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자역주 조정사원

석자역주(釋字譯註) 조정사원(祖庭事苑) 卷第八 釋名讖辨 3 祖偈飜譯

태화당 2019. 9. 8. 10:18

祖偈飜譯

禹門太守楊衒之 名系記略云 東魏興和年中 高僧雲啓往西域求法 至龜茲 會天竺三藏那連耶舍 欲傳法至東夏 雲啓曰 東夏佛法未振 宜且留此 耶舍遂出祖師傳法偈梵文 與啓飜譯 旣而啓游印土 耶舍乃將新譯華言祖偈 至于西魏 値時多事 乃入高齊 齊文宣帝延居石窟寺 以齊方受東魏禪 未暇飜譯 耶舍乃將龜茲所譯祖偈 授于居士萬天懿 天懿聞魏有西域三藏吉迦夜 昭玄寺沙門曇曜所譯付法藏傳 缺於佛祖傳法偈 遂寫本進于魏 梁簡文帝聞魏有本 乃遣使劉玄運往魏 傳歸建康 唐貞元中 金陵沙門慧炬 同西竺勝持三藏 編入寶林傳 雲啓 一名曇啓 龜茲 或云屈隨 音丘茲 禪 音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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禹門太守 楊衒之名系記해 이르자면 東魏(534-550) 興和年中539-542 고승 雲啓가 서역에 가서 법을 했는데 에 이르러 천축삼장 那連耶舍를 만나 傳法코자 東夏(中國)에 이르려 하였으나 雲啓가 가로되 東夏의 불법이 振作(떨쳐 일어남)치 못하니 宜當 단지 여기에 머무시오. 耶舍가 드디어 祖師傳法偈梵文을 내놓아 와 함께 번역했다. 이미 그러고선 印土(印度)游行했고 耶舍新譯華言祖偈(새로 중국말로 번역한 조사의 게)를 가지고 西魏(535-556)에 이르렀으나 때의 多事를 만나 이에 高齊(550-576. 北齊東魏의 실력자 高歡의 아들 高洋東魏孝靜帝로부터 讓位 받아 건국한 王朝)에 들어갔다. 文宣帝(재위 550-559. 高洋)가 맞이해 石窟寺에 거주하게 했다. 가 막 東魏禪讓(은 자리 전할 선. 禪位)을 받은지라 번역할 여가가 없었다. 耶舍가 이에 龜茲에서 번역한 바 祖偈를 가지고 거사 萬天懿에게 주었다. 천의가 에 서역삼장 吉迦夜昭玄寺 사문 曇曜가 번역한 付法藏傳佛祖의 전법게가 缺損하다 함을 듣고 드디어 寫本進上했다. 簡文帝(第二代皇帝. 재위 549-551)이 있다 함을 듣고 이에 劉玄運을 사자로 보내어 에 가서 傳受建康(南京. 당시에 首都)에 돌아오게 했다. 唐 貞元中785-805 금릉 사문 慧炬가 서축 勝持三藏과 함께 寶林傳에 편입했다. 雲啓一名曇啓. 龜茲는 혹은 이르되 屈隨며 음이 구자임. 은 음이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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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祖師讖祖師.

諸祖讖偈 自雲啓飜譯 編於智炬寶林傳 編二十八首般若多羅十一 那連耶舍一十三 竺大力一 誌公一 達磨一 六祖一 雖錄于傳 而罕知其由 或聞仰山箋註頗詳 竟不獲見 晚於雲門曜禪師錄中 得曜所註十八首 般若多羅止有三首見註 今幷錄于後 禪師諱重曜 嗣天台韶國師 名振當時 爲錢氏禮重 其讖註手澤尙存 今閟于會稽雲門雍熙之影堂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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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祖讖偈雲啓가 번역함으로부터 智炬寶林傳에 편입됐는데 二十八首. 般若多羅十一이며 那連耶舍一十三이며 竺大力이며 誌公이며 達磨이며 六祖이다. 비록 에 기록됐으나 드물게 그 유래를 알았다. 혹은 仰山箋註가 자못 상세하다 함을 들었지만 마침내 얻어 보지 못했다. 늦게서야 雲門曜禪師錄 중에서 한 바 十八首를 얻었는데 반야다라는 단지 三首가 있어 가 보였다. 지금 아울러 뒤에 기록한다. 선사의 휘는 重曜天台德韶國師를 이었다. 이름이 당시에 떨쳐 錢氏(吳越)禮儀로 존중함이 되었다. 讖註手澤(손이 자주 닿았던 물건에 손때가 묻어서 생기는 윤기. 물건에 남아있는 옛사람의 흔적)이 오히려 존재하며 지금도 회계 운문산의 雍熙影堂에 숨겨져 있다.