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六七】*袁州*仰山*惠寂*通智禪師 因見雪師子 乃指云 還有過得此色者麽 衆無對 雲門云 當時便與推倒〈雪竇顯云 雲門只解推倒 不能扶起〉
海印信頌 騃童積雪爲師子 觀者無不生欣喜 雖然踞地勢威獰 不解搖頭兼擺尾 仰山曾指示禪人 雲門推倒誰扶起 雪師子雪師子 似卽似是卽未是
天童覺頌 *一倒一起 雪庭師子 愼於犯而懷仁 勇於爲而見義 淸光照眼似迷家 明白轉身還墮位 衲僧家了無寄 同死同生何此何彼 暖信破梅兮春到寒枝 涼颷脫葉兮秋澄潦水
長蘆賾頌 兒戱功夫豈足誇 春風未動且䶥齖 仰山一色曾推倒 除是雲門老作家
知非子頌 雪作師子兒 推倒沒人窺 春來日又暖 更不存毫絲
開先暹代僧云 和尙未問時好
大洪恩拈 推倒扶起 盖是常儀 捏聚放開 罕逄明鑑 還知古人爲人處麽 也須是箇滴水滴凍底衲僧始得
瑯瑘覺上堂擧此話 至不能扶起 師云 卽今問汝諸人 推倒扶起 相去多少 拄杖子拶過眉毛鼻孔裏 呵呵大笑 便擲下拄杖
法眞一拈 推倒扶起則不無 作麽生是仰山當時爲人處
天童覺小叅擧此話 至不能扶起 師云 此話叢林有底 多作機鋒相見商量 還當也未 若不恁麽 又合如何 覺上座 今夜不惜兩莖眉 傍出一隻手 要與古人相見 仰山與麽說話 大似一機之絹 雲門善解裁長 雪竇偏能補短 三尊宿各有長處 衲僧家 畢竟取何人作則 但願春風多着力 一時吹入我門來 若也恁麽會去 乃有殺活手 具通方眼 不唯報化門頭八面受敵 亦乃毗盧頂上十字縱橫 其或未然 不免重說偈言去也 衲僧巴鼻 圓明絶類 直須推倒 却要扶起 玉馬飮乾明月泉 泥牛耕破琉璃地 *披毛戴角異中來 天上人閒能幾幾
●第五六七則; 聯燈會要八仰山慧寂 師指雪師子 謂衆云 還有過得此色者麼 衆無對 雲門云 便好與推倒 雪竇云 雲門只解推倒 不解扶起
●袁州; 今江西省北西部宜春縣的古稱 袁州北七十里 有楊岐方會的道場楊岐山普通禪院 南六十里有仰山慧寂所創的太平興國寺
●仰山; (一)位於江西宜春縣之南 山勢絶高 須仰視方得見 故稱仰山 又稱大仰山 唐僖宗時 潙山靈祐之弟子慧寂 曾於此地 開創禪院 發揚潙山靈祐之宗風 此卽禪宗之潙仰宗 仰山亦因此而聞名 慧寂滅後 經智齊擇和等 至慧南之弟子行偉時 大振法道 興盛一時 山中共有三塔 卽西塔南塔東塔 此外山下有棲隱寺 宋代更名爲太平興國禪寺 (二)指唐代僧仰山慧寂
●惠寂; (807-883) 又作慧寂 唐代僧 爲潙仰宗開山祖師之一 韶州(廣東韶關)葉氏 初生頗有異蹟 爲童穉 依番禺安和寺不語通出家 年十四 父母欲奪其志 遂斷二指以爲誓 因從剃落 通累加接引 而師無所啓發 年十八 通卒 因往謁乳源 洎筠州處微 吉州性空 鵶山躭源 皆不契 至大和三年(829) 參大潙靈祐 擧性空如人在井之緣 因而有省 山指令請戒於襄陽之大悲 師曰 慧寂平生不妄語 山云 你但依沙門法 師從之 時年三十三矣 復還潙山作直歲 尋領衆居郴州之王莽山 旣而移錫居袁州仰山 衆盈數百 一日 有梵僧負貝葉造師 師問 近離甚處 曰 早別西天 師曰 太遲生 曰 游山翫水 師曰 神通不無你 佛法未夢見 曰 來此禮文殊 却遇小釋迦 語訖隱去 大中十三年(859) 韋宙中丞 爲師創洪州觀音院居之 咸通(860-873)中 歸韶州之東平山 至中和三年二月十三日 集衆說偈 以兩手抱屈膝 儼然而終 歸葬於仰山 師行道於世 蒙寵賜者三 懿宗賜號知宗 僖宗賜澄虛 昭宗諡智通 [祖庭事苑七 宋高僧傳十二]
●通智; 仰山慧寂諡號 諸禪錄又作智通 祖庭事苑七仰山條云 蒙寵賜者三 懿宗賜號知宗 僖宗賜澄虛 昭宗諡智通
●一倒一起雪庭師子下; 從容錄二第二十六則云 雲門一倒 雪竇一起 仰山指師子 要過此色 三箇鼎足闕一不可 三玄三要盡在於茲 仰山恐人坐在明白裏 豈非愼犯懷仁也 指似於人令過此色 豈非勇爲見義也 魯語曰 見義不爲無勇也 雲門又恐坐在一色邊也 豈非愼犯懷仁 便與推倒 亦勇爲見義也 雪竇恐人只解推倒 乃愼犯懷仁也 更能扶起 勇爲見義也 不見趙州道 老僧不在明白裏 良以淸光照眼猶自迷家 明白轉身未免墮位 只解推倒不解扶起 而堪作什麼 本色衲僧如珠走盤 雖同死同生而不居生死 雖無彼無此 而權立彼此 末後兩句 有時太陽門下 有時明月堂前 萬古長空 一朝風月 朝菌蟪蛄 且道 而今是什麼時節 且隨老木同寒瘠 將逐春風入燒瘢
●披毛戴角; 見上第一一九則戴角披毛
【五六七】 원주(*袁州) 앙산(*仰山) 혜적(*惠寂) 지통선사(*通智禪師)가 설사자(雪師子)를 봄으로 인해 이에 가리키며 이르되 도리어 이 색을 초과함을 얻을 것이 있느냐. 대중이 대답이 없었다. 운문이 이르되 당시에 곧 퇴도(推倒)하여 주었겠다. 〈설두현이 이르되 운문은 다만 퇴도(推倒)할 줄만 알고 능히 부기(扶起)하지 못한다〉.
해인신(海印信)이 송하되 어리석은 동자가 눈을 쌓아 사자를 만드니/ 보는 자가 흔희(欣喜)를 내지 않음이 없다/ 비록 그렇게 땅에 웅크린 자세가 위녕(威獰)하지만/ 머리 흔들고 겸하여 꼬리 칠 줄 알지 못한다/ 앙산이 일찍이 선인(禪人)에게 지시했는데/ 운문이 퇴도(推倒)한 것을 누가 부기(扶起)하느냐/ 설사자여 설사자여/ 비슷하기는 곧 비슷하지만 옳기는 곧 옳지 않다.
천동각(天童覺)이 송하되 한 번 넘어뜨리고 한 번 일으킨/ 설정의 사자다(*一倒一起雪庭師子)/ 범(犯)함엔 삼가면서 인(仁)을 품고/ 작위(作爲)엔 용감하면서 의(義)를 본다/ 청광(淸光)이 눈을 비추매(照眼) 미가(迷家)와 같고/ 명백히 전신(轉身)하매 도리어 위(位)에 떨어진다/ 납승가(衲僧家)는 마침내 의지함이 없나니/ 동사동생(同死同生)하되 어찌 이것이며 어찌 그것이겠는가/ 난신(暖信; 따뜻한 소식)이 매화를 깨뜨리니 봄이 한지(寒枝)에 이르렀고/ 양표(涼颷; 서늘한 바람)가 잎을 탈락시키니 가을이 요수(潦水; 땅에 괸 빗물)를 맑힌다.
장로색(長蘆賾)이 송하되 아희(兒戱)의 공부(功夫)를 어찌 족히 과시하겠는가/ 춘풍이 동(動)하지 않았는데 또(且) 저아(䶥齖; 이가 바르지 못함)로다/ 앙산의 일색(一色)을 일찍이 퇴도(推倒)한 것은/ 오직(除) 이 운문이 노작가(老作家)다.
지비자(知非子)가 송하되 눈으로 사자아(師子兒)를 만들어/ 퇴도(推倒)하매 엿보는 사람이 없다/ 봄이 와서 해가 또 따뜻한데/ 다시 실터럭만큼도 존재하지 않는다.
개선섬(開先暹)이 대승(代僧)하여 이르되 화상이 묻지 않았을 때가 좋습니다.
대홍은(大洪恩)이 염하되 퇴도(推倒)와 부기(扶起)는 대개 이 상의(常儀)다. 날취(捏聚; 집어 모으다)하고 방개(放開)하매 명감(明鑑)을 만남이 드물다. 도리어 고인이 사람을 위한 곳을 아느냐. 또한 꼭 이것은 적수적동(滴水滴凍)하는 납승이라야 비로소 옳다.
낭야각(瑯瑘覺)이 상당하여 차화를 들어 至능히 부기(扶起)하지 못한다. 스님이 이르되 즉금 너희 제인에게 묻나니 퇴도(推倒)와 부기(扶起)는 서로 떨어짐이 얼마인가. 주장자가 눈썹과 콧구멍 속을 찰과(拶過; 핍박하다. 다그치다)한다. 하하 대소하고 곧 주장자를 던져 떨어뜨렸다.
법진일(法眞一)이 염하되 퇴도(推倒)와 부기(扶起)는 곧 없지 않으나 무엇이 이 앙산이 당시에 사람을 위한 곳인가.
천동각(天童覺)이 소참에 차화를 들어 至능히 부기(扶起)하지 못한다. 스님이 이르되 차화를 총림에서 어떤 이는 다분히 기봉상견(機鋒相見)이라 하여 상량하거니와 도리어 마땅한가 또는 아닌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또 합당히 어찌해야 하는가. 각상좌(覺上座)가 금야(今夜)에 두 가닥 눈썹을 아끼지 않고 곁에서 일척수(一隻手)를 내어 고인과 상견하려고 한다. 앙산이 이렇게 설화함은 한 베틀의 비단과 매우 흡사하고 운문은 잘 재장(裁長; 긴 것을 자르다)할 줄 알았고 설두는 오로지(偏) 능히 보단(補短)하였으니 3존숙이 각기 장처(長處)가 있다. 납승가(衲僧家)가 필경 어떤 사람을 취해 법칙을 삼아야 하나. 단지 원컨대 춘풍이 많이 착력(着力)하여 일시에 나의 문에 취입(吹入)해 오소서. 만약에 이렇게 이회(理會)하면 이에 살활수(殺活手)가 있고 통방안(通方眼)을 갖추어 보화문두(報化門頭)에서 팔면으로 수적(受敵)할 뿐만 아니라 또한 곧 비로정상(毗盧頂上)에서 십자(十字)로 종횡하리라. 그 혹 그렇지 못할진대 거듭 게언(偈言)을 설함을 면치 못한다. 납승의 파비(巴鼻)가/ 원명(圓明)하여 비류(比類)가 끊겼다/ 바로 퇴도(推倒)를 썼다가/ 도리어 부기(扶起)를 요한다/ 옥마(玉馬)는 명월천(明月泉)을 마셔 말렸고(飮乾)/ 이우(泥牛)는 유리지(琉璃地)를 갈아 깨뜨렸다(耕破)/ 피모대각(*披毛戴角)하여 이중(異中)에서 오나니/ 천상과 인간에 능히 몇몇이더냐.
●第五六七則; 연등회요8 앙산혜적(仰山慧寂). 스님이 설사자를 가리키며 대중에게 일러 이르되 도리어 이 색을 초과함을 얻을 것이 있느냐. 대중이 대답이 없었다. 운문이 이르되 곧 좋게 퇴도(推倒)하여 주겠다. 설두가 이르되 운문은 다만 퇴도(推倒)만 알고 부기(扶起)를 알지 못한다.
●袁州; 지금의 강서성 북서부 의춘현의 옛 명칭. 원주 북쪽 70리에 양기방회의 도량 양기산 보통선원이 있고 남쪽 60리에 앙산혜적이 창건한 바의 태평흥국사가 있음.
●仰山; (1) 강서 의춘현(宜春縣)의 남쪽에 위치함. 산세가 몹시 높아 반드시 우러러 보아야 비로소 얻어 보는지라 고로 명칭이 앙산(仰山)임. 또 명칭이 대앙산(大仰山)임. 당(唐) 희종(僖宗) 때 위산영우(潙山靈祐)의 제자 혜적(慧寂)이 일찍이 이 땅에 선원(禪院)을 개창(開創)하여 위산영우의 종풍을 발양(發揚)하였으니 이것이 곧 선종의 위앙종(潙仰宗)임. 앙산도 또한 이로 인해 이름이 알려졌음. 혜적이 입멸한 후 지제(智齊)ㆍ택화(擇和) 등을 경유해 혜남(慧南)의 제자 행위(行偉)에 이르렀을 때 법도(法道)를 크게 떨쳤으며 일시(一時)에 흥성했음. 산중에 모두 세 탑이 있는데 곧 서탑(西塔)ㆍ남탑(南塔)ㆍ동탑(東塔)임. 이 밖에 산 아래 서은사(棲隱寺)가 있는데 송대(宋代)에 이름을 바꿔 태평흥국선사(太平興國禪寺)라 했음. (2) 당대승 앙산혜적을 가리킴.
●惠寂; (807-883) 또 혜적(慧寂)으로 지음. 당대승. 위앙종(潙仰宗)의 개산조사(開山祖師)의 하나가 됨. 소주(韶州; 광동 소관) 섭씨(葉氏)며 처음 출생하자 자못 이적(異蹟)이 있었음. 어린이(童穉)가 되자 번옹(番禺) 안화사(安和寺)의 불어통(不語通)에 의지(依止)해 출가하였음. 나이 14에 부모가 그 뜻을 뺏으려 하자 드디어 두 손가락을 잘라 맹서(盟誓)를 삼았으며 인하여 체락(剃落)을 좇았음. 통(通)이 누차(屢次) 접인(接引)을 가했으나 스님은 계발(啓發)한 바가 없었음. 나이 18에 통이 죽자 인해 유원(乳源)에게 가서 참알(參謁)했으며 균주(筠州)의 처미(處微)ㆍ길주(吉州)의 성공(性空)ㆍ아산(鵶山)의 탐원(躭源)에 이르렀으나 다 계합(契合)치 못했음. 대화(大和) 3년(829)에 이르러 대위영우(大潙靈祐)를 참알해 성공(性空)의, 마치 어떤 사람이 우물에 있음과 같다는 인연을 들어 인해 살핌이 있었음. 위산(潙山)이 양양(襄陽)의 대비원(大悲院)에 청계(請戒; 곧 수계)를 지령(指令)하자 스님이 가로되 혜적(慧寂)은 평생에 망어(妄語)를 하지 않았습니다. 위산이 이르되 너는 단지 사문법(沙門法)에 의지(依止)하라. 스님이 이를 좇았는데 때의 나이는 33이었음. 다시 위산으로 돌아와 직세(直歲)가 되었으며 이윽고 대중을 거느리고 침주(郴州)의 왕망산(王莽山)에 거주하였음. 그러고는 이석(移錫)하여 원주(袁州)의 앙산(仰山)에 거주했는데 대중이 수백(數百)을 채웠음. 어느 날 어떤 범승(梵僧)이 패엽(貝葉; 佛經을 가리킴)을 지고 스님에게 나아가자 스님이 묻되 최근에 어느 곳을 떠났느냐. 가로되 아침에 서천(西天)을 떠났습니다. 스님이 가로되 너무 느리다. 가로되 유산완수(游山翫水)했습니다. 스님이 가로되 신통은 너에게 없지 않으나 불법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 가로되 여기에 와서 문수(文殊)에게 예배하려 했더니 도리어 소석가(小釋迦)를 만났습니다. 말을 마치자 은몰(隱沒)했음. 대중 13년(859) 위주중승(韋宙中丞)이 스님을 위해 홍주(洪州)에 관음원(觀音院)을 창건하고 거쳐하게 했음. 함통(咸通;. 860-873) 중에 소주(韶州)의 동평산(東平山)으로 돌아갔다가 중화(中和) 3년 2월 13일에 이르자 대중을 모아 게(偈)를 설하고 두 손으로 무릎을 안아 구부러지게 하고는 엄연(儼然; 의젓이)히 마쳤음. 앙산으로 귀장(歸葬)했음. 스님이 세상에 도를 행해 총사(寵賜)를 입은 게 세 번이니 의종(懿宗)이 호(號)를 주어 지종(知宗)이라 했고 희종(僖宗)이 징허(澄虛)를 주었고 소종(昭宗)이 지통(智通)이라 시호(諡號)했음 [조정사원7. 송고승전12].
●通智; 앙산혜적의 시호니 여러 선록에 또 지통(智通)으로 지었음. 조정사원7 앙산조에 이르되 총사(寵賜)를 입은 것이 세 번이다. 의종(懿宗)은 지종(知宗)이란 호를 주었고 희종(僖宗)은 징허(澄虛)를 주었고 소종(昭宗)은 시호하여 지통(智通)이라 했다.
●一倒一起雪庭師子下; 종용록2 제26칙에 이르되 운문은 한 번 퇴도(推倒)했고 설두는 한 번 부기(扶起)했고 앙산은 사자를 가리키며 이 색을 초과함을 요했다. 세 개의 정족(鼎足)에 하나라도 궐(闕)하면 불가하다. 3현3요(三玄三要)가 모두 여기에 있다. 앙산이 사람들이 명백 속에 앉아 있을까 염려했으니 어찌 범(犯)함을 삼가고 인(仁)을 품음(愼犯懷仁)이 아니겠는가. 사람에게 가리켜 주면서 이 색을 초과하게 했으니 어찌 위함엔 용감하면서 의(義)를 봄(勇爲見義)이 아니겠는가. 노어(魯語)에 가로되 의를 보고도 위하지 않으면 무용(見義不爲無勇)이라 했다. 운문은 또 일색변(一色邊)에 앉아 있을까 염려했으니 어찌 범(犯)함을 삼가고 인(仁)을 품음(愼犯懷仁)이 아니겠는가. 곧 퇴도(推倒)해 주었으니 또한 위함엔 용감하면서 의(義)를 봄(勇爲見義)이다. 설두는 사람들이 다만 퇴도(推倒)만 알까 염려했으니 곧 범(犯)함을 삼가고 인(仁)을 품음(愼犯懷仁)이며 다시 능히 부기(扶起)했으니 위함엔 용감하면서 의(義)를 봄(勇爲見義)이다. 보지 못하는가, 조주가 말하되 노승은 명백 속에 있지 않다 했으니 참으로 청광(淸光)으로써 눈을 비추면 오히려 스스로 미가(迷家)하고 명백히 전신(轉身)하면 위(位)에 떨어짐을 면하지 못한다. 다만 퇴도만 알고 부기를 알지 못한다면 차마 무엇하겠는가. 본색납승(本色衲僧)은 마치 구슬이 소반에 달림과 같아서 비록 동사동생(同死同生)하지만 생사에 거처하지 않고 비록 무피무차(無彼無此)하지만 권(權; 방편)으로 피차(彼此)를 세운다. 말후의 양구(兩句)는 어떤 때는 태양문하(太陽門下)며 어떤 때는 명월당전(明月堂前)이며 만고(萬古)의 장공(長空)이며 일조(一朝)의 풍월이며 조균(朝菌)이며 혜고(蟪蛄; 여치)다. 그래 말하라 이금(而今)은 이 어떤 시절인가. 다만(且) 노목(老木) 따라 한척(寒瘠)을 함께하고 이에(將) 춘풍을 쫓으며 소반(燒瘢; 태운 자국)에 들어간다.
●피모대각(披毛戴角); 위 제119칙 대각피모(戴角披毛)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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