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주원각경

어주원각경(御註圓覺經)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태화당 2025. 10. 19. 08:46

御註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上             底本 卍新續藏 第10

                                                                       大唐罽賓沙門佛陀多羅譯

大方廣者 無量無邊之廣也 蓋圓覺性體 周徧法界 如大方之廣故也 圓者圓滿具足 覺者虛明靈照 修多羅者 按諸註疏 乃總指諸經之辭 了義經者 贊此一經 是究竟了達之義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全一卷 略稱圓覺修多羅了義經 圓覺經 唐代佛陀多羅譯 凡十二章 佛爲文殊師利等十二菩薩說大圓覺之妙理 開元釋敎錄九曰 沙門佛陀多羅 唐云覺救 北印度罽賓人也 於東都白馬寺譯圓覺了義經一部 此經近出不委何年 且弘道爲懷務甄詐妄 但眞詮不謬 豈假具知年月耶

法界; 此指全部世界 一切事物

究竟; 一事理道法至極高深之處 終極永恒的眞理 二畢竟 此指一

 

대방광(大方廣)이란 것은 무량무변의 광(廣)이다. 대개(大蓋) 원각(圓覺)의 성체(性體)는 법계(法界)에 주편(周徧)함이 대방(大方)의 광(廣)과 같은 연고이다. 원(圓)이란 것은 원만히 구족(具足)함이며 각(覺)이란 것은 허명(虛明)하게 영조(靈照)함이며 수다라(修多羅)란 것은 여러 주소(註疏)를 안험(按驗)컨대 곧(乃) 제경(諸經)을 총지(總指)하는 사(辭)다. 요의경(了義經)이란 것은 이 일경(一經)은 이 구경(究竟)의 요달(了達)의 뜻임을 찬(贊)함이다.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모두 1권이며 약칭(略稱)이 원각수다라요의경(圓覺修多羅了義經)ㆍ원각경임. 당대(唐代) 불타다라(佛陀多羅)가 번역했고 무릇 12(). 부처가 문수사리(文殊師利) 12보살을 위해 대원각(大圓覺)의 묘리(妙理)를 설했음. 개원석교록9에 가로되 사문 불타다라는 당()에선 이르되 각구(覺救)니 북인도 계빈(罽賓) 사람이다. 동도(東都) 백마사(白馬寺)에서 원각요의경(圓覺了義經) 1부를 번역했다. 이 경은 최근에 나왔지만 어떤 해인지 알지 못한다. 또 홍도(弘道)를 품고 사망(詐妄)을 힘써 밝혔다. 단지 진전(眞詮)이라 그릇되지 않거늘 어찌 연월(年月)을 갖추어 앎을 빌리려 하는가.

法界; 여기에선 전부의 세계, 일체의 사물을 가리킴.

究竟; 1. 사리의 도법이 지극하고 고심(高深)한 곳. 종극의 영항(永恒)의 진리. 2. 필경. 여기에선 1을 가리킴.

 

如是我聞

阿難謂 如是經敎 親從

如是; 金剛般若經疏論纂要 如是者 智度論云 信成就也 佛法大海 信爲能入 智爲能度 信者言是事如是 不信者言是事不如是 又聖人說法但爲顯如 唯如爲是 故稱如是 大慧語錄十八 無盡居士這一箇人 不知幾百生中學般若來 今生如此得大受用 所註淸淨海眼經 說八成就 謂如是我聞一時佛在 云 理無不如之謂是 事無不是之謂如 自來不曾有人如此說

; 四十二章經解 佛者 梵語 具云佛陀 此翻覺者 謂自覺覺他覺行圓滿 自覺不同凡夫 覺他不同二乘 覺滿不同菩薩 卽是釋迦牟尼如來萬德慈尊 娑婆世界之敎主也

 

이와 같이(如是) 내가 들었다

아난이 이르되 이와 같은 경교(經敎)를 친히 불타(佛陀; )로 좇아 들었다.

如是; 금강반야경소론찬요. 여시(如是)란 것은 지도론에 이르되 신()을 성취함이다. 불법대해(佛法大海)에 신()이라야 능히 들어가고 지()라야 능히 제도(濟度)하나니 신자(信者)는 말하되 이 일이 이와 같다(如是) 하고 불신자(不信者)는 말하되 이 일이 이와 같지 않다(不如是) 한다. 또 성인의 설법은 다만 여()를 나타내기 위함이니 오직 여()라야 시()가 되는지라 고로 여시라고 일컫는다. 대혜어록18 무진거사(無盡居士)는 이 일개의 사람이다. 몇 백 생 중에 반야를 배워 와서 금생에 이와 같이 대수용(大受用)을 얻는지 알지 못한다. 청정해안경(淸淨海眼經)을 주()한 바에 8성취를 설했는데 이르자면 여시아문일시불재(如是我聞一時佛在). 이르되 이()로는 여()가 아님이 없음을 일러 시()라 하고 사()로는 시()가 아님이 없음을 일러 여()라 한다. 자래(自來; 종래. 원래)로 일찍이 이와 같이 설한 사람이 있지 않았다.

; 사십이장경해. ()이란 범어다. 갖추어 이르면 불타(佛陀; buddha)니 여기에선 각자(覺者)로 번역한다. 이르자면 자각(自覺)하고 각타(覺他)하여 각행(覺行)이 원만함이다. 자각(自覺)은 범부와 같지 않음이며 각타(覺他)2()과 같지 않음이며 각만(覺滿)은 보살과 같지 않음이다. 곧 이 석가모니여래니 만덕(萬德)의 자존(慈尊)이며 사바세계의 교주다.

 

一時

佛說此經之時

 

일시(一時)

불타가 이 경을 설할 때다.

 

婆伽婆

藏經曰佛之異稱

 

바가바(婆伽婆; bhagavat)

장경(藏經)에 가로되 불(佛)의 이칭(異稱)이다.

 

入於神通大光明藏

佛入大定中 神通光明無窮無盡 故名曰藏

 

신통(神通)의 대광명장(大光明藏)에 드시어

불타가 대정(大定) 중에 들어 신통의 광명(神通光明)이 무궁무진(無窮無盡)한지라 고로 이름해 가로되 장(藏)이다.

 

三昧正受

三昧者 正定中自得之妙 正受者 不受諸受 名爲正受

三昧; 翻譯名義集四 三昧 此云調直定 又云正定 亦云正受 圭峰疏云 不受諸受 名爲正受

 

삼매(三昧)에서 정수(正受)하여

삼매란 것은 정정(正定) 중에 자득(自得)한 묘(自得)며 정수(正受)란 것은 제수(諸受)를 불수(不受)하므로 이름하여 정수(正受)다.

三昧; 번역명의집4. 삼매(三昧) 여기에선 이르되 조직정(調直定)이며 또 이르되 정정(正定)이며 또는 이르되 정수(正受). 규봉소(圭峯疏)에 이르되 모든 수()를 받지 않으므로 정수(正受)라고 이름한다.

 

一切如來

金剛經曰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일체 여래와

금강경에 가로되 여래(如來)란 것은 좇아 오는 바도 없고 또한 가는 바도 없는지라 고로 이름이 여래다.

 

光嚴住持

光嚴者 光明莊嚴也 住者常住不住 持者受持無失

 

광엄(光嚴)으로 주지(住持)하시니

광엄(光嚴)이란 것은 광명의 장엄(莊嚴)이다. 주(住)란 것은 부주(不住)에 상주(常住)함이며 지(持)란 것은 수지(受持)하여 잃지 않음이다.

 

是諸衆生淸淨覺地

佛與衆生 本同一性故 諸佛光嚴住持處 卽衆生淨覺心地

心地; 心爲萬法之本 能生一切諸法 故曰心地 又修行者依心而近行 故曰心地 又三業中 心業最勝 故曰心地

 

이는 모든 중생의 청정한 각지(覺地)니라.

불타와 중생이 본래 동일한 성(性)인 연고이다. 제불이 광엄(光嚴)으로 주지(住持)하는 곳이 곧 중생의 정각(淨覺)의 심지(心地)다.

心地; 심은 만법의 근본이며 능히 일체의 제법을 내는지라 고로 가로되 심지(心地). 또 수행자가 심에 의해 행에 접근하는지라 고로 가로되 심지며 또 3업 중에 심업이 가장 수승하므로 고로 가로되 심지임.

 

身心寂滅平等本際

旣證寂滅 聖凡體同 方見本來眞際 了無差等

本際; 指根本究竟之邊際 眞理之根源 萬物之根本 又作眞際 實際

 

신심(身心)이 적멸(寂滅)인 평등한 본제(本際)

이미 적멸을 증(證)하여 성범(聖凡)의 체(體)가 같은지라 바야흐로 본래의 진제(眞際)를 보아 마침내(了) 차등(差等)이 없다.

本際; 근본구경(根本究竟)의 변제(邊際)ㆍ진리의 근원ㆍ만물의 근본을 가리킴. 또 진제(眞際)ㆍ실제(實際)로 지음.

 

圓滿十方

覺性圓滿 徧法界故

 

시방에 원만하여

각성(覺性)이 원만하여 법계에 두루한 연고이다.

 

不二隨順

雖順諸緣 覺性常一

 

불이(不二)를 수순(隨順)하고

비록 제연(諸緣)에 순(順)하나 각성(覺性)은 늘 하나이다.

 

於不二境現諸淨土

佛一性中 名不二境 以無著無染之法 接化衆生

 

불이경(不二境)에서 모든 정토(淨土)를 나타내셨으며

불타의 일성(一性) 가운데를 이름해 불이경(不二境)이며 무착무염(無著無染)의 법으로써 중생을 접화(接化)하였다.

 

與大菩薩摩訶薩十萬人俱

菩薩摩訶薩; 具名菩提薩埵摩訶薩埵 菩提薩埵作道衆生 新譯曰覺有情 摩訶薩埵作大衆生 新譯曰大有情 求道果之衆生 故云道衆生 求道果者通於聲聞緣覺 故爲簡別於彼 更曰大衆生也 又菩薩有中高下之諸位 但爲示地上之菩薩 更曰摩訶薩 [佛地論二 法華義疏一] 妙法蓮華經文句二上 氣類者 卽是菩薩摩訶薩也 若具存 應言菩提薩埵摩訶薩埵 什師嫌煩 略提埵二字

 

대보살마하살(大菩薩摩訶薩) 십만 인과 함께 하셨다.

菩薩摩訶薩; 갖춘 이름은 보리살타마하살타(菩提薩埵摩訶薩埵; bodhi-sattva mahā-sattva). 보리살타는 도중생(道衆生)으로 지으며 신역엔 가로되 각유정(覺有情). 마하살타는 대중생(大衆生)으로 지으며 신역엔 가로되 대유정(大有情)이니 도과(道果)를 구하는 중생이므로 고로 이르되 도중생이며 도과를 구하는 자는 성문과 연각에도 통하는지라 고로 그들과 간별(簡別)하여 다시 가로되 대중생임. 또 보살은 중고하(中高下)의 제위(諸位)가 있으므로 다만 지상(地上. 十地上)의 보살이 됨을 보이는지라 다시 가로되 마하살임 [불지론2. 법화의소1]. 묘법연화경문구2(妙法蓮華經文句二上). 기류(氣類)란 것은 곧 이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다. 만약 갖추어 둔다면 응당 말하되 보리살타마하살타(菩提薩埵摩訶薩埵). 집사(什師; 구마라집)가 번거로움을 싫어해 리타(提埵) 2자를 줄였다.

 

其名曰文殊師利菩薩 普賢菩薩 普眼菩薩 金剛藏菩薩 彌勒菩薩 淸淨慧菩薩 威德自在菩薩 辨音菩薩 淨諸業障菩薩 普覺菩薩 圓覺菩薩 賢善首菩薩等 而爲上首 與諸眷屬 皆入三昧 同住如來平等法會

上首; 一座大衆中之主位 稱爲上首 或擧其中一人爲上首 或擧多人爲上首

眷屬; 眷爲親愛 屬爲隸屬 指親近順從者

 

그 이름을 가로되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 보안보살(普眼菩薩),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 미륵보살(彌勒菩薩), 청정혜보살(淸淨慧菩薩), 위덕자재보살(威德自在菩薩), 변음보살(辨音菩薩), 정제업장보살(淨諸業障菩薩), 보각보살(普覺菩薩), 원각보살(圓覺菩薩), 현선수보살(賢善首菩薩等)이니 상수(上首)가 되었고 여러 권속(眷屬)과 더불어 모두 삼매에 들어 여래의 평등법회(平等法會)에 함께 머물렀다.

上首; 일좌(一座) 대중 중의 주위(主位)를 일컬어 상수라 함. 혹은 그 중의 한 사람을 천거해 상수로 삼기도 하고 혹 여러 사람을 천거해 상수로 삼기도 함.

眷屬; ()은 친애가 되며 속()은 예속이 됨. 친근하면서 순종하는 자를 가리킴.

 

於是文殊師利菩薩 在大衆中卽從座起 頂禮佛足右繞三匝 長跪叉手 而白佛言 大悲世尊 願爲此會諸來法衆 說於如來本起淸淨因地法行

本起者 佛從凡夫時最初所起之心 因地者 佛之初地 法行者 佛之妙行

頂禮; 卽兩膝兩肘及頭著地 以頭頂敬禮 承接所禮者雙足 向佛像行禮 舒二掌過額 承空以示接佛足 又作頭面禮足 頭面禮 其義同於五體投地 接足禮 及印度最上之敬禮 以我所高者爲頂 彼所卑者爲足 以我所尊 敬彼所卑者 卽禮之極 [首楞嚴經六 釋門歸敬儀下]

右繞; 又作右旋 右遶 卽向右方而旋繞也

長跪; 兩膝據地 兩脛上空 兩足指頭柱地 挺身而立 經文或曰胡跪 佛使丈夫互跪 使尼衆長跪 以女子體弱 長跪較互跪爲易也 [釋門歸敬儀下 寄歸傳一 釋氏要覽中]

叉手; 手掌相合 手指交叉表示心誠專一的敬禮動作

世尊; 金剛經解義上 慧能解云 世尊者 智慧超過三界 無有能及者 德高更無有上 一切咸恭敬 故曰世尊

法衆; 指信奉佛法 皈依三寶的佛敎信衆

 

이에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로 좇아 일어나 불족(佛足)에 정례(頂禮)하고 세 바퀴(三匝) 우요(右繞)하고 장궤(長跪)하여 차수(叉手)하고 불타에게 사뢰어 말하되 대비(大悲)하신 세존(世尊)이시여, 원컨대 차회(此會)의 모든 도래(到來; )한 법중(法衆)을 위해 여래의 본기(本起)의 청정한 인지(因地)의 법행(法行)을 설하시고

본기(本起)란 것은 불타가 범부였을 때로 좇아 최초에 일으킨 바의 마음이다. 인지(因地)란 것은 불타의 초지(初地)며 법행(法行)이란 것은 불타의 묘행(妙行)이다.

頂禮; 곧 두 무릎과 두 팔꿈치 및 머리를 땅에 붙여 두정(頭頂; 머리)으로 경례하면서 소례(所禮; 절을 받는)자의 두 발을 승접(承接). 불상을 향해 경례를 행하면 두 손바닥을 펴 이마를 지나야 하며 허공을 받들어 불족(佛足)을 접촉함을 보여야 함. 또 두면예족(頭面禮足)ㆍ두면례(頭面禮)로 짓나니 그 뜻은 오체투지(五體投地)ㆍ접족례(接足禮)와 같음. 그리고 인도(印度)의 최상의 경례임. 나의 높은 것은 머리가 되며 그의 낮은 것은 발이 되거니와 나의 존귀한 것으로써 그의 낮은 것에 경례를 함은 곧 경례의 지극함임 [수릉엄경6. 석문귀경의하].

右繞; 또 우선(右旋), 우요(右遶)로 지음. 곧 오른쪽 방향을 향해 선요(旋繞).

長跪; 두 무릎을 땅에 의거하고 두 정강이를 허공에 올리고 두 발가락을 땅에 버티고 몸을 곧게 세움이니 경문에서 혹 가로되 호궤(胡跪)라 함. 불타가 장부에겐 호궤(互跪)하게 하고 니중(尼衆)에겐 장궤(長跪)하게 했으니 여자는 몸이 약하며 장궤가 호궤에 비해 쉽기 때문임 [석문귀경의하. 기귀전1. 석씨요람중].

叉手; 손바닥을 서로 합치고 손가락을 교차하여 심성(心誠)이 전일(專一)한 경례의 동작을 표시.

世尊; 금강경해의상. 혜능이 해석해 이르되 세존(世尊)이란 것은 지혜가 3계를 초과하여 능히 미칠 자가 있지 않고 덕이 높아 다시 위가 있지 않으며 일체가 다 공경하는지라 고로 가로되 세존이다.

法衆; 불교를 신봉(信奉)하고 삼보에 귀의한 불교의 신중(信衆)을 가리킴.

 

及說菩薩於大乘中發淸淨心遠離諸病

諸病者諸幻也

 

및 보살이 대승(大乘) 중에서 청정심(淸淨心)을 발()하여 제병(諸病)을 원리(遠離)함을 설하시어

제병(諸病)이란 것은 제환(諸幻)이다.

 

能使未來末世衆生求大乘者不墮邪見 作是語已 五體投地 如是三請 終而復始

五體者 頭與四肢也 三請者 禮之至也

 

능히 미래의 말세(末世) 중생에 대승(大乘)을 구하는 자로 하여금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이 말을 지어 마치자 오체(五體)를 투지(投地)했다. 이와 같이 삼청(三請)하고는 마치자 다시 시작했다.

오체(五體)란 것은 머리와 사지(四肢)며 삼청(三請)이란 것은 예(禮)의 지극함이다.

 

爾時世尊告文殊師利菩薩言 善哉善哉 善男子 汝等乃能爲諸菩薩 咨詢如來因地法行 及爲末世一切衆生求大乘者 得正住持不墮邪見 汝今諦聽 當爲汝說 時文殊師利菩薩奉敎歡喜 及諸大衆默然而聽

善哉; 梵語娑度 此翻爲善哉 契合我意之稱歎語

諦聽; 卽從心中明白地聽聞佛法

 

이때 세존이 문수사리보살에게 고()해 말씀하시되 선재선재(善哉善哉)로다 선남자(善男子), 여등(汝等)이 이에 능히 제보살(諸菩薩)을 위해 여래의 인지(因地)의 법행(法行)을 자순(咨詢; 詢問)하고 및 말세의 일체중생에 대승을 구하는 자가 바르게 주지(住持)하여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않음을 얻게 하니 너는 이제 체청(諦聽)하라, 마땅히 너를 위해 설하리라. 때에 문수사리보살이 봉교(奉敎)하여 환희했고 및 모든 대중이 묵연(默然)히 들었다.

善哉; 범어 사도(娑度; sādhu)는 여기에선 번역해 선재니 나의 뜻에 계합함의 칭탄어(稱歎語).

諦聽; 곧 심중의 명백지(明白地)를 따라 불법을 청문(聽聞).

 

善男子 無上法王

佛之尊稱也 佛悟最上乘法 爲萬法之主 更無在其上者故也

最上乘; 至極之敎法也 諸宗各名其宗義

 

선남자여 무상(無上) 법왕(法王)

불타의 존칭(尊稱)이니 불타가 최상승법(最上乘法)을 깨쳐 만법지주(萬法之主)가 되어 다시 그 위에 있는 자가 없는 연고이다.

最上乘; 지극한 교법이니 제종(諸宗)이 각기 그 종의(宗義)를 이름함.

 

有大陀羅尼門 名爲圓覺

陀羅尼門者 藏經曰總持門也 今圓覺爲大陀羅尼門者 總攝八萬四千陀羅尼門故也

八萬四千; 乃數量極多之形容詞 略作八萬

 

대다라니문(大陀羅尼門)이 있으니 이름하여 원각(圓覺)이니라.

다라니문(陀羅尼門)이란 것은 장경(藏經)에 가로되 총지문(總持門)이다. 여금에 원각을 대다라니문이라고 하는 것은 팔만사천(八萬四千) 다라니문(陀羅尼門)을 총섭(總攝)하는 연고이다.

八萬四千; 곧 수량의 극다(極多)의 형용사(形容詞). 간략히 팔만(八萬)으로 지음.

 

流出一切淸淨眞如

眞空妙性如如不動者是也 裴休亦曰不妄不變故曰眞如

如如; 萬事萬物之眞實相平等無二 稱爲如如 金剛經註解三 如如者 得無所有境界 故維摩經云 如者不二不異 一切法亦如也 衆聖賢亦如也 至於彌勒亦如也 金剛經心印疏下 如如者 如於眞如也

 

일체(一切) 청정한 진여(眞如)

진공(眞空)의 묘성(妙性)이 여여(如如)하여 부동(不動)한 것이 이것이다. 배휴(裴休)가 또한 가로되 불망불변(不妄不變)인지라 고로 가로되 진여(眞如)다.

如如; 만사만물의 진실상이 평등하여 둘이 없음을 일컬어 여여라 함. 금강경주해3. 여여(如如)란 것은 무소유를 얻은 경계다. 고로 유마경에 이르되 여()란 것은 불이불이(不二不異)니 일체법도 또한 여()며 뭇 현성도 또한 여며 미륵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여다. 금강경심인소하. 여여란 것은 진여(眞如)에 여()함이다.

 

菩提

此翻覺也 六祖曰 前念著境卽煩惱 後念離境卽菩提 非覺而何

 

보리(菩提; bodhi)

여기에선 각(覺)으로 번역한다. 6조(祖)가 가로되 전념(前念)이 착경(著境)하면 곧 번뇌며 후념(後念)이 이경(離境)하면 곧 보리다 했으니 각(覺)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涅槃

此翻寂滅

 

열반(涅槃)

여기에선 적멸(寂滅)로 번역한다.

 

及波羅蜜

此云到彼岸 亦云事究竟

 

및 바라밀(波羅蜜)을 유출(流出)하여

여기에선 이르되 도피안(到彼岸; 피안에 이르다)이며 또한 이르되 사구경(事究竟; 사의 구경)이다.

 

敎授菩薩

佛指敎傳授諸菩薩故

 

보살을 교수(敎授)하나니

불타가 제보살에게 지교(指敎)하고 전수(傳授)하는 연고이다.

 

一切如來本起因地 皆依圓照淸淨覺

皆依者皆因也 圓照者圓明寂照 淸淨者一切無染 覺相者無相之相 傅大士曰 有身非覺體 無相乃眞形者是也

; 漢語大字典 相 佛敎名詞 對性而言 佛敎把一切事物外現的形象狀態 稱之爲相

 

일체 여래의 본기(本起)의 인지(因地)는 모두() 원조(圓照)의 청정한 각상()에 의()하여

개의(皆依)란 것은 개인(皆因)이다. 원조(圓照)란 것은 원명(圓明)과 적조(寂照)며 청정(淸淨)이란 것은 일체의 무염(無染)이며 각상(覺相)이란 것은 무상(無相)의 상(相)이다. 부대사(傅大士; 傅翕)가 가로되 유신(有身)은 각체(覺體)가 아니며 무상(無相)이 곧 진형(眞形)이라 한 것이 이것이다.

; 한어대자전 상() 불교의 명사(名詞)니 성()을 상대해 말함이다. 불교에선 일체의 사물과 밖으로 나타난 형상(形象)과 상태(狀態)를 잡아 이를 일컬어 상()이라 한다.

 

永斷無明 方成佛道

 

무명(無明)을 영단(永斷)하여 비로소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云何無明

衆生妄想迷失明悟眞覺之性 故曰無明

 

무엇을(云何) 무명(無明)이라 하는가

중생이 망상(妄想)으로 명오(明悟)한 진각지성(眞覺之性)을 미실(迷失)하는지라 고왈(故曰) 무명이다.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種種顚倒 猶如迷人四方易處

衆生自無始劫來 以妄爲眞 正如迷路之人 東西南北不知定處

 

선남자여 일체중생이 무시래(無始來)로 좇아 갖가지 전도(顚倒)됨이 마치 미인(迷人)이 사방(四方)을 역처(易處; 곳을 바꿈)함과 같이

중생이 무시겁래(無始劫來)로부터 망(妄)을 진(眞)으로 삼음이 바로(正) 미로지인(迷路之人)이 동서남북에 정처(定處)를 알지 못함과 같다.

 

妄認四大爲自身相

地水火風假合而成幻體 衆生顚倒認爲自身實相

 

4()를 망인(妄認)하여 자기의 신상(身相)으로 삼고

지수화풍(地水火風)이 가합(假合)하여 환체(幻體)를 이루거늘 중생이 전도(顚倒)되어 인정(認定; 認)해 자신(自身)의 실상(實相)으로 삼는다.

 

六塵緣影爲自心相

色聲香味觸法 六種塵緣之影 衆生顚倒 認爲自心實相

 

6()의 연영(緣影)으로 자기의 심상(心相)으로 삼나니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6종(種)의 진연(塵緣)의 그림자(影)를 중생이 전도되어 인정해 자심(自心)의 실상(實相)으로 삼는다.

 

譬如彼病目見空中華及第二月

妄認身相心相 譬如翳者妄見空華 揑目者妄見兩月

第二月; 與第一月相對 泛指似有非有之事物 猶如眼翳之人 望眞月時幻見二月 轉指分別妄心情見知解

 

비유컨대 저() 병목(病目)으로 공중의 꽃() 및 제2(第二月)을 봄과 같느니라.

신상(身相)과 심상(心相)을 망인(妄認)함이 비유컨대 예자(翳者; 翳眼인 자)가 공화(空華)를 망견(妄見; 허망하게 봄)하거나 날목자(揑目者; 눈동자를 누르고 비비는 자)가 양월(兩月)을 망견(妄見)함과 같다.

第二月; 1(第一月)과 상대됨. 널리 사유비유(似有非有)의 사물을 가리킴. 마치 안예(眼翳)의 사람이 진월(眞月)을 바라볼 때 2()을 헛 봄과 같음. ()하여 분별하는 망심(妄心)과 정견(情見)의 지해(知解)를 가리킴.

 

善男子 空實無華 病者妄執

本空 衆生妄認爲有 如空華本無 翳者妄執爲有也

; 指假相 一切事象皆無實體性 唯現出如幻之假相 卽幻相

 

선남자여 허공엔 실로 꽃이 없거늘 병자(病者)가 망집(妄執)하고

제환(諸)이 본래 공(空)했거늘 중생이 망인(妄認)하여 있음으로 삼음이 공화(空華)가 본래 없거늘 예자(翳者)가 망집(妄執)하여 있음으로 삼음과 같다.

; 가상(假相)을 가리킴. 일체의 사상(事象)은 모두 실체성이 없고 오직 여환(如幻)의 가상(假相)을 현출(現出)하나니 곧 환상(幻相).

 

由妄執故 非唯惑此虛空自性 亦復迷彼實華生處

衆生因妄執之故 不唯迷惑自己虛空之性 亦且不知彼之翳目實是空華生處也

 

망집(妄執)을 말미암는 연고로 오직 이 허공의 자성(自性)만 미혹(迷惑; )할 뿐 아니라 또한 다시 저() 실화(實華)의 생처(生處)도 미()하나니

중생이 이(之)를 망집(妄執)하기 때문인(因) 연고로 오직 자기의 허공지성(虛空之性)을 미혹할 뿐 아니라 역차(亦且; 또한) 저(彼) 예목(翳目)이 실로 이 공화(空華)의 생처(生處)인 줄 알지 못한다.

 

由此妄有輪轉生死 故名無明

因此種種顚倒 遂妄有輪轉生死也 本無輪轉生死 故曰妄有

 

이로 말미암아 허망하게() 생사에 윤전(輪轉)함이 있는지라() 고로 이름이 무명(無明)이니라.

이 갖가지 전도(顚倒)로 인해 드디어 허망하게(妄) 생사에 윤전(輪轉)함이 있거니와(有) 본래 생사에 윤전함이 없는지라 고로 가로되 망유(妄有)다.

 

善男子 此無明者 非實有體

無明因妄而起 非實有體相也

 

선남자여 이 무명(無明)이란 것은 실로 체()가 있지 않나니

무명이 망(妄)으로 인해 일어나므로 체상(體相)이 실유(實有)함이 아니다.

 

如夢中人夢時非無 及至於醒了無所得

此論衆生迷時 深以無明爲實 覺悟之後 方知無明是幻

 

몽중의 사람이 꿈꿀 때엔 없지 않다가 깸()에 이르러선(及至) 마침내() 소득(所得)이 없음과 같고

이것은 중생이 미시(迷時)엔 깊이 무명으로써 실(實)로 삼다가 각오(覺悟)한 후엔 비로소 무명이 이 환(幻)임을 아는 것을 논했다.

 

如衆空華滅於虛空 不可說言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無明之滅 如空華之滅 不可指說滅處者 蓋無明本無生處故也

 

예컨대(; 例擧를 표시) 뭇 공화(空華)가 허공에 멸(; 없어지다)하면 가히 꼭() 멸처(滅處)가 있다고 설언(說言)하지 못하나니 무슨 연고냐, 생처(生處)가 없는 연고이다.

무명(無明)의 멸(滅)은 공화(空華)의 멸과 같아서 가히 멸처(滅處)를 지설(指說)하지 못하는 것은 대개(大蓋; 蓋) 무명은 본래 생처(生處)가 없는 연고이다.

 

一切衆生於無生中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衆生妄見幻身有生滅相 故佛說名輪轉生死 說名者非實有也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무생(無生) 중에서 생멸(生滅)을 망견(妄見)하나니 이런 고로 생사에 윤전(輪轉)한다고 설명(說名)하느니라.

중생이 환신(幻身)에 생멸상(生滅相)이 있다고 망견(妄見)하는지라 고로 불타가 생사에 윤전한다고 설명(說名)했다. 설명(說名)이란 것은 실유(實有)가 아님이다.

 

善男子 如來因地修圓覺者 知是空華卽無輪轉

初修圓覺者 知生滅相 如彼空華 生滅頓空 卽無輪轉

 

선남자여 여래가 인지(因地)에서 원각(圓覺)을 닦았다는 것은 이 공화(空華)인 줄 안지라 곧 윤전(輪轉)이 없음이며

처음 원각을 닦는 자는 생멸상(生滅相)이 저(彼) 공화와 같은 줄 아는 것이다. 생멸이 돈공(頓空)하니 곧 윤전(輪轉)이 없다.

 

亦無身心受彼生死

旣無輪轉 身心亦空 身心旣空 生死安寄

 

또한 신심(身心)이 저 생사를 받음이 없나니

이미 윤전(輪轉)이 없으므로 신심(身心)도 또한 공(空)했으며 신심이 이미 공했거늘 생사를 어디에(安) 기탁(寄託; 寄)하겠는가.

 

非作故無 本性無故

非作爲然後無 性本淸淨無故

 

작위(作爲; )하는 고로 없음이 아니라 본성(本性)에 없는 연고니라.

작위(作爲)한 연후에 없음이 아니라 성(性)이 본래 청정하여 없는 연고이다.

 

彼知覺者 猶如虛空

覺上起知 所覺亦妄 如彼虛空了非佛性

 

() 지각(知覺)하는 자는 마치 허공과 같고

각상(覺上; 상은 방면을 표시)에 지(知)를 일으키니 소각(所覺)도 또한 망(妄)이며 저 허공과 같아서 마침내(了) 불성(佛性)이 아니다.

 

知虛空者 卽空華相

心執頑空 還歸色相

頑空; 又稱太虛空 虛空 偏空

 

허공을 아는 자는 곧 공화상(空華相)이지만

마음이 완공(頑空)을 집착하면 색상(色相)으로 환귀(還歸)한다.

頑空; 또 태허공(太虛空)ㆍ허공ㆍ편공(偏空)으로 지음.

 

亦不可說無知覺性

不起斷滅之念

斷滅; 又作斷見 二見之一 爲常見之對稱 卽偏執世間及我終歸斷滅之邪見

 

또한 가히 지각성(知覺性)이 없다고 설하지 못하나니

단멸지념(斷滅之念)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斷滅; 또 단견(斷見)으로 지음. 2견의 하나. 상견(常見)의 대칭이 됨. 곧 세간 및 아()가 마침내 단멸로 돌아간다고 편집(偏執)하는 삿된 견해임.

 

有無俱遣 是則名爲淨覺隨順

有知無知一無所著 故曰有無俱遣 淨覺隨順者 覺性淸淨 不立我相 故能隨順一切 無所迷執 如孔子之絕四是也

孔子之絕四; 毋意(不憑空臆測) 毋必(不獨斷絕對) 毋固(不拘泥固執) 毋我(不以自我爲中心) [論語子罕]

 

유무(有無)를 모두 보내어야 이것을 곧 이름하여 정각(淨覺)이 수순(隨順)함이니라.

유지무지(有知無知)에 하나도 집착하는 바가 없는지라 고로 가로되 유무를 모두 보낸다. 정각(淨覺)이 수순(隨順)한다는 것은 각성(覺性)이 청정하여 아상(我相)을 세우지 않는지라 고로 능히 일체에 수순(隨順)하되 미집(迷執)하는 바가 없다. 예컨대(如) 공자의 절사(孔子之絕四)가 이것이다.

孔子之絕四; 무의(毋意; 공연한 억측에 依憑하지 않음)ㆍ무필(毋必; 獨斷하거나 絕對하지 않음)ㆍ무고(毋固; 고집에 拘泥되지 않음)ㆍ무아(毋我; 自我를 중심으로 삼지 않음) [논어자한]

 

何以故 虛空性故 常不動故

蓋由性如虛空 常不動念之故

 

무슨 연고냐, 허공성(虛空性)인 연고며 늘 부동(不動)하는 연고며

대개 성(性)이 허공과 같음으로 말미암아 늘 동념(動念)하지 않는 연고이다.

 

如來藏中無起滅故 無知見故

如來藏中 卽淨覺性中也 淨覺性中 本無生滅相 本不立知見故也

如來藏; 眞如在煩惱中 謂之如來藏 眞如出煩惱 謂之法身 入楞伽經一 寂滅者 名爲一心 一心者 名爲如來藏

 

여래장(如來藏) 가운데엔 기멸(起滅)이 없는 연고며 지견(知見)이 없는 연고며

여래장 가운데란 곧 정각성(淨覺性) 가운데다. 정각성 가운데엔 본래 기멸상(生滅相)이 없고 본래 지견을 세우지 않는 연고이다.

如來藏; 진여가 번뇌 속에 있으면 이를 일러 여래장이며 진여가 번뇌에서 나오면 이를 일러 법신임. 입릉가경1. 적멸이란 것은 이름해 일심이며 일심이란 것은 이름해 여래장이다.

 

如法界性

圓覺性體 如法界之廣 故曰如法界性也

 

법계성(法界性)과 같으며

원각의 성체(性體)가 법계의 광(廣)과 같은지라 고로 가로되 법계성과 같다.

 

究竟圓滿徧十方故

衆德具足 無有邊際

 

구경(究竟)에 원만(圓滿)하여 시방에 두루한 연고니라.

중덕(衆德)을 구족하여 변제(邊際)가 있지 않다.

 

是則名爲因地法行 菩薩因此 於大乘中發淸淨心 末世衆生依此修行 不墮邪見

 

이를 곧 이름하여 인지(因地)의 법행(法行)이니 보살이 이로 인해 대승(大乘) 중에서 청정심(淸淨心)을 발()하고 말세 중생이 이에 의해 수행하여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爾時世尊欲重宣此義而說偈言

 

이때 세존이 이 뜻을 중선(重宣; 거듭 宣示)하고자 하여 게(; 梵語偈陀)를 설해 말씀하시되

 

文殊汝當知 一切諸如來

從於本因地 皆以智慧覺

 

문수(文殊) 너는 당지(當知)할지니/ 일체(一切)의 모든 여래가/ 본래의 인지(因地)로 좇아/ 모두 지혜로써 깨치느니라.

 

了達於無明 知彼如空華

卽能免流轉 又如夢中人

醒時不可得

 

무명(無明)을 요달(了達)하여/ 그것이 공화(空華)와 같은 줄 알아서/ 곧 능히 유전(流轉)을 면하며/ 또 몽중(夢中)의 사람이/ () 때 불가득임과 같느니라.

 

覺者如虛空 平等不動轉

覺徧十方界 卽得成佛道

衆幻滅無處

 

각자(覺者)는 허공과 같아/ 평등하여 동전(動轉)하지 않으며/ ()이 시방계(十方界)에 두루하여/ 곧 불도(佛道) 이룸을 얻나니/ 중환(衆幻)이 멸(; 없어지다)하여 처소가 없느니라.

 

成道亦無得 本性圓滿故

 

성도(成道)도 또한 얻음이 없나니/ 본성이 원만한 연고이니라.

 

菩薩於此中 能發菩提心

末世諸衆生 修此免邪見

 

보살이 이 가운데에서/ 능히 보리심을 발하고/ 말세의 모든 중생도/ 이를 닦아 사견(邪見)을 면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