어 세상에 유행함 [송고승전19. 전등록30]. ▲벽암록 제34칙 나찬화상(懶瓚和尙)이 형산(衡山)의 석실 가운데 은거했다. 당덕종(唐德宗)이 그 이름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를 불렀다. 사자가 그 석실에 이르러 선포해 말하되 천자께서 부름(詔)이 있으십니다. 존자는 마땅히 일어나 사은(謝恩)하세요. 나찬이 막 우분화(牛糞火)를 헤쳐 구운 토란(芋)을 찾아 먹으면서 찬 눈물이 턱에 드리워져 일찍 답하지 못했다. 사자가 웃으며 가로되 다만 존자에게 권하오니 눈물을 닦으십시오. 나찬이 가로되 내가 어찌 속인을 위해 눈물을 닦는 공부가 있으랴. 마침내 일어나지 않았다. 사자가 돌아가 아뢰자 덕종이 매우 흠탄(欽嘆)했다
●錐卓似香嚴; 지한(智閑; ?-898)이니 당대승. 청주(산동 익도) 사람. 처음엔 백장회해(百丈懷海)를 좇아 출가했고 뒤에 위산영우(潙山靈祐)를 참알(參謁)했으나 계합(契合)치 못했음. 읍제(泣涕; 울며 눈물 흘림)하며 고별하고 떠나 우연히 산중에서 풀을 베다가 와력(瓦礫)이 대나무에 부딪치며 소리를 짓자 휑하게 깨침이 있었음. 이에 위산(潙山)의 비지(秘旨)를 깨쳤고 인하여 그의 법을 이었음. 등주(鄧州) 향엄산(香嚴山)에 거주하면서 교화의 법을 크게 행했으며 정려(淨侶)가 천여 인이었으며 후세에 그를 일컬어 향엄선사(香嚴禪師)라 했음. 스님은 타고난 성품이 엄근(嚴謹)하고 말은 간직(簡直)을 좋아했음. 게송 2백여 수(首)가 있어 제방에 성행(盛行)함. 후에 칙시(敕諡)하여 습등대사(襲燈大師)라 했음 [전등록11. 송고승전13]. ▲조당집19 향엄. 향엄이 바로 게를 지어 대답해 가로되 거년은 이 가난이 아니며/ 금년이 비로소 이 가난이다/ 거년은 송곳 세울 땅(卓錐之地)도 없었는데/ 금년은 송곳마저 또한 없다.
●擊壤歌;이는 한 수의 먼 옛날 선민(先民; 선대의 사람. 옛날 사람)이 아름다운 생활을 노래하며 찬미한 가요임. 제왕세기의 기재에 의거하자면 제요(帝堯)의 시기에 천하가 크게 화평하여 백성이 무사했다. 8, 9십 노인이 있어 땅을 치며(擊壤) 노래하되 해가 나오면 일하고 해가 들어가면 쉬나니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거늘 제왕의 힘이 나에게 어찌 있겠는가 [백도백과].
●劉項飮; 유항(劉項)은 유방(劉邦)과 항우(項羽). 조정사원5. 홍문(鴻門) 항우(項羽)와 패공(沛公; 劉邦이니 字가 季. 沛縣에서 일어났으므로 沛公이라 함)이 홍문(鴻門)의 연회(宴會)를 했다. 아부(亞父; 范增이니 楚의 항우가 범증을 존경해 부르던 말)가 음모로 패공을 죽이려고 항장(項莊; 항우의 사촌동생)으로 하여금 검을 뽑아 좌중(坐中)에서 춤을 추게 하면서 패공을 격살(擊殺)하려 했지만 항백(項伯; 항우의 叔父)이 늘 그를 가렸다. 때에 유독 패공(沛公)과 장량(張良)만이 들어감을 얻어 앉았는데 번쾌(樊噲)가 영문(營門) 밖에 거처하다가 일이 급하자 바로 치고 들어가 장막 아래 섰다. 패공이 측간에 가는 척하며(如는 갈 여) 도주해 패상(霸上)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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