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림성사

총림성사권상(叢林盛事卷上) 차암인(且菴仁)

태화당 2026. 1. 30. 07:44

且菴仁和尙 越之上虞人 少習天台敎 初自括蒼隨雪堂過衢之烏巨 因見雪堂普說曰 今之兄弟做工夫 正如習射 先安其足 從習其法 後雖無心 以久習故 箭發皆中 喝一喝 云 卽今箭發也 看看 仁不覺身倒作避箭勢 豁然大悟 夏罷 以母老歸鄕 辭雪堂 堂以偈送之曰 儼老昔年窮事 脫履南游扣宗匠 石頭路滑不辭勤 腦後一槌曾兩當 仁禪勁志許誰儔 訪我蒼山白練州 萬浪千波洶涌處 果然呼喚不回頭 西山積老期同住 又說重尋越山路 歸時應是歲華深 趙州更有爐頭句 仁從是歸梅山 菴十六年 後天童覺和尙出隊至上虞 夜宿其菴 連榻與語 大奇之 旣歸 夏末不請首座 主事白覺 覺云 我首座早晚來也 乃遣侍者往越邀仁 仁纔至 卽請歸首座寮 衆訝之 未幾 令秉拂挂牌 衆服膺 後二年 宏智入滅 玅喜主後事 兩班皆衣布 唯仁不肯成服 喜怪問之 仁乃密啓其事 玅喜曰 元來是見雪堂來 後住長蘆 法席大振 甞頌臺山婆子話 學者爭誦之 曰 開箇燈心皁角鋪 日求升合度朝昏 只因霖雨連綿久 本利一空愁倚門 顯謨呂公正己 甞問道於師 旣別 覔偈 師援筆贈曰 君今親切到長蘆 抖擻衣衫一物無 此去逢人如借問 但言風急浪華麤

且菴仁; 守仁(?-1183) 宋代楊岐派僧 字且庵 上虞(今屬浙江)莊氏 受具於等慈寺妙晞 初習南山律 未幾 遍謁禪林 得法於烏巨道行 出世七住名山 道譽甚高 晩住眞州長蘆 有且庵語錄 [乾隆紹興府志六十九 普燈錄二十 五燈會元二十]

普說; 禪家之說法也 禪師上法堂升法座 爲大衆說法 稱爲普說

儼老; 指惟儼(751-834) 唐代僧 絳州(今山西新絳)人 俗姓韓 十七歲依潮陽(廣東)西山慧照出家 大曆八年(773) 就衡山希澡受具足戒 博通經論 嚴持戒律 後參石頭希遷 密領玄旨 次參馬祖道一 言下契悟 奉侍三年 後復還石頭 爲其法嗣 不久 至澧州藥山 廣開法筵 唐太和八年(834)示寂 壽八十四 一說太和二年十二月示寂 壽七十 敕諡弘道大師 [宋高僧傳十七 祖堂集四 傳燈錄十四 傳法正宗記七]

; 漢語大字典 相 佛敎名詞 對性而言 佛敎把一切事物外現的形象狀態 稱之爲相

石頭; 希遷 (700-790) 唐代僧 又稱無際大師 端州高要(廣東高要)人 俗姓陳 曾禮六祖慧能 靑原行思爲師 得靑原行思之印可 天寶(742-755)初年 居衡山南寺 寺之東有石狀如臺 乃結庵其上 時號石頭和尙 時江西以馬祖爲主 湖南以石頭爲主 四方學徒多輻湊於二師之門 唐貞元六年十二月示寂 壽九十一 臘六十三 諡無際大師 著有參同契 草庵歌各一篇行世 [宋高僧傳九 傳燈錄十四 五燈會元五]

趙州更有爐頭句; 祖庭事苑一 趙州無賓主 趙州垂語云 我三十年前 在南方火爐頭 有一則無賓主話 擧似諸人 雪峰聞擧 云 當時便好與一踏 趙州; 從諗(778-897) 唐代僧 曹州郝鄕(一說靑州臨淄)人 俗姓郝 法號從諗 幼年於曹州扈通院(一說靑州龍興院)出家 受具足戒前 卽往池陽參南泉普願 南泉深器之 復往嵩山琉璃壇受戒 尋返南泉 依止二十年 其後 歷參黃檗 寶壽 鹽官 夾山 五臺等諸大德 八十歲時 衆請住趙州城東觀音院 四十年間 大揚禪風 師夙居北地 振南宗禪 其玄言法語遍布天下 世稱趙州古佛 昭宗乾寧四年示寂 壽一百二十 敕諡眞際大師 著有眞際大師語錄三卷 [傳燈錄十 宋高僧傳十一 聯燈會要六 五燈會元四 佛祖歷代通載十七]

天童覺; 正覺(1091-1157) 宋代曹洞宗僧 俗姓李 字宏智 隰州(今山西隰縣)人 少習儒業 通五經 十一歲出家 十四歲于慈雲寺受具足戒 十八歲出遊參訪 遍接巨匠 一日聞僧誦法華經 至父母所生眼 悉見三千界處 豁然有省 二十三歲時 聞丹霞子淳道譽 遂往參禮咨詢 言下大悟 嗣其法 宣和二年(1120) 丹霞遷住大洪寺 亦相隨掌理箋記 次年昇首座 又于圓通寺照闡提席下任分座 又應長蘆寺眞歇之請而住寺開法 當時有衆一千七百 見其秉拂提唱 皆嘆服 六年後 轉至普照寺弘法 建炎元年(1127) 移住舒州(今安徽潛山)太平寺 又轉江州(今江西九江)圓通 能仁寺 建炎三年(1129) 住持浙江四明天童山天童寺 先後近三十年 嚴飾淸規 擧揚宗風 提倡坐禪 弘揚默照禪風 世稱正覺爲天童和尙 譽爲天童中興之祖 卒諡宏智禪師 著有天童百則頌古 宏智廣錄九卷 宏智覺禪師語錄四卷 [佛祖歷代通載三十 續傳燈錄十七 五燈會元十四]

出隊; 又作出鄕 指住持離大衆之隊 出發向遠方有緣之地 勸募財糧 亦卽托鉢 住持出隊歸寺後之上堂說法 或出隊之際所行之上堂說法 皆稱爲出隊上堂 [象器箋雜行類]

連榻; 並榻 多形容關系密切

主事; 指主行事務者 禪院職事之別稱 禪苑淸規初以監寺 維那 典座 直歲等四職爲主事 以後之淸規加都寺 副寺 稱爲六知事 [禪苑淸規十 釋氏要覽下]

秉拂; 一寺之首座代住持秉拂子 上法座開示大衆者也 凡前堂首座 後堂首座 東藏主 西藏主 書記 稱秉拂之五頭首 爲各有秉拂之資格者 又秉拂者之侍者 稱爲秉拂侍者 [百丈淸規七 象器箋職位類]

服膺; 銘記在心 衷心信奉 禪關策進註 中庸曰 子曰 回之爲人也 擇於中庸 得一善則眷眷服膺 而弗失之矣 註 服 猶著也 膺 胸 奉持而

入滅; 入滅度 入寂滅之略稱 又云入涅槃 取滅度 示寂等 此語非但指佛陀之入滅 高僧聖者之死 亦稱入滅

兩班; 又曰兩序 朝廷之制有文武兩班 禪林擬之於住持之下設東西兩班 長於學德者歸西序 謂之頭首 通於世法者歸東序 謂之知事 東序以都寺 監寺 副寺 維那 典座 直歲爲次第 西序以首座 書記 知藏 知客 知浴 知殿爲次第 由於宗派而略有不同 敕修淸規有兩班圖 [百丈淸規四兩序章 象器箋職位類 叢林校定淸規總要]

成服; 舊俗喪禮中死者的親屬穿上喪服叫做成服

臺山婆子; 聯燈會要六趙州 臺山下有婆子 凡有僧問 臺山路向甚麽處去 便云 驀直去 僧纔行 婆云 好箇師僧又恁麽去 每每如斯 僧擧似師 師云 待我與汝勘過 明日便去 亦如是問 婆亦如是答 師歸謂衆云 婆子 我爲汝勘破了也

燈心皁角; 賣燈心角之類 零碎日用品的小店鋪 比喩禪家師匠能根據學人不同器質 采取不同的接引措施 莢樹的果實 可去汚垢 乃洗滌用品

顯謨; 顯謨閣 宋代所建 又指顯謨閣學士

抖擻; 梵語頭陀 杜多 譯曰抖擻 抖揀 洮汰 浣洗等 謂抖擻衣服飮食住處三種貪著之行法也

借問; 敬辭 用於向別人詢問事情

 

차암인(且菴仁; 守仁) 화상은 월(; 越州)의 상우(上虞) 사람이다. 소년(少年; )에 천태교(天台敎)를 학습했다. 처음 괄창(括蒼)으로부터 설당(雪堂; 道行)을 따라 구(; 衢州)의 오거(烏巨; 오거산)에 이르렀다(). 인하여 설당(雪堂)의 보설(普說)을 보았으니 가로되 지금의 형제가 공부(工夫)를 짓는 것은 바로() 습사(習射; 射術을 익힘)와 같다. 먼저 그 발을 안정(安定; )하고 그 법을 익힘을 좇는다. 후에 비록 무심(無心)하더라도 구습(久習)을 쓰는() 연고로 화살을 발사(發射; )하면 모두 적중(的中; )한다. ()로 한 번 할하고 이르되 즉금 화살을 발사했다. 보아라, 보아라. ()이 불각(不覺)에 몸이 넘어지며 피전(避箭)하는 자세를 짓다가 활연(豁然)히 대오했다. 하파(夏罷; 夏安居를 마침)하자 모친이 노쇠(老衰; )했기 때문에 귀향(歸鄕)했다. 설당(雪堂)에게 고별하자() ()이 게()로써 그()를 전송(餞送; )해 가로되 엄로(儼老; 惟儼)가 석년(昔年)에 사상()을 궁구하려고/ 신발 벗고 남유(南游)하며 종장(宗匠; 禪宗大師)에게 물었다()/ 석두로(石頭)가 미끄러워도 근고(勤苦; )를 사양(辭讓; )하지 않았나니/ 뇌후(腦後)의 일추(一槌)가 일찍이 양당(兩當; 둘을 당하다)하였다/ 인선(仁禪; 守仁)의 경지(勁志)를 누가 짝함()을 허락하느냐/ 나를 창산(蒼山) 백련주(白練州)로 방문했다/ 만랑천파(萬浪千波)가 흉용(洶涌; 용솟음치다)하는 곳에/ 과연 호환(呼喚)해도 회두(回頭)하지 않는구나/ 서산(西山)의 적로(積老)가 동주(同住)를 기약(期約; )했고/ 또 말하되 월산로(越山路)를 거듭 찾았다(重尋)/ 돌아올 때 응당 이 세화(歲華; 歲月)가 깊나니/ 조주가 다시 노두구가 있다(趙州更有爐頭句). ()이 이로 좇아 매산(梅山)으로 돌아갔고 암거(菴居; )하기 16년이었다. 후에 천동각(天童覺; 正覺) 화상이 출대(出隊)하여 상우(上虞)에 이르렀다. 그 암자에서 야숙(夜宿)하며 연탑(連榻)하고 더불어 말했는데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이미 돌아가서는 하말(夏末)에 수좌(首座)를 청하지 않았다. 주사(主事)가 각()에게 사뢰자 각운(覺云) 나의 수좌가 조만(早晚; 早晩間)에 온다. 이에 시자를 보내 월()에 가서 인()을 맞이하게() 했다. ()이 겨우 이르자 곧 수좌료(首座寮)로 돌아가기를 청했고 대중이 이()를 의아(疑訝; )했다. 오래지 않아 병불(秉拂)하게 하고 괘패(挂牌)했는데 대중이 복응(服膺)했다. 2년 후에 굉지(宏智)가 입멸(入滅)했고 묘희(玅喜)가 후사(後事)를 주재(主宰; )했다. 양반(兩班)이 모두 의포(衣布; 喪服을 입음)했는데 오직 인()만 성복(成服)을 긍정하지 않았다. ()가 괴이히 여겨 이()를 묻자 인이 이에 몰래 그 일을 여쭈었다(). 묘희가 가로되 원래 이는 설당(雪堂)을 참견(參見; )하고 왔구나. 후에 장로(長蘆)에 주()했는데 법석(法席)을 대진(大振)했다. 일찍이 대산파자화(臺山婆子)를 송()했는데 학자들이 그것()을 쟁송(爭誦)했다. 가로되 저() 등심조각포(燈心皁角鋪)를 열어/ 날마다 승합(升合; 한 되와 한 홉)을 구하며 조혼(朝昏; 朝夕)을 지냈다/ 다만 임우(霖雨; 장마)가 연면(連綿)함이 오램으로 인해/ 본리(本利; 본전과 이자)가 일공(一空; 일제히 비다)해 근심스럽게 의문(倚門)했다. 현모(顯謨) 여공(呂公) 정기(正己)가 일찍이 스님에게 문도(問道)했다. 이미 헤어지매 게()를 찾자 스님이 붓을 당겨() 증정(贈呈; )해 가로되 그대가 지금 친절하게 장로(長蘆)에 이르렀으나/ 의삼(衣衫)을 두수(抖擻; 털어버리다)하여 일물(一物)도 없다/ 여기를 떠나(此去) 봉인(逢人)하여 차문(借問)할 것 같으면/ 단지 바람이 급해 낭화(浪華; 浪花)가 거칠다고() 말하시오.

且菴仁; 수인(守仁; ?-1183)이니 송대 양기파승. 자는 차암(且庵)이며 상우(지금 절강에 속함) 장씨. 등자사 묘희에게서 수구(受具)했고 처음엔 남산율을 학습했음. 오래지 않아 총림을 두루 참알했고 오거도행(烏巨道行)에게서 득법했음. 출세하여 명산을 7()했고 도예(道譽)가 심히 높았음. 만년에 진주 장로에 거주했고 차암어록이 있음 [건륭소흥부지69. 보등록20. 오등회원20].

普說; 선가의 설법임. 선사가 법당에 올라가 법좌에 올라 대중을 위해 설법함을 일컬어 보설이라 함.

儼老; 유엄(惟儼; 751-834)을 가리킴. 당대승. 강주(지금의 산서 신강)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한(). 17세에 조양(광동) 서산의 혜조(慧照)에게 의지해 출가했음. 대력 8(773) 형산(衡山)의 희조에게 나아가 구족계를 받았으며 경론을 널리 통달했고 계율을 엄히 가졌음. 후에 석두희천(石頭希遷)을 참알(參謁)해 몰래 현지(玄旨)를 영오(領悟)했음. 다음으로 마조도일(馬祖道一)을 참알해 언하에 계합(契合)해 깨쳤고 3년 동안 받들어 모시다가 뒤에 다시 석두로 돌아와 그의 법사(法嗣)가 되었음. 오래지 않아 예주(澧州)의 약산(藥山)에 이르러 법연(法筵)을 널리 열었음. 당 태화 8(834)애 시적했으니 나이는 84이며 일설엔 태화 212월에 시적했으니 나이가 70이라 함. 칙시(敕諡)가 홍도대사(弘道大師). [송고승전17. 조당집4. 전등록14. 전법정종기7].

; 한어대자전. () 불교의 명사(名詞)니 성()을 상대해 말함이다. 불교에선 일체의 사물과 밖으로 나타난 형상(形象)과 상태(狀態)를 잡아 이를 일컬어 상()이라 한다.

石頭; 희천(希遷; 700-790)이니 당대승. 또 호칭이 무제대사(無際大師). 단주(端州) 고요(高要; 광동 고요) 사람이며 속성(俗姓)은 진(). 일찍이 6조 혜능을 참례했고 청원행사(靑原行思)를 스승으로 삼아 청원행사의 인가(印可)를 얻었음. 천보(天寶; 742-755) 초년(初年)에 형산(衡山)의 남사(南寺)에 거주했는데 사원의 동쪽에 암석이 있어 형상(形狀)이 돈대()와 같았으며 이에 암자를 그 위에 엮은지라 당시에 호하기를 석두화상(石頭和尙)이라 했음. 당시(當時)에 강서(江西)는 마조(馬祖)를 주체(主體)로 삼았고 호남(湖南)에선 석두(石頭)를 주체로 삼았는데 사방의 학도(學徒)가 많이 두 스님의 문으로 복주(輻湊)하였음. 당 정원(貞元) 612월에 시적(示寂)했으니 나이는 91이며 승랍은 63. 시호(諡號)가 무제대사(無際大師)며 저서에 참동계(參同契)ㆍ초암가(草庵歌) 1()이 있어 세상에 행함 [송고승전9. 전등록14. 오등회원5].

趙州更有爐頭句; 조정사원1. 조주무빈주(趙州無賓主) 조주가 수어(垂語)하여 이르되 내가 30년 전 남방의 화로두(火爐頭; 는 조사)에 있으면서 1칙의 무빈주화가 있었는데 제인에게 거사(擧似; 는 줄 사)한다. 설봉이 거()를 듣고 이르되 당시에 곧 좋이 한 번 밟아 주었겠다. 趙州; 종심(從諗; 778-897)이니 당대승. 조주(曹州) 학향(郝鄕; 일설엔 청주 임치) 사람이니 속성(俗姓)은 학()이며 법호(法號)는 종심(從諗). 어린 나이에 조주(曹州) 호통원(扈通院; 일설엔 靑州 龍興院)에서 출가하였음. 구족계를 받기 전에 곧 지양(池陽)으로 가서 남천보원(南泉普願)을 참알(參謁)했으며 남천이 깊이 그를 법기(法器)로 여겼음. 다시 숭산(嵩山) 유리단(琉璃壇)으로 가서 수계하고는 이윽고 남천으로 돌아와 의지하기가 20년이었음. 그 후 황벽(黃檗)ㆍ보수(寶壽)ㆍ염관(鹽官)ㆍ협산(夾山)ㆍ오대(五臺) 등의 여러 대덕을 역참(歷參; 다니면서 참알)하였음. 80세 때 대중이 청하여 조주성(趙州城) 동쪽의 관음원(觀音院)에 거주했는데 40년 간 선풍(禪風)을 크게 드날렸음. 스님이 일찍 북지(北地)에 거주하면서 남종선(南宗禪)을 진작(振作)하였으며 그 현언(玄言)과 법어가 천하에 두루 분포하였음. 세칭 조주고불(趙州古佛). 소종(昭宗) 건녕(乾寧) 4년 시적했으니 나이는 120. 칙시(敕諡)는 진제대사(眞際大師)며 저서에 진제대사어록(眞際大師語錄) 3권이 있음 [전등록10. 송고승전11. 연등회요6. 오등회원4. 불조역대통재17].

天童覺; 정각(正覺; 1091-1157)이니 송대 조동종승. 속성(俗姓)은 이()며 자는 굉지(宏智)며 습주(隰州; 지금의 산서 습현) 사람. 어려서 유업(儒業)을 익혀 5()을 통달했음. 11세에 출가했고 14세에 자운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18세에 나가서 다니며 참방(參訪)하면서 거장(巨匠)을 두루 접촉했음. 어느 날 중이 법화경을 독송함을 들었는데 부모가 낳아 준 바의 눈으로 삼천계(三千界; 三千大千世界)를 다 본다 함에 이르러 휑하게 깨침이 있었음. 23세 때 단하자순(丹霞子淳; 洞山下八世. 芙蓉道楷法嗣)의 도예(道譽)를 듣고 드디어 가서 참례(參禮)하고 물어서 언하에 대오했으며 그의 법을 이었음. 선화(宣和) 2(1120) 단하가 대홍사(大洪寺)로 옮겨 주지(住持)하자 또한 따라가서 전기(箋記; 문서의 기록)를 장리(掌理; 관장해 管理)했으며 다음해에 수좌로 올랐음. 또 원통사 조천제(照闡提)의 석하(席下)에서 분좌(分座; 分座說法)에 임명되었고 또 장로사(長蘆寺) 진헐(眞歇; 眞歇淸了丹霞子淳法嗣)의 청에 응해 주사(住寺)하며 개법(開法)했음. 당시에 1,700의 대중이 있었는데 그의 병불(秉拂)의 제창(提唱)을 보고는 다 탄복(嘆服)했음. 6년 후에 옮겨 보조사(普照寺)에 이르러 홍법(弘法)했으며 건염(建炎) 원년(1127) 서주(舒州; 지금의 안휘 潛山)의 태평사(太平寺)로 이주했으며. 또 강주(江州; 지금의 강서 九江) 원통 능인사로 이전(移轉)했음. 건염 3(1129) 절강 사명(四明) 천동산의 천동사(天童寺)에 주지했는데 선후로 30년 가까이 되었음. 청규를 엄식(嚴飾)하고 종풍을 거양(擧揚)하고 좌선을 제창(提倡)하고 묵조선풍(默照禪風)을 홍양(弘揚)했음. 세칭 정각(正覺)을 천동화상(天童和尙)이라 했으며 천동의 중흥의 조사로 기렸음. 죽어서의 시호는 굉지선사(宏智禪師). 저서에 천동백칙송고(天童百則頌古)ㆍ굉지광록 9권ㆍ굉지각선사어록 4권이 있음 [불조역대통재30. 속전등록17. 오등회원14].

出隊; 또 출향(出鄕)으로 지음. 주지가 대중의 무리()에서 떠나 먼 지방의 유연(有緣)의 땅을 향해 출발하여 재량(財糧)을 권모(勸募)함을 가리킴. 또한 곧 탁발(托鉢). 주지가 출대(出隊)하여 귀사(歸寺)한 후의 상당설법(上堂說法)이나 혹은 출대할 즈음에 행하는 바의 상당설법을 다 일컬어 출대상당이라 함 [상기전잡행류].

連榻; 병탑(並榻)이니 다분히 관계가 밀절(密切)함을 형용.

主事; 사무를 주행(主行; 주관하여 행함)하는 자를 가리킴. 선원 직사(職事)의 별칭이니 선원청규에 처음은 감사ㆍ유나ㆍ전좌ㆍ직세 등 4()을 주사로 삼았고 이후의 청규엔 도사(都寺)와 부사(副寺)를 더해 일컬어 6지사라 했음 [선원청규10. 석씨요람하].

秉拂; 한 사원의 수좌가 주지를 대신해 불자를 잡고 법좌에 올라 대중에게 개시(開示)하는 것임. 무릇 전당수좌ㆍ후당수좌ㆍ동장주(東藏主)ㆍ서장주ㆍ서기를 일컬어 병불의 5두수(頭首)라 함. 각기 병불의 자격이 있는 자가 됨. 병불하는 자의 시자를 일컬어 병불시자라 함 [백장청규7. 상기전직위류].

服膺; 명기(銘記)하여 마음에 둠이니 충심(衷心; 속에서 眞情으로 우러나는 마음)으로 신봉함. 선관책진주(禪關策進註). 중용에 가로되 공자가 가로되 안회(顔回)의 사람됨은 중용을 택해서 1()을 얻으면 곧 권권(眷眷)하며 복응(服膺)하고 잃지 않는다. () ()은 착()과 같다. ()은 흉()이다. 봉지(奉持)하여 심흉(心胸)의 사이에 붙임이니 능히 지킴을 말함이다. 이아(爾雅) 친히 흉사(胸思)함이다. 또 복()이란 것은 생각을 둠을 일컬음이다.

入滅; 입멸도(滅度)ㆍ입적멸의 약칭. 또 이르되 입열반ㆍ취멸도ㆍ시적 등이니 이 말은 다만 불타의 입멸만 가리킴이 아니라 고승이나 성자의 죽음도 또한 칭호가 입멸임.

兩班; 또 가로되 양서(兩序). 조정의 제도에 문무 양반이 있으며 선림에서 이를 모방해 주지의 아래 동서 양반을 두었음. 학덕(學德)이 나은 자는 서서(西序)로 귀납(歸納)했으니 이를 일러 두수(頭首)라 함. 세법(世法)에 통달한 자는 동서(東序)로 귀납했으니 이를 일러 지사(知事)라 함. 동서는 도사(都寺)ㆍ감사(監寺)ㆍ부사(副寺)ㆍ유나(維那)ㆍ전좌(典座)ㆍ직세(直歲)로써 차제(次第)를 삼고 서서는 수좌(首座)ㆍ서기(書記)ㆍ지장(知藏)ㆍ지객(知客)ㆍ지욕(知浴)ㆍ지전(知殿)으로써 차제를 삼음. 종파를 말미암아 조금 같지 않음이 있음. 칙수청규에 양반도(兩班圖)가 있음 [백장청규4양서장. 상기전직위류. 총림교정청규총요].

成服; 구속(舊俗)의 상례(喪禮) 중 사자의 친속(親屬)이 상복(喪服)을 입는 것을 성복(成服)이라 불러 지음.

臺山婆子; 연등회요6 조주. 대산(오대산) 아래 파자(婆子; 노파)가 있었다. 무릇 어떤 중이 묻되 대산로는 어느 곳으로 향해 가야 합니까 하면 곧 이르되 바로 곧장 가십시오. 중이 겨우 가려 하면 노파가 이르되 좋은 스님이 또 이렇게 가시는구나. 번번이 이와 같았다. 중이 스님에게 들어 보이자 스님이 이르되 내가 너에게 감과(勘過)하여 줌을 기다려라. 명일 곧 가서 또 이와 같이 물었고 노파도 또한 이와 같이 답했다. 스님이 돌아와 대중에게 이르되 파자를 내가 너희를 위해 감파해 마쳤다.

燈心皁角; 등심(燈心; 등의 심지)과 조각(皂角) 종류의 영쇄(零碎; 자질구레하다)한 일용품을 파는 작은 점포. 선가의 사장(師匠)이 능히 학인의 같지 아니한 기질에 근거하여 같지 아니한 접인(接引)의 조시(措施; 措置)를 채취함임. 조각(; 皂角과 같음)은 조협수(莢樹)의 과실이니 가히 오구(汚垢)를 제거함. 곧 세척용품.

顯謨; 현모각(顯謨閣)이니 송대에 건립한 것이며 또 현모각 학사를 가리킴.

抖擻; 범어 두타(頭陀; dhuta)ㆍ두다(杜多)를 번역해 가로되 두수(抖擻)ㆍ두간(抖揀)ㆍ도태(洮汰)ㆍ완세(浣洗) 등이니 이르자면 의복ㆍ음식ㆍ주처 3종의 탐착을 두수(抖擻; 떨어버림)하는 행법임.

借問; 경사(敬辭)니 다른 사람을 향해 사정을 순문(詢問)함에 사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