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期城太守揚衒之早慕佛乘 問師曰 西天五印師承爲祖 其道如何 師曰 明佛心宗行解相應 名之曰祖 又問 此外如何 師曰 須明他心知其今古 不厭有無於法無取 不賢不愚無迷無悟 若能是解故稱爲祖 又曰 弟子歸心三寶亦有年矣 而智慧昏蒙尙迷眞理 適聽師言罔知攸措 願師慈悲開示宗旨 師知懇到 卽說偈曰 亦不覩惡而生嫌 亦不觀善而勤措 亦不捨智而近愚 亦不拋迷而就悟 達大道兮過量 通佛心兮出度 不與凡聖同躔 超然名之曰祖 衒之聞偈悲喜交幷曰 願師久住世間化導群有 師曰 吾卽逝矣不可久留 根性萬差多逢患難 衒之曰 未審何人 弟子爲師除得 師曰 吾以傳佛祕密利益迷途 害彼自安必無此理 衒之曰 師若不言 何表通變觀照之力 師不獲已乃爲讖曰 江槎分玉浪 管炬開金鎖 五口相共行 九十無彼我 衒之聞語 莫究其端 默記于懷禮辭而去 師之所讖 雖當時不測 而後皆符驗 時魏氏奉釋禪俊如林 光統律師流支三藏者乃僧中之鸞鳳也 覩師演道斥相指心 每與師論議是非鋒起 師遐振玄風普施法雨而偏局之量自不堪任 競起害心數加毒藥 至第六度 以化緣已畢傳法得人 遂不復救之端居而逝 卽後魏孝明帝太和十九年丙辰歲十月五日也〈依續法記 則十月五日乃孝莊帝永安元年 卽梁大通二年戊申歲 其年卽明帝武泰元年也 二月明帝崩 四月莊帝卽位 改元建義 至九月又改永安也 後云 汝主已厭世 謂是歲明帝崩也 據傳燈云 丙辰歲卽東魏文帝大統二年 西魏靜帝天平三年 梁大同二年 與厭世之說全乖也 又太和十九年 乃後魏文帝時 卽南齊明帝建武二年乙亥歲 殊相遼邈耳〉 其年十二月二十八日葬熊耳山 起塔於定林寺 後三歲魏宋雲奉使西域迴 遇師于葱嶺 見手携隻履翩翩獨逝 雲問 師何往 師曰 西天去 又謂雲曰 汝主已厭世 雲聞之茫然 別師東邁 暨復命 卽明帝已登遐矣 而孝莊卽位 雲具奏其事 帝令啓壙 唯空棺一隻革履存焉〈若依續法記 則後三歲乃莊帝永安三年庚戌歲 當梁武中大通二年也 其年十二月莊帝方崩 奉使迴時帝尙在耳 若據傳燈 則後三歲乃己未歲 卽西魏文帝大統五年 東魏靜帝興和元年 當梁武大同五年也 如此則豈復有孝莊帝耶 又稱宋雲遇師於葱嶺 尤誤也 宋雲使西域迴時 已在魏明帝正光年中矣 然則遇師於葱嶺者 蓋是魏末別遣使往西域迴耳○但當云 後三歲魏使有自西域迴者 遇師於葱嶺 見手携隻履翩翩獨逝 問師何往 曰西天去 又謂使曰 汝主已厭世 使聞之茫然別師東邁 暨復命卽明帝已登遐矣 而孝莊卽位 奉使具奏其事 帝令啓壙 唯空棺一隻革履存焉〉 擧朝爲之驚歎 奉詔取遺履 於少林寺供養 至唐開元十五年丁卯歲 爲信道者竊在五臺華嚴寺 今不知所在 初梁武遇師因緣未契 及聞化行魏邦 遂欲自撰師碑而未暇也 後聞宋雲事乃成之 代宗謚圓覺大師 塔曰空觀 師自魏丙辰歲告寂 迄皇宋景德元年甲辰 得四百六十七年矣〈當云自魏至庚子歲告寂 迄皇宋景德元年甲辰得四百七十五年矣 凡此年代之差 皆由寶林傳錯誤而楊文公不復考究耳〉
●太守; 戰國至秦朝時期郡守的尊稱 漢景帝更名爲太守 爲一郡的最高行政長官 [百度百科 祖庭事苑三]
●迷途; 迷之境界 指衆生輪迴轉生的三界六道之世界
●讖; 驗也 言將來之驗也 慧琳音義四十六 讖 祕密書也
●江槎分玉浪下; 祖庭事苑八 謂流支光統 密毒於吾 所以致九十也
●光統; 北齊鄴城大覺寺慧光律師 地論之宗匠 入鄴而任國統之官 故呼爲光統 [唐僧傳二十一]
●律師; 精通律學 善講戒律的師僧
●流支; 菩提流支 北魏僧 北天竺三藏也 又作菩提留支 此云道希 大乘瑜伽系之學者 北魏宣武帝永平元年(508) 至洛陽 帝甚重之 敕住於永寧寺 從而翻譯梵經 計譯有十地經論 金剛般若經 佛名經 法集經 深密解脫經 及大寶積經論 法華經論 無量壽經論等 凡三十九部一二七卷 [十地經論序 續高僧傳一 歷代三寶紀三] ▲祖庭鉗鎚錄下 元魏時菩提流支 與達磨同時 下藥以毒達磨者 是也
●鸞鳳; 鸞鳥和鳳凰 古代傳說中的神鳥 比喩賢良俊美的人
●玄風; 玄妙之宗風
●遼邈; 一遼遠 二相去甚遠 懸殊
●熊耳山; 位於河南盧氏縣南方 與永寧(今洛寧縣)爲界 山之兩峰竝峙如熊耳 故稱熊耳山 乃禪宗初祖菩提達磨之塔所 [大明一統志二十九 大淸一統志一六二]
●宋雲; 北魏敦煌人 爲北魏孝明帝時之使臣 孝明帝神龜元年(518 一說熙平元年或正光二年)十一月 奉胡太后之命 與沙門法力慧生等 自洛陽出發 途經赤嶺 土谷渾 鄯善 末城 波斯 賖彌等地 翌年十二月抵烏場國 謁烏場國王 竝爲說孔孟老莊之德及神仙方術 正光元年(520)四月中旬入乾陀羅國 後更西行 渡辛頭河(卽印度河) 巡禮雀離浮圖 大塔等佛蹟 翌年二月(一說三年或四年)返洛陽 攜回大乘梵文經典凡一七○部 其後事蹟不詳 又宋雲歸國後 將西域旅遊之見聞 撰成宋雲行紀 其後收於洛陽伽藍記五中[洛陽伽藍記五 釋迦方志下 魏書西域傳 魏書釋老志 河南通志三十三]
●奉使; 奉命出使 奉命出使的人 使者
●西域; 總指支那以西之諸國 別指印度
●葱嶺; 卽新疆省西南帕米爾高原之一大峻嶺 乃亞細亞大陸諸山脈之主軸 自古稱世界之屋脊 ▲西域記十二活國條 葱嶺者 據贍部州中 南接大雪山 北至熱海千泉 西至活國 東至烏鎩國 東西南北各數千里 崖嶺數百重 幽谷險峻 恆積冰雪 寒風勁烈 以産葱爲主 故謂葱嶺 又以山崖葱翠 遂以名焉
●翩翩; 輕擧貌 往來貌
●登遐; 本意謂死者升天而去 後引申爲對他人死去的諱稱 又特指帝王之死 又猶言登仙遠去
●得; 置于時間詞語之前 表示過了多少時間 相當于已經 過了
●楊文公; 楊億(974-1020) 北宋臨濟宗居士 浦城(福建建甌)人 字大年 少時以文章名世 太宗嘗召入面試 歎爲神童 眞宗時 歷任翰林學士 侍郞 修撰等官 初不知佛 學士李維勉 以宗門事 相策發 遂生深信 後參汝州廣慧元璉得法 每翼護法門 多著洪力 一時學佛士夫推爲領袖 又屢奉詔命編製大藏目錄 校刊景德傳燈錄 於譯經院任潤文一職 天禧四年有疾 書偈遺李遵勗而逝 享年四十七 謚號文 有文集行世 [五燈會元十二 居士傳二十 宋史三○五]
●考究; 一查考 硏究 二講求 此指一
기성태수(期城太守) 양현지(揚衒之)가 있어 일찍 불승(佛乘)을 흠모했다. 스님에게 물어 가로되 서천(西天)의 오인(五印)에서 사승(師承)하여 조(祖; 祖師)라 하거니와 그 도가 어떻습니까. 사왈(師曰) 불타의 심종(心宗)을 밝혀 행해(行解)가 상응함을 이름해 가로되 조(祖)다. 또 묻되 이 밖에 어떻습니까. 사왈 모름지기 타심(他心)을 밝히고 그 금고(今古)를 알고 유무(有無)를 싫어하지 않고 법에 취함이 없고 불현불우(不賢不愚)하고 무오무미(無迷無悟)하나니 만약 능히 이를 안다면 고로 일컬어 조(祖)라 한다. 우왈(又曰) 제자(弟子)가 삼보(三寶)에 귀심(歸心)한 지 또한 유년(有年; 數年)입니다만 지혜가 혼몽(昏蒙)하여 아직(尙) 진리에 혼미(昏迷)합니다. 마침(適) 스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조치(措置)할 바(攸; 저본에 收로 지었음)를 알지 못합니다. 원컨대 스님이 자비로 종지(宗旨)를 개시(開示)하십시오. 스님이 간도(懇到; 懇至와 같음)를 알고 곧 게를 설해 가로되 또한 악(惡)을 보고 혐오(嫌惡)를 내지 않고/ 또한 선(善)을 보고 근조(勤措; 부지런히 施行함)하지 않고/ 또한 지(智)를 버리고 우(愚)와 친근하지 않고/ 또한 미(迷)를 포기(抛棄)하고 오(悟)로 나아가지 않는다/ 대도(大道)를 달통(達通)하여 과량(過量; 思量을 초과)하고/ 불심을 통달하여 출도(出度; 度量을 벗어남)하고/ 범성(凡聖)과 더불어 같은 궤도(軌道; 躔)가 아니고/ 초연(超然)함을 이름해 가로되 조(祖)다. 현지(衒之)가 게를 듣자 비희(悲喜)가 교병(交幷; 交叉合幷)하며 가로되 원컨대 스님이 세간에 오래 머물며 군유(群有; 중생)를 화도(化導)하십시오. 사왈 나는 곧 떠날 것이니 가히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근성(根性)이 만차(萬差)라 환난(患難)을 많이 만났다. 현지가 가로되 미심(未審)하오니 어떤 사람입니까. 제자가 스님을 위해 제득(除得; 得은 조사)하겠습니다. 사왈 내가 불타의 비밀을 전수하여 미도(迷途)를 이익케 하거늘 그를 상해(傷害)하여 스스로 안녕한다면 반드시 이런 이치가 없다. 현지가 가로되 스님이 만약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어찌 통변(通變)하는 관조(觀照)의 힘을 표(表)하겠습니까. 스님이 불획이(不獲已; 부득이)하여 이에 참(讖)해 가로되 강사(江槎; 槎는 떼 사)가 옥랑(玉浪)을 나누고(江槎分玉浪)/ 관거(管炬)가 금쇄(金鎖)를 열었다/ 오구(五口)가 서로 공행(共行)하니/ 구십(九十)에 피아(彼我)가 없다. 현지가 말씀을 듣고도 그 단서(端緖)를 궁구(窮究)하지 못했고 묵묵히 가슴(懷)에 기억하고 예사(禮辭)하고 떠났다. 스님이 참(讖)하는 바는 비록 당시엔 헤아리지 못했지만 이후(而後; 以後)에 모두 부험(符驗; 符合)했다. 당시에 위씨(魏氏)는 석교(釋敎)를 받들어 선준(禪俊)이 숲과 같았는데 광통율사(光統律師)와 류지삼장(流支三藏)이란 자는 곧 승중(僧中)의 난봉(鸞鳳)이다. 스님이 도를 연설하면서 상(相)을 배척하고 심(心)을 가리킴을 보았고 매번 스님과 논의하면서 시비가 봉기(鋒起; 紛紛히 發生)하였다. 스님이 멀리 현풍(玄風)을 진작하고 법우(法雨)를 널리 베풀자 편국(偏局; 偏僻된 局量)의 도량(度量)인지라 스스로 감임(堪任)하지 못하고 해심(害心)을 다투어 일으켜 수차례(數) 독약을 가했다. 제6도(度; 次. 回)에 이르러 화연(化緣)을 이미 마치고 전법하고 사람을 얻었으므로 드디어 다시 구제하지 않고 단거(端居)히 서거했다. 곧 후위(後魏) 효명제(孝明帝) 태화(太和) 19년 병진세(丙辰歲) 10월 5일이다〈續法記에 의하면 곧 10월 5일은 곧 孝莊帝 永安元年(528)이며 곧 梁 大通 2년 戊申歲며 그 해는 곧 明帝 武泰元年이다. 2월에 明帝가 崩했고 4월에 莊帝가 즉위하여 建義로 改元했고 9월에 이르러 또 永安으로 개원했다. 뒤에 이르되 너의 主가 이미 厭世했다 했으니 이르자면 이 해에 明帝가 崩했다. 傳燈에 의거하자면 이르되 丙辰歲라 했는데 곧 東魏 文帝 大統 2년(536)이며 西魏 靜帝 天平 3년이며 梁 大同 2년이다. 厭世之說과 전부 어긋난다. 또 太和 19년은 곧 後魏 文帝 때니 곧 南齊 明帝 建武 2년 乙亥歲(495)다. 너무 서로 遼邈하다〉. 그 해 12월 28일 웅이산(熊耳山)에 안장(安葬)하고 정림사(定林寺)에 탑을 세웠다. 3세(歲) 후에 위(魏)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봉사(奉使)했다가 돌아오면서 스님을 총령(葱嶺)에서 만났는데 손에 척리(隻履)를 가지고 편편(翩翩)히 홀로 떠남을 보았다. 송운이 묻되 스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사왈 서천으로 간다. 또 송운에게 일러 가로되 너의 주(主; 主上)가 염세(厭世; 死)했다. 송운이 이를 듣고 망연(茫然)했다. 스님과 헤어지고 동쪽으로 나아갔는데(東邁) 복명(復命)함에 이르자(暨) 곧 명제(明帝)가 이미 등하(登遐)했고 효장(孝莊)이 즉위했다. 송운이 그 사실을 갖추어 아뢰자 황제가 계광(啓壙; 壙中을 열다)하게 했는데 오직 빈 관(棺)이었고 1척(隻)의 가죽신만 잔존(殘存)했다〈만약 續法記에 의하자면 곧 三歲 후는 곧 莊帝 永安 3년 庚戌歲며 梁武 中大通 2년(530)이다. 그 해 12월에 莊帝가 바야흐로 崩했으니 奉使하고 돌아왔을 때 帝가 아직 존재했다. 만약 傳燈에 의거할진대 곧 三歲 후는 곧 己未歲니 곧 西魏 文帝 大統 5년(539)이며 東魏 靜帝 興和元年이며 梁武 大同 5년에 상당한다. 이와 같다면 곧 어찌 다시 孝莊帝가 있겠는가. 또 일컫기를 宋雲이 스님을 총령에서 만났다 했으니 더욱 그르다. 송운이 서역에 奉使하고 돌아왔을 때 이미 魏明帝 正光年(520-524) 中에 있었다. 그렇다면 곧 스님을 총령에서 만난 자는 대개 이는 魏末 달리 遣使하여 西域에 갔다가 돌아왔을 것이다. ○단지 마땅히 이르되 三歲 후에 魏使가 서역으로부터 돌아오는 자가 있었다. 스님을 총령에서 만났는데 손에 隻履를 가지고 翩翩히 홀로 감을 보았다. 스님에게 물어 가로되 어디로 가십니까. 가로되 서역으로 간다. 또 사자에게 일러 가로되 너의 主가 이미 厭世했다. 사자가 이를 듣고 茫然했고 스님과 헤어져 東邁했다. 復命함에 이르러 곧 明帝가 이미 登遐했고 孝莊이 즉위했다. 奉使가 그 사실을 갖추어 아뢰자 帝가 啓壙하게 했는데 오직 空棺이었고 1隻 革履만 殘存했다〉. 온(擧) 조정(朝廷)이 경탄(驚歎)했다. 봉조(奉詔)하여 유리(遺履; 남긴 신)를 취해 소림사에서 공양했다. 당 개원(開元) 15년 정묘세(丁卯歲; 727)에 이르러 신도(信道)란 자가 훔쳐 오대산 화엄사에 둠이 되었는데 지금은 소재를 알지 못한다. 처음 양무(梁武; 양무제)가 스님을 만나 인연이 계합치 못했다가 및 위방(魏邦)에 교화를 행한다 함을 듣자 드디어 사비(師碑)를 자찬(自撰)하려다가 겨를이 없었다. 후에 송운(宋雲)의 사연을 듣자 이에 그것을 이루었다. 대종(代宗)이 시(謚; 諡와 같음)해 원각대사(圓覺大師)라 하고 탑을 가로되 공관(空觀)이라 했다. 스님이 위(魏) 병진세(丙辰歲)에 고적(告寂)함으로부터 황송(皇宋) 경덕(景德) 원년 갑진(甲辰)에 이르기까지 467년이 지났다(得)〈마땅히 이르되 魏 庚子歲(520)에 이르러 告寂함으로부터(戊申歲에 入寂했음) 皇宋 景德元年甲辰(1004)에 이르기까지 475년이 지났다(이 역시 맞지 않음). 무릇 이 年代의 差는 모두 寶林傳의 錯誤로 말미암았고 楊文公이 다시 考究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太守; 전국(戰國)에서 진조(秦朝) 시기에 이르기까지 군수(郡守)의 존칭이었음. 한경제(漢景帝)가 이름을 고쳐 태수라 했으며 1군(郡)의 최고 행정장관이 됨 [백도백과. 조정사원3].
●迷途; 미혹의 경계. 중생이 윤회하며 전생(轉生)하는 삼계육도(三界六道)의 세계를 가리킴
●讖; 험(驗; 증험)임. 장래의 험(驗)을 말함. 혜림음의46 참(讖) 비밀서(祕密書)다.
●江槎分玉浪下; 조정사원8 이르자면 류지(流支)와 광통(光統)이 몰래 나에게 독해(毒害)하였으니 소이로 구십(九十)에 이르렀다.
●光統; 북제(北齊) 업성(鄴城) 대각사의 혜광율사(慧光律師)니 지론(地論)의 종장임. 업(鄴)에 들어가 국통의 승관(僧官)에 임명된지라 고로 부르기를 광통이라 했음. [당승전21].
●律師; 율학에 정통하고 계율을 잘 강설하는 사승(師僧).
●流支; 보리류지(菩提流支; 梵 Bodhiruci)니 북위(北魏)의 승려니 북천축의 삼장(三藏)임. 또 보리류지(菩提留支)로 지으며 여기에선 이르되 도희(道希)니 대승유가계(大乘瑜伽系)의 학자임. 북위 선무제(宣武帝) 영평 원년(508) 낙양에 이르렀으며 제(帝)가 매우 그를 존중해 칙령으로 영녕사(永寧寺)에 거주케 했음. 이로부터 범경(梵經)을 번역했는데 번역한 걸 계산하자면 십지경론ㆍ금강반야경ㆍ불명경ㆍ법집경ㆍ심밀해탈경 및 대보적경론ㆍ법화경론ㆍ무량수경론 등 무릇 39부(部) 127권이 있음 [십지경론서. 속고승전1. 역대삼보기3]. ▲조정겸추록하. 원위(元魏) 시 보리류지(菩提流支)는 달마와 같은 시대이다. 약을 내려 달마를 독해(毒害)한 자가 이것이다.
●鸞鳳; 난새와 봉황. 고대 전설 중의 신조(神鳥). 현량(賢良)하고 준미(俊美)한 사람에 비유.
●玄風; 현묘한 종풍.
●遼邈; 1. 요원(遼遠)함. 2. 서로의 거리가 매우 멂. 아득히 다름(懸殊).
●熊耳山; 하남 노씨현 남방과 영녕(永寧; 지금의 낙녕현)의 경계에 위치함. 산의 두 봉우리가 병치(竝峙)한 게 웅이(熊耳)와 같은지라 고로 명칭이 웅이산임. 곧 선종 초조 보리달마의 탑소(塔所)임 [대명일통지29. 대청일통지162]
●宋雲; 북위 돈황 사람. 북위 효명제(孝明帝) 때의 사신(使臣)이 됨. 효명제 신귀 원년(518; 일설에 희평 원년 혹 정광2년) 11월 호태후(胡太后)의 명을 받들어 사문 법력ㆍ혜생 등과 낙양으로부터 출발하여 장도(長途)에 적령ㆍ토곡혼ㆍ선선ㆍ말성ㆍ파사(波斯)ㆍ사미(賖彌) 등지(等地)를 경과하여 다음해 12월 오장국(烏場國)에 다다라 오장국왕을 알현했고 아울러 공맹(孔孟)과 노장(老莊)의 덕 및 신선의 방술을 설했음. 정광 원년(520) 4월 중순 건타라국(乾陀羅國; 梵 gandhāra)에 들어갔고 후에 다시 서행(西行)하여 신두하(辛頭河; 곧 印度河)를 건넜음. 작리부도(雀離浮圖)ㆍ대탑 등의 불적(佛蹟)을 순례했음. 다음해 2월(일설에 3년 혹 4년) 낙양으로 돌아왔는데 대승 범문(梵文) 경전 무릇 170부를 가지고 회귀했음. 그 후의 사적(事蹟)은 불상임. 또 송운이 귀국한 후 서역 여유(旅遊)의 견문을 가지고 송운행기(宋雲行紀)를 찬성(撰成)했는데 그 후 낙양가람기5 중에 수입(收入)했음 [낙양가람기5. 석가방지하. 위서서역전. 위서석로지. 하남통지33].
●奉使; 봉명(奉命)하고 출사(出使)함. 봉명하고 출사하는 사람. 사자(使者).
●西域; 지나 이서(以西)의 제국을 모두 가리키지만 특별히 인도를 가리킴.
●葱嶺; 곧 신강성 서남 파미이고원(帕米爾高原; Pamir Plateau)의 일대준령(一大峻嶺)이니 곧 아세아대륙의 여러 산맥의 주축(主軸)이며 자고(自古)로 명칭이 세계의 옥척(屋脊; 용마루)임. ▲서역기12 활국조(活國條). 총령(葱嶺)이란 것은 섬부주(贍部州) 가운데 의거하여 남으론 대설산(大雪山)과 접(接)하고 북으론 열해천천(熱海千泉)에 이르고 서로는 활국(活國)에 이르고 동으론 오쇄국(烏鎩國; Usa 或 Osh)에 이른다. 동서남북이 각 수천 리며 애령(崖嶺)이 수백 겹이며 유곡(幽谷)이 험준하고 빙설이 항상 쌓였으며 한풍(寒風)이 경렬(勁烈)한다. 산총(産葱; 파를 생산함)을 주로 하기 때문에 고로 이르되 총령(葱嶺)이며 또 산애(山崖)가 파처럼 푸르므로 드디어 이름했다
●翩翩; 경거(輕擧)하는 모양. 왕래하는 모양.
●登遐; 본의(本意)는 이르자면 사자(死者)가 승천(升天)하여 감. 후에 인신(引申; 轉意)하여 타인의 사거(死去)에 대한 휘칭(諱稱)이 되었음. 또 제왕(帝王)의 죽음을 특지(特指)함. 또 등선(登仙)하여 멀리 간다 라고 말함과 같음.
●得; 시간사어(時間詞語)의 앞에 두며 다소의 시간이 지나갔음을 표시함. 이경(已經)ㆍ과료(過了)에 상당함.
●楊文公; 양억(楊億; 974-1020)이니 북송의 임제종 거사며 포성(복건 건구) 사람이며 자가 대년(大年). 젊은 시절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났으며 태종이 일찍이 불러들여 면시(面試)하고 감탄하며 신동(神童)이라 했음. 진종 때 한림학사(翰林學士)ㆍ시랑(侍郞)ㆍ수찬(修撰) 등의 관직을 역임(歷任)했음. 처음엔 불법을 알지 못했는데 학사(學士) 이유면(李維勉)이 종문사(宗門事)로써 서로 책발(策發)하는지라 드디어 심신(深信)이 났으며 후에 여주(汝州)의 광혜원련(廣慧元璉)을 참알(參謁)해 득법했음. 매양(每樣) 법문(法門)을 익호(翼護)하여 많이 홍력(洪力)을 붙였으며 일시에 불법을 배우는 사부(士夫)들이 영수(領袖)로 추대했음. 또 누차 조명(詔命)을 받들어 대장목록(大藏目錄)을 편제(編製)하고 경덕전등록을 교간(校刊)하였고 역경원에서 윤문(潤文)의 일직(一職)을 맡았음. 천희 4년 질병이 있더니 게를 써서 이준욱(李遵勗)에게 남기고 서거했으니 향년은 47이며 시호는 문(文). 문집이 있어 행세(行世)함 [오등회원12. 거사전20. 송사305].
●考究; 1. 사고(查考). 연구. 2. 강구(講求; 調査하여 求함). 여기에선 1을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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