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역주 조정사원

석자역주(釋字譯註) 조정사원(祖庭事苑) 卷第三 雪竇祖英上 8 배상국(裴相國)

태화당 2019. 9. 5. 08:44

裴相國

唐裴休 字公美 河內濟源人 志操堅正 童齓時 兄弟 同學於濟源別墅 休經年不出門 晝講經籍 夜課詩賦 虞人有以鹿贄兄儔者 儔與弟俅炰之 召休食 休曰 我等窮生 菜食不充 今日食肉 翌日何繼 無宣改饌 獨不食 長慶中登第 又應賢良方 正升甲科 歷官在相位五年 咸通初 遷吏部尙書太子少師 卒 休性寬慧 爲官不尙激察 而民吏畏服 善爲文 長於書翰 自成筆法 家世奉佛 休尤深於釋典 太原鳳翔近名山 多僧寺 視事之隙 遊踐山林 與義海僧講求佛理 中年後 不食葷血 常齋戒 屛嗜欲 香爐貝典不離齋中 詠歌贊唄以爲法樂 時人重其高潔 而鄙其太過 多以辭語嘲之 休不以爲忤 鎭洪州日 慕高安黃蘗山希運禪師之道 乃迎入府中 居開元寺演法 休一日述所解一編呈師 師接置於座 略不披閱 良久云 會麽 休云 測 師云 若便與麽會得 猶較些子 若也形於紙墨 何有吾宗 休乃贈詩一章云 自從大士傳心印 額有圓珠七尺身 挂錫十年棲蜀水 浮杯今日度漳濵 一千龍象隨高步 萬里香花結勝因 擬欲事師爲弟子 不知將法付何人은 마땅히 로 지어야 함. 蜀水 在今筠州米山縣北三里 桉晉書地理志云 蜀水源出縣內小界山 東流五百九十里 入南昌縣漳水合 耆老傳云 仙人許遜爲旌陽縣令 有奇術 晉末 人皆疾癘 多往蜀詣遜請救 與水投之上流 疾者飮之 無不愈也 邑人敬其神異 故以蜀水爲名 元豊間 高麗僧統義天 以華嚴大敎 慕學於錢塘淨源法師 躬朝 上國 當世宗匠悉皆參禮 至如大覺圓照諸禪師 皆有問答摹印別行 然泥在文字之學 知解之外 詰無所得 嘗問佛印元禪師曰 裴休愛黃蘗 重圭峰 優劣如何 元曰 在黃蘗爲優 天曰 何以知之 元曰 嘗讀裴休所作圭峯塔銘序云 休與師 於法爲昆仲 於義爲朋友 又嘗覧傳燈錄 裴公贈黃蘗詩云 擬欲事師爲弟子 不知將法付何人 其愛重優劣可知矣 人皆以爲名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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裴休(791-870)公美河內 濟源 사람이며 志操堅正했다. 童齓(은 이를 갈 친. 곧 어린 나이) 때 형제가 濟源別墅(는 농막 서)에서 同學했다. 는 해를 지내도록 出門하지 않고 낮에는 經籍을 익히고(은 익힐 강) 밤에는 詩賦를 공부(工夫 )했다. (땅 이름 우) 사람이 사슴을 형인 에게 주는 자가 있었다(는 물건을 가지고 상견할 지). 가 동생과 더불어 恭順(恭順할 구)히 그것을 구워(는 구울 포) 를 불러 먹자 했다. 휴가 가로되 우리들은 궁핍한 生計라 채식도 충족치 못하거늘 오늘 고기를 먹으면 다음날 어찌 계속하리오. 반찬을 바꾼다 함을 보이지 말아라 하고 홀로 먹지 않았다. 長慶中821-824 登第(登科科擧及第)했고 또 賢良方에 응시해 바로 甲科에 올랐다. 관직을 거쳐 宰相位에 있은 지 五年이었으며 咸通初860吏部尙書太子少師遷移했다가 했다. 휴는 성품이 寬慧했고 관리가 되어서는 激烈監察을 숭상하지 않았으므로 民吏畏服했다. 글을 잘 지었으며 書翰(은 붓 한. 글 한)에도 뛰어나 스스로 필법을 이루었다. 家世(전부터 代代로 내려오는 生業. 또는 門閥)奉佛했고 휴가 더욱 釋典에 깊었다. 太原鳳翔 근처 名山僧寺가 많았고 視事의 틈에 山林遊踐하며 義海과 더불어 佛理講求했다. 중년 후엔 葷血(은 매운 채소 훈)을 먹지 않고 늘 齋戒하며 嗜欲(는 즐길 기. 좋아할 기)을 물리쳤다. 香爐貝典齋中(는 집 재)에서 떠나지 않았고 詠歌贊唄法樂을 삼았다. 時人이 그 高潔을 존중하고 그 너무 지나침을 鄙陋하게 여겨 많이들 辭語로써 그를 嘲弄했지만 휴는 거스름으로 삼지 않았다. 洪州鎭撫하던 날에 高安의 황벽산 希運禪師의 도를 흠모해 이에 府中에 영입해 開元寺에 거처하면서 演法케 했다. 휴가 어느 날 해석한 바인 一編을 지어 스님에게 드렸다. 스님이 접수해 자리에 놓고는 조금도 열어보지 않았다. 良久하고 이르되 알겠는가. 휴가 이르되 헤아리지 못합니다. 스님이 이르되 만약 바로 이러히 會得하면 오히려 조금은 상당하지만(較些子) 만약에 紙墨形象한다면 어찌 나의 이 있으랴. 휴가 이에 詩 一章贈呈했으니 이르되 大士(百丈)에게서 心印傳受함으로부터/ 이마엔 圓珠가 있고(額間隆起한 게 肉珠와 같았음) 七尺의 몸이로다/ 석장을 걸어 놓고 十年蜀水에 살다가/ 잔을 띄워 오늘은 (은 물 이름 장. 빈은 물가 빈)을 건넜네./ 一千龍象(龍象大衆)高步를 따르고/ 萬里香花勝因을 맺도다/ 事師해 제자가 되고자 하오니/ 알지 못하여라 법을 가져 어떤 사람에게 부촉하시려나. 蜀水는 지금의 筠州 米山縣 북쪽 三里에 있음. 안험하니 晉書(百三十卷. 唐太宗 房玄齡 李延壽 등이 을 받아 지음. 西晉 四代 五十四年 東晉 十一代 百二十年 사이의 正史體歷史) 地理志에 이르되 蜀水水源縣內小界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五百九十里를 흘러 南昌縣 漳水에 들어가 합한다. 耆老(는 늙은이 기)가 전해 이르기를 仙人 許遜陽縣令이 되었는데 奇術이 있었다. 晉末에 사람들이 다 疾癘(染病 . 流行病. 疾疫)에 걸리자 많이들 으로 가서 에게 나아가 救濟를 요청했다. 물을 주어 上流에 그것을 던지게 했고 병든 자가 그것을 마시면 낫지 않음이 없었다. 邑人이 그 神異를 존경했으므로 고로 蜀水로써 이름했다. 元豊間1078-1085高麗僧統 義天(1055-1101)華嚴大敎錢塘淨源法師(1011-1088)에게 慕學했다. 몸소 上國朝見했는데 당세의 宗匠이 모두 다 참례했으며 내지 예컨대() 大覺(1009-1090. 懷璉이니 泐潭懷澄法嗣. 雲門下四世)圓照(1039-1099. 宗本이니 天衣義懷法嗣. 雲門下五世) 여러 선사가 다 문답이 있으며 摹印(는 베낄 모. 본뜰 모)別行한다. 그러나 문자의 에 막혀() 있어 知解의 밖에서 詰問하면 얻은 바가 없다(義天하는 말). 일찍이 佛印了元禪師(開先善暹法嗣. 雲門下四世)에게 물어 가로되 배휴가 황벽을 愛好하고 규봉을 존중했는데 優劣이 어떠한가. 이 가로되 황벽에 있어선 가 된다. (義天)이 가로되 무엇으로써 그것을 아는가. 이 가로되 일찍이 배휴가 지은 바 圭峯塔銘序를 읽었는데 이르기를 와 스님은 昆仲(은 맏 곤)이 되고 朋友가 된다 했으며 또 일찍이 전등록(卷第九)을 열람하니 裴公이 황벽에게 준 시에 이르기를 事師弟子가 되고자 하오니 알지 못하여라 법을 가져 어떤 사람에게 부촉하시려나 했으니 그 愛重의 우열을 가히 알것이다. 사람들이 名對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