空室道人者 直龍圖閣范公珣之女 幼聦慧 樂於禪寂 因從兄守官豫章之分寧 遂參死心禪師于雲巖 旣於言下領旨 尋以偈伸讚死心曰 韶陽死心 靈源甚深 耳中見色 眼裏聞聲 凡明聖昧 後富前貧 利生濟物 點鐵成金 丹靑徒狀 非古非今 死心問之曰 死心非眞 向甚麽處讚 若讚死心 死心無狀 若讚虛空 虛空無跡 無狀無跡 下得箇甚麽語 若下得語 親見死心 對曰 死心非眞 眞非死心 虛空無狀 妙有無形 絶後再穌 親見死心 於是死心笑而已 靈源禪師遂以空室道人號之 自爾叢林知名 政和間 居金陵 圜悟禪師住蔣山 佛眼禪師亦在焉 因機語相契 二師稱賞 然道韻閑淡似不能言者 至於開廓正見 雅爲精峭偈句 有讀法界觀曰 物我元無二 森羅鏡像同 明明超主伴 了了徹眞空 一體含多法 交參帝網中 重重無盡意 動靜悉圓通 又設浴於保寧 揭榜于門曰 一物也無 洗箇甚麽 纖塵若有 起自何來 道取一句子玄 乃可大家入浴 古靈只解揩背 開士何曾明心 欲證離垢地時 須是通身汗出 盡道水能洗垢 焉知水亦是塵 直饒水垢頓除 到此亦須洗却 後於姑蘇西竺院薙髮爲尼 名惟久 宣和六年 趺坐而終 道人生於華胄 不爲富貴籠絡 傑然追蹤月上女 直趣無上菩提 又變形服 與鐵磨爲伍 至於生死之際 効驗異常 非志烈秋霜 疇克爾耶
●空室道人; 智通(?-1124) 宋代黃龍派尼僧 自號空室道人 龍圖閣范珣之女 幼聰慧 樂禪寂 參黃龍死心於雲巖得悟 政和(1111-1118)間居金陵 時圓悟住蔣山 佛眼亦在 機語相契 二師稱賞 後於姑蘇西竺園薙髮 [五燈會元十八 羅湖野錄上] ◆道人; 指修行佛道者 或指得道之人 禪悟者
●直龍圖閣; 是北宋時期設置的一種榮譽性官職 [百度] ◆龍圖閣; 北宋閣名 約建於宋眞宗咸平四年(1001) 位於會慶殿西側 龍圖閣收藏有宋太宗御書 各種典籍 圖畫 寶瑞 以及宗正寺所進宗室名冊 譜牒等 景德元年(1004) 置龍圖閣侍制 四年置龍圖閣學士 龍圖閣學士爲加官 用以加文學之士 備顧問與論議 以示尊寵 北宋龍圖閣直學士是加官 貼職 一種虛銜 榮譽稱號 [百度百科]
●守官; 官吏的職責與職守
●參; (一)動詞 卽學人拜見師家以問道 又修行坐禪亦稱參 如參禪辨道 (二)名詞 如詰旦升堂爲早參(朝參) 晡時(今午後四時)念誦爲晩參 晩參前坐禪爲坐參 每五日一參爲五參上堂 定期上堂爲大參 住持不定時集衆問答應酬爲小參等
●死心; 悟新(1044-1115) 宋代黃龍派僧 王氏 韶州曲江人 稍長穎脫 壯依佛陀院德修祝髮 進具已 熙寧八年(1075) 至黃龍謁晦堂祖心 竝嗣其法 元祐七年(1092) 出住雲岩 紹聖四年 徙翠岩 政和初 居黃龍 政和五年 十二月十三日晩小參說偈 十五日泊然坐逝 悟新自是號死心叟 榜其居曰死心室 有語錄一卷 [續傳燈錄二十二 普燈錄六]
●丹靑; 一古代繪畫常用紅靑兩色 故稱畫爲丹靑 二丹靑手
●圜悟; 又作圓悟 克勤(1063-1135) 又作克懃 宋代楊岐派僧 四川崇寧人 俗姓駱 字無著 幼於妙寂院依自省出家 受具足戒後 於成都依圓明學習經論 後至五祖山參法演 蒙其印證 與佛鑑慧懃 佛眼淸遠齊名 世有演門二勤一遠之稱 被譽爲叢林三傑 崇寧(1102-1106)中 於成都昭覺寺開法 政和初年(1111)至荊州 當世名士張無盡禮謁之 與之談論華嚴要旨及禪門宗趣 復受澧州刺史之請 住夾山靈泉禪院 復徙道林 時因樞密鄧子常之奏請 敕賜紫服及佛果禪師之號 政和中 奉詔移住金陵蔣山 次住天寧萬壽 大振宗風 後居於金山 高宗幸揚州時 詔其入對 賜號圜悟 世稱圜悟克勤 後歸成都昭覺寺 紹興五年示寂 壽七十三 諡號眞覺禪師 弟子有大慧宗杲 虎丘紹隆等禪門龍象 曾於夾山之碧巖 集雪竇重顯之頌古百則 編成碧巖錄十卷 世稱禪門第一書 此外有圜悟佛果禪師語錄二十卷 [大慧普覺禪師年譜 僧寶正續傳四 嘉泰普燈錄十一 佛祖歷代通載三十 釋氏稽古略四]
●佛眼; 淸遠(1067-1120) 宋代楊岐派僧 號佛眼 臨邛(四川邛崍)李氏 嚴正寡言 因讀法華有疑 造舒州太平 依五祖法演參究不契 辭去 至金陵蔣山 邂逅靈源 靈源勸返 時演已遷海會 及再謁 遂得大悟 隱居大中庵 崇寧萬壽寺新成 王渙之請師開法 次補龍門 逾十二年 居和之褒禪 宣和初(1119) 歸蔣山之東堂 二年 辭世 壽五十四 臘四十 有語錄八卷 [普燈錄十一 續傳燈錄二十五]
●帝網; 因陀羅網 又作天帝網 帝網 爲帝釋天之寶網 網之一一結皆附寶珠 其數無量 一一寶珠皆映現自他一切寶珠之影 又一一影中亦皆映現自他一切寶珠之影 如是寶珠無限交錯反映 重重影現 互顯互隱 重重無盡 華嚴經以因陀羅網譬喩諸法之一與多相卽相入 重重無盡之義 [華嚴經探玄記一 華嚴五敎章一]
●大家; 一大衆 二大方家 此指一
●古靈; 神贊 亦作神讚 唐代僧 福州(今屬福建)人 初于福州大中寺受業 後行脚遇百丈懷海開悟 回大中寺 爲本師說法 本師于言下感悟 晩住古靈 聚徒敎化 [五燈會元四 聯燈會要七] ◆古靈只解揩背; 五燈會元四福州古靈神贊 本州大中寺受業 後行脚遇百丈開悟 却回受業 本師問曰 汝離吾在外 得何事業 曰 並無事業 遂遣執役 一日 因澡身命師去垢 師乃拊背曰 好所佛堂而佛不聖 本師回首視之 師曰 佛雖不聖 且能放光
●開士; 一梵語菩提薩埵之譯語 又作闡士 開者 明達之意 指開正道 以引導衆生者 經中多呼菩薩爲開士 二對僧人的尊稱 ▲開士何曾明心; 首楞嚴經五 跋陀婆羅幷其同伴十六開士 卽從座起 頂禮佛足而白佛言 我等先於威音王佛 聞法出家 於浴僧時 隨例入室 忽悟水因 旣不洗塵亦不洗體 中間安然 得無所有 宿習無忘 乃至今時 從佛出家 今得無學 彼佛名我跋陀婆羅 妙觸宣明成佛子住 佛問圓通 如我所證觸因爲上
●離垢地; 菩薩修行五十二階位中十地位之第二位 成就戒波羅蜜 斷修惑 除毁犯之垢 使身淸淨 故云離垢地
●趺坐; 跏趺坐 僧人修行時之一種坐姿 兩足交叉置于另側大腿上 佛經中認爲這種坐法 最安穩不疲倦 宜于坐禪 又稱交一足爲半跏趺坐 半跏坐 半跏 稱交二足爲全跏坐 全跏
●華胄; 顯貴家族的後裔
●籠絡; 禪林寶訓音義 籠絡 如鳥之在籠 馬著覊絡 不能脫去 學者溺之 亦猶是也
●月上女; 乃印度毘耶離城長者毘摩羅詰之女 名月上 初生不久 忽大如八歲 姿容端麗 城中求婚者衆 月上女卽告以七日之後 當自選其人 屆期 月上女昇虛空中說偈 大衆聞偈而止貪欲 其後月上女遇舍利弗 竝與之先後詣佛所 與舍利弗等對闡深義 [月上女經上]
●菩提; <梵> bodhi 舊譯爲道 新譯爲覺 道者通義 覺者覺悟之義 然所通所覺之境 有事理之二法 理者涅槃 斷煩惱障而證涅槃之一切智 是通三乘之菩提也 事者一切有爲之諸法 斷所知障而知諸法之一切種智 是唯佛之菩提也 佛之菩提 通於此二者 故謂之大菩提 [智度論四 注維摩經四]
●鐵磨; 劉鐵磨 唐代尼師 俗姓劉 以機鋒峻峭故 世稱劉鐵磨 於距潭州潙山十里處 結一小庵 參問潙山靈祐 [傳燈錄十 聯燈會要七]
공실도인(空室道人; 智通)이란 자는 직용도각(直龍圖閣) 범공(范公) 순(珣)의 딸이다. 어려서 총혜(聦慧)했고 선적(禪寂)을 즐겼다(樂) 종형(從兄)이 예장(豫章)의 분녕(分寧; 지금의 江西省 九江市 修水縣)에 수관(守官)함으로 인해 드디어 사심선사(死心禪師)를 운암(雲巖)에서 참(參)했고 이미 언하(言下)에 영지(領旨; 意旨를 領悟)했다. 이윽고(尋) 게로써 찬사심(讚死心; 사심을 讚하다)을 내밀어(伸) 가로되 소양(韶陽)의 사심은/ 영원(靈源)이 심히 깊다/ 이중(耳中)에 색을 보고/ 안리(眼裏)에 소리를 듣는다/ 범(凡)에 밝고 성(聖)엔 어둡고(昧)/ 뒤는 부귀며 앞은 빈곤이다/ 이생제물(利生濟物; 利生接物과 같은 뜻)하며/ 쇠에 점찍어 금을 이룬다/ 단청(丹靑)의 도연(徒然)한 형상(形狀)이/ 옛도 아니고 지금도 아니다. 사심이 물어 가로되 사심(死心)이 진(眞)이 아니거늘 어느 곳(甚麽處)을 향해 찬(讚)하느냐. 만약 사심을 찬(讚)한다면 사심은 형상(形狀; 狀)이 없고 만약 허공을 찬한다면 허공은 자취(跡)가 없다. 형상이 없고 자취가 없거늘 저(箇) 무슨 말(甚麽語)을 하득(下得)하겠는가. 만약 말을 하득한다면 사심을 친견했다. 대왈(對曰) 사심이 진(眞)이 아니며 진이 사심이 아니며 허공은 형상(形狀; 狀)이 없고 묘유(妙有)는 형상(形相; 形)이 없으니 기절(氣絶; 絶)한 후에 다시 깨어나야(穌) 사심을 친견합니다. 이에 사심이 웃을 따름이었다. 영원선사(靈源禪師; 惟淸)가 드디어 공실도인(空室道人)으로써 호(號)했다. 이로부터(自爾) 총림에 이름이 알려졌다. 정화(政和; 1111-1118) 간 금릉(金陵)에 거주했는데 원오선사(圜悟禪師)가 장산(蔣山)에 거주했고 불안선사(佛眼禪師)도 또한 있었다. 기어(機語)가 상계(相契)함으로 인해 이사(二師)가 칭상(稱賞; 誇贊)했다. 그러나 도운(道韻)이 한담(閑淡)하여 능히 말하지 못하는 자와 같았다. 정견(正見)을 개곽(開廓; 擴展)함에 이르러선 고아(高雅; 雅)하여 정초(精峭; 特出)한 게구(偈句)가 되었다. 독법계관(讀法界觀)이 있어 가로되 물아(物我)가 원래 둘이 없고/ 삼라(森羅)가 거울의 형상(形像; 像)과 같다/ 밝디밝게 주반(主伴)을 초월했고/ 또렷또렷 진공(眞空)에 사무쳤다/ 일체(一體)가 다법(多法)을 머금어/ 제망(帝網) 가운데 교참(交參)한다/ 중중(重重)하여 무진(無盡)한 뜻이여/ 동정(動靜)에 모두(悉) 원통(圓通; 원만히 통함)한다. 또 보녕(保寧)에 욕실(浴室; 浴)을 시설하고 문에 방(榜)을 걸어(揭) 가로되 일물(一物)도 없거늘 저(箇) 무엇(甚麽)을 씻느냐. 섬진(纖塵)이라도 만약 있다면 어디로부터 일어나 왔느냐. 일구자(一句子; 子는 조사)를 말함을 취해 현(玄; 현묘)해야 이에 가히 대가(大家; 대중)가 입욕(入浴)한다. 고령은 다만 등을 문지를 줄만 알았거늘(古靈只解揩背) 개사(開士)가 어찌 일찍이 마음을 밝혔겠는가(開士何曾明心). 이구지(離垢地)를 증득하고자 할 때 모름지기 이는 통신(通身; 온몸)이 땀을 내어야 한다. 모두 말하되 물이 능히 때를 씻는다 하지만 어찌(焉) 물 역시 진(塵)임을 알겠는가. 직요(直饒; 가령) 물과 때를 단박 제거하더라도 여기에 이르러선 또한 꼭 세각(洗却)해야 한다. 후에 고소(姑蘇) 서축원(西竺院)에서 머리카락을 깎고(薙髮) 니(尼; 비구니)가 되었으며 이름이 유구(惟久)다. 선화(宣和) 6년(1124) 부좌(趺坐)하여 마쳤다. 도인(道人)은 화주(華胄)에서 출생했으나 부귀에 농락(籠絡)되지 않았고 걸연(傑然)히 월상녀(月上女)를 추종(追蹤)하면서 바로 무상보리(無上菩提)로 향했다(趣). 또 형복(形服)을 변화해 철마(鐵磨)와 더불어 대오(隊伍; 伍)가 되었다. 생사지제(生死之際)에 이르러 효험(効驗)이 이상(異常)했으니 심지(心志; 志)가 강렬(强烈; 烈)하여 추상(秋霜)이 아니라면 누가(疇) 능히(克) 그러하겠는가(爾耶).
●空室道人; 지통(智通; ?-1124)이니 송대 황룡파 니승. 자호(自號)가 공실도인(空室道人)이니 용도각 범순의 딸임. 어릴 적에 총혜(聰慧)했고 선적(禪寂)을 좋아했음. 황룡사심(黃龍死心)을 운암에서 참하여 깨침을 얻었음. 정화(1111-1118) 간 금릉에 거주했음. 당시에 원오는 장산에 거주했고 불안도 또한 있었는데 기어(機語)가 상계(相契)하여 두 스님이 칭상(稱賞)했음. 후에 고소 서축원에서 머리를 깎았음 [오등회원18. 나호야록상]. ◆道人; 불도를 수행하는 자를 가리킴. 혹 도를 얻은 사람ㆍ선을 깨친 자를 가리킴.
●直龍圖閣; 이는 북송시기 설치한 일종의 영예성(榮譽性) 관직 [백도]. ◆龍圖閣; 북송의 전각 이름. 약 송진종 함평 4년(1001)에 건립했으며 회경전 서쪽 곁에 위치함. 용도각은 송태종의 어서(御書)ㆍ각종 전적ㆍ도화(圖畫)ㆍ보서(寶瑞) 그리고 종정시(宗正寺)에서 진상한 종실명책(宗室名冊)ㆍ보첩(譜牒)등을 수장했음. 경덕 원년(1004) 용도각시제(龍圖閣侍制)를 설치했음. 4년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를 설치했는데 용도각학사는 가관(加官; 1. 관직이 오름. 2. 本職 외에 다른 관직을 겸임함)이 됨. 문학지사(文學之士)를 가(加)함을 썼음. 고문(顧問)과 논의에 대비하였으니 존총(尊寵)을 보임임. 북송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는 이 가관(加官)이며 첩직(貼職; 겸직)이니 일종의 허함(虛銜; 빈 職銜. 명의만 있고 직분이 없는 이름뿐인 벼슬)이며 영예의 칭호임 [백도백과].
●守官; 관리의 직책과 직수(職守).
●死心; 오신(悟新; 1044-1115)이니 송대 황룡파승. 왕씨며 소주 곡강 사람. 조금 자라자 영탈(穎脫)했으며 장성하자 불타원 덕수에게 의지해 머리를 깎았음. 진구(進具; 전진하여 구족계를 받음)하고는 희녕 8년(1075) 황룡에 이르러 회당조심(晦堂祖心; 황룡혜남의 법사)을 참알(參謁)하고 아울러 그 법을 이었음. 원우 7년(1092) 출세하여 운암(雲岩)에 주지했고 소성 4년(1097) 취암(翠岩)으로 옮겼고 정화 초 황룡에 거주했고 정화 5년 12월 13일 저녁 소참(小參)에 게를 설하더니 15일에 조용히(泊然) 좌서(坐逝)했음. 오신(悟新)은 스스로 이 호(號)가 사심수(死心叟; 叟는 늙은이)며 그 거실에 방(榜)을 붙여 사심실(死心室)이라 했음. 어록 1권이 있음 [속전등록22. 보등록6].
●參; (1). 동사(動詞)임. 곧 학인(學人)이 사가(師家)를 배견(拜見)하고 도를 물음이며 또 수행하며 좌선함도 또한 호칭이 참(參)이니 예컨대(如) 참선(參禪)하며 변도(辨道)하다. (2). 명사(名詞)임. 예컨대(如) 힐단(詰旦; 이른 아침)의 승당(升堂)을 조참(早參; 朝參)이라 하고 포시(晡時; 지금의 오후 4시)의 염송(念誦)을 만참(晩參)이라 하고 만참 전의 좌선을 좌참(坐參)이라 하고 매(每) 5일마다 1참(參)함을 오참상당(五參上堂)이라 하고 정기상당(定期上堂)을 대참(大參)이라 하고 주지가 부정시(不定時)에 집중(集衆)하여 문답하며 응수(應酬)함을 소참(小參)이라 하는 등임.
●丹靑; 1. 고대의 회화(繪畫)에 늘 홍ㆍ청 두 색을 썼으므로 고로 그림을 일컬어 단청이라 함. 2. 단청수(丹靑手).
●圜悟; 또 원오(圓悟)로 지음. 극근(克勤; 1063-1135)이니 또 극근(克懃)으로 지음. 송대 양기파승. 사천 숭녕(崇寧) 사람이며 속성은 낙이며 자는 무착. 어릴 적에 묘적원에서 자성에게 의지해 출가했고 구족계를 받은 후에 성도(成都)에서 원명에게 의지해 경론을 학습했음. 후에 오조산에 이르러 법연(法演)을 참알해 그의 인증을 받았음. 불감혜근(佛鑑慧懃)ㆍ불안청원(佛眼淸遠)과 더불어 이름이 가지런해 세상에 연문(演門; 法演門下)의 이근일원(二勤一遠)의 칭호가 있으며 총림의 삼걸(三傑)이란 명예를 입었음. 숭녕(1102-1106) 중 성도 소각사(昭覺寺)에서 개법했음. 정화 초년(1111) 형주에 이르러 당세(當世)의 명사(名士)인 장무진을 예알해 그와 더불어 화엄의 요지(要旨) 및 선문의 종취(宗趣)를 담론했음. 다시 예주자사의 청을 받아 협산의 영천선원에 주지하다가 다시 도림으로 이사했음. 때에 추밀(樞密) 등자상의 주청(奏請)으로 인해 자복(紫服)과 및 불과선사(佛果禪師)란 호를 칙령으로 주었음. 정화(1111-1117) 중에 조칙(詔勅)을 받들어 금릉의 장산(蔣山)으로 이주했고 다음에 천녕의 만수(萬壽)에 거주하면서 종풍을 크게 진작(振作)했음. 후에 금산에 거주했는데 고종이 양주에 거둥했을 때 그를 불러 입대(入對. 궁에 들어가 마주함)했으며 원오(圜悟)란 호를 주었으니 세칭이 원오극근(圜悟克勤)임. 후에 성도 소각사로 돌아갔으며 소흥 5년에 시적했으니 나이는 73이며 시호는 진각선사(眞覺禪師). 제자에 대혜종고ㆍ호구소륭 등의 선문의 용상(龍象)이 있음. 일찍이 협산의 벽암(碧巖)에서 설두중현의 송고(頌古) 100칙을 모아 벽암록 10권을 편성했는데 세칭이 선문제일서(禪門第一書)임. 이 밖에 원오불과선사어록 20권이 있음 [대혜보각선사년보. 승보정속전4. 가태보등록11. 불조역대통재30. 석씨계고략4].
●佛眼; 청원(淸遠; 1067-1120)이니 송대 양기파승. 호는 불안(佛眼)이며 임공(臨邛; 사천 공래) 이씨(李氏). 엄정(嚴正)하고 말이 적었음. 법화경을 읽다가 의심이 있음으로 인해 서주(舒州) 태평(太平)으로 나아가 오조법연(五祖法演)에게 의지(依止)해 참구(參究)했으나 계합(契合)치 못하자 고별하고 떠나 금릉 장산(蔣山)에 이르렀는데 영원(靈源)을 해후(邂逅)했으며 영원이 돌아가기를 권했음. 때에 법연(法演)은 이미 해회(海會)로 옮겼는데 재알(再謁)함에 이르러 드디어 대오(大悟)를 얻었으며 대중암(大中庵)에 은거했음. 숭녕만수사(崇寧萬壽寺)를 새로 만들자 왕환지(王渙之)가 스님에게 청해 개법(開法)했음. 다음으로 용문(龍門)에 보임(補任)하여 12년을 넘자 화(和)의 포선(褒禪)에 거주하다가 선화 초(1119) 장산(蔣山)의 동당(東堂)으로 돌아온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는 54며 승랍은 40. 어록 8권이 있음 [보등록11. 속전등록25].
●帝網; 인다라망(因陀羅網)이니 또 천제망(天帝網)ㆍ제망(帝網)으로 지음. 제석천의 보망(寶網)이 됨. 망(網)의 하나하나의 결(結)에 모두 보주를 부착(附著)했으며 그 수가 무량함. 하나하나의 보주에 모두 자타의 일체 보주의 그림자가 비치어 나타나며 또 하나하나의 그림자 중에 또한 모두 자타의 일체 보주의 그림자가 비치어 나타남. 이와 같이 보주가 무한히 서로 섞이고 반영(反映)하면서 겹겹으로 그림자가 나타나고 호현호은(互顯互隱)하면서 중중무진함. 화엄경에서 인다라망으로 제법의 일(一)과 다(多)가 상즉상입(相卽相入)하고 중중무진함의 뜻에 비유함 [화엄경탐현기1. 화엄오교장1].
●大家; 1. 대중. 2. 대방가(大方家; 禪家의 高手). 여기에선 1을 가리킴.
●古靈; 신찬(神贊)이니 또 신찬(神讚)으로 지음. 당대승. 복주(지금 복건에 속함) 사람. 처음에 복주 대중사에서 수업했고 후에 행각하다가 백장회해를 만나 개오(開悟)했음. 대중사로 돌아와 본사(本師)를 위해 설법했고 본사가 언하에 감오(感悟)했음. 만년에 고령(古靈)에 거주하면서 무리를 모아 교화했음 [오등회원4. 연등회요7]. ◆古靈只解揩背; 오등회원4 복주고령신찬. 본주의 대중사에서 수업했다. 후에 행각하다가 백장을 만나 개오(開悟)하고 수업사(受業師)에게 돌아왔다. 본사(本師)가 물어 가로되 네가 나를 떠나 밖에 있으면서 어떤 사업을 얻었는가. 가로되 아무런 사업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보내어 집역(執役; 복역)케 했다. 어느 날 몸을 씻으면서 스님에게 명령해 때를 제거하게 했다. 스님이 이에 등을 두드리며 가로되 좋은 곳의 불당에 부처가 성스럽지 못하구나. 본사가 머리를 돌려 그를 보았다. 스님이 가로되 부처는 비록 성스럽지 못하나 그래도 능히 방광하는구나.
●開士; 1. 범어 보리살타의 번역어. 또 천사(闡士)로 지음. 개(開)란 것은 명달의 뜻이니 정도를 열어 중생을 인도하는 자를 가리킴. 경중에서 다분히 보살을 호칭하여 개사라 함. 2. 승인에 대한 경칭. ▲開士何曾明心; 수릉엄경5. 발타파라(跋陀波羅)와 아울러 그 동반(同伴) 16개사(開士)가 곧 자리로부터 일어나 불타의 발에 정례(頂禮)하고 불타에게 사뢰어 말하되 아등(我等)은 먼저 위음왕불(威音王佛)에게서 법을 듣고 출가하였습니다. 욕승(浴僧)할 때 예법(例法)을 따라 입실했다가 홀연히 수인(水因)을 깨쳤습니다. 이미 때를 씻지도 않았고 또한 몸을 씻지도 않았지만 중간이 안연(安然)하여 무소유를 얻었으며 숙습(宿習)을 잊지 못해 내지 금시(今時)에 불타를 좇아 출가해 이제 무학(無學)을 얻었습니다. 그 불타가 나를 이름해 발타파라라 했으며 묘촉(妙觸)이 선명(宣明; 明顯)해 불자주(佛子住)를 이루었습니다. 불타가 원통(圓通)을 물으시니 내가 증득한 바와 같음은 촉인(觸因)이 상(上)이 됩니다.
●離垢地; 보살이 수행하는 52계위(階位) 중 10지위의 제3위. 계바라밀을 성취하여 수혹(修惑)을 끊고 훼범(毁犯)의 구(垢)를 제거하여 몸으로 하여금 청정하게 하는지라 고로 이르되 이구지(離垢地)임.
●趺坐; 가부좌(跏趺坐)니 승인이 수행할 때의 일종의 앉는 모습. 두 발을 교차해 따로 곁의 넓적다리 위에 둠. 불경 중에 인정하기를 이런 종류의 좌법은 가장 안온(安穩)하여 피권(疲倦)하지 않으므로 좌선에 마땅하다 함. 또 한 발을 교차함을 일컬어 반가부좌ㆍ반가좌ㆍ반가(半跏)라 하고 두 발을 교차함을 일컬어 전가좌ㆍ전가(全跏)라 함.
●華胄; 현귀(顯貴; 顯達尊貴) 가족의 후예.
●籠絡; 선림보훈음의. 농락(籠絡) 새가 농에 있고 말에 기락(覊絡; 굴레와 고삐)을 부착함과 같아서 능히 벗어나지 못하나니 학자가 이에 빠짐도 또한 이와 같음.
●月上女; 곧 인도 비야리성(毘耶離城)의 장자 비마라힐(毘摩羅詰)의 딸이니 이름이 월상임. 처음 출생한 지 오래지 않아 홀연히 커져서 8세와 같았음. 자용(姿容)이 단려(端麗)하여 성중에서 구혼자가 많았는데 월상녀가 곧 고하기를 7일 후에 마땅히 스스로 그 사람을 선택하겠다. 기일에 이르자 월상녀가 허공 중에 올라 게를 설했고 대중이 게를 듣자 탐욕을 그쳤음. 그 후 월상녀가 사리불을 만나 아울러 함께 선후로 불타의 처소에 이르러 사리불 등과 깊은 뜻을 대천(對闡)했음 [월상녀경상].
●菩提; <범> bodhi. 구역은 도(道)라 했고 신역은 각(覺)이라 했음. 도란 것은 통(通)의 뜻이며 각이란 것은 각오의 뜻임. 그러나 소통소각(所通所覺)의 경계는 사리(事理)의 2법이 있음. 리(理)란 것은 열반이니 번뇌장(煩惱障)을 끊고 열반을 증득하는 일체지(一切智)며 이는 3승(乘)의 보리에 통함. 사(事)란 것은 일체 유위의 제법이니 소지장(所知障)을 끊고 제법을 아는 일체종지(一切種智)며 이는 오직 불타의 보리임. 이 둘에 통하는 것인지라 고로 이를 일러 대보리(大菩提)라 함 [지도론4. 주유마경4].
●鐵磨; 유철마(劉鐵磨)니 당대 니사(尼師). 속성은 유(劉)며 기봉이 준초(峻峭; 높고 깎아지른 듯함)한 고로 세칭이 유철마(劉鐵磨)임. 담주(潭州) 위산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한 작은 암자를 엮고 위산영우에게 참문했음 [전등록10. 연등회요7].
나호야록 주문제본
2025년 仲秋 번역필. 합 660쪽. 本註補註 合計 1,320 目. 미출간. 원문과 출처가 분명한 한문 주석을 넣고 다시 전체를 한글 번역. 주문 요청이 있을 시 인쇄소 에 부탁해 5일 내에 복사 제본해 발송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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