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二一】 조주가, 중이 묻되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입니까 함으로 인해 스님이 이르되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柏樹는 또 측백나무)다. 중이 이르되 화상은 경계를 가지고 사람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스님이 이르되 나는 경계를 가지고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 중이 이르되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입니까. 스님이 이르되 뜰 앞의 잣나무다. 〈법안(法眼)이 각철취(*覺鐵觜)에게 묻되 받들어 듣건대 조주가 백주자화(栢樹子話)가 있다던데 그렇습니까. 각(覺)이 이르되 선사(先師)는 이 말씀이 없었다. 법안이 이르되 이금(而今; 여금)에 천하에서 다 전하기를 중이 조주에게 묻되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입니까. 조주가 이르되 뜰 앞의 잣나무다. 어찌하여 없었다고 말합니까. 각(覺)이 이르되 선사를 비방하지 말아야 좋을 것이다. 선사는 이 말씀이 없었다〉.
설두현(雪竇顯)이 송하되 칠백갑자(七百甲子) 노선화(老禪和)가/ 가방(家邦)을 안첩(安貼; 安定)하며 이 그를 괴롭힌다/ 사람이 서래의를 묻자 정백(庭柏)을 가리키니/ 도리어 천하로 하여금 간과(干戈; 방패와 창)를 동하게 했다.
또 송하되 천성(千聖)의 영기(靈機)는 친하기가 쉽지 않나니/ 용이 용새끼를 낳으므로 인순(*因循)하지 말아라/ 조주가 연성벽(*連城璧)을 탈득(奪得)하니/ 진주(秦主)와 상여(相如)가 모두 상신(喪身)했다.
분양소(汾陽昭)가 송하되 뜰 앞의 잣나무는 지중(地中)에서 생장하나니/ 이우(犁牛; 耕牛)를 빌려 영상(嶺上)에서 밭을 갈지 않는다/ 바로 이 서쪽에서 오는 천 가지 길에/ 울밀(鬱密)한 조림(稠林; 빽빽한 숲)이 이 눈동자다.
천장초(天章楚)가 송하되 머리 숙이고 무릎 굽혀 서래의를 물으니/ 정백(庭栢; 뜰의 잣나무)이 삼삼(森森; 무성한 모양)한데도 눈이 열리지 않았다/ 가히 우습구나 자가(自家)가 종식(*種息)이 없어/ 지금토록 오히려 조주의 재배(栽培)를 찾는구나.
또 송하되 조주의 정백(庭栢)을 고금에 전하나니/ 납자는 격외(格外)의 현기(玄機)를 과시하지 말아라/ 조사의 단적(端的; 진실)한 뜻을 알고자 하느냐/ 금강(錦江)은 의구히 서천(*西川)에 속했다.
또 송하되 조주의 정백(庭栢)은/ 반은 푸르고 반은 희다/ 머리를 들어 천(薦; 領悟)하지 못한다면/ 주둥이에다 곧 후려갈기겠다.
천의회(天衣懷)가 송하되 조주의 정전(庭前)의 잣나무는/ 삼동(三冬)에 땅을 긁으며 차갑다/ 처처의 녹양(綠楊)은 가히 말을 맬 만하고/ 가가(家家)의 문 밑이 장안으로 통한다.
부산원(浮山遠)이 송하되 정전(庭前)의 백수(栢樹)는 조주가 말했고/ 여릉(廬陵)의 미가(米價)는 길양(*吉陽)이 폈다(敷)/ 세 살 동아(童兒)라도 모두 외우는데(念得)/ 팔십 옹옹(翁翁; 老翁)은 아느냐 또는 아니냐/ 6월에 엄(嚴)하게 얼었다가 가을에 또 덥나니/ 기러기가 사새(*沙塞)로 돌아가며 입에 갈대를 물었다.
자명(慈明)이 송하되 조주의 정전(庭前)의 잣나무가/ 천하에서 선객을 달리게 한다/ 자식을 키우면서 크게 하지 말지니/ 크고 나서 가적(家賊)이 된다.
낭야각(瑯瑘覺)이 송하되 조주의 뜰 앞 잣나무를/ 납승이 다 헤아리지 못한다/ 일당(一堂)의 운수승(*雲水僧)은/ 다 이 시방의 객이다.
천복일(薦福逸)이 송하되 심원(深院)에 서린(盤) 뿌리며 취색(翠色)이 그윽하나니/ 노사(老師)가 일찍이 선류(禪流)에게 지시했다/ 해마다 능상(凌霜; 霜寒에 抵抗함)의 절개를 고치지 않나니/ 청풍을 하재(下載)하며 어느 날에 쉬려나.
승천종(承天宗)이 송하되 서래의 조의(祖意)를 물음이 편다(偏多)하나니/ 조로(趙老)의 기봉(鋒機)의 답이 최고다/ 도리어 뜰 앞의 청수(靑瘦)한 잣나무를 가리키매/ 지금토록 천하에서 선포(禪袍; 僧衣)를 달리게 한다.
안애천(*鴈䔽泉)이 송하되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는/ 빙상(冰霜)이라 뼈에 사무치게 차다/ 조사가 집어 일으키지 못하나니/ 냉안(冷眼)으로 앉아 상간(*相看)하라.
또,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는/ 고근(孤根; 고독한 뿌리)이라 가히 옮기지 못한다/ 꼭 믿을지니 번지(繁枝) 아래/ 청풍이 다할 때가 없다.
또,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는/ 뿌리 없이 곳곳에 생장한다/ 이우(泥牛)가 효후(哮吼)하는 곳에/ 반야(半夜)에 일두(日頭; 頭는 조사)가 밝다.
또,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는/ 이파리 소리에 늘 가을을 띠었다/ 밝디밝게 모두 누설하나니/ 도사(道士)가 나귀를 거꾸로 탔다.
또,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는/ 나부끼며(*婆娑) 대천(大千)에 가득하다/ 금조(今朝)에 일찍 죽을 먹고/ 다시 낮에 고면(高眠; 安眠)함을 방출한다.
석문이(石門易)가 송하되 뜰 앞의 취백(翠栢)을 무운(霧雲)이 에워쌌고/ 학이 서고 용이 서려 기세가 더욱 웅장(雄壯)하다/ 참지 못할 것은 조주 다구한(多口漢)이/ 일시에 선옹(禪翁)에게 분부해 주었다.
도오진(道吾眞)이 송하되 조주의 뜰 앞 잣나무는/ 안리(眼裏)의 전광(電光)이 번쩍함이다(*掣)/ 운수(雲水; 운수객)는 왕래가 많고/ 촌옹(村翁)은 행보가 열등하다.
불일재(佛日才)가 송하되 조주가 정백(庭栢)을/ 선객을 향해 설했다/ 흑칠(黑柒)의 병풍이며/ 송라(*松蘿)의 양격(*亮隔)이다.
자수첩(資壽捷)이 송하되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가/ 여러 선객을 허망하게 움직였다/ 남쪽에서 북쪽의 가향(家鄕)을 묻고/ 동쪽에서 서쪽의 노맥(路陌; 門徑)을 찾았다/ 삼춘(三春)에 양류(楊柳)가 푸르고/ 오야(*午夜)에 섬여(*蟾蜍)가 희다/ 바람이 고요하매 해도(海濤)가 회귀하고/ 파사(波斯; 파사인)가 멀리 바라보며 작액(斫額)한다.
취암열(翠嵓悅)이 송하되 졸렬함을 안고 소림에서 이미 9년이었는데/ 조주에 홀연히 뜰 앞의 잣나무가 자랐다/ 가련하다 무한한 수주인(守株人)이여/ 요료(寥寥)히 앉아서 천봉(千峰)의 색을 대했다.
또 송하되 입문(入門)하매 하필이면 내기(來機)를 분변해야 하는가/ 요도(潦倒)의 선화(禪和)가 스스로 알지 못한다/ 뜰 앞의 잣나무를 억지로 지주(指注; 지시)해/ 도리어 졸지(卒地)에 침추(針錐)를 내리게 했다.
해인신(海印信)이 송하되 사람이 뜰 앞의 잣나무를 물으매/ 나는 이 영남의 객이라 하네/ 도리어 납월의 하늘을 사유하나니/ 눈 속에 매화가 터졌다.
황룡남(黃龍南)이 송하되 만목(萬木)은 수시로 조변(凋變; 시들어 변함)함이 있지만/ 조주의 정백(庭栢)은 고요히(鎭) 늘 영무(榮茂)하다/ 능상(凌霜)하며 정절(貞節)을 포지(抱持)할 뿐만 아니라/ 얼마나 청풍을 연주(演奏)하며 명월(*明月)을 대했던가.
또 송하되 조주가 정전(庭前)의 잣나무를 말함이 있었으니/ 선자(禪者)가 상전(相傳)함이 옛이며 다시 이제다/ 잎을 따고 가지를 찾으며 비록 앎이 있었지만/ 독수(獨樹)는 숲을 이루지 못함을 어찌 알겠는가.
또 송하되 정백(庭栢)이 창창(蒼蒼)하여 조심(祖心)을 보이나니/ 조주의 이 말이 총림에 퍼졌다/ 뿌리가 서리고(盤) 절개를 안고서 금지(*金地)에 있나니/ 선자(禪者)여, 격외(格外)에서 찾음을 그쳐라.
진정문(眞淨文)이 송하되 뜰 앞의 잣나무여/ 조주는 이 말이 없었다/ 만약 이 본색인(本色人)이라면/ 직하(直下; 즉각)에 상허(相許)하지 않으리라.
또, 뜰 앞의 잣나무여/ 조주가 이 말이 있었다/ 동도(同道)의 무리에게 보고(報告)하나니/ 적면(覿面; 당면)에 어떻게 거(擧)하는가.
또, 뜰 앞의 잣나무여/ 나는 말하노니 소나무만 같지 못하다/ 마른 가지가 쪼개져 땅에 떨어지면서/ 지난해의 종려나무를 타착(打着; 打中이니 명중시키다)했다.
또, 조화(造化)는 무사(無私)하여 사의(思議)치 못할 힘이니/ 하나하나 청청(靑靑)하여 세한(歲寒; 추운 계절, 곧 겨울)의 색이다/ 장단(長短)과 대소(大小)가 목전에 있거늘/ 가히 우습구나 시인(時人)이 앎을 얻지 못하네.
곤산원(崑山元)이 송하되 푸름이 쌓이고 뿌리가 서린 형세가 하늘에 기댔나니/ 조주가 일찍이 뜰 앞을 향해 가리켰다/ 지엽(枝葉)의 너풀거림(婆娑)이 심함을 싫어하지 말지니/ 손가락을 꼽으매 거의 2백 년이 넘었다.
동림총(東林揔)이 송하되 푸르고 푸른 정백(庭栢)을 어느 해에 심었나/ 조의(祖意)가 분명해 조주에게 보였다/ 바다가 뽕밭으로 변하면서 궁겁(*窮劫)이 있거늘/ 영묘(靈苗)는 그림자가 없이 시들지 않는 가을이다.
앙산위(仰山偉)가 송하되 다다아아(茶茶芽芽; 茶芽의 强調語)는 꽃이 피지 않고/ 함함담담(*菡菡蓞蓞)은 씨가 맺히지 않았다/ 칠금산(*七金山) 위에 빛이 섬삭(閃爍; 번쩍거리다)하나니/ 직하(直下; 즉각)에 백은(白銀)의 모래를 투과한다.
불타손(佛陁遜)이 송하되 잣나무가 뜰 앞에 있으면서 망언(妄言)을 하지 않나니/ 조주는 금고(今古)에 도가 늘 존재한다/ 춘래추거(春來秋去)는 연년(年年)의 일이니/ 믿지 못하겠거든 영산(靈山)에서 세존에게 물어라.
보녕용(保寧勇)이 송하되 뜰 앞의 잣나무로 선류(禪流)에게 보이매/ 몇 개가 친히 일찍이 조주를 보았는가/ 명년에 다시 새로운 가지가 있어/ 춘풍에 뇌란(惱亂)하며 마침내 쉬지 않는다.
천동각(天童覺)이 송하되 안미는 눈에 가로놓였고(*岸眉橫雪)/ 하목(河目)은 가을을 머금었다/ 해구(海口)는 고랑(鼓浪; 물결을 일으키다)하고/ 항설(*抗舌)은 가류(駕流; 流水를 부리다)한다/ 발란(撥亂; 난을 다스리다)의 수단이며/ 태평의 주모(籌謀)다/ 노조주(老趙州) 노조주(老趙州)여/ 총림을 교교(攪攪; 매우 攪亂하다)하며 마침내 쉬지 않네/ 도연히 공부를 허비함은 조거합철(造車合轍)이며/ 본래 기량(伎倆)이 없음은 색학전구(塞壑塡溝)다.
설두녕(雪竇寧)이 송하되 조로(趙老)의 뜰 앞 잣나무는/ 납승의 참다운 명맥(命脉)이다/ 사람마다 다만 수두(樹頭; 頭는 조사)의 푸름만 보고/ 그 가운데의 향자(香子; 향기로운 果實)의 흼을 보지 못하네.
정엄수(淨嚴遂)가 송하되 유어(有語)는 조주를 비방함이며/ 무어(無語)는 자기를 속임이다/ 가련하게도 법안 스님이/ 각철취(覺䥫觜)를 방과(放過; 放棄)했다/ 여금에 다시 여하(如何)를 묻지 말지니/ 청풍이 잡지(匝地; 땅에 두루함)함을 누구를 의빙해 알겠는가(委; 確知)
또 송하되 조주가 말씀이 없었다 함을 몇 사람이 아느냐/ 강북강남에서 본 자가 드물다/ 산사(山寺)의 도화(桃花)가 다시 어디에 있느냐/ 상봉하면 공연히 백공(*白公)의 시를 사랑한다 하더라.
승천회(承天懷)가 송하되 조주의 정백(庭栢) 외엔 다른 게 없나니/ 바람이 한성(寒聲)을 흔들어 야도(夜濤)와 같다/ 사람이 서래의를 물으매 일찍이 지출(指出)했나니/ 당처를 여의지 않고 잎이 너풀거린다(婆娑).
자수(慈受)가 송하되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가/ 문 밖의 버들과 어떠한가(何似)/ 대진(大盡; 큰 달)은 30일이며/ 소진(小盡)은 29다/ 다시 사(事)가 어떠냐고 묻는다면/ 양생구(孃生口)를 닫아버려라.
숭승공(崇勝珙)이 송하되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여/ 사반(沙飯)은 종래로 끓이기 어렵다/ 눈동자가 있는 자가 밝지 못하고(不明)/ 혀가 없는 사람이 말할 줄 안다(解語)/ 불명(不明)과 해어(解語)를/ 그대를 위해 재거(再擧)하겠다/ 남면(南面)은 한 사람인데/ 만조(滿朝)한 주자(朱紫; 朱紫 옷을 입은 官人)다.
불감근(佛鑑勤)이 송하되 만 리 장공(長空)에 비가 개였을 때/ 일륜(一輪) 명월이 청휘(淸輝)를 비춘다/ 부운(浮雲)이 천인(千人)의 눈을 엄단(掩斷; 가려서 끊다)하니/ 항아(姮娥)의 얼굴을 득견(得見)하는 자 드물다.
운문고(雲門杲)가 송하되 기기구구(崎崎嶇嶇; 崎嶇의 强調語)하고 평탄탄(平坦坦)하나니/ 평탄탄한 곳에 심히 기구(崎嶇)하다/ 갑자기(驀地) 파려(跛驢; 절름발이 나귀)가 능히 축답(蹴蹋; 차고 밟다)하며/ 추풍(追風)의 천마구(天馬駒)를 문지르고 지나갔다. 〈차록(此錄)은 이어서 오조연(五祖演)의 염을 들었음. 〉
묘지곽(妙智廓)이 송하되 송백은 천 년 동안 푸르건만/ 시인(時人)의 뜻에 들어가지 않고/ 모란은 하루 붉지만/ 만성(滿城)의 공자(公子)가 취한다.
양차공(*揚次公)이 송하되 조주의 뜰 아래 잣나무가 삼삼(森森)하나니/ 잎을 따고 가지를 찾으며 옛에서 여금에 이르렀다/ 명안납승(明眼衲僧)이 엿볼 것 같으면/ 서래(西來)의 조의(祖意)가 합당히 평침(平沉)하리라.
혼성자(混成子)가 송하되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가/ 자고로 고격(高格)이 존재했다/ 조주를 보지 못한 사람은/ 제방에서 좋게 객이 되리라.
열재거사(悅齋居士)가 송하되 철우(䥫牛)가 천고에 청파(淸波)에 누웠는데/ 대지에서 너를 어찌할 사람이 없구나/ 누가 한 실오리를 잡아 가볍게 비틀어 돌린다면/ 황전(黃田)의 촌녀가 밤에 북(梭)을 던지리라.
섭현성(*葉縣省; 歸省)이, 중이 백수자화(栢樹子話)를 청익함으로 인해 이르되 내가 너에게 설해 줌은 사양하지 않겠지만 도리어 믿겠는가. 이르되 화상의 중언(重言)을 어찌 감히 불신하겠습니까. 가로되 도리어 처마(簷頭)의 빗방울 소리를 듣느냐. 그 중이 활연(豁然)하여 불각에 실성(失聲)하며 이르되 야(*㖿). 귀성(歸省)이 이르되 네가 저(个) 무슨 도리를 보았느냐. 중이 곧 송으로써 대답해 이르되 첨두(簷頭; 처마)의 우적(雨滴)이여/ 분명히 역력하다/ 건곤(*乹坤)을 타파하고/ 당하(當下; 즉시)에 마음을 쉬었다. 귀성이 흔연(欣然)했다.
선혜대사(*善慧大師)가, 중이 묻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의 의지가 무엇입니까 함으로 인해 스님이 이르되 하늘 가에 달이 처음 나왔다. 이에 송을 이루어 가로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여/ 하늘 가에 달이 처음 나왔다/ 석인(石人)이 손뼉을 두드리며(*附掌) 웃고/ 이우(泥牛)가 해저에 다닌다.
운거우(雲居祐)가 시중(示衆)하여 차화를 들고 이르되 기재(奇哉)로다, 고성(古聖)이 일언반구(一言半句)를 수시(垂示)하니 가위(可謂) 성범(聖凡)의 문호를 절단하고 미륵의 눈동자를 직시(直示)하여 금석(今昔)에 추락함이 없다. 중중(衆中)에 이해(異解)가 다도(多途)며 상량이 비일(非一)이로되 종지를 매몰하고 명언(名言)을 착판(錯判)한다. 혹은 이르기를 청청(靑靑)한 취죽(翠竹)이 모두 이 진여며 울울(鬱鬱)한 황화(黃花)가 반야가 아님이 없다. 혹은 이르되 산하와 초목의 물건마다 다 이 진심(眞心)이 현현(顯現)하였음이거늘 어찌 유독 정전백수자이겠는가. 진모(塵毛)와 와력(瓦礫)이 모두 이 일법계중(一法界中)이라서 중중무진(重重無盡)하고 이사(理事)가 원융(圓融)하다. 혹은 이르기를 정전백수자를 재거(纔擧)하면 직하(直下)에 천취(薦取)하나니 적체(*覿體)가 전진(全眞)이므로 의의지간(擬議之閒)에 벌써 진경(塵境)에 떨어진다. 꼭 이 당인(當人)이 작용해 임기(臨機)하여 상견해야 한다. 혹방혹할(或棒或喝)하고 혹은 주먹을 경기(擎起)하고 옷소매를 한 번 떨치나니 이것의 안목은 마치 석화전광과 상사하다. 혹은 이르되 정전백수자이거늘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조주가 직하(直下)에 사람을 위한 실두(實頭; 如實)의 설화(說話)다. 주리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곧 잠을 자나니(打眠) 동전(動轉)하고 시위(施爲)함이 다 이 자가(自家)의 수용(受用)이다. 이와 같은 견해가 사속여마(似粟如麻)하나니 다 이 천마(天魔)의 종족이며 외도의 사종(邪宗)이니 단지 식정(識情)을 취해 분별하고 용심하여 취사(取捨)하며 억지로 지견을 지음이다. 구이(口耳)로 상전(相傳)하여 사람을 광혹(誑惑)하면서 명리를 도모하려고 함이니 이 무슨 업종(業種)이 조풍(祖風)을 점독(玷瀆)하는가. 왜 유방(遊方)하고 편력(徧歷)하면서 선지식을 구하여 신심(身心)을 결택(決擇)하고 조금이라도 저 납승을 닮지 않는가. 고래로 스스로 종문의 사범(師範)이 있으니 우리의 불심종(*佛心宗)이다. 석범제천(*釋梵諸天)이 공수(拱手)하며 경신(敬信)하고 삼현십성(*三賢*十聖)이 그 유래를 헤아리지 못한다. 이에 불자를 들고 이르되 만약 이 속을 향해 깨달으면 산하대지가 너희와 더불어 동참이다. 다시 좌우를 돌아보고 이르되 도림(*道林)이 어찌 감히 압량위천(壓良爲賤)하리오.
불감근(佛鑑勤)이 차화를 들고 이르되 대범(大凡) 사자(師資)의 도가 합하면 언의(言意)가 상투(相投)한다. 뜻을 얻으면 언어를 잊고(*得意忘言) 토끼를 얻으면 토끼그물을 잊고 고기를 얻으면 통발을 잊나니 조사의 도가 그렇지 않겠는가. 좋기로는 곧(是) 석자(昔者; 옛적)에 청량(*淸凉)이 각철취(覺䥫觜)에게 묻되 至이 말씀이 없었다. 청량이 이르되 이금(而今)에 천하에서 다 전하기를 중이 조주에게 묻되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입니까. 조주가 이르되 정전백수자다. 어찌하여 없었다고 말합니까. 각(覺)이 이르되 선사(先師)를 비방하지 말아야 좋으리니 선사는 이런 말씀이 없었다. 청량이 홀연히 그 뜻을 깨쳤다. 대중이여 차여(且如) 조주의 백수자화를 보기는 곧 한가지로 보고 듣기로는 곧 한가지로 듣거늘 무엇 때문에 각철취가 도리어 이르되 선사는 실로 이 말씀이 없었다 했는가. 이 법이 문자를 여의어(*法離文字) 언전(言詮)에 있지 않음이 아닐까. 이 선악을 생각하지 않아서 심체가 절로 나타남이 아닐까. 이 납의하사(*衲衣下事)는 노고롭게 추차(*錐劄)하지 않음이 아닐까. 이 향상일로(向上一路)는 천성(千聖)일지라도 전하지 못함이 아닐까. 만약 이와 같이 안다면 조주를 저버림을 면하지 못한다. 이미 이와 같지 않다면 합당히 어떠한가. 이러해도 얻지 못하고 이러하지 않아도 얻지 못하고 이러하거나 이러하지 않거나 모두 얻지 못한다. 양구하고 이르되 아느냐, 머리로 황초(荒草)를 뚫은 것은 무착(*無着)인 줄 알거니와 괘각(掛角)한 영양(羚羊)은 이 조주니라.
경산고(徑山杲)가 시중하여 들되 법안이 각철취에게 묻되 至선사(先師)를 비방하지 말아야 좋으리라. 스님이 이르되 만약 차어(此語)가 있었다고 말하면 각철취를 차과(差過; 놓침)함이며 만약 차어가 없었다고 말하면 또 법안을 차과(差過)하며 만약 양변(兩邊)에 모두 건너지 않는다고 말하면 또 조주를 차과하며 직요(直饒) 모두 이러하지 않고 딸리 일로(一路)를 투탈(透脫)함이 있다면 지옥에 들어가기가 화살을 쏨과 같다. 필경 어떠한가, 불자를 들어 일으키고 이르되 도리어 고인을 보느냐. 할(喝)로 한 번 할했다.
또 시중하여 차화를 들고 이르되 정전백수자를 금일 거듭 새로 들어 조주관(趙州關)을 타파하고 특지(特地; 특별히) 언어를 찾겠다. 이미 이, 관(關)을 타파했거늘 무엇 때문에 도리어 언어를 찾는가. 당초에 다만(將) 이르기를 모(茅; 띠)가 길고 짧다 했더니 태우고 나니 원래 땅이 평탄하지 않았더라.
또 보설(普說)에 이르되 오조사옹(*五祖師翁)이 말씀이 있었다.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인가,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다, 이렇게 알면 곧 옳지(是) 못한 것이다.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인가, 정전백수자다, 이렇게 알아야 비로소(方始) 옳다. 너희 제인이 도리어 아느냐, 이런 종류의 설화는 너희 제인이 이회(理會)함을 얻지 못한다고 말하지 말지니 묘희도 스스로 이회함을 얻지 못한다. 나의 이 문중(門中)엔 이회함을 얻음도 없고 이회함을 얻지 못함도 없다. 모기가 철우에 올라 네가 주둥이를 내릴 곳이 없다 운운(云云).
홍각범(洪覺範)이 가로되 옛적에 어떤 중이 조주에게 묻되 무엇이 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입니까. 답해 가로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다. 또 따라서(隨) 경계하여(誡) 가로되 너희가 만약 나의 이러한 말을 수긍한다면 내가 곧 너희를 고부(辜負; 저버리다)하며 너희가 만약 나의 이러한 말을 수긍하지 않는다면 내가 곧 너희를 고부(辜負)하지 않는다. 매자(昧者)가 이를 끊어(勦) 고인의 뜻을 불완(不完)하게 했으니 해(害)가 됨이 심하다.
승보전(*僧寶傳)에 이르되 설두현(雪竇顯)이 일찍이 대양(*大陽)에서 전객(*典客)이었다. 객과 더불어 조주의 종지를 논했는데 객이 가로되 법안선사가 옛적에 금릉(金陵)에서 각철취(覺䥫觜)란 자와 해후(邂逅)했는데 각(覺)은 조주의 시자였고 호칭이 명안(明眼)이었다. 물어 가로되 조주의 백수자인연(栢樹子因緣)을 기득(記得)합니까. 각이 가로되 선사(先師)는 이런 말씀이 없었으니 선사를 비방하지 말아야 좋으리라. 법안이 손뼉을 치면서 가로되 진실로 사자굴 속으로부터 오셨다. 각공(覺公)이 말하되 이런 말씀이 없었다 한 것을 법안이 이를 수긍했거니와 그 지취가 어디에 있습니까. 현(顯; 重顯)이 가로되 종문의 억양(抑揚)에 어찌 규철(䂓轍; 規轍과 같음. 法規와 軌轍이니 일정한 법식)이 있겠습니까. 때에 고행(*苦行)이 있었는데 그 곁에 시립(侍立)했다가 곧 웃음을 숨기며 떠났다. 객이 물러가자 현이 그를 책망(*數之)해 가로되 내가 객을 상대(偶)해 얘기하는데 네가 이에 감히 오만하게 웃느냐. 무슨 일을 웃었느냐. 대답해 가로되 객의 지안(智眼)이 바르지 못하고 법을 간택함이 밝지 못함을 알고 웃었습니다. 현이 가로되 어찌 설(說)이 있는가. 게로써 대답해 가로되 한 토끼가 몸을 가로하여 고로(古路)에 당(當)하니/ 창응(蒼鷹)이 한 번 보자 곧 사로잡았다/ 후래에 사냥개가 영성(靈性)이 없어/ 공연히 마른 말뚝의 구처(舊處)를 향해 찾더라. 현이 이상하게 여겼고 결약(結約)해 벗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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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염송집주 5책 1질로 발간되었습니다
불교신문 광고 2022년 3월 발행. 150부. 5책 1질. 총 4,842쪽, 12.5pt. 4․6배판. 하드. 양장. 정가 60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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