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七】 조주가 남천에게 묻되 무엇이 이 도입니까. 남천이 이르되 평상심이 이 도(*平常心是道)다. 스님이 이르되 도리어 취향(趣向)을 빌립니까. 남천이 이르되 취향하려고 하면 곧 어긋난다. 스님이 이르되 헤아리지(擬) 않으면 어떻게 이 도를 알겠습니까. 남천이 이르되 도는 지(知)와 부지(不知)에 속하지 않는다. 지(知)는 이 망각(妄覺)이며 부지(不知)는 이 무기(*無記)다. 만약 이 진실로 헤아리지 않는 도에 통달했다면 마치 태허(大虛; 큰 허공)의 확연허활(廓然虛豁)과 같거늘 어찌 가히 억지로 시비하리오. 스님이 언하에 대오했다.
취암열(翠嵓悅)이 송하되 평상심이 이 도라 하니/ 거보(擧步; 발을 내딛다)하여 황초(荒草)에 들어간다/ 도리어 차탄(嗟歎)하노니 왕노사여/ 도저(*到底)히 능히 깨닫지 못했다/ 능히 깨닫지 못함이여/ 옥토(玉兎; 달)와 금오(金烏; 해)가 비주(飛走)하는 대로 맡긴다.
칙지(則之)가 송하되 화로를 둘러싸고 불을 향하면 온몸이 따뜻하고/ 물을 건너면서 얼음을 두드리면 뼈에 사무치게 춥다/ 천상에 있는 별은 다 북두성에 공수(拱手)하고/ 집집마다 문 밖이 장안으로 통한다.
법진일(法眞一)이 송하되 조주가 석일(昔日)에 남천을 뵙자/ 언하에 투기(投機)하여 저절로 확연(廓然)했다/ 평상심이 이 도임을 알고자 하느냐/ 평상에도 머물지 않아야 도가 비로소 현묘하다.
불감근(佛鑑勤)이 송하되 평상의 도를 알고자 한다면/ 천진(天眞)이니 자연에 맡겨라/ 배를 운행하려면 의당 노를 들고/ 말을 달리려면 곧 채찍을 가한다/ 만약 주림을 만나거든 먹고/ 도리어 피곤함으로 인해 곧 잔다/ 모두 인연으로 좇아 얻은 바이지만/ 얻은 바는 또한 인연이 아니다/ 얻은 바가 또한 인연이 아니니/ 당인(當人)이 자연을 깨쳐라/ 우중(雨中)에 밝은 달을 보고/ 화리(火裏)에서 맑은 샘을 긷는다/ 직립(直立)하면 머리가 땅에 드리우고/ 횡면(橫眠)하면 발이 하늘을 가리킨다/ 응당 꼭 이렇게(漝麽) 이회(理會)해야/ 비로소 조사선에 계합한다.
원오근(圜悟勤)이 송하되 밥을 만나면 밥을 먹고/ 차를 만나면 차를 먹는다/ 천중백잡(千重百匝)하면서/ 사해가 일가(四海一家)다/ 붙은 것을 떼고 묶인 것을 제거하니/ 말을 해도 무언이며 동작해도 동작이 없다/ 확연(廓然)한 본체가 허공과 같나니/ 바람은 범을 좇고 구름은 용을 좇는다.
운문고(雲門杲)가 송하되 그대에게 권하노니 정신을 고로(苦勞; 노고)함을 쓰지 말아라/ 평상이라고 불러 지으면 더욱 친하지 않다/ 냉담(冷淡)하여 전연(全然) 자미(滋味)가 없지만/ 1회 거기(擧起)하매 1회 새롭다.
죽암규(竹庵珪)가 송하되 만약 이르되 평상심이 이 도라 한다면/ 지만(枝蔓; 가지와 덩굴)의 향상(向上)에 다시 가지(枝)를 냄이다/ 살갗에 붙은 땀내 나는 적삼(*貼肉汗衫)을 벗어버릴 것 같으면/ 불러와서 눈 위에 눈썹을 안치해 주겠다.
개선섬(開先暹)이 상당하여 거(擧)하되 조주가 남천에게 묻되 무엇이 이 도입니까. 이르되 평상심이 이 도다. 스님이 이르되 어느 것이 이 평삼심인 줄 알지 못하겠다. 여금에 화남(*和南)과 불심(不審), 차수(叉手)와 병족(竝足)이 다 이 비상(非常)이거늘 무엇이 이 평상(平常)인가. 보지 못하는가 덕산선사(*德山先師)가 말하되 평상심이 이 도라 하니/ 천진(天眞)이라 가히 논하지 못한다/ 달이 만포(萬浦)에 떨어지매/ 이 중류(衆流)가 삼키지 못함과 같다. 이미 그러히 평상이니 가히 다시 억지로 두각(頭角)을 냄은 옳지 않다. 노고롭게 오래 서지(久立) 말아라.
법진일(法眞一)이 거(擧)하되 조주가 남천에게 묻되 무엇이 이 도입니까. 남천이 이르되 평상심이 이 도다. 스님이 이르되 중중(衆中)에서 상량(商量)하기를 다만 평실(*平實)의 이회(理會)를 지었다, 혹은 이르되 반상합도(*返常合道)다 하거니와 만약 이와 같다면 모두 평상(平常)에 체재(滯在)하는지라 고인을 보고자 한다면 또한 옳지 않다. 중이 곧 묻되 지여(只如) 스님의 뜻은 어떠합니까. 스님이 이르되 톱으로 칭추를 가름이다(*鋸解秤鎚). 다시 중에게 묻되 알겠는가. 중이 이르되 알지 못합니다. 스님이 이르되 도리어 남천에게 문취(問取)하라.
개원기(開元琦)가 상당하여 이르되 이 1법은 펼쳐 가면 곧 사계(沙界)를 곧 편주(遍周)하고 거두어 오면 곧 섬호(纖毫)도 존재하지 않는다. 승(僧)이거나 속(俗)이거나 모두 다 구족했고 크거나 작거나 모두 변제(邊表)가 없다. 어찌 보지 못하느냐, 지난날 조주가 남천에게 묻되 무엇이 이 도입니까 至조주가 언하에 대오했다. 제인자(諸仁者)여 그래 말하라, 조주가 당시에 깨친 일이 어떠한가. 도리어 말함을 얻을 사람이 있느냐. 만약 없다면 개원(開元)이 금일 제인을 위해 말하겠다. 조주 노인이 다만 답보(踏步)하여 앞을 향할 줄만 알고 타갱낙참(墮坑落壍)을 깨닫지 못했다. 남천화상도 또한 이 냉처(冷處)에서 파화(把火)해야 하리라. 불자로써 승상(繩床)을 치고 하좌했다.
운문고(雲門杲)가 보설(普說) 운운(云云) 배워서 이를 아는(學而知之) 자가 있고 태어나자 이를 아는(*生而知之) 자가 있다. 예컨대 중이 조주에게 묻되 학인이 막 총림에 들었습니다. 스님의 지시를 구걸합니다. 조주가 이르되 네가 죽을 먹었느냐 또는 아니냐. 중이 이르되 죽을 먹었습니다. 조주가 이르되 발우를 씻으러 가거라. 중이 언하에 홀연히 대오하여 당하(當下: 즉시)에 휴헐(休歇)하고 곧 생사의 거처(去處)를 알았다. 묘희(妙喜)가 늘 설하기를 쉽지 않나니 이 중은 역량이 있다. 조주가 1백1십 근(斤) 담자(擔子; 짐)를 가져다 한 번 보내어 그의 어깨 위에 보내어 두매 이 중이 짊어지고서(荷得) 일기(一氣; 한 호흡)에 120리를 달려가되 다시는 머리 돌리지 않았으니 마치 범위(梵位; 梵王位)를 가지고 바로 범용(凡庸; 평범하고 변변하지 못한 사람)에게 줌과 같았다. 마음 속이 곧 첩첩지(*怗怗地)며 자력(慈力)을 흥득(興得)하고 비원(悲願)을 운득(運得)했으니 이것은 이 배워서 이를 아는(學而知之) 자다. 어느 것이 이 출생하면서 이를 아는(生而知之) 자인가, 예컨대 조주가 사미가 되었을 때 본사(*本師)와 함께 행각하다가 남천에 이르렀는데 남천의 와차(臥次)를 만났다. 본사가 예배하여 마치고 조주가 바야흐로 예배하는데 남천이 물어 이르되 최근에 어느 곳을 떠났느냐. 조주가 이르되 최근에 서상(瑞像; 瑞像院)을 떠났습니다. 남천이 이르되 도리어 서상(瑞像)을 보았느냐. 조주가 이르되 서상은 곧 보지 못했습니다만 면전에 다만 와여래(臥如來)를 봅니다. 남천이 드디어 일어나 묻되 너는 이 유주사미(有主沙彌)냐 무주사미(無主沙彌)냐. 조주가 이르되 이 유주사미입니다. 남천이 이르되 어느 것이 이 너의 주(主)냐. 만약 이 여금의 선화가(禪和家)일진대 곧 앞으로 다가가 손가락을 퉁기거나 저(个) 원상(圓相)을 짓거나 할로 한 번 할하거나 두드려 한 번 두드리거나 소매를 떨치며 곧 가거나 이런 종류의 악기식(惡*氣息)을 방출하였겠지만 너희가 보아라 조주는 완완지(緩緩地; 느릿느릿)에서 앞으로 다가가 말하되 맹춘(孟春)이지만 아직 추우니 복유(伏惟)컨대 화상은 존후(尊候) 만복하십시오. 남천이 이에 유나(維那)를 불러 이르되 이 사미는 별처(別處)에 안배(安排)하라. 다음날 도리어 와서 묻되 무엇이 이 도입니까. 남천이 또한 행방(行棒)하지 않고 또한 하할(下喝)하지 않고 또한 담현(談玄)하지 않고 또한 설묘(說妙)하지 않고 또한 견경(牽經)하지 않고 또한 인론(引論)하지 않고 또한 고인의 공안을 들지 않고 또한 사(事)를 설하지 않고 또한 이(理)를 설하지 않고 다만 실두(實頭; 如實)로 그를 향해 말하되 평상심이 이 도다. 그 조주가 이미 평상심을 이회(理會)하여 얻었기 때문에 곧 도리어 묻되 도리어 취향(趣向)함을 빌립니까 또는 아닙니까. 남천이 이르되 취향하려고 하면 곧 어긋난다 至억지로 시비하겠는가. 조주가 언하에 천료백당(*千了百當)했다. 남천이 말하되 도는 지(知)에 속하지 않고 부지(不知)에 속하지 않는다. 규봉(圭峯)은 이를 일러 영지(靈知)라 했고 하택(荷澤)은 이를 일러 지라는 한 글자가 중묘의 문(知之一字衆妙之門)이라 했고 황룡사심(黃龍死心)은 이르되 지라는 한 글자가 중화의 문(知之一字衆禍之門)이라 했다. 규봉과 하택을 보려고 한다면 곧 쉽지만 사심을 보려고 한다면 곧 어렵다. 이 속에 이르러선 꼭 이 초방안(超方眼)을 갖추어야 하나니 타인에게 설해 줌을 얻지 못하고 타인에게 전해 줌을 얻지 못한다.
송원(松源)이 상당하여 차화를 들고 이르되 청천백일에 이(个) 무엇을 깨쳤느냐, 돌돌돌(咄咄咄; 쯧쯧쯧), 이주(驪珠)로 창룡굴(蒼龍窟)을 격쇄(擊碎)하라.
원록공(*遠錄公)의 구대집(九帶集) 평회상실대(平懷常實帶)에 이르되 중이 남천에게 묻되 무엇이 이 도입니까. 남천이 이르되 평상심이 이 도다. 기여(其如; 如는 例擧를 표시) 평상도(平常道)를 통달하여선 산을 보면 곧 이 산이며 물을 보면 곧 이 물인지라 손 닿는 대로 집어 오매 풀이다. 설사 바람이 불어오매 나무가 움직이고 물결이 일어나매 배가 높아지고 봄에 나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저장하더라도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단지 풍조우순(風調雨順)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하고 변방이 영정(寧靜)하고 군신의 도가 합함을 얻거늘 어찌 기린(麒麟)이 출현하고 봉황이 내의(*鳳凰來儀)하여야 비로소 상서(祥瑞)를 나타냄에 있겠는가. 단지 이(理)가 직도(直道)에 돌아감을 얻으면 사(事)가 이에 평실(*平實)하여 가히 구할 성인이 없고 가히 버릴 범부가 없으며 내외가 평회(*平懷)하여 민연(*泯然)히 절로 없어진다. 소이로 제성(諸聖)의 어언(語言)이 세제(世諦)와 멀지 않아 세간을 수순(世閒)하나니 알면 곧 도중(途中)에서 수용(受用)하려니와 알지 못하면 곧 세제(世諦)로 유포(流布)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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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원. 한문주석 1만 여 개로 염송본문의 各則을 해석하고 전체를 한글로 번역. 주석의 쪽 수가 본문을 조금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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