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역주 조정사원

석자역주(釋字譯註) 조정사원(祖庭事苑) 卷第三 雪竇祖英上 9 식방진(式芳塵)

태화당 2019. 9. 5. 08:46

式芳塵

式 法也 芳塵 猶淸塵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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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받을 법). 芳塵淸塵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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斷際希運의 시호. -848. 849. 850.

筠州黃蘗希運禪師也 生閩方 幼從本州黃蘗山出家 後嗣百丈之道 裴相國事以師禮 以師酷愛舊山 常名師爲黃蘗 唐大中年 終於本山 敕諡斷際禪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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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주 황벽희운선사니 지방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에 本州의 황벽산을 좇아 출가했으며 뒤에 百丈의 도를 이었다. 裴相國이 스승의 예의로 모셨는데 스님이 舊山酷愛(은 심할 혹)했으므로 늘 스님을 이름해 황벽이라 했다. 唐 大中年本山에서 마쳤고 斷際禪師라고 敕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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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相國

唐李翱 字習之 幼勤於儒 博學好古 爲文尙氣質 元十四年 登進士第 授校書郞 三遷至京兆府司錄參軍 元和初 轉國子博士史館修撰 尋權知職方員外郞 十五年六月 授考功員外郞 竝兼史職 七月初 出爲朗州刺史 大和初 入朝爲諫議大夫 尋以本官知制誥 三月二日拜中書舍人 以繆擧栢耆 坐是左授少府少監 俄出爲鄭州刺史 五年 出爲桂州刺史 御史中丞 充桂管防禦使 七年 改授潭州刺史 湖南觀察使 八年 徵爲刑部侍郞 九年 轉戶部侍郞 七月 檢校戶部尙書 襄州刺史 充山南東道節度使 會昌中卒 諡曰文 翱不嘗執國政 或謂相國者 誤矣 爲朗州刺史時 聞藥山惟儼禪師玄化 屢請不起 乃躬入山謁之 會師看經 殊不顧揖 侍者云 太守在此 翱性褊急 乃曰 見面不如聞名 師呼太守 翱應? 師曰 何得貴耳賤目 翱拱手謝之曰 如何是道 師以手指上下曰 會麽 翱曰 不會 師曰 雲在靑天水在缾 翱乃忻愜作禮 述偈云 鍊得身形似鶴形 千株松下兩函經 我來問道無餘事 雲在靑霄水在缾 翱與韓愈 柳宗元 劉禹錫 爲文會之交 自相述古言 法六籍爲文 黜浮華 尙理致 言爲文者 韓 柳 劉焉 韓愈常論 仲尼旣沒 諸子異端所 荀 孟復之 楊墨之流 洗然遺落 殆周隋之世 王道弗興 故文中子有作 應在乎諸子左右 唐興 房魏旣亡 失道尙華 至有武后之弊 安史之殘 吾約二三子 同致君復堯舜之道 不可放淸言而廢儒 縱梵書而猾夏 敢有邪心歸釋氏者 有渝此盟 無享人爵 無永天年 先聖神明是糺是殛 無何 翱邂逅於儼禪師 頓了本心 末由戶部尙書襄州刺史 充山南東道節度使 復遇紫玉禪翁 且增明道趣 著復性書上下二篇 大抵謂本性明白 爲六情玷汙 迷而不返 今牽復之 猶地雷之復見天心矣 卽內敎之返本還源也 其書露而且隱 蓋而又彰 其文則象繫中庸 隱而不隱 釋敎其理 則從眞捨妄 彰顯自心 弗事言陳 唯萌意許也 韓劉覧之 嘆曰 吾道萎遲 翱且逃矣 見宋僧傳宜當 貞으로 지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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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翱(藥山惟儼法嗣. 靑原下三世)習之이다. 어릴 적 儒學에 근면했고 박학하고 好古했으며 글을 지으면서 氣質을 숭상했다. 貞元十四年798 進士第登科校書郞除授(官位를 주는 일. 除拜)했고 세 번 옮겨 京兆府司錄參軍에 이르렀다. 元和初806國子博士史館修撰으로 轉勤했고 잠시 만에 職方員外郞權知(主宰. 主持의 뜻)했다. 十五年820 六月 考功員外郞除授했고 아울러 史職을 겸했다. 七月 초에 나가서 朗州刺史가 되었고 大和初827(大和는 또한 太和로도 지음)入朝하여 諫議大夫가 되었고 잠시 만에 本官으로써 制誥했다. 三月二日 中書舍人除拜했고 栢耆를 잘못(는 어그러질 무) 천거함으로써 이 때문에 左遷되어 少府少監을 제수했다가 갑자기 나가서 鄭州刺史가 되었다. 五年831 나가서 桂州刺史御史中丞이 되었다가 桂管防禦使充當되었다. 七年833 潭州刺史湖南觀察使改授했다. 八年834 불러 刑部侍郞을 삼았다. 九年835 戶部侍郞으로 轉勤했고 七月檢校戶部尙書襄州刺史가 되었다가 山南東道節度使로 충당되었다. 會昌中841-846하니 가 가로되 文이다. 翱는 일찍이 國政을 잡지 않았거늘 혹은 이르되 相國이라 함은 잘못이다. 朗州刺史로 되었을 때 藥山惟儼禪師(745-828. 石頭希遷法嗣. 靑原下二世)玄化(玄妙한 교화)를 듣고 여러 차례 초청했으나 일어나지 않는지라 이에 몸소 입산하여 그를 謁見했다. 스님의 看經함을 만났는데 특수히 顧揖하지 않았다. 시자가 이르되 태수가 여기에 있습니다. 의 성질이 褊急(은 급할 편. 좁을 편)한지라 곧 가로되 얼굴을 봄이 이름을 들음만 같지 못합니다. 스님이 태수를 부르자 고가 ?(응답)했다. 스님이 가로되 어찌하여 귀를 귀하게 여기고 눈을 천하게 여김을 얻는가. 고가 拱手(은 마주 잡을 공. 곧 두 손을 겹쳐 모아 행하는 절. 恭敬의 뜻을 나타냄)하며 사과하고 가로되 무엇이 이 도입니까. 스님이 손으로써 아래 위를 가리키며 가로되 알겠는가. 고가 가로되 알지 못합니다. 스님이 가로되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느니라. 고가 곧 忻愜(은 기쁠 흔. 할 협. 뜻에 맞을 협)하여 作禮하고 게를 지어 가로되 身形鍊得鶴形과 같고/ 천 그루의 솔 아래 兩函의 경이로다/ 내가 와서 도를 물으매 나머지 일이 없고/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 하더라. 고가 韓愈(768-824) 柳宗元(773-819) 劉禹錫(772-842)과 더불어 文會의 교류를 했다. 스스로 古言을 보고 진술하되 六籍(六經이니 詩 書 禮 易 樂 春秋合稱)을 본받아 글을 짓되 浮華를 물리치고 理致를 숭상해야 하나니 글을 하는 자를 말하자면 韓 柳 劉. 韓愈가 늘 하되 仲尼가 이미 하매 諸子異端의 곳을 荀子(전국시대의 학자인 荀況의 존칭. 性惡說을 주창함. 荀況이 지은 書名이니 三十二篇으로 구성됨)孟子가 그것을 회복했고 楊朱墨翟(전국시대 나라 사람. 兼愛說을 주창했으며 墨家始祖. 저서에 墨子가 있으며 六十三篇 十五卷)가 씻은 듯 遺落했다. 이에() 의 세상에선 王道가 흥하지 않는지라 고로 文中子(王通이니 門人들이 文中子. 저서에 文中子 十卷이 있음)함이 있어 응함이 諸子左右에 있다. 이 흥하고 房魏(房玄齡. 578-648. 시호는 文昭. 당태종의 貞觀를 도운 功臣. 杜如晦 褚遂良 등과 함께 晉書 百三十卷을 지었음. 魏徵. -643. 당태종 때의 정치가. 玄成이며 시호는 文貞)가 이미 하매 도를 잃고 화려함을 숭상했으며 내지 武后弊端安史(安祿山史思明이니 755-763에 이르기까지 약 九年 동안 당나라를 뒤흔든 을 일으켰음)殘在가 있다. 내가 二三子(는 남자의 통칭)結約해 함께 主君堯舜로 복귀함에 이르게 하리니 淸言을 놓치고 儒道하거나 梵書放縱케 해 中夏(中國)를 어지럽힘은 옳지 못하다. 감히 邪心이 있어 釋氏에게 귀의하는 자는 이 盟誓를 더럽힘이므로 사람의 爵位를 향유하지 못하며 天年(天命)을 길게 함이 없으리라. 先聖神明으로 이를 糾彈(와 같음. 들추어낼 규. 바로잡을 규. 彈劾할 탄)하고 이를 죽이리라. 얼마 안되어서 儼禪師邂逅本心頓了했다. 말년에 戶部尙書襄州刺史를 경유해 山南東道節度使에 충당되었다. 다시 紫玉禪翁(道通禪師馬祖法嗣)을 만나 또 道趣增明했다. 復性書 上下二篇을 지었는데 大抵 이르자면 본성이 명백하나 六情(喜怒哀樂愛惡)玷汙되어 해 돌아오지 못하므로 이제 牽引해 그것을 회복함이다. 마치 地雷가 다시 天心을 봄과 같나니 곧 內敎返本還源이다. 는 드러내면서도 또 숨기고 덮으면서도 또 밝힘이며 그 은 곧 中庸象繫하여 숨기면서도 숨김이 아니다. 釋敎는 그 이치가 곧 을 좇고 을 버려 自心彰顯하고 言陳(언설을 베풀음)을 일삼지 않고 오직 意許(뜻에 認許)에서 비롯한다. 가 그것을 보고 탄식하며 가로되 吾道萎遲(마르고 케케묵음)하여 가 또 도주했다. 宋僧傳(卷第十七)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