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一○五】福州*長慶*慧稜禪師有時云 寧說阿羅漢有三毒 不說如來有二種語 不道如來無語 只是無二種語 保福云 作麽生是如來語 師云 聾人爭得聞 福云 *情知汝向第二門頭道 師云 作麽生是如來語 福云 喫茶去
雪竇顯頌 *頭兮第一第二 臥龍不鑑*止水 無處有月波澄 有處無風浪起 稜禪客稜禪客 三月禹門遭點額
蔣山泉頌 如來語 爲君擧 直饒聾人得聞 未免和沙合土 喫茶保福亦憨癡 似向*雷門撾布鼓
白雲昺頌 第一頭第二頭 淸風明月兩悠悠 將軍戰馬今何在 野草閑花滿地愁
雲門偃拈 保福何用繁詞 僧便問 作生是如來語 云 齋後未喫茶
智海逸上堂擧此話 連擧雲門拈 師云 諸禪德 保福長慶 吉人之詞寡 拙人之詞游 若子細點檢來 保福長慶干戈相待 雲門老人風行草偃 智海今日共樂昇平 作麽生是如來語 雨下街頭濕
黃龍心擧此話 問僧 只如長慶道 聾人爭得聞 如何却落第二頭 僧曰 聾人爭得聞 師曰 無繩自縛漢 我更問你 如來唯一說 作麽生見得一底道理 僧瞪目而視 師曰 比來問一 爾却答二
天童覺上堂擧此話 連擧雪竇道 無處有月波澄 有處無風浪起 師云 若有人問天童 作麽生是如來語 向他道 *阿羅跛
曩 諸禪德 且道 與古人語 是同是別 諸人若也未會 更爲劈扸去也 長慶能守 保福能做 雪竇手段縱橫 天童舌頭狤獠 若也分曉會去 與你把手共行 其或未然 各自勉力
又上堂擧此話云 第一第二頭 似有似無句 坐斷路歧 密密綿綿而不通水泄 打破窠臼 *坦坦蕩蕩而別是風規 還會麽 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
●第一一○五則; 此話出傳燈錄十九 ▲碧巖錄第九十五則 長慶保福在雪峯會下 常互相擧覺商量 一日平常如此說話云 寧說阿羅漢有三毒 不說如來有二種語 梵語阿羅漢 此云殺賊 以功能彰名 能斷九九八十一品煩惱 諸漏已盡 梵行已立 此是無學阿羅漢位 三毒卽是貪嗔癡 根本煩惱 八十一品尙自斷盡 何況三毒 長慶道 寧說阿羅漢有三毒 不說如來有二種語 大意要顯如來無不實語 法華經云 唯此一事實 餘二則非眞 又云 唯有一乘法 無二亦無三 世尊三百餘會 觀機逗教 應病與藥 萬種千般說法 畢竟無二種語 他意到這裏 諸人作麼生見得 佛以一音演說法則不無 長慶要且未夢見如來語在 何故 大似人說食終不能飽 保福見他平地上說教 遂問 作麼生是如來語 慶云 聾人爭得聞 這漢知他幾時 在鬼窟裏作活計來也 保福云 情知爾向第二頭道 果中其言 却問 師兄作麼生是如來語 福云 喫茶去 鎗頭倒被別人奪却了也 大小長慶 失錢遭罪 且問諸人 如來語還有幾箇 須知恁麼見得 方見這兩箇漢敗缺 子細檢點將來 盡合喫棒 放一線道與他理會 有底云 保福道得是 長慶道得不是 只管隨語生解 便道有得有失 殊不知 古人如擊石火 似閃電光 如今人不去他古人轉處看 只管去句下走 便道長慶當時不便用 所以落第二頭 保福云喫茶去 便是第一頭 若只恁麼看 到彌勒下生 也不見古人意 若是作家 終不作這般見解 跳出這窠窟 向上自有一條路 爾若道聾人爭得聞 有什麼不是處 保福云喫茶去 有什麼是處 轉沒交涉 是故道 他參活句 不參死句 這因緣與遍身是通身是因緣一般 無爾計較是非處 須是爾脚跟下 淨裸裸地 方見古人相見處
●長慶; 長慶院 位於福建閩侯縣之怡山 唐咸通(860-873)初年 大安禪師(793- 883)創置 初名怡山禪院 唐末五代間 慧稜禪師(854-932)任住持時 更名爲長慶院 於近代雖號稱榕垣五大叢林之一 實已破敗不堪 斷垣廢礎 擧目皆是 淸衆數百 皆崇尙瑜伽唄唱 無復禪者氣象 [大明一統志七十四 福建通志二六四]
●慧稜; (854-932) 五代後唐僧 號超覺 杭州(浙江)鹽官人(宋高僧傳作海鹽人) 俗姓孫 人稱孫公 十三歲於蘇州通玄寺出家受具足戒 歷參靈雲志勤 雪峰義存 玄沙師備等師 曾依止雪峰義存三十年 後爲其法嗣 唐代天祐三年(906) 住於泉州(福建)招慶院 後住福州(福建)長慶院 於後唐長興三年示寂 壽七十九 僧臘六十 [宋高僧傳十三 傳燈錄十八 佛祖歷代通載十七]
●情; 眞實 誠實
●頭兮第一第二下; 碧巖錄第九十五則云 頭兮第一第二 人只管理會第一第二 正是死水裏作活計 這箇機巧 爾只作第一第二會 且摸索不著在 雪竇云 臥龍不鑒止水 死水裏豈有龍藏 若是第一第二 正是止水裏作活計 須是洪波浩渺白浪滔天處 方有龍藏 正似前頭云澄潭不許蒼龍蟠 不見道 死水不藏龍 又道 臥龍長怖碧潭淸 所以道 無龍處有月波澄 風恬浪靜 有龍處無風起浪 大似保福道喫茶去 正是無風起浪 雪竇到這裏 一時與爾打疊情解頌了也 他有餘韻 教成文理 依前就裏頭 著一隻眼 也不妨奇特 却道 稜禪客稜禪客 三月禹門遭點額 長慶雖是透龍門底龍 却被保福驀頭一點
●止水; 死水 滯止不流的水 祖庭事苑二 止水 莊子(德充符) 仲尼曰 人莫鑑於流水而鑑於止水 唯止能止衆止
●雷門撾布鼓; 見上第四一四則布鼓
●阿羅跛
曩; 宏智錄四作阿囉跛
曩 金剛頂超勝三界經說文殊五字眞言勝相(一卷 唐 不空譯)曰 阿囉跛左曩 阿者 是無生義 囉者 淸淨無染離塵垢義 跛者 亦無第一義諦諸法平等義 左者 諸法無有諸行義 曩者 諸法無有性相 言說文字皆不可得義
●坦坦蕩蕩; 寬且平 喩人心地正直 心胸開闊
【一一○五】 복주(福州) 장경(*長慶) 혜릉선사(*慧稜禪師)가 어떤 때 이르되 차라리 아라한이 3독이 있다고 설할지언정 여래에게 2종어(二種語)가 있다가 설하지 않겠다. 여래가 말씀이 없다고 말함이 아니라 다만 이는 2종어가 없음이다. 보복(保福)이 이르되 무엇이 이 여래어인가. 스님이 이르되 귀머거리가 어찌 득문(得聞)하겠는가. 보복이 이르되 진실로(*情) 너는 제2문두(第二門頭)를 향해 말한 줄 알겠다. 스님이 이르되 무엇이 이 여래어인가. 보복이 이르되 차 마시러 가게(喫茶去).
설두현(雪竇顯)이 송하되 두(頭)는 제일제이(*頭兮第一第二)니/ 와룡은 지수(*止水)에 비치지(鑑) 않는다/ 무처(無處; 용이 없는 곳)엔 달이 있고 파도가 맑지만/ 유처(有處)엔 바람 없이 물결이 일어난다/ 능선객(稜禪客; 慧稜), 능선객이여/ 3월의 우문(禹門)에서 점액(點額)을 만났다.
장산천(蔣山泉)이 송하되 여래어를/ 그대를 위해 드나니/ 직요(直饒; 가령. 卽使) 농인(聾人; 귀머거리)이 득문(得聞)하더라도/ 모래에 섞고 흙에 합함을 면치 못한다/ 끽다한 보복(保福)도 또한 어리석나니(憨癡)/ 마치 뇌문(雷門)을 향해 포고(布鼓)를 두드림과 같다(似向*雷門撾布鼓).
백운병(白雲昺)이 송하되 제1두(第一頭) 제2두(第二頭)여/ 청풍과 명월이 둘 다 유유(悠悠)하다/ 장군과 전마(戰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야초(野草)와 한화(閑花)가 땅 가득히 근심스럽네.
운문언(雲門偃)이 염하되 보복은 왜 번사(繁詞)를 쓰는가. 중이 곧 묻되 무엇이(作生) 이 여래어입니까. 이르되 재후(齋後)에 차를 먹지 않았다.
지해일(智海逸)이 상당하여 차화를 들고 이어서 운문의 염을 들고는 스님이 이르되 제선덕(諸禪德)이여, 보복과 장경은 길인(吉人)의 언사(言詞)는 적고 졸인(拙人)의 언사는 뜬다(游). 만약 자세히 점검하면 보복과 장경은 간과(干戈)가 상대(相待)했고 운문 노인은 풍행초언(風行草偃)이다. 지해(智海)가 금일 승평(昇平)을 함께 즐기겠다. 무엇이 이 여래어인가, 비가 내리니 가두(街頭)가 습(濕)하다.
황룡심(黃龍心)이 차화를 들고 중에게 묻되 지여(只如) 장경이 말하되 귀머거리가 어찌 득문(得聞)하겠는가 했거늘 어찌하여 제2두에 떨어졌는가. 중이 가로되 귀머거리가 어찌 득문(得聞)하겠습니까. 스님이 가로되 끈 없이 스스로 묶인는 자(無繩自縛漢)로구나. 내가 다시 너에게 묻는다. 여래는 오직 일설(一說)이거니와 어떻게 일(一)의 도리를 견득(見得)하겠는가. 중이 눈 똑바로 뜨고 보았다. 스님이 가로되 비래(比來; 요사이) 하나를 물었는데 너는 도리어 둘을 답하는구나.
천동각(天童覺)이 상당하여 차화를 들고 이어서 들되 설두가 말하되 무처(無處; 용이 없는 곳)엔 달이 있고 파도가 맑지만 유처(有處)엔 바람 없이 물결이 일어난다. 스님이 이르되 만약 어떤 사람이 천동에게 묻되 무엇이 이 여래어인가. 그를 향해 말하되 아라파좌낭(*阿羅跛
曩). 제선덕(諸禪德)이여 그래 말하라, 고인의 말과 이 같은가 이 다른가. 제인이 만약에 알지 못한다면 다시 벽석(劈扸; 劈析)하여 가겠다. 장경은 능수(能守)했고 보복은 능주(能做)했고 설두는 수단이 종횡이고 천동은 설두가 길료(舌頭狤獠)다. 만약에 분효(分曉; 분명)하게 이회한다면 너희와 더불어 손잡고 공행()하려니와 그 혹 그렇지 못할진대 각자 면력(勉力; 努力)하라.
또 상당하여 차화를 들고 이르되 제일제이두(第一第二頭)는 사유사무구(似有似無句)다. 노기(路歧; 岐路)를 좌단(坐斷)하니 밀밀면면(密密綿綿)하여 불통수설(不通水泄; 물이 샐 틈이 없음)이며 과구(窠臼)를 타파하니 탄탄탕탕(*坦坦蕩蕩)하여 별다른 이 풍규(風規)다. 도리어 아느냐, 서로 아는 이는 천하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이는 능히 몇 사람인가.
●第一一○五則; 차화는 전등록19에 나옴. ▲벽암록 제95칙. 장경(長慶)과 보복(保福)이 설봉의 회하(會下)에 있으면서 늘 호상 거각(擧覺)하고 상량(商量)했다. 어느 날 평상(平常)처럼 이와 같이 설화해 이르되 차라리 아라한이 3독(毒)이 있다고 설할지언정 여래가 이종어(二種語)가 있다고 설하지 못한다 하였다. 범어 아라한은 여기에선 이르되 살적(殺賊)이니 공능(功能)으로써 이름이 나타난다(彰). 능히 구구 팔십일품의 번뇌(八十一品煩惱)를 끊어 제루(諸漏)가 이미 다했고 범행(梵行)이 이미 섰으므로 이것은 이 무학의 아라한위(無學阿羅漢位)다. 3독은 곧 이 탐진치(貪嗔癡)인 근본번뇌(根本煩惱)니 81품도 오히려 스스로 끊어 없앴거늘 어찌 하물며 3독이겠는가. 장경이 말하되 차라리 아라한이 3독이 있다고 설할지언정 여래가 이종어(二種語)가 있다고 설하지 못한다고 한 대의(大意)는 여래가 실어(實語)가 아님이 없음을 나타내고자 함이니 법화경에 이르되 오직 이 일사(一事)만 실(實)이며 나머지 둘은 곧 진(眞)이 아니다 했고 또 이르되 오직 일승법(一乘法)만 있고 둘도 없고 또한 셋도 없다 하였다(이상은 방편품의 글). 세존이 3백 여 회(會) 근기(根機)를 보아 두교(逗敎)하여 병에 응해 약을 주심이 만종천반(萬種千般)의 설법이로되 필경 이종어(二種語)가 없다. 그(불타)의 뜻이 이 속에 이르나니 제인은 어떻게 견득(見得)하는가. 불타가 일음(一音; 一音聲)으로써 법을 연설하심(佛以一音演說法)은 곧 없지 않으나 장경이 요차(要且; 그러나, 도리어) 꿈에도 여래어(如來語)를 보지 못하여 있나니 무슨 연고냐, 사람이 밥을 설하여도 마침내 능히 배부르지 못함과 매우 비슷하여서이다. 보복이 그(장경)의 평지상(平地上)의 설교(平常說敎)를 보고 드디어 묻되 무엇이 이 여래어인가. 장경이 이르되 농인(聾人)이 어찌 들음을 얻겠는가 하니 저한(這漢; 보복)이 그(장경)가 어느 때(幾時) 귀굴(鬼窟) 속에 있으면서 활계(活計)를 지어 왔는 줄 안지라 보복이 이르되 진정(眞情; 情)으로 네가 제2두(第二頭)를 향해 말한 줄 알겠다 하니 과연 그 말이 적중했다(장경의 말이 제2두임이 분명하다는 뜻). 도리어 묻되 사형(師兄)은 무엇이 이 여래어라고 하는가. 보복이 이르되 차 마시러 가거라. 창두(鎗頭; 頭는 조사)를 거꾸로 다른 사람(보복)에게 빼앗겨버림을 입었으니 대소(大小) 장경이 돈 잃고 죄를 만났다. 다만(且) 제인에게 묻노니 여래어가 도리어 몇 개가 있는가. 모름지기 이러히(1句1字도 없음) 견득(見得)할 줄 알아야 비로소 이 양개한(兩箇漢)의 패결(敗缺)을 보리라. 자세히 검점(檢點)하여 가져 올진대 모두 합당히 끽방(喫棒)해야 하지만 일선도(一線道)를 놓아(보복이 놓아) 그(장경)에게 이회(理會)를 준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르되 보복이 말한 것(道得; 得은 조사)은 옳고 장경이 말한 것은 옳지 않다 하며 다만 관대(管帶)하여 말 따라 앎(解)을 내어 곧 말하되 얻음도 있고 잃음도 있다 하거니와 고인은 돌을 치는 불과 같고 번쩍하는 번갯빛과 같은 줄 너무 알지 못함이다. 여금의 사람은 저 고인의 전처(轉處)로 가서 보지 않고 다만 구하(句下)로 관거(管去)하여 달리면서 곧 말하되 장경이 당시에 바로(便) 쓰지 않은지라 소이로 제2두에 떨어졌으며 보복이 이른 차 마시러 가거라는 곧 이 제1두라고 하나니 만약 다만 이러히 본다면 미륵이 하생함에 이르더라도 또한 고인의 뜻을 보지 못한다. 만약 이 작가일진대 마침내 이런 종류(這般)의 견해를 짓지 않으리니 이런 과굴(窠窟; 句下에 死却함이 과굴임)을 도출(跳出)해야 향상에 저절로 한 가닥의 길이 있으리라. 너희가 만약 말하되 농인(聾人)이 어찌 들음을 얻겠는가 한 것은 무슨 옳지 못한 곳이 있으며 보복이 이른 차 마시러 가거라는 무슨 옳은 곳이 있는가 한다면 더욱 교섭이 없다. 이런 고로 말하되 그는 활구를 참구하고 사구를 참구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 인연은 편신(遍身)이 옳은가 통신(通身)이 옳은가 한 인연(제89칙)과 더불어 일반(一般)이므로 너희가 계교(計較)하여 시비할 곳이 없나니 모름지기 이는 너희의 각근하(脚跟下)의 정나라지(淨裸裸地)라야 바야흐로 고인의 상견처(相見處)를 보리라.
●長慶; 장경원(長慶院)이니 복건 민후현(閩侯縣)의 이산(怡山)에 위치하며 당 함통(860-873) 초년 대안선사(大安禪師; 793-883)가 창건하여 설치했고 처음 이름은 이산선원이었음. 당말 오대 간 혜릉선사(慧稜禪師; 854-932)가 주지를 맡았을 때 이름을 고쳐 장경원이라 했음. 근대에 비록 호칭하기를 용원(榕垣) 5대 총림의 하나라고 하나 실로 이미 파패(破敗)되어 감내하지 못함은 끊어진 담장과 황폐한 주춧돌이 눈을 들면 모두 이것임. 청중(淸衆)이 수백이지만 모두 유가(瑜伽)의 패창(唄唱)을 숭상하고 다시는 선자의 기상이 없음 [대명일통지74. 복건통지264].
●慧稜; (854-932) 오대 후당승. 호는 초각(超覺)이며 항주(杭州; 절강) 염관(鹽官) 사람이며(송고승전엔 海鹽人으로 지어졌음) 속성(俗姓)은 손(孫)이며 사람들이 손공(孫公)이라 일컬었음. 13세에 소주(蘇州) 통현사(通玄寺)에서 출가해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음. 영운지근(靈雲志勤)ㆍ설봉의존(雪峰義存)ㆍ현사사비(玄沙師備) 등의 스님들을 역참(歷參)했음. 일찍이 30년 동안 설봉의존에게 의지(依止)했고 후에 그의 법사(法嗣)가 되었음. 당대(唐代) 천우(天祐) 3년(906) 천주(泉州; 복건) 초경원(招慶院)에 주(住)하다가 뒤에 복주(福州; 복건) 장경원(長慶院)에 주(住)했음. 후당(後唐) 장흥(長興) 3년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79며 승랍은 60 [송고승전13. 전등록18. 불조역대통재17].
●情; 진실. 성실(誠實).
●頭兮第一第二下; 벽암록 제95칙에 이르되 두(頭)의 제일(第一; 第一頭) 제이(第二; 第二頭)를 사람들이 다만 관취(管取; 管)하여 제일 제이로 이회(理會; 理解)한다면 바로(正) 이 사수(死水; 止水) 속에서 활계를 짓는 것이다. 이(這箇) 기교(機巧)를 너희가 다만 제일 제이라는 이회를 짓는다면 또한(且) 모색함을 얻지 못하여 있으리라. 설두가 이르되 와룡은 지수(止水)에 비치지 않는다 하니 사수(死水) 속에 어찌 용이 숨어 있으리오. 만약 이 제일 제이라 한다면 바로(正) 이 지수(止水) 속에서 활계를 짓는 것이니 반드시 이 홍파(洪波)가 호묘(浩渺)하고 백랑(白浪)이 도천(滔天)하는 곳이라야 바야흐로 용이 숨어 있으므로 바로 전두(前頭; 제18칙)에 이른 징담(澄潭)은 창룡(蒼龍)의 도사림을 허락하지 않는다와 비슷하다. 말함을 보지 못하느냐 사수(死水)는 용을 감추지 못한다 하며 또 말하되 와룡은 늘 벽담(碧潭)의 맑음을 두려워한다 하였다. 소이로 말하되 용이 없는 곳엔 달이 있고 파도가 맑으며 바람도 잠잠(恬)하고 파랑도 고요하며 용이 있는 곳엔 바람도 없는데 파랑(波浪)이 일어난다 하니 보복이 말한 차 마시러 가거라와 매우 흡사하여 바로 이 바람도 없는데 파랑(波浪)이 일어남이다. 설두가 이 속에 이르러 일시에 너희에게 정해(情解)를 타첩(打疊; 掃除, 收拾)해 주어 송료(頌了)했거니와 그(설두)가 여운(餘韻)이 있어 능히(敎; 能也) 문리(文理)를 이루어서 의전(依前)히 이두(裏頭; 裏面)로 나아가 1척(隻)의 눈을 붙이니 또한 기특함에 방애되지 않는다. 도리어 말하되 릉선객(稜禪客) 릉선객이여 3월의 우문(禹門; 용문)에서 점액(點額)을 만났다 하니 장경이 비록 이 용문을 통과한 용이지만 도리어 보복에게 갑자기(驀頭) 1점(點)을 입었다.
●止水; 사수(死水)니 체지(滯止)하여 흐르지 않는 물. 조정사원2. 지수(止水) 장자(德充符) 중니가 가로되 사람이 유수(流水)에 비추지 않고 지수(止水)에 비추나니 오직 지(止)라야 능히 중지(衆止)를 지(止)한다(衆止는 일체 静止를 구하는 자).
●雷門撾布鼓; 위 제414칙 포고(布鼓)를 보라.
●阿羅跛
曩; 굉지록4에 아라파좌낭(作阿囉跛
曩)으로 지었음. 금강정초승삼계경설문수오자진언승상(金剛頂超勝三界經說文殊五字眞言勝相; 一卷 唐 不空譯)에 가로되 아라파좌낭(阿囉跛左曩) 아(阿)란 것은 이 무생(無生)의 뜻이며 라(囉)란 것은 청정하여 물듦 없고 진구(塵垢)를 여읨의 뜻이며 파(跛)란 것은 또한 제일의제(第一義諦)가 없는 제법평등(諸法平等)의 뜻이며 좌(左)란 것은 제법은 제행(諸行)이 있지 않음의 뜻이며 낭(曩)이란 것은 제법은 성상(性相)이 있지 않으며 언설과 문자를 모두 불가득의 뜻이다.
●坦坦蕩蕩; 넓고 또 평탄함. 사람의 심지(心地)가 정직하고 심흉(心胸)이 개활(開闊)함에 비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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